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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 선이 그어진 밤

Author: 데이지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5-14 09:00:41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해남의 어두운 바다는 마치 모든 비밀을 끌어안고 기다리는 듯 묵묵히 일렁였다.

그 물결의 미세한 떨림이 수진의 눈을 스치자 그녀는 문득 생각했다.

‘이 밤이 끝나면,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겠구나.’

강혁은 그녀 옆을 걷고 있었지만 어쩐지 둘 사이의 거리는 아주 조금 멀어진 듯했다.

그건 싸움 때문도, 오해 때문도 아니었다.

두 사람 모두 무언가의 경계를 넘으려는 순간이었기 때문에

그 자연스러운 긴장감이 공기 속에 얇게 깔려 있었다.

“흑거미가 움직였다는 건…”

강혁이 말을 꺼냈다.

“…너한테 시간을 주지 않겠다는 뜻이겠지.”

“저에게만이 아니에요.”

수진은 입꼬리를 조금 눌렀다.

“저를 둘러싼… 모든 감정까지 손대겠다는 뜻이에요.

그 사람은 늘 그렇게 했어요. 사람의 마음을 먼저 죽이는 식으로.”

그녀의 말투는 담담했지만 그 ‘담담함’ 자체가 오래된 상처였다는 걸

강혁은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수진은 누구에게도 자신을 의지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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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쪽지를 바라보는 수진의 눈동자가 천천히, 그러나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깊게 흔들렸다.마치 오래전 묻어두었던 얼음층이 한순간에 금이 가며 아래의 검은 물을 드러내듯,그녀의 표정은 어느 지점에서 무너질까 아슬아슬한 경계에 서 있었다.강혁은 그녀보다 먼저 손을 뻗지 않았다.그는 수진이 눈으로 쪽지를 삼키고, 그 문장의 결을 마음속에서 느끼도록 기다렸다.그렇게 충분한 침묵이 흘렀을 때 그녀는 마침내 손가락 끝으로 종이를 집어 들었다.사각사각 종이가 접힌 자국 사이로 잔잔하게 닳아 있는 손때가 느껴졌다.누군가가 급히 접은 흔적, 조금은 조급했고, 조금은 떨렸고,그러나 마지막 순간엔 결심이 끝맺은 손놀림이었다.그리고 그 모든 낯섬의 끝에는 너무도 익숙한 글씨체가 있었다.수진은 입술을 깨물었다.억지로 피를 보이지 않으려고, 입술이 떨리는 것을 스스로만 알고 있으려고,눈꺼풀을 내려 그 흔들림을 감추려고 애썼다.그녀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오래전에 죽은 줄만 알았던 목소리가 서서히 살아났다.-자오밍아, 믿지 마라.-사람은… 마지막 순간에 진짜 얼굴을 보인다.-내가 곁에 없어도, 넌 살아야 한다.수진은 숨을 삼키며 그 문장들을 되짚었다.언니의 문장을 그대로 옮겨 적은 듯한 이 쪽지가 단순한 장난이 아닌 것이 분명했다.강혁은 그녀의 옆에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수진씨.”그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이 글씨… 정말로 언니의 필체와 같아?”그녀는 서둘러 대답하지 못했다.말이 아닌, 숨이 먼저 뒤틀렸다.그리고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네. 언니가 마지막으로… 저한테 남긴 말이에요.”그녀의 목소리는 갈라졌지만,절대 울지는 않으려는 의지가 그 안에서 부딪히고 있었다.강혁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그는 지금 던져야 할 질문이 그녀에게 얼마나 잔인한지 알고 있었다.그러나 회피할 수 없는 질문이기도 했다.“수민씨가…”그는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죽기 전에 이 문장을 남긴 이유를 기억하고 있어?”수진의 눈빛이 잠시 멀어

  • 내 여친은 린자오밍!   192. 문틈 너머의 그림자

    문틈이 아주 조금 열린 그 순간, 방 안의 공기 전체가 뒤틀린 듯 멈췄다.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조용함 속에 묻힌 그 미세한 기척은누군가의 의도를 감추지 못한 채 두 사람의 피부 위로 서늘하게 스며들었다.수진의 손이 반사적으로 강혁의 옷자락을 붙잡았다.자신도 모르게 나온 움직임이었지만 그 작은 힘조차 절박했다.그녀의 숨은 얕고 매끄럽게 이어지지 못하고 어딘가에서 걸려 끊기는 듯 떨렸다.강혁은 그녀의 손을 잠시 내려다본 뒤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손등으로 덮었다.그는 천천히 몸을 돌려 문틈 쪽을 응시했다.문은 아직 열린 것도, 닫힌 것도 아닌 모호한 경계에서 멈춰 있었다.마치 누군가가 “들어갈까, 말까”그 경계를 시험하는 듯한 태도였다.수진의 속눈썹이 떨렸다.그 떨림 너머로 일평생 그녀가 피해온 어둠의 기척이다시 발을 들여놓는 순간 같았다.“저건…”그녀가 낮게 말했다.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지만강혁은 그 미세한 떨림마저 놓치지 않았다.“움직이면 안 돼.”그가 숨처럼 조용히 말했다.문틈 너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섬뜩했다.그 무형의 기척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으면서두 사람에게 너무 잘 알려진 방식으로 스며들어왔기 때문이었다.어릴 적, 수진이 연변의 그 낡은 건물에서 들었던 소리.잠결에 수민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조용히 해, 자오밍아.”속삭이던 그 밤들.그리고 수민이 마지막으로 쓰러지던 순간,뒤에서 스멀거리던 그 익숙한 파동.수진의 손끝에서 감각이 사라지기 시작했다.숨조차 얕아지는 걸 강혁이 알아차렸다.그는 그녀를 향하지 않고, 문틈을 응시한 채 말했다.“내 뒤로.”그 말은 지시이기보다 약속에 가까웠다.수진은 그 조용한 음성에 아주 잠시 멈칫한 뒤 그의 뒤로 이동했다.그 순간조차도 머릿속은 가파르게 흔들렸다.‘언니 목소리를 보낸 사람이…여기에 있는 걸까.’그 생각만으로도 심장 쪽이 가파르게 수축했다.그러나 문은 더 열리지도, 다시 닫히지도 않았다.정적

  • 내 여친은 린자오밍!   191. 흉내 낼 수 없는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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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 여친은 린자오밍!   190. 부서진 목소리

    수진의 손끝이 휴대폰을 쥔 채 굳어 있었다.마치 그 작은 기계가 아닌, 자기 심장 전체를 움켜쥔 것처럼.방금 들려온 목소리는 세상의 어떤 폭발보다 그녀를 산산조각낼 힘을 지니고 있었다.그 목소리가 공기 속에 떨어진 순간 시간은 남김없이 얼어붙었다.“…자오밍아. 너, 왜 거기 있어?”언니였다. 그럴 리 없는 사람이었다.자신의 삶을 지켜주겠다고 약속했던 사람이었고,지켜내지 못한 순간에 쓰러져간 사람이었고,한 번도 꿈에서조차 이 목소리를 ‘현재 시점’으로 들은 적 없는 사람이었다.그러나 지금, 소리는 분명했다.음색도, 말투도, 어린 시절부터 그녀의 등을 감싸주던 그 결도.수진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천천히, 그러나 심하게. 숨을 쉬는 것도 잊은 듯 입술이 떨렸다.“…언니?”그녀는 거의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속삭였다.하지만 그것은 질문이 아니라, 스스로 믿을 수 없어서 깨우치듯 내뱉은 호명에 가까웠다.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강혁의 표정도 그 순간 완전히 굳어졌다.그는 수진의 반응을 보는 것만으로 그 목소리가 어떤 의미인지 즉시 알 수 있었다.“수진아.”그가 다가서며 손을 뻗었다.하지만 그녀는 손을 잡히지 않았다.아니, 손을 잡히는 감각조차 지금은 느껴지지 않았다.그녀는 그저 휴대폰 화면을 보며 얼어붙은 채 그 목소리를 다시 재생하려 했다.그러나 메시지는 딱 한 줄이었다.단 한 번만 재생됐고, 이미 삭제된 파일처럼 다시 들리지 않았다.수진의 호흡이 갑자기 가빠졌다.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어 몸에서 균형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수진, 나야.”강혁이 양 어깨를 붙잡았다.“여기 봐.”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지만 시선이 초점을 잡지 못했다.눈 안쪽이 짙게 흔들리고 있었다.“…언니 목소리였어요.”그녀의 입술이 떨렸다.“분명히… 분명히 언니였어요…”“하지만”그가 조심스럽게 말을 잇자,“죽었는데.”수진이 스스로 말을 끊었다.그녀의 목소리는 부러진 유리조각처럼 갈라져 있었다.말 하나하나가 스스로를

  • 내 여친은 린자오밍!   189. 선이 그어진 밤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그러나 해남의 어두운 바다는 마치 모든 비밀을 끌어안고 기다리는 듯 묵묵히 일렁였다.그 물결의 미세한 떨림이 수진의 눈을 스치자 그녀는 문득 생각했다.‘이 밤이 끝나면,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겠구나.’강혁은 그녀 옆을 걷고 있었지만 어쩐지 둘 사이의 거리는 아주 조금 멀어진 듯했다.그건 싸움 때문도, 오해 때문도 아니었다.두 사람 모두 무언가의 경계를 넘으려는 순간이었기 때문에그 자연스러운 긴장감이 공기 속에 얇게 깔려 있었다.“흑거미가 움직였다는 건…”강혁이 말을 꺼냈다.“…너한테 시간을 주지 않겠다는 뜻이겠지.”“저에게만이 아니에요.”수진은 입꼬리를 조금 눌렀다.“저를 둘러싼… 모든 감정까지 손대겠다는 뜻이에요.그 사람은 늘 그렇게 했어요. 사람의 마음을 먼저 죽이는 식으로.”그녀의 말투는 담담했지만 그 ‘담담함’ 자체가 오래된 상처였다는 걸강혁은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수진은 누구에게도 자신을 의지하는 법을 배운 적 없었다.누구도 그녀의 편이 되어준 적이 없었으니까.그래서 지금처럼 누군가가 그녀의 곁에 서서 같이 맞서겠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그녀에겐 거의 ‘이상한 감정’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나는…”강혁이 말을 이었다.“네가 두려워하는 걸 억지로 없애주겠다는 그런 말, 하지 않을게.”수진은 고개를 들었다.그의 눈빛이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무서운 건 무서운 거고, 위험한 건 위험한 거고, 상처는 상처니까.”그는 아주 짧은 숨을 쉬고 말의 끝을 단단하게 붙였다.“다만… 그 모든 걸 네가 혼자 감당할 필요는 없어.”그 말은 위로도 위협도 아니었다.그저 사실을 알려주는 말이었다.하지만 수진의 가슴에는 아릿한 열이 번졌다.그녀가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함께라는 감정’이낯설고 조심스러운 형태로 밀려들었다.“저도…”그녀는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혼자 있고 싶은 건 아니에요.”그 바람 같은 말은 아주 작은 용기였지만,그녀에게는 거의

  • 내 여친은 린자오밍!   188. 이미 들어온 위험

    바람이 갑자기 거칠게 방향을 틀어 바닷가의 얕은 모래 위를 훑고 지나갔다.수진의 손안에서 휴대폰이 차갑게 식어 있었고,그 차가움은 손바닥을 지나 손목, 팔, 그리고 심장 쪽으로 천천히 번져 갔다.그녀의 눈동자는 화면에 찍힌 짧은 문장을 벗어나지 못했다.“린자오밍, 문을 열기 전에 대가는 준비해야지.”문자 한 줄. 그 한 줄의 어투와 냄새, 문장 속에 섞인 어두운 숨결.수진은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흑거미. 그녀였다.달콤한 말투도, 위협적인 어조도 아닌,습관처럼 날아오는 짧은 경고문.그런 방식으로 그녀는 늘 사람들의 삶을 틀어쥐었다.수진의 손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하지만 그녀는 떨림을 억지로 멈추지 않았다.몸이 기억하는 공포를 굳이 숨기지 않았다.오히려 그 감정을 고스란히 느껴야 지금 자신이 어떤 길 위에 서 있는지 잊지 않을 수 있었다.“누구야?”강혁이 조용히 물었다.목소리는 낮았지만, 숨을 누른 듯한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수진은 잠시 대답하지 못하고 휴대폰 화면을 천천히 꺼뜨렸다.빛이 사라지는 순간, 그녀의 표정도 조금 어두워졌다.“…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에요.”“그 사람, 너한테 위험한 사람이지.”“그렇죠.”그녀는 숨을 고르며 답했다.“저한테… 가장 위험한 사람.”그 말을 듣는 강혁의 시선이 조금 더 깊게 가라앉았다.그는 그녀에게 더 묻고 싶어했지만,섣불리 들어선다면 그녀의 방어벽이 다시 올라갈 것을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는 한 박자 늦게, 조심스럽게 물었다.“되도록 나한테 숨기지 않았으면 좋겠어.”그 말투는 강요가 아니었다.그녀가 자신을 믿어주길 바라는 마음이 바람보다 얇게 스며 있는 그런 부탁이었다.수진은 잠시 그 시선을 피했다.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건드리고, 바다 냄새가 목 안쪽까지 스며들었다.숨을 내쉬면 그 냄새가 더 진하게 들어왔다.“저는…”그녀가 입을 열었다.“강혁씨를 위험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아요.”“이미 들어와 있어.”그의 말은 짧았지만, 간단한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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