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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잔상과 공허

Author: 다경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7-28 16:51:09

다음 날.

오전 10시 35분.

나는 평소보다 훨씬 늦게 잠에서 깼다.

"으... 머리가 왜 이렇게 아프지?"

잠에서 깬 나는 천천히 일어나 물을 마시기 위해 냉장고를 열었다.

"...! 아, 소연이!"

냉장고를 열자, 갑자기 떠오른 기억에 나는 황급히 냉장고를 닫고, 침대 위에 놓여 있던 핸드폰을 들었다.

"제발... 모든 게 꿈이었길..."

나는 핸드폰 잠금 화면을 풀자마자 카톡에 들어갔다.

'소연이에게 연락이 와 있을까...?'

하지만 내 간절함이 무색하게, 카톡에는 어제 읽지 못한 생일 축하 메시지와 광고만 있었고, 소연이와의 채팅방은 한참을 내려야 겨우 보였다.

"..."

나는 순간 온몸이 굳었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어제의 모든 일들을 부정했다.

"아니야... 소연이가 아직 안 일어났나?"

하지만 현실을 끝까지 부정하던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소연이의 프로필에는 나와의 흔적이 전부 사라져 있었다.

"아니야... 아니잖아... 이거 꿈이지?"

지이잉. 지이잉.

그 순간, 여사친 임지윤에게 전화가 왔다.

"연우, 나 3천 원만 빌려줘."

"지윤아..."

"응?"

"혹시 너도 소연이 프로필에 아무것도 없어...?"

"김소연? 원래 아무것도 없었을걸...? 아닌가?"

지윤이와의 대화 도중, 나는 어제 소연이에게 걸었던 전화들과 소연이가 보낸 문자가 떠올랐다.

"나 확인할 게 있어서 끊을게. 미안해."

"잠깐, 3천..."

뚝.

곧바로 어제의 통화 기록을 확인했고, 더 이상 어제의 일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럼 문자는..."

나는 겁이 났다. 내가 기억하는 모든 게 현실일까 봐 문자를 들어가기 주저했다.

"못 보겠어..."

결국 끝까지 문자를 보지 못했다.

다시 보면 내가 기억하는 모든 게 현실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으니까...

지이잉. 지이잉. 지이잉.

그때 걸려온 건 지효의 전화였고, 나는 잠시 전화 받는 것을 망설였지만, 물어볼 것이 많았기에 결국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제 잘 들어갔냐?"

'어제... 그렇구나... 다 진짜였어...'

지효의 첫마디에 묻고 싶었던 말은 전부 꺼낼 수 없게 되었고, 어떤 말도,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야! 듣고 있냐?"

"..."

"우리 집에 와. 니 뭐 두고 감."

"12시까지 와라. 안 오면 이거 버림."

"...?"

뚝.

지효는 자기 할 말만 하고 바로 끊었다.

'뭘 두고 왔지...?'

핸드폰을 보니 시간은 11시였고, 나는 생각을 정리할 틈도 없이 서둘러 나갈 준비를 했다.

씻고 옷을 갈아입으니, 어느덧 시간은 12시가 거의 다 되어 갔다.

"하... 택시 타야겠네..."

서둘러 택시를 불렀고, 신발을 신고 집을 나서니 택시가 집 앞에 도착해 있었다.

"안녕하세요, 기사님."

택시는 내가 미리 설정해 놓은 목적지로 학교를 가로질러 갔고, 나는 밖을 보며 소연이와의 추억을 떠올렸다.

'저 건물 학식... 소연이가 많이 좋아했는데...'

'저기서 소연이 사진 찍어 줬었는데...'

끊임없이 떠오르는 추억에 나는 눈을 감았지만, 머릿속에는 여전히 소연이와의 추억이 그려졌다.

5분... 10분...

그렇게 시간이 흘러, 택시는 지효의 아파트 앞에 도착했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시간은 12시가 넘어 있었고,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8층으로 올라갔다.

8층에 도착해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고, 지효의 집 문 앞으로 가 보니 밖에서 들릴 정도로 안이 소란스러웠다.

"뭐야...? 누가 있나?"

띵동.

지효가 문을 열어 주었고, 안에는 내 중·고등학교 때 친구 두 명이 와 있었다.

"???"

"야, 늦었으니까 니가 저거 옮겨라."

"연우 하이." 

"연우 오랜만." 

나와 같은 대학의 경영학부에 재학 중인 정시영, 공시생 김윤석 이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집 내부는 어제 내가 본 모습과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박스에 그대로 있던 이삿짐들은 대부분 정리되어 빈 박스만 남아 있었고, 쌓여 있던 설거지도 전부 사라졌다.

"야, 니가 저 상자 좀 방에 옮겨 줘."

"뭔데?"

"내 옷. 존X 무거워."

지효는 큰 박스를 가리켰고, 나는 상황 파악할 틈도 없이 지효에게 등 떠밀려 박스를 옮기러 갔다.

'옷인데 뭐가 무겁다고...'

"...!!!"

"ㅋㅋ. 무겁지?"

나는 박스를 힘겹게 들고 방으로 옮겼다.

"끝! 이제 나와."

"야, 내 물건은?"

"일단 나와."

나는 거실로 나갔고, 거실 소파에는 친구들이 앉아 있었다.

"너희는 왜 온 거야?"

"아마 너랑 같은 방식으로...?"

"설마..."

내가 설마 하는 마음으로 지효를 쳐다봤고, 지효는 그런 나를 보며 웃었다.

"ㅋㅋㅋㅋ."

"야, 니..."

"야, 니가 혼자 청승 떨고 있을까 봐 불렀지."

"하..."

나는 한숨을 쉬었지만, 내심 지효에게 감사했다. 지효가 아니었으면 집에서 소연이 생각만 했을 게 뻔했으니까.

"너도 앉아. 야, 짜장면 시킨다?"

"구라로 우리 불러서 일 시켜 놓고 고작 짜장면?"

"양심 터졌네."

지효의 말에 친구들은 불만을 표출했다.

"탕수육 추가."

"탕수육 가지고?"

"칠리새우 추가."

"콜."

친구들의 불만은 칠리새우에 졌고, 나는 그 모습에 웃음이 터졌다.

"야, 연우야."

"응?"

"너 헤어졌다며."

앉아있던 시영의 말에 나는 잠시 침묵했고, 그 모습에 아차 싶었는지 나를 위로했다.

"야, 괜찮아. 세상의 반이 여자야."

"근데 닌 왜 여친이 없냐?"

"닌 있냐?"

"난 있는데?"

"개부럽네, 진짜..."

친구들은 서로 티키타카하며 재밌게 대화했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고, 지효는 그런 나를 보고 뭔가 생각났는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야, 이 X끼 어제 신발장에서..."

"야...! 배달 언제 온대?"

나는 지효의 말을 끊었고, 화제를 돌리기 위해 윤석이의 연애 얘기를 꺼냈다.

"윤석아, 여자친구랑 며칠이야?"

"이제 100일 거의 다 됐어."

"100일..."

나는 이 얘기를 꺼내면 안 됐다.

'100일'이라는 말에 내 머릿속에는 소연이와의 100일 때 추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니, 이 얘기뿐만이 아니었다.

어떤 얘기를 들어도 그 안에 담긴 단어 하나하나가 소연이와의 추억으로 이어졌다.

대화 주제는 여러 번 바뀌었고, 친구들은 각자 많은 얘기를 했지만, 나는 단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띵동.

"배달 왔나 보네."

시간이 흘러 배달이 도착했고, 나와 친구들은 문 앞에 놓인 음식을 가져와 먹기 좋게 세팅했다.

"잘 먹을게."

"정당한 보상이지, 이건."

"..."

나는 아무 말도 없이 짜장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입가에 짜장면을 묻히며 먹던 소연이, 그걸 닦아주던 나.

내 머릿속은 고장이라도 난 듯, 떠올리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소연이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때였다.

퍽.

"...아!"

내 모습을 보다못한 지효가 내 뒤통수를 세게 쳤다.

"청승 그만 떨고 처먹어."

"...잘 먹을게."

우리는 짜장면을 먹으며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음식을 다 비웠다.

"아, 배불러."

"칠리새우 진짜... 개맛있네."

"이 집 맛있는데? 어디냐?"

"연우는 맛이 없었나 봄."

"응...? 아니야. 진짜 맛있었는데."

우리는 쓰레기를 치우고 바닥을 닦는 등 뒷정리를 했고, 뒷정리가 끝나자 지효는 방에서 플X를 가져와 TV에 연결했다.

"와, 이거 최신형 아님?"

"이게 공시생?"

친구들은 플X를 보며 많이 좋아했지만, 나는 좋아할 수 없었다. 소연이와의 온갖 추억들이 계속 떠올랐으니까.

나는 친구들에게 자꾸만 떠오르는 추억 탓에 어두워지는 내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괜히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나 먼저 갈게."

"아, 정연우 분위기 깨네."

"이걸 안 한다고?"

"야, 어디 가?"

"나 집에 부모님 오신대서..."

"아, 인정."

내 말에 시영이와 윤석이는 큰 의심 없이 알겠다고 했지만, 지효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진짜야."

"누가 뭐래?"

"니가 그런 눈으로 쳐다보니까."

"뭐래. 또 택시 불러줘?"

"아니, 어제 택시비나 줘."

"잘 가."

"..."

나는 친구들과 인사한 후 집을 나갔다.

"집 가긴 싫은데..."

미안함에 지효의 집을 나오긴 했지만, 그렇다고 내 자취방에 가기는 싫었다.

나는 엘리베이터에서 한참을 고민했다.

'공원...?'

문득 어제 소연이와 마지막에 갔던 공원이 떠올랐고, 나는 목적지를 그 공원으로 설정해 택시를 불렀다.

5분 뒤, 택시가 도착했고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눈을 감은 채 목적지까지 이동했다.

"손님, 도착했어요."

"아, 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택시에서 내려 공원 안으로 들어갔고, 소연이와 앉았던 벤치를 찾아갔다.

"기억엔 이쯤이었던 것 같은데..."

"아, 찾았다!"

벤치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니, 소연이가 나를 떠나간 그 길이 보였다.

"...다 현실이네."

나는 그 길을 바라보며 소연이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너한테 정말 실망했어...'

이 말을 떠올림과 동시에 내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나는 혹시 사람들이 볼까 봐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을 켜 소연이가 보낸 문자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소연이가 보낸 문자를 다시 하나씩 천천히 읽었고, 다 읽을 즈음에는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흐르고 있었다.

"내가 대체 무슨 짓을..."

지금의 내 옆에는 이 상황을 탓할 사람도, 나를 위로해 줄 사람도 없었다.

오직 나 혼자 견뎌 내야만 했다.

나는 입술을 꽉 깨물며 정말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눈물을 흘렸다.

핸드폰이 내 손에서 떨어진 것도 모른 채...

그렇게 한참 지나서야 정신을 붙들고 공원 화장실로 가 눈물을 닦았다.

"하..."

나는 세수를 한 후 휴지로 얼굴을 닦았고, 화장실을 나와서야 핸드폰이 없어진 것을 알아차렸다.

"벤치에 두고 왔나...?"

나는 다시 돌아가 벤치 위를 확인했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떨어졌나 싶어 벤치 아래를 살피던 그때, 한 여자가 뒤에서 말을 걸었다.

"저기... 이 핸드폰 주인 맞죠?"

그 말에 나는 뒤를 돌아, 그 여자가 들고 있던 내 핸드폰을 봤다.

"네, 맞아요... 감사합니다."

여자는 핸드폰을 나에게 건넸고, 나는 운 것이 들킬까 봐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감사 인사를 한 후 자리를 벗어났다.

나는 공원 밖으로 나가 택시를 타고 내 자취방으로 향했다.

자취방에 도착해 안에 들어가 곧바로 침대에 누웠다.

미칠 것 같았다. 가만히 있어도 계속 떠오르는 소연이의 마지막 말과 문자 내용에, 내가 했던 의심을 끊임없이 후회하고 나 자신을 원망했다.

'소연이는 나를 위해 많은 걸 해줬는데...'

'나는 고작 그런 걸로 의심하고 몰아붙였다니...'

'나에게 실망하는 건 당연한 거겠지...'

나는 소연이와의 추억을 회상하고, 그날 일을 되새기며 나 자신을 원망할 뿐이었다. 찾아갈 용기도, 다시 연락할 용기도 낼 수 없었다.

나는 그날 이후로 방학 동안 친구들과의 연락, 만남을 피했다.

지효의 전화.

"야, 밥 먹자."

"미안... 오늘 본가에 가야 해."

시영, 윤석, 지윤, 그 외 다른 친구들의 연락은 읽지 않는 등 스스로를 외부와 단절시켰다.

그렇게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시간을 흘려보내는 날이 반복됐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9월 2일, 개강 날이 다가왔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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