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밤은 길었다.
훈련소의 전등은 꺼져 있었지만, 불빛은 벽 사이로 스며들어 어둠을 더 짙게 만들었다.
수민은 그 빛의 경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건 마치 ‘선’처럼 보였다.
넘으면 죄가 되고, 서 있으면 죄책이 되고, 돌아서면 모든 게 사라지는 경계선.
그녀는 천천히 손끝을 들어 그 빛의 테두리를 따라 그렸다.
차가운 벽의 감촉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이 안에서 난… 점점 작아지고 있다.”
그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머릿속에서는 흑거미의 목소리가 되풀이되었다.
“네가 그 애를 구하려면, 네가 그 자리에 앉아야 해.”
그 말은 단순한 유혹이 아니었다.
그건 선택처럼 들렸다.
아니, 생존의 다른 형태였다.
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
기억 속에 떠오르는 건 어린 시절의 수진이었다.
겨울 장터 한켠, 눈이 쏟아지는 거리에서
“언니, 이 사탕 사주라니.”
그때만 해도 수진의 목소리는 투명했다.
누구도 거짓으로 들을 수 없던 순수한 톤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목소리가 사람을 울리고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그걸 견딜 수 없었다.
다음 날, 훈련소의 공기는 평소보다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흑거미는 늘 그렇듯 천천히 등장했다.
오늘 그녀의 옷은 검은색과 회색이 섞인 실크 소재였다.
빛을 받으면 은근하게 빛났고, 그림자에서는 완전히 사라졌다.
“좋은 아침이네, 애들.”
그녀의 음성이 울릴 때마다, 공간 전체가 명령처럼 움직였다.
“어제 ‘린자오밍’의 임무는 성공적이었다. 그 아이의 목소리는 이제 조직의 자산이다.”
그녀의 시선이 한 명 한 명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수민 앞에서 멈췄다.
“넌 어제 내 제안에 대해 생각했지?”
“생각했습니다.”
“결론은?”
“받겠습니다.”
주변의 공기가 순간 멎었다.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를 향했다.
흑거미의 입가가 천천히 올라갔다.
“역시… 피는 못 속이네.”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내 동생은… 이 조직의 최전선에서 제외해 주세요.”
“제외?”
“그 아이는 아직 어려요. 전 그 아이가 이 일에서 벗어나길 바랍니다.”
“대신 네가 하겠다는 거지?”
“예.”
흑거미는 잔을 들었다.
유리잔 속의 붉은 액체가 천천히 흔들렸다.
“좋아. 그럼, 거래 성립.”
그녀는 잔을 수민 앞에 밀었다.
“마셔.”
“이게 뭐죠?”
“우리의 계약이야. 이건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약속을 기억시키는 거야.”
수민은 잠시 주저하다 잔을 들었다.
입술이 잔에 닿자, 알코올 냄새와 달콤한 향이 동시에 퍼졌다.
그녀는 그것을 한 모금 마셨다.
입안이 화끈거렸고, 가슴 속에서 무언가 불타는 듯했다.
그녀는 잔을 내려놓으며 낮게 말했다.
“이제… 내가 대신하겠습니다.”
흑거미는 미소를 지었다.
“좋아. 이제 넌 내 사람이야,
그리고 동시에… 나의 그림자야.”
그 말의 의미는 곧 ‘이중의 역할’을 의미했다.
그녀는 동시에 조직의 사람이자, 흑거미가 감시해야 할 위험한 변수였다.
그날 밤, 수민은 창고 구역으로 내려갔다.
그곳에는 통화 기록, 송금 루트, 피해자 명단이
보관되어 있었다. 조직의 심장이었다.
그녀는 손전등을 켜지 않았다.
대신 손끝의 감각으로 서류더미를 더듬었다.
“한국… 국정원…”
그 단어가 적힌 문서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숨을 죽였다.
그 문서에는 ‘협력 가능 루트’라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그 아래엔 낯선 이름이 있었다.
“배신구.”
수민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이름은 이 세계의 문을 조금 열어젖힌 열쇠 같았다.
‘이 사람이… 흑거미와 연결되어 있다면.’
그녀는 그 순간, 마음속에서 하나의 문이 열리는 걸 느꼈다.
‘이걸 바깥으로 전해야 해.’
방으로 돌아오자 수진은 이미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베개 옆에 작은 꽃잎 하나를 내려놓았다.
조화가 아닌, 진짜 꽃이었다.
훈련소 마당에서 어렵게 찾아낸 한 송이의 시든 국화.
그녀는 속삭였다.
“수진아, 조금만 기다려. 내가 널 이곳에서 데리고 나갈게.”
수진은 잠결에 몸을 뒤척였다.
“언니…”
“응?”
“이제 괜찮다니.”
“뭐가?”
“여긴 따뜻하다니.”
그녀의 말은 너무 천진해서, 오히려 가슴이 아팠다.
수민은 이불을 덮어주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 따뜻하겠지.”
그녀는 그 말과 함께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그래서 내가 차가워질게. 그래야 널 지킬 수 있으니까.’
새벽, 흑거미는 홀로 복도 끝 창문 앞에 서 있었다.
그녀의 등 뒤로 수민의 그림자가 지나갔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대신 짧게 중얼거렸다.
“이제 또 한 명의 거짓이 태어났네.”
그녀의 미소는 달콤했지만, 그 끝엔 독이 스며 있었다.
강혁이 앞을 막아선 순간, 방 안의 온도는 더 낮아진 듯했다.그 차가움은 봉인의 압박 때문이 아니었다.수진의 가슴 깊은 곳에서 일어난 급격한 변온,마치 심장이 잘못된 기억을 찾아 맥박을 얼려버리는 듯한 느낌이었다.수민의 얼굴을 한 그 존재는 미세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수진을 바라보았다.그 눈동자는 살아 있지도, 죽어 있지도 않았다.그저 ‘남겨진 껍질의 눈’처럼 조용히 흔들릴 뿐이었다.그런데 바로 그 침묵이 수진의 폐 안쪽을 파고들어 숨을 막았다.“자오밍.”그 존재는 한 번 더 그녀를 불렀다.수진은 무릎이 풀릴 것 같은 순간, 강혁의 손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힘이 아니라 온기였다.지금 이 방에서 유일하게 ‘살아 있는 사람의 온기’.“수진. 네가 알고 있는 건 기억이고, 지금 저기 있는 건… 흑거미가 만든 윤곽이야.”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단했다.그러나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수진의 시야가 흔들렸다.눈앞에서 천천히 다가오는 얼굴이 과거의 어느 겨울밤과 겹쳐졌다.눈 속에 묻혀 있던 자매. 언니의 손.“자오밍, 언니한테 와.”그 목소리. 그 부름. 그 따뜻함을 가장한 잔인한 모조품.수진은 무의식적으로 한 발 나갔다.그러나 강혁이 그녀를 붙잡아 멈추게 했다.“가지 마.”그는 속삭였지만, 그 속삭임은 명령 같았다.“저건 너를 무너뜨리려고 만든 거야. 네가 언니를 잃은 그 순간을 다시 꺼내서, 네 마음을 갈라버리려는.”수진의 목 안에서 작은 숨이 튀어나왔다.“강혁… 내가… 언니 이름을… 들었어.”“그래. 너만 아는 거니까 흑거미가 더 노린 거야.”강혁이 수진의 눈을 바라보았다.“흑거미가 그걸 알아냈다는 건… 네 마음을 가장 아픈 데서 찌르려고 했다는 뜻이야.”그 존재는 여전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수민의 얼굴. 그러나 수민에게 단 한 번도 없었던 ‘감정의 공백’이 있었다.그 공백이 수진의 심장을 칼처럼 찔렀다.“자오밍.”이번엔 한발 더 다가와서 불렀다.수민의 입 모양, 수민의 톤, 수민의 미세한 호
바닥이 아주 미세하게 울렸다.진동이라 부르기도 애매한, 그러나 ‘몸이 먼저 느끼는 종류의 진동’이었다.지하 흙층이 아닌, 철골이 흔들릴 때 나는 낯선 떨림.수진은 귀 아래까지 심장이 치밀어 오르는 걸 느끼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말을 내뱉으면, 그 순간 들이킨 숨의 떨림이 자신의 공포를 그대로 드러낼 것 같아서였다.강혁은 바닥 중심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그의 눈동자는 작은 흔들림도 허용하지 않는 위험한 집중의 빛으로 가라앉아 있었다.수진 뒤에 서 있는 그 여자는 이미 손등에 핏기가 모두 빠져 있었다.수진이 어깨를 붙잡아 겨우 버티게 했지만봉인의 압박과 천장 위에서 내려오는 ‘무언가의 존재’가 그녀의 체온을 급격히 떨어뜨리고 있었다.바닥 한가운데가 아주 조금 사람 한 명의 무게보다 가볍게 하지만 분명히 눌렸다.수진이 숨을 멈췄다.강혁은 말을 잃었다.그리고 순간, 천장에서 떨어지는 건 그림자도, 사람도, 발걸음도 아니었다.기척이었다.흑거미가 키운 자들은 절대 발소리를 내지 않는다.기척을 먼저 내고, 다음에 발을 내딛는다.그 기척은 오랜 세월 어둠 속에서만 살아온 존재들이 가진 형체 없는 그림자의 느낌이었다.바닥이 다시 눌렸다.그리고 세 번째 진동이 왔다.그 순간 수진은 깨달았다.“…하나가 아니야.”강혁이 미세하게 머리를 돌렸다.“뭐가?”“여긴 ‘한 명’만 내려오는 구조가 아니야.흑거미는 늘 첫 번째 자를 보낼 때 그녀와 짝을 이루는 ‘그림자’를 함께 붙여.”그 말은 흑거미의 방식에서 거의 예언이나 다름없었다.첫 번째 자는 정면을 맡고, 그림자는 뒤에서 심장을 노린다.강혁은 순간 숨을 가볍게 들이켰다.“그럼… 벌써 둘이 내려왔다는 건가.”수진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그녀의 눈동자에 아주 작게, 금속판이 들리는 틈이 보였다.그리고 그 틈 사이로 ‘눈’이 있었다.사람의 눈이라 부르기엔 너무 차갑고,짐승의 눈이라 부르기엔 너무 조용한 그런 눈이었다.수진의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그 눈은 과거의 자
세 번째 봉인이 완전히 내려앉자, 방 안의 공기는 더 이상 ‘공기’가 아니었다.혀 끝에 닿는 맛조차 달라졌다.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금속이 아주 가늘게 갈린 가루가 폐 속으로 스며드는 듯했고,심장의 박동은 마치 누군가 손으로 조여 오듯 일정하게 느려졌다.흑거미의 봉인은 언제나 ‘심리’를 먼저 공격했다.몸을 옥죄는 게 아니라, 마음을 먼저 구속하는 방식.그걸 깨기 위해선 힘도, 기술도 쓸모없었다.마음이 버티지 못하면 몸은 알아서 무너졌다.수진은 오랫동안 이 감각을 잊고 있었다.그러나 잊는다고 없던 일이 되진 않았다.흑거미가 아이들을 키우던 그 지하 훈련실‘감정은 약점이다’라는 말이 매일같이 울려 퍼지던 그 공간의 냄새가 지금 이 방 안에 고스란히 되살아났다.그녀는 일순간 숨을 멈췄다.숨을 들이키면, 그 시절의 자신이 다시 살아날 것 같아서.강혁은 그녀를 살폈다.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수진을 향한 불안인지, 봉인의 압박 때문인지,아니면 문 밖에서 들려오는 발소리 때문인지 모르지만 그가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건 분명했다.그 여자는 수진과 닮아 있었지만 감정선이 훨씬 얇은 여자이미 봉인의 영향을 가장 먼저 받아 입술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손등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바닥을 짚는 손가락이 떨렸다.“괜찮아. 천천히 숨 쉬어.”수진은 그녀 뒤에서 심장 쪽에 손바닥을 대고마치 어릴 적 엄마가 애를 재우듯, 아주 느린 박자로 등을 쓸어내렸다.흑거미에게서 배운 생존 기술 중 하나였다.압박을 받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건‘내가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상기시키는 것.그녀의 호흡이 아주 조금씩 고르게 바뀌는 걸 확인한 뒤 수진은 손을 뗐다. 그리고 강혁을 바라봤다.강혁은 문틀 근처에서 자그마한 금속 조각 하나를 집어 들고 있었다.그 조각은 문 아래에서 부스러지듯 떨어져 나온 것이었다.손가락 끝으로 문질러본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소리 없는 폭약 성분. 흑거미는 이걸로 봉인을 ‘강화’했어.그녀의
문 아래로 스며들던 발자국의 ‘그림자’는 진짜 그림자가 아니라흑거미가 길러낸 자들이 이동할 때 바닥에 남기는 특유의 흔적이었다.살아 있는 발이 아니라, 살아 있는 체온이 아니라, 그들의 존재감 자체가 형태만 그림자처럼 길게 드리워지는 것. 수진은 그걸 오랫동안 봐왔다.언니가 죽기 전날 밤, 그 그림자들이 처마 아래 길게 누워 있었고그 길었던 그림자가 언니의 뒷모습을 집어삼키듯하나둘 벽을 타고 올라가던 장면을 그녀는 그걸 기억 속에서 지우고 싶어도 지울 수 없었다.강혁은 문 앞까지 다가가더니 몸을 측면으로 살짝 돌렸다.그 자세는 공격적인 형태도, 방어하는 형태도 아니었다.그가 예전에 현장에서 자주 취하던 ‘누군가의 움직임을 받아들이되, 먼저 휘두르지 않는’ 아주 오래된 습관의 자세였다.그가 그런 자세를 취하는 걸 보는 순간 수진은 또다시 심장이 무너져내릴 듯 아팠다.그녀는 강혁의 등을 바라보며 한 번, 아주 깊게 숨을 들이켰다.그 숨이 들숨인지, 울음인지, 스스로도 잘 구분되지 않았다.뒤에 서 있는 여자를 지그시 바라본 뒤 수진이 낮게 말했다.“두려워하지 마. 나도, 언니도… 두려워한 적은 있어도 그러다 부서진 적은 없어.”그 여자의 눈이 흔들렸다.수진은 그 흔들림을 보고 자신의 말투를 아주 미세하게 바꿨다.연변에서 쓰던 말투 중 가장 부드러운 억양을 꺼내 아주 천천히 덧붙였다.“나도 겁났어. 살아있으면서도 살아있지 않은 면들 때문에. 근데… 넌 그거 아니야.너는 그냥, 잘못 길러진 불쌍한 사람일 뿐이야.”그 말이 닿자 그 여자는 고개를 내리깔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그때 문 밖에서 첫 번째 금속음이 또 울렸다.아까 들렸던 세 번째 신호와는 달랐다.이번 건 더 묵직하고, 더 깊었다.마치 벽 한쪽이 안쪽으로 꺼지는 소리처럼 공기 자체를 낮은 음으로 흔들었다.강혁이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시작됐다.”“봉인이야?”수진이 물었다.강혁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단지 문틀을 바라보며“첫 번째 봉인.”그 한
문을 사이에 두고 서늘한 기척이 다가오는 동안, 강혁은 숨을 한 번 깊게 들이켰다.그 기척은 사람 하나가 낼 수 있는 기운이 아니었다.흑거미가 오랫동안 길러온, 냄새도, 발소리도, 체온도 지워버린 무리들 ‘그녀의 손발’이라 불리던 존재들이 움직일 때 특유의 공기가 있었다.습기가 끼지도 않고, 먼지가 뜨지도 않는 마치 공간이 자체적으로 체온을 잃어가는 느낌.수진도 그걸 알아챘다.그녀는 강혁 뒤에서 걸음을 멈추고, 옆에 있는 ‘또 하나의 자신’을 향해 속삭였다.“내가 뭐라 말하든… 절대 뛰지 마. 혁 씨가 널 붙잡든, 내가 너를 끌고 가든,너무 빠르게 움직이면 상대는 그걸 먼저 노릴 거야.”그 여자는 겁에 질린 눈으로 수진을 바라보았다.“나는… 너희 둘 때문에 나타난 게 아니야. 정말로… 살고 싶어서 온 거야.”“그걸 알아.”수진이 아주 부드럽게 대답했다.“그러니까 나도 널 살리고 싶어.”그 말에 그 여자는 믿기 어렵다는 듯 눈을 흔들었고,그 흔들림은 감당하지 못한 체온처럼 금세 목끝까지 차올랐다.그때 문 손잡이가 한 칸 돌아갔다.강혁이 수진 쪽으로 고개를 아주 미세하게 돌렸다.그 작은 움직임 속에, 둘만이 공유하는 오래된 감각이 있었다.위험을 앞두고 서로를 먼저 확인하는 버릇.한쪽이 숨을 들이기 전에 다른 쪽이 호흡을 맞추는 버릇.둘 사이에 피어나던 사랑도, 잿빛처럼 드리워진 오해도,모두 그 오래된 감각 위에 놓여 있다.수진의 장미향이 들숨에 아주 옅게 스며왔고, 강혁은 그 향으로 마음을 묶었다.움직이기 전까지 흔들리지 않기 위해.문이 열렸다.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사람이 아니었다.흑거미가 현장에서 종종 쓰던 방식이었다.전면에 사람을 먼저 내세우지 않고, 공간을 시험하듯 조용히 미끼를 던지는 것.문틈으로 들어온 건 새까맣게 말라붙은 종이 한 장이었다.‘종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두껍고, ‘장치’라고 부르기엔 너무 조용했다.낯선 기호들이 연기가 피어오르듯 새겨져 있었고그 기호들 사이로 극히 미세한
천장에서 울린 금속음은 처음엔 바람에 흔들린 전선 같은, 그저 미세한 떨림 정도였다.그러나 강혁은 이미 몸으로 알고 있었다.저런 소리는 실수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누군가가 ‘그들 셋 모두’를 한 공간에 모으는 데 성공했다는 신호였다.수진은 문가에 주저앉아 있는 여자를 천천히 일으켜 세웠다.그 여자의 손목은 마치 오랫동안 스스로를 붙잡고 버텨온 사람처럼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손등엔 가늘게 새겨진 상처들이 빛을 받아 드러났다.“걷겠어?”수진이 조심스레 묻자 그 여자는 두 번이나 숨을 들이켠 뒤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였다.“응… 걷… 걸을 수 있어.”그 목소리는 부서질 만큼 약했지만, 그 약함 속에 오래 묵은 인내가 들어 있었다.강혁은 방 둘레를 천천히 훑었다.출입구, 천장, 벽 모서리. 무언가 보이지 않는 감시망이 이미 촘촘히 박혀 있는 듯했다.그는 수진 쪽으로 무겁게 말했다.“우릴 지켜보고 있어. 방금 온 그 소녀까지 포함해서.”‘소녀.’수진은 그 말에 문득 마음이 조금 쓰라렸다.자신의 얼굴, 자신의 억양, 자신의 그림자로 살아온 존재를‘소녀’라고 불러주는 누군가가 있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도 오래된 진통처럼 다가왔다.그 낯선 여자는 강혁의 말에 움찔하며 뒷걸음질치려 했으나, 수진이 손목을 붙잡은 채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혁 씨는 네 적 아니야.”수진의 말은 낮고 조용한데 이상하게 힘이 있었다.그 말이 떨어지자 그 여자는 조금 가라앉은 듯 숨을 눌러 뱉었다.“…나는, 너희 둘에게 폐만 끼치는 거 아니야?”그 목소리는 고백이라기보다 자기 혐오에 가까웠다.수진은 그 여자의 눈을 들여다보았다.“흑거미에게 붙잡혀 있었던 거지? 너를 감시하고, 너를 시켜서”그 여자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아니야. 시켰다기보다… 난 그냥 그 여자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진 존재였어.”수진의 가슴이 아주 미세하게 내려앉았다.그 말은 곧 흑거미가 ‘자신의 죽음을 대비한 계획’을 세웠다는 의미이기도 했다.“너를… 나 대신하게 하
새벽의 공기는 무겁고 끈적했다.훈련소의 창문은 늘 닫혀 있었고, 바람은 커녕 소리조차 들어올 틈이 없었다.밖은 세상이 아니라, 단절된 또 다른 지옥이었다.그날, 수진은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다.눈을 떴을 때 머리맡의 스피커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지만,그녀는 스스로 몸을 일으켰다. 습관이었다.몸보다 먼저 깨어나는 건 의식이 아니라, ‘두려움’이었다.지각하면 벌을 받는다는 걸 이미 배워버렸으니까.언니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수민의 얼굴에는 깊은 피로가 깃들어 있었다.그녀는 요 며칠 밤마다 깨어 있었고, 훈련
바람이 불었다. 창문은 닫혀 있었지만, 그 안의 공기는 여전히 서늘했다.훈련소의 하루는 늘 같았다.새벽 여섯 시, 기상. 일곱 시, 발음 교정. 아홉 시, 실습 통화.점심은 고작 죽 한 그릇, 저녁은 간장국물뿐이었다.수민은 그 일정이 하루, 이틀, 열흘을 지나며 하나의 형벌처럼 느껴졌다.그녀는 잠을 자도 목소리가 귀에서 떠나지 않았다.“고객님, 걱정하지 마세요.”“네, 안전하게 처리하겠습니다.”매일같이 들려오는 아이들의 말.그 속에는 생명도, 감정도 없었다.모두 복제된 목소리였다.어느 날 오후, 훈련실의 스피커
새벽 여섯 시. 침대 머리맡의 스피커가 울렸다.금속성의 벨소리와 함께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기상. 훈련생 전원은 5분 내 1층 집합.”창문 밖은 아직 어둡고, 공기에는 먼지와 탄내가 섞여 있었다.수진은 몸을 일으키며 이불 끝을 움켜쥐었다.방 안은 적막했지만, 바닥 밑에서 들려오는 진동이 공간을 미세하게 흔들고 있었다.어제 밤 새벽 내내 전화 벨소리가 울렸고, 누군가는 울고, 누군가는 웃는 소리가 들렸다.그 웃음은 인간의 웃음이 아니었다.언니 수민이 무릎을 꿇은 채 양말을 신었다.“빨리 움직이자. 늦으면 맞
눈이 멎은 새벽, 창문에 성에가 피어 있었다.수진은 이불 속에서 언니의 손을 더듬었다. 따뜻해야 할 손끝은 이미 식어 있었다.“언니…”속삭이자 수민이 눈을 떴다.“깼어?”“언니, 여긴 진짜 학교 같은 데냐니?”수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말 대신, 벽 쪽을 바라봤다.벽에는 어제 봤던 붉은 문장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거짓은 기술이다. 진실은 약점이다.”그 아래엔 작고 낡은 스피커가 달려 있었다.철컥, 잡음과 함께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일어나라. 훈련 시작이다.”아이들은 벌떡 일어났다.아직 어린 수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