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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Author: 빛나냥
대학 시절, 강지연은 권지헌을 보러 건영대에 자주 들락날락했다.

매번 갈 때마다 오빠인 강시우를 만나러 왔다는 핑계를 대곤 했다.

그때 권지헌 곁에 늘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는 여자를 종종 보곤 했다.

키가 크고 몸매도 좋고 화려한 옷차림에 한낮의 태양처럼 찬란하고 눈부신 여자는 누가 봐도 귀하게 자란 티가 났다.

강지연은 강시우를 통해 그 여자가 바로 권지헌 여자친구이자 미대생인 허설아라는 걸 알게 되었다.

차갑고 고고하고 기품 넘치는 권지헌이 보기만 해도 속물 같고 제멋대로인 재벌 집 딸과 사귈 줄은 아무도 몰랐다.

강시우는 권지헌이 가난하긴 하지만 허설아가 돈을 펑펑 쓰면서 만나는 거라 했고 강지연은 그 말을 믿었다.

그러다 언젠가 협력하면서 권지헌이 사실은 권씨 가문 장손이고 미래 권율 가문의 후계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강지연은 권지헌과 허설아가 잠깐 즐기는 사이일 뿐이라고 확신했다.

나중에 권지헌에게서 그런 얘기도 들었지만 웬일인지 강지연은 전혀 기쁘지 않았다.

권지헌이 고개를 들고 싸늘하게 쳐다보았다.

강지연은 몸서리를 쳤다.

권지헌이 젓가락을 탁 내려놓고 일어나며 말했다.

"올라갈게요. 앞으로 꽃 선물할 거면 내 핑계 대지 마요."

박희수는 언짢은 기색으로 소리쳤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지연이에게 꽃 좀 선물한 게 뭐가 그렇게 못마땅해?"

권지헌은 이미 위층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강지연의 눈에는 미련이 가득했다.

박희수가 강지연의 손을 잡고 위로했다.

"지연아, 방금 네가 말한 허설아라는 사람 누구야?"

박희수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강지연은 방금 말실수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모처럼 권지헌을 만났는데 화나게 한 것이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오래전 동창이에요. 어머님, 방금 지헌 오빠에게 권율 그룹에서 인턴으로 일하고 싶다는 말 못 했는데 혹시 반대하는 건 아니겠죠?"

"그게 뭐 어렵다고 그래. 이따가 내가 말해줄게."

"고마워요, 이모."

-

위층, 권지헌 서재.

컴퓨터 화면에는 그룹 재무 보고서가 롤링되며 넘어가고 각 프로젝트팀의 정보가 일목요연하게 보였다.

권지헌의 시선은 저도 모르게 증가율이 가장 높은 허설아팀에 시선이 향했다.

낮에 본 허설아는 많이 말라 있었다.

전에도 표준 체형인데 종종 다이어트한다고 떠들고 했다. 그런데 지금은 어깨와 등이 겨우 A4 용지 한 장 정도로 말라 있었다.

프로젝트 기획안 옆에 적힌 담당자의 이름이 허설아인 것을 본 순간 미묘한 감정 변화가 생겼다.

그런데 진짜 허설아일 줄이야.

예술 전공인 허설아는 전에도 공부에 큰 흥미가 없었다.

학교 다닐 때도 늘 어차피 집에 돈이 평생 써도 남을 정도로 많아서 절대 일을 안 할 거라고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심지어 권율 그룹에서 일한다는 게 조금 놀라웠다.

더 놀라운 건 허설아의 기획안이 모든 팀 중 제일 뛰어나다는 사실이었다.

애초에 허설아와 사귄 건 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허설아가 죽어라 매달린 탓에 동의한 것이었다.

어차피 대학 졸업 후 권율 그룹으로 돌아가면 허설아와 헤어질 생각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내기는 의미가 달라졌다.

열정적이고 해맑고 유연하게 흔들리는 꽃 같은 허설아만 보면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사람들 앞에서는 도도한 허씨 가문 아가씨가 권지헌 앞에서는 유난히 온순하고 얌전했다.

두 사람은 수도 없이 광란의 밤을 보냈고 놀랍게도 허설아가 권지헌의 모든 취향을 완벽하게 만족시켜 줄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권지헌은 마치 열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떼어낼 수 없을 정도로 허설아가 좋아졌다.

권지헌은 미래를 계획하며 심지어 졸업 후 먼저 헤어졌다가 허설아에게 정식으로 정체를 밝히려고 했다.

허설아가 용서하지 않으면 허설아에게 아주 아주 많은 돈과 사랑을 주려 했다.

전에 무슨 일이 생기면 허설아의 유일한 해결 방법은 바로 돈이었다.

수업은 대리 출석을, 과제는 대리 작성을, 택배조차 사람을 시켜 대리 수령했다.

허설아는 돈이면 뭐든 다 된다고 믿었다.

권지헌에게 사귀자고 할 때도 당당하게 돈을 줄 수 있다고 말했었다.

다만 허씨 가문 열 개를 합쳐도 권씨 가문 1년 신탁 비용에 미치지 못했다.

그런데 버림받은 쪽은 권지헌이었다.

허설아는 미련도 없이 매정하게 떠났다.

권지헌의 모든 연락처를 차단하고 짐을 옮기고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했다.

권지헌은 나중에 다른 사람에게 물어서야 허설아가 해외로 갔다는 걸 알게 되었다.

권지헌에게 말 한마디 없이 떠난 것이다.

강시우조차 허설아가 출국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허설아는 현질로 풀세팅해서 장비가 무적인 게임 아이디까지 강시우에게 팔아버렸다.

권지헌은 기가 막혔다.

먼저 다가와서 권지헌의 세계에 기어이 비집고 들어오더니 말 한마디 없이 사라진 것이다.

너무 어이없었다.

권지헌은 허설아가 건영대 비주얼 원탑이자 어려서부터 떠받들려 살아온 권씨 그룹 후계자인 자신을 이렇게 두고 갈 거라고 믿지 않았다.

어떻게든 허설아를 찾아보려 했지만 전송한 모든 메시지는 끝내 묵묵부답이었다.

심지어 허설아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 싶어 권씨 가문의 인맥을 미리 동원해 찾을 생각까지 했다.

그런데 옆 침대에서 강시우가 조용히 수화기를 움켜쥐고 전화받는 소리가 들렸다.

허설아의 전화였다.

그 순간, 권지헌 마음속엔 들불처럼 번지는 증오만 가득했다.

권지헌의 이성을 집어삼키고 자신마저 태워버릴 기세였다

그 통화는 권지헌을 한없이 비웃고 조롱하는 것 같았다.

그 뒤로 누구도 허설아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회사를 물려받는 건 일찍 계획된 일이었다.

다만 허설아가 권율 그룹에 있을 줄은 몰랐다.

허설아를 본 순간 권지헌은 굳어버렸다.

허설아가 지금 예전보다 못 하게 지낸다고 속 시원하진 않았다. 오히려 가시가 박힌 듯 답답했다.

그리고 권지헌과 헤어지자마자 결혼했다니.

권지헌은 허설아가 다른 남자와 결혼하기 위해 자신과 급하게 헤어진 게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그리고 아이까지 낳았다.

전에 허설아는 아이를 안 좋아한다고 늘 말했다. 둘만의 세상을 충분히 즐기고 아이를 고민하겠다고 했다.

안 좋아하는 건 아마 권지헌의 아이가 아니었을까.

다른 남자의 아이는 임신하자마자 낳는 걸 보니.

가슴 한가운데 무거운 바위가 짓누르는 것처럼 설명할 수 없는 감정에 숨이 턱 막힌 권지헌은 발을 들어 책상 다리를 탁 걷어찼다.

허설아, 아주 대단해.

-

서재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박희수가 접시를 들고 들어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너 지연이 마음에 안 들어? 평소에 강시우랑도 사이가 좋아서 사돈 맺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박희수는 밥도 먹지 않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아들이 걱정되었다.

다른 집안이었으면 권지헌의 이런 성격을 받아주기 힘들 것이다.

박희수와 권지헌은 가까운 모자 관계가 아니었다.

권지헌은 어린 시절 권호성 옆에서 자랐고 성인이 된 후에는 일 때문에 바빴다.

최근에는 후계자 자리까지 넘겨받으면서 더 차가워지고 위압감이 느껴졌다.

박희수는 이런 아들이 왠지 조심스러워졌다.

권지헌은 젓가락을 들고 밥을 먹으며 말했다.

"마음에 안 드는 게 아니라 싫어요."

권지헌은 이런 부류의 여자들이 익숙했다.

자신을 향한 노골적인 욕망이 번뜩이는 모습이 진저리가 났다.

문득 다른 눈동자가 떠올랐다. 과거에는 부드러웠지만 지금은 차갑기만 한 눈은 권지헌의 마음을 싸늘하게 식어가게 했다.

"다음부터 집에 손님이 있으면 미리 얘기해요."

손님이 있었으면 집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게 무슨 말이야? 아무리 싫어도 아가씨한테 예의는 갖춰야지!"

그렇게 자리를 박차고 가버리니 박희수도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권지헌은 짧게 답했다.

"손님인지 나인지 알아서 선택해요."

박희수는 가슴 속에서 치미는 분노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한참 뒤, 박희수가 입을 열었다.

"너 같은 성격 참아줄 여자애가 몇이나 있겠어. 지연이가 너 좋아한다는데 그게 그렇게 싫어?"

권지헌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입가를 닦았다.

"네."

고개를 든 박희수는 권지헌 목에 남은 흔적을 발견했다.

"너 목에 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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