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은 많은 고급 주택이 고객의 자산을 확인한 후에야 주택을 볼 수 있는 규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럼 VIP고객이 되려면 어떤 요구가 있는 거죠?”“우선 L시에 주택을 구매 자격이 있어야 하죠. 이것은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에요. 둘째, 계좌 유동 자금은 반드시 20억 이상에 달하거나, 블랙카드를 소지해야 합니다. 물론 자신의 자산을 증명할 수 있는 다른 부동산을 제시할 수도 있고요.”현금이든 예금이든 블랙 카드든 정은은 없는 게 없었다.어느 것을 선택하면 좋을지 고민하고 있을 때, 소진헌은 이미 정은의 팔을 잡아당기며 그녀를 밖으로 끌고 갔다.“왜 갈수록 터무니없는 얘기를 하는 거야? 20억의 유동자금이 있어야 한다니, 드라마를 찍는 것도 아니고...”이미숙은 옆에서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소설도 감히 그렇게 쓰지 못하는데, 넌 그걸 대놓고 묻다니. 그동안 큰 도시에서 공부를 했다고 담력이 꽤 커졌구나.”그리고 미안해하며 고개를 돌려 직원에게 말했다.“미안해요, 우리 딸이 장난이 좀 심해서, 괜히 시간만 낭비하게 했네요.”이번에 그 직원은 더 이상 연기조차 하지 않았고 바로 눈을 부라렸다.“어디서 온 촌놈들이에요? 별장을 살 돈도 없는데 여기 와서 행패를 부리다니, 정신이 나간 거예요?”이미숙은 멈칫했고, 소진헌도 안색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먼저 잘못을 했기 때문에 따질 수가 없어 그저 사과만 했다.두 사람이 이렇게 나오자, 그 직원은 더욱 신이 나서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그 꼴로 별장을 사려고요? 아마 아파트의 화장실 하나조차 살 수 없을걸요! 살다 살다 이런 사람이 다 있다니, 정말 재수 없어!”‘평소에 출근하는 것도 귀찮아 죽겠는데, 오늘 난 또 드디어 큰 고기 하나 낚은 줄 알았네. 그런데 그저 돈이 없는 거지라니! 어이없어.’이미숙은 눈살을 찌푸렸다.“우리가 잘못한 건 맞지만, 이렇게 말하는 건 너무하지 않아요? 어쨌든 우리도 손님인데...” “듣기 싫으면 들어오지 말았어야죠. 뭐, 손님인데?
“나정 언니...” 영지는 놀라서 어쩔 줄 몰랐다.“왜 날 보는 거야? 넌 자신을 체크하는 절차를 알고 있는 거야? 만약 무슨 문제가 생기면, 네가 그 책임을 질 거야?”“저, 저도 절차를 대충 알고 있어요. 전에 배운 적이 있어요. 만약 자산을 체크한 후, 이 아가씨의 블랙카드에 문제가 없다면, 저도 그 책임을 질 필요가 없어요”“허, 일한 지 며칠 되지 않았지만 빨리도 배웠네. 그러나 이것만 기억해. 우리는 눈치가 있어야 하는데, 어떤 사람이 우리의 고객님이고, 누가 집을 살 수 있는지를 모두 잘 파악해야 돼. 그렇지 않으면 시간을 낭비하는 것과 다름이 없어.”영지는 입술을 오므렸다.“고마워요, 나정 언니. 그러나 저는 신인이니, 아직 고객님과 거래를 성사한 적이 없어요. 그리고 현재 인턴 단계에 처해있기에, 많이 보고 많이 연습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을 낭비해도 괜찮아요.”말이 끝나자, 영지는 정은을 바라보았다.“고객님, 규정된 절차에 따라, 저희는 고객님의 카드를 체크할 거예요. 만약 문제가 없다면 바로 별장을 보러 가실 수 있어요.”그리고 영지는 또 소진헌과 이미숙을 바라보았다.“아저씨, 아주머니, 이쪽에 앉아서 차 한 잔 마셔요. 카드 체크가 곧 끝날 거예요.”소진헌은 얼른 손을 흔들었다.“아니야, 아가씨도 참.”그는 지금 몹시 당황해 하고 있었다.‘정은이가 진짜 이 집을 사려고? 이따가 자산을 검사하면 거짓말이 들통날 텐데. 아까 밖으로 나갔어야 했는데. 우릴 비웃으면 비웃었지, 굳이 이런 내기를 할 필요가 없잖아.’이미숙은 소진헌보다 냉정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랬다.그녀는 앉아서 천천히 차를 한 모금 마셨지만, 찻잔을 든 손이 계속 떨렸다.“고객님, 이쪽으로 오세요.”“그래요.” 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영자와 한 사무실로 들어갔다.“풉, 능청스럽게 굴긴. 언제까지 연기할 수 있을지 두고 봐요! 정말 뻔뻔스럽네요...”...10분 후, 두 사람은 사무실에서 나왔다.“어때? 그 카드 가짜지?” 왕나정
그래서 영지가 어떻게 소개하든, 정은은 그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영지는 이미 자신의 흥분을 숨길 수가 없었다.“그럼, 어떻게 지불하실 건가요?”“전액으로 지불할게요.”소진헌은 딸이 정말 별장을 살 줄은 몰랐다. 게다가 돈까지 다 준비되었다니! 그는 말을 하려고 입을 벌렸는데, 소리를 내기도 전에 허리에서 통증이 전해왔다. 이미숙이 그를 꼬집었던 것이다.“정은이 뭘 하든 당신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그저 지켜보기만 하면 돼.”소진헌은 다시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영지는 떨리는 두 손으로 은행카드를 받은 다음, 또 허둥지둥 일련의 계약서를 준비했다.“고객님, 정말 잘 생각해 보셨어요? 문제가 없으시다면 제가 지금 카드로 결제해 드릴게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영지는 자신이 마치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절차대로 모든 수속을 밟은 다음, 마지막에 정은이 주택 매매 계약서에 사인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사무실 쪽에서도 5억 원이 이미 입금되었다는 소식을 보내왔다. 그 순간, 영지는 실감을 느끼는 동시에 마음이 놓였다.‘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래?! 출근한 지 이틀도 안 됐는데, 벌써 집 한 채를 팔았다니?! 그것도 별장을! 5억이라니, 운이 너무도 좋잖아!’영지는 바보처럼 헤헤 웃었다. 그러나 왕나정의 안색이 어두워진 것을 보자, 그녀는 바로 웃음을 참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참지 못하고 몰래 웃기 시작했다.수백 만원의 인센티브를 받을 수 있었으니, 영지는 기뻐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1초 전까지만 해도 날뛰며 그들을 비웃던 왕나정은 지금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고, 두 눈을 부릅떴다.“영지야, 너, 방금 뭐라고 했어...”“아, 나정 언니. 저는 방금 이 고객님의 카드가 확실히 블랙 카드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방금 VIP 응접실에서 저는 이미 고객님과 함께 별장을 선정했고, 가격을 협상했는데, 이렇게 나온 것도 단지 계약서를 사인하기 위해서였어요.”왕나정은 입술이 떨렸다. “정, 정말
‘5억... 난 평생 일하면서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서야 겨우 이 돈을 모을 수 있을 텐데.’정은은 마음이 찔렸다.“그동안 저도 그저 먹고 논 게 아니에요. 그래서 돈을 좀 모았죠.”그러던 중, 말을 하지 않던 이미숙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어떻게 모았는데?”그녀의 눈빛은 무척 날카로웠다.정은은 한숨을 쉬었다. ‘보아하니 엄마도 그 헛소문들을 들은 것 같군.’“엄마, 이건 다 제가 스스로 당당하게 번 돈이에요. 깨끗하니까 편하게 써도 돼요.”이것은 거짓말이 아니었다.처음에 강도겸은 정은과 함께하기 위해 심지어 부모님과의 인연까지 끊었다. 강구염은 화가 나서 도겸의 모든 은행 카드를 동결했고, 서영숙에게도 도겸을 도와주지 말라고 강요했다. 가장 힘들었던 시절, 두 사람은 아주 좁고 작은 지하실에서 지냈다. 비 오는 날엔 심지어 물이 새서 몸은 추웠지만, 두 사람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따뜻했다.도겸은 창업을 시도하려 했고 자금이 필요했다. 그래서 정은은 매일 나가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모았다. 후에 다른 사람의 소개로 정은은 미용 제품을 만드는 생물과학기술 회사에 들어가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 제품을 사용해 본 후, 연구팀과 협력하여 관련 피부 데이터를 제공했다. 그리고 우연한 기회에 정은은 직접 프로그램을 작성하여 그들을 도와 대량의 표본 데이터를 통계했다. 원래 복잡했던 통계 작업이 순식간에 간단해지면서 효율은 높아지고 정확도도 크게 향상되었다.당시 회사에서는 5천만 원을 제시하며 이 프로그램을 구매하려 했지만, 정은은 곧바로 승낙하지 않고 도겸에게 돌아가 이야기했다. 도겸은 직접 나서서 가격 협상을 했고, 타고난 상인의 재능을 발휘하여 최종적으로 2억 원에 거래를 성사시켰다.그렇게 정은은 도겸을 도와 자금을 모으는 데 성공했다. 이 자금을 바탕으로 도겸은 자신의 회사를 설립했고, 2년 후 업계의 다크호스로 떠올랐다.회사가 상장한 그날, 도겸은 정은에게 말했다.“넌 이 회사의 절반을 가질 자격이 있어.”그날 밤, 도겸
“지금 주문할게! 먼저 화분대를 사야겠어. 네 엄마는 등꽃을 좋아하니까. 그때 가서 등나무를 심을 수 있지... 그리고 또 수국을 몇 개 더 사야지. 5월에 꽃이 피면, 서 선생은 날 엄청 부러워하겠지...”서 선생님은 소진헌의 동료였다. 두 사람은 다른 학과를 가르치지만, 사이가 좋았는데, 모두 꽃을 좋아하는 달인이기 때문이다.서민철은 전에 교직원 주택단지를 떠나, 근처에서 분양주택을 하나 샀다. 1층이라서 작은 정원이 있었는데, 꽃을 가득 심었다. 그러나 면적이 크지 않아서 작은 식물을 좀 키울 수밖에 없었고, 수국과 같은 꽃이 활짝 피어야 보기 좋은 식물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소진헌은 한다면 하는 사람이었기에, 핸드폰으로 쇼핑으로 하기 시작했다. 이때 그는 멈칫했다.“새 집으로 이사 가면, 지금 이 집은 어떡하지?”정은이 대답했다.“그냥 남겨둬요.”“그럴 필요가 있을까?” 다른 선생님들은 이곳에서 이사가자마자 바로 집을 팔았다.위치가 좋고 또 인성 고등학교와 가깝기 때문에, 집을 사는 사람이 꽤 많았는데, 대부분 외지에서 온 학생과 학부모들이었다.물론 가격도 괜찮았다.소진헌은 비록 집을 팔고 싶지 않았지만, 정은이 별장을 사는데 그렇게 많은 돈을 썼기에, 이 집을 팔면 그래도 도움이 좀 될 거라 생각했다.정은은 또 어찌 소진헌의 생각을 모를 수 있겠는가. “이사 가더라도 일단 남겨둬요. 좀 더 기다리자고요.”소진헌은 의혹을 느꼈다.“뭘 기다려?”“그때 되면 알게 될 거예요.”“비밀도 참 많아...”소진헌이 중얼거렸다.정은이 말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철거에 관한 일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았다.만일 비밀이 새면, 문제도 뒤따를 것이다.그러나 정은이 이 일을 안 것도 다 도겸 덕분이었다.그때 도겸은 L시의 한 대형 백화점 개발에 관한 프로젝트가 낙찰됐는데, 정은은 서재에서 책을 읽다가 부주의로 서랍에 있는 계약서를 보았다.익숙한 ‘L시’라는 두 글자를 보며, 정은은 참지 못하고 뒤져 보았고, 그 백화점의 건설
주덕순은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다가가서 소진호의 팔을 안았다.“어머 동서, 뜻밖에도 여기서 만났네.”이미숙도 웃으며 인사했다.“둘째 형님.” “정은과 분양 사무소엔 어쩐 일이야? 설마 집을 사려는 건 아니겠지?”“아니요.” 그들은 어제 이미 샀으니까.“그래”주덕순은 이미숙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입가에 웃음이 짙어졌다.“우리는 집을 보러 왔는데. 바로 그 레이크 다이아 말이야, 지금 한창 잘나가는 그 아파트! 고층 한 채조차 구하기 어렵다고 하던데, 글쎄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책임자에게 돈을 줘도 살 수가 없다나! 우리도 시율이 덕분에 이곳의 아파트를 살 수 있었던 거야. 시율이가 이곳의 부동산 컨설턴트를 알고 있거든. 우리도 지금 계약서를 체결하자마자 바로 나온 거지.”여기까지 말하자, 주덕순은 득의양양해하며 턱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리고 이미숙의 의아한 표정을 봤을 때, 그야말로 엄청난 기쁨과 자랑스러움을 느꼈다.‘몰랐지? 부럽지? 질투하지? 아쉽게도 동서는 아무것도 없잖아.’이미숙은 확실히 놀랐다. 하지만 그것도 단지 두 사람이 또 집을 바꾸려 한다는 사실에 놀랐던 것이다.‘3년 전 금방 새 집 하나 바꾸지 않았어? 그런데 왜 또 바꾼 거지?’“아, 지금 지내고 있는 집이 너무 작아서, 많이 불편하거든. 게다가 이곳보다 더 좋은 곳이 어디있겠어?”이미숙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지금 지내고 있는 집은 팔려고요? 아니면 세를...”소진호가 대답했다.“우리는...”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덕순은 그를 세게 잡아당기더니 웃으며 말했다.“우리는 팔고 싶지도, 세를 놓고 싶지도 않아. 그깟 돈이 부족한 것도 아닌데, 뭐 하러 팔겠어? 그냥 부동산 투자하는 셈 치고, 집값이 올라갈 때까지 기다리면 더 좋지 않겠어?”주씨 가문은 돈이 있었고, 주덕순 부모님도 그녀를 무척 아꼈으니 그들은 확실히 그럴 실력이 있었다.“동서, 아직 이곳의 아파트를 보지 못했겠지?”이미숙은 고개를 저었다.“네.” 어제 정은은 들어오자마자 바로 별
이미숙은 어색하게 웃었다.‘내가 만약 정말 책으로 돈을 벌 수 있었다면, 정은이가 우리에게 별장을 사줄 필요도 없었겠지.’정은은 이미숙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눈치채고 먼저 입을 열었다.“둘째 큰아버지, 둘째 큰어머니, 저와 엄마는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에이, 주말에 뭐가 그렇게 바쁘다는 거야? 정은아, 너도 그래. 이제 서른이 다 되어가는 사람이 공부도 하지 않고, 일자리도 찾지 않고, 남자친구는 더 없고. 너처럼 이 나이에 부모님을 의지하는 아가씨가 더 있을까?”주덕순은 저번 체리의 일 때문에 정은을 보복하고 싶었다.이제 어렵게 기회를 얻자, 주덕순은 정은에게 전부 되갚아주려 했다.“다른 사람은 그렇다 쳐도, 네 큰오빠 좀 봐. 지금 J시에 자신의 회사를 차렸으니 얼마나 대단하니. 우리 시율은 비록 그런 능력이 없지만, 그대로 자신의 노력으로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고, 미래를 걱정할 필요가 없는 셈이지.”“가끔 난 정말 도련님과 동서가 걱정돼. 힘들게 키운 아이가 잘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니. 가문을 빛내지 않아도 되지만, 자신을 먹여살릴 능력조차 없잖아. 심지어 부모님의 돈이나 갉아먹고. 정은아, 너도 참...”주덕순은 고개를 저으며 탄식했다.옆에 있던 소진호는 미친 듯이 그녀에게 눈짓을 했지만, 주덕순은 보이지 않은 척했다.이미숙은 웃음을 거두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러게요, 시율이 제일 대단하죠. 대학도 힘들게 졸업한 아이가 공무원 시험에 합격할 수 있으니까요.”주덕순은 일부러 이미숙의 비웃음을 무시하며 더욱 득의양양해졌다.“그럼! 우리 시율은 어릴 때부터 나와 그이를 걱정시킨 적이 없었어. 말도 잘 듣고, 철도 들었고! 시율이 외할아버지가 그러셨는데, 몇 년 뒤에 시율에게 같은 공무원을 하나 소개해주시겠다잖아. 그럼 앞으로 시율이도 돈 걱정없이 다리 펴고 잘 수 있을 거야.”여기까지 말하자, 주덕순은 목소리를 높였다.“나는 평생 그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결국 부족한 게 없으니까. 난 단지 우리 가족들
말하면서 영지는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정은에게 건네주었다.정은은 그것이 원본이라는 것을 확인한 다음, 즉시 자신의 손에 있는 복사본을 돌려주었다.교환을 마치자, 영지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정말 죄송해요. 저도 처음으로 별장 수속을 밟아서 많은 절차에 익숙하지 않거든요. 정은 씨의 시간을 낭비해서 정말 죄송해요...”“괜찮아요.”주덕순은 한쪽에 서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다. 그녀는 모든 단어를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또 이해가 안 됐다.“방, 방금 무슨 계약서라고 했지?” 주덕순은 영기 손에 있는 서류를 가리켰다.“주택 매매 계약서요.”“누구 건데?”“당연히 정은 씨의 거죠. 이 집은 정은 씨가 산 거니까요.”주덕순은 몸이 비틀거리더니 하마터면 바닥에 쓰러질 뻔했다.“그러니까, 소정은이 여기서 집을 샀다고?!”“네.” 영지는 영문을 몰랐다. ‘이 사람은 누구지? 왜 자꾸 같은 질문을 반복하는 거야?’“그럴 리가?!” 주덕순은 눈을 부릅뜨더니 마치 벼락에 맞은 것처럼 꼼짝도 하지 못했다.“그럼 19호 아니면 20호 빌딩을 산 거야? 어느 층인데? 구조는? 면적은 몇 평이야?”“여사님, 뭔가 착각하신 모양인데요, 19호와 20화 빌딩은 모두 일반 고층 건물이에요. 정은 씨는 별장을 구매하셨고요.”‘뭐?!’“별, 별장을?!” 주덕순은 목이 찢어질 뻔했다.“이 사람들이 별장을 샀다고?! 레이크 별장인가?! 그, 그럴 리가?!”‘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거지?!’정은은 한숨을 내쉬었다.“둘째 큰어머니, 저 정말 형편이 없는 딸인 것 같아요. 서른이 다 되가는 사람이 일자리도 찾지 못하고 그저 부모님께 별장 한 채를 선물하며 효도를 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저는 그냥 제 부모님들이 행복하게 지내실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에요. 그럼 둘째 큰어머니도 이제 제 엄마 아빠를 위해 이렇게 걱정하실 필요가 없잖아요, 안 그래요?”주덕순은 말문이 막혔다.“저희는 이제 새 집을 꾸미러 가야 하니까, 두 분 계속 집을 보세요.”
정은은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 안전벨트를 매고 창밖을 슬쩍 바라봤다. 공장은 호텔에서 10km 떨어진 개발지구에 자리 잡고 있었다.은혁이 운전대를 잡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 구역은 첨단 기술 산업 클러스터로 지정돼 있어서, 기술 협력 프로젝트도 대부분 그쪽으로 집중되고 있어요.” “정은 씨가 찾는 그 새로운 감온 정확도 소재는 우리랑 CG그룹이 공동 개발한 건데, 지금까지 1세대부터 3세대까지 세 가지 버전이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집중했고, 중간중간 전문적인 질문도 빠짐없이 던졌다. 은혁이 답할 수 있는 부분은 성의껏 설명했지만, 구체적인 수치나 실험 조건처럼 세세한한 부분은 바로 대답하기 어려운 것도 있었다.약 20분 후, 두 사람은 공장에 도착했다. 은혁이 미리 연락해 둔 덕분에, 정문 앞에는 담당자가 나와 있었다.정은은 안내받아 간단히 실험실과 공장을 둘러봤다. 연구 구역과 생산라인은 전혀 겹치지 않게 구획이 나뉘어 있었고, 현장도 전반적으로 정돈된 느낌이었다.정은이 요청한 소재의 1세대와 2세대는 이미 완제품으로 확보되어 있었지만, 3세대는 아직 실험 단계였기에 정식 생산은 되지 않았다. 따라서 실험실에서 직접 합성해야 했다.“시간은 얼마나 걸리죠?” 정은이 은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은혁은 옆에 있는 연구원을 바라봤다.“8시간 정도 걸릴 것 같아요. 내일 오전엔 제품 받아보실 수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관련 비용은 정산대로 처리해 주세요. 최종 결정되면 한 번에 입금할게요.”은혁은 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비용은 무슨 비용... 정은 씨, 우리 사이에 뭘 그렇게 딱딱하게 굴어요.”정은은 침착하게 말했다. “그럴수록 더 딱딱하게 해야죠. ‘친할수록 돈 문제는 분명하게.’ 이건 기본이에요. 더군다나, 우리 둘은 그냥 ‘친구’일 뿐인데, 은혁 씨가 도와주는 것만 해도 충분히 고마워요.”“게다가 실험실도 예산이 따로 있는 조직이고, 모든 비용
실험실에서 진욱은 오늘만 몇 번째인지 모르게 재석을 힐끔거렸다. 결국 참지 못하고 다가갔다. “재석아, 너 오늘 길 가다 돈 주웠냐?”실험대 앞에서 입꼬리를 내릴 줄 모르던 재석의 손이 잠깐 멈췄다. “데이터 정리는 다 됐어? 3차 실험 가능성 평가 보고서는 언제 낼 건데?”“하, 이 사람 분위기 다 깨네.” 진욱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근데 말이야, 오늘 아침에 네가 샌드위치 먹는 거 봤거든.”“그래서?”“정은이가 해준 거지? 다 알아. 너희 둘, 다시 잘 되는 거야? 그것도 아니면, 이제 미련 접은 거야?” 재석은 살짝 고민하다가, 이제는 말해도 되겠다 싶어 입을 열려고 했다.바로 그때, 핸드폰에서 톡 알림이 떴다. 정은이었다.[도착했어요. 샌드위치는 맛있었어요?]재석은 바로 답장했다.[맛있었어.]정은은 곧장 자신의 일정을 재석에게 알려줬다.[지금 호텔 체크인하고, 오후엔 공장 갈 거예요.][응, 알겠어.]1분 정도 지났지만, 그다음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 재석은 괜히 허전해졌다.‘예전에도 이렇게 대화했었는데... 왜 지금은 이걸로는 부족하지?’정은과 더 오래 이야기하고 싶었다. 더 많은 말, 더 사적인 얘기, 더 가까운 거리. 그 마음은 마치, 가려운 곳을 손톱 끝으로 슬쩍 긁은 느낌. 절대 시원하지 않았다. 그냥 더 간지러워질 뿐.‘그냥, 정은이한테 세게 할퀴어지고 싶은데...’“누구랑 톡하냐?” 진욱이 슬쩍 핸드폰을 들여다보려 다가왔다.재석은 피할 틈도 없이 화면을 들킨 셈이 됐다. “뭘 감춰. 정은이랑 메시지 주고받는 거잖아. 왜? 뭐가 부끄럽다고.”“됐고.” 재석은 핸드폰을 집어넣고, 실험대에서 내려왔다. “오늘 점심은 내가 쏜다. 뭐 먹고 싶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몇 초 멈췄다. 옆에 있던 미진이랑 태민이 눈을 마주쳤다. “교수님,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갑자기 점심을요?”재석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먹고 싶은 거 생각나면 전 교수한테 말해.
비행기 이륙 직전, 은혁이 정은에게 제한했다. “정은 씨, 내 마일리지로 좌석 업그레이드해 줄게요.”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은혁의 얼굴에 아쉬움이 스쳤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로 돌아갔다. 잠시 후, 다시 다가와 말했다. “내가 정은 씨 옆자리로 바꿨어요.”비즈니스석에서 이코노미석으로 자리를 바꾸다니, 웬만한 사람이면 거절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은혁 씨,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돼요.” 정은은 단호한 어조였다.‘처음으로 이렇게까지 분명하게 말한 것 같아.’정은은 연애 한 번 안 해본 소녀가 아니었다. 은혁의 눈빛에 담긴 감정이 어떤 건지, 모를 리 없었다.하지만 그동안 굳이 선을 긋지 않은 건, 은혁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며, 오히려 몇 번이고 도와줬기 때문이었다. 이번 Z시 출장도 은혁의 도움 덕에 가능했던 일이었다.게다가 은혁이 고백도 안 했고, 정은이 불편할 정도로 다가온 것도 아니었으니까... 정은도 자신이 먼저 딱 잘라 말하는 게 오히려 예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그리고 그때의 정은은 솔로였고, 재석이 입을 열게 하기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의 자극은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정은은 이미 재석과의 관계를 정리했고, 은혁은 더 적극적으로 다가오고 있으니, 그녀도 이제 더 늦기 전에 확실히 은혁에게 말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래야 서로 상처받지 않을 테니 말이다.은혁은 정은의 말에 잠시 당황한 듯하다가, 이내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난 정은 씨 옆자리에 있는 게 좋아서 그래요.”정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즈니스석 티켓을 사 놓고 누구랑 자리를 바꾸든, 그건 상대방의 자유니까. 굳이 뭐라고 할 필요는 없지.’그 후, 정은은 노트북을 열고 일에 집중했다. 은혁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틈틈이 정은을 흘끗거렸다.그러다 손을 들어 승무원을 불렀다. “저기요. 잠깐만요.”“네, 손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결국 재석은 아쉬움 가득한 눈빛으로 정은의 손을 놓았다. 그러고는 조용히 열쇠를 건네받아 현관문을 열어주었다.“정은아, 잘 자.”그 한마디.‘정은아’라는 이름이 너무나 자연스럽고도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마치 수천 번은 불러본 것처럼.그 말에 정은은 순간 멍해졌다.‘왜 내 이름을 듣고도 가슴이 이렇게 설레지?’“네, 당신도 잘 쉬어요.”둘은 그렇게 짧은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문 안으로 들어갔다.그날 밤. 정은은 평소와 달랐다. 샤워를 마친 뒤 늘 하던 루틴, 논문 체크나 프로젝트 정리는 손도 대지 않았다.대신, 자기도 모르게 핸드폰을 들고 재석의 SNS를 열었다.‘뭐 하는 거야? 나...’그런데 이상하게, 자꾸만 궁금해졌다. ‘이 사람, 평소에 어떤 거 올리지?’재석은 SNS 설정 따위는 하지 않은 사람이었다.맨 아래까지 내리는 데 몇 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포스트 총수, 대략 서른 몇 개. 그중 90%는 논문, 연구, 산업 동향 공유.‘진짜 성실한 연구자 모드네...’그나마 정은과 관련 있는 건 얼마 전 실험실이 SCI 논문 게재됐을 때 서비대학교 공식 계정에서 축하 포스팅한 걸 공유한 것뿐이었다.[축하합니다.]짧고 건조한 멘트.그 밑엔 전진욱과 조미진이 ‘좋아요’를 눌러뒀다.‘이게 전부야?’그렇게 핸드폰을 내려놓으려던 순간, 알림이 하나 떴다. 재석이 새로운 글을 올렸다.정은은 무심코 눌러봤다. [r = a(1 - sinθ)]‘...어?’정은의 손가락이 멈췄다. 이 수식, 익숙했다. 너무 익숙해서 순간 심장이 멈칫했다.댓글 첫 줄엔 진욱이 있었다.[극좌표 함수? 밤에 안 자고 뭐 하세요? 조 교수님?]조미진과 손태민은 말없이 ‘좋아요’만 눌렀다. 하지만 두 사람은 속으로 ‘다음 연구 주제가 광학 쪽인가?’ 생각하며 혼란스러워했다.아무도 몰랐다. 이 수식의 진짜 의미를.‘r = a(1 - sinθ)’, 하트곡선.‘설마 이게, 그거? 진짜 그거... 맞아?’정은은 손끝을
“그럼... 고백하기 전까지, 혼자서 그렇게 많이 고민한 거예요?”“응.”“어쩐지...”정은이 아주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뭐라고?” 재석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이젠 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가요...”둘은 손을 꼭 잡고 복도로 향했다. 조용한 밤, 서로의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걷던 중, 재석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정은도 따라 멈춰 서며 돌아봤다.“왜요?”“정은아, 우리 지금... 사귀는 거 맞지?”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두 사람이 꼭 잡은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그렇게 생각 안 해요? 조금 전부터 내가 ‘재석 씨’라고 부른 거 못 느꼈어요?”“혹시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정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 지었다.“흠,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평소에도 꿈에서 날 자주 본 모양이네요?”재석의 몸이 순간 굳더니, 양 볼이 순식간에 빨개졌다.‘진짜 자주 꿨나 보다?’재석은 눈을 못 마주친 채, 그저 두 사람이 맞잡은 손만 바라보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진짜 좋아.”‘정은이도, 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구나.’‘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구나.’같은 계단, 같은 복도, 수없이 함께 걸어온 길. 그동안은 늘 친구라는 이름으로, 앞서거나 뒤따르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왔지만, 오늘은 처음으로, 손을 잡고 나란히 오르는 계단.정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근데, 왜 나랑 은혁 씨한테 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재석은 목소리를 낮추며, 살짝 눈을 피했다.“미안. 계산하러 나갔다가... 우연히 통화하는 거 들었거든.”정은의 눈이 살짝 커졌다.그리고 머릿속으로 자신이 통화 중 했던 말을 하나하나 되짚어봤다.‘공항에서 보자, 기대된다, Z시 출장... 뭐 이상한 말한 것도 없는데...?’그런데도 재석은 그걸 ‘여행 약속’으로 받아들였고, 그걸로 인해 혼자 삭이다가 결국 아래층에서 고백까지 해버린 거였다.“너희, Z시에 여행 간다고 했잖아.”
정은이 멍해 있는 사이, 재석이 한 걸음 다가섰다. 늘 부드럽고 점잖던 그가, 이 순간만큼은 전에 없던 강한 기운을 뿜어냈다. ‘이 남자... 이런 눈빛도 있었나?’정은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등이 벽에 닿는 순간, 재석은 어느새 바로 눈앞에 와 있었다.정은이도 이제야 제대로 실감이 났다. 재석이 자신보다 훨씬 크다는 걸. 그리고 지금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내려다보면, 자신이 마치 남자의 품 안에 갇힌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도.재석이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이제 좀 알겠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그때 네가 학업이 먼저라고 했을 때, 난 받아들였어.”“그런데 장은혁한텐 기회를 줬지. 정은아...”그가 고개를 더 숙이자,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목선에 닿았다. 순간, 정은의 팔에 소름이 쫙 돋았다. “너, 나한테 너무 불공평해.”그 마지막 한 마디는 묘하게 서글픈 기운이 섞여 있었다.정은은 입술을 달싹이며 뭔가 말하려 했지만, 재석은 그녀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알아, 내가 지금 어떤 입장인지. 묻고 따질 자격도 없고, 네가 누구를 좋아하든, 그건 네 자유라는 것도 알아.”“이 말 꺼냈다가, 우리 사이가 끝날 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근데... 계속 참다 보니까 알겠더라.”‘난... 그렇게까지 쿨한 사람이 아니었어.’“그래서 이제 참지 않기로 했어.”‘어떻게 되든, 그건 네가 정해.’그렇게 말한 재석은 고개를 숙인 채 멈췄다. 마치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처럼.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용한 밤공기 속에서, 정은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울렸다.“이제, 제가 말해도 될까요?”“응...”“재석 씨.”정은은 처음으로 재석을 그렇게 불렀다.“고개 들어요. 나 좀 봐요.”재석의 어깨가 순간 굳어졌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그는 이미, 거절당할 각오까지 끝냈다.그런데 눈이 마주친 순간, 정은의 두 눈 속에서 재석이 본 건... 눈물이 아닌, 웃음이었다.억지로 짓는
“헤어졌다고요?”정은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몰랐어?!”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진욱은 눈을 반짝이며 의자째로 다가오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본격적인 ‘TMI’를 털어놓기 시작했다.“M시 출장 갔다 오고 며칠 안 돼서, 재석이가 바로 짐 싸서 수아를 내보냈다니까?”정은은 그 말을 듣고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재석과 수아 사이에 어떤 감정선이 있었는지, 그동안 몇 번 스쳐 지나갔던 장면들이 퍼즐처럼 빠르게 떠올랐다.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눈빛 속엔 미묘한 기류가 스쳤다.“아마 진짜 많이 좋아했나 봐. 그러니까 정리할 때도 그만큼 아프고, 오래 걸리는 거겠지. 조금만 시간 지나면, 태민이도 정리될 거야.”진욱은 이어서 말했다.“네.”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대답했다.그 이후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남의 연애는, 들을 수는 있어도 깊게 얘기하지 말아야 해. 괜히 나서 봤자... 괜히 끼어든 꼴만 되니까.’...해가 지고, 붉은 노을이 건물 유리에 비치기 시작할 무렵. 정은은 마침내 작업을 끝냈다.진욱은 기다렸다는 듯 프로그램을 열고 기능 하나하나를 테스트했다.그리고 30초쯤 흐른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어어!! 복구됐어! 됐다! 돌아왔어! 다시 쓸 수 있어!!”미진도 덩달아 벌떡 일어나 양손을 번쩍 들었다.“살았다, 진짜!! 여태 손으로 데이터 입력한 거 생각하면... 이건 거의 기적이야!”진욱은 시계를 힐끗 보더니, 정은을 향해 말했다.“지금 이 시간까지 남아서 도와준 우리 정은이, 완전 수고 많았어! 조 교수...”“응...?”갑작스레 이름이 불리자, 재석은 몇 초간 멈칫하다가 고개를 돌렸다.진욱은 능청스럽게 말했다.“아니, 정은이가 이렇게 큰일 해줬는데, 감사 표시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적어도 밥 한 끼는 사야지.”“맞아요, 맞아요. 조 교수님, 이건 진짜 밥으로도 모자라요.” 미진이 곧장 거들었다.재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략 1년 전, 정은은 한동안 재석의 실험실을 빌려 쓴 적이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전진욱, 조미진 등과 인연이 닿았다.처음엔 서로 어색하고 낯설었지만, 몇 달이 지나면서 조금씩 가까워졌고, 지금은 가볍게 농담도 주고받을 만큼 편해졌다.그러던 어느 날, 진욱은 우연히 정은이 실험 데이터를 처리하는 속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 너무 빠른 게 아닌가 싶어서 슬쩍 물어봤더니, 정은은 코딩도 할 줄 아는 공대 만능 캐릭터였다. 그녀는 직접 짠 프로그램으로 데이터를 자동 정리하고, 다차원 분류와 정렬까지 가능하다고 했다.“와, 뭐야... 완전 반칙인데?”진욱은 결국 정은에게 부탁해 실험실 맞춤형 프로그램 하나를 따로 제작해달라고 했고, 그 이후, 데이터 정리는 그야말로 신세계를 맞이했다. 진욱은 쓸 때마다 감탄하며 말했다.“진짜... 정은이 덕분이야. 이게 사람을 살리네.”하지만 어제 그 기특한 프로그램이 갑자기 먹통이 됐다. 손태민이 고쳐보겠다고 덤볐지만, 결과는... 풍비박산이었다. ‘이젠 누가 손댔다간 진짜 박살 나겠어...’ 결국 정은에게 SOS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재석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오늘 시간 돼? 안 되면, 며칠 뒤도 괜찮고...]진욱은 훨씬 급했다. 말 그대로 살려달라는 마음이었다.[야, 오늘 안 데려오면... 나 여기서 바로 싸버린다! 진짜라고, 어?!]그는 어제 약 먹고 좀 괜찮아진 줄 알았건만, 밤새 배가 또 난리였다. 오늘 아침부터 실험실 화장실은 진욱의 전용이 되었다. 오전에만 6회 방문.그 말은, 그냥 협박 아니었다. 진짜 실현 가능성이 있었으니 말이다.정은은 상황을 듣고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시간 돼요. 지금 바로 갈게요.”[그래. 그럼 내가 정문 앞으로 갈게.]‘굳이 마중까진 필요 없는데...’ 뚝-정은이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 ...10분 뒤, 정은은 학교 정문 앞에서 재석과 마주쳤다. 두 사람은 실험실로 걸어가며 프로그램
“언니, 이건 굳이 우리 의견 물을 필요도 없지 않아요? 언니가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가는 거죠. 저희한텐 뭐든 시키기만 하세요. 무조건 따라갈게요!”민지가 단호하게 말하자, 서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맞아요, 저흰 누나 믿고 가는 거예요. 결정은 누나가 해요.”정은은 그 말에 잠시 멍해졌다가,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너희들... 나 그렇게 믿어도 돼? 나도 가끔 실수하거든?”민지는 마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정은 언니가 실수했다면, 그건 100% 저랑 서준 오빠가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뜻이에요.”“그건 좀 과장이지만...”‘그래도... 이런 믿음을 받는다는 게 참 따뜻하네.’세 사람은 그렇게 식사를 마쳤다.계산은 서준이 맡았고, 정은과 민지는 먼저 주차장으로 향했다. “언니, 먼저 가요. 전 서준이 데리러 갈게요.”“응? 굳이?”“우리 집이랑 방향이 같잖아요. 서준이는 차도 없으니까, 그냥 태워다 주는 거죠, 헤헤.”“그래, 알겠어. 그럼 조심히 가. 운전 천천히 하고.”“네. 언니도 잘 들어가요!”...두 ‘파트너’와 방향을 맞춘 정은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자료 조사부터 시작해 ‘신소재 최적화 계획안’을 정리하고, 모든 내용이 빠짐없이 정리됐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확인했다.벌써 밤 10시. 정은은 핸드폰을 들고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냈다.[장은혁 씨, 시간 돼요? 상의드릴 게 하나 있어요.]그 시각, 은혁은 거실 소파에 앉아 어머니인 황희숙 여사의 ‘진실 공방’에 시달리고 있었다.“너 외할아버지한테 전화 왔어. 오늘 도시락 들고 회사 갔다며? 근데 그냥 말도 없이 두고 사라졌다고 난리야. 게다가 누가 너랑 어떤 여자가 같이 있는 걸 병원 약국에서 봤다던데? 솔직히 말해봐. 너, 여자 친구 생겼지?”은혁은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아니 외할아버지는 왜 또 엄마한테 바로 전화해요? 진짜 너무하신다니까요...”“이 자식 봐라, 말버릇 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