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롭고 쓸쓸한 밤, 맞은편에서 가볍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정은아, 나 아파.”자세히 들어보니, 남자의 목소리는 은근히 떨렸다.그 순간, 정은은 본능적으로 마음이 아팠다.도겸은 잘난 체하고 고집이 세서, 피를 토할 때까지 술을 마시거나, 야근 때문에 밥 먹는 것을 잊어버린 것도 모두 흔한 일이었다.그동안 정은은 도겸의 건강을 돌보기 위해 많은 방법을 고민했다. 하루 세 끼 식사를 꼼꼼히 챙기고, 틈틈이 상태를 살피는 것은 물론, 한의원을 찾아가 안마법까지 배워왔다.엄청난 공을 들인 데다, 또 오랜 시간이 걸려서야 도겸의 위가 점차 호전되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이런 일이 귀찮았다. 가끔 짜증이 나면 심지어 눈살을 찌푸리며 자신의 엄마처럼 잔소리를 한다고 싫어하곤 했다.이미 잊혀져 가던 과거가 이 순간에 다시 떠올랐고, 방금 나타난 애틋한 감정도 곧 사라졌다.[난 의사가 아니야. 그렇게 아프면 그냥 병원에 가.]도겸은 정은의 차가운 목소리를 들으며 안색이 하얗게 질렸지만, 여전히 단념하지 않았다.“네가 끓인 죽 마시고 싶단 말이야.”정은은 조용히 듣고 있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맞은편도 입을 열지 않았는데, 마치 소리 없이 대치하고 있는 것 같았다.결국 정은이 먼저 전화를 끊었다.도겸은 여전히 핸드폰을 들고 있었다. 간호사는 그가 잠든 줄 알고 침대 앞으로 다가갔지만, 도겸이 아직 깨어 있으며 안색이 매우 좋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도련님, 지금...”간호사는 약간 의아해했다.도겸은 그녀에게 핸드폰을 돌려주며 피곤함에 눈을 감았고, 더 이상 소리를 내지 않았다....이튿날, 정은은 날이 밝자마자 바로 일어났다. 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선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위 좀 어때? 괜찮아? 죽 더 먹을래?”선우는 한창 달콤하게 자고 있었는데, 스팸 전화인 줄 알고 눈조차 뜨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정은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는 벌떡 일어났다.[정은 누나!][아, 정은 누나가 만든 죽이 너무 맛있어서, 몇 입
연희는 마음이 좀 찝찝해서 도겸의 팔을 흔들었다.“오빠, 왜 그래요?”도겸은 정신을 차리고 손을 흔들었다.“아니야. 나도 이제 다 나았으니, 너는 수업에 전념해. 더 이상 이쪽으로 찾아올 필요가 없어.”“앞으로 회사 일 때문에 나도 많이 바쁠 거야. 그래서 아마도 너랑 같이 있을 시간이 없을 것 같아.”연희는 멈칫하더니 이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겠어요.”별장을 나서자, 그녀는 웃음을 점차 거두더니 마음이 덜컹 내려앉았고. 눈빛도 많이 우울해졌다.‘방금 도겸 오빠는 분명히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전에는 그런 적이 없었잖아.’한참 망설이다가, 연희는 핸드폰을 꺼내 동건에게 전화를 걸었다. 도겸의 절친들 중, 그녀는 오직 동건의 연락처밖에 없었다.전화가 연결되자, 연희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동건 오빠, 저예요. 요 며칠 병원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예요? 저 방금 별장에서 나왔는데, 도겸 오빠의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아서요. 혹시 정은 언니 때문에 오빠가 기분이 안 좋은 건가요?”전화기 너머의 동건은 술집에서 어렵게 한 여자와 눈이 맞았는데, 두 사람 마침 번호를 교환하고 있었다. 그래서 연희의 질문을 듣고, 그는 얼버무리며 빨리 전화를 끊으려 했다.[정은 씨는 오지 않았지만, 죽을 두 번 끓여줬지.]말을 마치자, 사정없이 전화를 끊었다.‘역시 그 여자였어...’연희는 이를 악물며 눈빛은 차가웠다.이튿날 아침, 그녀는 일찍 도서관에 가서 복습하고 있는 정은을 찾았다.“도겸 오빠는 지금 내 남자친구예요. 두 사람 이미 헤어졌으니 좀 깔끔하게 정리하면 안 돼요? 더 이상 이런 쓸데없는 짓 하지 말란 말이에요. 두 사람 완전히 끝났다고요!”정은은 머릿속에서 방금 전의 문제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의 말을 듣자, 비록 웃기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정중하게 대답했다.“걱정 마, 난 전 남자친구와 아예 화해하고 싶지 않으니까, 너와 남자를 빼앗을 리가 없어.”연희가 떠나는 것을 보며, 정은은 쓸데없는 생각을 거
성준은 교수님들이 가장 좋아하는 학생이었다. 비록 정은과 같은 전공이 아니지만,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눌 때, 의외로 잘 맞았다.심오한 관점에 대해 이야기하자, 정은은 꽤 즐거웠다.그녀는 아직 석사 입학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비록 대부분 내용은 이미 술술 외울 수 있었지만, 현재 전공의 연구방향에 대해 아직 잘 모르고 있었기에, 대량의 논문을 읽으면서 천천히 지식을 쌓아 나가야지, 단번에 성과를 이룰 수 없었다.그리고 성준은 재학 중인 석사로서, 이미 학교를 떠난 지 몇 년이나 된 정은보다 이 방면이 훨씬 강했다.그들을 미행하고 있는 도겸은 두 사람이 매우 즐겁게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내가 아무리 애원해도 날 바라보지도 않고 심지어 그렇게 모질게 대하더니, 다른 남자와 즐겁게 얘기를 나누면서 웃어?’정은은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음식을 한가득 차렸고, 양식이 무척 다양했다.성준은 처음으로 그녀의 요리 솜씨가 좋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풍부한 음식을 보며 여전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이건... 우리 두 사람이 먹기에 너무 많지 않을까?”정은은 웃으며 대답했다.“선배님, 날 그렇게 많이 도와주었으니, 나도 당연히 풍성한 요리로 고마움을 표시해야죠.”성준은 머리를 긁적이며 쑥스러워했다.“사실 나도 뭐 도와주지 못했어. 네가 복습하는 효율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높거든.”함께 복습할 때, 그는 정은의 진보를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하나를 말하면 셋까지 알 뿐만 아니라, 기억력이 아주 강해서, 한 번 가르치며 두 번 다시 설명해 줄 필요가 없었다.“복습은 그중 하나일 뿐이죠. 나를 도와 논문 자료를 찾는 것 외에, 또 선배님 덕분에 내가 서비대학교 학생들만이 찾아볼 수 있는 원문 자원을 빌릴 수 있었잖아요.”성준은 의아해했다.“너 복습하는 동시에 논문을 준비하고 있었다니...”그는 마침내 오미선이 정은을 이렇게 중시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다 먹은 후, 성준은 잠시 앉아 얘기를
“출세했네, 소정은.”“남자들이 하나둘씩 끊이질 않구나.”도겸의 말투는 칼처럼 날카로웠다.“방금 그 남자는 누구야? 너희들 위에서 무슨 짓 했지?”정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녀의 손목이 아파 벗어나려 했지만, 도겸의 힘은 더 강해졌다. 정은이 필사적으로 발버둥칠수록 도겸은 더욱 세게 그녀를 움켜쥐었다.“강도겸, 이거 놔!”“먼저 대답해!”정은은 눈살을 찌푸리며 아픔을 참고 말했다.“그게 당신과 무슨 상관이야?”“전 남자친구로서 전 여자친구의 감정생활에 관심을 가지는 건 지나친 일이 아니잖아?”정은은 웃으며 담담하게 눈을 들었다.“당신도 잘 알고 있구나, 네가 내 전 남자친구라는 것을. 그래서, 여긴 왜 온 거야?”도겸은 한순간 말문이 막혔다.“지나가던 길이었어, 왜? 안 돼?”말이 끝나자마자, 한 할아버지가 욕설을 퍼부으며 골목으로 들어왔다.“누가 차를 골목 앞에 세운 거야? 도로가 이렇게 좁은데, 딱 출구를 막고 있다니. 자기가 스포츠카 차주면 다야? 교양이 없는데. 대체 어떻게 지나가라는 거야...”도겸은 침묵에 잠겼다.정은은 한눈에 그 눈에 차가 바로 도겸의 포르쉐라는 것을 알아차렸다.그녀도 그가 도대체 왜 왔는지를 따지고 싶지 않았기에, 쓰레기를 버린 다음 돌아섰다.“나한테 새로운 남자친구가 생기든 말든, 그게 한 사람이든 몇 사람이든, 모두 당신과 상관없는 일이야. 우린 이미 헤어졌으니까. 그게 무슨 뜻인지, 내가 설명해줘?”“당신의 미래는 나와 상관이 없으니, 당신도 나의 현재와 미래에 끼어들지 마. 우리 그냥...”정은은 잠시 멈추었다.“낯선 사람처럼 지내자.”“그리고, 여긴 어떻게 찾아왔는지 모르겠지만, 다시는 오지 마. 당신 여자친구가 오해할 수도 있으니까.”“그때 서연희에게 명분을 주기로 선택한 이상, 당신이 약속한 것처럼, 일편단심으로 그 여자를 대했으면 좋겠어.”정은은 도겸 때문에 상처를 입었기에, 연희도 자신과 똑같은 상처를 받게 하고 싶지 않았다.꽃다운 나이에 남자 때문에 인
방에 들어서자, 도겸은 미친 듯이 옷장을 열더니 또 정은의 옷방에 들어갔다. 명품가방, 옷, 그리고 그가 그녀에게 준 손목시계며 팔찌까지 전부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하나도 빠지지 않았다.앵두 팔찌에 시선이 떨어진 순간, 도겸은 호흡이 가빠지더니 눈빛도 어두워졌다.이것은 정은과 사귄 지 3년 되었을 때, 그가 외국에서 산 정은의 생일 선물이었다.앵두는 영어로 cherry였고, 발음은 cherish와 비슷하며, 소중하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이 팔찌는 그녀가 가장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그때 정은은 줄곧 끼고 다니며 한 번도 벗은 적이 없었는데, 지금 이것까지 별장에 남겨뒀다니. 마치 도겸을 향한 사랑도 전부 버리려는 것 같았다...도겸은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그제야 깨달았다. 정은은 억지를 부리는 것이 아니라, 그 말 모두 진심이었단 것을.‘정은은 지금 진심으로 나와 헤어지길 원해.’...쿵-위층에서 굉음이 울리자, 왕순자는 깜짝 놀라 재빨리 위층으로 달려갔다.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도겸은 마침 옷방에서 나왔는데, 안색이 어두웠고, 수시로 화를 낼 것만 같았다.“도련님...”왕순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도겸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떠났다. 그러나 방안을 바라보자, 그녀는 하마터면 숨이 넘어갈 뻔했다.옷방 안의 귀중한 주얼리들은 이미 박살 났고, 일부 가격표를 뜯지 않은 옷도 여기저기 버려져 있었다. 보헤미안 스타일의 카펫은 그야말로 쓰레기 더미처럼 옷이 가득 쌓여있었다. ‘내가 방금 상한 죽 한 솥을 버린 다음 주방을 다 정리했는데. 지금 또 침실을 치워야 한다니. 아이고, 내 팔자야!’...알록달록한 불빛, 시끌벅적한 노래, 노출된 옷을 입은 남자와 여자들이 무대 중앙에서 신나게 춤을 추고 있었다. 그리고 도겸은 구석에 혼자 앉아 묵묵히 술을 마시고 있었다.그는 위스키 한 병을 시켰는데, 한 입 한 입 쉬지 않고 마셨다. 술을 마시기보다는 오히려 화풀이를 하는 것 같았다.어두컴컴한 불빛은 도
고동건이 나타나더니 도겸의 어깨를 두드렸다.“언제 왔어? 왜 우리한테 말도 안 하고 온 거야? 위층에 룸 하나 예약했으니까 같이 가서 좀 마실까?”도겸은 관자놀이를 비볐다.“난 안 마실래, 너희들 마셔.”도겸이 떠나는 것을 보고, 동건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전에 도겸은 절대로 이런 자리에 빠지지 않았는데. 설마, 정은 씨와 화해한 거야?’‘그래, 금방 화해했다면 당분간 우리와 놀 수가 없겠군.’“동건아, 뭘 봐? 너밖에 안 남았어.”계단 옆에서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동건은 고개를 저으며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사람들을 향해 걸어갔다....별장에 도착했을 때, 시간은 이미 밤 10시였다.왕순자는 이미 도겸의 방과 옷방을 정리했고, 정은의 물건들도 모두 제자리로 복구되었다.그는 발길을 돌려 서재로 갔다.책꽂이 위에는 거의 생물학과 관련된 책들이 널려 있었다.정은은 비록 석사 입학을 준비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전공을 줄곧 연구하며 틈만 나면 서재에 하루 동안 앉아 공부를 했다. 이 책들도 모두 그녀가 남긴 것이었다.그녀는 가끔 도겸에게 자랑을 하곤 했다. 어떤 책은 이미 절판되었고, 어떤 책은 그녀가 원판을 찾아 복사한 것이며,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여 이 책들을 분류했는지를. 자신의 성과를 언급할 때마다, 정은은 유난히 즐겁게 웃었다...도겸은 그윽한 눈빛으로 책꽂이를 훑어보다가 갑자기 입술을 구부리며 웃었다. 그는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쓰레기를 들고 떠나려던 왕순자를 불렀다.“이모님 핸드폰 좀 빌려줘요.”왕순자는 즉시 경계에 찬 눈빛으로 도겸을 바라보았다.“저, 도련님, 저번에 제 핸드폰을 바닥에 부쉈잖습니까.”“새 거 사주지 않았어요?”왕순자는 말을 하지 못했다.“이리 줘요.”“이, 이건 제가 금방 산 거라서...” ‘망가지면 나도 마음이 아프다고!’“내일 이모님에게 아이폰 16 두 대를 보내라고 할게요.”“네!” 왕순자는 즉시 기뻐하며 핸드폰을 건넸다.핸드폰을 받자, 도겸은 몸을 돌려 정은에게 전
가는 길, 두 사람은 처음에 몇 마디 나누었지만, 후에 각자 침묵을 지켰다.재석은 오늘 자주 운전하던 차를 선택했다. 정은의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인지, 그는 천천히 운전하며 같은 속도를 유지했다.별장에 도착하자, 문 앞의 경호원은 심지어 정은에게 인사를 했다.“정은 아가씨, 정말 오랜만에 뵙네요. 그동안 출장 가셨어요?”정은은 담담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을 하지 않았다.재석은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별장 문 앞에 도착하자, 재석은 차를 세웠고, 두 사람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잠깐만 기다려요. 책 들고 나올게요.” 정은은 곧장 차에서 내렸다.“내가 도와줄 필요가 없는 건가?”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책이 많지 않아서요. 나 혼자도 들 수 있거든요.”말을 마치자, 정은은 별장을 향해 걸어갔다.초인종을 누른 순간, 왕순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그리고 문 밖의 사람을 보고, 왕순자는 기쁨에 소리쳤다.“정은 아가씨!”‘마침내 돌아오셨네요!’정은은 웃으며 설명했다.“물건 챙기러 왔는데...”“왔어?”말이 끝나기도 전에, 잠옷을 입은 도겸은 방금 일어난 듯 위층에 나타났다. 그는 가슴을 안고 의미심장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혼자 온 거야? 옮길 수 있겠어?”그는 커피 한 잔을 들고, 차가운 눈으로 정은을 내려다보았다.“옮기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니야? 나머지는 당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지.”정은은 담담하게 대답한 다음, 바로 서재로 갔다.도겸의 곁을 지날 때, 그도 정은의 뒤를 따라갔다.서재에서 책을 종류별로 정리한 다음, 정은은 미리 준비한 큰 가방을 꺼내 조심스럽게 안에 넣었다.도겸은 옆의 책장에 기대어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힘들어서 땀을 흘릴지언정 나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다니.’10분 뒤, 정은이 가방을 단단히 묶은 다음, 서재를 떠나려 할 때, 한마디도 하지 않던 도겸이 갑자기 발작했다.그는 낮은 소리로 욕설을 퍼부으며 책을 담은 가방
정은의 쉰 목소리는 떨림과 공포를 띠고 있었고, 마치 놀란 토끼처럼 절망적이면서도 연약했다.도겸은 더욱 다급해지더니, 그녀의 상의를 벗는 것을 포기하고 직접 치마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정은은 더욱 당황해졌다.“강도겸, 당신 곁에 여자가 얼마나 많은데, 왜 하필 전 여자친구인 날 강요하는 거냐고?!”“정말 하고 싶다면, 내가 지금 바로 서연희에게 연락할게.”“아, 이러지 마!”정은이 자신을 피하는 동시에, 붉어진 두 눈에 고집과 거부감을 드러낸 것을 보며, 도겸은 더욱 자극을 받았다.“왜? 헤어진 지 며칠밖에 안 됐는데 벌써 다 잊은 거야? 나와 같이 침대를 뒹군 적이 수백 번도 더 넘었을 텐데, 어디서 청순한 척이야?”정은은 화가 나서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나쁜 자식!”도겸은 냉소를 지으며 그녀의 턱을 들었다.“날 떠나면 무슨 좋은 남자라도 만날 것 같아? 누가 다른 남자와 잔 여자를 받아들이겠어?”눈물은 끊어진 구슬처럼 전혀 쏟아져 나왔고, 정은은 자신이 6년 동안 사랑한 남자를 바라보면서 오히려 그가 무척 낯설다고 느꼈다.“뭘 그렇게 보는 거야?” 도겸은 나지막이 웃으며 정은의 떨리는 입술을 쳐다보았다.“날 원하는 거야?”말을 마치자, 그는 그녀의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정은의 손을 조금씩 떼어내며, 악랄하게 그녀의 상의를 찢었다.정은은 울고 있었고, 도겸은 오히려 웃고 있었다.이때의 정은은 그제야 여자와 남자의 힘 차이가 얼마나 큰지를 깨달았다.‘됐어, 그냥 개한테 물렸다고 생각하자...’절망에 처한 순간, 그녀를 압박하고 있던 존재가 갑자기 사라졌다. 누군가 포악하게 정은을 억누르고 있던 도겸을 떼어낸 것이었다.미처 방비를 하지 않은 도겸은 그 힘에 뒤로 후퇴했고, 등이 책장에 부딪혀서야 똑바로 설 수 있었다.재석은 정은이 한참 지나도 나오지 않자, 책이 너무 무거워서 그런 거라 생각하고 차에서 내려와 그녀를 도와주려 했다.왕순자가 문을 연 후, 재석은 위층에서 들려오는 다툼을 똑똑히 들었고, 망설이지 않고
“그럼... 고백하기 전까지, 혼자서 그렇게 많이 고민한 거예요?”“응.”“어쩐지...”정은이 아주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뭐라고?” 재석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이젠 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가요...”둘은 손을 꼭 잡고 복도로 향했다. 조용한 밤, 서로의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걷던 중, 재석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정은도 따라 멈춰 서며 돌아봤다.“왜요?”“정은아, 우리 지금... 사귀는 거 맞지?”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두 사람이 꼭 잡은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그렇게 생각 안 해요? 조금 전부터 내가 ‘재석 씨’라고 부른 거 못 느꼈어요?”“혹시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정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 지었다.“흠,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평소에도 꿈에서 날 자주 본 모양이네요?”재석의 몸이 순간 굳더니, 양 볼이 순식간에 빨개졌다.‘진짜 자주 꿨나 보다?’재석은 눈을 못 마주친 채, 그저 두 사람이 맞잡은 손만 바라보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진짜 좋아.”‘정은이도, 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구나.’‘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구나.’같은 계단, 같은 복도, 수없이 함께 걸어온 길. 그동안은 늘 친구라는 이름으로, 앞서거나 뒤따르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왔지만, 오늘은 처음으로, 손을 잡고 나란히 오르는 계단.정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근데, 왜 나랑 은혁 씨한테 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재석은 목소리를 낮추며, 살짝 눈을 피했다.“미안. 계산하러 나갔다가... 우연히 통화하는 거 들었거든.”정은의 눈이 살짝 커졌다.그리고 머릿속으로 자신이 통화 중 했던 말을 하나하나 되짚어봤다.‘공항에서 보자, 기대된다, Z시 출장... 뭐 이상한 말한 것도 없는데...?’그런데도 재석은 그걸 ‘여행 약속’으로 받아들였고, 그걸로 인해 혼자 삭이다가 결국 아래층에서 고백까지 해버린 거였다.“너희, Z시에 여행 간다고 했잖아.”
정은이 멍해 있는 사이, 재석이 한 걸음 다가섰다. 늘 부드럽고 점잖던 그가, 이 순간만큼은 전에 없던 강한 기운을 뿜어냈다. ‘이 남자... 이런 눈빛도 있었나?’정은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등이 벽에 닿는 순간, 재석은 어느새 바로 눈앞에 와 있었다.정은이도 이제야 제대로 실감이 났다. 재석이 자신보다 훨씬 크다는 걸. 그리고 지금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내려다보면, 자신이 마치 남자의 품 안에 갇힌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도.재석이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이제 좀 알겠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그때 네가 학업이 먼저라고 했을 때, 난 받아들였어.”“그런데 장은혁한텐 기회를 줬지. 정은아...”그가 고개를 더 숙이자,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목선에 닿았다. 순간, 정은의 팔에 소름이 쫙 돋았다. “너, 나한테 너무 불공평해.”그 마지막 한 마디는 묘하게 서글픈 기운이 섞여 있었다.정은은 입술을 달싹이며 뭔가 말하려 했지만, 재석은 그녀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알아, 내가 지금 어떤 입장인지. 묻고 따질 자격도 없고, 네가 누구를 좋아하든, 그건 네 자유라는 것도 알아.”“이 말 꺼냈다가, 우리 사이가 끝날 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근데... 계속 참다 보니까 알겠더라.”‘난... 그렇게까지 쿨한 사람이 아니었어.’“그래서 이제 참지 않기로 했어.”‘어떻게 되든, 그건 네가 정해.’그렇게 말한 재석은 고개를 숙인 채 멈췄다. 마치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처럼.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용한 밤공기 속에서, 정은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울렸다.“이제, 제가 말해도 될까요?”“응...”“재석 씨.”정은은 처음으로 재석을 그렇게 불렀다.“고개 들어요. 나 좀 봐요.”재석의 어깨가 순간 굳어졌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그는 이미, 거절당할 각오까지 끝냈다.그런데 눈이 마주친 순간, 정은의 두 눈 속에서 재석이 본 건... 눈물이 아닌, 웃음이었다.억지로 짓는
“헤어졌다고요?”정은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몰랐어?!”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진욱은 눈을 반짝이며 의자째로 다가오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본격적인 ‘TMI’를 털어놓기 시작했다.“M시 출장 갔다 오고 며칠 안 돼서, 재석이가 바로 짐 싸서 수아를 내보냈다니까?”정은은 그 말을 듣고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재석과 수아 사이에 어떤 감정선이 있었는지, 그동안 몇 번 스쳐 지나갔던 장면들이 퍼즐처럼 빠르게 떠올랐다.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눈빛 속엔 미묘한 기류가 스쳤다.“아마 진짜 많이 좋아했나 봐. 그러니까 정리할 때도 그만큼 아프고, 오래 걸리는 거겠지. 조금만 시간 지나면, 태민이도 정리될 거야.”진욱은 이어서 말했다.“네.”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대답했다.그 이후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남의 연애는, 들을 수는 있어도 깊게 얘기하지 말아야 해. 괜히 나서 봤자... 괜히 끼어든 꼴만 되니까.’...해가 지고, 붉은 노을이 건물 유리에 비치기 시작할 무렵. 정은은 마침내 작업을 끝냈다.진욱은 기다렸다는 듯 프로그램을 열고 기능 하나하나를 테스트했다.그리고 30초쯤 흐른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어어!! 복구됐어! 됐다! 돌아왔어! 다시 쓸 수 있어!!”미진도 덩달아 벌떡 일어나 양손을 번쩍 들었다.“살았다, 진짜!! 여태 손으로 데이터 입력한 거 생각하면... 이건 거의 기적이야!”진욱은 시계를 힐끗 보더니, 정은을 향해 말했다.“지금 이 시간까지 남아서 도와준 우리 정은이, 완전 수고 많았어! 조 교수...”“응...?”갑작스레 이름이 불리자, 재석은 몇 초간 멈칫하다가 고개를 돌렸다.진욱은 능청스럽게 말했다.“아니, 정은이가 이렇게 큰일 해줬는데, 감사 표시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적어도 밥 한 끼는 사야지.”“맞아요, 맞아요. 조 교수님, 이건 진짜 밥으로도 모자라요.” 미진이 곧장 거들었다.재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략 1년 전, 정은은 한동안 재석의 실험실을 빌려 쓴 적이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전진욱, 조미진 등과 인연이 닿았다.처음엔 서로 어색하고 낯설었지만, 몇 달이 지나면서 조금씩 가까워졌고, 지금은 가볍게 농담도 주고받을 만큼 편해졌다.그러던 어느 날, 진욱은 우연히 정은이 실험 데이터를 처리하는 속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 너무 빠른 게 아닌가 싶어서 슬쩍 물어봤더니, 정은은 코딩도 할 줄 아는 공대 만능 캐릭터였다. 그녀는 직접 짠 프로그램으로 데이터를 자동 정리하고, 다차원 분류와 정렬까지 가능하다고 했다.“와, 뭐야... 완전 반칙인데?”진욱은 결국 정은에게 부탁해 실험실 맞춤형 프로그램 하나를 따로 제작해달라고 했고, 그 이후, 데이터 정리는 그야말로 신세계를 맞이했다. 진욱은 쓸 때마다 감탄하며 말했다.“진짜... 정은이 덕분이야. 이게 사람을 살리네.”하지만 어제 그 기특한 프로그램이 갑자기 먹통이 됐다. 손태민이 고쳐보겠다고 덤볐지만, 결과는... 풍비박산이었다. ‘이젠 누가 손댔다간 진짜 박살 나겠어...’ 결국 정은에게 SOS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재석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오늘 시간 돼? 안 되면, 며칠 뒤도 괜찮고...]진욱은 훨씬 급했다. 말 그대로 살려달라는 마음이었다.[야, 오늘 안 데려오면... 나 여기서 바로 싸버린다! 진짜라고, 어?!]그는 어제 약 먹고 좀 괜찮아진 줄 알았건만, 밤새 배가 또 난리였다. 오늘 아침부터 실험실 화장실은 진욱의 전용이 되었다. 오전에만 6회 방문.그 말은, 그냥 협박 아니었다. 진짜 실현 가능성이 있었으니 말이다.정은은 상황을 듣고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시간 돼요. 지금 바로 갈게요.”[그래. 그럼 내가 정문 앞으로 갈게.]‘굳이 마중까진 필요 없는데...’ 뚝-정은이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 ...10분 뒤, 정은은 학교 정문 앞에서 재석과 마주쳤다. 두 사람은 실험실로 걸어가며 프로그램
“언니, 이건 굳이 우리 의견 물을 필요도 없지 않아요? 언니가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가는 거죠. 저희한텐 뭐든 시키기만 하세요. 무조건 따라갈게요!”민지가 단호하게 말하자, 서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맞아요, 저흰 누나 믿고 가는 거예요. 결정은 누나가 해요.”정은은 그 말에 잠시 멍해졌다가,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너희들... 나 그렇게 믿어도 돼? 나도 가끔 실수하거든?”민지는 마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정은 언니가 실수했다면, 그건 100% 저랑 서준 오빠가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뜻이에요.”“그건 좀 과장이지만...”‘그래도... 이런 믿음을 받는다는 게 참 따뜻하네.’세 사람은 그렇게 식사를 마쳤다.계산은 서준이 맡았고, 정은과 민지는 먼저 주차장으로 향했다. “언니, 먼저 가요. 전 서준이 데리러 갈게요.”“응? 굳이?”“우리 집이랑 방향이 같잖아요. 서준이는 차도 없으니까, 그냥 태워다 주는 거죠, 헤헤.”“그래, 알겠어. 그럼 조심히 가. 운전 천천히 하고.”“네. 언니도 잘 들어가요!”...두 ‘파트너’와 방향을 맞춘 정은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자료 조사부터 시작해 ‘신소재 최적화 계획안’을 정리하고, 모든 내용이 빠짐없이 정리됐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확인했다.벌써 밤 10시. 정은은 핸드폰을 들고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냈다.[장은혁 씨, 시간 돼요? 상의드릴 게 하나 있어요.]그 시각, 은혁은 거실 소파에 앉아 어머니인 황희숙 여사의 ‘진실 공방’에 시달리고 있었다.“너 외할아버지한테 전화 왔어. 오늘 도시락 들고 회사 갔다며? 근데 그냥 말도 없이 두고 사라졌다고 난리야. 게다가 누가 너랑 어떤 여자가 같이 있는 걸 병원 약국에서 봤다던데? 솔직히 말해봐. 너, 여자 친구 생겼지?”은혁은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아니 외할아버지는 왜 또 엄마한테 바로 전화해요? 진짜 너무하신다니까요...”“이 자식 봐라, 말버릇 좀
진욱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렇게 마음이 있는 거면, 왜 정은이한테 솔직하게 말 안 해?”“겁나는 거지, 재석아? 말 꺼냈다가 거절이라도 당하면... 그땐 친구로도 남을 수 없을까 봐, 무서운 거잖아.”진욱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재석을 똑바로 바라봤다.“그건 너답지 않아. 내가 아는 재석이는, 망설이지 않고 결정하는 사람이었어. 결과가 불확실하다고 물러서는 사람 아니었잖아.”“정은이가 ‘지금은 연애 생각 없다’고 했지? 중요한 건 ‘지금은’이라는 거야. 사람 마음은 바뀌는 거고, 그때 거절했다고 지금도 똑같을 거란 보장은 없어. 알겠냐?”재석은 말없이 진욱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 말이 생각보다 깊게 박혔다. ‘지금도 똑같을까? 아니, 혹시... 지금은 조금 다를 수도 있는 걸까...’진욱은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야, 진심으로 말하는 건데, 너 계속 질질 끌면, 정은이 뺏긴다. 그리고 뺏기고 나서 울어봤자, 소용없을 거야.”“우리 정은이 인기 많은 거 너도 알잖아. 예전에도 정은이 두고 싸운 애들 있었잖아. 그리고 오늘 그 남자 봤지? 얼굴 잘생겼지, 젊지, 에너지 넘치지, 옷차림 보니까 집도 잘 사는 거 같던데?”재석은 이런 말을 아주 듣기 싫었다.“닥쳐.”진욱도 더 이상 말하기 싫었다. “칫. 드디어 위기감이 좀 드나?”‘그래, 긴장 좀 해라. 맨날 냉정한 척만 하지 말고... 이번엔 너도 좀 불안해져 봐야지.’...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집에 바래다준 뒤, 약을 가정부에게 전달하며, 복용 방법까지 하나하나 직접 설명했다. 봉수진은 저녁까지 먹고 가라며 붙잡았지만, 정은은 이미 서준, 민지와의 약속이 있었다.“외할머니, 며칠 안에 다시 올게요. 오늘은 친구들이랑 약속이 있어서요.”“그래그래, 알았어. 젊을 땐 많이 만나고 다녀야지.”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숙였고, 곧 차에 올랐다.약속 장소인 레스토랑에 도착했을 땐, 서준과 민지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테이블 위에
은혁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그러게요... 나야 뭐, 그랬으면 좋겠지만...”하지만 정은의 태도는 그리 확신을 줄 만큼의 호감은 아니었다.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분명히 좋아한다는 표시도 없는 애매한 선이 보이는 듯했다.‘그래서 더 미치겠어. 기대도 못 하고,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고... 이러니까 계속 마음이 붕 떠 있잖아...’그렇게 속으로 앓고 있었지만, 정은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봉수진의 약에 모든 관심을 쏟고 있었다.VIP 약국답게, 일 처리는 정말 빨랐다. 정성스럽게 달인 약이 곧바로 팩 단위로 나뉘어 밀봉되었고, 음용 방법까지 깔끔하게 안내되었다.냉장 보관 후, 따뜻한 물에 데워 마시면 된다는 안내였는데, 이 정도면 환자도 거부감 없이 약을 먹을 수 있을 것이었다. 약을 다 받은 후, 약 한 시간쯤 지나 두 사람은 병원을 나섰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은의 전화가 울렸다.“여보세요? 외할머니? 네, 약 다 받아놨어요.”“병원에서 달여줬어요. 네, 거기 계세요. 지금 바로 갈게요.”전화를 끊은 정은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은혁을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오늘 고마웠어요. 외할머니 모시러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아, 어... 그래요! 잘 가요!”은혁은 여자의 뒷모습이 멀어질 때까지 멍하니 서 있었다.심지어 여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후에도 한참을 그렇게 바라본 후에야 아쉬움 가득한 시선을 거두었다.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고, 화면엔 ‘황기' 두 글자가 떴다.“여보세요?”[야 이놈아! 도시락 던져놓고 도망가듯 나가버리면 어떡해?! 말도 못 붙였잖아! 뭐가 그렇게 급해? 뭐가 외할아버지보다 중요한 거냐고?!]“죄송해요... 헤헤.”황기는 순간 당황했다. ‘얘 지금 뭐야? 미쳤어? 웃음은 왜 이렇게 정직하게 새어 나오는 건데...?’...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태우고 병원을 나서는 중이었다. 바로 그때, 재석은 약을 수령하고 외래 진료실 앞 벤치에 앉아 있었다.
정은도 여기서 재석을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선배님, 병원엔 무슨 일로 오셨어요?”재석은 그제야 시선을 거둬들였다. 눈길이 정은에게 닿는 순간, 표정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난...”“날 데려다주러 온 거야.” 그 순간, 전진욱이 배를 감싸 쥐며 천천히 다가왔고, 재석 대신 대답을 건넸다.정은은 진욱을 바라보다가 눈이 살짝 커졌다. “교수님, 어디 아프세요?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요.”“하... 뭘 잘못 먹었는지, 아침부터 배탈이 나서... 약도 안 듣고... 이 사람이 막 끌고 오더라니까... 검사라도 받아보라고.”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하셨어요. 괜히 방치하다가 더 심해질 수도 있잖아요. 미리 체크하면 마음도 편하고요.”“어우, 너희 둘 미리 맞췄냐? 말이 어쩜 그렇게 똑같냐?” 진욱이 짐짓 장난스러운 말투로 투덜댔다.정은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재석을 바라봤다. “그랬어요?”재석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눈빛 속 어딘가 알 수 없는 감정이 일렁였다. ‘저 말투, 저 표정... 나만 아는 게 아닐 텐데...’“정은 씨, 이제 가야죠.” 그때, 은혁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아, 네.” 정은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희 먼저 갈게요.”그렇게 말한 후, 은혁과 나란히 병원 복도를 걸어 나갔다.재석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두 사람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눈빛 속 감정은 복잡하고도 묘했다. ‘뭔데, 저 둘은 저렇게 자연스러워...’“재석아? 야, 재석아!”진욱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재석은 고개를 돌렸지만, 눈빛 속 싸늘함은 여전했다. 진욱은 그 눈빛에 소름이 돋아 어깨를 움찔거렸다.“너... 왜 그래?”“방금 정은이가 ‘저희’라고 했어.”“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재석을 바라봤다. 몇 초간 멍하던 그는 그제야 이해가 된 듯 말했다. “아... 그 ‘저희’? 그게 뭐 어때서? 같이 왔으니까 ‘저희’지. 그럼
얼마 지나지 않아 황 원장은 처방전을 프린트해서 정은에게 건넸다.“수고 많으셨습니다, 원장님.”정은이 공손히 인사하자 황 원장은 손을 휘저었다.“아이구, 무슨... 이 아가씨는 인사도 참 반듯하게 잘하네요. 말도 예쁘게 하고, 얼굴도 예쁘고. 이런 손녀가 있으면, 어디 내놔도 자랑이겠네요.”봉수진은 바로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럼요. 우리 손녀는 어디 하나 빠지는 데가 없어요.”황 원장은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장난스럽게 물었다.“이렇게 예쁜 아가씨한테 남자 친구가 없을 리 없는데? 그렇죠?”봉수진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없어요! 보통 남자애들은 우리 정은이랑 안 어울려요.”“허허, 그래도 우리 손자 정도면 꽤 괜찮은데...?”황 원장이 살짝 떠보자 봉수진은 손사래를 쳤다.“아이구, 그 얘긴 그만해요. 정은이 아직은 시집 안 보낼 거예요. 지금이 제일 곁에 두기 좋을 때라니까요.”‘아이고, 또 시작이다...’정은은 속으로 헛웃음 치며 처방전을 가방에 쏙 넣고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났다.“저, 약 지으러 먼저 다녀올게요!”...진료실 문을 나서는 순간, 정은은 누군가와 부딪혔다.“아, 죄송해요!”고개를 돌려 상대방을 본 순간 정은의 걸음이 멈췄다.“은혁 씨?”은혁은 보온 도시락 통을 들고 서 있었다.“정은 씨! 또 보네요. 우리 진짜 인연인가 봐요? 하하...”“여긴... 병원인데? 누가 입원하셨어요?”정은이 도시락을 보며 물었다.“아, 아니에요. 저 입원실 온 거 아니고요! 외할아버지가 이 병원 의사세요. 오늘 외래 당번이라 저희 어머니가 직접 도시락을 싸주셨는데, 제가 대신 가져다드리러 온 거예요.”“혹시 외할아버지 성함이 황 씨?”“네! 황기 원장님이세요. 한약재 이름에서 따오셨대요, 혹시... 아는 분이세요?”‘어머나, 진짜 인연인가?’정은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오늘 저희 외할머니 진료도 황 원장님한테 받은 거예요.”“정말요? 세상에... 진짜 대박. 어쩐지 자꾸 마주치네요.”은혁은 정은 손에 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