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비행기가 착륙할 때, 창밖의 하늘은 낯설게 붉었다.프놈펜의 공기는 무겁고 뜨거웠다.한낮의 열기가 밤에도 사라지지 않았고,도시는 낮은 숨결처럼 진득하게 달아올라 있었다.강혁은 공항 게이트를 나서며 습한 공기를 깊게 들이켰다.“이 냄새, 오래전에 맡은 적이 있어.”수진이 고개를 돌렸다.“언니랑 마지막으로 온 곳이에요.”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기억을 억누르는 사람의 어투였다.그들은 택시를 타고 도심으로 향했다.도로 옆에는 오토바이 행렬이 끝도 없이 이어졌고,가로등 아래에는 아이들이 앉아 있었다.그 아이들은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 뒤에 어딘가 텅 빈 공허가 있었다.수진은 그 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저 아이들도, 언니랑 나처럼…”강혁이 말을 끊었다.“지금은 네가 그 아이들이야.”“…….”“누군가의 빛이 되어주면 돼.”그녀는 고개를 숙였다.“빛은 늘 누군가의 어둠에서 태어나요.”그들의 숙소는 메콩강 근처의 오래된 호텔이었다.창문 밖으로 보이는 강물은 검은 유리처럼 고요했다.도시의 불빛이 강 표면 위에서 일렁였다.그 불빛은 마치 수천 개의 기억처럼 반짝였다.수진은 창가에 앉아 USB를 손에 쥐었다.그것은 언니 수민이 마지막으로 남긴 데이터였다.‘照明_파일02 - LIVE ACCESS.’비밀번호가 필요했다.“언니가 남긴 단서가 있을 거예요.”“기억나?”“그날… 언니가 병원 침대에서 내 손을 잡고 했던 말.”그녀는 눈을 감았다.기억 속에서 들려오는 수민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따뜻했다.“照明은… 결국 사람의 이름이 될 거야.”수진이 눈을 떴다.“언니의 생일이에요. 비밀번호는 0314.”그녀가 입력하자, 화면이 깜빡이며 문서가 열렸다.그 안에는 영상 하나가 있었다.화면 속, 흑거미와 배신구가 있었다.그리고 그들 뒤에, 수민이 서 있었다.표정은 고요했지만, 눈빛은 단호했다.[수민] “照明은 감정이야. 복제가 아니라 기억을 나누는 기술이에요.사랑이 없는 인간은 완성되지 않아.”[
바람이 잔잔하게 불었다.해남의 아침은 여전히 느리게 움직였다.바닷가의 파도는 규칙적인 호흡처럼 들려왔고,그 소리 속에서 수진은 눈을 떴다.하얀 커튼이 바람에 밀려왔다가 다시 뒤로 물러났다.꽃향기가 방 안을 채우고 있었다.침대 머리맡엔 말라버린 백합 한 송이가 있었다.그녀는 손끝으로 그 꽃잎을 만지며 천천히 속삭였다.“언니, 나 이제 잘 지내요.”그녀는 일어나 머리카락을 묶었다.창문을 열자, 햇살이 들어왔다.바다 냄새와 흙 냄새가 섞인 공기가 폐 속으로 들어왔다. 그 향은 따뜻했다.‘린플라워’ 간판은 여전히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문을 열자 종소리가 울렸다.새로 들어온 아르바이트 학생이 인사를 했다.“사장님, 오늘은 손님이 좀 많아요.”“그래요?”“결혼식이 있대요.동네 교회에서요.”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오늘은 흰 장미로 준비해요.”“네, 사장님.”그녀는 장미 줄기를 자르며 가위 소리에 집중했다.그 리듬은 마치 파도와 닮아 있었다.그때 문이 열렸다.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오늘도 꽃 냄새가 진하네.”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강혁이었다.그는 평소보다 더 편안한 옷차림이었다.수진은 웃었다.“꽃집에선 당연한 냄새예요.”“난 이 냄새 때문에 여기 오는지도 몰라.”“그럼 매일 와요.”“그럼 일이라도 줘야지.”“음... 물 주기 정도는 시킬 수 있겠네요.”“그거면 충분해.”둘의 대화는 아무렇지 않게 흘러갔다.서로의 상처가 점점 옅어지는 듯했다.하지만 눈빛 속에는 여전히 오래된 불빛이 남아 있었다.그 불빛은 사라진 게 아니라, 그저 조용히 숨을 고르고 있었다.점심 무렵, 수진은 바다를 향해 걸었다.바람이 부드럽게 불었고, 모래 위에는 조개껍질이 흩어져 있었다.그녀는 신발을 벗고, 발끝으로 바닷물을 느꼈다.차가운 물결이 발목을 감싸올랐다.그 순간, 바람이 휘돌며 먼 곳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照明……’낯익은 울림이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렸지만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그녀
서울의 아침은 잔혹하게 평온했다.밤새 폭풍처럼 쏟아졌던 비가 멎자, 하늘은 다시 맑아졌다.그러나 수진의 마음은 여전히 잿빛이었다.비컨 타워의 유리창은 산산이 부서져 있었다.그녀는 잔해 위를 걸었다.강혁은 뒤에서 천천히 발걸음을 맞췄다.“이제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해요?”그녀의 물음에 그는 짧게 대답했다.“끝이 아니라, 정리일 뿐이지.”수진은 부서진 모니터를 밟으며 멈춰섰다.그 아래에서 흘러나온 붉은 빛이 바닥의 유리 조각을 따라 흩어졌다.마치 수민의 피처럼, 그녀의 마음을 물들였다.“照明이라는 이름, 그건 단순한 상징이 아니었어요.”“무슨 뜻이야.”“빛이 아니라, 빛이 사라질 때 드러나는 어둠의 잔상.”그녀의 손끝이 벽에 새겨진 한 문장을 가리켰다.‘Light exists only when darkness remembers it.’빛은 어둠이 기억할 때만 존재한다.“언니는 이 문장을 남기고 사라졌어요.”“흑거미의 말과 다르군.”“흑거미는 빛을 조종하려 했지만, 언니는 어둠을 껴안으려 했어요.”그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그래서 나를 ‘린자오밍’이라 불렀던 거예요.照明, 빛을 비추는 자가 아니라 빛을 기억하는 사람으로.”그녀는 폐허 한가운데 앉았다.태양이 건물 사이로 스며들며 먼지 속에서 금빛 입자를 만들었다.“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요.”“어디든.”“그런 대답은 싫어요.”“그럼, 네가 정해.”“……꽃이 피는 곳.”그녀는 천천히 일어섰다.손끝에 닿은 먼지를 털어내며,그녀는 마치 오래된 껍질을 벗는 것처럼 느꼈다.“꽃집으로 돌아갈래요.”“수진화방?”“아니요.”그녀가 웃었다.“이제 이름을 바꿔야죠. 린플라워. 내 이름으로.”그녀의 눈빛은 단단했고, 맑았다.그녀는 더 이상 복수를 품은 여자가 아니었다.한때 복수였던 사랑이 이제는 사랑을 닮은 삶으로 변하고 있었다.며칠 후, 해남으로 향하는 버스 안. 창가 자리에서 수진은 조용히 바다를 바라봤다.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언니의 그것과 겹쳐졌다
서울. 밤이었다.수천 개의 불빛이 하늘로 솟아오르고,그 아래로 사람들은 아무 일 없다는 듯 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그들의 일상 속 어딘가에 한 여자는 ‘죽은 이름’을 안고 돌아왔다.린자오밍 - 김수진.그녀의 발걸음은 조용했지만,그 발밑엔 오래된 기억의 그림자가 붙어 있었다.서울역 앞,버스에서 내린 그녀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봤다.유리 건물에 반사된 불빛이 마치 수민의 웃음처럼 흩어졌다.“이 도시, 언니가 마지막으로 본 곳이에요.”그녀의 말에 강혁이 옆에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그럼 여기서 끝내자.”“끝내는 게 아니라, 시작이에요.”그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확고했다.그들은 택시를 타고 강북의 오래된 거리로 향했다.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은 주소,그러나 수진의 기억은 그 길을 알고 있었다.“이 근처예요.”“확실해?”“언니의 로그 안에 남아 있었어요. 照明 프로젝트의 본거지, ‘비컨 타워’.”건물은 도시의 불빛 속에서도 유난히 어두웠다.30층 높이의 유리 빌딩, 그러나 창문 하나에도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사람의 흔적이 없어요.”“놈들이 일부러 숨긴 거겠지.”“그럼, 안에 있어요.”그녀는 가방에서 작은 금속 기기를 꺼냈다.소형 EMP 감지기였다.불빛이 깜박이며 신호음을 냈다.“감시망이 있어요. 우리 위치 이미 노출됐어요.”“그럼 조용히 들어가야지.”그가 웃었다.그 웃음은 오랜만에 보이는 생기였다.그녀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이럴 땐, 왜 웃어요.”“너랑 같이 있으니까.”“지금 그게 웃음이 나와요?”“그게 내가 사는 방식이지.”그녀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당신은 정말 바보 같아요.”“그래야 네 옆에 있지.”비컨 타워의 로비는 이미 폐쇄되어 있었다.철제 문을 열자, 안쪽 공기는 냉기처럼 차가웠다.빛 한 줄기 없었고, 엘리베이터조차 멈춰 있었다.“계단으로 가자.”그들은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발소리가 콘크리트 벽에 울려 퍼졌다.13층 즈음 올라섰을 때, 수진이 멈췄다.“이
바람은 무겁게 불었다.제주의 바다는 폭발의 잔향으로 검게 그을려 있었다.절벽 끝에 선 수진은 멀리 연기를 바라보았다.그녀의 눈에는 아직도 불빛이 남아 있었다.잔해 속에서 타오르던 불꽃이 그녀의 눈동자 안에서 꺼지지 않고 있었다.그녀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이제, 정말 끝난 걸까.”강혁은 그녀의 옆에서 고개를 저었다.“끝나려면, 아직 하나가 남았지.”“배신구.”“그래.”그녀는 잠시 바다를 바라보다가 물었다.“당신은 아직도 그 사람을 ‘원장님’이라고 부르나요?”“그 이름은 내 과거야. 지금은 단지, 내 죄의 이름이지.”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우리 둘 다 죄인이네요.”“그래서 만났잖아.”그 짧은 대화 뒤, 두 사람은 동시에 돌아섰다.그들의 시선이 향한 곳은 한 곳이었다.제주 공항 근처, 오래된 국정원 분소.국정원 분소는 폐허나 다름없었다.유리창은 깨져 있었고, 내부는 비어 있었다.그러나 공기 속에는 여전히 누군가의 숨이 남아 있었다.수진은 천천히 안으로 걸어들었다.먼지가 흩날렸고, 낡은 전등이 미세하게 흔들렸다.“여기서 언니가 훈련받았어요.”그녀의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그리고, 나도.”그녀는 벽을 손끝으로 훑었다.그 손끝이 닿자, 벽 안쪽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이 벽, 무언가 들어 있어요.”그녀는 강혁을 바라봤다.그는 주머니에서 소형 탐지기를 꺼냈다.기계음이 짧게 울렸다.“금속이네.”“열어봐요.”그는 망치를 들어 벽을 두드렸다.금속판이 떨어지며 안쪽에서 작은 상자 하나가 드러났다.상자는 낡았지만, 잠금장치는 여전히 단단했다.“열쇠는?”“없어요.”“그럼 부숴야지.”그가 총구를 들이밀었다.‘탕’짧은 소리와 함께 자물쇠가 깨졌다.수진은 천천히 뚜껑을 열었다.안에는 오래된 녹음기 하나와 갈색 봉투가 들어 있었다.그녀는 봉투를 집어 들었다.그 위엔 익숙한 필체로 쓰인 한 문장이 있었다.‘照明이여, 진실은 목소리로 남는다.’그녀는 녹음기를 꺼내 재생 버튼을 눌렀다.잠
제주 남쪽, 쇠소깍 근처.바람은 짠내를 머금은 채 산등성이를 스쳤다.수진은 후드를 눌러쓴 채 절벽 아래를 내려다봤다.짙은 검은 파도 밑으로, 바위 틈 사이에 녹슨 철문 하나가 숨겨져 있었다.그 문은 마치 오래된 심장처럼, 아직도 무언가를 품은 채 미세하게 진동하고 있었다.“이게, REDTIDE의 본체예요.”그녀의 목소리가 낮고 단단했다.“언니가 여기 있었을까.”강혁이 물었다.“있었어요. 이곳이 언니의 마지막 기록에 남아 있었어요.”그들은 로프를 타고 절벽을 내려갔다.철문 앞에 서자, 녹이 슨 경첩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수진이 손가락을 대자, 문 옆의 판넬이 깜빡이며 빛났다.비밀번호를 입력하라는 오래된 디지털 화면.그녀는 천천히 숫자를 눌렀다.‘1207.’삑. 짧은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언니의 생일이에요.”그녀가 중얼거렸다.지하로 이어진 계단은 어둡고 축축했다.빛은 없었지만, 그들은 익숙하게 손전등을 꺼냈다.계단은 생각보다 길었다.한참을 내려가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여기, 언니가 이런 곳에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아요.”“그녀는 믿은 거야. 이곳에서 뭔가를 끝낼 수 있다고.”그들은 마지막 계단을 내려섰다.눈앞에 펼쳐진 공간은 의외로 정돈되어 있었다.벽면엔 파일 캐비닛이 줄지어 있었고,한가운데엔 낡은 책상 하나와 그 위에 낡은 레코더가 놓여 있었다.레코더 위에는 손으로 쓴 쪽지 한 장이 붙어 있었다.‘照明_김수민 개인 로그.’수진은 숨을 들이켰다. 손이 떨렸다.“……이건 언니의 목소리예요.”그녀는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지직 노이즈 사이로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이걸 듣는 사람은 내가 끝내 이루지 못한 일을 대신해야 해요.”“照明 프로젝트는 인간의 ‘감정 복제’를 위한 거예요.”“흑거미는 믿었어요. 감정이 남으면, 인간은 사라지지 않는다고.”“그래서 나를 실험체로 삼았죠.”수진은 숨을 삼켰다.“……언니.”녹음은 계속됐다.“하지만 난 실패했어요. 사랑은 복제되지 않아요. 사
아침의 바다는 유난히 잔잔했다.수평선 위로 떠오르는 햇살이 바다와 하늘의 경계를 지우고 있었다.강혁은 낚싯줄을 걷어 올리며 잔잔한 물결을 바라봤다.그는 예전처럼 어부의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달라져 있었다.이제 그에게 바다는 은신처가 아니라 통로였다.세상으로 나아가는 문, 그녀가 남긴 빛이 흐르는 길.멀리서 낡은 어선 한 척이 다가왔다.배 위에는 젊은 청년 둘이 서 있었다.둘 다 고등학생 또래였고, 서로를 닮은 듯 닮지 않은 얼굴이었다.“혹시 강혁 선생님이세요?”“그래.”그는 웃었다.“여기까지 어
그날 아침, 하늘은 유난히 맑았다.구름은 길게 흘렀고, 바람은 부드럽게 피부를 스쳤다.수진은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차 안에는 은은한 라벤더 향이 떠돌았다.강혁은 운전대를 잡고, 옆자리의 그녀를 힐끔 바라봤다.“졸려요?”“아니요.”그녀는 미소를 지었다.“그냥… 이런 풍경이 익숙하지 않아요.”차창 밖으로 펼쳐진 산맥과 들판은 그녀가 자라온 연변의 겨울 풍경과는 전혀 달랐다.따뜻했고, 부드럽고, 잔잔했다.“혁 씨.”“응?”“사람이… 새로 태어날 수 있을까요?”그의 시선이 잠시 하늘로 향했다.“태어나는
비가 멎은 새벽, 해남의 바다는 거울처럼 고요했다.파도는 숨을 죽였고, 구름은 한 줄기 빛을 허락했다.린꽃방 안은 정적이었다.탁자 위엔 어젯밤 그대로의 커피잔이 식어 있었고, 꽃잎 몇 개가 창문으로 떨어져 있었다.수진은 그 자리에서 봉투 속 USB를 꺼내 들었다.표면엔 여전히 'Project Mirror'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그 글자를 손끝으로 따라 쓰자, 마치 오래된 기억이 손끝을 타고 전류처럼 흘렀다.그녀의 머릿속 어딘가에서 미세한 진동음이 일었다.[MIRROR SYSTEM: RESTART INITIATED
밤이 깊었다.'린꽃방’의 유리문에는 비가 흘러내리고 있었다.조용히 내리던 가을비는 어느새 창문을 두드리며마치 오래된 기억을 깨우는 듯한 소리를 냈다.수진은 조용히 작업대 앞에 앉아 있었다.책상 위에는 흰 장미 다섯 송이가 놓여 있었다.그녀는 가위를 들어 한 송이씩 다듬었다.하지만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잘린 꽃잎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그녀는 그것을 바라보다 문득 손끝에 닿은 차가움을 느꼈다.살갗이 아닌 금속 같은 감각. 그녀의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그건 오랜만에 느껴보는, 익숙한 이질감이었다.[W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