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나온 후 소정남이 혼잣말로 중얼댔다.“자식, 결벽증이 있으면서 토사물이 옷에 묻었는데 예정 씨를 밀치지도 않네? 진짜 진심으로 사랑하나 봐, 이걸 다 참다니.”소정남은 여전히 하예정의 열렬한 팬으로서 그녀를 존경할 따름이다.한편 집안에서 전태윤은 외투를 벗어 바닥에 내던지고는 하예정의 외투도 벗겨서 바닥에 던졌다.그는 나중에 깨끗이 치울 예정이었다.우선 만취한 그녀부터 안방에 들여보내야 한다.“태윤 씨...”구토한 하예정은 정신이 맑아졌는지 아니면 속이 후련해서인지 또다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전태윤이 안자마자 그녀는 불쑥 큰 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그래, 나 여기 있어.”전태윤은 다정한 말투로 대답하며 그녀를 안고 제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뭔가 달라졌다는 걸 발견했다.그녀의 물건이 싹 다 없어졌다!이건... 홧김에 본인 방으로 짐을 옮겼다는 말인가?전태윤은 문 앞에 서서 몇 분 동안 침묵하다가 결국 하예정을 안고 그녀의 방으로 돌아갔다.“태윤 씨... 나빠... 나 태윤 씨 안 좋아할래요... 태윤 씨 미워할래...”전태윤이 그녀를 침대에 내려놓자 그녀는 또다시 남편이 싫고 안 좋아할 거라며 구시렁댔다.“삐돌이...”전태윤은 그녀를 한참 바라보다가 허리 숙여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미안해, 예정아, 내가 잘못했어.”하예정은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전태윤은 몰래 한숨을 내쉬고 자리를 떠났다.그는 하예정의 깨끗한 옷을 찾아 침대 위에 내려놓고 그녀를 한참 동안 내려다보다가 그제야 자리에 앉아 옷을 벗겨주기 시작했다.그는 불타오르는 마음을 달래며 겨우 하예정에게 깨끗한 옷을 갈아입혔다.그리고 방에 돌아가 황급히 찬물에 샤워했다.추운 날에 자꾸만 찬물로 샤워를 해야 했다. 그가 컨디션이 좋았으니 망정이지 진작 추위에 떨어 감기 걸렸을 것이다.30분 후 그는 다시 하예정의 침대 머리맡에 자리 잡고 앉았다.하예정은 더는 뒤척이지 않고 깊이 잠들었다.하지만 눈가에 눈물이 고였고 얼굴의 눈물 자국도
“결혼 뒤에도 난 줄곧 널 경계하고 의심해서 6개월짜리 계약서도 작성했지. 대부분 너에 대한 많은 제약으로 구성됐어... 맞아, 나 나쁜 놈이야, 내 이익만 따지고 널 고려한 적이 없었어. 날 망할 자식이라고 욕해, 난 진짜 망할 놈이야. 미안해, 예정아!”전태윤은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하며 속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맹세할게, 두 번 다시 이런 일은 없어. 널 이해하고 대화로 풀어보도록 노력할게. 널 믿도록 노력할게. 너도 아내가 처음이고 나도 남편이 처음이야. 우린 모두 경험이 없어. 그러니까 인제부터 함께 배워나가고 함께 노력하며 오래오래 같이 살자, 응?”전태윤은 그녀의 귓가에 대고 한참을 속삭이다가 결국 그녀 옆에 누운 채로 잠들어버렸다.이번 일로 부부는 서로 너무 힘들었다.하예정은 술집에 가서 술로 아픈 마음을 달랬고 전태윤은 밤새 업무에 몰입하며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못하다가 아내가 술 마시러 갔다는 소식을 듣고는 수중의 업무를 전부 내려놓고 곧바로 돌아왔다. 그는 배도 고프고 졸음이 쏟아지고 피곤이 마구 몰려왔다.숙희 아주머니가 타일렀듯이 부부는 서로 믿어주고 배려해야 오래간다고 했다.전태윤은 그녀보다 일찍 깨났다.그가 깨났을 땐 이미 아침 7시가 넘은 시각이었다.거실을 미처 청소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그는 하예정의 볼에 가볍게 입 맞추고는 서둘러 청소하러 나갔다.토사물을 깨끗이 치우고 바닥을 여러 번 닦은 후 그의 외투를 휴지통에 버리고 하예정의 옷은 직접 손빨래했다.토사물이 너무 많이 묻어 세탁기까지 더러워질까 봐...모든 일을 마친 후에야 전태윤은 배가 고파 났다.어젯밤에 저녁을 먹지 않았고 오늘 아침엔 일어나자마자 이렇게 많은 일을 했으니 배가 더 고팠다.너무 고픈 나머지 손까지 벌벌 떨렸다.그는 얼른 주방에 들어가 라면을 끓여 먹었다. 허기진 배를 채우니 그제야 손이 안 떨렸다.“띠리링...”이때 휴대폰이 울렸다.그는 전화를 받은 후 중저음의 목소리로 대답했다.“3시간 뒤에 도착할게.”그는 전화를
그림을 유심히 살펴보던 그의 눈빛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하예정은 그를 나름 잘 그렸는데... 심장 부위를 아주 돋보이게, 그리고 아주 아주 작게 그렸다...그가 속 좁다는 걸 표현하고 싶은 걸까? 삐돌이에 소심한 남편이란 뜻일까?!그의 자화상 뒤엔 호수인지 연못인지 하는 물이 그려져 있었고 수면 위엔 동그란 사물이 잔뜩 널브러져 있었다. 물속엔 물고기가 없어 물고기의 입에서 나온 거품이라고 단정 지을 수도 없었다.연못 뒤엔 알이 하나 덩그러니 그려져 있었다.전태윤은 그림을 들고 걸어가며 생각했다.하예정의 그림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자화상은 전태윤이 틀림없는데 물과 동그라미는 또 무슨 뜻일까?강일구가 아래층에서 그를 기다렸다.“도련님.”“그래.”전태윤이 대답하고는 강일구에게 그림을 보여주며 차에 탔다.“너희 사모님께서 날 위해 그린 그림이야.”강일구는 그림의 내용을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사모님의 그림 솜씨가 뛰어나다는 걸 굳게 믿으며 칭찬을 남발했다.“사모님의 그림은 명화에 가깝죠.”“그래, 날 아주 사진처럼 생동하게 그렸어.”전태윤이 의자에 기대며 수면 위의 동그라미들을 빤히 쳐다봤다.‘이 동그라미들은 대체 뭘 의미하는 거지?’“물이 혼탁해졌어. 그러니까... 내 마음이 저 동그라미처럼 작고 동그라미의 개수만큼 자주 삐진다는 거네!”강일구가 의아한 듯 고개 돌려 전태윤에게 물었다.“도련님, 뭐라고 말씀하셨어요?”그는 얼핏 도련님이 스스로 자주 삐진다는 말을 들은 것 같았다!그가 잘못 들은 걸까?“아니야, 아무것도. 운전해, 시간이 빠듯해.”전태윤은 그녀의 그림 속에 담긴 깊은 뜻을 알아내고 한숨을 길게 내쉬며 조심스럽게 그림을 접었다. 비록 하예정이 그를 원망하는 내용이지만 이는 그에게 그려준 첫 그림이었다.의미가 남다르니 정성껏 소장해야 한다.“띠리링...”휴대폰이 또 울렸다.소정남에게 걸려온 전화였다.“태윤아, 너 지금 집이야 아니면 또 출장 갔어?”“출장 가는 길이야.”“너 엄청 고생하네. 주
전태윤이 하찮은 표정을 지었다.“내가 표정 관리가 안 됐으면 좋겠어? 내가 왜 그래야 하는 건데? 예정이가 대놓고 날 나쁜 놈이라고 욕해도 그건 다 사랑해서 그런 거야. 나한테 아무 감정 없으면 쳐다보는 것조차 시간 낭비라고 느낄 텐데 뭣 하러 욕까지 하겠어. 우리 와이프가 처음 그려준 그림인데 찢긴 왜 찢어? 나 꼭 그림틀에 넣어서 소중히 간직할 거야. 나중에 나이 들어서 다시 꺼내 감상해야지. 그땐 또 감회가 새로울 거야.”소정남이 그의 말을 받아쳤다.“너 그림틀에 안 넣기만 해봐, 비겁한 놈이라고 놀려댈 거야!”전태윤이 목소리를 내리깔고 대답했다.“어디 틀에 넣기만 하겠어? 나랑 예정의 방에 걸어두고 아침저녁으로 두 번씩 볼 텐데.”소심하게 사소한 일로 툭하면 하예정과 사이가 틀어지지 말자고 본인을 일깨워줘야 한다.그녀를 화나게 해서도 안 되고, 속상하게 해서도 안 되며 눈물을 흘리게 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소정남이 입을 삐죽거렸다.“너 그 그림 사무실 벽에 걸 수 있어?”“내가 왜 거기에 걸어야 하는데? 우리 와이프가 그려준 명화야. 우리 부부의 방에 걸어놓아야지 뭣 하러 딴사람들 보여줘? 너도 그 그림의 내용을 싹 다 잊는 게 좋을 거야. 됐어, 그만 얘기해. 나 눈 좀 붙여야겠어.”요즘 2, 3일을 꼬박 새우다 보니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그래, 좀 자.”소정남이 전화를 끊었다.그는 전태윤이 그림의 깊은 뜻을 깨닫지 못한 줄 알고 일부러 전화해 한바탕 놀려주려고 했는데 전부 깨달았을 뿐만 아니라 사랑 타령까지 하며 부부의 감정이 얼마나 깊은지 자랑질만 해댔다.부부는 역시 부부인가보다. 사로가 남들과 다른 걸 보니...하예정은 전태윤이 그녀가 술 마신 것 때문에 밤새 날아왔다가 지금 다시 출장 가는 걸 아예 몰랐다.그녀는 휴대폰 벨 소리에 겨우 잠에서 깼다.깨나니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지만 간신히 참으며 전화를 받았다.“예정 씨, 저예요. 깨셨으면 문 좀 열어주실래요?”“아주머니... 잠시만요, 지금 바로 열어드릴게
게다가 꿈에 그녀에게 말을 엄청 많이 했지만 무슨 얘기를 했는지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꿈에서 그녀는 전태윤에게 안 들린다고 좀 더 높게 말하라고 했지만 전태윤은 입 모양만 할 뿐 목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안달이 나서 미칠 것만 같았다.숙희 아주머니는 고개 돌려 그녀를 힐긋 바라보다가 다시 몸을 돌리고 하던 일을 마저 했다.“저는 어제 오후에 예진 씨랑 우빈이 데리고 먼저 돌아갔고 밤에도 예진 씨 집에서 자서 태윤 씨가 왔는지 잘 몰라요.”하예정이 머리를 탁 치며 대답했다.“맞아요, 아주머니 집에 오지 않았어요. 아이고, 머리 아파. 해장탕 끓여주실 수 있어요? 안 되겠다, 나 진통제 먹고 와서 다시 얘기해요. 머리가 터질 것 같아요.”하예정은 곧바로 주방을 나갔다.그녀는 거실로 걸어가 약상자를 찾아내고는 진통제를 꺼내 분말을 입에 부으려 했다.“머리 아프지?”이때 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하예정은 놀라서 손이 떨린 바람에 분말이 반쯤 쏟아졌다.“제대로 못 자서 그래. 진통제 먹으면 괜찮아져.”언니에게 들켰으니 대놓고 먹어도 될 듯싶었다.“내가 몇 번을 얘기했어, 술을 먹지 말랬잖아. 주량이 약해서 몇 잔 마시면 바로 취한단 말이야. 내 말은 늘 귓등으로 흘리지. 왼쪽 귀로 들어가서 오른쪽 귀로 털어내는 거야? 태윤 씨가 집에 없어서 아무도 감시하지 않으니 제멋대로 술을 마셔대?”하예진은 속상하고도 화가 나서 동생의 귀를 가볍게 잡아당겼다.“태윤 씨 오면 얘기할 거야. 앞으론 출장 갈 때 가족도 데려갈 수 있으면 널 데리고 가게 해야겠어. 남편이 집에 없다고 술이나 마셔대지 못하게 말이야.”“언니, 태윤 씨는 일 때문에 출장 갔어. 내가 거길 왜 따라가? 술을 두 잔 마신 것뿐이야. 정말 많이 안 마셨다니까.”“누굴 속여? 내가 모를 줄 알아? 주량은 약하면서 술은 엄청 좋아하지. 옆에 지켜보는 사람이 없으면 네가 몇 병을 마실지 몰라.”하예진이 동생에게 핀잔을 늘여놓으며 주방으로 들어갔다.“아주머니께 해장탕 끓여달
하예진이 동생을 힐긋 쳐다봤다.“그럼 설마 제부 옷이 홀로 여기까지 달려왔을까 봐? 그것도 다 젖은 상태로? 이건 어젯밤이나 오늘 아침에 씻은 게 틀림없어.”하예정이 겨우 말을 이어갔다.“태윤 씨가... 어젯밤에 진짜 돌아온 거야?”“뭐라고?”“아니야, 아무것도. 내가 키운 꽃 예쁘지? 꽃 구경 하고 있어, 나 밥 좀 먹을게.”하예정은 밥그릇을 들고 주방에 돌아가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재빨리 휴대폰을 꺼내 심효진에게 문자를 보냈다.「효진아, 나 어젯밤에 대략 언제쯤 취했어? 취하고 나서 너랑 서준이가 나 집까지 바래다준 거야?」「내가 밤새 꿈을 꿨거든. 꿈에 태윤 씨가 돌아온 거 있지? 난 전혀 안 보고 싶은데 말이야.」「우리 집 발코니에 태윤 씨 옷이 널려있다? 게다가 젖은 채로... 설마 나 꿈 꾼 거 아니고 태윤 씨가 진짜 돌아왔었나?」「문자로 해, 전화하지 말고. 언니가 집에 와있어. 나랑 태윤 씨가 싸운 걸 알면 또 엄청 걱정할 거야.」하예진은 이혼한 뒤 동생네 부부 사이가 틀어질까 봐 너무 걱정됐다.심효진이 재빨리 답장했다.「너 술 엄청 많이 마셨어. 그래서 만취한 거야. 널 알고 나서 나도 처음 봤다니까. 너 거의 최고기록이야. 태윤 씨도 어제 돌아왔었어. 네가 취한 뒤 내가 널 부축하고 술집을 나갔는데.」「입구에서 태윤 씨랑 마주쳤어. 보자마자 널 가로채 가더라고. 난 뭐 어쩔 새도 없었다니까.」「널 집까지 바래다준 건 당연히 태윤 씨고 너 그거 꿈 아니야. 태윤 씨가 네 옆에 있었어. 난 또 네가 만취해서 필름이 끊긴 줄 알았지.」하예정은 말을 잇지 못했다.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심효진에게 물었다.「태윤 씨가 정말 돌아왔다고? 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나지 않아. 꿈인 줄로만 알았어. 나한테 엄청 많은 얘기를 했는데 마치 늙은 영감처럼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니까.」심효진은 타자하기 귀찮아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너 방금 깼어? 태윤 씨는? 아 참, 어젯밤에 정남 씨한테 여쭤봤는데 태윤 씨 오늘 또 그 도
“띠리링...”이때 성소현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하예정은 심효진과의 채팅을 잠시 멈추고 성소현의 전화를 받았다.“예정이 너 어디 살아?”“발렌시아 아파트요.”“알았어, 지금 갈게. 가게 갔는데 문을 잠갔더라고.”하예정이 대답했다.“그래요, 위치 보내줄게요. 나랑 언니도 지금 막 나가려던 참이었어요.”성소현이 알겠다며 대답했다.하예정이 위치를 보낸 후 그녀는 내비게이션을 켜고 발렌시아 아파트로 출발했다.성소현은 늘 빠른 속도로 달리다 보니 길모퉁이를 돌아 큰길의 차량들과 합류하려 할 때 하마터면 마이바흐와 부딪칠 뻔했다. 양쪽 모두 급브레이크를 밟았다.성소현이 도어를 내리자 상대방 기사도 도어를 내렸다.성소현은 상대에게 뒤로 물러서라며 모퉁이를 돌아야 한다고 했건만 상대는 그녀에게 바로 대답한 게 아니라 고개 돌려 뒷좌석에 앉은 사람을 쳐다봤다.“무슨 일이야?”예준하가 중저음의 목소리로 물었다.“상대가 선뜻 비키지 않습니다. 저희더러 물러서라고 합니다.”예준하는 커튼을 걷고 상대를 확인한 후 다시 커튼을 내리고는 기사에게 말했다.“성씨 일가의 살벌한 따님이야. 횡포하기로 소문났으니 뒤로 물러서서 양보해.”예준하는 예진 그룹의 관성 지사를 관리하고 있어 평소 관성 상업계의 거물들을 상대하고 있다. 비록 성씨 그룹과 아무런 업무 왕래가 없지만 성씨 일가의 몇몇 핵심 인물은 거의 다 알고 있었다.예진 그룹은 전씨 그룹과 합작하고 있는데 전씨 그룹이 성씨 그룹과 안 맞다 보니 예준하도 자연스럽게 성씨 그룹과 업무상에 왕래하지 않았다. 그래도 성씨 일가의 중요 인물들은 얼추 알고 있었다.성씨 일가의 실세는 성기현인데 그는 또 팔불출로 유명하다. 성기현을 몰라도 유청하는 반드시 알아야 한다. 괜히 성씨 일가 안방마님의 심기를 건드렸다가 팔불출 성기현에게 복수 당하기 십상이니까.성씨 가문 사모님 이경혜 여사도 반드시 알아야 한다. 그녀는 비록 성씨 그룹의 오너 자리에 앉지는 못했지만 말단 직원부터 시작해서 차츰차츰 성장해나갔고 그녀의 남
파란불로 변한 뒤 예준하의 차가 먼저 출발했다.성소현은 그의 차 번호를 유심히 살펴보며 생각했다.‘차 주인이 누구지? 뒤에 따라가는 검은색 세단 몇 대는 경호 차량 같은데?’관성에서 외출할 때 경호원을 데리고 다니는 사람은 전태윤 한 명뿐이다!성소현은 전태윤 말곤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그녀의 오빠는 경호원을 데리고 다니기 싫어한다. 가끔 데리고 다녀도 두 명뿐이다. 전태윤처럼 경호팀을 두 팀으로 나눠 밤낮으로 데리고 다니진 않는다. 한팀에 경호원이 8명 좌우 있다 보니 매번 전태윤이 등장할 때마다 왕의 아우라가 느껴진다.하예정은 성소현이 오는 길에서 예준하를 마주친 걸 전혀 모른 채 위치를 보냈고 심효진에게도 이모네 댁으로 가야 할 것 같다고 문자를 보냈다.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전태윤에게도 문자를 보냈다.전태윤은 비행기 안인지 그녀에게 답장하지 않았다.하예정은 순간 기분이 또다시 가라앉았다.“답장 안 할 테면 하지 말라지 뭐. 나도 그다지 바라는 건 아니야.”그녀는 휴대폰을 외투 옷 주머니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릇을 들고 설거지하러 주방으로 들어갔다.“언니 얼굴에 난 상처에 약 발랐어?”“응, 발랐는데 흉터 자국이 남을지 모르겠어.”“상처가 깊지 않아 자국이 남지 않을 거야.”하예진은 우빈을 안고 걸어와 주방 입구에서 동생이 설거지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예정아, 너도 내가 마음 약해졌다고 생각해?”“언니는 우빈이를 봐서 그 인간들 한번 용서해준 거야. 게다가 그 인간들도 이젠 우리에게 훌륭한 이모가 있다는 걸 아니까 앞으론 감히 언니한테 함부로 대하지 못할 거야. 단지... 언니 전 시어머니가 조금 후회하는 것 같아.”“진작 후회했어. 내가 떠날까 봐 후회한 게 아니라 제 아들이 재산을 나누는 게 아까웠겠지. 인제 이혼했으니 마음껏 생각하라고 해.”말하는 와중에 하예진에게 익숙하고도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번호를 완벽하게 기억하지 못해서 낯설었고 전에 한번 이 번호로 전화를 받은 적이 있어서 익숙했다.“하예진
“할머니, 제가 뭐가 똑똑해요, 전 진짜 멍청해요. 할머니야말로 대단하신 분이죠.”전이혁은 할머니께 아부하는 멘트를 던졌다.하지만 그것이 단순히 아부라고 할 수 없는 게, 할머니는 정말 대단한 인물이었다. 남들이 보기엔 전씨 가문 자손들은 이미 충분히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할머니의 손바닥 안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할머니는 마치 삼장법사였고 자손들은 손오공 같은 존재로 손오공이 아무리 강해도 삼장법사 앞에선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할머니, 저 진짜 꼼수 같은 거 부리지 않아요.”“그건 네 사정이고. 어떻게 하든 네 마음대로 해. 할머니는 이미 너에게 신붓감을 골라줬고, 대시하든 포기하든 그것 역시 너에게 달린 일이야. 1년이면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줬다고 생각한다.”“하지만 한 가지 경고할게. 지금까지 우리 전씨 가문에는 일편단심인 남자만 있었을 뿐 양다리를 걸치는 남자는 없었어. 네가 전씨 가문의 가풍을 망가뜨리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전이혁은 최대한 얼굴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알겠어요, 할머니. 저 이제 운전해야 해요. 도착해서 또 이야기 나눠요.”“그래, 운전 조심하고.”할머니는 전이혁에게 안전을 당부하고 전화를 끊었다.전화를 끊은 뒤, 할머니는 곧장 양씨 아저씨에게 전화를 걸었다.“양 집사, 내 생선은?”할머니는 자신이 잡은 생선을 혹시 다른 사람이 먹을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양씨 아저씨는 웃으며 대답했다.“어르신께서 구운 생선은 냄새가 정말 좋아요. 아무도 어르신의 생선을 뺏어 먹으려 하지 않으니 안심하세요.”그들 몇몇 자식들 따라 직원 숙소에서 지내는 할머니들은 전씨 할머니가 좋은 분인 걸 알고 함께 수다도 떨고 낚시도 하지만 전씨 가문의 중심인 전씨 할머니의 권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들은 전씨 할머니의 물건을 건드리는 일은 없었다. 혹시나 건드렸다가 이곳에서 일하는 자식들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었으니까.서원 리조트의 모든 직원은 훌륭한 대우와 복지를 받고 있었다. 산기슭에 지어진 숙소는 혼자인
두 사람은 함께 아침을 먹은 후, 방을 나섰다.그러자 집사는 전태윤이 다음에 올 때 묵을 수 있도록 스위트룸을 원래 상태로 정리하기 시작했다.도아영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서 다시 잠을 청했다.전이혁은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고, 할머니가 전화를 받자 물었다.“할머니, 지금 어디 계세요?”“리조트에 있어. 무슨 일이야? 할머니 보고 싶어? 그렇다면 와서 할머니랑 같이 밥 한 끼 먹자.”그러더니 할머니는 한 마디 덧붙였다.“지금 생선이 막 익었어. 냄새 진짜 좋다.”전이혁은 의아해하며 물었다.“아침부터 생선 구워 드세요?”“너한테 말한 거 아니야. 친구들이랑 얘기 중이었어. 아침부터 생선 구우면 안 돼? 그리고 지금 아침도 아니잖아. 아홉 시도 넘었네, 해가 중천에 뜨려고 하고 있어.”“오늘 날씨도 풀렸고, 할머니는 친구들이랑 낚시 갔다가 지금은 잡은 생선 구워 먹고 있어. 소풍하는 느낌이라 꽤 괜찮아.”전이혁은 그 모습이 쉽게 그려졌다. 산 아래에는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고 물 아래에는 물고기와 새우들이 헤엄치고 있었다.할머니는 가끔 몇몇 직원들의 어머니들과 함께 낚시하곤 했었다. 냇가에는 큰 나무 한 그루 있었는데 그 아래에는 돌로 된 테이블이 몇 개 있어 할머니의 한마디면 집사는 바비큐 그릴을 가져와 그들이 직접 구워 먹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할머니가 말하길, 그들은 먹는 것보다는 굽는 과정을 더 즐겼다. 비록 직원이 구워줄 수도 있었지만, 그들은 다른 사람이 구워주는 건 맛이 없다며 투덜대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 먹지 못할 때면 남은 건 직원들에게 나눠주기도 했었다.서원 리조트의 직원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할머니는 권위를 내세우며 직원들에게 막 대하지 않고 옆집 할머니처럼 따뜻하게 대해준다는 사실을.“할머니, 생선 더 잡아서 구워주세요. 저 지금 갈게요.”전이혁은 결심한 듯 할머니에게 진실을 털어놓으러 갈 생각이었다.“네가 와서 직접 잡아. 손질까지 하면 할머니가 구워줄게.”그러더니 할머니는 전이혁에게 물었다.“
“여긴 호텔 맞고, 당연히 아영 씨가 묵던 방일 수가 없죠. 어제 아영 씨가 취해서 방에 데려다줬는데 눕자마자 토하더라고요. 침대랑 바닥까지 모두 엉망이 돼서 어쩔 수 없이 다른 방으로 옮겼어요.”전이혁은 다시 자리에 앉더니 도아영에게 말했다.“아영 씨 술 취하면 정말 감당하기 힘들어요. 앞으로 술 좀 줄이는 게 좋을 것 같네요.”도아영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뗐다.“제가 전이혁 씨랑 함께 많이 마신 건 알겠는데 그 뒤로는 기억이 하나도 안 나네요. 그런데 그 술 진짜 맛있었어요. 제가 해주시로 돌아갈 때 한 박스만 챙겨줘요. 기분 안 좋을 때 집에서 한두 잔 마시려고요.”“아영 씨가 그 정도로 술이 부족하진 않을 텐데요?”전이혁은 도아영의 집에 좋은 술이 부족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그는 도아영의 말이 전혀 믿기지 않았다.“맞아요. 술이 부족한 건 아니에요. 하지만 전이혁 씨가 준 술은 부족하죠.”전이혁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그래요. 아영 씨가 돌아갈 때 한 박스 챙겨줄게요. 그리고 관성 특산물도 좀 챙길 테니 같이 가져가요. 어찌 되었든 먼 길 왔는데 헛걸음하게 하면 안 되니까요.”도아영은 웃으며 대답했다.“맞아요. 헛걸음하게 만들면 안 되죠.”그러더니 그녀는 전이혁의 옆으로 다가가 소파에 기대어 앉았다.“전이혁 씨, 여기 꿀 있어요? 머리가 아파서 그러는데 저 꿀물 좀 타 주면 안 돼요?”“아까는 참을 만하다면서요?”전이혁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일단 세수 좀 하고요. 그리고 타 줄게요. 아영 씨도 세수해요.”“목욕할 거면 아영 씨 방에 가서 해요. 여긴 우리 형이 자주 묵는 스위트룸인데, 아영 씨니까 형이 허락한 거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형수님이 부탁해도 절대 안 된다고 했을 거예요.”전이혁의 큰형과 형수님은 도아영이 할머니께서 정해준 자신의 신붓감이라는 걸 알고,이미 도아영을 가족이나 다름없이 생각하고 있었다.어젯밤, 전이혁이 그런 말을 했을 때 도아영은 살짝 기분이 상했었다. 하지만
전이혁은 얼른 도아영을 부축하더니 살짝 귀찮다는 듯이 물었다.“아영 씨, 또 왜 그래요?”“저... 화장실... ”도아영은 눈이 풀린 채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화장실 가고 싶어요?”도아영은 비틀거리며 제대로 걷기도 힘든 상태였고 전이혁의 표정은 점점 굳어지기 시작했다. 도아영을 혼자 화장실에 가게 둘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남자인 자신이 부축해서 데려가는 것도 난감한 일이었다.도아영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전이혁은 급히 그녀를 부축하며 다시 한번 물었다.“혼자 괜찮겠어요?”도아영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녀는 이미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도 모를 정도로 심하게 취해 있었다.도아영의 상태를 보아하니 전이혁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부축해 화장실로 데려가야 했다. 전이혁은 가면서도 입으로는 끊임없이 투덜거렸다.그는 도아영을 화장실로 들여보내고 도망치듯 밖으로 뛰어나왔다.전이혁은 도아영이 나올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10분이 넘도록 나오지 않았고, 노크를 해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결국, 전이혁은 걱정된 마음에 문을 살짝 열어 안을 들여다봤지만 무슨 일인지 도아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어? 어디 간 거야?’전이혁은 의심스러운 마음에 문을 활짝 열고 들어가 보았다. 그 결과, 도아영은 화장실 문 옆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그러니 문틈 사이로 도아영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었다.“이 여자 진짜!”도아영의 모습을 보자, 전이혁은 앞으로 절대 그녀에게 술을 많이 마시게 하지 않으리라고 결심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전이혁은 앞으로 자신이 도아영과 함께 밥을 먹게 된다면 그녀에게 술을 마시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 자신 말고는 도아영이 다른 누구와 함께 얼마나 마시든, 그건 전이혁이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전이혁은 안으로 들어가 도아영을 안고 나온 뒤,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그는 원래 방으로 돌아가 쉴 예정이었지만, 도아영의 상태를 보아하니 도저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결국 그날 저녁,
한편 호텔에서 도아영을 돌보던 전이혁은 전창빈의 메시지를 확인하더니 단독으로 그에게 음성 메시지로 물었다.[너 그 먼 곳까지 가서 가정 요리사를 하려고?]전창빈은 소파에 앉아 답장을 보냈다.[안 될 건 없지? 선우씨 가문의 가정 요리사 자리는 도전적이잖아. 내가 합격할 수 있을지 시험해 보고 싶었어. 다행히도 형 동생이 모든 경쟁자를 물리쳤지 뭐야. 난관을 하나둘씩 돌파했어.]전이혁이 회답했다.[요리사 하나 뽑는 걸 대통령 선거처럼 하는구먼. 얼마나 있을 계획이야? 설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명절에는 안 오려고?]전창빈이 답장했다.[설날에는 아마 못 갈 것 같아. 여기 주인이 날 해고하면 그때나 갈 수는 있겠는지.]전이혁이 피식 웃었다.[네 실력으로는 해고당할 리가 없잖아. 네가 주인을 해고하는 게 더 말이 되겠다. 이해가 안 가. 왜 그 먼 곳까지 가려고 한 거야? 넌 사업도 있는데... 어디서 요리하든 다 마찬가지일 텐데 굳이 몇천 리나 떨어진 곳까지 갈 필요가 있나? 거기 추울 텐데 너 괜찮겠어?]전창빈이 대답했다.[우리 추위를 못 타본 것도 아니고. 형도 할머니에 의해 눈이 수북이 쌓인 산으로 버려지지 않았어? 내 얘긴 그만하고... 형은 어때? 우리 미래의 형수님께 구애하기 시작했어?]‘난 벌써 움직이고 있는데 형이 아직도 움직이지 않는다면... 내가 나중에 민아 씨와 함께 할머니께 인사를 드리러 갈 때 형은 대체 어쩌려고?’전창빈은 속으로 생각했다.전씨 할머니의 지팡이가 전창빈의 등짝을 때리지 않는다면 해가 서쪽에 뜨는 거나 다름없을 것이다.[말도 마라. 정말 귀찮아. 큰형수님이 오늘 저녁에 우리한테 밥 사주셨어.]전창빈이 웃으며 회답했다.[하하! 괴로웠겠네.][내 말이. 할머니께서 나에게 정해주신 그 여자분이 큰형수님을 찾아가 하소연했더니 큰형수님이 우리 두 사람에게 밥을 사주신 거 있지.][형이 우리 형수님한테 무슨 짓이라도 했어?][아직 너의 형수님이 아니거든!]전이혁은 전창빈의 호칭을 정정했다. 그는 도아영과
“저는 앞으로 큰아가씨의 평가에 근거해서 요리 방법을 조정해 나갈 거예요. 그렇게 해야만 실력을 키울 수 있을 테니까요. 제가 만드는 모든 요리를 큰아가씨께서 만족해하시면 제가 여기에서 졸업할 수 있겠네요.”강진은 웃으며 대답했다.“그렇게 되면 큰아가씨께서 당신을 놓아주지 않을걸요.”‘평생 선우민아 씨를 위해 요리해 드리는 건 기쁜 일이지.'이 말을 입 밖으로 내뱉고 싶었지만 전창빈은 꾹 참았다. 이런 말은 입 밖에 내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내면 오해를 살 수 있으니까. 설령 전창빈이 선우민아에게 애정 공세를 하는 것이 두 번째 목표라고 해도 이런 생각을 드러내서는 절대로 안 된다.선우민아가 가업을 운영한다는 건 그녀가 매우 유능한 인물이라는 증거다. 이렇게 강한 강한 여성은 쉽게 넘볼 수 없는 상대이다.전호영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는 너무 힘들어서 하예정의 도움을 받은 끝에야 지름길을 택할 수 있었고 고현의 마음을 얻었다.강진은 그 말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걸 깨닫고는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전창빈 씨, 오늘 오후 내내 바쁘셨는데 일찍 쉬세요. 내일 아침 큰아가씨를 위해 아침식사를 준비해야 합니다. 가장 일찍 아침을 드시는 분은 큰아가씨와 민기 도련님입니다. 민기 도련님은 학교에 가야 해서 일찍 식사하시고 큰아가씨는 매일 민기 도련님을 학교에 데려다주신 후 회사에 가시니까 두 분은 늘 함께 식사하시는 편이에요. 하여 아침 7시쯤이면 큰아가씨와 민기 도련님의 아침을 준비하시면 됩니다. 다른 분들의 아침은 9시 이후에 준비하시면 돼요.”전창빈이 말을 건넸다.“그 시간대면 아침과 점심을 함께 드시는 거네요.”“어르신과 사모님은 그렇죠. 점심 무렵에 일어나셨다가 식사 후에는 외출하셔서 저녁에야 돌아오세요. 때로는 안 오시기도 하는데, 그럴 땐 제가 미리 알려드릴게요. 안 오시는 날은 창빈 씨가 쉬는 거나 마찬가지죠. 그냥 자신의 배만 채우시면 돼요.”여기에서는 사실상 선우민아 자매만 아침을 먹는 셈이다.“큰아
동생 선우정아가 어이없어하는 모습을 보며 선우민아는 미소를 지었다.“알았어. 지금은 네가 전창빈 씨를 좋아하지 않는다 치더라도 앞으로 어떻게 될진 모르는 일이니까. 앞으로 매일 여기 와서 식사해. 전창빈 씨와 접촉할 기회도 많아져야 그에 대해 더 잘 알게 될 거 아니야. 만약 그가 정말 괜찮은 사람이라면 거리가 멀어도 너희 부모님께서도 어쩔 수 없이 동의하실 거야. 혹은 전창빈 씨에게 우리 지역에서 사업을 하게 하고 여기서 집을 사도록 하든가.”선우정아는 또 벙어리가 되어버렸다.선우민아가 이렇게 말하는 걸 보니 선우정아는 앞으로는 감히 그 집에 밥 먹으러 가기도 어려울 것 같다고 여겼다.선우민아가 자꾸 자신이 전창빈을 좋아한다고 오해하고 있지 않는가.전창빈은 미래의 아내는 지금 미래 처제가 자기를 좋아한다고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전이혁은 강진을 따라 숙소로 돌아갔다. 강진은 웃으며 축하의 말을 전했다.“전창빈 씨, 이제 우리는 동료가 되었군요. 오래 함께 일했으면 좋겠습니다.”선우씨 가문의 여러 집안이 같은 대저택 안에서 함께 살고 있었지만 집안마다 독립된 공간이 있었다.선우민아의 요리사는 자주 교체되는 편이었기에 강진 역시 1년 정도는 함께 일할 사람을 원했다.요리사와 친해지기도 전에 퇴직하는 경우가 너무 많았다.전창빈도 웃으며 말을 이었다.“저도 집사님과 오래 함께 일하고 싶습니다. 앞으로 제가 요리들을 더 연구해서 큰아가씨께서 제 요리만 먹고 싶어 하도록 해야겠네요.”“큰아가씨께서 창빈 씨 요리만 고집하게 만들면 정말 대단한 거예요. 요리 대회에 나가면 ‘요리의 신'이라는 칭호를 받을 수 있을 만큼요.”선우민아의 입맛을 사로잡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전창빈은 웃으며 말했다.“‘요리의 신' 같은 건 관심 없어요. 저는 단지 제 요리 실력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해서 손님들을 만족시키고 싶을 뿐이죠.”전창빈은 그가 고용한 요리사들에게는 항상 조언을 해주곤 한다. 본인이 잘 배워야 현재 이끌고 있는 요리사들도
선우민아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저런 사업을 가진 사람을 네가 정말 좋아한다면 작은아버지와 숙모도 반대하지 않으실 거야. 다만 전창빈 씨가 관성 사람이라 우리랑 거리가 너무 멀어. 작은아버지와 숙모는 네가 먼 곳으로 시집가는 걸 아쉬워할 수도 있을 거야.”선우정아는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언니! 제가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요? 저는 정말 그런 마음 없단 말이에요. 오히려 저는 그분이 언니랑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우리 자매 일곱 명 중 언니가 맏이라 당연히 언니가 먼저 시집가야죠. 제가 언니를 앞지를 순 없잖아요.”착각인지 정말 본 건지, 선우정아는 전창빈이 선우민아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특별한 시선이 느껴졌다.그리고 전창빈은 사실 정말로 선우민아를 위해 온 거였다.아니, 정확히는 선우민아의 까다로운 입맛을 만족시켜주기 위해 온 것이다. 그녀를 만족시킬 수 있다면 다른 손님들도 분명히 만족시킬 수 있을 테니까.선우정아는 생각했다. 선우민아처럼 입맛이 까다로운 사람은 많지 않을 거라고.선우민아는 손을 뻗어 동생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우리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잖아. 게다가 사촌 자매이기도 하기 때문에 네가 나보다 먼저 시집간다고 해도 전혀 문제가 안 되거든. 나는 당분간 시집갈 생각 없어. 만약 고려한다 해도 이 지역의 사람일 거야. 생각해봐, 민기와 민수는 아직 몇 살밖에 안 됐는데 애들이 커서 사업을 이어받을 수 있을 때까지 적어도 20년은 더 기다려야 되잖아. 이 20년 동안 우리 자매는 계속 회사를 떠받쳐야 해. 만약 우리가 먼 곳으로 시집가면, 누가 회사를 이끌겠어? 셋째와 넷째에게 그런 능력이 있는지 지켜봐야 할 거야 아니야.”셋째 동생과 넷째 동생도 이제 성인이 되어 사업을 배우기 시작했지만 아직은 거대한 가업을 떠받칠 능력이 되지 못했다.하여 선우민아는 자연스레 먼 곳으로 시집갈 생각이 없었다. 시집을 간다 해도 A시의 남자에게 시집갈 것이다. 그래야 시집가서도 친정 회사를 계속 관리할 수 있으니까.앞으로 선우민기
전창빈이 말했다.“행동으로 보여드리죠.”선우정아는 눈썹을 치켜들며 웃었다.“전이혁 씨는 정말 자신만만하신가 봐요.”선우민아는 선우정아를 한 번 흘겨보더니 전창빈에게 물었다.“그럼 언제부터 출근 가능하세요?”“이 자리를 위해 온 만큼 언제든지 가능합니다.”선우민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내일부터 정식으로 출근하세요. 강 집사님께서 이미 숙소를 준비해 뒀을 테고 월급은 내일부터 계산됩니다. 한 달의 수습 기간이 있고 수습 기간 중 급여는 일당으로 지급됩니다. 공짜로 일을 시키진 않을 거예요.“누구든 마찬가지로 하루 일하면 하루 급여를 계산해 주었다.“집사님께서 어제 이미 숙소를 준비해 주셨습니다. 급여는 어떻게 계산되든 상관없습니다. 전 도전을 위해 온 거지 월급을 위해 온 게 아니니까요.”전이혁은 돈이 부족한 게 아니었다. 아내만 부족할 뿐...“좋아요. 지금은 숙소로 가서 쉬세요. 우리 집에서의 하루 세끼 준비 시간은 집사님께서 알려주실 거예요. 아침을 제외한 점심과 저녁 식사 준비 시간은 변함없어요.”선우씨 가문의 사람들 아침 식사는 각자 일어나는 시간이 다르기 때문에 딱히 정해진 시간이 없었다.전창빈이 대답했다.“알겠습니다. 집사님께 여쭤보겠습니다.”그는 다시 모두에게 고개를 끄덕인 뒤 자리를 떠났다.전창빈이 떠나자 선우민아도 일어서서 가족들에게 말했다.“저는 아직 처리할 일이 있어서 나가봐야 할 것 같아요. 민기한테는 주말에 데리고 나가주겠다고 전해주세요.”선우민기는 그녀보다 스무 살이나 어렸기 때문에 남동생을 아들처럼 키웠다.선우민기는 선우민아를 무서워하면서도 잘 따랐다.선우정아도 그녀의 언니를 따라 일어섰다.“저도 일 보러 갈게요.”한경주가 딸에게 당부했다.“접대할 때 술 너무 많이 마시지 마. 몸에 해로워.”“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5년 전의 제가 아닌걸요.”선우민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회사를 막 이어받았을 때 그녀는 많은 사람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그땐 위엄도, 경험도 없었고 회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