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의 익숙한 모든 것이 아이러니로 가득했다.‘왜? 내가 왜 그때 그런 말을 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마치 내가 뭔가에 홀린 것 같아! 내 마음대로 지껄이며 정은이 당시의 고통과 절망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어.’이 1년 동안 정은은 이미 학교에 들어가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지만, 도겸은 여전히 이 룸에 갇혔다.나갈 수도 없고, 나갈 생각도 없었다.도겸은 술잔을 세게 쥐더니,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헤어지자고 했을 때는 그렇게 단호했지만, 지금은 후회해 죽을 지경이었다.선우는 이 상황을 보고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말릴 수도 없는 이상, 아이고, 모르겠다...’“자, 형, 같이 마셔요.”얼마 지나지 않아, 도겸은 잔뜩 취했다.선우는 차로 그를 별장에 데려다주었다.도중에 도겸은 두 눈을 꼭 감고 계속 소리쳤다.“정, 정은아... 날 버리지 마라...”선우는 마음이 아팠다.‘나도 두 사람이 사귀는 것을 줄곧 지켜본 셈이지. 그렇게 행복한 두 사람이 어째서 오늘 이 지경으로 되었을까?’선우는 도겸을 침실에 눕힌 다음, 이대로 떠나는 게 마음이 좀 걸렸다.생각하다 그는 핸드폰을 꺼내서 누군가에게 전화를 했다.“네, 이모님, 본가로 가신 거예요? 지금 도겸이 형 별장에 한 번 오시면 안 돼요?”왕순자는 말문이 막혔다.‘지금 금방 잠들었는데!’30분 후, 왕순자는 졸린 몸을 이끌고 나타났다.선우는 담배를 두 대나 피웠는데, 왕순자를 보자마자 눈빛이 번쩍였다.“아이고 이모님, 드디어 오셨네요!”왕순자는 침대를 힐끗 쳐다보며 어이가 없었다.“왜 또 취하신 거예요?”‘나 좀 조용히 살 게 할 수는 없는 거야?’선우는 어색해서 가볍게 기침했다.“그 뭐지... 오늘 형 기분이 좋지 않아서 좀 많이 마셨으니, 이모님이 잘 좀 돌봐 주세요.”말을 마치자, 선우는 줄행랑을 쳤다.“잠깐만요.”“네?”“방에 쓰레기통이 있잖아요.”선우는 영문을 몰랐다.“알아요, 왜요?”“그럼 다음에 담배꽁초 좀 함부로 버리지 마세요! 제가 다
“정은아... 네가 아직도 화가 나 있다는 거 알아... 그런데 어떻게 자신을 이모님과 비교할 수가 있니? 정은아... 넌 이모님보다 훨씬 좋아... 그러니 그런 말 하지 마...”‘아니... 내가 뭐? 왜 비교할 수 없는 거야? 내가 뭘 어쨌다는 거야?!’“정은아...”“정은, 정은, 그 놈의 정은! 정은은 무슨!”말하면서 왕순자는 손바닥으로 도겸의 머리를 쳤다.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반응하자, 그녀는 깜짝 놀랐지만 잠시 후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이렇게 때리니, 마치 무슨 스위치라도 눌렀는지 도겸은 즉시 손을 놓았다.왕순자는 바로 도망을 갔다.자신의 작은 방으로 돌아가자, 왕순자는 또 분노와 걱정에 침대에서 뒤척이기 시작했다. ‘오늘 밤은 본가로 돌아갈 수가 없을 것 같군. 아이고, 정은 아가씨는 정말 돌아오고 싶지 않으신 건가? 그럼 앞으로 누가 저 미친 도련님을 단속하지? 미치겠네.’가까스로 잠이 들었는데, 한밤중에 왕순자는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그녀는 억지로 일어나 2층으로 올라간 다음, 또 가볍게 안방 방문을 열었다.‘쯧, 어쩔 수 없지 뭐, 내가 가정부잖아...’그러나 다음 순간, 악취가 확 풍겨오더니 왕순자는 하마터면 토를 할 뻔했다.그리고 방 안을 살펴보자, 바닥에 구토물이 가득 있었다.그러나 장본인은 아주 편하게 자고 있었다.‘정말이지, 하나님, 차라리 저를 죽이세요!’...이튿날, 도겸은 아침 일찍 일어났다.그는 깔끔하게 수염을 깎고 양복을 입고 내려왔는데, 어젯밤의 주정뱅이와 전혀 딴판이었다.왕순자는 이미 죽을 다 끓였다.그녀가 부지런한 것이 아니라, 도겸이 매번 술에 취할 때마다 아침에 일어나면 죽을 좀 끓여달라고 시켰기 때문이다.이번에 왕순자는 미리 준비를 했다.죽을 안방으로 가져가려던 참에 도겸이 위층에서 내려왔다.“도련님, 외출하시려고요? 죽 좀 끓였는데, 마시고 가세요.”도겸은 그 죽을 보더니 잠시 넋을 잃었다. 곧이어 그는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평온하게 말했다.“배 안 고파요. 그
거리를 두고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은, 정은에게도, 도겸에게도 가장 좋은 선택이었다.정은은 서류와 펜을 거두었는데, 남자가 갑자기 중얼거렸다.“하지만 난 널 여전히 친구로 생각할 거야...”정은은 바로 떠났다.도겸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냉정하게 시선을 거두었다.그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씁쓸함이 혀끝에서 퍼졌지만, 그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엄지손가락으로 컵을 가볍게 어루만지며, 시선은 맞은편 정은이 마셨던 커피에 떨어졌다.‘정은이는 줄곧 우유를 탄 커피를 좋아했기 때문에 커피가 그리 쓰지 않을 거야.’도겸은 정은의 커피를 들고 가볍게 한 입 맛보았다.아니나 다를까, 그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그들은 6일, 6개월이 아닌 6년을 함께 지냈다.‘6년을 함께 했는데, 내가 너에 대해 잘 모를 것 같아? 아니, 난 그 누구보다도 더 잘 알아, 다 안다고! 그렇다면...’도겸은 실눈을 뜨고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난 절대로 포기할 수 없어. 정은아, 넌 내 여자일 수밖에 없어. 지금은 아니지만, 앞으로는 다시 내 여자로 될 거야!’도겸은 남은 커피를 천천히 마셨다. 전에 그는 아메리카노를 좋아했지만, 정은은 좋아하지 않았다. ‘이 참에 바꾸는 게 좋지 않을까? 사실 하나도 안 어려워. 심현빈을 보면 알잖아. 그 자식이 왜 정은의 배척을 당하지 않았겠어? 자신을 숨길 줄 알고, 엄살 부릴 줄 아니까. 내색하지 않고, 무심한 척하며 정은의 생활에 스며드는 거지. 교활한 자식.’봄날의 비는 가늘고 잔잔해서 존재감이 없어 보이지만 토양을 미친 듯이 적시며 감정을 돋아나게 할 수 있었다.현빈은 내색하지 않고 일부러 물러서는 척을 했기에, 정은은 압력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그럼 자연히 경각성을 늦추며 그가 접근하도록 내버려둘 것이다.‘심현빈도 할 수 있다면, 난 왜 못할까?’어젯밤에 도겸은 확실히 취했다. 하지만 깨어나는 것도 한순간이었다.그 순간, 도겸은 갑자기 납득했다.정은을 다시 되찾으려면 조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몇 번 만났지만, 그렇다고 말을 걸 만큼 친하지 않았다.그러나 경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매우 자연스럽게 입을 열었다.“괜찮아요? 어제... 교문 앞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앉아 있었는데. 감기에 걸리지 않았죠?”도겸은 여전히 침묵하며 말할 의욕이 없었다.경혜도 개의치 않고 혼자 계속 중얼거렸다.“그쪽도 커피 마시러 왔어요? 여기 커피 꽤 괜찮아요. 근처의 다른 커피숍에 비해 확실히 더 맛있거든요. 난 다른 맛을 시도해 보았는데...”“지금 이 가게의 간판인 아이스 아메리카노 마시고 있는 거죠? 맛은 고소하지만 약간 씁쓸해서 케이크와 같이 먹으면 딱이에요.”도겸은 여자의 부드럽고 듣기 좋은 목소리를 듣고, 눈빛이 갑자기 흥미진진해졌다. 그리고 입가에 서서히 의미심장한 미소가 나타났다.경혜는 남자의 눈빛에 등골이 오싹했지만 여전히 미소를 유지해야 했다.“날, 날 왜 그렇게 보는 거예요? 내 얼굴에 뭐 더러운 거 묻었어요?”말하면서 경혜는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만졌다.이때 도겸이 입을 열었다.“너 나한테 관심 있지?”그는 많은 여자를 만나봤기에, 경혜의 이런 눈빛이 낯설지 않았다.비록 그녀는 애써 숨기며 별로 개의치 않는 척했지만, 여전히 도겸의 눈을 피할 수 없었다.경혜는 도겸이 이렇게 직접적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아무런 징조도 없이 직접 자신의 비밀을 말했던 것이다.그녀는 머리가 새하얘지더니 얼굴이 빨개지는 동시에 목소리도 점점 작아졌다.“그, 그렇게 티가 났나요? 바로 알아차렸다니...”‘바로 인정을 했어!’도겸은 이런 여자를 너무 많이 봐왔다. 예쁘고, 섹시하고, 매력이 넘치는 여자들.그는 갑자기 흥미를 잃었다.도겸은 무심코 컵의 가장자리를 매만지며 얼음처럼 차가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그럼 너도 잘 알 거야. 나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경혜는 전혀 놀라지 않고 오히려 고개를 끄덕였다.“난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아주 오래 전부터 이 일을 알고 있었어요. 소정은과 난 모두 같은 전공을 선
경혜는 자신이 승낙하면 그들의 사이가 거래 사이로 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이건 아예 내가 원하는 게 아니잖아. 하지만 거절하면... 이 남자가 바로 일어나서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떠날 거야.’‘이것은 아마도 내가 이 남자에게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일 거야!’“좋아요, 그 제안, 받아들일게요.”경헤는 일부러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어차피 가짜잖아요. 게다가 나도 돈을 좀 벌 수 있고.”‘지금은 가짜겠지만, 미래의 일은 누가 알겠어? 나에게 시간만 준다면...’도겸은 눈을 반쯤 드리우고 있었고, 얼굴에 별다른 표정이 없었다.“좋아, 그럼 이따 내가 비서에게 계약서를 보내라고 할 테니까, 넌 그냥 사인하면 돼.”계약서로 똑똑히 써야 분쟁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이것도 도겸이 서연희에게서 얻은 교훈이라고 할 수 있다.경혜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그러나 마음은 덜컹 내려앉았다.‘보아하니 정말 나와 얽히고 싶지 않은 모양이군. 여자가 자신에게 매달리는 것도 아주 두려워하는 것 같아.’“그럼 이제 번호 추가해도 되는 거예요? 언제든지 연락할 수 있으니까요.”경혜는 대범하게 핸드폰을 꺼냈다.도겸은 가볍게 응답하며 그녀의 번호를 추가했다.경혜는 또 도겸의 톡을 추가했는데, 그의 프로필 사진이 한 폭의 산수화인 것을 발견했다. 파도가 일렁이는 동시에 은은한 물안개가 피어올랐고, 안개 속에서 웅장한 산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마음이 통한 건가요? 당신의 프로필 사진에 물이 있고, 내 프로필 사진에 구름이 있는데.”“물과 구름이 뭐?”경혜는 멈칫했다.“다 풍경이잖아요.”도겸은 그녀를 바로잡았다.“내 프로필 사진은 물이 아니야.”“네?”“물안개야.”경혜는 어색하게 웃었다.“그렇군요... 나 방금 주의하지 않았어요...”도겸의 손끝은 가볍게 프로필 사진을 어루만졌다.“‘정겨운 산과 물이 붓 끝에 머물고, 은빛 물안개가 그림 속에 피어나네.’ 정은의 이름으로 지어진 이행시야.”경혜는 웃음이 안 나왔
“그럼 왜 매일 달리는 거예요?” ‘매일 아침 저녁으로 달리다니, 마라톤에 나가려는 건가?’재석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만약 자세히 분별한다면, 재석은 약간 마음이 찔렸다.정은은 또 물었다.“요즘 실험실은 바쁘지 않은 거예요?”“응, 대부분 전 교수에게 맡겼거든.”지금도 실험실에서 낑낑거리며 열심히 일하는 진욱은 재채기를 멈추지 않았다.“에취! 에취! 조 교수, 정말 나만 괴롭히는 거야 뭐야!”재석은 정은에게 물었다.“아침 먹었어?”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먹었어요, 선배님은요?”“나도, 오늘 다른 일정 있어?”정은은 생각해 보았다.“집에 가서 몇 편의 논문 좀 봐야 하는 것 외에 다른 일 없어요.”“어제 Y시의 친구가 표고버섯 한 상자 부쳤는데, 네가 가져가서 먹어.”표고버섯은 정말 좋은 물건이었다.“왜 나에게 주는 거예요? 선배님은요?”재석은 웃음을 금치 못했다.“난 평소에 집에서 밥을 하지 않잖아. 버섯을 오래 두면 쉽게 상할 거야. 그러니 너에게 주는 게 가장 좋아.”“그래요, 그럼 잘 먹을게요!”두 사람은 함께 위층으로 올라갔다.후에 정은은 재석의 집에 갔는데, 큰 거품박스 하나가 문 뒤에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열어보니 안에 각종 버섯이 있었는데, 표고버섯이며 느타리버섯, 송이버섯 등이 있었다.전국의 버섯을 모두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모든 버섯은 종류 별로 한 봉지씩 진공 포장이 되었다.그래서 장거리 운송을 거쳐 또 하루를 놔둬도 보기에 여전히 싱싱했다.정은은 그야말로 보물을 얻은 것 같았다.“선배님, 시중에서 구하기 어려운 버섯인데, 정말 나에게 주는 거예요?”재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얼른 말했다.“가져가, 다 가져가.”“네. 그럼 저녁에 버섯전골 해먹어야겠네요!”말하면서 정은은 상자를 안고 만족해하며 자기 집으로 돌아갔는데, 재석에게 거절할 기회도 주지 않았다.오후 5시, 재석은 시간을 맞추며 와서 정은을 도와주었다.주방에 들어가 보니, 정은은 이미 각종 버섯을 깨끗이 씻어
그릇은 두 사람이 함께 씻었고, 주방도 두 사람이 함께 치웠다.마지막으로 함께 외출을 하며 쓰레기를 버렸다.정은은 패딩을 입고 쓰레기를 들고 나갔다.재석도 집에 가서 두 포대의 쓰레기를 들고 나왔다.“선배님, 쓰레기를 안 버린 지 얼마나 됐어요?”“이주 정도?”“선배님이 이런 사람인 줄 몰랐는데.”다행히도 모두 포장함, 비닐 봉지들이었고 남은 음식찌꺼기나 과일껍질 같은 것은 없었다.“가자.”아래층으로 내려갈 때, 두 사람은 같은 아파트에 사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이미 쓰레기를 버리고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았다.그렇게 네 사람이 딱 마주쳤다.“조 교수랑 정은이 너도 쓰레기를 버리러 나온 거야?”“네.” 재석은 고개를 끄덕였다.할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정은을 바라보았다.“오늘 또 무슨 맛있는 걸 한 거야? 아래층에서도 아주 향기가 죽여주던데!”“버섯전골이요.”“어머! 조 교수가 어제 받은 그 버섯 맞지?”어제 재석이 택배를 받을 때, 마침 채소를 사서 돌아오는 할머니를 만났는데, 그녀에게 버섯을 보존하는 방법에 대해 물었다.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할머니는 더욱 환하게 웃었다.“두 사람 하나는 식재료를 제공하고, 다른 하나는 음식을 책임지니 이웃이 된 것도 다 운명이지! 이렇게 친해졌으니 차라리 함께 하는 게 더 좋지 않겠어!”옛날 사람들은 시원시원하고 대담했다.정은은 처음에는 반응하지 못하다가, 재석의 기침소리를 듣고서야 갑자기 정신을 차리며 재빨리 손을 흔들었다.“아니에요, 지금 오해를...”할머니는 즉시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끊었다.“설명할 필요 없어, 그럴 필요 없어. 너희들이 좋으면 되지! 가자 영감, 집에 가야지!”“그래...” 할아버지는 웃으며 대답했다.“당신도 참, 늘 허튼소리를 하기 좋아한다니깐. 정은이 얼굴이 다 빨개졌잖아.”“내가 무슨 허튼소리를 했다는 거야? 그 당시에 우리도 하나는 위층, 하나는 아래층에서 살다가 알게 되었잖아? 그때 사회가 이렇게 개방되지 않아서, 우리는 2년
정은은 줄곧 재석이 향수를 쓰는지 안 쓰는지가 궁금했다.그러나 이 문제는 좀 예민해서 잠시 마음속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정은은 어색하게 웃었다.“고마워요, 선배님. 외출할 때 목도리 챙기는 것을 잊어버렸어요...”사실 잊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귀찮았던 것이다.쓰레기를 버리고 바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이 정도면 목도리를 안 둘러도 상관없을 거라 생각했다.재석은 정말 정은의 속마음을 몰랐을까?다만 간파하지 않았을 뿐, 묵묵히 자신의 목도리를 그녀에게 주었다.“방금 임 교수님과 장 교수님이 왜 아이를 가지지 않으셨냐고 물었지? 원하지 않은 게 아니라 임 교수님의 몸이 좋지 않아서 그래.”그 시대의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는 사형을 선고받은 범인과 다름없었다.장 교수의 집안은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두 사람이 이혼하도록 강요했다.임 교수는 양심의 가책을 느껴, 더 이상 매달리고 싶지 않아 스스로 악인이 되려고 이혼을 제기했다.그러나 장 교수는 한사코 동의하지 않았다.“후에 장 교수님이 그 당시의 아내를 되찾기 위해서 집안과 관계를 끊고 임 교수님을 찾아가셨다고 들었어.”“아무튼 20년 동안 집안사람들과 왕래하지 않았는데, 나중에 가족들도 서서히 이 현실을 받아들였고, 다시 연락하기 시작한 거야. 하지만 사이도 그리 좋은 편은 아니야.”임 교수는 본래 고아였다. 장 교수도 그녀를 위해 자신을 고아로 만들었다.이때부터 그들의 인생은 서로뿐이었다.정은은 이 말을 듣고 눈시울을 붉혔다.“그 시절은 정말 로맨틱한 것 같아요. 비록 발달하진 않지만, 일생동안 딱 한 사람만 사랑할 수 있으니까요.”그녀는 앞을 바라보았다. 재석은 그런 정은을 바라보았다.여자는 풍경을 보고 있었고, 동시에 다른 사람의 풍경으로 되기도 했다.정은은 한숨을 내쉬었다. 숨은 흰 안개로 되어 마치 응결된 이슬과 같았다.그녀는 중얼거렸다.“올해 눈이 올지 모르겠네...”작년은 눈송이만 조금 날렸는데, 땅에 떨어지자마자 바로 물이 되어 전혀 쌓이지 않았다.재작
“그럼... 고백하기 전까지, 혼자서 그렇게 많이 고민한 거예요?”“응.”“어쩐지...”정은이 아주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뭐라고?” 재석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이젠 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가요...”둘은 손을 꼭 잡고 복도로 향했다. 조용한 밤, 서로의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걷던 중, 재석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정은도 따라 멈춰 서며 돌아봤다.“왜요?”“정은아, 우리 지금... 사귀는 거 맞지?”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두 사람이 꼭 잡은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그렇게 생각 안 해요? 조금 전부터 내가 ‘재석 씨’라고 부른 거 못 느꼈어요?”“혹시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정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 지었다.“흠,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평소에도 꿈에서 날 자주 본 모양이네요?”재석의 몸이 순간 굳더니, 양 볼이 순식간에 빨개졌다.‘진짜 자주 꿨나 보다?’재석은 눈을 못 마주친 채, 그저 두 사람이 맞잡은 손만 바라보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진짜 좋아.”‘정은이도, 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구나.’‘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구나.’같은 계단, 같은 복도, 수없이 함께 걸어온 길. 그동안은 늘 친구라는 이름으로, 앞서거나 뒤따르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왔지만, 오늘은 처음으로, 손을 잡고 나란히 오르는 계단.정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근데, 왜 나랑 은혁 씨한테 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재석은 목소리를 낮추며, 살짝 눈을 피했다.“미안. 계산하러 나갔다가... 우연히 통화하는 거 들었거든.”정은의 눈이 살짝 커졌다.그리고 머릿속으로 자신이 통화 중 했던 말을 하나하나 되짚어봤다.‘공항에서 보자, 기대된다, Z시 출장... 뭐 이상한 말한 것도 없는데...?’그런데도 재석은 그걸 ‘여행 약속’으로 받아들였고, 그걸로 인해 혼자 삭이다가 결국 아래층에서 고백까지 해버린 거였다.“너희, Z시에 여행 간다고 했잖아.”
정은이 멍해 있는 사이, 재석이 한 걸음 다가섰다. 늘 부드럽고 점잖던 그가, 이 순간만큼은 전에 없던 강한 기운을 뿜어냈다. ‘이 남자... 이런 눈빛도 있었나?’정은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등이 벽에 닿는 순간, 재석은 어느새 바로 눈앞에 와 있었다.정은이도 이제야 제대로 실감이 났다. 재석이 자신보다 훨씬 크다는 걸. 그리고 지금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내려다보면, 자신이 마치 남자의 품 안에 갇힌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도.재석이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이제 좀 알겠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그때 네가 학업이 먼저라고 했을 때, 난 받아들였어.”“그런데 장은혁한텐 기회를 줬지. 정은아...”그가 고개를 더 숙이자,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목선에 닿았다. 순간, 정은의 팔에 소름이 쫙 돋았다. “너, 나한테 너무 불공평해.”그 마지막 한 마디는 묘하게 서글픈 기운이 섞여 있었다.정은은 입술을 달싹이며 뭔가 말하려 했지만, 재석은 그녀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알아, 내가 지금 어떤 입장인지. 묻고 따질 자격도 없고, 네가 누구를 좋아하든, 그건 네 자유라는 것도 알아.”“이 말 꺼냈다가, 우리 사이가 끝날 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근데... 계속 참다 보니까 알겠더라.”‘난... 그렇게까지 쿨한 사람이 아니었어.’“그래서 이제 참지 않기로 했어.”‘어떻게 되든, 그건 네가 정해.’그렇게 말한 재석은 고개를 숙인 채 멈췄다. 마치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처럼.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용한 밤공기 속에서, 정은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울렸다.“이제, 제가 말해도 될까요?”“응...”“재석 씨.”정은은 처음으로 재석을 그렇게 불렀다.“고개 들어요. 나 좀 봐요.”재석의 어깨가 순간 굳어졌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그는 이미, 거절당할 각오까지 끝냈다.그런데 눈이 마주친 순간, 정은의 두 눈 속에서 재석이 본 건... 눈물이 아닌, 웃음이었다.억지로 짓는
“헤어졌다고요?”정은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몰랐어?!”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진욱은 눈을 반짝이며 의자째로 다가오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본격적인 ‘TMI’를 털어놓기 시작했다.“M시 출장 갔다 오고 며칠 안 돼서, 재석이가 바로 짐 싸서 수아를 내보냈다니까?”정은은 그 말을 듣고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재석과 수아 사이에 어떤 감정선이 있었는지, 그동안 몇 번 스쳐 지나갔던 장면들이 퍼즐처럼 빠르게 떠올랐다.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눈빛 속엔 미묘한 기류가 스쳤다.“아마 진짜 많이 좋아했나 봐. 그러니까 정리할 때도 그만큼 아프고, 오래 걸리는 거겠지. 조금만 시간 지나면, 태민이도 정리될 거야.”진욱은 이어서 말했다.“네.”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대답했다.그 이후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남의 연애는, 들을 수는 있어도 깊게 얘기하지 말아야 해. 괜히 나서 봤자... 괜히 끼어든 꼴만 되니까.’...해가 지고, 붉은 노을이 건물 유리에 비치기 시작할 무렵. 정은은 마침내 작업을 끝냈다.진욱은 기다렸다는 듯 프로그램을 열고 기능 하나하나를 테스트했다.그리고 30초쯤 흐른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어어!! 복구됐어! 됐다! 돌아왔어! 다시 쓸 수 있어!!”미진도 덩달아 벌떡 일어나 양손을 번쩍 들었다.“살았다, 진짜!! 여태 손으로 데이터 입력한 거 생각하면... 이건 거의 기적이야!”진욱은 시계를 힐끗 보더니, 정은을 향해 말했다.“지금 이 시간까지 남아서 도와준 우리 정은이, 완전 수고 많았어! 조 교수...”“응...?”갑작스레 이름이 불리자, 재석은 몇 초간 멈칫하다가 고개를 돌렸다.진욱은 능청스럽게 말했다.“아니, 정은이가 이렇게 큰일 해줬는데, 감사 표시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적어도 밥 한 끼는 사야지.”“맞아요, 맞아요. 조 교수님, 이건 진짜 밥으로도 모자라요.” 미진이 곧장 거들었다.재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략 1년 전, 정은은 한동안 재석의 실험실을 빌려 쓴 적이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전진욱, 조미진 등과 인연이 닿았다.처음엔 서로 어색하고 낯설었지만, 몇 달이 지나면서 조금씩 가까워졌고, 지금은 가볍게 농담도 주고받을 만큼 편해졌다.그러던 어느 날, 진욱은 우연히 정은이 실험 데이터를 처리하는 속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 너무 빠른 게 아닌가 싶어서 슬쩍 물어봤더니, 정은은 코딩도 할 줄 아는 공대 만능 캐릭터였다. 그녀는 직접 짠 프로그램으로 데이터를 자동 정리하고, 다차원 분류와 정렬까지 가능하다고 했다.“와, 뭐야... 완전 반칙인데?”진욱은 결국 정은에게 부탁해 실험실 맞춤형 프로그램 하나를 따로 제작해달라고 했고, 그 이후, 데이터 정리는 그야말로 신세계를 맞이했다. 진욱은 쓸 때마다 감탄하며 말했다.“진짜... 정은이 덕분이야. 이게 사람을 살리네.”하지만 어제 그 기특한 프로그램이 갑자기 먹통이 됐다. 손태민이 고쳐보겠다고 덤볐지만, 결과는... 풍비박산이었다. ‘이젠 누가 손댔다간 진짜 박살 나겠어...’ 결국 정은에게 SOS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재석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오늘 시간 돼? 안 되면, 며칠 뒤도 괜찮고...]진욱은 훨씬 급했다. 말 그대로 살려달라는 마음이었다.[야, 오늘 안 데려오면... 나 여기서 바로 싸버린다! 진짜라고, 어?!]그는 어제 약 먹고 좀 괜찮아진 줄 알았건만, 밤새 배가 또 난리였다. 오늘 아침부터 실험실 화장실은 진욱의 전용이 되었다. 오전에만 6회 방문.그 말은, 그냥 협박 아니었다. 진짜 실현 가능성이 있었으니 말이다.정은은 상황을 듣고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시간 돼요. 지금 바로 갈게요.”[그래. 그럼 내가 정문 앞으로 갈게.]‘굳이 마중까진 필요 없는데...’ 뚝-정은이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 ...10분 뒤, 정은은 학교 정문 앞에서 재석과 마주쳤다. 두 사람은 실험실로 걸어가며 프로그램
“언니, 이건 굳이 우리 의견 물을 필요도 없지 않아요? 언니가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가는 거죠. 저희한텐 뭐든 시키기만 하세요. 무조건 따라갈게요!”민지가 단호하게 말하자, 서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맞아요, 저흰 누나 믿고 가는 거예요. 결정은 누나가 해요.”정은은 그 말에 잠시 멍해졌다가,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너희들... 나 그렇게 믿어도 돼? 나도 가끔 실수하거든?”민지는 마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정은 언니가 실수했다면, 그건 100% 저랑 서준 오빠가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뜻이에요.”“그건 좀 과장이지만...”‘그래도... 이런 믿음을 받는다는 게 참 따뜻하네.’세 사람은 그렇게 식사를 마쳤다.계산은 서준이 맡았고, 정은과 민지는 먼저 주차장으로 향했다. “언니, 먼저 가요. 전 서준이 데리러 갈게요.”“응? 굳이?”“우리 집이랑 방향이 같잖아요. 서준이는 차도 없으니까, 그냥 태워다 주는 거죠, 헤헤.”“그래, 알겠어. 그럼 조심히 가. 운전 천천히 하고.”“네. 언니도 잘 들어가요!”...두 ‘파트너’와 방향을 맞춘 정은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자료 조사부터 시작해 ‘신소재 최적화 계획안’을 정리하고, 모든 내용이 빠짐없이 정리됐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확인했다.벌써 밤 10시. 정은은 핸드폰을 들고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냈다.[장은혁 씨, 시간 돼요? 상의드릴 게 하나 있어요.]그 시각, 은혁은 거실 소파에 앉아 어머니인 황희숙 여사의 ‘진실 공방’에 시달리고 있었다.“너 외할아버지한테 전화 왔어. 오늘 도시락 들고 회사 갔다며? 근데 그냥 말도 없이 두고 사라졌다고 난리야. 게다가 누가 너랑 어떤 여자가 같이 있는 걸 병원 약국에서 봤다던데? 솔직히 말해봐. 너, 여자 친구 생겼지?”은혁은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아니 외할아버지는 왜 또 엄마한테 바로 전화해요? 진짜 너무하신다니까요...”“이 자식 봐라, 말버릇 좀
진욱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렇게 마음이 있는 거면, 왜 정은이한테 솔직하게 말 안 해?”“겁나는 거지, 재석아? 말 꺼냈다가 거절이라도 당하면... 그땐 친구로도 남을 수 없을까 봐, 무서운 거잖아.”진욱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재석을 똑바로 바라봤다.“그건 너답지 않아. 내가 아는 재석이는, 망설이지 않고 결정하는 사람이었어. 결과가 불확실하다고 물러서는 사람 아니었잖아.”“정은이가 ‘지금은 연애 생각 없다’고 했지? 중요한 건 ‘지금은’이라는 거야. 사람 마음은 바뀌는 거고, 그때 거절했다고 지금도 똑같을 거란 보장은 없어. 알겠냐?”재석은 말없이 진욱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 말이 생각보다 깊게 박혔다. ‘지금도 똑같을까? 아니, 혹시... 지금은 조금 다를 수도 있는 걸까...’진욱은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야, 진심으로 말하는 건데, 너 계속 질질 끌면, 정은이 뺏긴다. 그리고 뺏기고 나서 울어봤자, 소용없을 거야.”“우리 정은이 인기 많은 거 너도 알잖아. 예전에도 정은이 두고 싸운 애들 있었잖아. 그리고 오늘 그 남자 봤지? 얼굴 잘생겼지, 젊지, 에너지 넘치지, 옷차림 보니까 집도 잘 사는 거 같던데?”재석은 이런 말을 아주 듣기 싫었다.“닥쳐.”진욱도 더 이상 말하기 싫었다. “칫. 드디어 위기감이 좀 드나?”‘그래, 긴장 좀 해라. 맨날 냉정한 척만 하지 말고... 이번엔 너도 좀 불안해져 봐야지.’...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집에 바래다준 뒤, 약을 가정부에게 전달하며, 복용 방법까지 하나하나 직접 설명했다. 봉수진은 저녁까지 먹고 가라며 붙잡았지만, 정은은 이미 서준, 민지와의 약속이 있었다.“외할머니, 며칠 안에 다시 올게요. 오늘은 친구들이랑 약속이 있어서요.”“그래그래, 알았어. 젊을 땐 많이 만나고 다녀야지.”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숙였고, 곧 차에 올랐다.약속 장소인 레스토랑에 도착했을 땐, 서준과 민지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테이블 위에
은혁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그러게요... 나야 뭐, 그랬으면 좋겠지만...”하지만 정은의 태도는 그리 확신을 줄 만큼의 호감은 아니었다.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분명히 좋아한다는 표시도 없는 애매한 선이 보이는 듯했다.‘그래서 더 미치겠어. 기대도 못 하고,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고... 이러니까 계속 마음이 붕 떠 있잖아...’그렇게 속으로 앓고 있었지만, 정은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봉수진의 약에 모든 관심을 쏟고 있었다.VIP 약국답게, 일 처리는 정말 빨랐다. 정성스럽게 달인 약이 곧바로 팩 단위로 나뉘어 밀봉되었고, 음용 방법까지 깔끔하게 안내되었다.냉장 보관 후, 따뜻한 물에 데워 마시면 된다는 안내였는데, 이 정도면 환자도 거부감 없이 약을 먹을 수 있을 것이었다. 약을 다 받은 후, 약 한 시간쯤 지나 두 사람은 병원을 나섰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은의 전화가 울렸다.“여보세요? 외할머니? 네, 약 다 받아놨어요.”“병원에서 달여줬어요. 네, 거기 계세요. 지금 바로 갈게요.”전화를 끊은 정은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은혁을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오늘 고마웠어요. 외할머니 모시러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아, 어... 그래요! 잘 가요!”은혁은 여자의 뒷모습이 멀어질 때까지 멍하니 서 있었다.심지어 여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후에도 한참을 그렇게 바라본 후에야 아쉬움 가득한 시선을 거두었다.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고, 화면엔 ‘황기' 두 글자가 떴다.“여보세요?”[야 이놈아! 도시락 던져놓고 도망가듯 나가버리면 어떡해?! 말도 못 붙였잖아! 뭐가 그렇게 급해? 뭐가 외할아버지보다 중요한 거냐고?!]“죄송해요... 헤헤.”황기는 순간 당황했다. ‘얘 지금 뭐야? 미쳤어? 웃음은 왜 이렇게 정직하게 새어 나오는 건데...?’...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태우고 병원을 나서는 중이었다. 바로 그때, 재석은 약을 수령하고 외래 진료실 앞 벤치에 앉아 있었다.
정은도 여기서 재석을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선배님, 병원엔 무슨 일로 오셨어요?”재석은 그제야 시선을 거둬들였다. 눈길이 정은에게 닿는 순간, 표정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난...”“날 데려다주러 온 거야.” 그 순간, 전진욱이 배를 감싸 쥐며 천천히 다가왔고, 재석 대신 대답을 건넸다.정은은 진욱을 바라보다가 눈이 살짝 커졌다. “교수님, 어디 아프세요?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요.”“하... 뭘 잘못 먹었는지, 아침부터 배탈이 나서... 약도 안 듣고... 이 사람이 막 끌고 오더라니까... 검사라도 받아보라고.”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하셨어요. 괜히 방치하다가 더 심해질 수도 있잖아요. 미리 체크하면 마음도 편하고요.”“어우, 너희 둘 미리 맞췄냐? 말이 어쩜 그렇게 똑같냐?” 진욱이 짐짓 장난스러운 말투로 투덜댔다.정은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재석을 바라봤다. “그랬어요?”재석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눈빛 속 어딘가 알 수 없는 감정이 일렁였다. ‘저 말투, 저 표정... 나만 아는 게 아닐 텐데...’“정은 씨, 이제 가야죠.” 그때, 은혁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아, 네.” 정은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희 먼저 갈게요.”그렇게 말한 후, 은혁과 나란히 병원 복도를 걸어 나갔다.재석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두 사람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눈빛 속 감정은 복잡하고도 묘했다. ‘뭔데, 저 둘은 저렇게 자연스러워...’“재석아? 야, 재석아!”진욱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재석은 고개를 돌렸지만, 눈빛 속 싸늘함은 여전했다. 진욱은 그 눈빛에 소름이 돋아 어깨를 움찔거렸다.“너... 왜 그래?”“방금 정은이가 ‘저희’라고 했어.”“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재석을 바라봤다. 몇 초간 멍하던 그는 그제야 이해가 된 듯 말했다. “아... 그 ‘저희’? 그게 뭐 어때서? 같이 왔으니까 ‘저희’지. 그럼
얼마 지나지 않아 황 원장은 처방전을 프린트해서 정은에게 건넸다.“수고 많으셨습니다, 원장님.”정은이 공손히 인사하자 황 원장은 손을 휘저었다.“아이구, 무슨... 이 아가씨는 인사도 참 반듯하게 잘하네요. 말도 예쁘게 하고, 얼굴도 예쁘고. 이런 손녀가 있으면, 어디 내놔도 자랑이겠네요.”봉수진은 바로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럼요. 우리 손녀는 어디 하나 빠지는 데가 없어요.”황 원장은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장난스럽게 물었다.“이렇게 예쁜 아가씨한테 남자 친구가 없을 리 없는데? 그렇죠?”봉수진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없어요! 보통 남자애들은 우리 정은이랑 안 어울려요.”“허허, 그래도 우리 손자 정도면 꽤 괜찮은데...?”황 원장이 살짝 떠보자 봉수진은 손사래를 쳤다.“아이구, 그 얘긴 그만해요. 정은이 아직은 시집 안 보낼 거예요. 지금이 제일 곁에 두기 좋을 때라니까요.”‘아이고, 또 시작이다...’정은은 속으로 헛웃음 치며 처방전을 가방에 쏙 넣고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났다.“저, 약 지으러 먼저 다녀올게요!”...진료실 문을 나서는 순간, 정은은 누군가와 부딪혔다.“아, 죄송해요!”고개를 돌려 상대방을 본 순간 정은의 걸음이 멈췄다.“은혁 씨?”은혁은 보온 도시락 통을 들고 서 있었다.“정은 씨! 또 보네요. 우리 진짜 인연인가 봐요? 하하...”“여긴... 병원인데? 누가 입원하셨어요?”정은이 도시락을 보며 물었다.“아, 아니에요. 저 입원실 온 거 아니고요! 외할아버지가 이 병원 의사세요. 오늘 외래 당번이라 저희 어머니가 직접 도시락을 싸주셨는데, 제가 대신 가져다드리러 온 거예요.”“혹시 외할아버지 성함이 황 씨?”“네! 황기 원장님이세요. 한약재 이름에서 따오셨대요, 혹시... 아는 분이세요?”‘어머나, 진짜 인연인가?’정은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오늘 저희 외할머니 진료도 황 원장님한테 받은 거예요.”“정말요? 세상에... 진짜 대박. 어쩐지 자꾸 마주치네요.”은혁은 정은 손에 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