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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달콤한 거짓말

Author: 데이지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3-10 15:23:15

새벽의 공기는 무겁고 끈적했다.

훈련소의 창문은 늘 닫혀 있었고,

바람은 커녕 소리조차 들어올 틈이 없었다.

밖은 세상이 아니라, 단절된 또 다른 지옥이었다.

그날, 수진은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다.

눈을 떴을 때 머리맡의 스피커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지만,

그녀는 스스로 몸을 일으켰다. 습관이었다.

몸보다 먼저 깨어나는 건 의식이 아니라, ‘두려움’이었다.

지각하면 벌을 받는다는 걸 이미 배워버렸으니까.

언니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수민의 얼굴에는 깊은 피로가 깃들어 있었다.

그녀는 요 며칠 밤마다 깨어 있었고, 

훈련소의 통신 라인을 살피는 모습을 보였다.

수진은 그것이 위험하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말리지 않았다.

그녀는 더 이상 언니에게 간섭할 자격이 없다고 느꼈다.

조용히 방을 나서자 복도는 차가웠다.

벽에는 언제나처럼 붉은 문장 하나가 붙어 있었다.

“목소리는 칼보다 빠르다.”

훈련실 문 앞에는 이미 조교들이 대기 중이었다.

오늘의 훈련 주제는 ‘실전 응용’.

아이들에게 주어진 미션은 실제 피해자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그들의 통화는 녹음되어 분석되고, 성공 여부는 오직 ‘상대의 울음’으로 평가되었다.

흑거미가 들어왔다.

그녀는 오늘따라 유난히 밝은 색 옷을 입고 있었다.

흰 블라우스에 붉은 립스틱, 그녀의 미소는 어둠 속에서 더 또렷하게 빛났다.

“오늘부터 너희는 진짜다.”

그녀의 말에 아이들의 어깨가 굳었다.

“그동안은 연습이었지만, 오늘부턴 실전이다.

사람의 돈을, 마음을, 그리고 시간을 훔쳐야 한다.

하지만 절대 들켜선 안 된다. 거짓말의 핵심은 들키지 않는 거야.”

그녀의 시선이 수진을 향했다.

“린자오밍, 네 차례가 올 거야.”

그 이름이 불릴 때마다, 

수진의 가슴속 어딘가가 서늘해졌다.

그 이름은 이제 그녀의 정체가 되어가고 있었다.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아이가 통화를 시작했지만, 결과는 모두 실패였다.

누군가는 너무 서툴게, 누군가는 너무 기계적으로 말했다.

상대는 아무 말 없이 전화를 끊었다.

흑거미의 입꼬리가 천천히 내려갔다.

“감정이 없어.”

“죄송합니다.”

“그 말 자체가 감정이야.”

그녀의 목소리가 칼처럼 날카로웠다.

그때, 흑거미의 손끝이 수진을 가리켰다.

“린자오밍. 너.”

수진은 숨을 삼켰다.

그녀의 손이 떨렸지만, 표정은 굳건했다.

“네, 지도자님.”

“스크립트는 자유야. 네가 생각하는 ‘달콤한 거짓말’을 해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화기의 숫자를 눌렀다.

신호음이 세 번 울리고, 낮고 피곤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그녀는 아주 부드럽게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고객님. ○○은행 보안팀입니다.”

“은행이요?”

“네, 최근 고객님의 계좌에서 비정상적인 송금이 감지되어 확인차 연락드렸습니다.”

“그런 적 없는데…”

“그럴 줄 알았어요. 그래서 이렇게 직접 전화드린 거예요.”

그녀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낮아졌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남자의 숨소리가 느려졌다.

“어떻게 하면 되죠?”

“간단해요. 지금 안전계좌로 옮기기만 하시면 돼요. 제가… 옆에서 도와드릴게요.”

그녀는 마지막 단어를 아주 천천히, 속삭이듯 말했다.

그 순간, 통화실 내부의 공기가 달라졌다.

수민은 모니터를 통해 그 장면을 보고 있었다.

동생의 표정은 놀라울 만큼 침착했다.

눈빛엔 두려움도, 망설임도 없었다.

그녀는 완벽한 배우였다.

거짓을 진심처럼, 진심을 거짓처럼.

몇 분 후, 조교의 손에 들린 화면에 ‘이체 완료’ 메시지가 떴다.

남자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목소리가 참… 믿음직하시네요.”

수진은 미소 지었다.

“좋은 하루 되세요, 고객님.”

전화를 끊는 순간, 방 안의 정적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흑거미가 천천히 일어나 걸어왔다.

그녀의 손끝이 수진의 턱 아래에 닿았다.

“잘했어.”

그녀의 눈빛에는 냉정한 자부심이 깃들어 있었다.

“넌 이제 완벽하다. 네 목소리는 사람의 마음을 녹여버려.”

수진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그건 죄책감이 아니라… 이상한 쾌감이었다.

‘내가 한 말 한마디에, 한 사람이 움직였다.’

그 느낌은 살아있다는 실감처럼 그녀의 혈관을 타고 돌았다.

그날 밤, 수민은 훈련장 뒤편의 저장실에 숨어 있었다.

그녀는 시스템을 조작해 방금 통화 녹음 파일을 몰래 복사했다.

수진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괜찮아요, 고객님. 제가 도와드릴게요.”

그녀는 파일을 듣는 내내 손이 떨렸다.

“이게… 진짜 수진의 목소리야?”

어디에도 어린 날의 따뜻한 음색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 목소리는 달콤했고, 위험했고, 중독성이 있었다.

그녀는 몰래 눈을 감았다.

“이대로 두면… 수진은 돌아오지 못해.”

며칠 뒤, 흑거미는 수진을 자신의 개인실로 불렀다.

그곳은 다른 공간들과 달랐다.

벽에는 붉은 비단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고,

천장에는 오래된 샹들리에가 걸려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와인과 향초가 놓여 있었다.

그 향은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앉아.”

수진은 조심스레 자리에 앉았다.

흑거미는 잔을 채우며 말했다.

“네 목소리, 들을 때마다 기분이 좋아져. 거짓말인데 왜 이렇게 아름다울까?”

“그냥… 시키는 대로 한 것뿐이에요.”

“아니. 넌 달라. 넌 사람을 속이는 게 아니라, 사람을 ‘믿게’ 해.”

그녀는 잔을 들고 말했다.

“이건 상이다. 너 같은 아이는 드물어.”

“감사합니다.”

“린자오밍, 넌 앞으로 내 옆에 있게 될 거야.”

그 말에 수진의 어깨가 굳었다.

“제 옆…이요?”

“그래. 이제 너는 단순한 훈련생이 아니라, 나의 오른팔이야.

언젠가 네가 나를 대신하게 될지도 모르지.”

수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잔을 들었지만, 와인은 입에 닿지 않았다.

그 향이 너무 진해서,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날 밤, 수민은 수진의 방으로 찾아왔다.

문을 열자 그녀는 불 꺼진 방 안에서 혼자 앉아 있었다.

탁자 위에는 꽃이 한 송이 놓여 있었다.

훈련소의 정원에서 몰래 꺾은 조화였다.

진짜 꽃이 아니라, 플라스틱이었다.

“그게 뭐야?”

“꽃이라니.”

“여기서 꽃은 금지잖아.”

“진짜 꽃이 아니니까 괜찮다니.”

“왜 그걸 여기에…”

“그냥, 예뻐서.”

수민은 조심스럽게 그녀 옆에 앉았다.

“오늘 일, 들었어.”

“…”

“수진아, 넌 잘못한 거야.”

“잘못이라니? 그건 훈련이라니.”

“그건 사람을 속인 거야.”

“언니… 사람은 원래 속는다니.

우린 그걸 알려주는 거뿐이다.”

그녀의 말은 너무 차분했다.

수민은 더 이상 설득할 말을 찾지 못했다.

“이건 너가 아니야.”

“맞다니. 이게 지금의 나라니.”

수진은 손에 들고 있던 조화를 바라봤다.

“이 꽃은 향도 없고, 생명도 없다니.

그래도 언니, 예쁘잖아.”

“그건… 가짜야.”

“가짜여도 예쁘다니. 세상 사람들도 진짜보다 가짜를 좋아한다니.”

그녀의 웃음이 너무 가벼워서, 오히려 슬펐다.

수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일어섰다.

문을 닫는 순간, 수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니, 나 이제 진심 같은 거 모르겠다니.”

밤이 깊어갈수록  창밖의 어둠은 점점 더 짙어졌다.

수진은 혼자 남은 방 안에서 조화를 바라보다가 불을 껐다.

완전한 어둠 속, 그녀는 속삭였다.

“달콤한 거짓말은 진짜보다 따뜻하다니.”

그녀의 눈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그 미소는, 다음 날 새벽 훈련소의 전광판에

떠오른 새로운 이름처럼 빛나는 거짓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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