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그때 내가 혼약을 깨뜨린 것에 대한 복수인가요?”그녀는 손을 들어 두 눈을 가렸다.손바닥 아래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가슴 한복판이 칼로 도려내는 듯 아팠다.하지만 누구를 탓할 수 있을까.처음부터 모든 것은 그녀가 자초한 일이었다.진심을 다해 내어 준 마음이 이토록 처참하게 짓밟히는 기분이란…… 이런 것이었을까.한동안 침묵하던 김경란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아직 신 선생님께 예를 올리지 못했습니다.”신지완은 손을 내렸다.그녀가 무슨 뜻인지 깨닫기도 전에, 김경란은 몸을 돌려 촛불이 놓인 곳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쿵.이마가 바닥에 닿는 소리가 고요한 방 안에 울려 퍼졌다.쿵.또 한 번의 절.한 번, 또 한 번.그때마다 둔탁한 소리가 신지완의 가슴을 내리쳤다.그녀는 그 자리에 굳은 채, 붉은 혼례복을 입고 죽은 아버지에게 절을 올리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김경란은 한참 동안 이마를 바닥에 댄 채 움직이지 않았다.이윽고 몸을 일으킨 그의 얼굴에는 장난기도, 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오직 감히 가벼이 여길 수 없는 엄숙함만이 서려 있었다.“신 선생님.”그가 낮게 불렀다.“선생님께 약속드렸던 일은…… 결코 저버리지 않겠습니다.”신지완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목구멍이 꽉 막힌 듯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그녀는 그저 김경란을 바라보았다.이 세상에 자신 말고도 아버지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었다.자신만큼이나 아버지의 죽음을 마음에 품고, 그와의 약속을 잊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로 그녀는 줄곧 혼자였다.진실을 밝히기 위해 온갖 수모를 견뎠고, 누구에게도 속마음을 털어놓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버텨 왔다.그런데 지금, 눈앞의 남자가 죽은 아버지에게 절을 올리고 있었다.자신의 생에서 가장 소중했던 두 남자.한 사람은 이미 이 세상에 없었고, 다른 한 사람은 너무나 가까이 있으면서도 감히 마음껏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신지완은 끝내 참지 못하고 얼굴을 가린 채 울음을 터뜨렸다.김경란이 자리에서
신지완은 탁자 위에 남아 있던 술잔을 집어 들었다.김경란의 소매를 가만히 잡아당기자, 그는 저항 없이 그녀를 따라 일어섰다.취기에 잠긴 듯 비틀거리면서도 그녀의 손만큼은 놓치지 않았다. 신지완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방 안으로 이끌었다.문이 닫히자 바깥의 찬바람이 차단되었다.방 안에는 촛불만이 남아 가늘게 흔들리고 있었다.붉은 혼례복을 입은 두 사람의 그림자가 벽에 길게 드리워졌다.그녀는 김경란을 의자에 앉힌 뒤 흐트러진 옷깃을 정돈해 주었다.붉은 옷자락을 매만지던 손끝이 그의 가슴께에서 멈췄다. 조금만 더 가까이 다가가면 서로의 숨결마저 뒤섞일 거리였다.김경란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취기에 흐려진 눈빛이 그녀의 얼굴을 좇았다. 신지완이 시선을 피하려 하자, 그가 문득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지완아.”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신지완의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다.그녀는 대답하지 않은 채 그의 옷깃을 매만지던 손을 거두었다.“가만히 계세요.”신지완은 한 걸음 물러섰다.그리고 달빛을 향해 몸을 돌린 채 엄숙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신씨 가문의 장녀 신지완은 오늘 이 자리에서 맹세합니다.”김경란의 시선이 그녀에게 고정되었다.“금씨 경란에게 시집가, 오늘 밤 하루 동안 부부의 연을 맺겠습니다. 저 하늘의 밝은 달을 증인으로 삼겠습니다.”말을 마친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웃음이라기보다는 오래된 소원을 마지막으로 이루어 보려는 사람의 애틋한 표정에 가까웠다.신지완은 술잔을 들어 술을 따랐다.맑은 술이 잔을 채우는 소리가 고요한 방 안에 작게 울렸다.그녀는 김경란에게 다가갔다.한 걸음,또 한 걸음.마침내 두 사람 사이에 더는 물러설 곳이 없을 만큼 가까워졌을 때, 신지완은 술잔을 입가에 가져갔다.그리고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이 술을 마시면……그대는 제 서방님이 되는 겁니다.”그녀의 숨결이 그의 입술에 닿을 듯 가까웠다.김경란의 목울대가 작게 움직였다.그는 그녀의
김경란은 마치 오랜 세월 굶주렸던 사람처럼 그녀의 입술을 거칠게 덮쳤다.다급하고 절박한 입맞춤이었다.억눌러 온 그리움과 원망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 듯, 그는 그녀가 조금이라도 멀어질까 두려운 사람처럼 품 안에 단단히 가두었다.신지완은 숨을 삼켰다.“김경란…….”그녀는 그의 얼굴을 밀어내려 손을 뻗었다. 손바닥에 닿은 뺨은 술기운으로 뜨거웠다. 고개를 돌리려던 순간, 손끝에 축축한 물기가 스쳤다.눈물이었다.신지완의 손이 멎었다.달빛 아래, 김경란의 눈가가 젖어 있었다.한 방울의 눈물이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려 그녀의 손바닥에 닿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만은 애처로울 만큼 간절했다.그 눈빛을 마주한 순간, 신지완은 더는 모른 척할 수 없었다.차마 그를 밀어내지 못한 채, 망설이던 손끝으로 그의 뺨을 가만히 감쌌다.엄지로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 주는 순간, 그녀의 마음속에서 마지막까지 버티고 있던 무언가가 조용히 무너져 내렸다.그녀가 더는 고개를 돌리지 않자, 김경란의 숨결이 한층 거칠어졌다.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맞추었다. 그리웠던 사람을 되찾은 기쁨과 다시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뒤섞여, 입맞춤은 갈수록 깊고 절박해졌다.“……지완아.”그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마치 꿈속에서조차 수없이 되뇌었던 이름인 듯, 목소리에는 오랜 그리움이 짙게 배어 있었다.“신지완…….”그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눈가에 맺힌 눈물을 조심스레 훔친 뒤 다시 뺨에 입술을 내렸다.한 번으로는 모자랐다.이마도, 눈도, 뺨도.그녀의 얼굴을 하나하나 확인하듯, 오래도록 눈길을 머물고 입을 맞추었다. 그러면서도 손끝만큼은 놀라울 정도로 조심스러웠다. 마치 조금이라도 힘을 주면 눈앞의 사람이 꿈처럼 흩어져 버릴까 두려운 듯했다.“정말…… 돌아온 거야?”김경란이 물었다.그의 눈동자에 달빛이 가만히 흔들렸다.신지완은 대답하지 못했다.그녀의 침묵마저 두려운 듯, 김경란은
혼례복이 완성되었을 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다.신지완은 하루 종일 노파의 곁에서 옷을 만드는 일을 도왔다. 고명주와 체형이 비슷한 덕분에 치수를 새로 잴 필요는 없었다. 남은 비단을 적당히 자르고 서둘러 꿰매니, 해가 지기도 전에 옷 한 벌이 겨우 완성되었다.물론 제대로 된 혼례복이라고 부르기에는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금실로 수놓은 장식은 거의 없었고, 옷자락의 마감도 거칠었다. 붉은 비단을 입은 여인은 분명 혼례를 앞둔 신부의 모습이었지만, 신지완은 자신의 얼굴에서 기쁨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등불이 희미해진 복도를 지나 자신의 거처로 향했다.밤바람이 제법 차가웠다.정원을 가로지르던 신지완은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뜰 한구석, 오래된 석탁 앞에 붉은 그림자가 앉아 있었다.달빛 아래로 술병 몇 개가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사내는 한 손에 술잔을 든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붉은 옷자락이 밤바람에 가볍게 흔들렸다.김경란이었다.신지완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그 역시 혼례복을 입고 있었다.붉은 비단에 금실이 수놓인 옷은 고명주의 혼례를 위해 준비한 것일 터였다. 그러나 달빛 아래 드러난 그 옷의 빛깔은 신지완이 입은 것과 다르지 않았다.같은 붉은 비단.같은 혼례를 앞둔 밤.다만 그는 고명주의 신랑이 될 사람이었고, 그녀는 고재상의 첩이 될 사람이었다.신지완은 입술을 깨물었다.세상에 이렇게 잔인한 우연도 있을까.김경란은 술잔을 들어 단숨에 비웠다. 잔이 비자 곧바로 술병을 기울였다. 술이 넘칠 듯 찰랑거렸지만,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신지완은 문득 오래전의 일을 떠올렸다.가난한 서생이던 시절, 김경란은 술을 입에 대는 법이 없었다. 술 한 잔 살 돈이 있으면 차라리 책을 사겠다고 하던 사람이었다. 그녀가 장난삼아 술을 권해도 그는 고개를 저으며 웃기만 했다.그런데 장원 급제 후에는 달라졌다.신지완은 그가 술을 마시는 모습을 몇 번이나 보았다. 연회에서 억지로 잔을 비우는 모습도, 늦은 밤 홀로 술을 마시는 모습도
다음 날 아침, 고씨 저택은 이른 새벽부터 떠들썩했다.하인들은 마당을 오가며 붉은 비단을 나르고, 처마 밑에는 혼례에 쓸 장식들이 하나둘 걸리기 시작했다. 평소보다 몇 배는 분주한 모습이었다.신지완은 창가에 앉아 바깥을 바라보다가 헛웃음을 흘렸다.황후의 생신 연회가 아직 열릴지도 않았다. 조정에서 정식으로 교지를 내린 것도 아니었다.그런데 벌써 혼례 준비라니.‘이렇게까지 서두를 일이야?’신지완은 입술을 비틀었다.그때 문밖에서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신 소저, 안에 계시오?”문을 열자 허리가 굽은 노파 하나가 서 있었다. 고씨 집안에서 오래 일한 하녀인 듯했지만, 신지완은 얼굴을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대감의 분부로 모시러 왔소. 따라오시오.”신지완은 무슨 일인지 묻기도 전에 노파에게 이끌려 별채로 향했다.방 안에는 붉은 비단과 금실로 수놓은 장식들이 널려 있었다. 한쪽 탁자 위에는 자와 가위, 바느질 도구까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노파는 그녀를 방 한가운데 세우더니 다짜고짜 옷자락을 잡아당겼다.“자, 옷부터 벗으시오.”신지완은 황급히 노파의 손을 쳐냈다.“지금 무슨 짓을 하시는 겁니까?”“무슨 짓이라니? 혼례복을 맞추려면 치수를 재야 할 것 아니오.”노파는 오히려 당연한 일을 왜 묻느냐는 듯 눈을 흘겼다.“곧 대감의 첩이 되실 분이니, 혼례복 한 벌쯤은 있어야지. 소저도 이제 신분이 달라지는 셈이잖소. 기루에서 몸을 팔던 여인이 대감의 첩이 된다니, 그야말로 팔자가 핀 거지.”말끝마다 비웃음이 묻어났다.신지완은 주먹을 꽉 쥐었다. 면사 아래로 드러난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노파는 그런 그녀의 기색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붉은 비단을 집어 들었다.“사실 이런 좋은 비단은 기루 출신이 입기엔 과분하지. 하지만 명주 아가씨께서 특별히 베푸신 은혜니 고맙게 여기시오.”“……고명주 아가씨가요?”“그렇소. 아가씨께서 장원랑과 혼례를 올리실 예정이라 혼례복을 준비하고 계시거든. 신랑 신부의 옷을 만들고도 비단이 조금 남았는데
병풍 너머로 맑은 피리 소리가 흘러나왔다.곧이어 거문고의 선율이 그 뒤를 따랐다.처음에는 서로 다른 두 악기의 소리였다. 그러나 몇 마디가 지나자 피리와 거문고는 마치 서로의 마음을 읽기라도 하는 듯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피리가 높이 오르면 거문고가 부드럽게 받쳐 주었고, 거문고의 선율이 잦아들면 피리가 그 빈자리를 채웠다.말 한마디 없이도 서로의 뜻을 알아듣는 연주였다.고명주는 병풍 뒤에서 눈을 크게 떴다.거문고 소리가 이렇게 아름다웠던가?평소 음악에는 영 소질이 없던 그녀조차 넋을 놓고 귀를 기울였다. 자신이 연주하는 시늉만 하고 있다는 사실도 잠시 잊을 만큼 훌륭한 선율이었다.반면 병풍 밖에 서 있던 김경란은 거문고를 연주하는 신지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그녀는 여전히 같았다.거문고를 잡으면 온몸에서 빛이 나는 듯했다. 현을 짚는 손끝은 망설임이 없었고, 고개를 살짝 숙인 옆모습에는 누구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고요함이 깃들어 있었다.오래전에도 그랬다.그는 한때 그녀의 연주를 듣기 위해 일부러 서재에서 나오곤 했다. 그녀가 자신에게 거문고를 가르쳐 주던 시간도, 연주를 마친 뒤 자랑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던 모습도 여전히 생생했다.김경란의 입가에서 희미한 웃음이 사라졌다.그는 시선을 거두지 못한 채 낮게 중얼거렸다.“……여전하군.”마침내 마지막 선율이 잦아들었다.정원에는 한동안 여운만이 남았다.최수아는 피리를 내린 채 움직이지 못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눈물을 쏟아 냈다.“수아 언니?”병풍 뒤에서 고명주가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최수아는 눈가를 훔치며 고명주에게 다가왔다.“명주 아가씨, 미안해요. 제가 그동안 아가씨를 잘못 알고 있었어요.”“네?”고명주는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밖에서 들은 말만 믿고 아가씨를 편견에 가득 찬 눈으로 바라봤어요. 그런데 오늘 연주를 듣고 나니 알겠어요. 아가씨가 얼마나 깊은 마음을 지닌 분인지…….”고명주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그녀는 거문고를 제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