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그 이유를 찍으러 가는 겁니다.”
도윤이 전화 너머에서 말했다. 서하는 펼쳐 둔 노트를 내려다봤다. 제작진이 온다니 다시 치워야 할 물건처럼 느껴졌다.
“회사에서는 부부 사생활만 찍으라고 한다면서요.”
“요청이 왔다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어디까지 쓸지는 자료를 보고 결정해야 하고요.”
“제가 말하기 전에 잘라 놓지는 마세요.”
잠시 말이 없던 도윤이 촬영 시간을 확인했다. 전화를 끊은 서하는 노트를 덮어 서랍 대신 책상 한가운데 놓아두었다.
오후에 도착한 제작진이 현관부터 확인하자, 주소가 찍히지 않도록 문밖은 촬영하지 않기로 했다. 서하는 회사 서류를 모아 둔 상자 쪽도 찍지 말아 달라며 손으로 가리켰다.
스태프가 상자에 덮개를 씌우는 동안 도윤은 햇빛이 드는 쪽을 살폈다. 카메라를 조금 옮긴 뒤 서하에게 앉아 보라고 했다.
의자를 당기자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제 방에서 제 의자를 옮기는 일에도 허락이 필요한 기분이었다.
“이 정도면 됩니까?”
“네. 지금 앉으신 대로 계시면 됩니다.”
도윤이 옆으로 비켜서고 누군가 마이크를 확인하는 동안, 서하는 익숙한 책상을 낯선 각도에서 바라봤다. 화면에 잘 나오도록 한쪽에 쌓아 둔 책까지 가지런히 정리돼 있었다.
그녀는 책 한 권을 집어 원래 놓였던 자리에 돌려놨다. 책등이 안쪽을 향해 조금 삐뚤어졌다.
“저건 저렇게 둬요. 펼쳐 놓고 보던 거라서.”
도윤은 그대로 두라고 했다. 서하는 무릎에 들어간 힘을 풀었다.
“언제부터 쓰신 곳입니까?”
“3년쯤 됐어요. 리콜 관련 일을 마무리하고 나서요.”
“남편분이 마련해 주셨다고요.”
“네. 이제 여기서 제 글을 쓰라고 했어요.”
서하의 시선이 책상 모서리에 머물렀다. 처음 배송받던 날 작은 흠집이 있었다.
배송받자마자 바꿀까 싶다가도 빨리 의자를 당겨 앉고 싶어 그냥 받았다. 흠집보다 그 자리에서 처음 본 창밖이 더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가구는 직접 고르신 겁니까?”
“책상은 제가 골랐어요. 출력한 원고 옆에 노트북을 놓을 수 있게 넓은 걸로요.”
“쓰신 글도 보여주실 수 있습니까?”
서하는 노트를 열었다. 첫 장에는 여러 번 고친 제목이 있고, 다음 장에는 인물 소개가 절반쯤 적혀 있었다. 그다음부터는 회사 전화번호와 행사 때 확인해야 할 목록이 끼어 있었다.
보여줄 부분을 고르려다 손이 멎었다.
“완성한 건 없어요.”
“오래 쓰지 못하신 이유가 있습니까?”
“다른 일이 먼저여서요. 급한 것부터 끝내다 보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누군가가 보낸 연락에 노트를 덮던 밤들이 떠올랐다. 서하는 문장 끝을 삼키지 않으려고 천천히 덧붙였다.
“당신 것도 곧 쓰면 되잖아. 늘 그렇게 말했어요.”
도윤이 노트에 뭔가를 적었다. 방금 한 말 중 무엇을 골라 두는 걸까. 자신에게 인터뷰를 해 주던 사람들도 저 글씨가 궁금했을까.
“이혼하고 나면 지금 생활과는 달라질 수도 있잖습니까.”
“그렇겠죠.”
“가장 걱정되는 게 뭡니까?”
이번에는 대답을 바로 못 했다. 생활비나 거처, 구해야 할 일도 떠올랐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떠오른 것은 오랫동안 글을 쓰지 않은 자신이었다.
“다시 쓸 수 있을까, 그게 걱정돼요. 예전에는 쓰고 싶은 게 많았는데.”
서하가 노트를 넘기자 빈 장이 나왔다. 손가락으로 종이 가장자리를 눌렀다. 도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질문을 바꿨다.
“이 방을 떠나야 한다면 아쉽지 않으시겠어요?”
“아깝죠.”
서하는 다시 책상을 봤다.
“여기서 보낸 시간이 있으니까. 그런데 방을 계속 쓰려고 또 같은 일을 반복하고 싶지는 않아요. 여기서 못 끝낸 제 글도 쓰고 싶고요.”
“그럼 남편분이 이제부터는 글만 쓰게 해 주겠다고 한다면요?”
서하가 고개를 들었다. 도윤은 표정을 바꾸지 않고 기다렸다. 다시 합칠 마음이 있는지를 묻는 질문이라는 걸 서하도 알았다.
“제 남편은 자기가 그렇게 말해 주면 제가 돌아올 거라고 생각해요.”
“윤서하 씨 생각은 다릅니까?”
“그 말은 3년 전에 들었어요. 그 뒤에 어떻게 됐는지는 제가 여기서 살아봤고요.”
도윤의 펜이 멈췄다. 서하는 카메라를 보지 않고 그를 향해 말을 이었다.
“이제 제가 뭘 할지는 제가 정해 보고 싶어요.”
촬영을 마치고도 제작진은 한동안 방을 찍었다. 서하는 책을 정리했다. 가방을 들고 나가는 모습은 한 번 더 찍었지만, 전화받는 시늉을 해 달라는 요청에는 그러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럼 이 장면은 안 찍겠습니다.”
도윤이 카메라 옆에서 촬영을 정리하는 동안에도 서하는 거절을 거두지 않았다. 찍지 말라고 해도 되는구나. 지금은 촬영할지부터 자신에게 묻고 있었다.
장비가 나가고 마지막으로 도윤이 남았다. 그는 촬영 중 옮긴 의자를 원래 위치로 밀어 놓았다.
“오늘 말씀 중에 회사 자료와 연결해서 확인할 부분이 있습니다. 법무 검토가 끝나지 않으면 첫 회에서 못 쓰는 대목도 있을 겁니다.”
“제 생각을 말한 부분까지요?”
“그건 구분해서 보겠습니다.”
서하는 촬영할 때 펼쳤던 노트를 덮었다.
“아까 마지막 질문, 원래 준비하신 거예요?”
“다시 같이 살 생각이 있는지요?”
“네.”
“한 번은 확인해야 했습니다.”
“제 답은 바꾸지 마세요. 남편이 원하는 대답으로.”
도윤이 그녀를 잠깐 봤다. 알겠다고 한 뒤 더 설득하지 않고 나갔다. 서하는 문을 닫고 한동안 손잡이를 놓지 않았다.
***
이틀 뒤, 서하는 제작사 편집실에서 첫 회 검토본을 봤다. 모니터 앞에 도윤이 앉아 있었고, 가연은 법무 의견이 표시된 문서를 펼쳤다.
서하는 결혼생활을 설명한 부분부터 확인하고 싶다고 했다. 도윤이 해당 구간을 재생했다.
화면은 작업실 창밖에서 시작됐다. 햇빛이 들어오는 넓은 책상과 소파, 정리된 책장. ‘한성가 며느리가 머무는 개인 작업실’이라는 자막이 붙어 있었다.
촬영할 때와는 제법 달랐다. 바닥에 내려놓은 짐과 벗어 놓은 실내화는 화면 밖으로 밀려났다.
서하가 급히 먹은 점심 포장지는 당연히 나오지 않았다. 대신 창가에 앉아 있던 모습이 오래 보였다.
이어 도윤의 질문이 들렸다.
“이혼하고 나면 지금 생활과는 달라질 수도 있잖습니까.”
“그렇겠죠.”
“가장 걱정되는 게 뭡니까?”
화면 속 서하가 책상을 보았다.
“아깝죠.”
자신이 한 말이었다. 하지만 저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었다.
서하는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화면 속의 자신은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노트의 빈 장을 내려다보던 순간이었다. 음악이 낮아지고 눈가가 크게 잡혔다.
도윤의 다음 질문이 이어졌다.
“남편분이 이제부터는 글만 쓰게 해 주겠다고 한다면요?”
화면은 대답 대신 결혼사진으로 넘어갔다. 가족의 사생활 보호를 위해 일부 내용은 편집했다는 안내가 짧게 붙었다.
“잠깐만요.”
서하가 말하자 도윤이 재생을 멈췄다. 결혼사진 속 서하는 웃고 있었다. 화면을 멈춰 두니 그 웃음이 더 선명했다.
“제 대답이 바뀌었어요.”
가연이 문서에서 고개를 들었다. 도윤은 재생 위치를 앞쪽으로 옮겼다.
“어느 부분 말씀입니까?”
“가장 걱정되는 게 뭐냐고 물으셨잖아요. 저는 다시 글을 쓸 수 있을지가 걱정이라고 했어요.”
서하가 모니터의 책상을 가리켰다.
“아깝다는 말은 이 방을 떠나면 아쉽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답한 거예요.”
도윤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원본 인터뷰를 불러왔다. 스피커에서 서하의 목소리가 다시 나왔다. 방을 계속 쓰려고 같은 일을 반복하고 싶지 않다는 대목까지 들은 뒤 그가 화면을 멈췄다.
“본사 수정본에 답변이 잘못 붙어 있네요. 제가 확인을 놓쳤습니다.”
“저걸 보면 제가 이혼해서 가난해질까 봐 걱정하는 사람 같잖아요.”
“생활이 달라지는 부담을 앞에 놓자는 구성에는 저도 동의했습니다. 하지만 이 연결은 잘못됐습니다. 원래 질문으로 돌리겠습니다.”
질문 하나를 돌려놓아도 남는 문제가 있었다. 서하는 다음 구간을 가리켰다.
“마지막 대답도요. 다시 돌아갈 생각이 없다고 말씀드렸어요.”
가연이 원본과 검토본의 구간을 나란히 확인했다. 회사 업무를 구체적으로 언급한 부분에는 아직 검토가 필요하다는 표시가 있었다.
“회사에서 맡으셨다는 개별 업무와 문서 내용은 지금 확인이 덜 됐습니다. 그 부분을 빼면서 주변 발언도 함께 줄어든 것 같아요.”
“제가 제 글을 쓰고 싶다는 데도 회사 확인이 필요한가요?”
가연은 문서를 내려놨다.
“그 말씀 자체는 아닙니다.”
모니터 속 작업실은 실제보다 훨씬 근사했다. 저 좋은 방을 두고 왜 나가려는지, 보는 사람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정작 그 이유를 말한 장면이 없었다.
“법무에서 빼라고 한 곳을 보여 주세요.”
표시된 문서에는 회사 자료와 구체적인 업무 귀속에 관한 부분이 담겨 있었다. 서하는 마지막 장을 짚었다.
“이 문장은 안 들어가 있는데요.”
서하가 요청한 대로 원본의 마지막 답변이 다시 재생됐다. 이제 무엇을 할지 자신이 정해 보고 싶다는 말이 나오자, 그녀는 그 대목의 위치를 종이에 적었다.
도윤이 마우스에서 손을 뗐다.
“그건 분량을 줄이면서 빠졌습니다.”
“제가 아무 말 안 하는 얼굴은 이렇게 오래 나오고요?”
도윤이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서하가 노트를 보던 짧은 침묵은 다른 장면 사이에도 끼어 있었다. 같은 표정이 쓰인 구간을 짚어 주자, 그가 편집 화면을 열어 해당 컷을 확인했다.
“이 표정을 길게 보여주는 게 효과적이라고 봤습니다.”
“제가 뭘 생각하는지보다요?”
도윤은 말없이 검토본을 닫고 원본 인터뷰 화면을 크게 띄웠다.
“앞뒤를 다시 연결해서 보겠습니다.”
문서를 자기 앞으로 당긴 서하는 회사 서류를 전부 내보낼 수 없다는 건 알았다. 그래도 왜 그 방을 떠나려는지는 서류 없이 말할 수 있었다.
“방이 아깝다는 말, 지우지 않아도 돼요.”
도윤이 고개를 들었다.
“좋아했던 방이니까요. 아까운 건 맞아요. 다만 그다음에 한 말도 같이 있어야 해요.”
서하는 종이에 복원할 질문과 답을 나란히 적었다. 왜 걱정하는지, 무엇이 아까운지, 그래도 왜 이혼하려는지. 각각 다른 질문에 한 대답이었다.
가연은 그중 회사 자료와 연결되지 않는 개인적인 경험과 의사 표현부터 확인하겠다고 했다. 공개가 보류된 업무 자료는 빼더라도, 그 빈자리에 다른 뜻을 넣어서는 안 된다는 의견도 남겼다.
수정할 항목을 추려도 남은 부분이 많았다. 도윤이 펼친 편집표 곳곳에는 회사 관련 장면을 줄여 달라는 요청이 붙어 있었다.
“수정본 받기 전에는 확인했다고 처리하지 말아 주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도윤이 검토 상태를 미완료로 바꿨다. 서하는 화면에서 그 표시가 바뀌는 것까지 보고 가방을 챙겼다.
문 앞에 다다랐을 때, 모니터에서 원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이제 제가 뭘 할지는 제가 정해 보고 싶어요.
문손잡이에 손을 얹고 돌아보던 서하의 발이 문턱 앞에 멎었다. 촬영 때 하지 못한 말이 아니라, 분명히 했는데 사라진 말이었다.
도윤은 영상을 멈추지 않은 채 듣고 있었다. 촬영장에서 직접 들었던 말을, 이번에는 처음 듣는 사람처럼.
“PD님.”
그가 고개를 돌렸다.
“남편이 시킨 일은 아직 못 내보낸다고 하셨죠.”
서하는 원본 화면을 가리켰다.
“그런데 제가 하고 싶은 일은 왜 잘랐어요?”
작업실을 다녀온 뒤로 서하는 노트북 앞에 앉는 시간이 길어졌다. 준혁이 보낸 메시지는 변호사에게 전달했고, 작업실에 남아 있던 개인 원고도 챙겼다. 당장 해결된 일은 없었지만, 적어도 무엇을 잃을 수 있고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는 전보다 분명해졌다.다음 날 오전, 제작진은 정규 4회 편집 회의를 열었다. 채미래와 준혁 사이의 관계가 방송에 들어갈 수 있는 시점이 다가오고 있었다.미래가 공개에 동의하지 않은 부속합의는 구성안에서 제외돼 있었지만, 제작진은 공개된 장면만으로도 관계의 균열을 보여 줄 수 있다고 판단했다. 서하가 준혁의 거짓을 어떻게 확인했고, 자신이 어떤 일을 맡았는지 설명하는 장면이 중심이었다.마케팅 담당자가 편집본을 띄웠다. 서하가 준혁의 개인 해명 영상을 바라보는 장면 뒤로, 준혁과 미래가 행사장에서 나란히 걷는 과거 영상이 붙어 있었다.자막은 ‘아내가 몰랐던 남편의 두 얼굴’이라고 적혀 있었다. 서하는 화면을 끝까지 본 뒤 손을 들었다.“이 장면은 빼 주세요.”“어떤 부분이요?” 담당자가 물었다.“행사장에서 같이 걷는 영상이요. 저 영상만으로는 두 사람의 관계를 알 수 없어요. 제가 그때 몰랐다는 사실을 설명할 자료도 아니고요.”“시청자는 두 사람이 가까웠다는 걸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가까웠다는 건 누구와 누구 사이를 말하는 거죠? 준혁 씨와 미래 씨가 같이 걷는 장면이라면 그 사실만 보여 주면 돼요. 제가 그걸 언제 알았는지는 별도로 확인해야 하고요. 화면에
준혁이 보낸 메시지는 짧았다. ‘그 작업실, 계속 비워 둘 생각은 없어.’ 설명도 이유도 없었다. 서하는 그 문장을 캡처해 변호사에게 전달하고, 작업실에 남아 있는 자신의 물건부터 확인했다.당장 돌려받을 수 있는 공간은 아니었다. 등기는 준혁의 이름으로 돼 있었고, 두 사람이 나눌 정산도 아직 합의에 이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곳에 남겨 둔 원고까지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었다.그녀는 오래된 메모장을 꺼냈다. 작업실을 마련해 주던 날 준혁이 했던 말이 안쪽 표지에 적혀 있었다.‘이제 여기서 네 글을 써.’ 당시 서하는 그 말을 믿었다. 결혼하고 나서 회사의 원고와 남편의 말을 대신 쓰느라 자기 문장을 뒤로 미뤘지만, 언젠가 다시 쓰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작업실은 그 약속이 실제로 이루어질 장소처럼 보였다.그런데 그곳에서 보낸 시간은 생각과 달랐다. 책상 위에는 회사 브리핑 초안이 쌓였고, 벽면에는 일정표와 행사 동선이 붙었다.서하가 개인적으로 쓰던 노트는 서랍 안으로 들어갔다. 준혁은 급한 일이 생길 때마다 그 공간을 회의실처럼 썼고, 서하는 그가 원하는 문장을 정리했다. ‘네 글을 써’라는 약속은 조금씩 ‘내 일을 도와줘’라는 말에 밀려났다.서하는 노트북을 열어 작업실 관리 메시지를 확인했다. 준혁은 다음 주에 중개인을 불러 내부를 확인하겠다고 했다.그동안 남겨 둔 개인 물품은 날짜를 정해 가져가라는 말도 붙어 있었다. 마치 그 공간이 처음부터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는 듯한 문장이었다.그녀는 변호사에게 연락했다.&ldqu
한준혁의 연락은 서하의 변호사를 통해 왔다. 공식적인 조정 일정이나 서면 제안이 아니라, 짧은 문장 하나였다.직접 만나 정리할 일이 있으니 시간을 내 달라는 요청이었다. 변호사는 응할 의무는 없지만, 상대가 어떤 조건을 내놓는지 확인하고 싶다면 대리인과 함께 만나면 된다고 했다.서하는 메시지를 한 번 더 읽었다. 준혁은 업무 기록이 공개된 방송 이후 개인 계정에 입장문을 올렸고, 그 뒤로는 서하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는 일을 줄였다.그렇다고 물러선 것은 아니었다. 그의 말은 이제 ‘내가 직접 했다’에서 ‘최종 승인권은 내게 있었다’로 좁아졌다. 기록이 확인한 순서를 되돌릴 수 없으니, 다른 방식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결론을 만들려는 듯했다.“만나야 할까요?” 서하가 물었다.“만나지 않아도 됩니다. 다만 상대가 정산과 관련된 제안을 하려는 것이라면, 조건을 확인한 뒤 거절할 수도 있습니다. 구두로 합의하지 말고, 어떤 제안이든 문서로 받는 편이 안전합니다.”“방송을 그만두라는 얘기를 할 수도 있겠네요.”“그럴 가능성은 있겠죠. 그 부분은 정산과 분리해서 판단하시면 됩니다.”서하는 잠시 생각한 뒤 만남을 받아들였다. 준혁이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해서만은 아니었다.무엇을 바라는지 직접 듣고,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은 자기 말로 거절하고 싶었다. 준혁이 정해 놓은 이야기 안에서 답만 고르기보다, 어디서 멈출지를 먼저 확인하려는 만남이었다.외부 사무실의 작
채미래의 메시지는 다음 날 오전에 도착했다. ‘잠깐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방송과 무관한 자리였으면 합니다. 문서를 보여 드리겠다는 뜻은 아니고, 제가 확인한 사실을 어디까지 말할 수 있는지부터 정하고 싶어요.’서하는 문장을 천천히 읽었다. 미래는 여전히 공개에 동의하지 않았고, 문서도 제공하지 않겠다고 했다.그래도 먼저 대화를 청해 온 점은 전날과 달랐다. 서하는 이 개인적인 만남이 방송 자료 수집으로 바뀌지 않도록, 답장을 쓰기에 앞서 메시지를 가연에게 전달했다.가연은 짧게 답했다.“만나실 수는 있습니다. 다만 촬영이나 녹음은 하지 않는다고 먼저 분명히 하세요. 대화 중 들은 내용을 나중에 방송에 쓰려면 별도 동의와 검토가 필요합니다. 지금은 당사자가 공개하지 않겠다고 했으니까요.”서하는 그 문장을 그대로 미래에게 보냈다. 잠시 뒤 미래가 답했다.‘그 조건이면 괜찮아요. 장소는 제가 정해도 될까요?’ 서하가 동의하자 방송국과 떨어진 작은 카페로 약속이 잡혔다. 창가 대신 출입문이 보이는 안쪽 자리라, 지나는 사람에게 얼굴이 잘 드러나지 않을 곳이었다.약속 시간보다 10분 먼저 도착한 서하는 물 한 잔을 주문했다. 카페에는 점심을 앞둔 손님이 몇 명뿐이었다. 그녀는 휴대전화 녹음 기능이 꺼져 있는지 확인하고, 화면을 아래로 뒤집어 놓았다.미래를 만나러 온 이유는 정보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상대가 직접 말하고 싶은 범위를 듣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정해 놓고도, 혹시 자신이 듣고 싶은 말만 기다리게 되지는 않을지 걱정됐다.미래는 약속 시간에
채미래는 합의서를 펼쳐 놓고도 한동안 첫 장만 바라봤다. 종이 위에는 자신과 한준혁의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었다. 서명도 있었다.약속을 처음 들었을 때는 그 두 가지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준혁은 이사회 쪽 정리는 끝났고, 혼인 신고만 마치면 자신에게 약속한 지분과 지원이 집행될 거라고 했다. 그 말을 믿었기에 미래는 계약을 읽으면서도 조건을 따지지 않았다.그때는 따지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준혁이 자신을 선택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특별하다고 느꼈다.오랫동안 만난 사이라는 말보다, 한성의 다음 자리에 자신이 함께 설 수 있다는 약속이 더 큰 확신을 줬다. 자신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믿고 싶었다. 서하가 아내라는 자리에서 지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자리를 자신이 차지할 수 있다는 생각에 눈을 감았다.이제는 같은 문장을 다시 읽어도 뜻이 달랐다.‘주식 양도는 혼인 신고 완료 및 이사회 사전 승인 후 별도 절차에 따라 진행한다.’미래는 손가락으로 ‘사전 승인’이라는 단어를 짚었다. 그 아래에는 지원금과 관련한 항목도 있었다.지급 일정은 혼인 이후 별도 합의로 정하고, 이사회 승인이 완료되지 않을 경우 당사자 간 협의를 통해 조정한다는 문구였다. 준혁이 말한 ‘끝난 일’은 문서 안에서 단 한 번도 확정된 적이 없었다.그녀는 합의서를 덮었다가 다시 펼쳤다. 처음 읽었을 때는 정해진 절차를 형식적으로 적어 둔 것이라고 생각했다.준혁은 우호 지분을 이미 확보했다고 했다. 그 말이 맞다면 서류만 갖추면 되는 일이었다. 미래의 시선이 승인 조건에서 멎었다. 이미 가진 것과, 앞으로 받아야 하는 것. 문서에는 그 둘이 같은 말로 적혀 있지 않았다.미래가 꺼낸 다른 파일은 준혁이 약속을 설명하던 날 보내 준 자료였다. 그 화면에는 분명 ‘이사회 우호 지분 기확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당시에는 그 문구를 의심하지 않았다. 누가, 어떤 방식으로, 어느 시점에 확보했는지 묻는 대신 그가 자신에게 보여 준 계획표를 믿었다. 지금 와서 보니 계획표
채미래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한 건 밤 10시가 조금 지난 뒤였다. 서하가 모르는 번호로 받은 문자를 가연에게 전달한 지 한 시간쯤 지났을 때였다.이번에는 발신자 이름이 화면에 떴다. 채미래는 긴 설명 대신 짧은 문장을 보냈다.‘오늘 방송에 나온 리콜 기록과는 별개로, 한준혁 씨와 제가 서명한 부속합의가 있습니다. 그 문서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알아두셨으면 합니다. 다만 지금은 공개에 동의하지 않습니다.’서하는 메시지를 두 번 읽었다. 미래가 무엇을 원하는지, 왜 지금 연락했는지 아직 알 수 없었다.자신에게 유리한 자료를 주려는 것인지, 준혁을 압박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당한 일을 먼저 알리고 싶었던 것인지도 단정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미래는 공개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적었다.서하는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문서가 있다는 사실은 확인했습니다. 공개 동의가 없으므로 방송이나 홍보에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문서의 성격을 확인하고 싶다면, 공개와 무관한 방식으로 연락할 수 있습니다.’답장을 보내고 나서야 손에 들어간 힘이 조금 풀렸다. 메시지를 받은 순간에는 자료가 더 생겼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준혁이 미래에게는 무엇을 약속했을까. 자신에게 하던 말과 어디가 달랐을까. 궁금증에 메시지로 눈을 돌리고도, 서하는 읽고 싶다는 마음만으로 남의 약속을 펼쳐 보일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다.잠시 뒤 미래에게서 답이 왔다. ‘문서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나요? 서하 씨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이미 알고 있잖아요.’그 문장을 오래 보고 있으려니 미래가 자신에게 공감하는 듯도, 자신이 준혁을 공격하는 데 쓰이길 바라는 듯도 했다. 어느 쪽이든 아직은 서하 혼자 붙인 해석이었다.‘제가 아는 건 제게 일어난 일입니다. 미래 씨와 준혁 씨 사이의 약속은 미래 씨가 공개 여부를 정해야 합니다. 문서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내용을 제가 대신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답장을 보낸 뒤로 한동안 소식이 없자 서하는 휴대전화를 뒤집어 놓았다. 그렇다고 이 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