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라울은 다시 도구를 들었다.
세레나는 이번에는 간섭하지 않았다. 성맥의 흐름은 안정되어 있었고,
라울의 손도 정확했다. 끊어진 힘줄과 벌어진 피부가 차례로 이어진 뒤
손바닥 전체를 얇은 천으로 감쌌다.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도록 작은 나무판을 대고 고정하자,
그제야 주변에 서 있던 사람들의 굳은 어깨가 조금 풀렸다.
“며칠은 열이 오르는지 지켜봐야 합니다.”
라울이 말했다.
“상처가 붉게 부어오르거나 냄새가 나면 바로 불러 주십시오.
손가락은 임의로 움직이지 말고요.”
에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레나는 사용인 둘에게 에마를 숙소 안 침대로 옮기라고 지시했다.
에마가 일어나려 하자 다리에 힘이 풀렸고, 세레나가 반사적으로 팔을 받쳤다.
“아가씨, 옷이 다 더러워졌어요.”
에마는 자신의 상처보다 세레나의 치맛자락을 먼저 보고 있었다.
세레나는 피와 약품이 얼룩진 옷자락을 내려다봤다.
“갈아입으면 됩니다.”
“헬레나 부인께서 보시면…….”
“손부터 보세요.”
세레나는 에마가 다치지 않은 손으로 상처를 만지려는 것을 막았다.
“지금부터는 제 옷보다 본인 손을 먼저 걱정하세요.”
에마는 무언가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붉어진 눈가를 들키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숙였고,
사용인들의 부축을 받아 숙소 안으로 들어갔다.
복도에 남은 피와 유리 조각도 대부분 치워져 있었다.
라울은 도구를 닦으며 세레나를 바라봤다.
“영애께서 공작저로 가지 않으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소문은 빠르기도 했다.
세레나는 피 묻은 손을 다시 물에 씻었다.
“가야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공작님께서는 영애의 치료를 원하셨다고 하더군요.”
“환자가 특정 치료사를 원한다고 해서 그 치료사가 반드시 응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전에는 다르게 생각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세레나는 물속에서 손가락을 천천히 비볐다.
손톱 틈에 남은 핏자국이 좀처럼 빠지지 않았다.
“전에는 제가 틀렸던 모양입니다.”
라울은 더 묻지 않았다. 대신 깨진 약병이 담겨 있던 상자를 살펴보더니 표정을 굳혔다.
“약제실에서 쓰는 수면초 추출액입니다. 병이 오래되어 유리가 얇아졌군요.”
세레나는 상자 안을 들여다봤다. 병마다 먼지가 두껍게 앉았고,
마개 주변에는 녹빛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상자 측면에는 석 달 전에 검수됐다는 표시가 있었지만,
병의 상태는 몇 년 동안 방치된 것에 가까웠다.
“석 달 전 검수한 물건이 맞습니까?”
라울의 입술이 가늘어졌다.
“제가 약제실 관리를 맡고 있었을 때는 이런 병을 남겨 두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누가 관리하죠?”
“헬레나 부인께서 새로 들인 집사가 약재 비용과 창고를 맡고 있습니다.
저는 필요한 약을 요청받아 사용하는 정도입니다.”
세레나는 상자에 적힌 검수인의 서명을 확인했다.
낯선 이름이었다.
전생에는 공작저에서 테오도르의 상처와 약만 살폈다.
베일런 저택의 약제실이 어떻게 관리되는지,
사용인들이 어떤 약을 쓰고 있는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가문이 몰락해 가는 동안에도 자신과 관련된 것은
테오도르에게 보낼 편지와 그를 치료할 물품뿐이었다.
에마가 다친 이유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었다.
비용을 줄이기 위해 폐기해야 할 병을 계속 사용했고,
사용인들은 상태도 모른 채 낡은 상자를 옮겼다.
누군가의 손바닥이 찢어진 뒤에야 보이는 균열이 이 저택 곳곳에 남아 있을 것이다.
“이 상자는 버리지 마세요.”
세레나가 말했다.
라울이 눈을 들었다.
“부인께 보여 드릴 생각입니까?”
“장부부터 확인하겠습니다.”
“약제실 장부는 집사만 볼 수 있습니다.”
“베일런 가문의 영애가 베일런 저택의 약품 장부를 볼 수 없다는 뜻인가요?”
라울은 쓴웃음을 지었다.
“가문의 영애가 아니라 안주인의 권한이 문제겠지요.”
세레나는 상자 측면의 검수 표시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잉크가 쉽게 번지지 않았다. 날짜도 서명도 분명했다.
“그 권한이 사람을 다치게 했다면 확인해야 합니다.”
라울은 세레나의 얼굴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상자의 뚜껑을 닫았다.
“제가 보관하겠습니다.”
“누가 가져가려 하면 제 지시라고 하세요.”
“그 말로 막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막지 못하면 누가 가져갔는지 기억해 두세요.”
라울의 입가에 처음으로 희미한 웃음이 스쳤다.
“오늘 아침부터 베일런 저택이 제법 낯설어졌습니다.”
세레나는 소매에 묻은 물기를 닦았다.
“저도 그렇습니다.”
세레나는 다음 날 해가 뜨기 전에 치료원 운영표부터 고쳤다.베일런 제4광맥 외부 기록 보관소까지는 마차로 반나절이 걸렸다.왕복과 현장 확인까지 계산하면 하루 대부분을 비워야 했지만,그녀가 없는 동안 치료가 멈춘다면 지난 며칠 동안 만든 체계는결국 세레나 한 사람에게 의존하는 또 다른 성전이 될 뿐이었다.중증 환자는 브랜든과 요하네스가 나눠 맡고, 약제와 노출 물품 분리는 나디아가 책임졌다.새 환자가 들어오더라도 기존 분류 기준을 먼저 적용하며,판단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세레나의 귀환을 기다리지 말고 두 치료사가 함께 결정하도록 했다. 제6광산촌에 전달한 고농도 성력 관련 관찰 자료도 같은 방식으로 계속 갱신했다.세레나는 마지막으로 빈칸 하나를 남겼다.‘총괄 책임자 부재 시 최종 결정권자.’브랜든이 그 칸을 보다가 말했다.
세레나는 대답하지 않았다.기억이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그녀는 열두 살 때 테오도르의 부상을 치료했던 일은 현재 생에서 할런의 증언으로 확인했고,일부 감각과 장면을 떠올린 적은 있었다.하지만 제4광맥 격리실에서 자신이 기록을 작성했다는 기억은 없었다.테오도르가 낮게 물었다.“기억나십니까?”세레나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요.”그는 더 묻지 않았다.세레나는 장갑 낀 손을 장부 위에 올리지 않고 허공에서 잠시 멈췄다가 내렸다.“기억이 안 난다고 없는 일은 아니겠죠.”“그렇다고 기록 하나 때문에 기억을 만들어 낼
“본당 지시대로 ‘은빛 혈관’이라는 표현을 지우고 ‘혈관성 열증’으로 바꾼 적이 있습니다.집단 사례 번호를 없앤 적도 있습니다.”세레나는 그녀를 오래 바라봤다.“왜 말씀하십니까?”“그게 제가 한 일이니까요.”대답은 짧았다.“그리고 계속 숨기면 지금도 같은 일이 반복됩니다.”세레나는 장갑 낀 손을 허리 앞에 모았다.“증언한다고 책임이 없어지지는 않습니다.”“알고 있습니다.”“황실 조사관에게 정식 진술을 하셔야 합니다.”&
일곱 해 전 4-W 적용 지역 목록.베일런 제4광맥.제5광산촌.두 곳의 민간 정제소.그리고 칼베른 서부 임시 군 의료창고.테오도르의 얼굴이 굳었다.“칼베른도 있었군요.”“네.”이번에는 세레나도 그를 보았다.일곱 해 전.테오도르가 열두 살의 세레나를 처음 만났던 시기와 겹친다.그가 베일런 인근에서 부상을 입었던 시기.현재의 어린 시절 기억 조각과 연결되는 위치였다.하지만 세레나는 그걸 먼저 꺼내지 않았다.테오도르 역시 과거 기억을
그 정도 대화가 자연스럽게 오간 뒤에야 둘 다 잠깐 멈췄다.며칠 전까지만 해도 세레나가 그의 행동을 수정하면 테오도르는 그걸 죄책감처럼 받았고, 세레나는 다시 설명할지 말지부터 경계했다.지금은 조금 달랐다.불편하면 불편하다고 말한다.그래도 필요한 건 받아들인다.세레나는 그 변화에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그 대신 서류를 다음 장으로 넘겼다.오후가 기울 무렵, 건물 바깥에서 낯선 마차 소리가 들렸다.로이스가 먼저 문 쪽으로 움직였다.테오도르는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검을 뽑지 않았다.황실 조사관이 창문으로 밖을 확인한 뒤 말했다.“루멘 성전 마차입니다.”세레나는 시계를 봤다.자신들이 이곳에 들어온 지 세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았다.누군가 소식을 전달했다.정문 앞에 멈춘 마차에서는 북부 지원국 사람이 아니라 중앙 본당 소속 행정사제 둘과 성기사 네 명이 내렸다.가장 앞에 선 사제가 봉인된 문서를 들고 있었다.“황실 조사단이 이 건물에 진입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세레나는 건물 안에서 나가지 않았다.황실 조사관이 먼저 응대했다.“정식 조사 명령에 따른 진입입니다.”“이곳에는 오염 가능 의료 기록이 포함돼 있습니다. 중앙 본당에서 전문 보존을 위해 이관하겠습니다.”세레나는 사제의 문서를 받아 보지 않았다.“오염 가능성이 있습니까?”상대가 그녀를 봤다.“세리스 베인 치료사.”“질문에 답해 주세요. 이 건물 안 기록이 오염됐을 가능성이 있습니까?”“제4광맥 백휘석 분진에 장기간 노출됐을 수 있습니다.”“그럼 옮기면 안 되겠네요.”사제의 표정이 굳었다.세레나는 아주 차분하게 말했다.“오염 여부를 확인하지 않은 종이 상자를 마차에 싣고 사람 많은 중앙 본당까지 운반하는 건 위험합니다.”“본당에는 처리 시설이 있습니다.”“여기서 먼저 표본 검사하면 됩니다.”“중앙 의료감사부 권한으로”황실 조사관이 끼어들었다.“현재는 제국 광산 관련 기록 은닉 가능성을 조사 중입니다. 증거물 이동은 황실 조사단 승인이 필요합니
첫 장 제목.‘루멘 성전 서부 광산 의료위기 대응 절차 4-W.’발행 시기.일곱 해 전.적용 대상.‘백휘석 채굴·정제 시설에서 원인 불명 고열, 은빛 혈관, 환각, 배뇨 감소,비정상 출혈이 집단 발생한 경우.’회의실 안이 조용해졌다.나디아가 가장 먼저 말했다.“증상 자체가 거의 지금이랑 같아요.”세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네.”이제 일곱 해 전에도 같은 임상 양상이 있었다는 사실은 상당히 강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