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답해, 정은이의 잠옷을 입은 적이 있냐고 묻잖아.”연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니에요... 전... 전 그런 적 없어요... 도겸 씨, 저 너무 아파요...”도겸은 연희가 입고 있는 잠옷 치마를 잡아당기며 차갑게 비웃었다.“그럼 이걸 어떻게 설명한 건데? 만약 해 본 적이 없다면, 어떻게 그렇게 능숙할 수가 있지?”그때 두 사람이 관계를 맺었을 때부터 도겸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분명히 전날 저녁에 껴안은 사람은 정은이었는데, 어떻게 다음날 깨어나자마자 연희로 변했을까?도겸은 단지 자신이 술에 취해서 사람을 잘못 보았다고 생각했을 뿐, 자신이 연희의 꾀에 속았다는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그 일을 생각하면 도겸은 이가 근질근질했다.“넌 지금 내 인내심을 도전하고 있어!”도겸은 분노를 느끼며 연희를 땅에서 잡아당겼다.“걸레 같은 것, 지금 당장 꺼져! 이 집에서 꺼지라고!”화가 치밀어 오르자, 도겸은 더욱 덥다고 느꼈다.마치 온몸이 불에 타고 있는 것 같았다...그는 몸을 비틀거리며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이상해! 이 반응은 마치...’도겸은 표정이 차가워졌다.“너 나한테 약 먹였어?!”연희는 마음이 찔려서 도겸의 시선을 피했다.“젠장! 넌 정말 겁도 없는 거야?! 감히 나한테 약을 먹여?!”도겸은 거칠게 숨을 헐떡였다. 마음속의 그 불은 점점 더 세차게 타올랐고, 눈도 점점 붉어졌다.연희는 침을 삼키며 마음속의 공포를 억눌렀다. 그리고 땅에서 일어나 눈물을 흘리며 그를 향해 걸어갔다.“도겸 씨, 지금 무척 괴로울 거예요...”도겸은 연희를 차갑게 바라보았다.연희는 입술을 깨물었다.“제가 도와줄 수 있어요, 정말이에요...”말하면서 그녀는 잠옷을 벗기 시작했다.“알잖아요, 제가 도겸 씨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그런 당신을 위해서 뭘 해도 저는 상관없어요. 절 다른 여자라고 생각해도, 제 가슴에 머리를 파묻히며 소정은의 이름을 불러도 전혀 개의치 않아요.”자신까지 감동시켰는지, 연희는 목소리까지 떨렸
연희는 멍해졌다.“당신은... 당신은 분명히 약을...”“왜? 실망했어?”미리 자신의 이상을 감지한 도겸은 얼른 욕실에 달려가서 먹은 해장국을 토해냈다.열이 나는 것은 단지 몸에 남은 약의 약효에 불과했다.“괜찮은 이상, 방금 왜, 왜 그런 척을 한 거죠?”도겸은 웃으며 말했다.“네가 희망에서 실망을 느끼고 또 절망에 빠지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재미있지 않아?”연희는 온몸을 떨었다.“넌 정말 겁도 없구나, 감히 나에게 약을 먹이다니. 하지만 넌 그럴 담력이 있어도 머리가 없잖아. 멍청한 것!”“이모님.”“도련님, 무슨 분부라도 있으십니까?” 명을 받은 왕미자는 즉시 문을 밀고 들어왔다.연희는 허둥지둥 잠옷을 입으려 했다. 그러나 어떡해도 잘 입을 수가 없어 낭패를 봤다.“이 여자의 물건을 좀 정리해요. 30분 안으로 사람과 물건을 모두 내 집에서 던져버려요! 그리고 모든 출입문 비밀번호를 바꿔요. 지금부터 난 이 집에서 이 여자와 관련된 그 어떤 것도 보고 싶지 않아요.”“네, 도련님.”연희는 끌려나갔다.멍하니 왕미자가 자신을 잡아당기도록 내버려 두었다.이때 그녀는 꿈에서 깨어난 듯 세게 발버둥 쳤다.“날 건드리지 마요!”왕미자는 멈칫했다.“내 뱃속에 도겸 씨의 아이가 있어요. 당신이 뭐라고, 나에게 손을 댈 자격이 있긴 한 거예요?! 일단 자신의 주제부터 잘 파악해 봐요. 만약 나와 아이를 다치게 한다면, 당신은 배상할 수 있어요?! 내가 아들을 낳고, 도겸 씨에게 시집가면, 제일 먼저 이모님을 해고할 거예요!”왕미자는 웃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빛은 마치 바보라도 보는 것 같았다.“아가씨,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본 거 아니에요? 임신했다고 재벌 가문에 시집갈 수 있을 줄 알았어요? 저는 강씨 가문에서 수십 년 동안 일했는데, 회장님이든 사모님이든 도련님이든, 모두 쉽게 남에게 휘둘리는 분이 아니세요. 강씨 가문의 손자는 다른 여자도 낳을 수 있지만, 이를 통해 가문의 여주인으로 되려 하다니. 너무 단순하시네요.”설사
“네, 도련님.”연희는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배를 안았다.“아파요... 배가 너무 아파요...”도겸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그가 움직이지 않자, 왕미자도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이때 연희는 이미 바닥에 주저앉았고, 이마에도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그녀는 손으로 남자의 바짓가랑이를 잡으며 애원했다.“도겸 씨, 살려줘요, 우리의 아이를 살려줘요. 배가 정말 아파요...”왕미자는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도련님, 서연희 아가씨는 지금 엄살을 부리고 있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식은땀은 이미 얇은 잠옷 치마를 적셨고, 연희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졌다.“그럼 알아서 처리해요.”도겸은 이 말을 남기고 떠났다.왕미자는 자신이 정말 재수가 없다고 느꼈다.‘우리 같은 가정부가 대체 무슨 잘못을 했다고!’...새벽 4시, 구급차가 별장에 와서 연희를 싣고 떠났다.그 병원은 마침 서영숙이 지금 입원해 있는 병원이었다.서영숙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왕미자의 전화를 받았다. 당시 연희와 도겸이 집에서 한바탕 소란을 피웠는데, 도겸이 그녀를 쫓아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연희는 버티며 떠나지 않겠다고 했다이번에 정말 큰일인 것 같았다.서영숙은 방심하지 못하고, 아이에게 문제가 생길까 봐 즉시 연희의 병실로 찾아갔다.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돼지를 잡는 듯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선생님, 제발요! 제가 이렇게 빌게요! 제 아이를 꼭 지켜주세요!”“저는 이 아이가 없으면 안 돼요. 이게 제 전부란 말이에요!”의사는 애써 연희를 위로했다.“진정 좀 하세요! 심호흡 하면서 감정부터 조절해 보세요. 지금 정서가 너무 흥분되어서, 이렇게 하면 환자분에게도, 태아에게도 좋지 않아요,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먼저 진정을 취한 다음 구체적으로 어떻게 치료할 것인가에 대해...”연희는 전혀 듣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의사의 손을 덥석 잡았다.“선생님, 솔직히 말해보세요. 제 아이를 지킬 수 있는 거예요? 제 아이는 멀쩡한 거냐고요? 아이에게 아무
서영숙은 연희가 자신을 원망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분명히 네가 소란을 피워서 이렇게 됐는데, 그게 어째서 내 탓인 거야? 한 번만 더 헛소리를 해 봐? 내가 네 입을 찢어버릴 테니까!”“그래요, 오늘 저를 죽이지 않으면 당신이 지는 거예요.”“이모님...” 서영숙은 화가 나서 온몸을 떨었다.“도겸에게 전화를 해서 지금 병원으로 오라고 해요. 당장!”“네, 사모님!”도겸은 전화를 두 번이나 끊었는데, 이제야 겨우 연결되었다.[무슨 일이죠?]“도련님, 사모님께서 병원으로 오시랍니다.”[시간이 없어요.]“그런데... 사모님과 서연희 아가씨가 싸우고 있습니다.”[그래요.]왕미자는 어이가 없었다.[그럼 서 여사님에게 전해줘요. 그때 여사님이 서연희 뱃속에 있는 아이를 지키겠다고 고집을 부리셨잖아요. 지금 이렇게 많은 일이 생긴 것도 다 여사님 때문이죠. 그러니 이를 책임지고 수습을 하셔야 하지 않겠어요? 더 이상 날 귀찮게 하지 마요!]말을 마치자 도겸은 바로 전화를 끊었다.왕미자가 다시 전화를 할 때, 그의 전원은 이미 꺼진 상태였다.“사모님, 도련님께서...”“뭐라고 했는데?”왕미자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도련님께서는 이 일이 사모님께서 스스로 저지른 일이니, 마땅히 그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도련님과는 상관없는 일이니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이때 연희는 따귀를 맞았을 때보다 더 처량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곧이어 병실도 혼란스러워졌다.의사는 황급히 사람을 내쫓았다.“임산부는 지금 상태가 매우 위험하니, 응급처치를 진행해야 합니다. 가족분은 어서 나가세요!”서영숙은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떨렸다.‘아이가 정말 없어지는 것은 아니겠지? 아까 그렇게 충동적이지 말 걸 그랬어...’30분 후, 병실 문이 안에서 열리자 의사와 간호사들이 줄지어 나왔다.서영숙은 즉시 가서 물었다.“선생님, 우리 손자는 괜찮은 거예요?”의사는 이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말다툼에 머리가 아파서 차갑게 말했
“우리 큰집은 지금 너와 도겸이 둘뿐이니, 어디 둘째, 셋째와 비교할 수 있겠니? 만약 유언장에 쓴 대로 사람 수에 따라 분배한다면, 틀림없이 우리가 손해를 볼 거야. 그러나 만약 네 오빠나 너에게 아이가 생겨 그 분배에 참여할 수 있다면, 우리도 돈을 조금 건질 수 있잖아. 지금 너한테 기대할 수 없지만, 서연희 뱃속의 아이는 마침 그 요구에 적합하니 당연히 애를 써서 남겨둬야지.”서정은 문득 깨달았다.“이것 때문이었구나.”“이제 알겠지? 서연희 뱃속의 아이가 무사히 태어나기만 하면, 우리는 적어도 이만큼 도 많이 가질 수 있어.”서영숙은 한 손을 내밀었다.“100억이요?”“좀 더 생각해 봐.”“설, 설마 천 억은 아니겠죠?”서영숙이 웃었다.서정은 숨을 한 모금 들이켰다.그리고 병실 안의 연희는 이 말을 더욱 똑똑히 들었다.VIP 병실도 그런 셈이라서, 방음이 전혀 안 됐다.연희는 손으로 아직 평탄한 자신의 배를 어루만졌다. ‘천 억이라니... 그게 대체 얼마야?’...현재 연희는 병원에서 지내도 소용이 없었고, 주로 조용히 휴식을 취해야 했다.그래서 나흘 째 되는 날에 서영숙은 연희에게 퇴원 수속을 밟아줬다.이번에 하마터면 아이를 잃을 뻔했기에, 서영숙 뿐만 아니라 연희도 무척 두려웠다.처음 며칠 집에 있을 때, 연희는 여전히 조심스러웠다. 밥도 아무거나 먹지 않고, 너무 흥분하지 못했으며 아이에게 영향을 미칠까 봐 걱정했다.시간이 지남에 따라 연희는 아이가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서영숙은 집에서 바쁘게 움직이며 그녀를 신처럼 모셨다. 하늘의 별을 따지 못한 것 외에, 다른 것은 정말 원하는 대로 해주었다.그동안 도겸은 별장에 한 번도 돌아가지 않았다.서영숙이 직접 그에게 전화해도 소용없었다. 받지 않거나 직접 돌아가는 것을 거절했다.두어 마디 하자마자 바로 끊어버리며 엄청난 짜증을 냈다.도겸은 이제 연희가 싫어서, 한 번 더 보는 것도 구역질이 났다.연희도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다.‘어차피 나에게 아이가 있
“뭐라고?”“임신하지 않으셨는데, 왜 보신탕을 마시는 거죠? 임산부와 음식은 빼앗는 건 너무하지 않아요?”“너 혼자서 그 큰 솥에 있는 것을 다 마실 수 있겠어?” 서영숙은 연희의 머리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뜻밖에도 이런 바보 같은 말을 하다니.“다 마실 수 있죠.”“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연희도 엄살을 부리지 않았다.“절 위해 삶으신 이상, 다른 사람들이 마시면 안 되죠. 안 그래요?”“그래.” 서영숙은 화가 나서 그릇을 내려놓더니 냉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너 혼자 천천히 마셔라!”말을 마치고 서영숙은 몸을 돌아섰다.연희는 의기양양하게 눈썹을 치켜세웠고, 식탁 위의 국 두 그릇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시기해하며 입을 삐죽거리더니 마시지도 않고 방으로 돌아갔다.“너 왜 보신탕을 안 마신 거야?!”연희는 낮잠에서 금방 깨어나며 하품을 했다.“갑자기 마시고 싶지 않아서 그래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너--”“아주머니, 번거로우시겠지만 나중에 제 방에 들어올 때 노크 좀 하세요. 이렇게 갑자기 나타나면 제 뱃속의 아이가 놀랄 거예요.”서영숙은 속이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밤이 되자, 연희는 거실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았다.서영숙은 그녀에게 화원에 가서 산책을 해야 태아에게 좋다고 했지만, 그녀는 들은 체 만 체였다.“아주머니가 이렇게 한가하신 이상, 만둣국 좀 사러 가시면 안 될까요? 저 지금 성동의 행복 만둣국이 땡기네요. 그 가게가 맛이 제일 좋거든요.”서영숙은 창밖을 내다보았는데, 날은 벌써 어두워졌다.성동에 가려면 운전을 해도 50분이 걸렸고, 거의 2시간 후에야 돌아올 수 있었으니 또 무슨 만둣국이 있겠는가?설령 있다 하더라도 사 오면 다 식어서 맛이 없을 것이다.“이 시간이라면 이미 문을 닫았겠지? 만둣국 먹고 싶다면, 내가 이모님더러 좀 만들라고 할게...”연희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집에서 만드는 게 어떻게 밖의 만둣국보다 맛있을 수 있겠어요? 그 가게는 11시가 되어서야
서영숙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탕을 끓였는데, 연희가 욕을 피붓는 것을 보며 열받았다.“이건 족발인데, 안에 삼을 넣어서 아이에게 좋아.”“아이한테 좋다고 임산부를 무시하는 거예요? 기름이 둥둥 떠 있는 거 못 봤어요? 보기만 해도 느끼한데 어떻게 마실 수 있겠어요?”서영숙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그럼 넌 어떻게 하고 싶은 거니?”“어쩜 이렇게 둔해요? 이렇게 간단한 일까지 제가 가르쳐야 하는 거예요? 위의 기름을 버리면 되잖아요? 그렇게 멍청해서 어떻게 지금까지 살았는지...”연희는 조금도 인정사정을 봐주지 않았고, 하는 말도 독하며 듣기 거북했다.서영숙은 남한테서 이런 모욕을 당한 적이 없었다. 순간 화가 치밀어 오르자, 그녀는 벌떡 일어나서 버럭 했다.“누가 둔하다는 거야? 서연희 너 말이 너무 심하잖아!”만약 서영숙이 자세히 생각을 해본다면, 연희가 지금 한 말과 말투가 전에 그녀가 연희를 욕했을 때와 거의 똑같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그렇다, 연희는 지금 복수를 하고 있었다.그녀는 지금 뱃속에 천 억짜리 아이를 품고 있었다. 명문가에 시집갈 수 없다 하더라도, 연희는 이 아이로 서영숙에게서 돈을 뜯을 수 있었다.‘200억 정도는 줘야겠지? 이제 돈이 있으니 도겸 씨에게 시집가든 안 가든 상관없어. 어차피 그 남자도 날 싫어하잖아. 명문가에 시집가지 않는 이상, 당연히 미래의 시어머니에게 잘 보일 필요가 없고. 그럼 나도 얼른 복수를 해야지 않겠어?’“지금 저한테 소리를 치시는 거예요? 기름을 버리라고만 했지, 다른 일 시킨 것도 아니고. 그렇게 내키지 않으면 그냥 가세요. 제가 언제 제 곁에 남아달라고 애원한 적 있어요? 만약 제 뱃속에 있는 아이에게 무슨 문제가 생기면...절대로 후회하지 마세요.서영숙은 한참 후에야 겨우 진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연희의 요구에 따라 삼계탕 위의 기름을 걷어내기 시작했다.30분 넘게 걷어냈지만, 연희는 얼마 마시지도 않았다. 서영숙은 화가 나서 하마터면 다시 쓰러질 뻔했다...강씨
오미선의 말이 끝나자마자 키가 훤칠한 남자가 안에서 걸어 나왔다.정은은 멍해졌다.“소개하지. 이 아이는 네 성 교수님의 제자, 심현빈이야.”남자는 미소를 지으며 정은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반가워, 후배야.”“성 교수님의 학생이었어요?”정은은 혀를 내둘렀다.“왜? 그렇게 안 보여?”“그건 아니에요.”오미선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너희들 서로 아는 거야?”현빈은 고개를 끄덕였다.“네.”‘그리고 안 지 꽤 오래됐지...’“그럼 다행이군. 다 아는 사람들인 이상, 저녁에 같이 밥 먹고 가지 그래?”“감사합니다, 교수님. 그럼 저도 사양하지 않겠습니다.”정은도 줄곧 여기서 저녁을 먹었다.박애영은 요리를 한 상 차렸는데, 정은이 즐겨 먹는 음식이 두 개나 있었다.현빈은 일부러 그런 것인지, 사람들이 자리에 앉을 때, 그는 그 두 음식과 가장 가까운 자리를 정은에게 양보했다. 그리고 그 자신은 주동적으로 옆에 앉았다.오미선은 이를 보고 눈썹을 치켜세웠다.그러나 정은은 그저 우연이라고 생각하며 전혀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우와, 이모님 정말 너무 좋아, 내가 좋아하는 음식까지 만들어주셨다니.’“현빈이 넌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지?” 오미선이 갑자기 물었다.“올해 28살입니다.”“28살에 자신의 투자회사를 경영하다니, 정말 유망한 젊은이구나.”현빈은 겸손하게 손을 흔들었다.“과찬이십니다. 회사를 차릴 수 있게 된 것은 가족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최근 2~3년만에 서서히 허전되기 시작했고요.”“장사를 하고 투자를 하는 것보다, 저는 오 교수님과 성 교수님과 같은 연구학자가 더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매일 실험에 몰두하고, 해마다 열심히 탐구하며, 외로움과 지루함을 견뎌내시며 과학의 참뜻과 학술의 비밀을 위해 일생을 바치셨잖아요.”“과학연구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이런 생활은 외롭지도 않고 지루하지도 않아. 안 그래, 정은아?”“그럼요.” 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직장처럼 남과 비교할 필요가 없고, 사회의 교
아침 일찍, 정은은 알람도 없이 자연스럽게 눈을 떴다. 몸이 먼저 하루를 시작하려는 듯 움직였다. 그녀는 세수하고, 옷을 갈아입고, 간단히 머리를 정리했다.오늘 오전 수업은 조금 늦게 있어서, 평소와 달리 부엌부터 들렀다. 전날 밤부터 저온 조리기에 찬물로 불려둔 죽이 잘 끓고 있는지 확인하려고 뚜껑을 여는 순간, 뜨겁게 올라오는 김이 정은의 얼굴을 감쌌다. 쌀과 잡곡이 어우러진 고소한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정은은 숟가락으로 조심스레 한 입 떠먹어봤다. ‘음... 달지도 않고, 너무 퍼지지도 않았어. 딱 좋아.’ 이어서 전원을 끄고, 불도 내렸다. 그리고 집에 밀가루가 조금 남아 있었기에, 이번엔 자기만의 전병을 해보기로 했다. 정은은 먼저 매콤한 양념장을 만들었다. 양파랑 마늘은 잘게 다지고, 된장에 고추장, 그리고 약간의 물을 넣어 자글자글 볶았다. 거기에 설탕 조금과 굴 소스, 그리고 향신료를 살짝 넣어 풍미를 더했다. 양념장은 따로 식힌 정은이 밀가루 봉지를 꺼냈다. 약 500그램을 큰 그릇에 덜고, 소금을 약간 넣어 섞은 후, 젓가락으로 가운데를 십자로 그어 가르듯 나누었다. 한쪽엔 찬물, 다른 쪽엔 끓는 물을 부어가며 각각 섞어줬다. ‘반죽이 식어도 딱딱해지지 않는 비결. 할머니가 알려준 방식이지.’ 섞은 반죽은 5분 정도 숙성시킨 후, 손으로 부드럽게 치댔다.반죽은 금세 매끈하고 끈적이지 않게 변했다. 15분 정도 덮어두고 반죽을 숙성시키는 사이, 정은은 기름장도 따로 만들어 놓았다. 숙성된 반죽은 전기 팬 크기에 맞게 밀대로 펴고, 표면에 기름장을 바른 후, 피자처럼 8조각으로 칼집을 냈다. 바깥에서 안쪽으로 접어가며 둥글게 뭉친 후, 5분간 더 숙성. 그걸 다시 눌러 납작하게 만들었고, 한 번 더 밀대로 펴줬다. 이제 팬 위에 올릴 차례. 양면이 노릇하게 구워지면, 양념장을 바르고 대파를 송송, 참깨를 솔솔. 정은은 전병을 두 장 부쳐서 작게 잘랐다. 한 끼
재석이 문득 물었다. “내가 왜 웃는지 몰라서 그래?” 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내가 알아야 해요?” “우리 여자 친구랑 관련된 건데, 알아야 하지 않을까?” 남자의 눈을 마주했을 때, 그 안에 담긴 사랑이 넘칠 듯 차오르고 있었다. ‘저 눈은 반칙이야.’ “재석 씨, 우리... 질문 게임할래요?” 재석이 눈썹을 올렸다. “어떻게 하는 건데?” “서로 번갈아 가면서 질문 하나씩 해요. 빠르게 묻고, 빠르게 답하기... 거짓말은 금지...” “좋아, 네가 먼저.” 정은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내가 몇 번째 여자예요?” 시작부터 강수였다. 하지만 재석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첫 번째. 첫사랑.” ‘첫사랑...’ 그 말이 재석의 입에서 흘러나올 때, 낮고 묵직한 울림에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섹시하지만 진심이 느껴지는 톤.이미 예상한 대답이었지만, 막상 재석의 입으로 직접 듣고 나니 조금 놀라기도, 어안이 벙벙하기도 했다. ‘진짜... 한 번도 안 사귀어 봤다고?’ 재석이 질문을 이어갔다. “근데, 왜 그걸 물어본 거야? 그렇게 신경 쓰였어?” 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질문이 두 개잖아요.” “그럼 두 번에 나눠서 대답을 들어야겠네.” “좋아요, 우선 ‘왜 물어봤냐’에 대한 대답부터 할게요.” 정은은 살짝 숨을 고르더니, 또박또박 말했다. “그전까진 재석 씨의 연애사에 관해 물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사적인 영역이니까, 굳이 파고들지 않았고요. 하지만 지금... 우리는 연인이니까...”“그런 건, 앞으로 어떻게 관계를 쌓아갈지에 대한 기준이 될 수도 있잖아요.” 재석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우리 여자 친구 차례.” 정은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언제부터 날 좋아했어요?” 재석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몇 초간 고민했다. “왜 망설여요?” 그러자 그가 정은의 말을 따라 하듯 장난스럽게 말
“음... 내가 틀린 말 했어요?”정은이 눈웃음을 지으며 말하자, 재석의 이마에 살짝 핏줄이 떠올랐다. 정은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장은혁 씨한테 그렇게 말한 건, 화를 내거나 따지지 않고 먼저 날 걱정부터 했기 때문이에요. 그건 기본적으로 사람 됨됨이가 괜찮다는 뜻이니까요.” “그 뒤로 계속 들이대지 않고 물러난 것도, 자존심 있고 선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라는 거죠...”“그리고 일 방면에서는... 솔직히 소재 분야에선 장은혁 씨가 겪어온 게 많아요. 그런 경험이 아니었으면, Z시 공장장이 그렇게까지 대우 안 해줬을걸요?” ‘하아... 진짜...’ 재석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운전대가 삐걱하고 미세하게 흔들릴 정도로.그러다 결국, 참지 못하고 말했다. “그래서...”하지만 그 말은 정은의 장난기 어린 시선과 정면으로 부딪쳤다.여자의 입꼬리는 살짝 올라가 있었으며, 눈빛에는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표정이 서려 있었다. “설마... 지금 일부러 이러는 거야?”정은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객관적으로 평가한 것뿐인데요? 일부러라니요?”“흠흠...” 재석이 괜히 헛기침했다.“그럼, 우리 여자 친구가 보기에... 나랑 장은혁 중에 누가 더 나아? 일로든, 사람 됨됨이로든.”정은은 잠시 멈칫하더니, 웃음을 터뜨렸다.“푸흐하하하하...”웃음이 참을 수 없다는 듯 터져 나왔다. 눈매가 접히고, 어깨가 들썩이고, 결국은 배까지 움켜쥐며 웃기 시작했다.“아 진짜... 그런 걸 물어요? 재석 씨, 그런 거 묻는 사람 아니잖아요! 근데 진짜 묻네요?! 아 너무 웃겨요...”재석은 억울한 듯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봐, 일부러 그런 거 맞네. 스스로 실토한 셈이지?”“푸하하하...”“아직도 웃어?” 재석은 눈을 찌푸리며 다시 그녀를 쳐다봤다.정은은 눈물까지 맺힌 얼굴로 말했다. “웃으면 안 돼요? 웃긴 걸 어떡해요? 아, 우리 남자 친구 진짜 귀엽다니까요...”‘이 사람, 질투하면서도 날 내
정은은 바로 정색하고 ‘남자 친구’에게 물었다.“몇 시에 도착했어요? 솔직히 말해봐요.”재석은 ‘10분 전’이라고 말하려다, 입술이 굳어졌다. 결국 피식 웃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음... 한 시간 전.”“왜 그렇게 일찍 온 거예요? 비행편도 다 보냈잖아요.”“그냥... 널 빨리 보고 싶었어.”두 사람의 시선이 딱 맞닿았다. 정은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근데 난 고작 3일밖에 안 비웠는데요?”재석이 바로 대답했다.“나한텐, 3일이 3년 같았거든.”“재석 씨...” 정은은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진짜... 말 너무 잘하네, 이 사람.’“생각보다 말 잘하네요. 그런 거 잘 못할 줄 알았는데요...”재석은 장난기 없이, 진지하게 말했다. “거짓말 아니고, 그냥 진심을 말한 거야.”정은의 가슴이 너무나 설렜다.‘이렇게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하니까 더 심쿵하잖아.’‘진짜 반칙이다, 조재석.’이런 다정한 장면이, 멀리서 바라보는 은혁의 눈에는 그야말로 심장을 후벼 파는 칼날과 같았다. ‘조재석...? 그 조재석이라고?’‘병원에서 봤을 땐, 서로 어색하기 그지없던 두 사람이었는데...’ ‘분명히 그땐... 전혀 사귀는 것 같지 않았는데...’은혁의 표정이 굳어지고, 입꼬리가 서서히 내려앉았다. ‘설마... 이거 다 연기인 건가? 날 거절하려고, 연극까지 짠 거야?’점점 차오르는 분노에 못 이긴 은혁은 두 사람 쪽으로 빠르게 걸어갔다.“정은 씨!”정은은 좀 놀랐다.“네?”재석도 좀 이해가 되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은혁은 정은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굳이 이럴 필요는 없잖아요. 나를 거절하는 건 괜찮아요. 근데 이런 식으로 거짓말까지 하면서, 스스로를 망가뜨릴 필요는 없잖아요.”‘스킨십까지... 괜히 헛소문만 나면 손해 보는 건 여자 쪽이라고...’은혁은 이번엔 재석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정은 씨가 무슨 이유로 이런 유치한 연극에 합을 맞춰주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이런 행
정은은 은혁의 그 아련하고 억울한 표정을 보자, 그냥 말이 안 나왔다. ‘대체 지금 머릿속에 무슨 드라마를 찍고 있는 거지...?’ ‘진짜, 할 말 없네...’오후 세 시 정각. 탑승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승객들이 하나둘 줄을 서고, 정은도 조용히 탑승했다.비행기가 거의 만석이 된 후, 은혁은 이코노미석 안에서 정은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A 열, F 열, 가운데 구역까지 샅샅이 훑었지만, 없었다.잠시 후, 탑승 문이 닫히고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승객 여러분, 곧 출발하겠습니다.”그제야 은혁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고 기내 앞쪽으로 조심스럽게 올라가 봤다.그리고, 비즈니스석 좌석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있는 정은을 발견했다.“정, 정은... 씨? 이코노미석이 아니었어요...? 나는 그게...”‘뭐지, 상황이 이상한데...?’ ‘내가 이코노미석이라 당연히 정은 씨도 그럴 줄 알았는데...’정은은 슬쩍 웃었다. “누가 그래요? 내가 이코노미석 탄다고?”“지난번에 올 때는... 그때는 분명...”“그때는 비즈니스석이랑 일등석이 매진이었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코노미석에 탄 거고, 이번엔 자리가 있어서 그냥 비즈니스로 예약한 거죠.”‘아... 나 지금까지 뭐 한 거지. 혼자 다 짐작하고, 혼자 의미 부여하고, 혼자 낭만 타령하고...’은혁은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었다.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사실 은혁 씨는 나에 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어요. 그냥... 본인이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들을 뿐이죠.”그 말에는 어떤 분노도, 원망도 없었다. 그저 담담히 사실만 전달할 뿐.은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다. ‘와... 진짜, 뼈 맞았다.’자리에 앉은 은혁은 좌석의 불편함을 바로 체감했다. 다리는 제대로 뻗지도 못하고, 의자도 푹신하지 않고, 무엇보다 공기 중에 떠도는 그 ‘답답한 사람 냄새’가 꽤 거슬렸다.‘내 마음이 아무리 복잡하다지만... 이건 좀
은혁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말문이 막힌 채, 몇 초간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진짜... 남자 친구가 있었던 거야?’ ‘아니면... 나 때문에 그렇게 말한 걸까?’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렸지만, 정은은 이미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고 없었다....그 시각, 정은은 공장 회의실에서 진승구와 협의 중이었다. 조건은 명확했고, 가격도 이견 없이 깔끔하게 정리됐다.공장장인 진승구는 시원시원한 정은의 태도에 감탄했고, 그 자리에서 바로 계약서 인쇄를 지시했다.서류가 출력되자, 두 사람은 조용히 사인했고, 정은은 먼저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좋은 협력 관계 기대하겠습니다.”진승구도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받았다. “함께하게 되어 영광입니다.”정은이 회의실을 나선 후, 문이 다시 벌컥 열렸다.“정은 씨는 어딨어요?” 은혁이었고, 숨이 가빠 보였다.“소... 소정은 씨요?” 진승구는 당황해하며 되물었다.“그래요, 그분. 지금 어딨어요? 아까 계약한다고 했잖아요? 그냥 바로 도장 찍지 말고 좀 더 시간 끌라고 했잖아요. 이틀 정도만 더 붙잡아 두지...”진승구는 식은땀을 흘리며 답했다. “아... 이미 계약 다 끝났는데요...”은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 바보야, 바보... 진짜 바보!’속으로 열 번은 외쳤다. ‘이딴 놈한테 뭘 맡기겠다고...! 아버지한테 건의해야겠네. 앞으로 공장 접대비 전액 삭감... 출장자도 식당에서 밥 먹게 하고, 노래방은? 절대 금지!’은혁은 스스로를 다독이는 척했지만, 자꾸만 뇌리를 맴도는 정은의 말 한마디에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았다.‘남자 친구가 있다... 그게 진짜든 아니든, 어제 그 말은 분명 나를 밀어내기 위한 거였어. 다 망친 거야. 다 그놈의 진승구 때문이야...’진승구도 그런 은혁을 보면서 이해가 안 됐다.‘은혁 도련님... 왜 저래...?’...정은은 과일 봉지를 하나 들고 김대영이 있는 작업실 쪽으로 향했다.“김 기사님, 누가 찾아왔어요!”“예
정은이 계속 말했다.“이미 결과 나왔어요. 기준에는 전혀 못 미치네요.”김대영은 들숨을 멈췄다. “그렇게 빨리?”‘진짜다... 이 속도면 혼자서 실험실 하나는 돌리겠다니까.’“그럼, 옷부터 갈아입고 올게. 오늘은 절대 민폐 안 끼칠게!”“감사합니다, 선생님.”“에이... 감사하긴! 당연한 거지!” ‘선생님이라니... 아저씨도 아니고, 기사님도 아니고... 선생님이라 불러주다니, 나 오늘 힘난다.’모든 준비를 마친 오전 8시. 연구실 측에서 드디어 3세대 샘플이 도착했다.정은과 김대영은 다시 책상에 마주 앉아 정밀 측정과 테스트를 시작했다. 시간은 어느덧 금방 흘러 점심시간.김대영이 말했다. “가자, 밥 먹으러.”“네.”식당으로 향하는 길, 두 사람은 오후 실험 플랜에 대해 대화를 이어갔다. 바로 그때, 헐레벌떡 뛰어오는 은혁의 머리는 약간 흐트러져 있었다.심지어 셔츠 깃은 구겨져 있었으며, 표정은 평소답지 않게 초조해 보였다.“정... 정은... 씨!”은혁은 숨이 차 헉헉거리며 말했다. “겨우 찾았어요...”정은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아침부터 계속 메시지 보내도 답이 없고, 호텔 방에도 없길래... 무슨 일 생긴 줄 알았어요.”은혁도 정은을 걱정한 그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6시 반에 나왔어요. 어제 은혁 씨 늦게 들어온 것 같길래 아직 잘 거라 생각하고, 일부러 안 깨웠어요.”정은은 솔직히 대답했다.“6시 반...”은혁은 민망한 듯 짧게 웃었다. 그리고 변명처럼 말을 덧붙였다. “나 어제... 일부러 취한 거 아니에요. 원래 술 그렇게 안 마시는데... 공장장이랑 애들이 자꾸 마시자고 해서...”“끝나고 또 노래방까지... 근데 거기, 이상한 데 아니고 진짜 건전한 곳이에요. 나 원래 그런 데 잘 안 가요.”정은은 담담하게 말했다. “괜찮아요. 오해할 일도 없고, 솔직히 말해 저랑은 큰 상관도 없는 얘기예요. 그럼, 김 선생님이랑 밥 먹으러 가볼게요.”“아
정확히 말하자면, 한 사람에게 연락해야 한다는 걸 잊었다.오후에 재석이 먼저 전화를 걸어왔다. 공장 쪽 진행 상황을 물어보는 짧은 통화였고, 그때 정은은 막 실험에 들어가 바쁜 와중이었다.“일 끝나면 내가 먼저 연락할게요, 알겠죠?”이 말은 바로 마지막에 정은이 한 한마디였다. 그리고... 그 뒤로 연락이 없었다.‘하... 진짜 미쳤어. 그 말 해놓고 까먹었다고? 이런 사람은 또 없을 거야’정은은 민망함에 얼굴을 문지르며 핸드폰을 들었고, 톡을 열자마자 미확인 메시지가 쌓여 있었다.하나같이 은혁에게 온 것들. [정은 씨, 지금 어디예요?][정은 씨, 밥은 먹었어요?][정은 씨, 같이 식당 갈래요?][...] 친절한 말들이었지만, 그 속엔 정은이 찾는 메시지가 없었다.‘아니지, 지금 연락해야 할 사람은 장은혁이 아니라...’정은은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지만, 몇 자 쓰다가 다시 전부 지웠다. 결국, 손가락이 향한 건... 영상 통화 버튼.띠-잠시 울리던 화면이 바뀌며, 재석의 얼굴이 화면에 떴다.정은이 ‘미안하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일 끝났어?]“네.” 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피곤하지 않아?]“괜찮아요. 근데... 미안해요. 공장에서 나오는 길에 바로 연락하려고 했는데, 정신이 없었어요...”[괜찮아, 언제 연락하든 난 항상 여기 있어.]‘이 말, 왜 이렇게 따뜻하지...’ 재석은 가슴속에서 뭉근한 온기가 퍼졌다.그때, 문득 정은의 시선이 멈췄다. “지금 어디예요?”[집.]“집 어디요...? 방? 아니면...”재석은 순간 멈칫했다. 정은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화장실?”화면 속, 지나치게 가까이 잡힌 남자의 얼굴. 말도 안 되게 커진 이마와 눈, 화면에 머리까지 박을 기세였다.‘잠깐만. 이거... 설마...’“설마... 지금 옷 안 입었어요?”정적. 화면 너머의 공기조차 얼어붙는 느낌.재석의 얼굴이 굳었다. [씻으려고
정은은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 안전벨트를 매고 창밖을 슬쩍 바라봤다. 공장은 호텔에서 10km 떨어진 개발지구에 자리 잡고 있었다.은혁이 운전대를 잡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 구역은 첨단 기술 산업 클러스터로 지정돼 있어서, 기술 협력 프로젝트도 대부분 그쪽으로 집중되고 있어요.” “정은 씨가 찾는 그 새로운 감온 정확도 소재는 우리랑 CG그룹이 공동 개발한 건데, 지금까지 1세대부터 3세대까지 세 가지 버전이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집중했고, 중간중간 전문적인 질문도 빠짐없이 던졌다. 은혁이 답할 수 있는 부분은 성의껏 설명했지만, 구체적인 수치나 실험 조건처럼 세세한한 부분은 바로 대답하기 어려운 것도 있었다.약 20분 후, 두 사람은 공장에 도착했다. 은혁이 미리 연락해 둔 덕분에, 정문 앞에는 담당자가 나와 있었다.정은은 안내받아 간단히 실험실과 공장을 둘러봤다. 연구 구역과 생산라인은 전혀 겹치지 않게 구획이 나뉘어 있었고, 현장도 전반적으로 정돈된 느낌이었다.정은이 요청한 소재의 1세대와 2세대는 이미 완제품으로 확보되어 있었지만, 3세대는 아직 실험 단계였기에 정식 생산은 되지 않았다. 따라서 실험실에서 직접 합성해야 했다.“시간은 얼마나 걸리죠?” 정은이 은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은혁은 옆에 있는 연구원을 바라봤다.“8시간 정도 걸릴 것 같아요. 내일 오전엔 제품 받아보실 수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관련 비용은 정산대로 처리해 주세요. 최종 결정되면 한 번에 입금할게요.”은혁은 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비용은 무슨 비용... 정은 씨, 우리 사이에 뭘 그렇게 딱딱하게 굴어요.”정은은 침착하게 말했다. “그럴수록 더 딱딱하게 해야죠. ‘친할수록 돈 문제는 분명하게.’ 이건 기본이에요. 더군다나, 우리 둘은 그냥 ‘친구’일 뿐인데, 은혁 씨가 도와주는 것만 해도 충분히 고마워요.”“게다가 실험실도 예산이 따로 있는 조직이고, 모든 비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