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은 조깅을 마치고 돌아와서 샤워를 한 다음, 베란다에 줄지어 늘어선 모양이 각기 다른 녹색 다육식물에 분홍색이 더 많아진 것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검지로 살짝 눌렀는데, 말랑말랑한 식물을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책상 위의 핸드폰이 윙윙거렸다. 선우의 번호인 것을 보고, 정은은 호기심에 전화를 받았다.[선우야? 이 시간에 왜 나한테 전화를 하는 거지? 무슨 일 있어?]“정은 누나, 요즘 잘 지내고 있었어요?”[그럭저럭이야. 너는?]기회다 싶은 선우는 바로 연기를 하기 시작했다.“난, 난 별로 좋지 않아요.”정은은 눈살을 찌푸렸다.[왜?]“밤새 술을 마셔서인지 속이 안 좋네요. 정은 누나, 지금 어떻게 된 일인지, 난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고, 딱 누나가 끓인 죽이 너무 먹고 싶은 거 있죠? 정말 너무 먹고 싶은데... 지금 시간 있어요?”도겸이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없었기에 선우는 이런 핑계를 댈 수밖에 없었다.비록 정은은 도겸을 통해 선우를 알게 되었지만, 그동안 함께 지내면서 선우와의 관계도 나름 좋았다.상대방이 위가 아프다고 하니 정은도 거절하기가 좀 어려웠다. 그녀는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시간 있어. 나 지금 장 보러 나갈 테니까 점심에 와서 가져가.]“네! 고마워요, 정은 누나! 누나밖에 없네요! 사랑해요, 누나! 그럼 이따 다시 전화할게요.”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점심시간이 되자, 선우는 내비게이션에 정은이 보낸 주소를 입력한 다음, 먼저 서비대학교에 도착했다. 그 후 또 여러 골목을 굽이굽이 돌아서야 마침내 목적지 근처에 도달했다.길가에 차를 세우고 가로숫길을 건너자, 선우는 정은이 지내고 있는 아파트를 찾았다. ‘7층이라고 했는데... 그런데 엘리베이터가 없다니.’선우는 눈을 들어 아파트를 바라보며 침을 삼켰다.5분 후, 그는 숨을 헐떡이며 도착했고, 마치 사우나라도 한 것처럼 온몸이 땀투성이로 되었다.정은은 문을 열어 선우를 들여보낸 다음, 얼른 물 한 잔을 따라 주었다.“괜찮
심현빈은 소파에 앉아 안절부절못하는 선우의 모습을 바라보더니, 웃음을 참으며 입을 열었다.“그건 걱정할 필요가 없을 텐데. 이것도 다 선우가 정은 씨에게 자기가 먹고 싶다고 거짓말을 해서 정은 씨가 끓여준 거야. 그러니 어떻게 병문안 하러 오겠어?”도겸은 안색이 즉시 어두워졌고, 선우를 차갑게 쳐다보았다.“내가 언제 가라고 했어? 누가 시킨 거냐고?”선우는 목을 움츠리더니 가볍게 기침을 했다.“형 요 며칠 줄곧 밥을 먹지 않아서 나도 걱정돼서 그런 거잖아요. 정은 누나가 죽을 만들지 않았다면, 형은 아직도 굶고 있을 거예요.”도겸은 싸늘한 표정을 하며 대답을 하지 않았다.“참, 방금 정은 누나 집에 갔는데, 지금 지내는 곳이 얼마나 작고 낡은지, 심지어 엘리베이터조차 없는 거 있죠? 그렇게 매일 7층을 걸어서 올라가야 한다니, 딱 봐도 고생을 하면서 지내고 있는 게 분명해요.”선우는 말하면서 도겸의 안색을 살펴보았다. 그는 비록 입으로는 싸다고 말했지만, 눈빛에 여전히 걱정이 담겨 있었다.‘음, 마음에 아직도 정은 누나가 있는 모양이야.’선우가 계속 말을 하려 할 때, 간드러진 목소리가 입구에서 들려왔다.“오빠!”선우와 현빈은 징그러워서 몸서리를 쳤다.‘소름이 쫙 끼치네...’연희는 며칠간 도겸의 문자를 받지 못했고, 전화해도 그가 받지 않아 결국 동건에게 물어봤는데, 그제야 도겸이 위병으로 입원한 것을 알았다.이 소식을 듣자마자 그녀는 안절부절못하며 수업까지 튀고 병원으로 달려왔다.이때 도겸이 환자복을 입고, 안색까지 창백한 것을 보니, 연희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오빠, 미안해요. 저도 방금에야 오빠가 입원한 사실을 알았어요. 어디 불편한 데 없어요? 안색이 왜 이렇게 창백한 거예요? 제가 의사 불러올까요?”그녀의 질문에 도겸은 짜증이 났다. 그리고 더욱 짜증 나는 것은 바로 오자마자 울기 시작한 것이었다. 도겸뿐만 아니라 선우와 현빈도 시끄럽다고 생각했다.도겸은 미간을 비볐다.“지금은 이미 괜찮으니까 울지
도서관에 간 정은은 연속으로 두 장의 시험지를 풀었는데, 모두 마지막 문제에서 사로가 막혔다.정은은 한참이나 계산했지만, 줄곧 풀리지 않았다. 전에 어느 책에서 비슷한 문제를 본 적이 있다는 생각에 그녀는 일어나서 관련 자료와 문제를 찾아보기 시작했다.몇 분 만에 찾은 다음, 자리로 돌아가려던 참에 정은은 그 옆에 놓인 책에 시선을 빼앗겼다.책 제목은 『유전자 서열의 재조합과 융합』이었다. 그녀는 조재석이 한 말을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그 책을 꺼냈다.간단하게 훑어보니, 뜻밖에도 이 책의 관점은 정은의 관점과 아주 비슷했다. 그녀는 계속 읽기 시작했고, 후에 감탄을 금치 못하며 아예 그 속에 빠져들었다.이때, 주머니 속의 핸드폰에 문자가 들어왔는데, 조수민이었다.[나 지금 어디게?]정은은 그녀가 장난치고 있는 줄 알고 바로 답장을 하려다가 갑자기 무언가를 깨달았다.[너 학교에 왔어?!][빙고!]도서관 밖에서, 정은은 내려오자마자 나무 아래에 서 있는 수민을 보았다.“갑자기 학교에 왜 온 거야?”“마침 이 근처에 들렀는데, 너한테 맛있는 거 주고 싶어서.” 수민이 손을 들자, 향기가 넘쳤다.“배달 마쳤으니 가볼게.”“나랑 같이 먹지 않고 그냥 가려고?”수민은 손을 흔들었다.“원래 너에게 주려고 산 거야. 게다가 나 요즘 좀 바쁘거든.”여기까지 말하자, 수민은 한숨을 쉬었다.“최근에 새 프로젝트 하나 책임졌는데, 3일 동안 총 8시간밖에 자지 못했어. 그리고 깨어나자마자 우리 아빠가 날 집으로 부르셨고. 사는 게 정말 힘들다 힘들어!”수민은 디자이너였다. 1년에 대외적으로 몇 개의 큰 주문만 받았지만, 하나하나 무척 복잡했기에 바쁘면 휴식시간이 거의 없었다.이번에도 갑작스럽게 임명을 받은 것인데, 그렇지 않았다면 프로 대신 그녀를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참, 이번 일은 강씨 가문과 관계가 좀 있어.” 수민은 눈알을 굴리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관심 있어?”“없어.”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은은 직접 끊어버렸고,
도겸은 꾹 참고 듣다가 결국 폭발했고, 전화를 끊은 다음 비행 모드를 켰다.이번에 차 안은 완전히 조용해졌다.집에 들어서자, 도겸은 그제야 마음이 평온해졌고,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위층으로 올라갈 때, 그는 갑자기 방향을 돌리더니 저도 모르게 주방으로 향했다.주방에는 깨끗하게 정리된 주방기구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는데, 눈앞에 정은이 바삐 움직이는 장면이 아른거렸다.그녀는 전날 저녁에 식재료를 깨끗이 씻고 물에 담가야 했기에, 죽을 끓이려면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다시 식재료와 쌀을 함께 솥에 넣은 다음 삶았다.도겸은 힘드니까 정은에게 하지 말라고 했지만, 다음날 퇴근하고 돌아오면, 항상 따끈따끈한 죽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후에...’그는 더 이상 정은을 설득하지 않고 마음 편하게 맛있는 음식을 즐기며, 그녀가 잘해 주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생각에 잠긴 사이, 밖의 문이 갑자기 열렸다.“도련님?”왕순자는 서영숙의 전화를 받고 달려왔다.도겸이 병원을 떠나자, 그와 말이 통하지 않은 서영숙은 도겸이 혼자 집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걱정되어, 어쩔 수 없이 왕순자에게 전화를 했다.도겸은 담담하게 분부한 다음 위층으로 올라갔다.“이모님, 죽 좀 끓여줘요.”‘왜 또 죽을 끓이라는 거지? 정인 아가씨는 도대체 언제 돌아오시는 거야? 정말 너무 힘들다 힘들어...’마음속으로 불평을 했지만, 왕순자는 여전히 앞치마를 두르고 주방에 들어가 죽을 끓이기 시작했다.죽을 다 끓이고 위층으로 올라가니, 도겸은 이미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다.그의 안색은 여전히 창백했고, 잠들었어도 여전히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왕순자는 죽을 내려놓은 다음, 주방에 가서 깨끗이 정리한 후, 조용히 떠났다.한밤중에 도겸은 위가 불에 타는 것만 같았고, 몸은 마치 땡볕을 쬐는 것처럼 무척 더웠다. 차가운 바늘이 혈관을 찌르며 액체를 수송하자, 그는 그 통증이 서서히 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여전히 매우 더웠다.서영숙은 침대 앞
외롭고 쓸쓸한 밤, 맞은편에서 가볍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정은아, 나 아파.”자세히 들어보니, 남자의 목소리는 은근히 떨렸다.그 순간, 정은은 본능적으로 마음이 아팠다.도겸은 잘난 체하고 고집이 세서, 피를 토할 때까지 술을 마시거나, 야근 때문에 밥 먹는 것을 잊어버린 것도 모두 흔한 일이었다.그동안 정은은 도겸의 건강을 돌보기 위해 많은 방법을 고민했다. 하루 세 끼 식사를 꼼꼼히 챙기고, 틈틈이 상태를 살피는 것은 물론, 한의원을 찾아가 안마법까지 배워왔다.엄청난 공을 들인 데다, 또 오랜 시간이 걸려서야 도겸의 위가 점차 호전되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이런 일이 귀찮았다. 가끔 짜증이 나면 심지어 눈살을 찌푸리며 자신의 엄마처럼 잔소리를 한다고 싫어하곤 했다.이미 잊혀져 가던 과거가 이 순간에 다시 떠올랐고, 방금 나타난 애틋한 감정도 곧 사라졌다.[난 의사가 아니야. 그렇게 아프면 그냥 병원에 가.]도겸은 정은의 차가운 목소리를 들으며 안색이 하얗게 질렸지만, 여전히 단념하지 않았다.“네가 끓인 죽 마시고 싶단 말이야.”정은은 조용히 듣고 있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맞은편도 입을 열지 않았는데, 마치 소리 없이 대치하고 있는 것 같았다.결국 정은이 먼저 전화를 끊었다.도겸은 여전히 핸드폰을 들고 있었다. 간호사는 그가 잠든 줄 알고 침대 앞으로 다가갔지만, 도겸이 아직 깨어 있으며 안색이 매우 좋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도련님, 지금...”간호사는 약간 의아해했다.도겸은 그녀에게 핸드폰을 돌려주며 피곤함에 눈을 감았고, 더 이상 소리를 내지 않았다....이튿날, 정은은 날이 밝자마자 바로 일어났다. 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선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위 좀 어때? 괜찮아? 죽 더 먹을래?”선우는 한창 달콤하게 자고 있었는데, 스팸 전화인 줄 알고 눈조차 뜨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정은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는 벌떡 일어났다.[정은 누나!][아, 정은 누나가 만든 죽이 너무 맛있어서, 몇 입
연희는 마음이 좀 찝찝해서 도겸의 팔을 흔들었다.“오빠, 왜 그래요?”도겸은 정신을 차리고 손을 흔들었다.“아니야. 나도 이제 다 나았으니, 너는 수업에 전념해. 더 이상 이쪽으로 찾아올 필요가 없어.”“앞으로 회사 일 때문에 나도 많이 바쁠 거야. 그래서 아마도 너랑 같이 있을 시간이 없을 것 같아.”연희는 멈칫하더니 이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겠어요.”별장을 나서자, 그녀는 웃음을 점차 거두더니 마음이 덜컹 내려앉았고. 눈빛도 많이 우울해졌다.‘방금 도겸 오빠는 분명히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전에는 그런 적이 없었잖아.’한참 망설이다가, 연희는 핸드폰을 꺼내 동건에게 전화를 걸었다. 도겸의 절친들 중, 그녀는 오직 동건의 연락처밖에 없었다.전화가 연결되자, 연희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동건 오빠, 저예요. 요 며칠 병원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예요? 저 방금 별장에서 나왔는데, 도겸 오빠의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아서요. 혹시 정은 언니 때문에 오빠가 기분이 안 좋은 건가요?”전화기 너머의 동건은 술집에서 어렵게 한 여자와 눈이 맞았는데, 두 사람 마침 번호를 교환하고 있었다. 그래서 연희의 질문을 듣고, 그는 얼버무리며 빨리 전화를 끊으려 했다.[정은 씨는 오지 않았지만, 죽을 두 번 끓여줬지.]말을 마치자, 사정없이 전화를 끊었다.‘역시 그 여자였어...’연희는 이를 악물며 눈빛은 차가웠다.이튿날 아침, 그녀는 일찍 도서관에 가서 복습하고 있는 정은을 찾았다.“도겸 오빠는 지금 내 남자친구예요. 두 사람 이미 헤어졌으니 좀 깔끔하게 정리하면 안 돼요? 더 이상 이런 쓸데없는 짓 하지 말란 말이에요. 두 사람 완전히 끝났다고요!”정은은 머릿속에서 방금 전의 문제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의 말을 듣자, 비록 웃기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정중하게 대답했다.“걱정 마, 난 전 남자친구와 아예 화해하고 싶지 않으니까, 너와 남자를 빼앗을 리가 없어.”연희가 떠나는 것을 보며, 정은은 쓸데없는 생각을 거
성준은 교수님들이 가장 좋아하는 학생이었다. 비록 정은과 같은 전공이 아니지만,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눌 때, 의외로 잘 맞았다.심오한 관점에 대해 이야기하자, 정은은 꽤 즐거웠다.그녀는 아직 석사 입학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비록 대부분 내용은 이미 술술 외울 수 있었지만, 현재 전공의 연구방향에 대해 아직 잘 모르고 있었기에, 대량의 논문을 읽으면서 천천히 지식을 쌓아 나가야지, 단번에 성과를 이룰 수 없었다.그리고 성준은 재학 중인 석사로서, 이미 학교를 떠난 지 몇 년이나 된 정은보다 이 방면이 훨씬 강했다.그들을 미행하고 있는 도겸은 두 사람이 매우 즐겁게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내가 아무리 애원해도 날 바라보지도 않고 심지어 그렇게 모질게 대하더니, 다른 남자와 즐겁게 얘기를 나누면서 웃어?’정은은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음식을 한가득 차렸고, 양식이 무척 다양했다.성준은 처음으로 그녀의 요리 솜씨가 좋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풍부한 음식을 보며 여전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이건... 우리 두 사람이 먹기에 너무 많지 않을까?”정은은 웃으며 대답했다.“선배님, 날 그렇게 많이 도와주었으니, 나도 당연히 풍성한 요리로 고마움을 표시해야죠.”성준은 머리를 긁적이며 쑥스러워했다.“사실 나도 뭐 도와주지 못했어. 네가 복습하는 효율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높거든.”함께 복습할 때, 그는 정은의 진보를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하나를 말하면 셋까지 알 뿐만 아니라, 기억력이 아주 강해서, 한 번 가르치며 두 번 다시 설명해 줄 필요가 없었다.“복습은 그중 하나일 뿐이죠. 나를 도와 논문 자료를 찾는 것 외에, 또 선배님 덕분에 내가 서비대학교 학생들만이 찾아볼 수 있는 원문 자원을 빌릴 수 있었잖아요.”성준은 의아해했다.“너 복습하는 동시에 논문을 준비하고 있었다니...”그는 마침내 오미선이 정은을 이렇게 중시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다 먹은 후, 성준은 잠시 앉아 얘기를
“출세했네, 소정은.”“남자들이 하나둘씩 끊이질 않구나.”도겸의 말투는 칼처럼 날카로웠다.“방금 그 남자는 누구야? 너희들 위에서 무슨 짓 했지?”정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녀의 손목이 아파 벗어나려 했지만, 도겸의 힘은 더 강해졌다. 정은이 필사적으로 발버둥칠수록 도겸은 더욱 세게 그녀를 움켜쥐었다.“강도겸, 이거 놔!”“먼저 대답해!”정은은 눈살을 찌푸리며 아픔을 참고 말했다.“그게 당신과 무슨 상관이야?”“전 남자친구로서 전 여자친구의 감정생활에 관심을 가지는 건 지나친 일이 아니잖아?”정은은 웃으며 담담하게 눈을 들었다.“당신도 잘 알고 있구나, 네가 내 전 남자친구라는 것을. 그래서, 여긴 왜 온 거야?”도겸은 한순간 말문이 막혔다.“지나가던 길이었어, 왜? 안 돼?”말이 끝나자마자, 한 할아버지가 욕설을 퍼부으며 골목으로 들어왔다.“누가 차를 골목 앞에 세운 거야? 도로가 이렇게 좁은데, 딱 출구를 막고 있다니. 자기가 스포츠카 차주면 다야? 교양이 없는데. 대체 어떻게 지나가라는 거야...”도겸은 침묵에 잠겼다.정은은 한눈에 그 눈에 차가 바로 도겸의 포르쉐라는 것을 알아차렸다.그녀도 그가 도대체 왜 왔는지를 따지고 싶지 않았기에, 쓰레기를 버린 다음 돌아섰다.“나한테 새로운 남자친구가 생기든 말든, 그게 한 사람이든 몇 사람이든, 모두 당신과 상관없는 일이야. 우린 이미 헤어졌으니까. 그게 무슨 뜻인지, 내가 설명해줘?”“당신의 미래는 나와 상관이 없으니, 당신도 나의 현재와 미래에 끼어들지 마. 우리 그냥...”정은은 잠시 멈추었다.“낯선 사람처럼 지내자.”“그리고, 여긴 어떻게 찾아왔는지 모르겠지만, 다시는 오지 마. 당신 여자친구가 오해할 수도 있으니까.”“그때 서연희에게 명분을 주기로 선택한 이상, 당신이 약속한 것처럼, 일편단심으로 그 여자를 대했으면 좋겠어.”정은은 도겸 때문에 상처를 입었기에, 연희도 자신과 똑같은 상처를 받게 하고 싶지 않았다.꽃다운 나이에 남자 때문에 인
정은은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 안전벨트를 매고 창밖을 슬쩍 바라봤다. 공장은 호텔에서 10km 떨어진 개발지구에 자리 잡고 있었다.은혁이 운전대를 잡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 구역은 첨단 기술 산업 클러스터로 지정돼 있어서, 기술 협력 프로젝트도 대부분 그쪽으로 집중되고 있어요.” “정은 씨가 찾는 그 새로운 감온 정확도 소재는 우리랑 CG그룹이 공동 개발한 건데, 지금까지 1세대부터 3세대까지 세 가지 버전이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집중했고, 중간중간 전문적인 질문도 빠짐없이 던졌다. 은혁이 답할 수 있는 부분은 성의껏 설명했지만, 구체적인 수치나 실험 조건처럼 세세한한 부분은 바로 대답하기 어려운 것도 있었다.약 20분 후, 두 사람은 공장에 도착했다. 은혁이 미리 연락해 둔 덕분에, 정문 앞에는 담당자가 나와 있었다.정은은 안내받아 간단히 실험실과 공장을 둘러봤다. 연구 구역과 생산라인은 전혀 겹치지 않게 구획이 나뉘어 있었고, 현장도 전반적으로 정돈된 느낌이었다.정은이 요청한 소재의 1세대와 2세대는 이미 완제품으로 확보되어 있었지만, 3세대는 아직 실험 단계였기에 정식 생산은 되지 않았다. 따라서 실험실에서 직접 합성해야 했다.“시간은 얼마나 걸리죠?” 정은이 은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은혁은 옆에 있는 연구원을 바라봤다.“8시간 정도 걸릴 것 같아요. 내일 오전엔 제품 받아보실 수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관련 비용은 정산대로 처리해 주세요. 최종 결정되면 한 번에 입금할게요.”은혁은 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비용은 무슨 비용... 정은 씨, 우리 사이에 뭘 그렇게 딱딱하게 굴어요.”정은은 침착하게 말했다. “그럴수록 더 딱딱하게 해야죠. ‘친할수록 돈 문제는 분명하게.’ 이건 기본이에요. 더군다나, 우리 둘은 그냥 ‘친구’일 뿐인데, 은혁 씨가 도와주는 것만 해도 충분히 고마워요.”“게다가 실험실도 예산이 따로 있는 조직이고, 모든 비용
실험실에서 진욱은 오늘만 몇 번째인지 모르게 재석을 힐끔거렸다. 결국 참지 못하고 다가갔다. “재석아, 너 오늘 길 가다 돈 주웠냐?”실험대 앞에서 입꼬리를 내릴 줄 모르던 재석의 손이 잠깐 멈췄다. “데이터 정리는 다 됐어? 3차 실험 가능성 평가 보고서는 언제 낼 건데?”“하, 이 사람 분위기 다 깨네.” 진욱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근데 말이야, 오늘 아침에 네가 샌드위치 먹는 거 봤거든.”“그래서?”“정은이가 해준 거지? 다 알아. 너희 둘, 다시 잘 되는 거야? 그것도 아니면, 이제 미련 접은 거야?” 재석은 살짝 고민하다가, 이제는 말해도 되겠다 싶어 입을 열려고 했다.바로 그때, 핸드폰에서 톡 알림이 떴다. 정은이었다.[도착했어요. 샌드위치는 맛있었어요?]재석은 바로 답장했다.[맛있었어.]정은은 곧장 자신의 일정을 재석에게 알려줬다.[지금 호텔 체크인하고, 오후엔 공장 갈 거예요.][응, 알겠어.]1분 정도 지났지만, 그다음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 재석은 괜히 허전해졌다.‘예전에도 이렇게 대화했었는데... 왜 지금은 이걸로는 부족하지?’정은과 더 오래 이야기하고 싶었다. 더 많은 말, 더 사적인 얘기, 더 가까운 거리. 그 마음은 마치, 가려운 곳을 손톱 끝으로 슬쩍 긁은 느낌. 절대 시원하지 않았다. 그냥 더 간지러워질 뿐.‘그냥, 정은이한테 세게 할퀴어지고 싶은데...’“누구랑 톡하냐?” 진욱이 슬쩍 핸드폰을 들여다보려 다가왔다.재석은 피할 틈도 없이 화면을 들킨 셈이 됐다. “뭘 감춰. 정은이랑 메시지 주고받는 거잖아. 왜? 뭐가 부끄럽다고.”“됐고.” 재석은 핸드폰을 집어넣고, 실험대에서 내려왔다. “오늘 점심은 내가 쏜다. 뭐 먹고 싶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몇 초 멈췄다. 옆에 있던 미진이랑 태민이 눈을 마주쳤다. “교수님,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갑자기 점심을요?”재석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먹고 싶은 거 생각나면 전 교수한테 말해.
비행기 이륙 직전, 은혁이 정은에게 제한했다. “정은 씨, 내 마일리지로 좌석 업그레이드해 줄게요.”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은혁의 얼굴에 아쉬움이 스쳤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로 돌아갔다. 잠시 후, 다시 다가와 말했다. “내가 정은 씨 옆자리로 바꿨어요.”비즈니스석에서 이코노미석으로 자리를 바꾸다니, 웬만한 사람이면 거절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은혁 씨,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돼요.” 정은은 단호한 어조였다.‘처음으로 이렇게까지 분명하게 말한 것 같아.’정은은 연애 한 번 안 해본 소녀가 아니었다. 은혁의 눈빛에 담긴 감정이 어떤 건지, 모를 리 없었다.하지만 그동안 굳이 선을 긋지 않은 건, 은혁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며, 오히려 몇 번이고 도와줬기 때문이었다. 이번 Z시 출장도 은혁의 도움 덕에 가능했던 일이었다.게다가 은혁이 고백도 안 했고, 정은이 불편할 정도로 다가온 것도 아니었으니까... 정은도 자신이 먼저 딱 잘라 말하는 게 오히려 예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그리고 그때의 정은은 솔로였고, 재석이 입을 열게 하기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의 자극은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정은은 이미 재석과의 관계를 정리했고, 은혁은 더 적극적으로 다가오고 있으니, 그녀도 이제 더 늦기 전에 확실히 은혁에게 말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래야 서로 상처받지 않을 테니 말이다.은혁은 정은의 말에 잠시 당황한 듯하다가, 이내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난 정은 씨 옆자리에 있는 게 좋아서 그래요.”정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즈니스석 티켓을 사 놓고 누구랑 자리를 바꾸든, 그건 상대방의 자유니까. 굳이 뭐라고 할 필요는 없지.’그 후, 정은은 노트북을 열고 일에 집중했다. 은혁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틈틈이 정은을 흘끗거렸다.그러다 손을 들어 승무원을 불렀다. “저기요. 잠깐만요.”“네, 손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결국 재석은 아쉬움 가득한 눈빛으로 정은의 손을 놓았다. 그러고는 조용히 열쇠를 건네받아 현관문을 열어주었다.“정은아, 잘 자.”그 한마디.‘정은아’라는 이름이 너무나 자연스럽고도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마치 수천 번은 불러본 것처럼.그 말에 정은은 순간 멍해졌다.‘왜 내 이름을 듣고도 가슴이 이렇게 설레지?’“네, 당신도 잘 쉬어요.”둘은 그렇게 짧은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문 안으로 들어갔다.그날 밤. 정은은 평소와 달랐다. 샤워를 마친 뒤 늘 하던 루틴, 논문 체크나 프로젝트 정리는 손도 대지 않았다.대신, 자기도 모르게 핸드폰을 들고 재석의 SNS를 열었다.‘뭐 하는 거야? 나...’그런데 이상하게, 자꾸만 궁금해졌다. ‘이 사람, 평소에 어떤 거 올리지?’재석은 SNS 설정 따위는 하지 않은 사람이었다.맨 아래까지 내리는 데 몇 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포스트 총수, 대략 서른 몇 개. 그중 90%는 논문, 연구, 산업 동향 공유.‘진짜 성실한 연구자 모드네...’그나마 정은과 관련 있는 건 얼마 전 실험실이 SCI 논문 게재됐을 때 서비대학교 공식 계정에서 축하 포스팅한 걸 공유한 것뿐이었다.[축하합니다.]짧고 건조한 멘트.그 밑엔 전진욱과 조미진이 ‘좋아요’를 눌러뒀다.‘이게 전부야?’그렇게 핸드폰을 내려놓으려던 순간, 알림이 하나 떴다. 재석이 새로운 글을 올렸다.정은은 무심코 눌러봤다. [r = a(1 - sinθ)]‘...어?’정은의 손가락이 멈췄다. 이 수식, 익숙했다. 너무 익숙해서 순간 심장이 멈칫했다.댓글 첫 줄엔 진욱이 있었다.[극좌표 함수? 밤에 안 자고 뭐 하세요? 조 교수님?]조미진과 손태민은 말없이 ‘좋아요’만 눌렀다. 하지만 두 사람은 속으로 ‘다음 연구 주제가 광학 쪽인가?’ 생각하며 혼란스러워했다.아무도 몰랐다. 이 수식의 진짜 의미를.‘r = a(1 - sinθ)’, 하트곡선.‘설마 이게, 그거? 진짜 그거... 맞아?’정은은 손끝을
“그럼... 고백하기 전까지, 혼자서 그렇게 많이 고민한 거예요?”“응.”“어쩐지...”정은이 아주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뭐라고?” 재석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이젠 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가요...”둘은 손을 꼭 잡고 복도로 향했다. 조용한 밤, 서로의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걷던 중, 재석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정은도 따라 멈춰 서며 돌아봤다.“왜요?”“정은아, 우리 지금... 사귀는 거 맞지?”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두 사람이 꼭 잡은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그렇게 생각 안 해요? 조금 전부터 내가 ‘재석 씨’라고 부른 거 못 느꼈어요?”“혹시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정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 지었다.“흠,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평소에도 꿈에서 날 자주 본 모양이네요?”재석의 몸이 순간 굳더니, 양 볼이 순식간에 빨개졌다.‘진짜 자주 꿨나 보다?’재석은 눈을 못 마주친 채, 그저 두 사람이 맞잡은 손만 바라보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진짜 좋아.”‘정은이도, 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구나.’‘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구나.’같은 계단, 같은 복도, 수없이 함께 걸어온 길. 그동안은 늘 친구라는 이름으로, 앞서거나 뒤따르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왔지만, 오늘은 처음으로, 손을 잡고 나란히 오르는 계단.정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근데, 왜 나랑 은혁 씨한테 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재석은 목소리를 낮추며, 살짝 눈을 피했다.“미안. 계산하러 나갔다가... 우연히 통화하는 거 들었거든.”정은의 눈이 살짝 커졌다.그리고 머릿속으로 자신이 통화 중 했던 말을 하나하나 되짚어봤다.‘공항에서 보자, 기대된다, Z시 출장... 뭐 이상한 말한 것도 없는데...?’그런데도 재석은 그걸 ‘여행 약속’으로 받아들였고, 그걸로 인해 혼자 삭이다가 결국 아래층에서 고백까지 해버린 거였다.“너희, Z시에 여행 간다고 했잖아.”
정은이 멍해 있는 사이, 재석이 한 걸음 다가섰다. 늘 부드럽고 점잖던 그가, 이 순간만큼은 전에 없던 강한 기운을 뿜어냈다. ‘이 남자... 이런 눈빛도 있었나?’정은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등이 벽에 닿는 순간, 재석은 어느새 바로 눈앞에 와 있었다.정은이도 이제야 제대로 실감이 났다. 재석이 자신보다 훨씬 크다는 걸. 그리고 지금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내려다보면, 자신이 마치 남자의 품 안에 갇힌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도.재석이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이제 좀 알겠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그때 네가 학업이 먼저라고 했을 때, 난 받아들였어.”“그런데 장은혁한텐 기회를 줬지. 정은아...”그가 고개를 더 숙이자,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목선에 닿았다. 순간, 정은의 팔에 소름이 쫙 돋았다. “너, 나한테 너무 불공평해.”그 마지막 한 마디는 묘하게 서글픈 기운이 섞여 있었다.정은은 입술을 달싹이며 뭔가 말하려 했지만, 재석은 그녀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알아, 내가 지금 어떤 입장인지. 묻고 따질 자격도 없고, 네가 누구를 좋아하든, 그건 네 자유라는 것도 알아.”“이 말 꺼냈다가, 우리 사이가 끝날 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근데... 계속 참다 보니까 알겠더라.”‘난... 그렇게까지 쿨한 사람이 아니었어.’“그래서 이제 참지 않기로 했어.”‘어떻게 되든, 그건 네가 정해.’그렇게 말한 재석은 고개를 숙인 채 멈췄다. 마치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처럼.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용한 밤공기 속에서, 정은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울렸다.“이제, 제가 말해도 될까요?”“응...”“재석 씨.”정은은 처음으로 재석을 그렇게 불렀다.“고개 들어요. 나 좀 봐요.”재석의 어깨가 순간 굳어졌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그는 이미, 거절당할 각오까지 끝냈다.그런데 눈이 마주친 순간, 정은의 두 눈 속에서 재석이 본 건... 눈물이 아닌, 웃음이었다.억지로 짓는
“헤어졌다고요?”정은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몰랐어?!”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진욱은 눈을 반짝이며 의자째로 다가오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본격적인 ‘TMI’를 털어놓기 시작했다.“M시 출장 갔다 오고 며칠 안 돼서, 재석이가 바로 짐 싸서 수아를 내보냈다니까?”정은은 그 말을 듣고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재석과 수아 사이에 어떤 감정선이 있었는지, 그동안 몇 번 스쳐 지나갔던 장면들이 퍼즐처럼 빠르게 떠올랐다.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눈빛 속엔 미묘한 기류가 스쳤다.“아마 진짜 많이 좋아했나 봐. 그러니까 정리할 때도 그만큼 아프고, 오래 걸리는 거겠지. 조금만 시간 지나면, 태민이도 정리될 거야.”진욱은 이어서 말했다.“네.”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대답했다.그 이후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남의 연애는, 들을 수는 있어도 깊게 얘기하지 말아야 해. 괜히 나서 봤자... 괜히 끼어든 꼴만 되니까.’...해가 지고, 붉은 노을이 건물 유리에 비치기 시작할 무렵. 정은은 마침내 작업을 끝냈다.진욱은 기다렸다는 듯 프로그램을 열고 기능 하나하나를 테스트했다.그리고 30초쯤 흐른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어어!! 복구됐어! 됐다! 돌아왔어! 다시 쓸 수 있어!!”미진도 덩달아 벌떡 일어나 양손을 번쩍 들었다.“살았다, 진짜!! 여태 손으로 데이터 입력한 거 생각하면... 이건 거의 기적이야!”진욱은 시계를 힐끗 보더니, 정은을 향해 말했다.“지금 이 시간까지 남아서 도와준 우리 정은이, 완전 수고 많았어! 조 교수...”“응...?”갑작스레 이름이 불리자, 재석은 몇 초간 멈칫하다가 고개를 돌렸다.진욱은 능청스럽게 말했다.“아니, 정은이가 이렇게 큰일 해줬는데, 감사 표시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적어도 밥 한 끼는 사야지.”“맞아요, 맞아요. 조 교수님, 이건 진짜 밥으로도 모자라요.” 미진이 곧장 거들었다.재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략 1년 전, 정은은 한동안 재석의 실험실을 빌려 쓴 적이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전진욱, 조미진 등과 인연이 닿았다.처음엔 서로 어색하고 낯설었지만, 몇 달이 지나면서 조금씩 가까워졌고, 지금은 가볍게 농담도 주고받을 만큼 편해졌다.그러던 어느 날, 진욱은 우연히 정은이 실험 데이터를 처리하는 속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 너무 빠른 게 아닌가 싶어서 슬쩍 물어봤더니, 정은은 코딩도 할 줄 아는 공대 만능 캐릭터였다. 그녀는 직접 짠 프로그램으로 데이터를 자동 정리하고, 다차원 분류와 정렬까지 가능하다고 했다.“와, 뭐야... 완전 반칙인데?”진욱은 결국 정은에게 부탁해 실험실 맞춤형 프로그램 하나를 따로 제작해달라고 했고, 그 이후, 데이터 정리는 그야말로 신세계를 맞이했다. 진욱은 쓸 때마다 감탄하며 말했다.“진짜... 정은이 덕분이야. 이게 사람을 살리네.”하지만 어제 그 기특한 프로그램이 갑자기 먹통이 됐다. 손태민이 고쳐보겠다고 덤볐지만, 결과는... 풍비박산이었다. ‘이젠 누가 손댔다간 진짜 박살 나겠어...’ 결국 정은에게 SOS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재석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오늘 시간 돼? 안 되면, 며칠 뒤도 괜찮고...]진욱은 훨씬 급했다. 말 그대로 살려달라는 마음이었다.[야, 오늘 안 데려오면... 나 여기서 바로 싸버린다! 진짜라고, 어?!]그는 어제 약 먹고 좀 괜찮아진 줄 알았건만, 밤새 배가 또 난리였다. 오늘 아침부터 실험실 화장실은 진욱의 전용이 되었다. 오전에만 6회 방문.그 말은, 그냥 협박 아니었다. 진짜 실현 가능성이 있었으니 말이다.정은은 상황을 듣고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시간 돼요. 지금 바로 갈게요.”[그래. 그럼 내가 정문 앞으로 갈게.]‘굳이 마중까진 필요 없는데...’ 뚝-정은이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 ...10분 뒤, 정은은 학교 정문 앞에서 재석과 마주쳤다. 두 사람은 실험실로 걸어가며 프로그램
“언니, 이건 굳이 우리 의견 물을 필요도 없지 않아요? 언니가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가는 거죠. 저희한텐 뭐든 시키기만 하세요. 무조건 따라갈게요!”민지가 단호하게 말하자, 서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맞아요, 저흰 누나 믿고 가는 거예요. 결정은 누나가 해요.”정은은 그 말에 잠시 멍해졌다가,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너희들... 나 그렇게 믿어도 돼? 나도 가끔 실수하거든?”민지는 마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정은 언니가 실수했다면, 그건 100% 저랑 서준 오빠가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뜻이에요.”“그건 좀 과장이지만...”‘그래도... 이런 믿음을 받는다는 게 참 따뜻하네.’세 사람은 그렇게 식사를 마쳤다.계산은 서준이 맡았고, 정은과 민지는 먼저 주차장으로 향했다. “언니, 먼저 가요. 전 서준이 데리러 갈게요.”“응? 굳이?”“우리 집이랑 방향이 같잖아요. 서준이는 차도 없으니까, 그냥 태워다 주는 거죠, 헤헤.”“그래, 알겠어. 그럼 조심히 가. 운전 천천히 하고.”“네. 언니도 잘 들어가요!”...두 ‘파트너’와 방향을 맞춘 정은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자료 조사부터 시작해 ‘신소재 최적화 계획안’을 정리하고, 모든 내용이 빠짐없이 정리됐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확인했다.벌써 밤 10시. 정은은 핸드폰을 들고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냈다.[장은혁 씨, 시간 돼요? 상의드릴 게 하나 있어요.]그 시각, 은혁은 거실 소파에 앉아 어머니인 황희숙 여사의 ‘진실 공방’에 시달리고 있었다.“너 외할아버지한테 전화 왔어. 오늘 도시락 들고 회사 갔다며? 근데 그냥 말도 없이 두고 사라졌다고 난리야. 게다가 누가 너랑 어떤 여자가 같이 있는 걸 병원 약국에서 봤다던데? 솔직히 말해봐. 너, 여자 친구 생겼지?”은혁은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아니 외할아버지는 왜 또 엄마한테 바로 전화해요? 진짜 너무하신다니까요...”“이 자식 봐라, 말버릇 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