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맞습니다.”
강옥보다 설연이 먼저 대답했다.
잔 부딪치는 소리가 끊겼다. 멀리 물 위에서 등잔 하나가 흔들렸다. 누군가 들이켠 숨이 지나치게 크게 들렸다.
설연은 등을 폈다.
“제 이름은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귀비의 부채가 멎었다.
부인하면 흉터를 보이고, 다시 부인하면 유모를 압박할 생각이었다. 준비해 둔 질문들이 한꺼번에 쓸모를 잃었다.
그녀는 곧 표정을 가다듬었다.
“역적의 핏줄이 이름을 속이고 궁에 들어왔구나. 대군께서도 아셨습니까?”
무강이 일어났다.
상처를 감춘 옷깃이 아주 조금 당겨졌다. 설연은 그의 손이 탁자 끝을 짚었다가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내가 보증했다.”
“정체를 아시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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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죽음으로 나를 감췄는데.”설연은 구출의 사연을 더 묻지 않았다. 임경은 손바닥으로 종이를 폈다. 죽은 설씨 여식 한 명을 명부에 보태기 위해 낸 정정 청이었다.“마마께서는 시신을 보지 못하셨습니다. 제가 대신 수습 확인을 했다고 적었습니다.”“그럼 당신도 거짓 증인이네.”“예.”정문익이 임경의 얼굴을 보았다.“지금 제출하면 그 책임도 묻게 될 수 있소.”집사는 고개를 숙였다.“살아 계신 분을 지키는 것과, 그분이 알아야 할 일을 감추는 것은 같지 않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누구한테.”“마마께서 오늘 사람을 보내셨습니다. 물으시는 것은 숨김없이 답하라고. 기록도 모두 내라고 하셨습니다.”설연은 종이를 손대지 않고 읽었다. 무강이 당장 자신을 찾아와 설명하지 않고, 자신의 거짓말을 확인할 증거를 보냈다는 사실은 알았다. 그것으로 상처가 덜 아프지는 않았다.정정 청에는 시신 번호가 없었다.“다른 사람 몸을 내 이름으로 묻은 건 아니야?”“그런 지시는 없었습니다. 저는 관노청에 서류를 냈을 뿐이라 매장 현장까지 알지는 못합니다.”설연은 이 대답도 적게 했다. 빈 무덤일 수도, 다른 사람의 무덤일 수도 있었다. 위로가 되는 쪽을 먼저 고르고 싶지 않았다.백현은 그녀 앞에 물을 놓았다. 손잡이가 오른쪽으로 돌아가 있었다. 설연은 그릇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나는 살았는데 누군가 딸을 못 찾게 됐을 수도 있네.”“확인하자.”백현은 괜찮다고 말하지 않았다.“확인해서 있으면 이름을 돌려주자. 없으면 없다고 적고.”설연이 눈을 감았다. 해야 할 일이 생기자 울음이 조금 늦춰졌다.정문익은 다음날 관노청 수습 명부와 정정 접수 기록을 대조하기로 했다. 임경의 증언과 문서를 따로 봉했다. 옥분의 행방도 독립된 조회 항목으로 적었다. 설씨 가문의 딸만 살아 돌아왔다고 그날의 사람이 모두 계산된 것은 아니었다.늦은 밤, 출궁 허가가 내려왔다. 설연은 아란에게 자신의 칼을 받아 허리에 찼다. 강옥의 병상에는 들어가지 않고 아란에게 말을
정문익은 임경을 부르겠다고 답했다. 그 약속을 들은 뒤에야 설연은 걸음을 옮겼다.백현은 걸음을 맞췄다. 팔을 잡지도, 괜찮으냐고 묻지도 않았다. 다만 사람들이 마주 오면 자신이 바깥쪽으로 섰다. 설연은 그 작은 움직임들을 모두 알고 있었다.진료실 앞에서 그녀가 멈췄다.“여기에는 들어가기 싫어.”강옥이 있었다. 용서하지 못한 사람이 한 방에 둘이면, 자신의 숨을 어디에 놓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백현은 아란을 불렀다. 아란은 설연의 얼굴을 보더니 먼저 빈 처치실의 문을 열었다. 궁 밖으로 데려가는 일은 출궁 절차와 증인 경호를 정리한 뒤에 할 수 있었다.“여기서 손부터 다시 감자.”아란은 피 묻은 붕대를 적셔 천천히 풀었다. 설연은 상처를 보지 않았다.“그 사람이 나를 구했대.”“들었어.”“그래서 더 모르겠어.”아란의 손이 잠시 멈췄다.“모르면 오늘 정하지 마. 상처도 하루에 두 번 꿰매면 더 벌어져.”백현이 문가에서 낮게 말했다.“나는 내일 미워할 것도 오늘 미리 미워하는 편인데.”“그래서 네 얼굴이 그렇게 피곤하지.”설연의 입술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웃음까지는 가지 못했으나, 숨이 한 번 편하게 나왔다. 아란은 그 정도면 됐다는 듯 새 천을 감았다.밤이 되기 전 임경이 도착했다. 조사를 위한 출입 허가를 받은 집사는 상자 하나를 품고 있었다. 무강은 동석하지 않았다. 정문익이 먼저 말해 두었다. 누구의 진술과 맞춰야 하는지 알려 주지 않겠다고.임경은 의자 끝에 앉았다.“동짓날 밤, 무엇을 맡았소?”“마마께서 화상 입은 여식을 안고 오셨습니다. 이름은 묻지 말라 하셨습니다.”“얼굴을 보았소?”“피와 그을음이 많았습니다. 지금 이분이라고 제 기억만으로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설연은 처음으로 그의 눈을 보았다.임경은 상자를 열었다. 구호소에 지불한 약값 수령증과 당시 집안 지출장이 있었다. 허리의 화상 약과 여식의 손·얼굴 처치 비용이 따로 적혀 있었다. 날짜와 구호소 이름이 무강의 진술과 맞았다.정문익은 종이를 바
“그 아이는.”설연은 다른 말부터 묻지 않았다.무강이 고개를 숙였다.“그날 데려오지 못했다.”“그다음 날에는?”붓끝에서 먹 한 방울이 떨어졌다. 정문익이 천으로 닦았다. 무강은 그 작은 움직임이 끝나기 전에 대답했다.“관노청에 넘겨졌다는 말만 듣고 이름을 찾았다. 명부가 바뀌었다고 했다. 더 따지면 네 생존을 다시 조사하겠다는 전갈을 받았다.”“그래서 멈췄어.”“그래.”설연은 손을 무릎 위에 놓았다. 탁자를 또 쥐면 아플 것을 이제 알았다.“그 사람 딸 이름은 기억해?”무강이 눈을 들었다.“옥분.”설연의 입술이 떨렸다. 마구간 뒤 우물가에서 머리 땋는 법을 가르쳐 달라던 아이였다. 가족의 얼굴에 가려 잊고 있던 이름이 살아 있는 사람의 입에서 나왔다.“그 이름도 적어 줘.”그녀가 정문익에게 말했다.무강은 다음 말을 기다렸다. 용서하지 않겠다는 말도, 원망도 나오지 않았다. 설연은 자신의 죽음을 피한 다음부터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다.그는 계속 진술했다.일인용 반출패를 들고 문밖으로 나왔을 때 소녀는 기침조차 하지 않았다. 병사는 칼끝으로 패의 인장을 확인하고 길을 비켰다. 무강은 소녀를 겉옷으로 감싸 말에 태웠다. 담 안쪽에서 누군가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그는 손을 떼어 냈다.무엇이라고 약속했는지는 기억하고 있었다.돌아오겠다.그 말을 하고 돌아가지 않았다.설연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나를 어디로 데려갔어?”“성 서쪽 구호소. 집사 임경에게 너를 맡겼다. 의원에게는 신원을 모르는 화상 환자라고 말했다.”“그 뒤에는?”“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네가 없어졌다. 임경이 사흘을 찾았지만 발견하지 못했다.”그 대목에서 설연의 기억이 이어졌다. 짚 냄새가 나는 방. 얼굴을 살피던 낯선 손. 문밖에서 설씨 여식을 찾는다는 소리를 듣고 창 아래로 몸을 밀어 넣었던 밤.그녀는 기억난다고 말하지 않았다. 먼저 그의 진술을 끝까지 듣기로 했다.“그래도 살아 있다는 건 알았잖아.”“그랬다.”“왜 진실을 알릴 생각은 안 했
“돌려보낸다니.”설연의 목소리가 마른 종이에 긁혔다.“나는 그때 어디 있었는데.”무강은 탁자 건너 그녀를 보았다. 대답을 시작하기 전에 손을 뒤로 감췄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그 버릇까지 숨기는 것처럼 보일까 두려웠다.“서쪽 담 밖. 내 품에서 시위에게 넘어간 뒤였다.”정문익이 붓을 들었다. 지금부터 적히는 것은 확인된 사실이 아니라 무강의 진술이었다.칠 년 전, 무강이 설가에 도착했을 때 대문은 이미 불에 잠겨 있었다.그는 담 아래 젖은 짚을 밟고 넘어갔다. 옆문에서 창을 겨누던 병사가 그의 얼굴을 알아보고 무기를 내렸다. 그 틈으로 안채에 들었다. 어디선가 기침이 났다. 불 타는 소리에 묻혔다가, 다시 났다.“누가 있느냐!”무너진 장롱 옆에서 손 하나가 움직였다.무강은 들보를 밀었다. 타들어 간 나무가 옆구리를 눌렀다. 옷 안으로 불씨가 들어왔다. 이를 악물고 몸을 비틀자 틈이 벌어졌다. 소녀의 왼손이 달아오른 쇠장식을 쥔 채 굳어 있었다.“놓아. 손을 놓아야 나갈 수 있어.”소녀가 고개를 저었다. 눈썹 끝에서 피가 흘렀다.“어머니가…….”그 뒤는 기침이었다.무강은 손가락을 하나씩 펴고 소녀를 끌어냈다. 문밖으로 나올 때 들보가 내려앉았다. 뜨거운 바람이 등을 떠밀었다. 그는 소녀의 얼굴을 가슴에 묻고 담의 무너진 곳으로 달렸다.밖에서는 창끝이 기다렸다.“폐하께서 확인하신답니다.”무강은 자신의 신분을 말했다. 병사는 물러나지 않았다. 담 건너 임시 지휘소 앞에 황제의 가마가 있었다. 호위병은 길을 막았고 소녀를 넘기라고 했다.
종이 아래쪽이 검게 그을려 있었다.설연은 불에 닿은 자리를 먼저 보았다. 손바닥의 흉터가 욱신거렸다. 원본을 가져온 서고 관원이 문서가 보관된 함의 번호와 이관 내역을 읽었다. 정문익은 등본을 곁에 놓고 문장마다 짚었다.일치했다.설씨 일문에 대한 토벌. 자시의 발령. 군사를 통솔할 권한. 그리고 무강의 이름.설연은 이름 위에서 눈을 멈췄다.글씨가 급하지 않았다. 획을 중간에 고쳐 쓴 흔적도 없었다. 남의 손에 붙잡혀 겨우 그은 선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글씨 모양만으로 서명한 사람의 마음까지 알 수는 없었다.그래서 그녀는 물었다.“당신 것이야?”“내가 썼다.”회랑에서 들은 말을 그가 다시 했다.정문익이 서고 관원을 보았다. 관원은 당시 군문에서 보관한 서명 대조첩을 펼쳤다. 같은 달의 군량 지급 명령과 병사 귀환 허가가 있었다. 다른 사람을 먹이고 돌려보내던 이름이, 이 종이에서도 같은 자리에 놓여 있었다.설연은 웃을 뻔했다.어제 자신의 손에 붕대를 감아 주던 손이었다. 아무것도 빼앗지 않을 것처럼 천천히 다가오던 손.그 손으로 이런 글도 쓸 수 있었다.“왜 자시야.”그녀는 목소리를 눌렀다.“신시에 군사들이 서문을 막았어. 술시에는 화상 입은 사람들이 의원에게 왔고. 그런데 왜 명령은 자시에 나왔지?”무강의 시선이 문서에 내려앉았다.“내가 서명하러 갔을 때 이미 불이 났다.”정문익의 붓이 움직였다.설연이 그를 돌아보았다.“그럼 늦게 도착한 거야? 아무것도 못 해서 이름만 빌려준 거야?”자신이 그에게 도망갈 길을 만들어 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화가 났다. 그보다 먼저 무서웠다. 차라리 그가 고개를 끄덕였으면 하는 자신이.무강은 그 길로 가지 않았다.“그렇게 말하면 내가 한 일이 작아진다.”그가 문서 중간을 가리켰다.잔여 인원의 처분을 군문에 일임한다는 문장이 있었다. 뒤에 붙은 작은 별지는 당시에 넘겨받은 사람들을 기록한 목록이었다. 설연은 눈으로 수를 세다가 멈췄다. 이름 대신 남녀와 나이만 적힌 줄이
“듣겠습니다.”설연의 대답에 황제가 눈썹을 올렸다.그녀는 무강을 돌아보지 않았다.“누구에게 불리하든 듣겠습니다. 그러니 사람을 먼저 살려 주십시오.”황제가 서약을 완전히 풀라는 명령을 내렸다. 강옥은 다시 노비가 되지는 않지만 궁에서 받던 집과 급료를 잃는다. 거짓 증언의 죄도 따로 묻는다. 정문익과 봉인관은 원본에 해제 표식을 남기되, 증거가 될 종이는 보존해야 했다.이번에는 사흘을 빌리는 일이 아니었다.설연은 명서를 받아 들었다. 황제는 한치수가 작성한 증언을 자신이 묶어 두었다는 사실을 끝내 잘못이라 부르지 않았다. 그저 은혜를 더 베푸는 얼굴이었다.무강도 함께 편전을 나왔다. 회랑의 햇빛이 길었다. 설연은 그 빛 아래에서 멈췄다.“한치수가 군령 원본을 보라고 했어.”무강은 걸음을 멈췄다.“그래.”“당신이 쓴 걸 보라고.”멀리서 궁인이 빈 쟁반을 포개는 소리가 났다. 무강은 그 소리가 끝날 때까지 대답을 미루지 않았다.“열람을 청하겠다. 네가 보는 자리에서 말하겠다.”설연은 그 얼굴에서 부정을 찾았다. 아주 짧은 부정 하나면 숨을 돌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그녀를 잠깐 편하게 해 줄 거짓말조차 하지 않았다.“지금 먼저 말할 수는 없어?”“내가 서명했다.”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지나갔다.설연은 명서를 세게 쥐었다. 종이가 구겨졌다. 원래 알고 있던 일이었다. 등본에서도 이름을 보았다. 그런데 직접 듣는 목소리는 종이와 달랐다.“왜.”“내가 왜 그랬는지 말하면, 네가 받은 상처까지 변명하는 것 같아서 두렵다.”설연이 고개를 들었다.“볼 거야. 설명도 전부 들을 거고. 당신이 순서를 정해 주지 않아도.”무강이 눈을 내렸다.“알겠다.”그녀는 먼저 진료실로 향했다. 무강은 한 걸음 뒤에서 걸었다. 부축할 만큼 가까웠던 거리가 다시 생겼다. 누구도 그 간격을 메우지 않았다.아란은 명서를 읽고 강옥의 상태를 확인했다. 봉인관은 정문익과 함께 벽장의 봉인을 열었다. 전날 임시 집례를 마친 시각과 새 왕명의 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