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너 잘났다! 됐지?”“병원의 규정에 따라, 교통사고 부상자는 가족들에게 연락해야 하는데, 난 부모님에게 괜한 걱정을 시키고 싶지 않아서 네 번호를 알려줄 수밖에 없었어.”수민은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더니 투덜댔다.“핸드폰이 깨지지만 않았어도 네 전화를 받을 수 있었는데.”정은은 그제야 왜 수민의 핸드폰이 줄곧 전원이 꺼진 상태였는지를 깨달았다.“그럼 지금 좀 어때? 어디 아픈데 없어?”교통사고 현장을 지나간 데다가 또 이것이 대형 연쇄 교통사고였기에 정은은 수민을 걱정했다.“네가 오기 전에 해야 할 검사는 이미 다 마쳤는데, 모든 게 다 정상이야. 이제 가서 수속을 밟으면 퇴원할 수 있어.”정은은 그제야 한숨을 돌렸다.“그럼 됐어.”수민은 가방 하나밖에 없어서 두 사람은 바로 1층에 가서 계산을 한 다음 떠나려 했다. 그러나 서영숙과 마주칠 줄이야. 그녀의 곁에는 심지어 서연희가 있었다.두 사람은 고개를 숙이고 무슨 말을 하고 있었다. 서영숙은 눈웃음을 지었고, 연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찬성했다.아주 화목해 보였다.“그럼 앞으로 좀 주의해. 여기저기 부딪치지 않게.”“안심하세요. 꼭 주의할게요.”“풉.” 수민은 냉소를 지었다.“불여우가 이렇게 날뛰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네. 그 남자의 엄마를 믿고 있었구나!”서영숙은 반년 만에 정은을 다시 만났다. 그녀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처럼 초라하지 않았고, 오히려 혈색이 아주 좋았다.연희는 멈칫하더니 마찬가지로 정은을 본 게 분명했다.그녀는 즉시 허리를 받치며 배를 내밀었다. 그리고 먼저 인사를 했다.“정은 언니, 정말 우연이네요. 병원에서 이렇게 마주칠 줄은 몰랐는데.”정은은 웃음을 거두며 바로 떠나려 했다.다음 순간, 연희는 무심한 척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요즘 배가 아파서 병원에 와서 검사를 했는데, 글쎄 임신한 거 있죠?”.정은은 발걸음을 멈췄다.“나 자신도 예상하지 못했어요. 정말 너무 의외였죠. 그러나 도겸 오빠에게는 아주 큰 서프라이즈였어요
그래서 서영숙은 수민을 뚫어지게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만약 눈빛이 칼이 될 수 있다면, 지금 수민은 틀림없이 갈기갈기 짖어졌을 것이다.“조수민 씨, 나에게 무슨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요.”연희는 고개를 들며 억울한 표정으로 수민을 바라보았다.다만 이런 수법은 수민에게 전혀 먹히지 않았다.“무슨 오해? 넌 자존심이 있는 거야? 부끄러운 줄 아는 거야?”서영숙은 노발대발했다.“조수민, 너무 지나치게 굴지 마! 그래도 난 네 윗사람이야.”“어머, 말로 이길 수 없으니까 절 협박하시는 거예요? 하지만 저는 여태껏 남의 협박을 받은 적이 없었어요. 참, 지금 더 심한 말을 할 수도 있는데, 한번 들어보실래요?”“됐어, 수민아, 더 이상 말해봤자지. 이 사람들과 다툴 필요 없어.”정은은 이런 말다툼을 하기가 귀찮았다. 설령 이긴다 하더라도 뭐가 달라지겠는가?그녀의 담담한 말투, 평온한 눈빛에 서영숙은 바로 폭발했다.“너 지금 열등감 느끼고 있는 거지?” 서영숙은 냉소를 지었다.“우리 도겸이와 6년 넘게 사귀었는데도 임신한 적이 없잖아. 그런데 연희는 이제 겨우 몇 개월 만에 바로 임신을 했잖니? 아이도 낳을 줄 모르는 넌 애초에 젊고 철이 없던 도겸을 속일 수밖에 없었겠지. 내가 널 우리 가문의 며느리도 받아들일 것 같아? 꿈이나 깨!”서영숙이 이런 말을 하는 것도 당연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정은은 그녀를 바라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무시에 서영숙은 마음이 불편해졌다.예전에 서영숙은 정은을 무시했지만, 상대방은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 두 사람이 뒤바뀌면서 정은이 오히려 그녀를 무시했다.그러니 서영숙은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가 있겠는가?이런 느낌은 마치 전에 자신의 발밑에서 기어다니던 개가 어느 날 갑자기 식탁에 뛰어올라 그녀를 향해 짖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한입 깨문 것과 같았다.정은은 미소를 지었다.“죄송하지만, 저는 그런 꿈을 꾸지 않을 거예요. 강씨 가문의 며느리는 원하는 사람이 되라고 해요. 아주머니
생각할수록 화가 난 서영숙은 뜻밖에도 정은과 수민을 쫓아갔다.전에 서영숙은 이런 일을 하는 것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오직 수준이 없는 사람만이 이렇게 행동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러나 이때의 서영숙은 그런 수준이 없는 사람으로 되었다. 정말 화가 난 게 분명했다.“안중에 사람도 없는 악독한 것.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바로 너희들을 말하는 것이었네!”수민은 이 말을 듣자마자 웃었다.‘날 욕해도 되지만, 정은이를 건드리면 절대로 안 돼!’“그 입 닥쳐요, 아줌마!”“왜, 내 말이 틀렸어? 이 여자는 내 아들과 6년 동안 함께 해도 임신한 적이 한 번도 없었잖아. 그럼 소정은에게 문제가 있는 거 아니야?! 너 정말 웃기네. 반응이 왜 이렇게 커? 도둑이 제 발 저린 거지?”“허!” 수민은 냉소를 지었다.“6년 넘게 임신하지 않았다고요? 그럼 당신 아들의 몸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고요? 자주 병원을 드나들면서, 술과 담배까지 했으니 얼른 그 귀염둥이 아들을 데리고 병원에 가서 검사해 보세요. 만약 정말 무슨 문제가 있다면, 큰일인데...”말을 마치자, 수민의 눈빛은 연희의 배에 떨어졌다.연희는 안색이 돌변하더니 황급히 변명했다.“난 남자친구라곤 도겸 오빠 하나밖에 없었어요. 난 절대 그런 짓을 하지 않을 거예요...”아들 도겸을 언급하자, 서영숙은 갑자기 흥분해졌다.“감히 허튼소리를 하다니, 네 입을 찢어버릴 거야...”수민은 또 어떻게 그런 서영숙을 두려워하겠는가? 그녀는 즉시 소매를 걷고 말했다.“그래요, 도대체 누가 누구의 입을 찢는지 두고 봐요!”정은은 두 사람이 손을 쓰려는 것을 보고 서둘러 수민을 말렸다.연희도 멍해졌는데, 일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몰랐다.그녀는 한쪽에 서서 서영숙과 수민이 싸우는 것을 지켜보았고, 정은이 다가오는 틈을 타서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그리고 땅에 주저앉으며 울부짖었다.“내 배! 배가 너무 아파요!”서영숙은 잔뜩 긴장하기 시작했고, 수민과 싸울 겨를도 없이 즉시 연희를 바라보았다.
수민은 입을 삐죽거렸다.“정말 뻔뻔한 사람들이네. 방금 넌 나를 막지 말았어야 했어.” 수민은 방금 힘을 얼마 쓰지 않았기에, 정말 싸운다면, 서영숙은 당해낼 방법이 없었다.정은은 연희가 떠날 때의 안색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자, 됐어, 화내지 마. 그럴 가치가 없잖아. 중요하지도 않은 사람들 때문에 화를 내면 몸만 상해.”수민은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하지만 다음에 또 이렇게 나온다면, 난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정은은 얌전하니까 이런 일은 내가 나서면 돼.’“알았어.” 정은이 웃었다.“너 오늘 많이 놀랐지? 내가 한턱 낼게. 뭐 먹고 싶어?”수민은 그녀의 어깨를 안았다.“이 말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가자, 내가 널 데리고 맛있는 거 먹으러 갈게.”“응? 이 말은 내가 해야 되는 거 아니야?”“누가 말해도 똑같아. 내 마음만 알면 돼.”...차 안에서.서영숙은 검사 보고서를 들고 있었다. 연희 뱃속의 아이가 무척 건강하다는 의사의 말을 떠올리며, 그녀는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웃었다.연희는 서영숙의 표정을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그녀는 오늘 처음으로 서영숙과 만났던 것이다.도겸과 함께 할 때, 그는 자신의 가정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에, 연희는 그가 재벌 집 도련님이고, 아래에 여동생이 하나 있다는 것밖에 몰랐다.남자가 일방적으로 헤어지자고 한 다음, 연희는 갖은 방법을 생각해가며 그와 연락을 취하려 했다.그러나 예외 없이 줄곧 캄캄 무소식이었다.도겸이 이토록 단호하게 헤어지려 하자, 연희는 당황하기 시작했다.수소문한 끝에 서영숙의 핸드폰 번호를 알아냈고, 연희는 얼른 전화를 걸어 자신이 임신한 일을 말했다.현재 서영숙은 연희와 그녀 뱃속의 아이에 대해 나름 만족한 모양이었다.오기 전에 미래의 시어머니에게 좋은 인상을 남겨야 한다는 생각에, 연희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포장된 선물 상자를 꺼냈다.그녀는 달콤하게 웃으며 부드럽게 말했다.“어머님, 처음 뵙는 것이니 제가 선물을 조금 준비했
연희를 학교 앞까지 데려다 준 다음, 서영숙은 또 그녀에게 배를 조심하라고 당부한 후에야 기사에게 집으로 돌아가자고 분부했다.”“네, 사모님.”서영숙은 뒷줄에 앉아 그 못생긴 스카프를 보며 참지 못하고 입을 삐죽거렸다.보면 볼수록 눈에 거슬려, 그녀는 아예 그것을 좌석 아래로 던진 다음 재빨리 손을 뗐다. 마치 손에 무슨 더러운 것이라도 묻은 것 같았다.연희를 떠올리면 서영숙은 한숨을 금치 못했다.‘생김새도 보통, 행동거지도 대범하지 못해. 청순하다고 말하는 것도 다 억지로 칭찬하는 것일 뿐이야. 정말 가난한 티가 난다니깐.’서영숙은 다시 한번 그 스카프를 바라보았다.장밋빛의 스카프는 촌스러웠고, 아무리 고급스럽게 포장을 해도 그 수준 떨어지는 기운을 감출 수 없었다.‘일반 가정 출신은 정말 안목이 없다니까.’‘전에 소정은이 준 선물은 그래도 스카프에 주얼리, 가방 등이 있었지. 모든 게 정교할 뿐만 아니라 나와 얼마나 잘 어울렸는지. 딱 봐도 열심히 고른 게 분명해...’여기까지 생각하자 서영숙은 마음속으로 퉤퉤 했다.‘그 재수 없는 여자를 왜 생각하는 거야?!’...“사모님, 도착했습니다.”서영숙이 집에 들어오자마자 강서정이 내려왔다. 그녀의 손에 정교하게 포장된 상자가 있는 것을 보고, 서정은 그게 무슨 비싼 물건인 줄 알았다.그러나 그것이 뜻밖에도 장밋빛 스카프일 줄이야. 문제는 그 스카프는 바느질이 울퉁불퉁하여 예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촌스럽기까지 했다.“엄마, 이게 어디서 난 물건이에요?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이딴 촌스러운 물건을 산 거예요? 설마 이걸 쓰고 다니시려는 건 아니죠?”서정은 검지와 중지로 그들 집안과 어울리지 않는 그 스카프를 들었다.솔직히 그녀는 이렇게 못생긴 목도리는 정말 처음이었다.‘정말 구역질이 나네, 이 색깔이 뭐야? 집안의 개가 봐도 깜짝 놀랄걸.’서영숙은 씩씩거리며 말했다.“네 오빠의 여자친구가 준 거다. 자신이 더 정성스럽게 만든 선물이 더 성의가 있다나. 내가 보기에 그냥 나한테 돈
서영숙에게 있어 그녀의 아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이었다.‘그래도 내 며느리는 대학원 석사 정도 해야지. 해외 명문대에 유학한 배경이 있으면 더 좋고.’아무리 봐도 연희는 서영숙의 기대와 거리가 멀었다. 다만 그녀의 뱃속에 아이가 있었기에 서영숙은 마지못해 그녀와 만나겠다고 한 것이었다.‘우리 가문에 시집을 와? 헛된 망상을 하고 있어!’서정은 이 말을 듣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녀는 서영숙의 계획에 놀라지 않은 것 같지 않았다.그리고 서정은 손에 들고 있던 스카프를 쓰레기통에 버린 다음 티슈로 손을 닦았는데, 행여나 그런 궁상맞은 기운이 몸에 묻을까 봐 두려웠다.“정말 그랬으면 좋겠네요. 서연희가 뭐라고, 내 올케 언니가 될 자격은 없죠... 심지어 소정은 만도 못하잖아요.”학교 퀸카라는 호칭을 갖고 있었으니, 얼굴은 겨우 합격이었지만, 집안이든 돈이든 학력이든 아무도 없었다.‘우리 오빠가 대체 그 여자 어디가 마음에 든 거야? 정말 정신이 나갔구나!’“귀찮아 죽겠으니까 듣고 싶지 않아요. 우리 오빠의 일들은 앞으로 나한테 말하지 마요. 나 밖에 나가볼게요!”서정은 선물과 비싼 과일을 챙긴 다음 외출할 준비를 했다.그녀는 오미선을 찾아가서 다시 한번 자신을 위해 기회를 쟁취하고 싶었다. 만약 오미선이 학생을 하나 더 모집하겠다고 승낙한다면, 서정은 아직 희망이 있었다!서영숙은 서정이 부랴부랴 외출하는 것을 보고 뒤에서 타일렀다.“날씨도 추워서 길이 미끄러우니까 운전할 때 주의해...”오미선의 집에 도착하자, 지난번 거절당했던 기억이 다시 머릿속에 떠올랐다. 서정은 입술을 깨물며 자기도 모르게 주눅이 들었다.그러나 성공하면 대학원 자격을 얻을 수 있었기에, 결국 서정은 선물을 들고 차에서 내렸다. 이번에 그녀는 선물을 많이 가져오지 않았는데, 주로 성의를 더 많이 선보이려 했다.오기 전에 서정은 이미 여러 번 연습한 적이 있었다. 어떻게 말을 하면 사람들이 기뻐하고, 또 어느 각도에서 웃을 때가 더 보기 좋은지.서정은 오
정은은 표정이 차가워졌다.“내가 면접시험을 본 영상은 이미 전 나라의 사람들이 봤으니, 내 점수에 이의가 있다면 학교측에 반영하지 그래. 입만 열면 허튼소리를 지껄이지 말고. 요즘 사회는 소문을 마구 퍼뜨려도 벌을 피할 수 있잖아. 나와 조 교수님의 사진을 인터넷에 올린 그 주모자가 누구인지, 난 아직 알아내지 못했거든.”정은은 말할 때 눈빛은 서정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그녀의 그 어떤 미세한 표정도 놓치지 않았다.정은이 ‘사진’과 ‘주모자’를 언급했을 때, 서정은 시선을 딴 데로 돌렸는데, 마음이 찔린 게 분명했다.정은은 즉시 알아차렸다.‘강서정이 한 짓이었구나. 예상했던 사람이긴 해.’“전부터 계속 날 비난하던데, 설마 날 질투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에이 정말, 내가 왜 진작에 교수님 비위를 맞출 방법을 생각하지 못했을까?’“넌 뭐가 그리 잘났는데요? 서연희가 우리 오빠의 아이를 임신을 했어요. 아직 모르죠?”정은은 조용히 대답했다.“너보다 조금 일찍 알았을 뿐이야.”“오늘 교수님을 찾으러 왔지? 지금 집에 안 계시니 그만 돌아가.”정은은 자신이 무슨 말을 잘못했는지 몰랐다. 서정은 마치 꼬리 밟힌 고양이처럼 순식간에 화를 내기 시작했다.“네가 뭔데?! 교수님이 안 계시면, 너도 날 쫓아낼 자격이 없어요! 난 오늘 꼭 들어갈 거예요. 그래서 날 어쩔 건데요?”“정은이는 어쩔 수 없지만, 주인인 난 거절할 수 있겠지?”뒤에서 오미선은 안경을 위로 밀었고, 얼굴은 무척 차가웠다.서정은 안색이 굳어졌다.‘교수님이 언제 오신 거지? 방금 내가 한 그 말들을 들었을까?’“교수님, 저는...”“나 너 기억해.” 오미선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서정을 훑어보았다. “지난번에도 날 찾아왔었지.”서정은 오미선이 자신을 기억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러나 기뻐할 겨를도 없이, 오미선은 엄숙하게 말했다.“내가 지난번에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어? 난 교수님이니, 내 학생들이 자신의 실력으로 좋은 성적을 낼 수 있기를 바랄 뿐이야. 온갖 방법
서정은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정말이에요? 그래도 되는 거예요?!”“그럼.”“저 교수님의 학생으로 되고 싶어요! 사실 저도 교수님을 오랫동안 존경해 왔거든요. 교수님의 학생이 될 수 있다면, 정말 한이 없어요.”그녀는 자신이 방금 오미선의 집에서 나온 것을 잊은 것 같다.“그럼 그렇게 하자, 네 이름은...”서정은 영리하게 말을 이어받았다.“교수님, 저는 강서정이라고 해요. 서비대 생물학과 학생이고요.”“본교의 학생이었구나? 그럼 기초도 괜찮겠군.”송지혜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참, 서정아, 개학할 때, C강의동에 와서 날 찾아. 내가 널 네 선배님들에게 소개할게.”‘선배님?’서정은 송지혜가 지금 실험을 계획하고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녀는 무척 흥분해졌다. ‘만약 기회가 있다면, 나도 그 실험팀에 가입할 수 있겠지? 서비대 실험팀은 손꼽히는 수준이잖아. 소정은도 들어갈 수 없을 거야!’여기까지 생각하니 서정은 웃음이 더욱 간절해졌다.송지혜는 서정이 눈치가 빠르고 말까지 잘하는 것을 보며 매우 만족했다. 그녀는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오미선의 집 방향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흥, 우리 학교에 이름난 교수님이 둘이나 있을 필요가 있을까? 난 오미선보다 훨씬 실력이 있고, 심지어 인맥 방면에서 한 수 위였지만, 하필 학교는 과제 경비, 교육 자원, 심지어 학생 분배까지 모두 오미선의 편을 들어줬지. 대체 왜? 오미선이 나이가 많아서? 경력이 많아서?’그동안 오미선의 과제는 줄곧 정체된 상태였고, 3년이 지나도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했다. 그리고 밑에 있는 대학원생들도 매우 평범했다.‘올해의 학생은 더욱 말할 것도 없지! 오미선이 이번에 선택한 세 명의 대학원생은 수준이 모두 별로라고 들었어. 그중에는 나이가 좀 많은 학생까지 있다나? 몇 번 만에 합격했을지 누가 알아. 늙어서 사람 보는 안목도 따라서 나빠진 거야. 이런 나이 많은 학생은 딱 봐도 천부적인 재능이 없는데. 오미선만 마음이 약해서 그런 학생을 받
“언니, 이건 굳이 우리 의견 물을 필요도 없지 않아요? 언니가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가는 거죠. 저희한텐 뭐든 시키기만 하세요. 무조건 따라갈게요!”민지가 단호하게 말하자, 서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맞아요, 저흰 누나 믿고 가는 거예요. 결정은 누나가 해요.”정은은 그 말에 잠시 멍해졌다가,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너희들... 나 그렇게 믿어도 돼? 나도 가끔 실수하거든?”민지는 마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정은 언니가 실수했다면, 그건 100% 저랑 서준 오빠가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뜻이에요.”“그건 좀 과장이지만...”‘그래도... 이런 믿음을 받는다는 게 참 따뜻하네.’세 사람은 그렇게 식사를 마쳤다.계산은 서준이 맡았고, 정은과 민지는 먼저 주차장으로 향했다. “언니, 먼저 가요. 전 서준이 데리러 갈게요.”“응? 굳이?”“우리 집이랑 방향이 같잖아요. 서준이는 차도 없으니까, 그냥 태워다 주는 거죠, 헤헤.”“그래, 알겠어. 그럼 조심히 가. 운전 천천히 하고.”“네. 언니도 잘 들어가요!”...두 ‘파트너’와 방향을 맞춘 정은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자료 조사부터 시작해 ‘신소재 최적화 계획안’을 정리하고, 모든 내용이 빠짐없이 정리됐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확인했다.벌써 밤 10시. 정은은 핸드폰을 들고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냈다.[장은혁 씨, 시간 돼요? 상의드릴 게 하나 있어요.]그 시각, 은혁은 거실 소파에 앉아 어머니인 황희숙 여사의 ‘진실 공방’에 시달리고 있었다.“너 외할아버지한테 전화 왔어. 오늘 도시락 들고 회사 갔다며? 근데 그냥 말도 없이 두고 사라졌다고 난리야. 게다가 누가 너랑 어떤 여자가 같이 있는 걸 병원 약국에서 봤다던데? 솔직히 말해봐. 너, 여자 친구 생겼지?”은혁은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아니 외할아버지는 왜 또 엄마한테 바로 전화해요? 진짜 너무하신다니까요...”“이 자식 봐라, 말버릇 좀
진욱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렇게 마음이 있는 거면, 왜 정은이한테 솔직하게 말 안 해?”“겁나는 거지, 재석아? 말 꺼냈다가 거절이라도 당하면... 그땐 친구로도 남을 수 없을까 봐, 무서운 거잖아.”진욱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재석을 똑바로 바라봤다.“그건 너답지 않아. 내가 아는 재석이는, 망설이지 않고 결정하는 사람이었어. 결과가 불확실하다고 물러서는 사람 아니었잖아.”“정은이가 ‘지금은 연애 생각 없다’고 했지? 중요한 건 ‘지금은’이라는 거야. 사람 마음은 바뀌는 거고, 그때 거절했다고 지금도 똑같을 거란 보장은 없어. 알겠냐?”재석은 말없이 진욱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 말이 생각보다 깊게 박혔다. ‘지금도 똑같을까? 아니, 혹시... 지금은 조금 다를 수도 있는 걸까...’진욱은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야, 진심으로 말하는 건데, 너 계속 질질 끌면, 정은이 뺏긴다. 그리고 뺏기고 나서 울어봤자, 소용없을 거야.”“우리 정은이 인기 많은 거 너도 알잖아. 예전에도 정은이 두고 싸운 애들 있었잖아. 그리고 오늘 그 남자 봤지? 얼굴 잘생겼지, 젊지, 에너지 넘치지, 옷차림 보니까 집도 잘 사는 거 같던데?”재석은 이런 말을 아주 듣기 싫었다.“닥쳐.”진욱도 더 이상 말하기 싫었다. “칫. 드디어 위기감이 좀 드나?”‘그래, 긴장 좀 해라. 맨날 냉정한 척만 하지 말고... 이번엔 너도 좀 불안해져 봐야지.’...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집에 바래다준 뒤, 약을 가정부에게 전달하며, 복용 방법까지 하나하나 직접 설명했다. 봉수진은 저녁까지 먹고 가라며 붙잡았지만, 정은은 이미 서준, 민지와의 약속이 있었다.“외할머니, 며칠 안에 다시 올게요. 오늘은 친구들이랑 약속이 있어서요.”“그래그래, 알았어. 젊을 땐 많이 만나고 다녀야지.”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숙였고, 곧 차에 올랐다.약속 장소인 레스토랑에 도착했을 땐, 서준과 민지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테이블 위에
은혁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그러게요... 나야 뭐, 그랬으면 좋겠지만...”하지만 정은의 태도는 그리 확신을 줄 만큼의 호감은 아니었다.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분명히 좋아한다는 표시도 없는 애매한 선이 보이는 듯했다.‘그래서 더 미치겠어. 기대도 못 하고,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고... 이러니까 계속 마음이 붕 떠 있잖아...’그렇게 속으로 앓고 있었지만, 정은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봉수진의 약에 모든 관심을 쏟고 있었다.VIP 약국답게, 일 처리는 정말 빨랐다. 정성스럽게 달인 약이 곧바로 팩 단위로 나뉘어 밀봉되었고, 음용 방법까지 깔끔하게 안내되었다.냉장 보관 후, 따뜻한 물에 데워 마시면 된다는 안내였는데, 이 정도면 환자도 거부감 없이 약을 먹을 수 있을 것이었다. 약을 다 받은 후, 약 한 시간쯤 지나 두 사람은 병원을 나섰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은의 전화가 울렸다.“여보세요? 외할머니? 네, 약 다 받아놨어요.”“병원에서 달여줬어요. 네, 거기 계세요. 지금 바로 갈게요.”전화를 끊은 정은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은혁을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오늘 고마웠어요. 외할머니 모시러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아, 어... 그래요! 잘 가요!”은혁은 여자의 뒷모습이 멀어질 때까지 멍하니 서 있었다.심지어 여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후에도 한참을 그렇게 바라본 후에야 아쉬움 가득한 시선을 거두었다.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고, 화면엔 ‘황기' 두 글자가 떴다.“여보세요?”[야 이놈아! 도시락 던져놓고 도망가듯 나가버리면 어떡해?! 말도 못 붙였잖아! 뭐가 그렇게 급해? 뭐가 외할아버지보다 중요한 거냐고?!]“죄송해요... 헤헤.”황기는 순간 당황했다. ‘얘 지금 뭐야? 미쳤어? 웃음은 왜 이렇게 정직하게 새어 나오는 건데...?’...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태우고 병원을 나서는 중이었다. 바로 그때, 재석은 약을 수령하고 외래 진료실 앞 벤치에 앉아 있었다.
정은도 여기서 재석을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선배님, 병원엔 무슨 일로 오셨어요?”재석은 그제야 시선을 거둬들였다. 눈길이 정은에게 닿는 순간, 표정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난...”“날 데려다주러 온 거야.” 그 순간, 전진욱이 배를 감싸 쥐며 천천히 다가왔고, 재석 대신 대답을 건넸다.정은은 진욱을 바라보다가 눈이 살짝 커졌다. “교수님, 어디 아프세요?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요.”“하... 뭘 잘못 먹었는지, 아침부터 배탈이 나서... 약도 안 듣고... 이 사람이 막 끌고 오더라니까... 검사라도 받아보라고.”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하셨어요. 괜히 방치하다가 더 심해질 수도 있잖아요. 미리 체크하면 마음도 편하고요.”“어우, 너희 둘 미리 맞췄냐? 말이 어쩜 그렇게 똑같냐?” 진욱이 짐짓 장난스러운 말투로 투덜댔다.정은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재석을 바라봤다. “그랬어요?”재석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눈빛 속 어딘가 알 수 없는 감정이 일렁였다. ‘저 말투, 저 표정... 나만 아는 게 아닐 텐데...’“정은 씨, 이제 가야죠.” 그때, 은혁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아, 네.” 정은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희 먼저 갈게요.”그렇게 말한 후, 은혁과 나란히 병원 복도를 걸어 나갔다.재석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두 사람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눈빛 속 감정은 복잡하고도 묘했다. ‘뭔데, 저 둘은 저렇게 자연스러워...’“재석아? 야, 재석아!”진욱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재석은 고개를 돌렸지만, 눈빛 속 싸늘함은 여전했다. 진욱은 그 눈빛에 소름이 돋아 어깨를 움찔거렸다.“너... 왜 그래?”“방금 정은이가 ‘저희’라고 했어.”“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재석을 바라봤다. 몇 초간 멍하던 그는 그제야 이해가 된 듯 말했다. “아... 그 ‘저희’? 그게 뭐 어때서? 같이 왔으니까 ‘저희’지. 그럼
얼마 지나지 않아 황 원장은 처방전을 프린트해서 정은에게 건넸다.“수고 많으셨습니다, 원장님.”정은이 공손히 인사하자 황 원장은 손을 휘저었다.“아이구, 무슨... 이 아가씨는 인사도 참 반듯하게 잘하네요. 말도 예쁘게 하고, 얼굴도 예쁘고. 이런 손녀가 있으면, 어디 내놔도 자랑이겠네요.”봉수진은 바로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럼요. 우리 손녀는 어디 하나 빠지는 데가 없어요.”황 원장은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장난스럽게 물었다.“이렇게 예쁜 아가씨한테 남자 친구가 없을 리 없는데? 그렇죠?”봉수진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없어요! 보통 남자애들은 우리 정은이랑 안 어울려요.”“허허, 그래도 우리 손자 정도면 꽤 괜찮은데...?”황 원장이 살짝 떠보자 봉수진은 손사래를 쳤다.“아이구, 그 얘긴 그만해요. 정은이 아직은 시집 안 보낼 거예요. 지금이 제일 곁에 두기 좋을 때라니까요.”‘아이고, 또 시작이다...’정은은 속으로 헛웃음 치며 처방전을 가방에 쏙 넣고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났다.“저, 약 지으러 먼저 다녀올게요!”...진료실 문을 나서는 순간, 정은은 누군가와 부딪혔다.“아, 죄송해요!”고개를 돌려 상대방을 본 순간 정은의 걸음이 멈췄다.“은혁 씨?”은혁은 보온 도시락 통을 들고 서 있었다.“정은 씨! 또 보네요. 우리 진짜 인연인가 봐요? 하하...”“여긴... 병원인데? 누가 입원하셨어요?”정은이 도시락을 보며 물었다.“아, 아니에요. 저 입원실 온 거 아니고요! 외할아버지가 이 병원 의사세요. 오늘 외래 당번이라 저희 어머니가 직접 도시락을 싸주셨는데, 제가 대신 가져다드리러 온 거예요.”“혹시 외할아버지 성함이 황 씨?”“네! 황기 원장님이세요. 한약재 이름에서 따오셨대요, 혹시... 아는 분이세요?”‘어머나, 진짜 인연인가?’정은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오늘 저희 외할머니 진료도 황 원장님한테 받은 거예요.”“정말요? 세상에... 진짜 대박. 어쩐지 자꾸 마주치네요.”은혁은 정은 손에 들
아침 햇살이 창문 틈 사이로 스며들었다. 부드럽게 퍼진 빛이 정은의 잠든 옆얼굴을 은은하게 감쌌다.살랑이는 바람에 커튼 끝자락이 가볍게 흔들렸고, 고요한 침실에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여보세요? 외할아버지?”이춘재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아직 자고 있었구나? 그럼 내가 이따가 다시...]“아뇨, 괜찮아요. 이제 깼어요. 요즘 집에서 쉬고 있어서요, 실험실을 좀 멈췄거든요. 왜요, 무슨 일 있으세요?”전화기 너머에서 이춘재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어젯밤에... 내 친구 하나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단다. 병원에서 못 버티고... 그냥 그렇게.]‘헉...’[오늘 아침에 그 집 식구한테 연락이 왔어. 장례 준비도 해야 하고, 남은 가족들도 어찌할 바를 모르니 내게 좀 도와달라고 하더구나. 그 친구는 진짜, 훅 떠났지만 남겨진 식구들은... 참 마음이 아프지.]이춘재는 말을 멈췄고, 한참 후에 덧붙였다.[원래는 오늘 네 외할머니가 병원 가는 날이라 내가 같이 가기로 했는데... 현빈이는 출장이란다. 생각해 보니까 내가 부탁할 사람은 너밖에 없더라.]정은은 웃으며 말했다.“외할아버지, 그게 어떻게 부탁이에요. 당연히 제가 가야죠. 외할머니랑 병원 가는 건 제 몫이에요. 외할아버지는 마음 놓고 다녀오세요.”[그래, 그래. 고맙다, 정은아.]...오전 9시. 정은은 외할머니댁 앞에 도착했다. 봉수진은 이미 외출 준비를 마치고 작은 가방을 손에 든 채 문 앞에 서 있었다.그 옆엔 이춘재가 말없이 함께 서 있었고, 두 사람은 뭔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당신 진짜 왜 그래요? 정은이는 실험실에서도 바쁜 애인데, 이런 일까지 시켜서 되겠어요? 괜히 애 걱정하게 만들고, 또 미안하게 만들고...”봉수진의 잔소리가 이어졌고, 이춘재는 구겨진 어깨로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맞아, 당신 말이 다 맞아. 근데 정은이가 요즘 쉰다길래... 그냥 부탁한 거지 뭐...”“쉰다고 병원까지 같이 가야 해요? 그
수민은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손을 올려 한 대 갈겼다.짝!동건은 피하지 못하고 정통으로 이마를 맞았다.“야! 미쳤어?!”수민은 인상을 팍 구기며 외쳤다.“너 귀신이야 뭐야? 소리도 없이 뒤에서 들이대고... 맞을만 하니까 맞은 거지.”“뭐? 지금 그딴 태도를 보이는 이유가 뭐야? 딴 남자 생각하다가 놀란 거 아냐? 장은혁? 그 잘난 척하는 새끼?”수민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맞아. 잘생겼지, 말도 잘해, 심지어 마술도 하지. 매력 넘치는데?”“푸... 마술? 그건 여자들 꼬시려고 배운 거지. 허세로 가득 찬 새끼야.”“오히려 더 좋지 뭐... 허세라도, 적어도 표현은 하잖아. 넌 뭐 있어?”동건은 이를 악물었다.“그런 애가 뭐가 그렇게 좋다고. 딱 봐도 겉멋만 잔뜩 든 애송이잖아.”“내가 좋으면 된 거지. 근데... 잠깐만. 너, 여기 어떻게 들어왔어?”수민의 눈빛이 순간 날카로워졌다.“그냥.”“고동건!!!”“야, 소리 좀 그만 질러. 힘 좀 아끼라고. 이따가 쓸 데가 있을 테니까.” “꺼져.”수민은 문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동건은 한 발도 움직이지 않았다.대신, 그녀를 천천히 바라보다가 작게 웃었다.“너 요즘... 왜 이렇게 자꾸 도망치는데? 솔직히 말해봐. 내가 그리웠지?”“웃기지 마.”“아닌데... 지금도 눈 흔들리는 거 보이거든.”수민은 숨을 고르며 조용히 말했다.잠시 후, 그녀는 동건에게 그대로 안겨 침대 위로 내던져졌다.동건은 셔츠 단추를 풀며 천천히 그녀 쪽으로 다가갔다.“한다고 했잖아. 내가 농담하는 사람으로 보여?”수민은 몸을 살짝 일으키며, 도발적인 미소를 지었다.“너 하나로 되겠어?”“해보면 알겠지.”밤은 길었고, 봄기운처럼 뜨거웠다.누군가는 그 열기를 마음껏 즐겼고, 누군가는 답답한 숨을 눌러 삼켰다....불 꺼진 침실. 어둠 속,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창문 너머로 달빛만이 희미하게 커튼 틈 사이로 비스듬히 들어왔다.재석은 거실 창 앞에 서 있었다. 등
부재중 10통 중 9통은 고동건, 그리고 나머지 1통...‘어? 우리 조재석 교수님?’수민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톡 알림도 확인했다.읽지 않은 메시지 42개.대부분은 역시나 고동건.수민은 손가락으로 휙휙 넘기며 대충 읽었다.[야, 또 남자랑 밥 처먹냐?][여사친 모임엔 남자 안 끼운다며?][그 장은혁, 꽃미남 새끼 남자 아니냐?][조수민 너 진짜 표리부동이다?] [답장 안 해?][전화도 안 받아? 10초 준다!][기다려, 오늘 밤에 너 좀 혼나야겠어!!]수민은 손가락으로 한 번에 쭉 밀어내고, 심드렁하게 한 마디만 보냈다.[꺼져!!!]10초도 안 돼서 동건한테서 바로 또 메시지가 왔다.[답장할 줄은 몰랐네...][넌 진짜 사람 마음 찢어놓고 아무렇지 않지?] [아냐, 넌 원래 마음이 없지.][...]수민은 무표정하게 창을 닫았다. ‘이 인간은 진심으로 질린다...’그리고 재석과의 메시지함을 열었다.단 두 줄.[정은이랑 어디서 밥 먹었어?][장은혁도 함께였어?]수민의 눈썹이 절로 올라갔다.‘어라...?’‘우리 조재석 교수님이? 이런 문장을? 이렇게 빠르게? 이렇게 직접적으로?’‘우리 조 교수님... 평소에 ‘응’ 하나 치는 데도 심장 박동 조절하듯 하던 사람이었는데...’게다가 이 두 문장, 보통 사람이 보냈다면 ‘그냥 궁금했나 보다’ 하고 넘겼을 거다.하지만, 그게 ‘조재석’이라는 이름으로 오면 느낌이 전혀 달랐다.‘이거... 약간... 삐쳤다고 읽어야 하나?’수민의 눈이 반짝였다.‘뭐야, 이거 진짜네?’그녀는 살짝 웃으며 미용실에서 찍어둔 사진을 열었다.정은과 은혁이 나란히 앉은 각도, 분위기도 꽤 그럴싸한 장면.‘자, 실험 들어가자.’사진을 톡에 업로드. 손끝으로 부드럽게 터치.전송 완료.바로 이어 핸드폰에 내장된 스톱워치를 켰다.“시... 작!”1초, 2초, 3초... 5초...띵-[지금 어디야?]수민은 피식 웃으며 핸드폰을 내려놨다.‘오케이, 확정. 조재석 교수님
“은혁아, 우리 먼저 가볼게.”은혁이 손을 흔들며 인사하려던 찰나, 정은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은혁 씨, 같이 식사하시죠? 어차피 저도 아직 안 먹었는데요.”“마침 예약도 해뒀으니까 괜찮다면 같이 가요.”“정, 정말요?! 괜찮을까요?”은혁은 말끝이 떨릴 정도로 들뜬 기색이었다.수민은 표정으로 정은에게 물었다. ‘진심이야?’정은은 눈빛으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수민은 한숨 쉬듯 웃으며 말했다.“좋지 뭐... 사람 하나 늘어난다고 달라질 거 없잖아. 같이 가자.”은혁은 기뻐서 입꼬리를 다 못 내렸다. ‘정말 같이 가는 거야...? 나 지금 약간... 꿈꾸는 거 아냐?’...레스토랑에 도착하자 직원이 안내한 자리로 세 사람이 들어갔다. 따로 마련된 룸이라 분위기도 아늑했다.음식이 나오기 전, 은혁이 갑자기 말했다.“기다리는 김에... 작은 마술 하나 보여드릴까요?”수민은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마술도 해? 그러고 보니, 정은이 외할머니 생신 때도 뭐 하나 보여줬었지.”“이번엔 새로 배운 거예요.” 은혁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그럼 해봐, 해봐!” 수민은 벌써 핸드폰을 꺼내 카메라 준비 완료 상태로 들고 있었다.“도구 필요해?” 그녀가 묻자, 은혁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옆 캐비닛에서 종이 티슈 한 팩을 꺼냈다.그중 다섯 장을 쏙쏙 뽑아냈다. 마침 티슈에 프린트된 꽃무늬가 하나하나 다 달랐다.그는 정은을 향해 말했다.“정은 씨, 가장 마음에 드는 거 하나 골라주세요.”정은은 망설이지 않고 무심하게 한 장을 집어 들었다.은혁은 그걸 받아 조심스럽게 반으로 접고 말했다.“잘 봐요.”다시 펴서 말한 뒤, 조용히 티슈를 손안에서 뭉쳤다. 그리고 그 주먹을 천천히 펴자 손안에는 작은 꽃 한 송이가 피어 있었다.“선물이에요.”은혁은 웃으며 그 꽃을 정은에게 건넸다.“진짜 꽃이에요?”정은은 놀란 듯 꽃을 받았다. 손에 올려놓고 한참을 들여다봤다.‘이거... 어떻게 한 거지?’수민은 슬쩍 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