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예정은 친언니가 주형인과 만나 서로 사랑해서 결혼했다가 이혼하는 모습까지 모조리 지켜봤다. 그들은 하마터면 못 볼 꼴까지 볼 뻔했다. 이에 하예정은 이 세상 아무에게도 기대지 말고 오직 본인 스스로 버텨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한 이불을 덮고 자는 사이라 해도 온전히 의지할 순 없었다.오늘은 나와 한 이불을 덮고 자도 언제 딴 사람에게 달려갈지 모를 게 배우자이니까.“지금 내가 속이 좁다는 거야?”전태윤의 중저음의 목소리가 한없이 싸늘하게 들려왔다. 마치 이 한겨울 추위처럼 서늘했다.그는 하예정을 몹시 신경 쓰기에 그녀의 모든 걸 알고 싶었다.그녀가 먼저 알려주지 않고서는 인제 와서 그가 속 좁고 사소한 일에 화낸다고 몰아붙이다니.‘이게 사소한 일이야? 노동명처럼 덜렁대는 성격도 다 아는데 내가 걔한테 전해 들어야겠어? 노동명이 말해주지 않고 나도 더 묻지 않으면 예정이는 아마 평생 말하지 않겠지.’하예정은 그의 관심에 감동하지 않을뿐더러 도리어 말해봤자 그가 집에 없으니 아무 소용 없다고 했다.“내 뜻은 태윤 씨가 너무 쉽게 화낸다고요. 항상 자기중심적이고 다른 사람이 조금만 마음에 내키지 않게 행동하면 바로 화내잖아요.”전태윤은 장점이 아주 많지만 단점도 존재했다.완벽한 사람은 없으니 하예정도 그에게 완벽을 요구하진 않았다. 그녀 또한 결점투성이니까. 다들 흔하디흔한 보통 사람이다.하예정이 그의 단점을 말했으니 그가 고칠 수 있으면 고치고 만약 못 고치겠다면 번마다 마찰을 빚으며 서로 맞춰가야 한다. 결국엔 그녀가 참는 법을 배우거나 아예 이 점을 무시하고 신경 쓰지 말아야 한다.전태윤이 전화를 끊었다.이에 하예정은 어이가 없었다.“내 전화를 끊어? 더 화났다는 거야?”그녀도 분노가 차올라 휴대폰을 침대에 내던지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내가 이렇게까지 명확하게 얘기했는데 아직도 화를 내? 마음대로 하라고 하지 뭐. 내가 굳이 달래줘야 하나?!”그는 결국 하예정이 모든 일을 그에게 말해주길 바라는 걸까?그녀가 혼잣말로 구시
몇 분 후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더니 잠깐 고민하다가 바닥에 내려와 제 물건을 정리하고 방으로 돌아갔다.‘태윤 씨 방에서 안 잘래.’하예정은 홧김에 제 방으로 돌아가서 잤다.그 시각 전태윤도 씩씩거리며 화를 내고 있었다.하예정의 문자를 읽었지만 답장을 보내지 않고 바로 삭제해 버렸다.그의 머릿속엔 단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하예정이 그를 속 좁은 남자라고 말하며 가족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전태윤은 휴대폰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 안을 빙글빙글 돌아다녔다. 그는 짜증 난 마음을 달래다가 결국 커피 한 잔 내렸다.커피를 마시며 애써 마음을 가라앉힌 후 겨우 일에 몰입하기 시작했다.전태윤은 밤을 새울 작정이었다.하예정은 처음에 뒤척이며 잠들지 못하다가 한 시간이 지나니 슬슬 화가 가라앉았다.‘처음 있는 일도 아닌데 내가 번마다 태윤 씨 때문에 이렇게 화를 내면 제 명에 못 살아. 전혀 그럴 가치가 없다고.’그녀는 곧바로 마음을 다잡고 잠을 청했다.‘화낼 테면 내라지 뭐! 누가 신경 쓴대! 속 좁긴, 매사에 자기중심적이야. 자기도 사사건건 나한테 얘기하지 못하면서 왜 난 모든 걸 보고해야 하는 건데? 아니, 집에도 없으면서 내가 말한다고 바로 날아와?’그 일은 사실 하예정도 나설 필요가 없었다. 이경혜의 자기소개로 이미 주씨 집안 두 모녀가 지릴 정도로 식겁했고 마지막 결정을 내린 건 언니 하예진이었다.하예진은 우빈이를 생각하며 합의를 보기로 했다.이는 언니의 결정이고 하예정은 언니의 모든 결정을 존중한다.그런데 정작 전태윤은 노동명이 다 아는 사실을 본인이 모른다면서 꼬투리를 잡았다.노동명은 하예진의 회사 대표이고 또 마침 회사 문 앞에서 그런 일이 발생했으니 당연히 알게 될 터! 하예정이 일부러 노동명에게 알려준 것도 아니다.그녀는 왠지 전태윤이 아무나 다짜고짜 질투하는 느낌이 들었다.그날 밤 하예정은 매우 늦게 잠들었다. 출장 간 전태윤은 커피 두 잔을 마시고 나서야 날이 밝을 때까지 업무에 몰입했다.
“급할 거 없어요, 예정 씨. 아침 천천히 드세요. 언니분한테 방금 전화가 왔는데 우빈이를 가게에 보냈다고 해요. 효진 씨가 가게에 있으니 우린 이따가 바로 가게로 가면 돼요. 언니분 집으로 헛걸음을 할 필요가 없어요.”하예정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식탁 앞에 앉았다.숙희 아주머니는 오늘 그녀에게 갖가지 소로 된 만두를 빚어주었고 흰 쌀죽과 깍두기 밑반찬도 있었다.깍두기라...하예정은 휴대폰을 꺼내 작은 접시에 담긴 깍두기를 사진 찍어 속 좁은 태윤 씨에게 보내주었다.물론 태윤 씨는 그녀에게 답장하지 않았다.하예정은 혼잣말로 구시렁댔다.“예정 씨, 만두가 맛없어요?”숙희 아주머니는 구시렁대는 하예정을 보더니 자신이 빚은 만두가 맛없는 줄 알고 조심스럽게 물었다.“예정 씨는 어떤 만두소를 좋아하세요? 말만 하면 내일 바로 빚어드릴게요.”“아주머니, 저 음식 안 가려요. 무슨 소든 다 잘 먹어요. 아주머니도 이리 와서 앉아요. 우리 함께 얘기 나누며 먹어요.”전태윤이 집에 없으니 숙희 아주머니도 훨씬 편해졌다.물론 하예정 앞에서 전태윤도 조금은 자상해지지만 그가 여태껏 쌓아온 카리스마에 아주머니는 함께 식탁에 마주 앉아 음식을 먹는 게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아주머니는 태윤 씨 아홉째 동생을 몇 년 동안 돌보면서 태윤 씨랑도 알고 지낸 지 오래되셨죠? 태윤 씨가 너무 일방적이고 자기중심적이란 생각은 안 드세요? 상대가 저에게 일말의 숨김도 없어야 한다고 요구하고 말이에요!”숙희 아주머니는 죽을 두어 모금 마시다가 그녀의 말을 듣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주머니는 관심 조로 하예정에게 물었다.“예정 씨, 갑자기 왜 그런 질문을 하세요?”하예정은 깍두기를 집으며 말을 이어갔다.“어젯밤에 태윤 씨랑 싸운 것 같아요. 지금은 아마 또 냉전기에 들어선 것 같고요.”숙희 아주머니는 아무 말이 없었다.‘하룻밤 사이에 도련님과 사모님이 또 싸우시다니, 게다가 지금은 냉전 중이고...’“예정 씨, 어쩌다가 태윤 씨랑 싸우게 된 거예요?”요즘
“태윤 씨야말로 날 온전히 한 가족으로 대하지 않는다고요. 본인도 못 하면서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요구한대요? 태윤 씨는 전형적인 내로남불 스타일이에요. 무릇 본인 중심으로 돌아가야 하고 조금만 어긋나면 내가 저를 한 가족으로 여기지 않았다고 화를 내잖아요! 그땐 나도 홧김에 태윤 씨한테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고 속 좁은 남자라고 했어요. 그리고 태윤 씨가 바로 전화를 꺼버렸죠. 내가 다시 문자를 보내도 아무 답장이 없어요. 늘 이런 식이에요. 화나면 답장도 안 하고 전화도 안 받고 어린 여자애들처럼 왜 그런대요.”숙희 아주머니는 말을 잇지 못했다.‘사모님의 분석이 아주 정확해요. 도련님은 바로 그런 사람이에요.’전태윤은 어려서부터 후계자로 길러졌고 동생들도 전부 그의 위주로 지내왔다.그가 전씨 그룹을 장악한 뒤로 할머니든, 부모님이든 전부 두 손을 내려놓고 전적으로 이 그룹을 전태윤에게 맡겼다. 전씨 그룹에서 그의 말이 곧 진리이다.동생들도 회사에서 여전히 그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전태윤은 천성이 일방적인 데다가 그런 환경 속에서 지내다 보니 무릇 자기중심적인 성격으로 거듭났다.그는 모든 걸 지배하는 데 적응했고 모두가 그에게 순종하는 것에 익숙해졌다.하예정은 본인 인생을 전태윤에게 지배당하기 싫었고 그에게 순종하며 의지하는 것도 익숙지 않았다.이에 전태윤은 그녀에게 홀시 당했다는 느낌이 들었다.그를 중시하지도 않고 한 가족으로 여기지 않는 기분이 들었다.다만 하예정의 말처럼 전태윤은 그녀에게 완전히 솔직했던가?“아주머니가 저 대신 날짜를 기록해주세요. 태윤 씨가 이번엔 며칠이나 냉전을 벌일지 지켜봐야겠어요. 나도 이젠 문자 안 보낼래요. 그래봤자 아무런 답장이 없잖아요. 누가 알아요? 내 카톡을 아예 삭제했을지. 만약 진짜 삭제했다면 평생 태윤 씨를 재 추가하지 않을래요!”숙희 아주머니가 답했다.“태윤 씨가 조금 일방적이긴 하죠. 하지만 제가 볼 땐 태윤 씨가 예정 씨에게 중시 받지 못하고 늘 남처럼 제외당하는 느낌이 들어서 화나신
하예정은 숙희 아주머니가 계속 청소하는 걸 보더니 별생각 없이 먼저 집을 나섰다.숙희 아주머니는 그녀를 입구까지 바래다주고 엘리베이터를 탄 모습까지 확인한 후에야 방에 돌아와 황급히 전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태윤은 처음에 전화를 받지 않았다.아주머니가 연속 세 번 걸어도 받지를 않았다.아주머니는 마지못해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도련님, 사모님께서 약 드셨어요.」1분도 채 안 돼 전태윤한테서 바로 전화가 걸려왔다.“예정이가 무슨 약을 먹었는데요?”그의 말투는 평소처럼 차분하고 냉랭했다. 다만 아주머니는 그를 잘 알기에 지금 몹시 긴장하고 있다는 걸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사모님께서 어젯밤에 제대로 못 자서 머리 아프고 눈이 시려서 진통제를 드셨어요.”전태윤은 아무 말이 없었다.‘놀랐잖아! 아주머니도 참, 똑바로 얘기하실 것이지. 난 또 예정이가 약 먹고 자살하려는 줄 알았잖아. 내가 괜한 생각을 했네.’하예정은 누구보다 밝은 성격이라 자살은 생각지도 않을 것이다.그런 그녀가 전태윤을 위해 자살을 한다? 전태윤은 어이없다는 듯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난 예정이한테 심효진보다 못한 존재야.’“도련님, 사모님께서 아침 드실 때 저한테 다 얘기하셨어요.”숙희 아주머니가 한숨을 내쉬었다.“도련님, 제가 볼 때 도련님이 꼭 짚고 넘어가셔야 할 것 같아요. 도련님께서 왜 사모님을 좋아하시는지, 사모님의 어떤 점이 좋은지 말이에요. 도련님 요구대로 사모님을 바꾸려고 하지 마세요. 진짜 그렇게 변하면 도련님은 사모님을 계속 좋아하실까요?”“예정이는 나한테 아무 얘기도 안 해요. 노동명이 다 아는 걸 내가 모르는 게 말이 돼요?”“그럼 도련님은 사사건건 사모님께 얘기하셨나요? 잊지 마세요. 도련님은 아직도 사모님께 본인 정체를 숨기고 있어요. 정작 도련님이야말로 사모님께 너무 많은 걸 숨기고 있다고요.”전태윤의 낯빛이 어두워졌다.“아주머니는 대체 누구 편이에요?”“저야 당연히 도련님 편이죠. 이게 다 도련님 잘 되라고, 도련님을 위해
하예정이 가게에 왔을 때 마침 소정남이 가게 안에서 걸어 나왔다.그는 걸어가면서 고개 돌려 손 인사를 했는데 상대는 안 봐도 심효진일 게 뻔했다.소정남은 하예정을 보더니 깍듯이 인사했다.하예정도 그에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소정남과 너무 친하지도 않고 그의 진짜 신분을 알게 되니 사뭇 어색해졌다.소정남도 그녀와 딱히 화젯거리가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친구의 아내였기에 친구가 없는 장소에서 너무 가까이 지낼 필요도 없었다.“예정 씨, 저는 이만 회사로 돌아갈게요.”“네, 조심히 돌아가세요.”소정남이 웃으며 차에 올라타고는 곧장 자리를 떠났다.하예정은 그제야 가게에 들어갔다.안에 들어서자마자 카운터에 놓인 커다란 장미꽃다발이 보였는데 대충 봐도 99송이는 될 듯싶었다. 장미꽃 외에도 심효진이 평소 즐겨 먹는 간식거리가 한가득 놓여있었다.소정남은 꽃과 간식거리 외에도 심효진이 평소 애용하는 스킨케어 제품을 몇 세트 선물했다.심효진은 주우빈을 안고 카운터 안에 앉아있었다. 그녀는 한창 과자 봉지를 뜯어 우빈이와 나눠 먹다가 하예정을 보더니 활짝 웃었다.“정남 씨가 간식거리를 한가득 보내왔어. 우리 가게 지키면서 실컷 먹자. 이것들을 다 먹으려면 지루할 틈도 없겠네.”“이모.”주우빈이 하예정을 부르더니 또다시 심효진의 손에 쥔 과자 봉지에 눈길을 돌렸다.심효진은 포장을 뜯고 안에서 과자 한 점 꺼내 우빈에게 먹여줬다. 주우빈은 오물오물 씹으면서 작은 손을 봉지 안에 쏙 넣었다.“우빈이 너무 많이 먹지 마. 그러다 밥맛 없을라.”심효진은 우빈에게 좀 더 나눠준 후 봉지를 닫았다. 아이에게 간식을 너무 많이 먹이면 제때 밥을 먹지 않으려 하니까.하예정은 간식거리와 스킨케어 세트들을 바라보며 친구에게 장난치듯 말했다.“정남 씨가 네가 뭘 좋아하는지 제대로 파악했네. 전부 네가 잘 먹는 간식이고 평소 애용하는 브랜드 제품이잖아.”전태윤은 하예정에게 간식도 사준 적 없고 화장품도 선물한 적이 없다.하예정이 성소현에게 받은 마스크팩을 붙이면
결국 그녀는 체면도 무릅쓰고 성소현에게 소정남에 관한 얘기를 캐물었는데 소정남이 누군가를 다스리려면 상대는 죽지 못해 사는 꼴이 된다고 했다.그는 상대가 모든 걸 조금씩 잃어가고 그 속에서 차츰차츰 절망감을 느끼며 가슴을 후벼 파듯이 무척 괴롭힌다고 한다.하여 심효진은 만에 하나 소정남을 거절했다가 그의 심기를 건드려 괜한 전태윤만 괴롭힘을 당할까 봐 걱정했다.“일단 시도는 해볼게. 걱정 마. 나 자신을 무리하게 굴지는 않을 테니까.”심효진은 전태윤을 걱정하는 건 제쳐두고 절대 그녀 자신을 무리하게 몰아붙이진 않을 것이다.“예정아, 어젯밤에 소현 씨 집에 안 갔어? 예진 언니가 우빈이 데려왔을 때 모습 보고 나 깜짝 놀랐잖아.”그 일만 생각하면 하예정은 화가 울컥 치밀어 주씨 집안 사람들을 또 한 번 맹비난했다.김은희와 주서인이 언니네 회사에 찾아가지만 않았어도 하예정은 지금 전태윤과 싸울 일이 없었을 텐데!다만 전태윤의 성격대로라면 둘은 조만간 싸울 게 뻔하다. 얼마나 더 싸워야 서로 날 선 감정이 둥글둥글해질 수 있을까?“효진아, 저녁에 퇴근하고 우리 함께 바에 가서 술 한잔해.”심효진이 웃으며 대답했다.“남편이 출장 가고 없으니 너 제법 대범해졌다.”“집에 있어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우린 서로 신경 안 써.”말투가 이상한 걸 보아 부부싸움을 한 듯싶었다. 심효진은 입꼬리를 씩 올리며 하예정의 눈치를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예정아, 태윤 씨랑 또 싸웠지?”심효진이 몸져누웠던 그날도 두 사람은 크게 한바탕 싸울 뻔했다.이유는 전태윤이 마침 김진우가 하예정에게 꽃을 선물하는 걸 보았기 때문이다.이 일로 심효진은 또 친히 김진우를 찾아가 진지한 대화를 나눴다.여전히 마음을 접지 못하는 김진우를 보며 심효진도 내심 불안했다. 그렇게 열심히 설득했건만 동생은 전혀 새겨듣지 않았다.김진우는 지금 막다른 골목에 갇혀있다. 앞으로 나아가려 해도 더는 길이 없고 뒤로 물러서는 건 그가 원치 않았다. 하여 이렇게 버티고 있을 뿐
그녀는 몸을 홱 돌려 다시 사무실에 돌아갔다. 그 동료는 아직도 신이 나서 사람들과 수다를 떨었다.하예진은 곧게 그 동료에게 다가갔다.상대는 그제야 하예진이 다시 돌아온 걸 알아챘다.누구 험담을 하다가 당사자에게 바로 현장을 잡히는 건 실로 난감한 일이었다. 그 여자 동료는 어쩔 바를 몰랐다.“혹시 노 대표님을 짝사랑하세요?”하예진의 한마디에 그 여자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아니거든요.”상대가 부인했다.“그런데 왜 나랑 대표님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소문을 퍼뜨리는 건데요? 재미있어요 이 상황이? 나 방금 그쪽 말투에서 엄청 질투하고 있다는 걸 느꼈어요. 그쪽 대표님 짝사랑하는 게 틀림없어요. 그래서 항상 날 겨냥하는 거고요. 다들 믿거나 말거나 난 대표님께 아무 감정도 없어요. 맞아요, 나 이혼했어요. 쓰레기 같은 남자가 바람을 피웠는데 그럼 이혼을 안 하고 남겨뒀다가 함께 구정이라도 보내야 하나요? 내가 이혼했다는 이유만으로 대표님을 꼬시려는 것처럼 함부로 말해도 돼요? 다들 해도 해도 너무 하네요 진짜! 노 대표님은 정정당당한 분이세요. 나랑 대표님은 일말의 감정도 없어요. 만약 있었다고 해도 대표님이 굳이 당신들에게 숨길 가치가 있을까요?”하예진이 싸늘한 눈빛으로 사람들을 쳐다보며 냉랭하게 말했다.“한 번만 더 함부로 입을 놀리고 루머를 퍼뜨렸다가 비방죄로 확 고소해버릴 줄 알아요!”말을 마친 그녀는 곧게 사무실을 나섰다.여자 동료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다른 사람들은 전부 차갑게 자리를 떠난 하예진을 쳐다봤다. 다들 그녀가 좀 전에 했던 말을 똑똑히 들었다.왠지 모두에게 경고장을 날리는 듯한 기세였다.회사에서 하예진에 관한 루머가 너무 많아 진짜 비방죄로 그들을 전부 고소한다면...“얼굴 왜 그래?”하예진이 얼굴을 긁힌 상처가 아직 완전히 가라앉지 않았다. 이를 본 노동명이 관심 조로 그녀에게 물었다.“며칠 뒤면 나을 거예요. 관심해줘서 고마워요 대표님.”하예진은 그의 책상과 2미터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할머니, 제가 뭐가 똑똑해요, 전 진짜 멍청해요. 할머니야말로 대단하신 분이죠.”전이혁은 할머니께 아부하는 멘트를 던졌다.하지만 그것이 단순히 아부라고 할 수 없는 게, 할머니는 정말 대단한 인물이었다. 남들이 보기엔 전씨 가문 자손들은 이미 충분히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할머니의 손바닥 안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할머니는 마치 삼장법사였고 자손들은 손오공 같은 존재로 손오공이 아무리 강해도 삼장법사 앞에선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할머니, 저 진짜 꼼수 같은 거 부리지 않아요.”“그건 네 사정이고. 어떻게 하든 네 마음대로 해. 할머니는 이미 너에게 신붓감을 골라줬고, 대시하든 포기하든 그것 역시 너에게 달린 일이야. 1년이면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줬다고 생각한다.”“하지만 한 가지 경고할게. 지금까지 우리 전씨 가문에는 일편단심인 남자만 있었을 뿐 양다리를 걸치는 남자는 없었어. 네가 전씨 가문의 가풍을 망가뜨리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전이혁은 최대한 얼굴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알겠어요, 할머니. 저 이제 운전해야 해요. 도착해서 또 이야기 나눠요.”“그래, 운전 조심하고.”할머니는 전이혁에게 안전을 당부하고 전화를 끊었다.전화를 끊은 뒤, 할머니는 곧장 양씨 아저씨에게 전화를 걸었다.“양 집사, 내 생선은?”할머니는 자신이 잡은 생선을 혹시 다른 사람이 먹을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양씨 아저씨는 웃으며 대답했다.“어르신께서 구운 생선은 냄새가 정말 좋아요. 아무도 어르신의 생선을 뺏어 먹으려 하지 않으니 안심하세요.”그들 몇몇 자식들 따라 직원 숙소에서 지내는 할머니들은 전씨 할머니가 좋은 분인 걸 알고 함께 수다도 떨고 낚시도 하지만 전씨 가문의 중심인 전씨 할머니의 권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들은 전씨 할머니의 물건을 건드리는 일은 없었다. 혹시나 건드렸다가 이곳에서 일하는 자식들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었으니까.서원 리조트의 모든 직원은 훌륭한 대우와 복지를 받고 있었다. 산기슭에 지어진 숙소는 혼자인
두 사람은 함께 아침을 먹은 후, 방을 나섰다.그러자 집사는 전태윤이 다음에 올 때 묵을 수 있도록 스위트룸을 원래 상태로 정리하기 시작했다.도아영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서 다시 잠을 청했다.전이혁은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고, 할머니가 전화를 받자 물었다.“할머니, 지금 어디 계세요?”“리조트에 있어. 무슨 일이야? 할머니 보고 싶어? 그렇다면 와서 할머니랑 같이 밥 한 끼 먹자.”그러더니 할머니는 한 마디 덧붙였다.“지금 생선이 막 익었어. 냄새 진짜 좋다.”전이혁은 의아해하며 물었다.“아침부터 생선 구워 드세요?”“너한테 말한 거 아니야. 친구들이랑 얘기 중이었어. 아침부터 생선 구우면 안 돼? 그리고 지금 아침도 아니잖아. 아홉 시도 넘었네, 해가 중천에 뜨려고 하고 있어.”“오늘 날씨도 풀렸고, 할머니는 친구들이랑 낚시 갔다가 지금은 잡은 생선 구워 먹고 있어. 소풍하는 느낌이라 꽤 괜찮아.”전이혁은 그 모습이 쉽게 그려졌다. 산 아래에는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고 물 아래에는 물고기와 새우들이 헤엄치고 있었다.할머니는 가끔 몇몇 직원들의 어머니들과 함께 낚시하곤 했었다. 냇가에는 큰 나무 한 그루 있었는데 그 아래에는 돌로 된 테이블이 몇 개 있어 할머니의 한마디면 집사는 바비큐 그릴을 가져와 그들이 직접 구워 먹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할머니가 말하길, 그들은 먹는 것보다는 굽는 과정을 더 즐겼다. 비록 직원이 구워줄 수도 있었지만, 그들은 다른 사람이 구워주는 건 맛이 없다며 투덜대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 먹지 못할 때면 남은 건 직원들에게 나눠주기도 했었다.서원 리조트의 직원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할머니는 권위를 내세우며 직원들에게 막 대하지 않고 옆집 할머니처럼 따뜻하게 대해준다는 사실을.“할머니, 생선 더 잡아서 구워주세요. 저 지금 갈게요.”전이혁은 결심한 듯 할머니에게 진실을 털어놓으러 갈 생각이었다.“네가 와서 직접 잡아. 손질까지 하면 할머니가 구워줄게.”그러더니 할머니는 전이혁에게 물었다.“
“여긴 호텔 맞고, 당연히 아영 씨가 묵던 방일 수가 없죠. 어제 아영 씨가 취해서 방에 데려다줬는데 눕자마자 토하더라고요. 침대랑 바닥까지 모두 엉망이 돼서 어쩔 수 없이 다른 방으로 옮겼어요.”전이혁은 다시 자리에 앉더니 도아영에게 말했다.“아영 씨 술 취하면 정말 감당하기 힘들어요. 앞으로 술 좀 줄이는 게 좋을 것 같네요.”도아영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뗐다.“제가 전이혁 씨랑 함께 많이 마신 건 알겠는데 그 뒤로는 기억이 하나도 안 나네요. 그런데 그 술 진짜 맛있었어요. 제가 해주시로 돌아갈 때 한 박스만 챙겨줘요. 기분 안 좋을 때 집에서 한두 잔 마시려고요.”“아영 씨가 그 정도로 술이 부족하진 않을 텐데요?”전이혁은 도아영의 집에 좋은 술이 부족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그는 도아영의 말이 전혀 믿기지 않았다.“맞아요. 술이 부족한 건 아니에요. 하지만 전이혁 씨가 준 술은 부족하죠.”전이혁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그래요. 아영 씨가 돌아갈 때 한 박스 챙겨줄게요. 그리고 관성 특산물도 좀 챙길 테니 같이 가져가요. 어찌 되었든 먼 길 왔는데 헛걸음하게 하면 안 되니까요.”도아영은 웃으며 대답했다.“맞아요. 헛걸음하게 만들면 안 되죠.”그러더니 그녀는 전이혁의 옆으로 다가가 소파에 기대어 앉았다.“전이혁 씨, 여기 꿀 있어요? 머리가 아파서 그러는데 저 꿀물 좀 타 주면 안 돼요?”“아까는 참을 만하다면서요?”전이혁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일단 세수 좀 하고요. 그리고 타 줄게요. 아영 씨도 세수해요.”“목욕할 거면 아영 씨 방에 가서 해요. 여긴 우리 형이 자주 묵는 스위트룸인데, 아영 씨니까 형이 허락한 거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형수님이 부탁해도 절대 안 된다고 했을 거예요.”전이혁의 큰형과 형수님은 도아영이 할머니께서 정해준 자신의 신붓감이라는 걸 알고,이미 도아영을 가족이나 다름없이 생각하고 있었다.어젯밤, 전이혁이 그런 말을 했을 때 도아영은 살짝 기분이 상했었다. 하지만
전이혁은 얼른 도아영을 부축하더니 살짝 귀찮다는 듯이 물었다.“아영 씨, 또 왜 그래요?”“저... 화장실... ”도아영은 눈이 풀린 채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화장실 가고 싶어요?”도아영은 비틀거리며 제대로 걷기도 힘든 상태였고 전이혁의 표정은 점점 굳어지기 시작했다. 도아영을 혼자 화장실에 가게 둘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남자인 자신이 부축해서 데려가는 것도 난감한 일이었다.도아영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전이혁은 급히 그녀를 부축하며 다시 한번 물었다.“혼자 괜찮겠어요?”도아영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녀는 이미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도 모를 정도로 심하게 취해 있었다.도아영의 상태를 보아하니 전이혁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부축해 화장실로 데려가야 했다. 전이혁은 가면서도 입으로는 끊임없이 투덜거렸다.그는 도아영을 화장실로 들여보내고 도망치듯 밖으로 뛰어나왔다.전이혁은 도아영이 나올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10분이 넘도록 나오지 않았고, 노크를 해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결국, 전이혁은 걱정된 마음에 문을 살짝 열어 안을 들여다봤지만 무슨 일인지 도아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어? 어디 간 거야?’전이혁은 의심스러운 마음에 문을 활짝 열고 들어가 보았다. 그 결과, 도아영은 화장실 문 옆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그러니 문틈 사이로 도아영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었다.“이 여자 진짜!”도아영의 모습을 보자, 전이혁은 앞으로 절대 그녀에게 술을 많이 마시게 하지 않으리라고 결심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전이혁은 앞으로 자신이 도아영과 함께 밥을 먹게 된다면 그녀에게 술을 마시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 자신 말고는 도아영이 다른 누구와 함께 얼마나 마시든, 그건 전이혁이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전이혁은 안으로 들어가 도아영을 안고 나온 뒤,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그는 원래 방으로 돌아가 쉴 예정이었지만, 도아영의 상태를 보아하니 도저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결국 그날 저녁,
한편 호텔에서 도아영을 돌보던 전이혁은 전창빈의 메시지를 확인하더니 단독으로 그에게 음성 메시지로 물었다.[너 그 먼 곳까지 가서 가정 요리사를 하려고?]전창빈은 소파에 앉아 답장을 보냈다.[안 될 건 없지? 선우씨 가문의 가정 요리사 자리는 도전적이잖아. 내가 합격할 수 있을지 시험해 보고 싶었어. 다행히도 형 동생이 모든 경쟁자를 물리쳤지 뭐야. 난관을 하나둘씩 돌파했어.]전이혁이 회답했다.[요리사 하나 뽑는 걸 대통령 선거처럼 하는구먼. 얼마나 있을 계획이야? 설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명절에는 안 오려고?]전창빈이 답장했다.[설날에는 아마 못 갈 것 같아. 여기 주인이 날 해고하면 그때나 갈 수는 있겠는지.]전이혁이 피식 웃었다.[네 실력으로는 해고당할 리가 없잖아. 네가 주인을 해고하는 게 더 말이 되겠다. 이해가 안 가. 왜 그 먼 곳까지 가려고 한 거야? 넌 사업도 있는데... 어디서 요리하든 다 마찬가지일 텐데 굳이 몇천 리나 떨어진 곳까지 갈 필요가 있나? 거기 추울 텐데 너 괜찮겠어?]전창빈이 대답했다.[우리 추위를 못 타본 것도 아니고. 형도 할머니에 의해 눈이 수북이 쌓인 산으로 버려지지 않았어? 내 얘긴 그만하고... 형은 어때? 우리 미래의 형수님께 구애하기 시작했어?]‘난 벌써 움직이고 있는데 형이 아직도 움직이지 않는다면... 내가 나중에 민아 씨와 함께 할머니께 인사를 드리러 갈 때 형은 대체 어쩌려고?’전창빈은 속으로 생각했다.전씨 할머니의 지팡이가 전창빈의 등짝을 때리지 않는다면 해가 서쪽에 뜨는 거나 다름없을 것이다.[말도 마라. 정말 귀찮아. 큰형수님이 오늘 저녁에 우리한테 밥 사주셨어.]전창빈이 웃으며 회답했다.[하하! 괴로웠겠네.][내 말이. 할머니께서 나에게 정해주신 그 여자분이 큰형수님을 찾아가 하소연했더니 큰형수님이 우리 두 사람에게 밥을 사주신 거 있지.][형이 우리 형수님한테 무슨 짓이라도 했어?][아직 너의 형수님이 아니거든!]전이혁은 전창빈의 호칭을 정정했다. 그는 도아영과
“저는 앞으로 큰아가씨의 평가에 근거해서 요리 방법을 조정해 나갈 거예요. 그렇게 해야만 실력을 키울 수 있을 테니까요. 제가 만드는 모든 요리를 큰아가씨께서 만족해하시면 제가 여기에서 졸업할 수 있겠네요.”강진은 웃으며 대답했다.“그렇게 되면 큰아가씨께서 당신을 놓아주지 않을걸요.”‘평생 선우민아 씨를 위해 요리해 드리는 건 기쁜 일이지.'이 말을 입 밖으로 내뱉고 싶었지만 전창빈은 꾹 참았다. 이런 말은 입 밖에 내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내면 오해를 살 수 있으니까. 설령 전창빈이 선우민아에게 애정 공세를 하는 것이 두 번째 목표라고 해도 이런 생각을 드러내서는 절대로 안 된다.선우민아가 가업을 운영한다는 건 그녀가 매우 유능한 인물이라는 증거다. 이렇게 강한 강한 여성은 쉽게 넘볼 수 없는 상대이다.전호영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는 너무 힘들어서 하예정의 도움을 받은 끝에야 지름길을 택할 수 있었고 고현의 마음을 얻었다.강진은 그 말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걸 깨닫고는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전창빈 씨, 오늘 오후 내내 바쁘셨는데 일찍 쉬세요. 내일 아침 큰아가씨를 위해 아침식사를 준비해야 합니다. 가장 일찍 아침을 드시는 분은 큰아가씨와 민기 도련님입니다. 민기 도련님은 학교에 가야 해서 일찍 식사하시고 큰아가씨는 매일 민기 도련님을 학교에 데려다주신 후 회사에 가시니까 두 분은 늘 함께 식사하시는 편이에요. 하여 아침 7시쯤이면 큰아가씨와 민기 도련님의 아침을 준비하시면 됩니다. 다른 분들의 아침은 9시 이후에 준비하시면 돼요.”전창빈이 말을 건넸다.“그 시간대면 아침과 점심을 함께 드시는 거네요.”“어르신과 사모님은 그렇죠. 점심 무렵에 일어나셨다가 식사 후에는 외출하셔서 저녁에야 돌아오세요. 때로는 안 오시기도 하는데, 그럴 땐 제가 미리 알려드릴게요. 안 오시는 날은 창빈 씨가 쉬는 거나 마찬가지죠. 그냥 자신의 배만 채우시면 돼요.”여기에서는 사실상 선우민아 자매만 아침을 먹는 셈이다.“큰아
동생 선우정아가 어이없어하는 모습을 보며 선우민아는 미소를 지었다.“알았어. 지금은 네가 전창빈 씨를 좋아하지 않는다 치더라도 앞으로 어떻게 될진 모르는 일이니까. 앞으로 매일 여기 와서 식사해. 전창빈 씨와 접촉할 기회도 많아져야 그에 대해 더 잘 알게 될 거 아니야. 만약 그가 정말 괜찮은 사람이라면 거리가 멀어도 너희 부모님께서도 어쩔 수 없이 동의하실 거야. 혹은 전창빈 씨에게 우리 지역에서 사업을 하게 하고 여기서 집을 사도록 하든가.”선우정아는 또 벙어리가 되어버렸다.선우민아가 이렇게 말하는 걸 보니 선우정아는 앞으로는 감히 그 집에 밥 먹으러 가기도 어려울 것 같다고 여겼다.선우민아가 자꾸 자신이 전창빈을 좋아한다고 오해하고 있지 않는가.전창빈은 미래의 아내는 지금 미래 처제가 자기를 좋아한다고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전이혁은 강진을 따라 숙소로 돌아갔다. 강진은 웃으며 축하의 말을 전했다.“전창빈 씨, 이제 우리는 동료가 되었군요. 오래 함께 일했으면 좋겠습니다.”선우씨 가문의 여러 집안이 같은 대저택 안에서 함께 살고 있었지만 집안마다 독립된 공간이 있었다.선우민아의 요리사는 자주 교체되는 편이었기에 강진 역시 1년 정도는 함께 일할 사람을 원했다.요리사와 친해지기도 전에 퇴직하는 경우가 너무 많았다.전창빈도 웃으며 말을 이었다.“저도 집사님과 오래 함께 일하고 싶습니다. 앞으로 제가 요리들을 더 연구해서 큰아가씨께서 제 요리만 먹고 싶어 하도록 해야겠네요.”“큰아가씨께서 창빈 씨 요리만 고집하게 만들면 정말 대단한 거예요. 요리 대회에 나가면 ‘요리의 신'이라는 칭호를 받을 수 있을 만큼요.”선우민아의 입맛을 사로잡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전창빈은 웃으며 말했다.“‘요리의 신' 같은 건 관심 없어요. 저는 단지 제 요리 실력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해서 손님들을 만족시키고 싶을 뿐이죠.”전창빈은 그가 고용한 요리사들에게는 항상 조언을 해주곤 한다. 본인이 잘 배워야 현재 이끌고 있는 요리사들도
선우민아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저런 사업을 가진 사람을 네가 정말 좋아한다면 작은아버지와 숙모도 반대하지 않으실 거야. 다만 전창빈 씨가 관성 사람이라 우리랑 거리가 너무 멀어. 작은아버지와 숙모는 네가 먼 곳으로 시집가는 걸 아쉬워할 수도 있을 거야.”선우정아는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언니! 제가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요? 저는 정말 그런 마음 없단 말이에요. 오히려 저는 그분이 언니랑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우리 자매 일곱 명 중 언니가 맏이라 당연히 언니가 먼저 시집가야죠. 제가 언니를 앞지를 순 없잖아요.”착각인지 정말 본 건지, 선우정아는 전창빈이 선우민아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특별한 시선이 느껴졌다.그리고 전창빈은 사실 정말로 선우민아를 위해 온 거였다.아니, 정확히는 선우민아의 까다로운 입맛을 만족시켜주기 위해 온 것이다. 그녀를 만족시킬 수 있다면 다른 손님들도 분명히 만족시킬 수 있을 테니까.선우정아는 생각했다. 선우민아처럼 입맛이 까다로운 사람은 많지 않을 거라고.선우민아는 손을 뻗어 동생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우리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잖아. 게다가 사촌 자매이기도 하기 때문에 네가 나보다 먼저 시집간다고 해도 전혀 문제가 안 되거든. 나는 당분간 시집갈 생각 없어. 만약 고려한다 해도 이 지역의 사람일 거야. 생각해봐, 민기와 민수는 아직 몇 살밖에 안 됐는데 애들이 커서 사업을 이어받을 수 있을 때까지 적어도 20년은 더 기다려야 되잖아. 이 20년 동안 우리 자매는 계속 회사를 떠받쳐야 해. 만약 우리가 먼 곳으로 시집가면, 누가 회사를 이끌겠어? 셋째와 넷째에게 그런 능력이 있는지 지켜봐야 할 거야 아니야.”셋째 동생과 넷째 동생도 이제 성인이 되어 사업을 배우기 시작했지만 아직은 거대한 가업을 떠받칠 능력이 되지 못했다.하여 선우민아는 자연스레 먼 곳으로 시집갈 생각이 없었다. 시집을 간다 해도 A시의 남자에게 시집갈 것이다. 그래야 시집가서도 친정 회사를 계속 관리할 수 있으니까.앞으로 선우민기
전창빈이 말했다.“행동으로 보여드리죠.”선우정아는 눈썹을 치켜들며 웃었다.“전이혁 씨는 정말 자신만만하신가 봐요.”선우민아는 선우정아를 한 번 흘겨보더니 전창빈에게 물었다.“그럼 언제부터 출근 가능하세요?”“이 자리를 위해 온 만큼 언제든지 가능합니다.”선우민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내일부터 정식으로 출근하세요. 강 집사님께서 이미 숙소를 준비해 뒀을 테고 월급은 내일부터 계산됩니다. 한 달의 수습 기간이 있고 수습 기간 중 급여는 일당으로 지급됩니다. 공짜로 일을 시키진 않을 거예요.“누구든 마찬가지로 하루 일하면 하루 급여를 계산해 주었다.“집사님께서 어제 이미 숙소를 준비해 주셨습니다. 급여는 어떻게 계산되든 상관없습니다. 전 도전을 위해 온 거지 월급을 위해 온 게 아니니까요.”전이혁은 돈이 부족한 게 아니었다. 아내만 부족할 뿐...“좋아요. 지금은 숙소로 가서 쉬세요. 우리 집에서의 하루 세끼 준비 시간은 집사님께서 알려주실 거예요. 아침을 제외한 점심과 저녁 식사 준비 시간은 변함없어요.”선우씨 가문의 사람들 아침 식사는 각자 일어나는 시간이 다르기 때문에 딱히 정해진 시간이 없었다.전창빈이 대답했다.“알겠습니다. 집사님께 여쭤보겠습니다.”그는 다시 모두에게 고개를 끄덕인 뒤 자리를 떠났다.전창빈이 떠나자 선우민아도 일어서서 가족들에게 말했다.“저는 아직 처리할 일이 있어서 나가봐야 할 것 같아요. 민기한테는 주말에 데리고 나가주겠다고 전해주세요.”선우민기는 그녀보다 스무 살이나 어렸기 때문에 남동생을 아들처럼 키웠다.선우민기는 선우민아를 무서워하면서도 잘 따랐다.선우정아도 그녀의 언니를 따라 일어섰다.“저도 일 보러 갈게요.”한경주가 딸에게 당부했다.“접대할 때 술 너무 많이 마시지 마. 몸에 해로워.”“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5년 전의 제가 아닌걸요.”선우민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회사를 막 이어받았을 때 그녀는 많은 사람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그땐 위엄도, 경험도 없었고 회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