하예정의 수줍은 모습은 전태윤의 마음을 더욱 뜨겁게 만들었다.그녀를 품에 안고 몇 번이고 타오르고 싶었지만 그는 끝내 참아냈다.몇 번 깊은숨을 내쉰 뒤 전태윤은 그녀를 놓아주며 부드럽게 말했다.“내가 뜨거운 물 받아줄게. 오늘은 푹 쉬자.”전태윤은 욕실로 들어가 욕조에 물을 받기 시작했다.하예정은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잠시 후 그는 욕실에서 나와 아내의 잠옷을 챙기며 물었다.“머리 감을래? 내가 감겨줄게.”배가 부른 하예정은 이제 몸을 굽히기도 쉽지 않아 스스로 머리를 감는 것이게 조금 불편했다.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어제 감았어요. 어릴 때 엄마가 매일 머리 감으면 나이 들어서 두통 생긴다고 하셨거든요. 그래서 전 항상 이틀에 한 번씩 감아요.”매일 머리를 감으면 정말 두통이 생기는지는 몰랐지만 예전 어른들은 대부분 그렇게 말했다.게다가 머리카락이 길었기에 굳이 자주 감고 싶지도 않았다.특히 겨울에는 더더욱 그랬다.“그럼 내일 점심쯤 내가 감겨줄게.”“그래요. 밤에는 추워서 굳이 안 감는 게 나아요.”전태윤은 그윽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당신이 날 목욕시켜 주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태윤 씨가 힘들어할까 봐...”하예정은 눈웃음을 지으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전태윤은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하예정은 웃으며 그의 손에서 잠옷을 받아 들었다.“됐어요. 혼자 씻을게요. 당신까지 추운 날씨에 고생할 필요 없잖아요.”관성의 겨울은 심하게 춥지 않았지만 밤이 되면 공기가 차가웠기에 이런 날씨에 찬물이라도 닿으면 감기에 걸리기 쉬웠다.하예정이 욕실로 들어가자 전태윤은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꺼냈다.화면에는 전창빈이 보낸 사과 메시지가 연달아 뜨고 있었다.그는 한참을 읽다가 짧은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됐어. 그만 사과해. 나 안 화났어. 하지만 다음에는 안 봐준다. 다시는 이런 일 없게 해.]전창빈은 곧장 답장을 보냈다.[형, 다시는 안 그럴게! 진짜야!]전창빈은 다시는 그런 실수를
전태윤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사람은 누구나 늙는 법이야. 우리가 아무리 관리를 잘해도 나이가 들면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하고 머리카락은 하얘지고 이도 다 빠질 테지.”하예정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받아쳤다.“당신이 이가 다 빠질 만큼 늙어도 난 여전히 당신을 사랑할 거예요. 내 눈에는 당신이 언제나 가장 멋진 남자니까요. 이렇게 멋진 남자가 바로 나, 하예정의 남편이라는 게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몰라요. 세상 모든 사랑을 나 하나에게만 주고 오직 나만 아껴야 해요. 아기가 태어나면 조금은 아기한테도 사랑을 나눠줘야 하겠지만 그래도 당신이 가장 사랑해야 할 사람은 여전히 나예요. 알았죠?”아이에게로 향할 남편의 애정을 떠올리자 하예정은 장난기 어린 투정으로 미리 선을 그었다.전태윤은 피식 웃으며 아내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넌 내 아내야. 난 오직 너 하나만 사랑하고 아낄 거야. 내 아들은 자기 아내에게 사랑받으면 돼. 내 사랑을 나눠줄 생각은 없어.”하지만 반년 뒤, 그는 아내뿐 아니라 아이까지 한껏 아끼는 ‘아내 바보, 자식 바보’로 변해 있을 것이다.전씨 할머니의 말대로 결국 스스로 자신의 뒤통수를 치는 꼴이 되어있을지도 모른다.“자, 이제 화 풀어요.”“당신이 이렇게 설득하는데 내가 더 화내면 안 되지. 그래, 알았어. 그보다 먼저 목욕할래? 내가 따뜻한 물 받아줄게. 푹 담그고 피로 좀 풀어.”하예정은 시계를 슬쩍 보더니 대답했다.“아직은 괜찮아요. 어차피 지금 휴가 중이고 내일도 출근 안 하잖아요. 조금 있다가 씻을게요. 우선 세뱃돈부터 챙겨야겠어요. 결혼 안 한 도련님들이 있으니 새해 인사할 때 세뱃돈 챙겨줘야죠. 형수로서 덕담도 함께 해주고.”그녀는 전씨 가문 장남의 아내로서 아직 미혼인 전유하, 전유림과 같은 어린 도련님들에게 세뱃돈을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금액이 많고 적음이 중요한 게 아니라 마음을 담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이제 하예정은 전씨 가문의 큰며느리로 되었다. 돈이 모자랄 리 없는 그녀였기에 이번에 내놓은
‘도대체 누가 이렇게 눈치 없이 우리 남편을 화나게 한 거지? 제정신이야? 새해를 맞기도 전에 이런 짓을 하다니.’“예정아, 넌 내가 널 사랑한다는 거 믿어?”전태윤은 곧장 답하지 않고 먼저 그녀의 믿음을 확인하려 했다.하예정은 웃음을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어떻게 안 믿겠어요? 당신 정체를 알게 된 후로 우리는 정말 진지하게 얘기했잖아요. 그때 이후로는 저는 한 번도 의심해 본 적 없어요. 나에 대한 당신의 마음, 난 백 퍼센트 믿고 있다니까요. 그때 단지 속였다는 게 너무 화났던 거예요. 감정이 의심스러워서가 아니라 당신이 솔직히 털어놓을 기회가 그렇게 많았는데 끝까지 숨겼잖아요. 게다가 집안 사람들까지 전부 동원해서 나를 속였으니 그때 안 화날 여자가 어디 있겠어요? 우리 결혼한 지도 꽤 됐고 내 뱃속에는 아기도 있어요. 몇 달 후면 태어날 아기 아빠가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한다면... 이건 분명 무슨 일 있는 거예요. 솔직히 말해봐요. 누가 헛소리한 거예요? 이름 좀 대봐요. 내가 당장 가서 호되게 혼내줄게요.”그녀의 눈빛은 단단했고 말투는 단호했다.‘지금이 어떤 때인데 감히 우리 남편을 자극해? 명절 앞두고 이런 말 던지다니 진짜 멍청한 놈이야.’그녀는 마음속으로 이를 갈았다.전태윤은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천천히 손을 풀었다.“벌써 혼냈어.”하예정은 몸을 돌려 옆으로 앉아 남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말했다.“진짜 그런 사람이 있었어요? 대체 누구예요?”하예정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평화로운 나날을 보내온 터라 감히 그들의 관계를 건드릴 만한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전창빈.”“설마... 당신 친동생 그 전창빈?”“그래. 바로 그놈.”전태윤의 표정이 다시 굳었다.그는 조금 전 전화로 벌어진 일을 차분히 알려주었다.이야기를 다 들은 하예정은 오히려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하하, 역시 도련님답네요. 이 질투의 화살을 형한테 쏠 줄이야. 세상에! 자기 형을 상대로 질투라니.”“너
전태윤의 눈과 마음에는 언제나 아내, 하예정만이 자리하고 있었다.그에게 있어 하예정을 제외한 모든 여자는 여자가 아니었다.전태윤은 전창빈을 호되게 혼냈지만 그게 진심으로 화가 나서라기보다 동생의 철없는 말에 욱한 것이었다.친혈육이라고는 전창빈 하나뿐이다.전태윤은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앞으로 전창빈이 연애나 감정 문제를 꺼내더라도 절대 조언하지 않겠다고.다시 말해 이제부터는 그저 조용히 듣기만 할 생각이다.이번 일로 그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됐어. 너도 이제 스물일곱 살이잖아. 다 큰 어른이 자기 감정은 알아서 처리해야지. 앞으로 너 연애 문제를 나한테 말하지 마. 내가 뭐 사랑 상담사냐? 너희 형제 중 누가 연애 문제만 생기면 다 나한테 들고 와. 내가 무슨 사랑 박사야?”그는 짙은 한숨을 내쉬며 덧붙였다.“내가 예정이랑 맺은 인연은 너희가 흉내 낼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러니까 다시는 그런 얘기 꺼내지 마.”전창빈은 전화기 건너편에서 웃기만 했다. 형의 화가 아직 다 가시지 않았음이 분명했다.그는 얼른 화제를 돌려 하예정과 곧 태어날 아이 이야기를 꺼냈다.그제야 전태윤의 말투가 조금씩 부드러워졌다.한참을 그렇게 대화를 나눈 뒤에야 두 사람은 전화를 끊었다.전창빈은 휴대폰을 내려놓으며 깊은숨을 내쉬었다.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훔치며 그는 홀로 중얼거렸다.멀리 떨어져 있는 형과 단지 전화 통화 한 번 했을 뿐인데 그 한마디 잘못된 말 때문에 식은땀이 날 정도로 긴장했으니 역시 형의 카리스마는 대단했다.그는 입술을 꾹 다물다가 스스로 입을 몇 번 가볍게 쳤다.“이 입 때문에... 그 말만 안 했어도 형이 나한테 연애 상담을 더 해줬을 텐데.”전태윤 역시 여전히 마음이 완전히 진정되지 않았다.그는 동생의 한심한 말이 떠오를 때마다 속이 뒤틀렸다.“그 녀석이 내 앞에 있었으면 발로 한 대 찼을 텐데.”그의 중얼거림이 방 안에 가라앉을 무렵 방문이 조용히 열렸다.하예정이 들어왔다.아래층에서 가족들과 함께 얘기를 나
전창빈은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문을 닫고 잠금장치를 걸었다.누구의 시선도 차단된 공간에서 그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형, 나... 들켰어.”“뭐가? 무슨 일을 한 거야?”“민아 씨가 내가 관성 전씨 가문의 여섯째 아들이란 걸 알게 됐어. 민아 씨의 오래된 친구가 남편 출장을 따라 관성에 다녀왔는데 그곳에서 보름쯤 머물며 전씨 그룹 이야기를 들었대. 내 성이 전씨라는 걸 듣자 바로 물어보더라고. 그래서 인정했어. 내가 전씨 가문의 여섯째 아들이라고. 왜 숨겼냐고 묻기에 굳이 족보를 들춰볼 일도 없는 거 아니냐고 대답했어. 게다가 나를 이미 두 번이나 조사했었으니까.”전태윤이 말을 이었다.“그건 숨긴 게 아니야. 네가 일부러 감춘 것도 아니잖아. 처음 만난 사람마다 ‘나 전씨 가문의 아들이오’라고 떠들며 다닐 필요 없으니까. 그건 속임수가 아니야. 넌 네 실력으로 선우씨 가문에 들어갔잖아. 뒤를 봐주는 사람 없이 오로지 네 실력으로 들어간 거야. 그러니 네가 누구인지 들켰다 한들 무슨 문제겠어. 민아 씨는 자신을 위해서라도 널 내쫓지는 못할 거야. 게다가 새로운 요리사를 구하려면 시간도 걸리지. 그리고 민아 씨가 아직 네 요리에 질린 것도 아니잖아.”선우민아에게 전창빈은 그저 요리사일 뿐이다. 그가 전씨 가문의 아들이라 한들 이곳은 관성이 아니기에 그 사실이 그녀에게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전태윤은 덧붙였다.“민아 씨가 널 조사했을 때 내가 나서서 네 신분을 가려줬어. 혹시 너에게 화를 내면 형이 대신 숨겨줬다고 해.”“그렇게 말했어. 믿더라고.”“그럼 뭘 걱정해? 네가 진짜로 걱정하는 건 뭐야? 네 정체를 알고 나서 민아 씨가 네 음식을 안 먹겠다거나 너를 내쫓을까 봐?”전창빈은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대답했다.“조금... 그런 걱정이 있어.”“민아 씨는 선우씨 가문의 대표야. 나도 우리 가문의 대표잖아. 같은 입장에서 보면 오히려 널 더 높이 평가할걸. 자신의 한계를 넓히려 신분을 내려놓고 오직 요리를 위해 먼 타지까지
“언니, 내가 보기엔 창빈 씨가 오히려 언니한테 특별한 감정을 가진 것 같아요. 언니를 바라보는 눈빛도, 언니 앞에서 웃을 때 그 표정도 다르잖아요. 언니처럼 눈치 빠른 사람이 그걸 못 느꼈을 리 없다고 생각해요. 언니, 혹시 생각해 본 적 없어요? 혹시 창빈 씨의 할머니께서 정해 주신 여자가 언니일지도 모른다는 거요?”선우민아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나는 그분 얼굴조차 몰라. 한 번도 뵌 적 없는데 그분이 나를 약혼녀로 정하실 리가 없잖아. 게다가 창빈 씨가 직접 말했어. 곧 사직하고 그분에게 구애하기 시작할 거라고. 됐어. 네가 안 힘들다니 그걸로 됐어. 이제부터는 그 사람과는 딱 일 관계로만 지내. 밥만 맛있게 먹고 다른 생각은 하지 마.”선우정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이미 전창빈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다고 수없이 말했건만 선우민아는 여전히 믿지 않았다.생각해 보면 선우민아를 탓할 수도 없었다. 선우정아가 전창빈을 향해 보여준 호감의 눈빛과 태도는 누가 봐도 단순한 존경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웠을 테니 말이다.그래도 이 틈을 타서 선우민아에게 이렇게 단호하게 말해주어서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선우정아는 여겼다. 이참에 언니를 안심시키고 자신이 정말로 마음을 접었다는 걸 보여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명절이 지나면 선우민아네 집에도 당분간 들르지 않을 작정이었다.멀리 떨어져 지내다 보면 선우민아도 동생이 전창빈에게 아무 마음이 없다는 걸 알게 될 터였다.지금 바로 거리를 두지 않은 건 명절 연휴 동안에는 그저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편하게 쉬고 싶었기 때문이다.굳이 스스로를 괴롭히며 입맛을 버릴 이유는 없었다.그냥 모른 척, 아무런 일도 없는 척 편하게 와서 밥만 얻어먹고 싶었다.다만 앞으로는 언니 앞에서 전창빈을 칭찬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괜히 또 오해를 살 필요가 없지 않은가.“알았어요. 언니 말대로 할게요. 앞으로 창빈 씨하고는 거리 두고 지낼게요.”“그래. 그게 좋겠어.”“그럼 이만 나가볼게요.”“응.”선우민아는 동생과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