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권지헌은 한창 회의 중이었다.박시연 팀은 요즘 강성시로 연수를 떠나 있어 사흘은 더 있어야 돌아왔다.연희를 데리러 갈 사람이 허설아 말고는 마땅히 떠오르는 이가 없었다.자리에서 일어서는데 배가 팽팽하게 조여왔다. 조금 전 감정이 격해진 탓에 아이도 덩달아 발길질을 하는 듯했다. 마침 들어서던 김지유가 허리를 짚고 몸을 일으키는 허설아를 보고는 빠르게 달려와 부축했다."어디 가려고요? 배가 불러서 움직이기도 힘들텐데.""연희 데리러 가려고."김지유는 허설아를 도로 앉히며 말했다."내가 갈게요. 큰일도 아닌데 직접 운전대 잡지 마요. 선생님한테 전화 한 통만 해주면 내가 픽업하러 갈게요."허설아도 사실 운전이 편치는 않았던지라 순순히 차 키를 건넸다."서준이도 있으면 데려와.""네."-삼십 분 후.허설아의 컬리넌을 몰고 유치원 앞에 선 김지유는 나무 밑에 홀로 앉아 낙엽을 갖고 노는 연희를 발견했다.차 문을 열고 내리자마자 옆 카페에서 나오던 누군가와 정면으로 부딪힐 뻔했다.막 거래처와의 미팅을 마치고 나오던 노현우였다.유치원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보고 낯이 익다 싶었는데 다시 보니 김지유였다."지유야."김지유가 고개를 든 순간 시선이 마주쳤다.노현우는 커피색 롱코트 안에 검은 셔츠와 슬랙스를 입고 있었다. 넥타이는 매지 않아 자유분방하면서도 기품있고 단정해 보였다. 방금 노현우가 뭐라고 불렀는지 김지유는 미처 알아듣지 못한 듯했다. "여기 계셨네요? 설아 대표님 딸 데리러 왔어요."연희가 김지유를 발견하고는 쪼르르 달려왔다."지유 이모! 나 왔어요!"꼭 예쁜 나비 한 마리가 김지유의 품으로 날아드는 것 같았다.유치원 선생님은 이미 김지유가 데리러 온다고 허설아의 연락을 받은 뒤라, 확인만 하고 순순히 보내주었다."서준이는? 엄마가 같이 데려오랬는데.""식당에서 밥 먹어요."저녁도 급식으로 나오는데 연희는 입이 짧은 편이지만 전서준은 뭐든 가리지 않고 잘 먹었다.선생님 품에 안겨 나올 때도 볼에 밥풀이 붙어 있
권율 그룹 산하 연애 게임이 SNS 실시간 화제 검색어에 올랐다.[게임 심쿵 스나이퍼, 여성 유저 비하 논란][게임 심쿵 스나이퍼 × 봄날 주얼리 콜라보, 노이즈 마케팅 조작 의혹]봄날과 àl'aube에도 심쿵 스나이퍼를 즐기는 직원이 적지 않았다.심쿵 스나이퍼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허설아도 휴대폰에 게임을 다운하고 있었기에 한번 확인해볼 생각이었다.그런데 너무 오랫동안 게임을 하지 않은 탓인지 켜자마자 한참 업데이트를 하고 새 프로그램까지 다운해야 한다기에 다시 꺼버렸다.실시간 검색어들을 확인하고서야 한 유저가 앞뒤 다 자르고 게임 속 남자 주인공이 여성 유저를 존중하지 않는다고 왜곡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댓글에는 이미 다른 유저들이 해명을 했지만 이내 다른 비난 댓글에 묻혀 버렸다.허설아도 게시글을 몇 개 눌러보고서야 앞뒤 사정을 알게 되었다.시중에는 올해 심쿵 스나이퍼와 비슷한 연애 게임이 세 개나 출시될 예정이었다.마찬가지로 오래된 주얼리 브랜드들과 콜라보를 진행하고 있었다.봄날과 함께 엮여 실시간 검색어에 오른 건 노이즈 마케팅인 동시에 견제하는 것이기도 했다.만약 봄날과 심쿵 스나이퍼의 화제성을 새로 출시할 게임에 얼마라도 전이할 수 있다면 밑질 것 없는 장사였다.설령 안 되더라도 손해 볼 건 없었다.이번에 봄날에 유입된 고객이 전부 심쿵 스나이퍼 유저인 건 아니었다. 게임을 안 하는 사람도 많았고 단순히 디자인에 반해 주문하는 이들도 상당했다.심쿵 스나이퍼 공식 계정에 해명 글이 하나 올라왔다.아주 오래전, 기획 단계에서 작성된 남자 주인공 이미지 설정 내용을 공개했다.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해명보다는 본인이 보려 하는 것만 고집스레 믿을 뿐이었다.심쿵 스나이퍼가 입장문을 공개해도 많은 사람들은 그저 변명일 뿐 게임이 여러모로 여성 유저를 비하한다는 생각을 했다.덩달아 봄날까지 같이 욕을 먹게 되었다.댓글창을 보던 허설아는 곧바로 홍보팀에 봄날과 유금각의 콜라보 신제품을 공개하도록 결정했다. 시리즈 이름은 '
"대표님, 드릴 말씀이 있어요.""말해."김지유는 잠깐 생각하더니 노준서에 관해 간단히 설명했다. 그 말을 들은 허설아도 왠지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애를 써서 얻어내려 한 게 겨우 너의 업무 정보였다고?""그게 아니면 제 논문에 관심이라도 있겠어요? 서로 전공이 달라서 저희 전공 용어는 봐도 모를걸요."허설아도 노준서가 이런 짓을 해서 얻을 이득이 도무지 짐작가지 않았다.그런데 따지고 보면 àl'aube가 요즘 사소한 골칫거리를 많이 겪는 건 사실이었다.대신 대처는 빨랐다. 허설아가 알 즈음엔 이미 담당 부서에서 다 해결한 뒤였다.오히려 봄날 브랜드가 문제였다.최근 여러 도시에서 오프라인 매장이 잇달아 오픈하고 있었다. 이 기회에 권율 그룹 게임과의 콜라보 소식도 발표하고 남자 주인공별로 콜라보 목걸이와 반지, 귀걸이를 내놓았는데 불티나게 팔리곤 했다. 허설아는 고아현한테 신제품 홍보를 맡아달라고 연락했다.àl'aube의 이번 제품 수익은 전부 동물 보호 사업에 쓰일 예정이었다.하지만 고아현은 거절했다.자신의 상업적 가치도 부족하고 홍보력도 떨어져서 àl'aube가 헛 돈을 팔게 할 뿐이니 차라리 홍보능력이 있는 다른 연예인을 찾으라고 했다.허설아는 그래도 고아현이 맡아주길 고집했고 한동안 신경전이 이어졌다.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고아현이 àl'aube 홍보를 하겠다고 답하기도 전에 벌써 관련 기사가 잔뜩 새어나갔다. 고아현은 연예계를 은퇴한 상태였기에 네티즌들은 이번에 다시 홍보를 맡으면 은퇴 번복이라며 떠들어 댔다.심지어 àl'aube가 고아현과 짜고 노이즈 마케팅을 벌이는 거라며 욕하기도 했다. 돈 좀 벌려는 수작이라는 거였다.기사들을 본 허설아도 머리가 지끈거렸다.요즘 àl'aube가 워낙 잘나가다 보니 뭘 하든 늘 논란의 중심에 서곤 했다.송원영 일까지 들춰내며 양심도 없이 거짓말도 서슴지 않는다고 욕해댄 탓에 봄날 이미지에도 영향을 주었다. 허설아가 다시 고아현한테 전화를 걸었다."홍보를 부탁하는
김지수는 방에 들어가기 전, 소파에 앉은 노현우한테 몰래 고맙다는 손짓을 했다.노현우가 부드럽게 웃었다.김지유는 김지수 방문을 닫아주고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김지수가 생각이 많다는 건 김지유도 알고 있었다.그런 환경에서 자란 여자아이가 생각이 없었다면 진작 산골 마을의 암묵적인 관습에 짓밟혀 남아나지 못했을 것이다.어렵게 사귄 친구도 민보영마저 전학을 가면서 요즘은 김지수와 어울릴 시간도 많지 않았다.노현우는 소파에 긴 다리를 꼬고 앉은 채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고 김지유를 바라보았다.거실에 켜져 있는 캔들 워머에는 사과향 캔들이 놓여 있어 따뜻하면서도 나른하게 빠져들고 싶은 은은한 향이 퍼졌다.김지유가 다가가 캔들 워머를 끄며 말했다."아까는 고마웠어요, 제가 배웅해 줄까요?""아니에요, 저 같은 성인 남자가 배웅까지 받을 필요가 있나요."노현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 밖으로 나가며 주위를 둘러보더니 김지유를 내려다보며 말했다."현관에 남자 슬리퍼 한 켤레 놔두는 건 어때요?"김지유가 고개를 저었다."아무도 안 오는데 남자 슬리퍼 놔두면 오히려 더 티 나잖아요. 저희 아파트 안전해요, 경비원이 계속 순찰 돌거든요."마침 문밖에서 순찰 중인 경비원의 불빛이 스쳐 지나갔다.노현우도 더는 고집하지 않고 말했다."그럼 먼저 갈게요, 내일 봬요.""내일 봬요."현관문을 닫은 뒤 김지유는 창가로 달려가 노현우가 건물을 나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노현우도 뒤를 돌아보았다.다만 20층이 넘는 데다 시력이 좋지 않아 높은 곳의 실루엣까지는 알아볼 수 없었다.노현우가 몸을 돌려 어둠 속으로 들어서자 흰둥이라는 강아지가 다가와 다리에 몸을 비비고는 신나게 건물 안으로 뛰어갔다.이어서 할아버지가 부르는 소리도 들렸다."흰둥아, 왔니."노현우는 건물 입구를 바라보다가 불이 꺼지고 나서야 자리를 떠났다.김지유 말처럼 주인이 있는 강아지였다. -김지유는 씻고 침대에 누워 휴대폰에 온 업무 메시지를 확인했다. 머릿속에 불쑥 노준서가 했
김지유는 전혀 망설임 없었다. "유학 가고 싶으면 말해. 너 유학 보내줄 돈 있어."사과를 입에 문 김지수가 손을 뻗어 소매를 잡아당기자 김지유가 손등을 세게 쳐냈다."언니, 화내지 마. 월반하고 싶은 것도 이미 다 배워서 그런 거야. 한번 시도해봐서 나쁠 것도 없잖아. 유학도 가고 싶은데 언니 돈 쓰기는 싫어."김지수가 잠시 뜸을 들이다 말을 이었다."이런 걸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 언니는 나한테 이미 너무 많은 걸 해줬잖아."김지유는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김지수를 노려보았다."누가 너한테 무슨 말이라도 했어? 엄마 아빠가 연락했어? 아니면 무슨 얘기라도 들은 거야?"어려서부터 워낙 많은 풍파를 겪은 두 자매는 또래보다 일찍 철이 들었고 눈치 빠른 김지유는 바로 김지수의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 짐작했다. 김지수가 얼버무리며 말했다. "아이참, 엄마 아빠가 연락한 거 아니야. 날 어떻게 찾겠어. 그냥…… 그냥 언니 발목 잡기 싫어서 그래. 인터넷 보니까 사람들이 언니처럼 여동생 뒷바라지 해주면 연애도 못한대."김지유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났다."김지수, 앞으로 휴대폰 보지 마!"고향에 있을 때 김지수는 휴대폰을 만질 기회가 거의 없었다. 동생이 바깥세상을 너무 모를까 걱정되기도 하고 연락하기도 편하도록 김지유가 휴대폰을 사줬다.그런데 이제는 인터넷을 너무 많이 봐서 어떤 정보든 걸러 듣지를 못했다.김지수는 움찔하면서도 계속 김지유한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김지유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침묵이 흘렀다.손님으로 와 있던 노현우는 소파에 앉아 자매의 다툼을 지켜보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수 씨, 이름이 참 예쁘네요."김지수는 노현우 같은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었지만 고위급 임원진 같은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져 저도 모르게 얌전해졌다."저희 언니가 지어준 이름이에요. 예전엔 저희 이름이 초롱이, 초원이었어요." 노현우가 부드럽게 말했다.
김지유의 갑작스러운 눈물에 놀란 노현우는 라이터를 넣고 손수건을 꺼내 건넸다."죄송해요."김지유도 이성을 잃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오늘 밤 바람이 너무 차기도 했고 정말 마음이 흔들린 것도 있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게 대외적인 가면인지, 가면 뒤의 진짜 모습인지 알고 싶었다.노현우는 입을 뗐다가 결국 아무 말도 못 하고 손을 뻗어 김지유 눈가의 눈물을 닦아주며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노현우는 김지유의 지난 짝사랑 얘기는 알고 싶지 않았다.다만 지금 흘리는 눈물이 누구 때문인지는 알고 싶었다.권지헌 때문일까?그때 마침 문을 연 김지수가 수건으로 머리를 닦으며 말했다."언니 열쇠 안 챙겼어? 들어와."김지유는 서둘러 얼굴을 닦으며 김지수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했다. 노현우도 뒤따라 들어가 수도 밸브를 잠그고 새 수도관으로 교체한 뒤 다시 물을 틀어보니 과연 물이 새지 않았다."오래된 수도관은 나가는 길에 버릴 테니 일찍 쉬어요."김지유는 좀 멋쩍어졌다."옷이 더러워졌는데 벗어놓고 가면 제가 드라이클리닝 맡길까요?"노현우가 안에 받쳐 입은 셔츠에 먼지가 잔뜩 묻어 지저분해져 있었다. 이 시간에 집까지 끌고와서 수도관 수리를 부탁한 것도 모자라 비싸 보이는 옷까지 더럽혔다는 생각에 김지유는 더 미안해졌다.노현우가 눈썹을 치켜올렸다."그럼 저더러 뭘 입고 돌아가라는 거예요?"봄이라 셔츠에 얇은 코트 하나만 걸치고 있는데 셔츠를 벗으라니, 그럼 코트만 입고 가라는 소리야?길에서 다른 사람이라도 마주치면 변태라도 나타났다고 생각하기 뻔했다. 김지유도 그건 아니다 싶었는지 서둘러 말했다."그럼 내일 저한테 줘요, 세탁해 줄게요!"노현우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김지유 씨," 노현우가 보기 드물게 웃으며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내일 더러워진 셔츠를 지유 씨한테 가져다주면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게다가 셔츠 한 벌일 뿐인데 제가 지유 씨한테 세탁 맡기겠어요?" 김지유가 빨래 해주는 가사 도우미도 아니고 그걸 당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