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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출연 조건

Penulis: YuIm
last update Tanggal publikasi: 2026-11-01 23:09:32

도윤은 서하가 적은 마지막 문장을 오래 봤다. 생방송. 그 세 글자 아래에 그어진 선이 유난히 짙었다.

“편집을 못 하게 하시려는 겁니까?”

“남편이 한 말을 정정하고 싶어요. 그건 제가 직접 해야겠어요.”

“남편분이 나온다고 하지는 않았는데요.”

“알아요. 저 혼자 할 거예요.”

도윤이 등받이에서 몸을 뗐다. 노트북을 다시 열고 행사 영상을 찾았다. 서하가 정확한 구간을 말하자 손가락이 재생 막대 위에서 멈췄다.

아내는 회사와 계약을 맺거나 업무를 맡은 적이 없다는 준혁의 목소리가 작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서하는 휴대전화 보관함을 열었다.

계약서 사본은 금세 찾았다. 회사에서 받은 메일을 따로 모아 두는 버릇은 결혼 후에도 남아 있었다.

“원본도 갖고 계십니까?”

“집에 있는 서류함에요. 계약이 끝났을 때 돌려받은 제 몫이에요.”

“지금 가져오실 수 있고요?”

준혁은 서하가 서류를 갖고 있다는 걸 잊었을 것이다. 챙기는 일도 늘 그녀에게 맡겼으니까.

도윤은 곧장 전화를 걸었다. 현장 법무에게 자료를 함께 봐 달라는 요청이었다. 통화를 끝낸 뒤에야 조건서를 다음 장으로 넘겼다.

“본인이 한 말과 자료가 어떻게 사용되는지 확인한다. 뜻이 달라지도록 잘라 붙이지 않는다. 불리하다는 이유만으로 일방적으로 출연을 끝내지 않는다.”

“제가 그만두겠다고 할 때는요?”

“이유와 촬영 상황을 보고 계약대로 협의해야죠. 언제든 아무 조건 없이 나가셔도 된다고는 못 합니다.”

서하는 펜 뚜껑을 열었다.

“그럼 제가 멈추겠다고 했을 때 어떤 불이익이 있는지도 처음부터 적어 주세요. 나중에 말하지 마시고.”

“내용을 확인한다는 게 모든 편집을 마음대로 바꾸겠다는 뜻입니까?”

“제가 한 말이 제가 안 한 말로 바뀌면, 그건 고쳐야죠.”

도윤의 펜이 잠시 멎었다. 그는 그 문장 옆에 작은 표시를 남겼다.

“수정 전후 내용과 담당자가 남도록 하겠습니다. 확인하고 싶은 자료는 정식으로 요청하실 수 있게 하고요.”

“방송이 끝난 뒤에도요.”

“네. 그 부분까지 넣죠.”

받아 적다가 고개를 드니 도윤은 이미 다음 항목을 읽고 있었다. 자신의 요구가 생각했던 것만큼 까다롭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회의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노트북과 얇은 서류철을 든 여자가 들어와 명함을 내밀었다.

“박가연입니다. 제작 법무 맡고 있어요.”

가연은 인사를 마치자마자 계약서 사본부터 봤다. 외부 자문이라는 제목과 계약 상대방, 업무 기간을 차례로 확인한 뒤 서하에게 물었다.

“회사 직원이셨던 건 아니죠?”

“외부 자문으로 계약했어요. 브리핑과 대외 일정 쪽이요.”

“그럼 그 구분은 방송에서도 지켜야 합니다. 지금 확인할 건 계약과 업무 참여 여부예요. 전체 리콜을 누가 해결했느냐는 이야기까지 한 번에 할 수는 없고요.”

서하는 화면 속 준혁을 봤다. 자신에게 회사 일을 맡긴 적도 없다던 사람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오늘은 저 말만 고치면 돼요.”

가연은 공개할 수 없는 부분을 가릴 계획을 설명했다. 계약 원본과 실제 연락 내역을 대조하고, 한성에도 방송 전에 답변할 기회를 주겠다고 했다. 서하는 서류에 있는 다른 직원들의 연락처를 직접 짚었다.

“이 사람들 이름은 꼭 지워 주세요. 저 때문에 연락받게 하고 싶지 않아요.”

도윤이 옆에서 메모했다. 서하가 화면을 넘기려다 문득 그의 노트북을 봤다. 작게 띄워진 표에 예상 출연자 이름 대신 빈칸이 여러 개 남아 있었다.

“제 이혼이 급하신가 봐요.”

도윤은 화면을 숨기지 않았다.

“편성은 잡혀 있는데 보여줄 이야기가 부족합니다.”

“그래서 저를 쓰겠다는 거고요.”

“관심을 끌 겁니다. 한준혁 씨 아내가 직접 나와서 이혼하겠다고 하는데.”

그는 잠시 조건서를 내려다봤다.

“그 관심을 끝까지 붙잡을 수 있을지는, 만나서 결정하려고 했습니다.”

동정하는 말보다 듣기 쉬웠다. 아무 조건 없이 믿으라는 사람보다는 계산할 수 있는 상대가 나았다.

“8회 동안 뭘 찍으실 건가요?”

“별거 준비, 일상, 인터뷰요. 다시 글을 쓰실 생각이 있다면 그것도.”

“이혼 안 하고 화해하면 좋아하실 것 같은데.”

“그 결말을 계약에 걸지는 않겠습니다.”

서하는 조건서의 여백에 한 줄을 더 적었다. 관계 회복을 목적으로 출연하지 않는다.

도윤이 그 글씨를 보고 입을 열었다가, 말없이 자기 쪽 서류에도 같은 내용을 적었다.

***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서하는 현관에서 잠깐 멈췄다가 신발을 벗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외출하고 돌아오는 일이었는데, 오늘은 누구와 마주칠지 살피며 들어가야 했다.

옷방 서류함에서 자문 계약서를 찾았다. 결혼사진 밑에 있던 파일이었다.

종이 사이에는 준혁의 손글씨로 적힌 메모도 끼어 있었다. 서하야, 이것도 확인하고 답장해 줘.

그 짧은 부탁 아래에 여러 해의 날짜가 쌓여 있었다.

서하는 필요한 것만 챙겼다. 원래 쓰던 노트북과 옷 몇 벌, 자신 앞으로 온 우편물.

반지를 빼자 손가락에 옅은 자국이 남았다. 누가 보라고 식탁에 놓는 대신, 반지는 가방 안쪽 주머니에 넣었다.

나오려는데 준혁에게 전화가 왔다.

“집이야?”

“나가려던 참이야.”

“거기 있어. 이야기 좀 하자.”

서하는 가방을 어깨에 멨다.

“이혼 이야기면 변호사 알아보고 연락할게.”

“기자한테 연락했다며.”

서하는 현관문에 댔던 손을 내렸다. 제작사에 오기 전 기자에게 연락했었다. 기사로 다루지 않겠다는 답은 이미 들었는데, 통화한 사실마저 준혁에게 전해진 모양이었다.

“내가 누구한테 무슨 말을 했는데?”

“그게 중요해? 네가 그러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

“당신 말만 듣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낫겠지.”

준혁이 길게 숨을 내쉬어도 먼저 말을 거두지 않았다. 이번에는 그가 대답할 차례였다.

“행사에서 한 말 때문이면, 그건 가정하고 회사를 구분한다는 뜻이잖아.”

“그럼 그렇게 바로잡아.”

“뭘?”

“나는 당신 회사와 계약하고 일했어. 안 했다고 한 말, 틀렸다고.”

준혁은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서하는 현관 앞에 선 채 기다렸다.

“네가 어디 나가서 돈 벌어야 하는 처지도 아니고, 그 한마디가 그렇게 중요해?”

“중요해.”

“알았으니까 그만해. 나중에 정리할게.”

서하는 통화를 끝내고 원본이 든 가방을 고쳐 들었다. 집 밖으로 나와 문이 잠기는 소리를 끝까지 듣는 동안에도, 누군가 달려 나와 다시 이야기하자고 부르는 일은 없었다.

***

다음 날 오후, 가연은 서하 앞에 가려진 자료와 계약서를 나란히 놓았다. 공개할 부분은 짧았다.

윤서하라는 이름, 외부 자문 계약이라는 제목, 당시 맡았던 업무의 범위. 금액과 다른 사람의 이름, 서명은 읽을 수 없도록 처리돼 있었다.

“원본하고 제출하신 업무 연락을 대조했습니다. 회사 쪽에도 이 범위로 질문 보냈고요. 아직 답변은 안 왔습니다.”

서하는 한 장씩 넘기며 자신이 말하려는 범위와 맞는지 확인했다. 제작사 결재를 거쳐 돌아온 출연 계약에는 전날 요구한 내용이 별도 항목으로 붙어 있었다.

공개를 원하는 자료, 촬영 장소, 사전 확인 방법. 서하는 내용을 읽고 한 장씩 서명했다.

도윤은 마지막 종이를 받아 가연에게 넘겼다.

“오늘 저녁에 출연 발표 라이브를 하겠습니다. 정규편 첫 방송은 촬영본을 보고 따로 확인하시는 거고요.”

“제가 생방송에서 못 하겠다고 하면요?”

“시작하기 전이면 멈춥니다.”

“시작한 뒤에는?”

도윤은 벽에 걸린 모니터를 가리켰다.

“나간 말은 회수할 수 없습니다. 불편한 질문에는 답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때 제가 다른 말로 대신 채우지는 않겠습니다.”

서하는 계약서 사본을 가방에 넣었다. 이제 말할 곳이 생겼다. 막상 생기고 나니, 자신이 그곳에서 입을 열 수 있을지 걱정이 났다.

출연 예고가 올라간 것은 오후 5시였다. 휴대전화에 알림이 한꺼번에 들어왔다.

뜸했던 지인들, 시어머니, 준혁의 이름이 화면을 채웠다. 서하는 휴대전화를 뒤집고 테스트 촬영용 의자에 앉았다.

카메라 뒤에서 도윤이 말했다.

“소리부터 보겠습니다. 편하게 아무 말이나 해 보세요.”

아무 말. 그것이 가장 어려웠다. 서하는 생수병 뚜껑에 손을 얹었다가 의자 팔걸이로 옮겼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그것도 들어왔습니다.”

도윤은 이어폰 한쪽을 눌렀다. 옆에 있던 스태프에게 소리를 조금 낮춰 달라고 한 뒤, 카메라 위쪽을 가리켰다.

“답하실 때 저를 보셔도 됩니다. 렌즈를 꼭 보고 이야기할 필요는 없어요.”

“말이 끊기면요?”

“기다리죠.”

그는 말을 하면서도 손목시계를 확인했고, 서하는 그 짧은 동작을 놓치지 않았다. 기다리는 동안에도 제작진의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시간이 많이 걸리면 미리 말씀드릴게요.”

도윤이 시계에서 눈을 뗐다.

“제작진한테 줄 시간도 정해 주시는 겁니까?”

“남의 일정까지 망치고 싶지는 않아서요.”

“지금은 본인 답변만 생각하셔도 됩니다.”

서하는 렌즈 옆에 서 있는 그를 보았다. 검은 셔츠 소매가 팔꿈치 아래까지 걷혀 있었다.

무심코 생수병을 돌리던 손이 멈췄다. 도윤은 다른 스태프의 말을 듣다가도 서하가 입을 열면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준비한 말이 잠깐 늦어졌다.

테스트가 끝나자 다시 울린 전화에 준혁의 이름이 떴다. 서하는 촬영실 밖으로 나가 받았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예고를 본 목소리였다. 서하는 닫힌 문 너머의 움직임을 들으며 대답했다.

“당신이 나중에 한다던 이야기.”

“카메라 앞에서 남편 욕하면 네 얼굴에도 침 뱉는 거야.”

“내 얼굴은 내가 알아서 할게.”

“그 PD가 평생 너 책임져 줄 것 같아?”

서하가 안쪽을 돌아보자, 모니터 앞에서 스태프와 이야기하는 도윤이 보였다. 그녀가 통화하는 모습을 찍으라는 손짓도, 누구 전화냐고 묻는 눈치도 없었다.

“그 사람한테 책임져 달라고 한 적 없어.”

준혁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하가 전화를 끊으려는데 목소리가 낮아졌다.

“지금 그만두면 오늘 일은 없는 걸로 할게.”

그 말을 듣자 오히려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행사장에서 본 것까지, 오늘 자신이 고른 일까지 남편은 없애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있었던 일로 둘 거야.”

서하는 통화를 끝냈다. 휴대전화를 끄지는 않았다.

혹시 회사의 정정 답변이 오면 확인해야 했다. 대신 개인 전화 알림만 무음으로 바꿨다.

라이브 시작을 앞두고 가연이 촬영실로 들어왔다. 손에는 새로 인쇄한 메일이 있었다.

“회사 답변이 왔어요.”

물을 내려놓고 건네받은 종이를 읽자, 가족의 사적 도움을 회사의 공식 업무처럼 받아들이지 말라는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정작 계약이 있었느냐는 질문에는 답이 없었다.

도윤이 메일 아래를 읽었다.

“방송 중에도 이 입장을 소개해 달라는 요청입니다.”

서하는 가려진 계약서 화면을 한 번 더 확인했다. 그 작은 칸 안에 자신의 이름이 남아 있었다.

“그대로 읽어 주세요. 제가 대답할게요.”

공개 자료를 마지막으로 살핀 가연이 카메라 옆으로 비켜섰다. 스태프가 손가락을 들어 시작을 알리자 서하는 무릎에 모았던 손을 풀었다.

도윤이 그녀를 보았다.

“윤서하 씨, 들어갑니다.”

카메라 위에 빨간 불이 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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