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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Author: 빛나냥
허설아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지금 권지헌의 얼굴이 얼마나 일그러져 있는지 알 리 없었다.

그저 뚫어지게 쳐다보는 권지헌의 시선에 온몸이 굳는 듯했고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만 싶었다.

허설아는 말을 마치기 무섭게 탕비실을 빠져나왔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한 허설아의 뒷모습을 보던 권지헌이 커피잔을 꽉 움켜쥐었다.

허설아는 원래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건 쓰다고 마시지 않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렇지 않게 마시고 있었다.

실핏줄이 가득한 눈으로 점점 사라지는 허설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권지헌은 심호흡으로 감정을 추슬렀다.

그리고 짧게 욕설을 내뱉었다.

사무실로 돌아온 권지헌은 휴대폰을 꺼내 강시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헌아, 무슨 일이야?"

"허설아, 누구랑 결혼했어?"

전화기 너머 강시우는 권지헌의 의도를 전혀 알 수 없는 물음에 얌전히 답할 수밖에 없었다.

"나도 몰라. 외국에서 혼인신고 했대…… 임신한 걸 알고 그냥 결혼했다던데 나도 설아 남편 본 적 없어."

"언제쯤 일이야?"

강시우는 잠시 우물쭈물 망설이다가 가까스로 답했다.

"그, 그게 너랑 헤어진 뒤에 설아가 남편이랑 같이 해외에 갔다고 들었어……"

강시우도 더는 감히 말하지 못했다.

권지헌과 헤어지자마자 초고속 결혼과 임신이라니.

아무리 권지헌이 허설아를 좋아하지 않았어도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웠을 수 있다는 건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강시우가 무언가 더 말하려는데 권지헌이 먼저 전화를 끊었다.

전화가 끊긴 신호음에 강시우는 도리어 안도의 숨을 쉬었다.

권지헌이 계속 캐물으면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한참 고민하던 강시우는 결국 허설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지헌이가 네 남편 얘기 물어봤어."

바로 허설아의 답장이 도착했다.

"안타깝게도 우리 남편은 게이가 아닐 거야."

강시우는 말문이 막혔다.

'그게 포인트가 아니잖아?'

두 사람이 어쩌다 또 만났는지 묻고 싶었지만 잠시 고민하던 강시우는 진흙탕에 발을 들이지 않기로 했다.

-

퇴근할 때까지 권지헌은 메일을 받고도 잠잠했다.

어젯밤 일이 떠올리자 여전히 가슴이 철렁한 허설아는 칼같이 정시에 퇴근하기로 했다.

허설아가 컴퓨터를 끄는 걸 본 안초희가 놀라며 물었다.

"오늘은 야근 안 해?"

"안 할래. 집에 가서 연희랑 놀아주려고."

두 사람이 웃고 떠들며 엘리베이터에 들어서는데, 하루 종일 다시 마주치지 않았던 권지헌을 하필이면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쳤다.

안초희와 허설아는 웃음기가 싹 가신 채 잔뜩 긴장해서 옆에 서 있었다.

다행히 권지헌은 두 사람을 신경 쓰지 않고 이어폰을 낀 채 통화 중이었다.

"알았어요. 오늘은 꼭 같이 식사할게요. 네, 걱정 마세요. 장미 사 가는 것도 잊지 않았어요."

잔잔한 물결처럼 부드럽고 다정한 말투에서 상대가 권지헌이 아끼는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3년 전, 허설아도 침대 위에서나 권지헌이 이렇게 다정하게 달래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전화기 너머의 상대는 아마 권지헌 목에 흔적을 남긴 여자일 것이다.

엘리베이터 안에서의 몇십 초가 눈 깜짝할 새에 흐르고 권지헌이 먼저 밖으로 나갔다.

안초희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부러운 듯 말했다.

"대표님 방금 여자 친구랑 통화하신 거겠지? 저렇게 다정하시다니. 아무리 냉정한 남자도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면 한없이 부드러워지네."

허설아는 잠시 멈칫하다가 무의식적으로 답했다.

"그렇겠지."

차에 태워주겠다는 안초희의 호의를 정중히 거절한 허설아는 비좁은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지하철 안은 사람들로 붐볐다.

갑자기 강시우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아마 조민규가 직원 정보를 소개할 때 가족 상황을 언급한 모양이었다.

전에도 다른 한 상사가 예쁘장하고 도도한 남다른 분위기의 허설아는 집안도 좋고 돈이 부족하지 않을 거라 생각해서 승진이나 월급 인상 기회에 허설아를 배제한 적 있었다.

그때도 조민규가 기회를 얻을 수 있게 도와주었기에 허설아는 너무 고마웠다.

그런데 권지헌이 남편 얘기를 물은 건 조금 뜻밖이었다.

허설아의 남편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전에 연동근을 데리고 해외로 치료하던 비행기 안에서 우연히 같은 병을 앓는 환자를 만난 적 있었다.

양가 어른의 마지막 바람은 자식들이 결혼하는 것이었다.

허설아와 상대 환자의 아들은 병상 앞에서 양가 아버지에게 꼭 결혼할 거라고 약속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환자는 세상을 떠났고 허설아도 그 남자와 오랫동안 연락을 하지 않았다.

혼인 상황은 허설아가 대충 둘러댄 말일 뿐이었다.

대외적으로 허설아는 항상 유부녀였다.

그때, 허설아는 이미 연희를 낳은 뒤였다.

이 사회에서 남편이 무책임하고 아이를 신경 쓰지 않는 여성은 동정의 대상이었다.

혼전 임신으로 아이 아빠조차 찾지 못하는 여자는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기 마련이었다.

허설아는 자신을 향하는 시선은 상관없었지만 사람들이 연희를 색안경을 끼고 보길 원하지 않았다.

쓸 일은 없다고 해도 아이에게 명의상의 아빠가 필요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허설아는 권지헌에게 연희의 존재를 절대 알리지 않을 것이다.

권씨 가문 같은 집안은 연희의 존재를 알게 되면 허설아에게서 아이를 빼앗아 가거나 모녀를 모욕하거나 아이를 홀대할지도 몰랐다.

어떤 가능성이든 열려 있었다.

권씨 가문은 딸인 연희를 빼앗아 가도 귀하게 대접하지 않을 것이다.

허설아는 재벌가에서 아이를 두고 싸우는 모습을 너무 많이 봐서인지 마음 한구석에 늘 가시처럼 박혀 있었다.

권지헌의 목적이 무엇이든 허설아는 상관없었다.

허설아에게 중요한 건 딸 연희뿐이었다.

-

권씨 가문.

권지헌은 들고 있던 흐드러지게 핀 장미꽃 다발을 식탁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박희수에게 건네며 짧게 말했다.

"엄마가 원하던 꽃이에요."

박희수는 깜짝 놀라서 꽃을 받으며 불만을 토로했다.

"내가 원하던 거라니? 귀국하고 나서 계속 집에 돌아오지도 않고 혹시 엄마는 잊은 거야?"

"손 씻고 올게요."

권지헌은 말하고 바로 돌아서서 화장실로 향했다.

"못된 녀석!"

박희수는 투덜대면서도 이내 다시 미소를 띤 채 들고 있던 꽃다발을 옆에 있는 강지연에게 건넸다.

"자, 지헌이가 산 꽃이니 네가 받아. 이런 생화는 젊은이들이 들고 있어야 어울리지, 난 이제 너무 늙었어!"

강지연의 예쁘장한 얼굴에 수줍음과 놀라움이 가득 번졌다.

강지연은 꽃을 받지 않고 손을 씻고 나오는 권지헌을 힐끗 쳐다보며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

"이모, 지헌 오빠가 이모한테 선물한 건데 제가 받으면 안 되죠. 그리고 이렇게 아름다우신데 무슨 나이가 많다고 그러세요?"

박희수는 눈꼬리가 휘어지게 웃었다.

권지헌의 차가운 말보다 강지연의 살가운 말이 훨씬 듣기 좋았다.

"받아, 원래 너 주려고 사라고 한 거야."

강지연이 밥 먹으러 온다는 말에 권지헌에게 꽃을 사 오라고 한 것이었다.

모든 것이 완벽한 권지헌이지만 연애를 하지 않는 게 문제였다.

평소에도 여자에 전혀 관심이 없어 보여서 박희수는 애간장이 타기 시작했다.

권씨 가문 장남이자 장손인 권지헌은 권씨 가문 큰아들의 외동아들이었다.

권씨 가문 어르신 권호승은 아들이 셋 있었고 슬하에 손자 넷과 손녀가 하나 있었는데 결혼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중 어린 동생들은 그렇다 쳐도 나이가 좀 있는 동생들은 큰형인 권지헌이 결혼하지 않았는데 먼저 갈 수 없다며 버티고 있었다.

박희수도 하나뿐인 아들인 권지헌이 빨리 가정을 꾸려 대를 이어주기를 바랐다.

강지연 눈에는 온통 권지헌뿐이었다.

권지헌은 분위기가 남달랐다.

정장을 벗자 안에 입고 있던 조끼가 완벽한 몸매가 도드라지게 했고 손짓과 행동 하나하나가 형용할 수 없는 고귀한 분위기를 풍겼다.

“지헌 오빠, 이 꽃… 내가 받아도 돼?”

"네 멋대로 부르지 마."

권지헌이 고개를 들고 빨개진 강지연 얼굴을 마주 보았다.

"너한테 주는 꽃 아니야. 갖고 싶으면 직접 사."

강지연은 불쌍한 척 아랫입술을 깨물며 불쑥 말을 꺼냈다.

"지헌 오빠, 허설아 아직도 기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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