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에마의 치료가 끝난 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헬레나가 세레나를 찾았다.
시녀가 전한 말은 초대가 아니라 명령에 가까웠다.
즉시 응접실로 내려오라는 것,
옷은 갈아입되 지나치게 시간을 끌지 말라는 것까지 덧붙었다.
세레나는 피 묻은 드레스를 벗었다.
하녀가 새 옷을 내오려 했으나 화려한 장식이 달린 연분홍 드레스 대신
단정한 회색 원피스를 골랐다.
머리도 다시 정교하게 올리지 않고 목덜미 아래에서 낮게 묶었다.
거울 속 열아홉 살의 얼굴은 어린 티가 남아 있었지만,
눈빛까지 과거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목에 걸린 펜던트의 균열은 옷깃 안에 감췄다.
응접실로 향하는 길에 사용인 숙소를 한 번 들렀다.
에마는 침대에 누워 있었고, 다친 손은 베개 위에 올려져 있었다.
옆에는 설탕물과 온도 변화를 기록할 종이가 놓여 있었다.
“아가씨.”
에마가 일어나려 하자 세레나는 손을 들어 막았다.
“그대로 계세요. 열이 오르거나 손가락 감각이 둔해지면 바로 라울 의원님을 부르세요.”
“부인께 가시는 길이세요?”
“네.”
에마의 시선이 세레나의 회색 옷에 머물렀다.
“공작님께 가지 않으신 일로 화가 많이 나셨을 거예요.”
“그럴 겁니다.”
“저 때문에 더 화가 나실지도 몰라요.”
세레나는 에마의 다치지 않은 손 옆에 기록용 펜을 놓았다.
“에마 때문에 제가 공작님께 가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 순서는 바뀌지 않아요.”
에마의 손가락이 펜대에 닿았다.
“그러니 죄송해하지 마세요. 다친 사람이 사과하면,
상자를 관리하지 않은 사람은 편해지니까요.”
세레나는 더 머물지 않고 방을 나왔다.
응접실 문 앞에는 마리엘이 서 있었다.
연한 크림색 드레스와 진주 장식을 한 그녀는 아침부터 벌어진 소란과
전혀 관계없는 사람처럼 흐트러짐이 없었다.
“언니.”
마리엘은 세레나의 소박한 차림을 훑어본 뒤 걱정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공작님께서 많이 다치셨다는데 정말 가지 않으셨어요?”
“네.”
“왜요?”
세레나는 문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가고 싶지 않았으니까.”
마리엘의 미소가 아주 잠깐 멈췄다. 전생의 세레나라면 테오도르와
관련된 질문 앞에서 이유를 길게 설명했을 것이다.
그가 자신에게 어떤 말을 했고, 어떤 표정을 지었으며,
그럼에도 사랑하는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누군가 알아주기를 바랐으니까.
지금은 설명할수록 상대에게 쥐여 줄 것이 많아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언니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이상하네요.”
마리엘이 부드럽게 말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공작님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실 것처럼 보였는데.”
“사람은 어제와 같은 선택만 하면서 살지는 않아요.”
“그래도 공작님께서는 놀라셨겠어요. 늘 언니가 와 줄 거라고 믿으셨을 테니까.”
세레나는 문을 열기 전 마리엘을 돌아봤다.
“그 믿음이 잘못된 것이겠죠.”
마리엘은 대꾸하지 않았다.
응접실 안에는 헬레나와 베일런 백작 오르센이 함께 있었다.
오르센은 창가의 의자에 앉아 있었지만 세레나가 들어와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헬레나는 벽난로 앞에서 검은 부채를 접었다 펴며 기다리고 있었다.
“앉아라.”
세레나는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마리엘은 헬레나 옆에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
탁자 위에는 칼베른 공작가의 문장이 찍힌 봉투가 놓여 있었다.
세레나가 아침에 보낸 소견서보다 훨씬 두껍고 화려한 봉투였다.
헬레나가 그것을 손끝으로 밀었다.
“네가 공작가의 요청을 거절했다고 들었다.”
“맞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지?”
“정식 자격이 없는 제가 공작님의 주치의처럼 불려 다니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지금 와서 자격을 말하는구나. 그동안은 아무 문제 없이 치료하지 않았느냐.”
“그동안 잘못했다면 지금부터라도 고쳐야겠지요.”
헬레나의 부채가 탁자 위에 놓였다.
가볍게 내려놓았는데도 방 안의 공기가 날카롭게 바뀌었다.
“세레나, 칼베른 공작께서 네 치료를 받는 것은 단순한 호의가 아니다.
그분과의 관계가 있기 때문에 채권자들이 우리를 기다려 주고 있는 거야.
네 감정에 따라 움직여도 되는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오르센의 손이 의자 팔걸이 위에서 움찔했지만, 그는 여전히 창밖만 보고 있었다.
세레나는 탁자 위 봉투를 열지 않았다.
“가문의 채무가 어느 정도입니까?”
“공작님께 보여 드릴 게 있습니다.”테오도르가 지도를 내려다봤다.“B-W4.”“아십니까?”“아닙니다. 어제 보고에서 처음 봤습니다.”세레나는 최신 광산 지도를 그 옆에 놓았다.“B-W4는 어머니가 사용했던 베일런 서부 제4광맥 현장 표기와 같습니다.적어도 제가 기억하는 범위에서는요.”테오도르가 바로 연결하지 않았다.“같은 표기 체계를 다른 곳에서도 썼을 가능성은?”“있습니다.”“그럼 아직 베일런 광산과 연결됐다고 단정할 수는 없겠군요.&
세레나는 시간을 듣고 지도를 펼쳤다.해가 지기 전에 다음 역참까지 도착하려면 빠듯해진다.황실 기록관이 말했다.“우회로를 택하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세레나는 바로 결정하지 않았다.칼베른 공병대가 안전하지 않다고 판단한 다리를 서둘러 건너는 선택지는 제외했다.남은 것은 기다림과 우회다.그녀는 도로 관리관에게 우회 산길을 최근 통과한 차량이 있는지 물었다.“오늘 오전에는 소형 마차 두 대가 지났습니다.그런데 약제 마차처럼 무거운 건 추천하지 않습니다.”세레나는 나디아의 약제 상자를 한번 봤다.“기다리겠습니다.”
정오가 지나 첫 번째 산악 관문에 들어섰을 때 길이 막혔다.전날 내린 비로 작은 지류가 불어나면서 오래된 목교 일부가 내려앉았고,관도를 이용하던 마차들이 양쪽에 길게 늘어서 있었다.황실 조사단 마차가 멈추자 세레나는 먼저 내려가지 않고도로 관리관의 설명부터 들었다.“사람이 다친 건 있습니까?”“다리가 무너질 때 지나던 짐마차 한 대가 옆으로 기울었습니다.마부가 팔을 다쳤고, 짐꾼 한 명이 다리에 상처를 입었습니다.”세레나는 브랜든을 봤다.“환자부터 확인하시죠.”브랜든이 고개를 끄덕였고, 세레나와 나디아가 함께 내렸다.다리는 완전히 끊긴 것이 아니었다.
북부로 떠나는 아침, 세레나는 황실 의료감찰원 별관 현관에서 자신의 짐부터 확인하지 않았다.첫 번째 마차에는 환자용 약제와 응급 처치 도구, 두 번째 마차에는 황실 약제 연구실에서 보낸 표본 채취 용기와 봉인함이 실렸다. 나디아가 관리하는 약제 상자에는 각각 번호가 붙어 있었고, 일반 응급약과 백휘석 노출 환자에게 사용할 보조 약물, 제한적으로 가져가는 고농도 성력 증폭제가 서로 다른 잠금장치 안에 들어 있었다. 황실 기록관 두 사람은 조사 서류와 환자 기록용 공책을 따로 보관했고, 정식 치료사 브랜든 유스는 자신이 의료 책임자로 동행한다는 점을 출발 기록에 직접 남겼다.세레나는 그 장부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뒤에야 자신의 작은 여행 가방을 마차에 실었다.안에는 옷보다 의료용 장갑과 필기도구가 많았다.누군가 보기에는 혼인 직후 북부 공작령으로 향하는 공작 부인의 첫 여행이었다.그러나 그녀의 마차에는 혼례 상자도, 공작가 문장이 새겨진 짐도, 칼베른가 사용인도 없었다.나디아가 그 사실을 확인하듯 마차 옆에서 주위를 한번 둘러봤다.“정말 아무도 안 왔네요.”“누가요?”“공작가에서요. 보통 이 정도 되면 사용인 열 명쯤 보내서 부인께서 직접 짐을 드시면 안 됩니다. 같은 말 하지 않나요?”세레나는 마지막 약제함의 봉인을 확인하며 대답했다.“보내지 말라고 계약했습니다.”“계약이 생각보다 바로바로 효과가 있네요.”“효과가 없으면 쓸 이유가 없죠.”나디아는 웃으며 마차에 올라탔다.테오도르는 약속한 대로 두 시간 먼저 제도를 떠났다. 칼베른군 본대는 동쪽 군도로를 사용했고, 세레나의 황실 의료 조사단은 서부 관도를 따라 움직였다. 같은 북부로 향하지만 서로의 이동 속도에 맞추지 않았으며, 역참도 가능한 한 겹치지 않도록 조정했다.세레나는 그 계획을 마음에 들어 했다.결혼했다는 이유로 출발 시각까지 맞출 필요는 없었다.마차가 황실 별관을 떠난 뒤 제도 외곽의 돌길을 지나 넓은 서부 관도로 올라섰을 때, 세레나는 창밖을
제7배수로.오래된 북서 통로.소유권 분쟁 폐광 구역.에드윈이 발견된 지점.그리고 일곱 해 전 지도에 표시된 ‘봉쇄 구역’.모두 가까이 있었다.하지만 아직 한 선으로 이어 붙이지 않았다.그때 황실 전신관이 추가 문서를 가져왔다.“북부에서 하나 더 왔습니다.”세레나가 받았다.에드윈이 안정된 뒤 자신의 외투 안쪽에 숨겨 둔 물건을 직접 꺼내 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작은 황동 열쇠였다.열쇠 자체에는 특별한 표식이 없었다.문제는 함께 있던 종이였다.물에 젖어 절
“황실 의료감찰원 외부 수습 치료사이자 백휘석 노출 사건 조사 참여자.”“혼인 관계는?”“질문받으면 숨길 필요는 없습니다.”“호칭은요?”세레나는 계약 내용을 떠올렸다.공식 법률·외교 행사에서는 필요한 경우 ‘부인’이라는 호칭을 사용할 수 있다.그러나 영지 회의는 애매했다.“처음 소개할 때는 ‘세리스 치료사’로 해 주세요.”“알겠습니다.”“혼인 관계가 법적 이해충돌이나 권한 문제에 영향을 줄 때만 ‘부인’이라고 밝히고요.”“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