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빨간 불은 생각보다 작았다. 서하는 그 불빛 아래 달린 렌즈를 보다가, 조금 옆에 선 도윤에게 시선을 옮겼다.
“윤서하입니다.”
목소리가 낯설게 들렸다. 남편의 인사말은 여러 번 고쳐 줬어도 제 이름으로 시작하는 말은 오래 하지 않았다. 서하는 잠깐 숨을 고르고 다음 문장을 이었다.
“저는 한준혁 씨와 결혼한 지 7년이 됐습니다. 지금은 이혼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모니터 옆의 댓글이 빠르게 올라갔다. 진짜 부인 맞느냐는 질문과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말이 섞였다. 서하는 더 읽지 않고 도윤을 봤다.
“직접 출연을 결정하신 이유가 있습니까?”
“제가 한 말이 없는 상태에서 제 이야기가 너무 많이 나와서요.”
“오늘 정정하고 싶은 내용부터 말씀해 주시겠어요?”
준비해 둔 행사 영상이 재생됐다. 밝은 조명 아래의 준혁은 느긋했다. 아내가 회사와 계약을 맺거나 업무를 맡은 적이 없다는 말 뒤로 객석의 웃음이 들렸다.
서하는 자기 손을 내려다보지 않았다. 가연과 확인했던 자료가 화면에 뜨자 종이의 어느 부분이 가려졌는지부터 살폈다. 다른 직원들의 이름과 연락처는 보이지 않았다.
“저는 당시 외부 자문 계약을 맺었습니다. 기술적인 리콜 판단은 전문팀에서 했고, 제가 맡은 건 대외 설명과 일정 조율 쪽이었습니다.”
도윤이 계약서에 표시된 업무 범위를 읽었다. 화면에는 짧은 문장과 서하의 이름만 남았다.
“직원이 아니라 외부 계약자였다는 말씀이죠?”
“네. 그래서 계약하지 않았다는 말도, 업무를 맡은 적이 없다는 말도 틀렸습니다.”
말을 마치자 목이 바짝 말랐다. 물을 들어도 되나 싶었는데 도윤이 다음 질문을 서두르지 않았다.
서하는 컵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컵 바닥이 받침에 닿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가연이 확인을 마친 자료라는 안내가 이어졌다. 계약서를 공개하기까지의 검토 범위도 짧게 설명됐다. 전체 리콜의 성과나 세부 책임까지 판단하지는 않는다는 안내였다.
도윤은 방송 직전에 도착한 한성의 입장도 읽었다. 가족의 사적인 도움을 공식 업무로 받아들이지 않기 바란다는 답변이었다.
서하는 그 문장을 듣고 의자 팔걸이에서 손을 뗐다.
“회사가 제게 업무를 요청했고, 계약을 했습니다. 가족이라는 말로 그 사실까지 없어지지는 않아요.”
“한준혁 씨는 가정과 회사를 구분한다는 취지로 말씀하신 것일 수도 있습니다.”
도윤이 정해 둔 확인 질문을 했다. 서하는 어제 준혁이 전화에서 했던 말과 똑같다고 생각했다. 답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계약하고 일한 적이 있다고 고쳐 주시면 됩니다. 오늘 제가 요구하는 건 그거예요.”
댓글에서 계약이라는 단어가 거듭 보였다. 남편 말이 틀렸다는 반응 사이에 아내가 남편을 도와준 게 무슨 큰일이냐는 말도 있었다.
서하는 그중 하나를 읽다가 시선을 거뒀다. 모두를 설득하려 들면 말이 길어질 것 같았다.
“남편분에게 직접 바로잡아 달라고 말씀하신 적도 있습니까?”
“어제 요청했어요. 나중에 정리하겠다는 답을 들었습니다.”
“그 답을 기다리지 않으신 이유는요?”
서하는 행사장 객석에서 자신을 부럽다던 사람을 떠올렸다. 준혁의 거짓말을 나쁜 뜻 없이 믿어 준 얼굴. 자신도 예전에는 그런 얼굴로 남편을 올려다봤다.
“남편이 원고를 보내 달라고 하면 저는 그날 밤에 했어요. 다음 날 행사가 있다고 하면 새벽에라도 고쳤고요.”
말이 잠깐 끊겼다. 도윤이 고개를 아주 조금 움직였다. 듣고 있다는 표시였다.
“그런데 제 이야기는 매번 나중이었어요. 언제까지 기다리면 되는지도 모르겠고.”
서하는 처음으로 렌즈를 똑바로 봤다.
“이번에는 제가 날짜를 정하고 싶었습니다.”
질문지를 내려다보던 도윤이 다음 장을 넘기자 종이 모서리가 테이블에 닿았다. 촬영실이 조용한 탓에 그 작은 소리마저 또렷하게 들렸다.
“방송이 시작되면 결혼생활에 관한 불편한 질문도 받게 됩니다. 오늘 이 결정을 후회하실 수도 있고요.”
“네.”
“지금도 출연하시겠습니까?”
서하는 무릎 위의 손을 폈다. 손톱이 눌린 자리에 하얀 반달이 남아 있었다.
“제가 모르는 데서 제 대답을 정하는 것보다는 낫겠어요.”
그제야 도윤이 정규 방송을 소개했다. 서하 한 사람의 일상과 이혼을 준비하는 과정을 촬영하는 프로그램이라는 설명이었다. 준혁과의 동반 출연이나 화해를 약속한 방송이 아니라는 점도 분명히 했다.
“회사에서 정정 답변을 보내 주시면, 그 내용도 확인해 전하겠습니다.”
도윤의 마무리 말 뒤로 카메라의 불이 꺼졌다. 스태프가 종료됐다고 다시 알려 줘도 좀처럼 몸이 움직이지 않더니, 의자를 밀고 일어선 순간에야 다리가 저리다는 걸 느꼈다.
“잠깐만요. 마이크부터.”
자기 옷에 달린 선을 보고 서하가 말했다. 다가오려는 스태프에게 위치를 물어 직접 집게를 푼 뒤, 선까지 건네고서야 촬영실 밖으로 나갔다.
화장실 세면대 앞에 서니 손이 떨렸다. 수도꼭지를 누르는 데 두 번이나 손끝이 빗나갔다. 서하는 차가운 물을 손바닥에 받아 손목부터 적셨다.
울면서 말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그런데 방송이 끝났는데도 참으려니 턱이 아팠다. 고개를 숙이자 눈물 한 방울이 세면대 안으로 떨어졌다.
잘했다고 말해 줄 남편에게 전화할 수 없었다. 방금 자신이 바로잡은 사람이 그 남편이었다.
서하는 휴지를 뽑아 눈 밑을 눌렀다. 거울 속 얼굴은 방송을 시작하기 전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화장은 조금 지워졌고 입술은 말라 있었다. 거울에서 달라진 얼굴을 더 찾아보려던 서하는, 손안에서 뭉개진 젖은 휴지를 버리고 수도꼭지를 잠근 뒤 물기를 털었다.
복도에 나오니 도윤이 촬영 장비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는 서하를 보고 들고 있던 케이블을 옆 사람에게 넘겼다.
“자료는 회사 회신까지 붙여서 보내드리겠습니다.”
“제가 말을 너무 오래 했나요?”
“확인할 말은 다 하셨습니다.”
잘했다거나 불쌍했다는 말이 붙지 않아 숨을 쉬기 편했다.
도윤이 탁자에 놓인 휴지를 가리켰다.
“오른쪽에 조금 남았습니다.”
서하가 눈가를 만지자 그가 자기 눈 아래를 가볍게 짚어 위치를 알려 줬다. 가까이 다가와 닦아 주지는 않았다. 서하는 작은 거울로 확인하고 남은 화장을 지웠다.
“찍은 건 아니죠?”
“방금은 촬영 안 했습니다.”
도윤이 카메라 렌즈에 덮개가 끼워진 것을 보여 줬다. 서하는 손거울을 접었다.
“내일 일정 보내 주세요. 확인하고 답할게요.”
“오늘은 댓글 오래 보지 마십시오.”
“왜요. 안 좋은 말이 많아요?”
“좋은 말만 읽어도 밤샙니다.”
서하는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까지 더 말이 없던 도윤은, 마지막으로 보였을 때 휴대전화로 다른 일을 확인하고 있었다.
***
한태산의 집무실에서 같은 방송을 다시 보고 있던 준혁이 재생을 멈췄다. 화면 속 서하의 이름이 그대로 굳었다.
“사소한 계약을 저렇게 들고나올 줄은 몰랐습니다.”
한태산은 아들을 보지 않고 비서실에서 보낸 확인 내용을 읽었다. 외부 자문 계약.
업무 요청 메일. 보관된 계약 기간. 지울 수 없는 항목만 짧게 적혀 있었다.
“없다고는 왜 했어.”
“직원으로 일한 게 아니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렇게 말했나?”
준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영상의 재생 막대를 앞으로 돌렸다. 계약을 맺은 적도 없다는 준혁의 목소리가 다시 나왔다.
“고칠 건 고쳐.”
“지금 인정하면 더 나옵니다.”
“더 나오게 만들어 놓은 건 너고.”
태산은 안경을 벗어 책상에 놓았다. 준혁은 그 동작을 보고 몸을 곧게 세웠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큰소리를 내는 일보다 저렇게 말을 줄이는 것이 두려웠다.
“당분간 회사 이름 걸고 대외 발언하지 마라. 공식 답변은 홍보 쪽에서 한다.”
“아버지.”
“말 한 번 잘못해서 바로잡는 거다. 일을 더 키우지 말고.”
준혁은 정규 방송을 막아야 한다고 했다. 태산은 묶여 있는 광고와 방송 관계를 확인하라는 지시부터 내렸다.
갑자기 방송을 멈추게 하면 이유를 묻는 사람이 생긴다. 그가 원한 건 시끄러운 중단이 아니라 조용한 축소였다.
“생방송은 오늘 끝났잖아. 다음 건 녹화라며.”
태산이 모니터를 껐다.
“내보낼 수 있는 것부터 따져. 광고 쪽에도 이야기하고.”
준혁의 숨이 그제야 길어졌다. 아버지가 방법을 찾고 있었다. 서하가 카메라 앞에서 이긴 얼굴을 하는 것도 오늘뿐일 터였다.
“제가 서하 만나서 정리하겠습니다.”
“네가 정리할 수 있으면 여기까지 왔겠나.”
준혁은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아버지는 이미 다른 서류를 펼치고 있었다.
***
다음 날 아침, 작업실 바닥에 둔 휴대전화가 울렸다. 서하는 얇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켰다. 소파에서 잠들었다가 목이 아파 바닥으로 내려온 참이었다.
가연이 보낸 메시지였다. 회사의 공식 입장문과 정정된 기사 화면이 함께 붙어 있었다.
한성은 서하가 과거 외부 자문 계약에 따라 일부 대외 소통 업무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공개 행사에서 나온 준혁의 발언은 정확하지 않았다고 했다. 앞으로 관련 대외 설명은 회사 공식 창구로 일원화한다는 문장도 있었다.
‘일부’라는 단어가 눈에 걸렸다. 자신이 밤새 매달렸던 일들이 그 짧은 말 안에 들어가 있었다. 그래도 없었던 일이라고 쓰지는 못했다.
다른 메시지가 도착했다. 도윤이었다.
정정 내용 확인했습니다. 이후 발언도 같은 범위로 대응하겠습니다.
짧은 확인 답장을 보낸 뒤, 서하는 행사 때의 발표문을 꺼냈다.
준혁이 챙겼던 종이와 같은 내용의 파일이 노트북에 남아 있었다. 자신이 고친 표시까지 그대로였다.
공식 입장문을 별도 폴더에 저장했다. 파일 이름을 적다가 잠깐 멈췄다.
늘 준혁의 이름과 행사 날짜부터 적었었다. 이번에는 ‘윤서하_업무 참여 정정’이라고 썼다.
준혁에게 전화가 온 건 커피를 타기도 전이었다.
“이제 됐지?”
서하는 휴대전화를 귀에 댄 채 컵을 꺼냈다.
“뭐가.”
“회사에서도 다 정리했잖아. 네가 일했다고.”
“응. 읽었어.”
“방송은 거기서 끝내. 더 할 이야기가 뭐가 있어.”
빈 컵을 책상 위에 놓았다. 한 문장을 고쳤으니, 서하도 집으로 돌아와 주기를 바라는 모양이었다.
“할 이야기는 많아.”
“너 끝까지 이럴 거야?”
“이혼하자고 했어. 그 말은 안 바뀌었어.”
준혁의 목소리가 높아졌지만, 서하는 회사 일 외에는 변호사를 통해 연락하겠다는 말로 통화를 끝냈다. 커피포트 버튼을 누르자 곧 물 끓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작업실 안은 어수선했다. 소파에는 어제 입은 옷이 걸쳐 있었고, 책상 밑에는 가져온 짐이 풀리지 않은 채 놓여 있었다. 그래도 오늘은 누구의 발표문을 먼저 고쳐야 할지 묻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오랫동안 미뤄 둔 노트를 펼치니 첫 장에 3년 전 날짜가 남아 있었다. 빈 종이에 바로 글을 쓰기는 어려워도, 다시 덮어 서랍에 넣고 싶지는 않았다.
잠시 뒤 도윤이 전화했다. 촬영 시간을 확인하는 짧은 통화일 줄 알았는데, 그가 처음 꺼낸 말은 달랐다.
“한성 쪽에서 정규편에 관한 요청이 왔습니다.”
“무슨 요청이요?”
“회사 업무 이야기는 더 다루지 말아 달랍니다. 이혼하는 부부의 사생활로만 구성해 달라고요.”
서하는 펼쳐 놓은 노트에서 눈을 들었다.
“그럼 제가 왜 이혼하는지는요?”
작업실을 다녀온 뒤로 서하는 노트북 앞에 앉는 시간이 길어졌다. 준혁이 보낸 메시지는 변호사에게 전달했고, 작업실에 남아 있던 개인 원고도 챙겼다. 당장 해결된 일은 없었지만, 적어도 무엇을 잃을 수 있고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는 전보다 분명해졌다.다음 날 오전, 제작진은 정규 4회 편집 회의를 열었다. 채미래와 준혁 사이의 관계가 방송에 들어갈 수 있는 시점이 다가오고 있었다.미래가 공개에 동의하지 않은 부속합의는 구성안에서 제외돼 있었지만, 제작진은 공개된 장면만으로도 관계의 균열을 보여 줄 수 있다고 판단했다. 서하가 준혁의 거짓을 어떻게 확인했고, 자신이 어떤 일을 맡았는지 설명하는 장면이 중심이었다.마케팅 담당자가 편집본을 띄웠다. 서하가 준혁의 개인 해명 영상을 바라보는 장면 뒤로, 준혁과 미래가 행사장에서 나란히 걷는 과거 영상이 붙어 있었다.자막은 ‘아내가 몰랐던 남편의 두 얼굴’이라고 적혀 있었다. 서하는 화면을 끝까지 본 뒤 손을 들었다.“이 장면은 빼 주세요.”“어떤 부분이요?” 담당자가 물었다.“행사장에서 같이 걷는 영상이요. 저 영상만으로는 두 사람의 관계를 알 수 없어요. 제가 그때 몰랐다는 사실을 설명할 자료도 아니고요.”“시청자는 두 사람이 가까웠다는 걸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가까웠다는 건 누구와 누구 사이를 말하는 거죠? 준혁 씨와 미래 씨가 같이 걷는 장면이라면 그 사실만 보여 주면 돼요. 제가 그걸 언제 알았는지는 별도로 확인해야 하고요. 화면에
준혁이 보낸 메시지는 짧았다. ‘그 작업실, 계속 비워 둘 생각은 없어.’ 설명도 이유도 없었다. 서하는 그 문장을 캡처해 변호사에게 전달하고, 작업실에 남아 있는 자신의 물건부터 확인했다.당장 돌려받을 수 있는 공간은 아니었다. 등기는 준혁의 이름으로 돼 있었고, 두 사람이 나눌 정산도 아직 합의에 이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곳에 남겨 둔 원고까지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었다.그녀는 오래된 메모장을 꺼냈다. 작업실을 마련해 주던 날 준혁이 했던 말이 안쪽 표지에 적혀 있었다.‘이제 여기서 네 글을 써.’ 당시 서하는 그 말을 믿었다. 결혼하고 나서 회사의 원고와 남편의 말을 대신 쓰느라 자기 문장을 뒤로 미뤘지만, 언젠가 다시 쓰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작업실은 그 약속이 실제로 이루어질 장소처럼 보였다.그런데 그곳에서 보낸 시간은 생각과 달랐다. 책상 위에는 회사 브리핑 초안이 쌓였고, 벽면에는 일정표와 행사 동선이 붙었다.서하가 개인적으로 쓰던 노트는 서랍 안으로 들어갔다. 준혁은 급한 일이 생길 때마다 그 공간을 회의실처럼 썼고, 서하는 그가 원하는 문장을 정리했다. ‘네 글을 써’라는 약속은 조금씩 ‘내 일을 도와줘’라는 말에 밀려났다.서하는 노트북을 열어 작업실 관리 메시지를 확인했다. 준혁은 다음 주에 중개인을 불러 내부를 확인하겠다고 했다.그동안 남겨 둔 개인 물품은 날짜를 정해 가져가라는 말도 붙어 있었다. 마치 그 공간이 처음부터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는 듯한 문장이었다.그녀는 변호사에게 연락했다.&ldqu
한준혁의 연락은 서하의 변호사를 통해 왔다. 공식적인 조정 일정이나 서면 제안이 아니라, 짧은 문장 하나였다.직접 만나 정리할 일이 있으니 시간을 내 달라는 요청이었다. 변호사는 응할 의무는 없지만, 상대가 어떤 조건을 내놓는지 확인하고 싶다면 대리인과 함께 만나면 된다고 했다.서하는 메시지를 한 번 더 읽었다. 준혁은 업무 기록이 공개된 방송 이후 개인 계정에 입장문을 올렸고, 그 뒤로는 서하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는 일을 줄였다.그렇다고 물러선 것은 아니었다. 그의 말은 이제 ‘내가 직접 했다’에서 ‘최종 승인권은 내게 있었다’로 좁아졌다. 기록이 확인한 순서를 되돌릴 수 없으니, 다른 방식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결론을 만들려는 듯했다.“만나야 할까요?” 서하가 물었다.“만나지 않아도 됩니다. 다만 상대가 정산과 관련된 제안을 하려는 것이라면, 조건을 확인한 뒤 거절할 수도 있습니다. 구두로 합의하지 말고, 어떤 제안이든 문서로 받는 편이 안전합니다.”“방송을 그만두라는 얘기를 할 수도 있겠네요.”“그럴 가능성은 있겠죠. 그 부분은 정산과 분리해서 판단하시면 됩니다.”서하는 잠시 생각한 뒤 만남을 받아들였다. 준혁이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해서만은 아니었다.무엇을 바라는지 직접 듣고,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은 자기 말로 거절하고 싶었다. 준혁이 정해 놓은 이야기 안에서 답만 고르기보다, 어디서 멈출지를 먼저 확인하려는 만남이었다.외부 사무실의 작
채미래의 메시지는 다음 날 오전에 도착했다. ‘잠깐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방송과 무관한 자리였으면 합니다. 문서를 보여 드리겠다는 뜻은 아니고, 제가 확인한 사실을 어디까지 말할 수 있는지부터 정하고 싶어요.’서하는 문장을 천천히 읽었다. 미래는 여전히 공개에 동의하지 않았고, 문서도 제공하지 않겠다고 했다.그래도 먼저 대화를 청해 온 점은 전날과 달랐다. 서하는 이 개인적인 만남이 방송 자료 수집으로 바뀌지 않도록, 답장을 쓰기에 앞서 메시지를 가연에게 전달했다.가연은 짧게 답했다.“만나실 수는 있습니다. 다만 촬영이나 녹음은 하지 않는다고 먼저 분명히 하세요. 대화 중 들은 내용을 나중에 방송에 쓰려면 별도 동의와 검토가 필요합니다. 지금은 당사자가 공개하지 않겠다고 했으니까요.”서하는 그 문장을 그대로 미래에게 보냈다. 잠시 뒤 미래가 답했다.‘그 조건이면 괜찮아요. 장소는 제가 정해도 될까요?’ 서하가 동의하자 방송국과 떨어진 작은 카페로 약속이 잡혔다. 창가 대신 출입문이 보이는 안쪽 자리라, 지나는 사람에게 얼굴이 잘 드러나지 않을 곳이었다.약속 시간보다 10분 먼저 도착한 서하는 물 한 잔을 주문했다. 카페에는 점심을 앞둔 손님이 몇 명뿐이었다. 그녀는 휴대전화 녹음 기능이 꺼져 있는지 확인하고, 화면을 아래로 뒤집어 놓았다.미래를 만나러 온 이유는 정보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상대가 직접 말하고 싶은 범위를 듣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정해 놓고도, 혹시 자신이 듣고 싶은 말만 기다리게 되지는 않을지 걱정됐다.미래는 약속 시간에
채미래는 합의서를 펼쳐 놓고도 한동안 첫 장만 바라봤다. 종이 위에는 자신과 한준혁의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었다. 서명도 있었다.약속을 처음 들었을 때는 그 두 가지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준혁은 이사회 쪽 정리는 끝났고, 혼인 신고만 마치면 자신에게 약속한 지분과 지원이 집행될 거라고 했다. 그 말을 믿었기에 미래는 계약을 읽으면서도 조건을 따지지 않았다.그때는 따지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준혁이 자신을 선택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특별하다고 느꼈다.오랫동안 만난 사이라는 말보다, 한성의 다음 자리에 자신이 함께 설 수 있다는 약속이 더 큰 확신을 줬다. 자신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믿고 싶었다. 서하가 아내라는 자리에서 지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자리를 자신이 차지할 수 있다는 생각에 눈을 감았다.이제는 같은 문장을 다시 읽어도 뜻이 달랐다.‘주식 양도는 혼인 신고 완료 및 이사회 사전 승인 후 별도 절차에 따라 진행한다.’미래는 손가락으로 ‘사전 승인’이라는 단어를 짚었다. 그 아래에는 지원금과 관련한 항목도 있었다.지급 일정은 혼인 이후 별도 합의로 정하고, 이사회 승인이 완료되지 않을 경우 당사자 간 협의를 통해 조정한다는 문구였다. 준혁이 말한 ‘끝난 일’은 문서 안에서 단 한 번도 확정된 적이 없었다.그녀는 합의서를 덮었다가 다시 펼쳤다. 처음 읽었을 때는 정해진 절차를 형식적으로 적어 둔 것이라고 생각했다.준혁은 우호 지분을 이미 확보했다고 했다. 그 말이 맞다면 서류만 갖추면 되는 일이었다. 미래의 시선이 승인 조건에서 멎었다. 이미 가진 것과, 앞으로 받아야 하는 것. 문서에는 그 둘이 같은 말로 적혀 있지 않았다.미래가 꺼낸 다른 파일은 준혁이 약속을 설명하던 날 보내 준 자료였다. 그 화면에는 분명 ‘이사회 우호 지분 기확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당시에는 그 문구를 의심하지 않았다. 누가, 어떤 방식으로, 어느 시점에 확보했는지 묻는 대신 그가 자신에게 보여 준 계획표를 믿었다. 지금 와서 보니 계획표
채미래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한 건 밤 10시가 조금 지난 뒤였다. 서하가 모르는 번호로 받은 문자를 가연에게 전달한 지 한 시간쯤 지났을 때였다.이번에는 발신자 이름이 화면에 떴다. 채미래는 긴 설명 대신 짧은 문장을 보냈다.‘오늘 방송에 나온 리콜 기록과는 별개로, 한준혁 씨와 제가 서명한 부속합의가 있습니다. 그 문서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알아두셨으면 합니다. 다만 지금은 공개에 동의하지 않습니다.’서하는 메시지를 두 번 읽었다. 미래가 무엇을 원하는지, 왜 지금 연락했는지 아직 알 수 없었다.자신에게 유리한 자료를 주려는 것인지, 준혁을 압박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당한 일을 먼저 알리고 싶었던 것인지도 단정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미래는 공개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적었다.서하는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문서가 있다는 사실은 확인했습니다. 공개 동의가 없으므로 방송이나 홍보에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문서의 성격을 확인하고 싶다면, 공개와 무관한 방식으로 연락할 수 있습니다.’답장을 보내고 나서야 손에 들어간 힘이 조금 풀렸다. 메시지를 받은 순간에는 자료가 더 생겼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준혁이 미래에게는 무엇을 약속했을까. 자신에게 하던 말과 어디가 달랐을까. 궁금증에 메시지로 눈을 돌리고도, 서하는 읽고 싶다는 마음만으로 남의 약속을 펼쳐 보일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다.잠시 뒤 미래에게서 답이 왔다. ‘문서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나요? 서하 씨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이미 알고 있잖아요.’그 문장을 오래 보고 있으려니 미래가 자신에게 공감하는 듯도, 자신이 준혁을 공격하는 데 쓰이길 바라는 듯도 했다. 어느 쪽이든 아직은 서하 혼자 붙인 해석이었다.‘제가 아는 건 제게 일어난 일입니다. 미래 씨와 준혁 씨 사이의 약속은 미래 씨가 공개 여부를 정해야 합니다. 문서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내용을 제가 대신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답장을 보낸 뒤로 한동안 소식이 없자 서하는 휴대전화를 뒤집어 놓았다. 그렇다고 이 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