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의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다리가 휘청거려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았다.하지만 지금 여기서 쓰러질 순 없었다.“오빠, 제일 좋은 의사에게... 연락했어요?”정은은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는 걸 똑똑히 들었다.그때, 강서원조차 이쪽을 힐끔 돌아봤다.[호주 최고의 의료팀이 이미 모였어.]현빈의 대답이었다.정은은 몸이 또 한 번 흔들렸다. 입술을 깨물며 겨우 물었다.“정말... 정말 다른 방법은 없는 거예요?”그건 기도이자 절망이었다.[할 수 있는 건 다 해봤어. 하지만...]현빈의 목소리에 억눌린 한숨이 묻어났다.정은의 눈물이 한순간에 터졌다.“오빠... 어떡해요? 나... 어떻게 해야 해...”모든 기운이 빠져나가, 목소리는 갈라지고 머릿속은 하얗게 비어버렸다.그저 본능처럼 도움을 청했다.다행히 현빈은 침착했다.[정은아, 잘 들어. 아직 24시간 남았어. 내가 전용기를 공항에 대기시켜 놨어. 지금 바로 공항으로 가. J시에서 호주까지 15시간이니까, 순조롭게 오면 오미선 교수님... 마지막으로 만날 수 있어.]정은은 눈물을 훔칠 틈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요. 지금 당장 갈게요.”[그리고...]현빈이 잠시 머뭇거렸다.“오빠, 지금 그게 중요한가요? 교수님이... 무슨 말이라도 하셨어요?”정은의 눈물이 더 거세졌다.[진정해... 교수님이 의식이 희미해진 상태에서 네 이름을 부르다가, 다른 사람 이름도 불렀어.]“누구요?”[기봉 씨...]그 이름을 듣는 순간, 정은의 숨이 잠시 멎었다.현빈은 그게 자신이 아는 ‘조기봉’인지 확신이 없었지만, 말없이 굳어버린 정은의 표정을 보고, 확신했다.‘맞아... 조기봉 회장님...’정은의 떨리던 시선이, 서서히 단단해졌다.“알았어요. 준비할게요.”통화를 끊자마자, 정은은 성큼성큼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그 모습을 본 강서원이 미간을 찌푸리며 따라붙더니, 몸으로 길을 막았다.“이번엔 절대 못 피해! 분명히 말해. 헤어질 거야, 말 거야?!”정은은 도저히 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나요?”정은이 물었다.“사모님 본인의 결혼 기념일이잖아요. 남편, 아들들, 그리고 사모님이 초대한 손님들. 그중 대부분은 사모님을 진심으로 아끼고, 축하해 주러 온 사람들이에요.”“그런데 사모님은 그 손님들을 이용해 나를 함정에 빠뜨렸어요. 제 부모님 앞에서, 손님들의 입을 빌려 저를 모욕했죠.”“물러나게 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을 텐데, 굳이 가장 불쾌하고 치졸한 수를 골라 쓰셨네요.”“정말... 대단하세요. 강서원 여사님, 제 기준을 또 한 번 갱신하셨어요.”“다행히...”말을 멈춘 정은을 향해 강서원이 미간을 좁혔다.“다행히 뭐가?”“다행히, 사모님의 세 아들은 사모님 같지는 않아요. 아드님들은 바르고, 훌륭하고, 옳고 그름을 분별할 줄 아는 사람들이에요.”“너...”“저는 재석 씨가 초대장을 건넸다고 해서 원망하지 않아요.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요, 큰 병을 앓고 아직 회복 중인 어머니가 이런 잔꾀를 부릴 거라고...”“재석 씨는 계속해서 사모님과 저 사이를 어떻게든 풀어 보려고 했어요.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저는 그 마음을 이해하고 따라가 주기로 했죠. 혹시나...”“혹시나 저와 사모님 사이에 어떤 균형이 생겨서, 재석 씨가 더는 힘들어하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고...”“그래서 저는 번번이 마음을 누그러뜨렸고, 재석 씨의 부탁을 들어줬어요. 하지만 사모님은 그럴 만한 가치가 없어요.”정은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아들이 어머니를 위해 한 모든 것, 그게 아무 가치도 없다고요.”강서원의 목소리가 단호하게 터져 나왔다.“네가 뭘 안다고?! 나는 재석이를 위해서...”“하... 자기만 옳다는 착각이에요.”정은의 입꼬리가 비웃듯 휘어졌다.“병원 얘기를 꺼내셨으니, 저도 말할게요. 그날 이후 저는 헤어지기로 마음을 정했어요. 그런데 그걸 재석 씨가 알아챘죠. 말은 안 해도, 마음속에 그런 결심이 생기면, 함께 지내면 티가 나기 마련이잖아요.”“두 번째로 병원에 들렀다가 돌아오는 길에 재석 씨가 차
사람과 사람이 어울린다는 건, 말로 다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다.예전엔 서영숙이 정은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고, 지금은 강서원이 정은을 좋아하지 않는다.정은은 문득 생각했다.‘나는 원래 시어머니 복이 없는 걸까?’‘이런 좋은 집안의 어른들한테는 왜 이렇게 미움만 살까?’그녀는 아무렇지 않다고, 상관없다고 스스로 수없이 말했지만, 정작 지금처럼 부모님 앞에서, 이렇게 은근히... 따돌려지다니, 아무리 다독여도 마음이 고요해지지 않았다.‘그래, 나도 어쩔 수 없이 신경 쓰는구나.’“재석 씨, 나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요.”말을 마친 정은은 뒤돌아섰다.“정...”재석은 ‘같이 나갈게’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목까지 차오른 말이 끝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재석의 마음속에는 분노, 수치, 죄책감, 그리고 후회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이럴 줄 알았으면...!’‘이럴 줄 알았으면 초대장 따윈 절대 건네지 않았을 텐데... 왜...’재석의 시선이 강서원을 향했다.그 눈빛에는 어머니에 대한 낯섦과 실망이 깃들어 있었다.책망과 질문이 뒤섞였지만, 끝내는 허탈한 자조와 자기혐오로 가라앉았다.가슴속엔 뭔가가 잔뜩 차올라,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마치 이성의 끈을 끊고, 그대로 폭발할 듯한 감정이었다.강서원은 아들의 시선을 감히 마주하지 못했다.애써 그쪽을 보지 않으며, 입가에 붙인 단정한 미소로 손님들과 인사를 나누고, 평소처럼 사교에 집중했다.그러나 재석의 고통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시선을 거둔 순간, 이미숙과 눈이 마주쳤다.그 매서운 눈빛 앞에서, 재석이 느낀 당혹과 죄책감은 숨길 곳이 없었다.그리고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이 몰려왔다.그것은 바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강서원이 스스로는 치밀하다고 생각한 이 판과 은근히 감춘 악의는... 정작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손님들의 눈은 속이지 못했다.하물며 정은의 부모인 이미숙과 소진헌이 그 신호를 놓칠 리 없었다.어쩌면, 그게 강서원이 노린 결과
아무도 조씨 가문과 척질 만큼 어리석게 행동할 생각은 없을 것이다.그런데도 꼭 누군가 그런 짓을 하는 사람이 있고, 심지어 다른 사람들까지 분위기에 휩쓸리게 했다.순식간에 현장은 수군거림으로 가득 찼다.“설마... 강 대표님 전 여자친구가 조 교수님 현 여자친구랑 같은 사람이야?”“강 대표님이 아직도 소정은 씨를 못 잊었다던데, 오늘 보니 확실히 이유가 있네.”“대단하다! 강씨 가문이든 조씨 가문이든, J시에서 손꼽히는 명문가인데... 소정은 씨, 진짜 대단하네. 한 사람과 헤어졌어도 또 누군가 만나는데, 그것도 점점 더 좋은 집안으로.”“...”물론, 그 속에서도 상황을 똑바로 알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그렇게 말하면 여자 쪽이 되게 안 좋은 사람처럼 들리잖아. 소정은 씨는 이춘재 어르신의 외손녀야. 이씨 가문에서 애지중지 키운 분이라고.”“이씨 가문? 예전에 J시 재계 1위였던 그 집안?”“응. 30년 전만 해도 조씨 가문보다 훨씬 더 이름이 높았어. 다만 큰일이 있어서, 이춘재 어르신 부부가 해외로 나간 뒤로는 점점 조용해진 거지. 그래도 몇 대에 걸쳐 쌓은 재산이 어마어마해. J시 ‘이원’ 알지? 원래 그게 이씨 가문 별장이었어.”“아, 그러고 보니 생각난다. 예전에 이춘재 어르신 회갑연 때, 잃어버린 친딸을 찾았다고 공식 발표했잖아? 그리고 친 외손녀도 같이 소개했는데, 그게 바로 소정은 씨였어!”“맞아, 나도 기억나네...”“...”이미윤은 사람들 틈에서, 점점 바뀌어 가는 여론을 들으며 표정이 한층 더 광기로 물들었다.그때 강서원이 정은의 손을 놓고 변리아를 향해 손짓했다.리아는 그걸 보자마자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고, 못 본 척하며 현우를 붙잡았다.“응가하고 싶어? 그래, 엄마가 데려가 줄게.”조지언이 끼어들었다.“내가 데리고 갈게요. 남자 화장실이 편하잖아요.”리아가 고개를 갸웃했다.“당신네 집 화장실이 남녀 따로 있어요?”지언이 머쓱하게 웃었다.“아, 그건 아닌데요.”리아가 재빨리 말을 잘랐다.“그러
정은은 오늘 밀크티 색감의 실크 롱드레스를 입었다. 부드러운 소재과 몸매를 따라 흐르는 핏이, 정은의 몸이 만드는 곡선을 완벽하게 드러냈다.잘록한 허리, 곧게 뻗은 긴 다리, 단아하고 기품 있는 얼굴.아름답긴 정말 아름다웠다. 그래서 더 눈에 띄었다.정은은 이렇게까지 주목받고 싶지 않았다. 하물며 여긴 강서원이 만든 자리였다.강서원은 처음부터 정은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 상황에서 정은이 분위기를 못 읽고 튀어 보이면, 더 미움만 사게 될 뿐이었다.그래서 정은은 드레스 위에 재킷을 걸쳤다. 따뜻했고, 원피스의 화려함을 적당히 가리며, 보기에도 나쁘지 않았다.재석은 정은의 그런 속사정을 알 리 없었다.“왜 재킷을 걸쳤어?”“따뜻하잖아요.”“안은 난방 빵빵한데? 그냥 드레스만 입어도 돼.”정은은 한숨을 삼키고 결국 솔직하게 말했다.“재석 씨, 나 오늘은 여기 손님으로 왔어요.”“그래서?”“손님이 제일 하면 안 되는 게 뭔지 알아요? 호스트보다 튀는 거.”재석이 잠깐 멍해졌다.“오늘 이 자리의 주인공은 당신 부모님이지, 우리 둘이 아니잖아요.”...둘은 늦게 온 건 아니었지만, 재석과 정은이 도착했을 때 소진헌과 이미숙은 먼저 와 있었다.“아빠, 엄마.”정은이 먼저 다가갔다.재석도 자연스럽게 함께 인사했다.“아버님, 어머님.”“오랜만이네, 조 교수. 요즘 살 좀 빠진 것 같지 않나?”소진헌이 웃으며 재석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너무 무리하지 말고, 몸도 좀 챙겨.”“네, 감사합니다, 아버님.”그때 이미윤은 사람들 틈에서 이미숙 가족이 화기애애하게 웃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그 온화하고 완벽한 장면이, 눈을 찌르듯 아프게 들어왔다.‘왜?’남편은 이미숙 때문에 자신을 버렸고, 아들은 정은 때문에 먼 나라로 떠나버렸다.양부모는 잔인하게도 이미윤과의 모든 연을 끊었다.이제 이미윤은 부모도 남편도 자식도 없는 혼자가 됐다.그런데 그 모든 불행의 원흉인 이미숙과 정은이... 저렇게 환하게 웃으며 자신이 평생 갈망하
소진헌이 처음으로 조씨 가문 본가에 들어섰다.걸음을 옮기면서도 주변을 은근슬쩍 살폈다.그러고는 고개를 약간 숙여 이미숙에게 작게 속삭였다.“여기 이 집, 우리 장인 장모님 댁보다 더 크네.”이미숙이 고개를 끄덕였다.“여기, 조씨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집이래요.”“옆에 저 땅 좀 봐. 온실 지어놨네. 저거 밭으로 바꾸면 사계절 내내 채소 걱정 없겠다.”그 앞을 지나칠 때, 소진헌은 주위를 살핀 뒤 슬쩍 쪼그려 앉아 흙을 손으로 만져 봤다.‘오... 기름진데?’이미숙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이렇게 큰 땅, 누가 농사지어요? 심어놓으면 물 주고 김매는 사람도 따로 둬야 할 텐데... 채소 좀 먹자고 사람 고용하는 게 이득일까요?”“아... 그러네.”소진헌은 멋쩍게 머리를 긁었다.‘땅만 크다고 되는 게 아니지. 농사꾼이 있어야 채소가 나오지.’“정은이랑 조 교수는? 아직 안 왔나?”이미숙도 주위를 둘러봤다.“계획대로라면 우리가 오기 전에 도착해야 했는데...”“전화해 볼까...”소진헌이 핸드폰을 꺼내려는 순간, 강서원이 조기봉의 팔을 가볍게 끼고 다가왔다.“정은 어머님, 정은 아버님.”강서원은 은은한 노란빛의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머리를 단정히 올린 채 화장을 곱게 했다.아픈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그 시선엔 부드러운 미소가 머물렀고, 분위기마저 온화했다.이미숙이 미소로 화답했다.“안녕하세요. 또 뵙네요.”소진헌도 앞으로 나서며 조기봉에게 손을 내밀었다.“반갑습니다. 결혼기념일 축하합니다.”조기봉이 웃으며 악수를 받았다.“멀리 L시에서 일부러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별말씀을요. 회장님, 인사가 너무 과하십니다.”“자, 안으로 들어가시죠.”“괜찮아요, 바쁘실 텐데. 저희는 저희끼리 들어가도 됩니다.”부부가 안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조기봉이 중얼거리듯 말했다.“정은이 부모님, 참 좋은 분들이네. 그래서 그런가, 정은이도 그렇게 예의 바르고 싹싹하게 컸지.”“재석이 눈이 진짜 높아. 좋은 것만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