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유독 서은석의 집만 달랐다.자식 셋 중 결혼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심지어 지금은 셋 다 만나는 사람조차 없었다.서은석의 어머니 문정은은 늘 빨리 결혼하라고 재촉했지만 진전이 없었다.서은석은 다들 마음이 끌리는 결혼 상대를 만나지 못한 거라고만 생각했다.그런데 이제 와 돌이켜 보니 자식들 결혼에 관한 문정은의 태도가 어딘가 이상했다.문정은은 자주 이렇게 말하곤 했다."너무 까다롭게 고르지 마. 너희 조건이 좋기는 해도 결혼은 물건 사고파는 장사가 아니잖니.""마음에 드는 사람이면 얼마든지 데려오렴.""집에서는 누구를 데려와도 반대하지 않을 테니까."큰형과 둘째 누나도 예전에 연인을 집에 데려온 적이 있었다.하지만 둘 다 결국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서은석은 혼란스러웠다."스님 말씀은 어머니께 큰 문제가 있다는 뜻입니까?""문제라기보다 인과와 업보라고 해야겠지요. 사람은 오랫동안 가족의 영향을 크게 받기 마련이니까요."스님은 농담하듯 가볍게 말했다."형제분들도 아직 서른은 넘지 않았겠군요. 그 나이를 넘기면 상황이 한결 나아질 겁니다. 대표님도 마찬가지예요. 사람이 서른이 넘으면 자기 운을 따르게 되니 집안에서 물려받은 업보의 영향도 줄어들지요."서은석은 더욱 막막했다.서른이라고?설마 그 나이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 나아진다는 걸까?그때가 되면 송원영이 서은석을 상대해 줄지는 둘째치고, 이미 다른 사람을 만나 결혼해 아이까지 낳았을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송원영이 웨딩드레스를 입고 다른 남자와 결혼식장에 들어서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심지어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을 수도 있었다.상상만으로도 누군가 심장을 세게 내리친 듯 가슴이 아팠다.송원영을 생각보다 훨씬 더 좋아하고 있었다.서은석이 허탈하게 쓴웃음을 지었다."그때까지 기다릴 수 있다 해도 원영이는 이미 저를 잊었을 겁니다."서은석도 자존심이 있었다.처음에는 포기할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싸울 때마다 왜 늘 자신이 먼저 고개를 숙여야 하는지 의심한 적 있었다.
오늘 일을 겪고 서은석이 가장 먼저 떠올린 곳은 뜻밖에도 이 사찰이었다.아직 상황을 되돌릴 여지가 있는지 알고 싶었다.그런데 스님의 말을 듣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더 복잡해졌다.이 모든 게 어머니의 문제라는 건 분명히 알고 있었다.하지만 어머니가 도대체 왜 그러는지는 또 알 수 없었다."그러니까 상대가 원영이가 아니었어도 어머니는 어떻게든 저희를 갈라놓으려 했을 거라는 말씀이십니까?""그렇습니다. 서 대표님이 연애를 할 때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입니다."서은석은 바싹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고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단숨에 비웠다.쓰디쓴 차가 배 속으로 들어가자 온몸 구석구석 쓴맛이 퍼졌다.차가 얼마나 쓴지 마음속까지 쓴맛이 배어드는 것 같았다.어머니가 송원영에게 했던 모진 말과 영문도 모르고 반사적으로 어머니를 두둔했던 자신의 태도가 떠올랐다.서은석은 스스로 뺨이라도 후려치고 싶었다.하지만 뺨 몇 대 때린다고 한들 송원영이 쉽게 마음을 돌릴 리 없었다.송원영은 고집이 아주 센 사람이었다.서은석은 송원영이 사소한 잘못도 그냥 넘기는 법이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강인하고 단호한 사람이었다.처음에는 서은석을 생각해서 어머니의 모진 말을 다 참았을지도 몰랐다.그러나 서은석의 태도가 중립을 벗어나는 순간, 송원영은 두 번 다시 돌아보지 않을 것이다.오는 내내 서은석은 다급한 나머지 아무 데나 매달린다며 스스로를 비웃었다.하지만 달리 방법도 없었다.오죽하면 여기까지 왔을까.스님이 아침부터 오늘 찾아올 줄 알고 있었다는 것도 예상 밖이었다.서은석은 살면서 이렇게 불안했던 적이 없었다.스님이 입을 열었다."서 대표님, 이 고비를 넘길 수 있을지는 두 분의 관계만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대표님 자신입니다.""대표님의 인생에서 어떤 과제를 마주해야 하는지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스님은 태연하고 여유로웠다.차를 한 잔 더 따라 서은석 앞으로 살며시 밀어 주었다.눈앞의 돌 테이블은 오랜 세월 비바람을 견디
그래도 어린 제자는 속으로 투덜거렸다.이 시간이면 산길을 오르기도 힘든데 대체 누가 찾아온다는 걸까?바로 그때 계단 아래에서 손전등 불빛이 나타났다.길바닥을 비추는 강한 불빛에 어린 제자는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어린 제자는 순간 눈이 휘둥그레졌다."스승님, 기다리시던 분이 올라오시는 것 같아요!""그래, 들어오라고 하거라."산을 오르는 사람은 어지간히도 급한 모양이었다.계단을 세 칸씩 성큼성큼 올라 금방이라도 뛰어오를 기세였다.문 앞에 도착했을 때는 숨이 턱까지 차고 이마에서 굵은 땀방울이 뚝뚝 떨어졌다.어린 제자가 안을 가리켰다."스승님께서 아침부터 계속 기다리셨어요. 드디어 오셨네요."서은석은 숨을 몰아쉬었다. 너무 급히 올라온 탓에 폐 속 공기가 바닥난 기분이었고 콧속에는 피비린내가 가득했다.다른 데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나무 아래에서 바둑을 두는 스님에게 다가갔다."스님,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 왔습니다."스님이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앉아서 숨 좀 돌리시지요. 묻고 싶으신 것도 서두른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마주 앉은 서은석은 심장이 쿵쾅거렸다.급하게 산을 올라온 탓인지, 며칠 사이 벌어진 일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서인지 서은석도 알 수 없었다.서은석과 송원영이 이별한 것이다.이번에는 예전과 달랐다.어쩌면 되돌리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걸 서은석도 알고 있었다.서은석은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거칠게 헝클었다.한껏 풀이 죽은 얼굴에 말소리에도 힘이 없었다."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집에서…… 제가 여자친구와 만나는 걸 반대합니다.""분명 좋은 사람인데, 왜 우리 집에서는 받아 주지 않는 걸까요?"스님이 서은석을 달랬다."서 대표님은 어떤 여인을 만나든 연애 때문에 마음고생을 면하기 어려운 운명입니다. 상대가 누구든 집에서는 반대할 겁니다."서은석은 멈칫했다.생각해 보니 사실이었다.전에 집에서 소개해 준 여자들조차 어머니는 온갖 흠을 잡았다.서은석도 크게 관심이 없어 다시 연락하지 않았기에 어머니도 앞
다음 날,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칠 무렵 권지헌은 혼자 산에 올랐다.말끔하게 차려입은 옷은 이슬이 흠뻑 맺혀 있었다.권지헌은 멈추지 않고 성큼성큼 올라가 사찰 문이 열리자마자 가장 먼저 들어섰다.어린 제자가 권지헌을 보고 두 손을 모았다."권 대표님, 스승님께서 오실 줄 아시고 기다리고 계셨습니다."권지헌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제자를 따라 들어가니 나무 아래 앉은 노스님이 인자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권 대표님, 바라던 일이 이루어지셨겠군요. 축하드립니다.""감사합니다. 이번에는 갓 태어난 아이를 위해 평안을 비는 부적을 받으러 왔습니다."스님이 옆에 놓인 작은 파란 주머니를 집어 들었다."이미 준비해 두었으니 마음 놓으십시오."권지헌이 옆에 앉으며 물었다."스님은 제가 올 줄 어떻게 아셨습니까?"스님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허허 웃었다."대표님뿐 아니라 전에 이곳에 오셨던 분도 찾아올 겁니다."스님은 이런 일을 늘 훤히 꿰뚫고 있었다.권지헌은 물을 한 잔 마셨다.미리 생각해 둔 질문을 꺼내기도 전에 스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어허, 묻지 않으셔도 됩니다."아이 외에 권지헌이 궁금해할 것이 있다면 당연히 허설아의 일이었다.스님은 웃으며 찻잔을 들어 권지헌의 잔에 가볍게 부딪쳤다."전에도 말씀드렸지요. 사모님께서는 이미 여러 고비를 넘기셨으니 앞으로는 만사가 순조로울 겁니다.""아이의 앞날도 굳이 물으실 필요 없습니다.""믿으셔야 합니다. 대표님 아이라면 절대 뒤처지지 않고 남다르게 뛰어난 인물이 될 게 분명합니다."허설아 이야기를 듣자마자 권지헌의 표정이 눈에 띄게 풀렸다.권지헌이 가장 걱정했던 건 그것뿐이었다.아이야 두 사람의 아이인 만큼 앞날이 순탄하리라는 건 권지헌도 의심하지 않았다.다만 건강하고 자유롭게 자라기를 바랐다.권지헌은 신도 부처도 믿지 않았다.그런데도 허설아와 두 아이만큼은 집착할 정도로 더 많은 행운이 따르기를 바랐다.자신의 운을 떼어 줘야 한대도 기꺼이 내줄 수 있었다.스님의 말에 권
"정 마음에 안 들면 아이가 성인이 된 뒤에 본인이 직접 바꾸게 하면 돼."허설아는 가슴이 뭉클했다.권지헌은 어떻게든 허설아를 안심시키려고 갖은 방법을 생각하곤 했다.허설아는 아기의 보드라운 볼에 얼굴을 맞대고 눈을 감았다.그리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속삭였다.'앞으로 네 이름은 연우야. 너한테는 세상에서 제일 좋은 아빠와 엄마, 누나가 있어.'-출산 후 6시간 동안은 물도 마실 수 없었다.권지헌은 내내 곁을 지키며 이따금 면봉에 물을 묻혀 허설아의 입술을 적셔 주었다.거의 모든 과정을 함께하며 퇴원하는 날까지 쉴 틈 없이 움직였다.허설아는 한결 개운하고 컨디션이 좋아 보이는데 오히려 권지헌이 눈 밑이 새카맸다.병원에 있는 며칠 동안 아이를 직접 돌봐 보니 사업보다 훨씬 어렵다는 걸 깨달았다.제 아이가 아니었다면 몇 번이나 성질을 부렸을 것이다.그러다가도 연우가 웃어 주면 화낼 마음이 싹 사라졌다.생명이란 참 신기했다.산후조리원에 도착하자 허설아에게 축하 메시지가 잇따라 쏟아졌다.고아현도 메시지를 보내왔다.위험한 고비를 무사히 넘기고 이제 말도 할 수 있게 되었다며 출산을 축하했다.허설아는 처음에는 조금 의아했다.퇴원해서 산후조리원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다들 어떻게 이렇게 빨리 알았을까?휴대폰을 열어 보고서야 아침에 권지헌이 SNS에 글을 올렸다는 걸 알았다.권지헌의 SNS는 원래 아주 깔끔했다.허설아와 연희 이야기를 빼면 나머지는 전부 회사 경영과 관련된 글이었다.올해 올린 글은 거의 다 권율 그룹의 신규 혁신 프로젝트였다.올해 들어 사생활과 관련된 글은 이번이 처음이었다.아기 사진도 한 장 올렸는데 작은 손이 허설아의 손가락 하나를 꼭 움켜쥐고 있는 사진이었다.[고생했어, 자기야.]일상을 무심히 기록한 듯한 게시물이었다.그런데도 좋아요가 아주 많이 달려 있었다.다들 이렇게 빨리 소식을 접할 만했다.허설아도 SNS에 글을 하나 올렸다.권지헌이 연우를 안고 서성이며 달래는 뒷모습을 몰래 찍은 사진이었
권지헌은 아기를 품에 안고 조용히 느껴 보았다.간호사가 너무 긴장하지 말라며 자세를 바로잡아 주었다.권지헌이 아기를 안고 들어오는 걸 본 박희수는 깜짝 놀라 서둘러 달려가 아기를 받았다.그제야 권지헌은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는 걸 알아차렸다.힘 조절을 잘못해서 품 안의 말랑 콩떡 같은 아기가 불편할까 봐 겁이 났다.박희수는 아기를 허설아 옆에 눕혔다.출산 직후 의사가 아기의 얼굴을 허설아의 뺨에 잠깐 맞대게 한 뒤 바로 데려갔었다.이제야 허설아는 힘을 내 눈을 뜨고 아기를 볼 수 있었다.연희가 조심스레 곁에 서 있었다."엄마. 이게 내 동생이야? 왜 이렇게 못생겼어?"허민정이 웃으며 말했다."갓 태어난 아기들 중에선 네 동생이 아주 잘생긴 편이야.""나도 태어났을 때 이렇게 못생겼어?""그럼."허민정은 연희를 안고 몇 년 전 연희가 태어났을 때 찍은 사진을 보여 주었다.볼이 빨갛고 아직 눈도 뜨지 못한 채 쭈글쭈글한 모습이었다.연희는 사진 속 못생긴 아기가 자기라는 걸 도저히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허민정이 사진을 몇 장 더 넘겼다.한 달쯤 되었을 때는 연희도 아주 예쁘게 변해 있었다.그제야 연희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럼 동생도 내가 태어났을 때보다 조금 못생긴 거네. 아빠, 내가 태어났을 때 아빠는 왜 없었어?"권지헌이 동생을 안고 들어오는 걸 보던 연희는 문득 아빠를 알게 된 시기와 자신의 나이가 맞지 않는다는 게 떠올랐다.권지헌이 미안한 얼굴로 사과했다."그때는 아빠가 엄마와 연희 곁에 없었어. 정말 미안해.""사과했으니까 용서해 줄게. 동생 이름은 뭐야?"허설아도 권지헌을 바라보았다.다들 이름을 이미 지었다고만 할 뿐 허설아에게는 알려 주지 않았다.권지헌이 천천히 말했다."연우. 허연우."허설아는 뜻밖이라는 듯 권지헌을 바라보았다.눈동자가 살짝 움츠러들었다."왜 이 이름이야?""연우의 '우'는 아름다운 옥을 뜻해. 이 아이도 세상에 둘도 없는 보물처럼 귀하고 완전한 사람으로 자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