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다른 도시 매장과 쇼핑몰의 계약 협의가 갑자기 잡혔는데 허설아는 임신 후기였고 권서진은 서경시로 결혼식 세부 사항을 논의하러 떠난 터라 송원영 혼자서는 도저히 일손이 부족했다.김지유의 업무량도 부쩍 늘었다.노현우가 출장 장소와 시간을 물었다."그럼 내가 찾아갈까요? 나 주말엔 시간 많아요."김지유는 휴대폰을 손에 들고 화면 속 메시지를 보다가 저도 모르게 씩 웃었다. "노 대표님이 번거롭지 않다면야 당연히 좋죠."하지만 생각해 보니 주말 하루 같이 보내겠다고 굳이 다른 도시까지 따라가는 건 김지유 스스로도 그럴 여력이 없는 것 같았다.김지유가 노현우한테 저녁 약속을 제안했지만 이번에는 노현우가 거절했다. "준서가 집에 가있어서 얼른 들어가 봐야 해요. 내일 경원시에서 봐요."노준서 이름을 본 순간, 김지유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내 답장을 보냈다."내일 봬요."-마지막 며칠을 더 출근한 허설아는 결국 박희수 손에 이끌려 작은 별채에 눌러앉은 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특히 회사로 출근은 절대 안 된다는 게 원칙이었다.박희수는 아파트 단지에 사람이 너무 많고 오가는 사람도 잦고 오르내리기 불편할까 걱정했다.그래서 요즘 다시 본채로 옮겼고 허설아와 권지헌은 작은 별채에서 지내게 되었다. 허설아는 서재에 틀어박혀 그림을 그렸다.요즘 àl'aube와 봄날이 너무 바빠서 일러스트 그릴 시간이 통 없었는데 마침 한가해진 것이다.박시연이 문을 두드렸다."사모님, 고아현 씨가 오셨는데 뵙고 싶다고 하시네요." 잠시 멍해졌던 허설아는 그제야 고아현을 집으로 초대했던 일이 떠올랐다. "들어오라고 해요.""네."고아현이 서재에 들어서니 흰색 롱드레스를 입은 허설아가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로 태블릿으로 뭔가를 그리고 있었다.화면 속에는 방금 구도만 잡아두고 아직 선이나 색을 작업하지 않은 일러스트 한 장이 있었다.마지막 만남으로부터 벌써 일 년이 지나 있었다.햇볕에 새까맣게 그을린 고아현은 탄탄해진 몸에 딱 붙는 스포츠 원피스를 입고 머
"준서 선배, 하고 싶은 말이 그거라면 분명히 말할게요. 그럴 기회는 없어요. 저 좋아하는 사람 있거든요."노준서가 순간 넋을 놓고 김지유와 시선을 마주쳤다. 순간 거절하려고 지어낸 핑계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김지유의 눈빛은 당당했고 노준서를 바라보는 눈길에는 경계심마저 어려 있었다.노준서는 순간 막막해졌다.노준서가 이런 식으로 접근한 여자가 한 둘이 아니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딱 잘라 거절한 사람은 김지유가 유일했다.노준서가 자존심이 상한 듯 언성을 높였다."왜요? 누구 좋아하는데요? 설마 우리 형이에요?"김지유가 미간을 찌푸렸다."그게 무슨 상관이에요?"지금 이 순간 노준서의 반듯하고 점잖은 가면 밑에 숨겨진 못된 본성이 보이는 것 같았다."제가 누굴 좋아하든, 노준서 씨 요구를 거절하든 다 제 마음이에요. 노준서 씨, 선 넘었어요."김지유가 손목시계를 흘깃 확인했다. "저 다음 수업 있어서 여기까지만 할게요."김지유는 더 이상 노준서의 생각은 관심도 없다는 듯 돌아서더니 길을 건너 도서관을 향해 걸어갔다. 노준서는 멀어지는 김지유의 뒷모습을 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김지유에게 접근한 건 그저 àl'aube 사람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발판이 필요해서였다. 혹시라도 àl'aube의 기밀 자료까지 손에 넣을 수 있다면 더 좋았을 테고그런데 김지유의 경계심이 이렇게 심할 줄은 몰랐다.노준서는 휴대폰을 하필 그때 바꾼 게 다행이라며 김지유가 아마 본인 휴대폰에 프로그램이 설치된 걸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태연할 리 없었다.노준서가 답답한 듯 한숨을 뱉더니 나무 밑 벤치에 앉아 방금 도착한 문자를 확인하는 얼굴이 어두워졌다.전화를 걸자 수화기 너머에서 다그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겨우 회사의 서류 몇 개일 뿐이잖아, 대체 할 수 있는 거야 없는 거야?""우리가 계약금도 이미 다 입금했는데 이제 와서 갑자기 못 한다는 소리 하지 마."노준서가 미간을 꾹꾹 누르며 말했다."시간 좀 더 주세요.""벌써
김지유는 권서진의 호의를 잘 알고 있었다.평소 김지유는 이런 명품 가방을 메고 다닐 성격이 아니었다. 그런데 아침에 현관에 놓인 가방을 드는 순간, 자동차 매장에서 차를 보던 그날이 떠올랐다.수천만 원짜리 맞춤 정장을 갖춰 입은 노현우가 커다란 곰돌이 가방을 손에 들고 있던 모습은 생각만 해도 어울리지 않았다. 문을 나서려던 김지유는 결국 다른 가방으로 바꿨고 책을 넣기에도 딱 맞춤했다. 강보라의 질문에 김지유가 차분하게 답했다."설마 그 가방 메고 비즈니스 리셉션 갈 순 없잖아.""하긴 그렇네. 그런데 지유 너 참 체력도 좋다. 출근하면서 수업까지 듣다니, 연애할 마음이 없는 게 당연하겠어." 김지유는 답을 하지 않고 물건을 다 챙겨 가방에 넣고는 강보라와 함께 강의실을 나섰다.고개를 드니 건영대 캠퍼스의 무성한 플라타너스 잎이 온 세상을 다 가릴 만큼 우거진 채 머리 위를 뒤덮고 있어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김지유가 솔직하게 말했다."연애 안 하고 싶은 건 아니야. 아직 딱 마음에 드는 남자를 못 만나서 그렇지.""말은 잘하네, 꼭 무슨 눈에 들어온 사람이라도 있는 것처럼. 너희 회사에 엘리트들이 그렇게 많은데 설레는 사람 하나 없어?"김지유가 담담하게 말했다."사내 연애는 국법으로 금지야. 회사에서 동료한테 반하면 그걸로 끝장인 거야."강보라가 자지러지게 웃었다.도서관에 거의 도착했을 때, 뒤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김지유 씨."노준서가 멀지 않은 곳에서 김지유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강보라가 김지유의 팔을 잡아끌며 경계하듯 말했다."저 사람 왜 또 왔어? 설마 진짜로 너 좋아하는 거 아니지?"김지유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최근 알게 된 사실이 있다면 봄날의 경쟁사인 한 유명한 귀금속 브랜드의 매장 건물을 노준서가 디자인했다는 것이었다.건축학과 우수 학생인 노준서는 건축 분야에서 큰 상도 몇 차례 받은 적이 있으니 주얼리 매장 건물 디자인을 맡는 것 자체는 이상할 게 없었다.하지만 김지유는
허설아는 연달아 몇 개의 회의에 참석했다. 송원영과는 앞으로 봄날의 라인을 하이주얼리와 일반 골드 제품으로 나누기로 상의했다. 금값 시세가 오르거나 내려도 봄날은 일주일 동안 가격을 변화하지 않고 일주일 뒤 실제 시세를 반영해 조정하기로 정했다.따지고 보면 봄날의 금 주얼리는 다른 금 브랜드들보다 저렴한 편이었다.요즘 핫하다고는 해도 오래된 브랜드들과 경쟁해 시장 점유율을 높이려면 아직 갈 길이 멀었다.봄날과 àl'aube 모두 디자이너 규모도 늘렸다.분기별 메인 제품 디자인은 여전히 권서진이 맡았지만 나머지 제품은 각 팀에서 우수한 디자이너의 시안 중에서 고르기로 했다.회의가 끝난 뒤, 송원영이 나날이 불러오는 허설아의 배를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한번 만져봐도 돼요?""그럼요."송원영이 조심스레 손을 갖다 댔다.감촉이 참 신기했다. 물이 가득 찬 풍선을 만지는 느낌이었는데 안에서 새 생명이 자라고 있다고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손길이 조심스러워졌다."너무 신기해요." 결혼도 출산도 안 해본 여자로서 임신해서 이렇게 배가 불러온다는 건 상상조차 안 가는 낯선 경험이었다.송원영의 손바닥에 아이의 발길이 느껴졌다.송원영이 화들짝 손을 떼며 놀란 눈으로 허설아를 쳐다보았다."방금 저 찬 거 맞죠?""맞아요, 이 아이는 연희보다 훨씬 활발해요. 태어나면 지헌이와 함께 운동하고 공 찰 상대가 하나 생길 것 같네요."요즘 연희는 야외 운동 한 번 하려면 권지헌이 몇 번씩 재촉해야 했다.허설아는 연희를 가졌을 때 참 얌전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번 아이는 활발한 성격인 듯했다. 송원영은 회의 자료를 챙겨 들고 허설아 팔을 부축하며 걸었다."아이한테 나중에 꼭 얘기해 줘요, 원영 이모 노후 책임져야 한다고." 허설아가 웃으며 놀렸다."원영 이모는 본인 아기 낳을 생각은 없고요?""지금은 생각이 없어요. 애 낳을 생각만 해도 너무 괴로워요. 지금은 일단 저부터 잘 챙기는 게 우선이고 다른 건 나중에 생각할래요.""은석 씨 생각은요
이런 서류는 사실 노현우가 직접 가져올 필요까지는 없었다.하지만 노현우의 속셈은 따로 있었다. 이맘때면 김지유가 학교에 없을 테니 àl'aube에 있을지도 모른다고만 생각했는데 오는 길에 마침 마주칠 줄은 몰랐다.마침 오늘 차도 갖고 오지 않은 상황이었다. 정말 둘 사이에 인연이란 게 있는지도 몰랐다.아이들을 데려다주고 김지유는 바로 퇴근했다.몇 시간이나 월급 받으면서 쉰 셈이니 이득이었다. 노현우가 옆에서 함께 걸으며 김지유의 작은 차를 찾아 주차장으로 향했다. "데려다줄까요?""괜찮아요, 저희 집 여기서 좀 멀어요."노현우가 바깥 도로를 가리켰다."번거롭겠지만 저 앞 갈림길까지만 태워줄래요? 비서한테 데리러 오라고 할게요."김지유는 일단 타라고 한 뒤 차를 몰며 물었다."노 대표님, 제 차가 작다고 마음에 안 들어요?"이 시간에 비서를 부르느니, 차라리 데려다주는 게 나았다."그건 아니고 지유 씨가 왔다 갔다 하면 한 시간은 걸릴 텐데 집에 도착하면 늦은 밤이 되잖아요." 노현우가 잠시 뜸을 들이다 덧붙였다."마음이 안 놓여, 지유야."김지유의 손이 순간 멈칫했다.그러고 보니 오후에 마주쳤을 때도 이렇게 불렀던 것 같았다.노현우라는 사람은 가끔 의외로 솔직한 구석이 있었다.그 점이 김지유는 왠지 편하게 느껴졌다.갈림길에 도착하니 일처리가 빠른 노현우의 비서가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노현우가 문을 열고 차에서 내리며 말했다."조심히 가요, 저 먼저 갈게요."김지유가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남자는 성큼성큼 걸어가 길가에 세워진 차에 오르며 손을 흔들어 답하고는 김지유의 차가 먼저 출발하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자리를 떴다.차를 몰고 집으로 향하는 김지유의 휴대폰에 새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지역 표시도 안 뜨는 익명 번호의 문자였다.[너 좋은 날도 얼마 안 남았어.][김지유, 반드시 지독하게 갚아줄 거야.]김지유는 순간 멍해졌다.누가 장난이라도 치는 걸까. 번호에 전화를 걸어봤지만 연결되지 않았다. 문자
이렇게 거침없이 말하는 사람은 김지유밖에 없었다.허설아는 메시지를 보며 웃고 싶었지만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배 속 아이가 발로 툭툭 찼다."그럼 파이팅해서 빨리 넘어오게 만들어. 그래야 오늘 맥도날드 값을 내가 안 내지."김지유가 살짝 웃었다.생각해 보니 두 아이를 사무실로 데려가 봐야 허설아가 퇴근하고 권지헌이 데리러 올 때까지 마냥 기다려야 할 뿐이었다.연희는 얌전한 편이지만 전서준은 도통 진정하지 못해서 허설아 일하는 데 방해라도 되면 곤란했다.김지유는 휴대폰을 꺼내 옆 상가의 영화 상영 시간표를 확인했다.마침 최신 애니메이션을 발견하고 아이들에게 물었다."애니메이션 볼래?"아이들은 모두 애니메이션은 거절하지 않았다. 김지유는 노현우한테도 물었다."노 대표님도 시간 괜찮아요?""당연하죠."오늘 마지막 일정이 서류 전달하는 것이었다.이미 àl'aube 코앞에 와 있으니 아무 때나 전달해 주면 되었다.김지유가 이렇게 신나 하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김지유는 허설아한테 알리고 티켓을 끊은 뒤 두 아이를 데리고 영화관으로 향했다. 관객 대부분이 아이들과 함께 온 어른들이었고 나름 너무 지루하지도 않아서 김지유도 중반부터는 흥미진진하게 보았다.영화가 끝났을 땐 벌써 9시가 다 되어 있었다.허설아한테서는 여전히 아무 연락이 없었다.영화관을 나서는데 직원이 웃으며 말을 걸었다."저희 인증샷 찍으시면 굿즈 드리는 이벤트 하고 있는데 두 분 아이들이랑 사진 남기실래요? 가족분들 모두 너무 잘생기고 예쁘셔서 여기 붙여두면 완전 예쁠 것 같아요!"사은품은 영화 관련 굿즈인 귀여운 머리띠 두 개였다.연희와 전서준 둘 다 눈이 반짝였다.김지유가 노현우를 쳐다보았다. 영화가 끝나고 관객들이 나오는 극장 앞 비상구 표시등 불빛이 눈앞의 남자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노현우가 고개를 숙여 김지유를 내려다보았다.사실 철한선에서 둘이 함께 찍은 사진도 있었지만 다 대충 찍은 것들이었고 그마저 대부분은 김지유가 찍어서 김지수한테 보여주려던 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