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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2화

Author: 십일
“자, 우리 큰 눈덩이 하나 굴리자.”

말하면서 재석은 이미 소매를 걷어붙이며 당장이라도 시작할 기세였다.

“선배님, 그냥 눈덩이 말고, 우리 눈사람 만들어요! 네?”

재석은 순간 멍해졌다.

“뭐든 다 할 줄 안다면서요? 눈사람 만드는 게 더 재밌잖아요. 아, 이왕이면 좀 더 크게 만들어야겠다...”

정은은 남자의 반응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두 손을 부지런히 움직였다. 조금 전 아이들이 만들던 걸 떠올리며 그대로 따라 하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재석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자 정은은 고개를 들었다.

“선배?”

“눈사람을... 만든다고?”

“맞아요!”

정은의 눈이 반짝였다.

“그래.”

그는 살짝 한숨을 쉬고는 그대로 쪼그려 앉았다.

예상했던 것과는 좀 달랐지만, 그래도 못 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 결과.

정은은 눈앞에 놓인, 어딘가 이상한 두 덩어리의 눈덩이를 바라보았다. 간신히 위아래로 쌓긴 했지만, 둥글지도 네모지지도 않은 데다, 위가 더 크고 아래가 더 작았다.

얼굴은커녕 전체적인 형태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이게 대체 뭐지?’

억지로라도 무언가라고 해야 한다면 그냥 ‘두 눈덩어리’라고 하는 게 맞을 듯했다.

정은은 조심스레 재석을 쳐다보았다.

딱히 할 말은 없었다.

재석은 민망한 듯 코를 긁적이며 헛기침했다.

“그게... 아무래도 오늘따라 컨디션이 좀 안 좋은가 봐.”

“괜찮아요...”

정은은 재석이 더 민망해할까 봐 그렇게 말했지만, 그는 오히려 더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시간도 늦었고 밖도 많이 춥네. 이제 들어갈까요?”

“그래.”

한번 허세를 부리다 평생 창피를 당한 셈이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계단을 올라 각자 집으로 들어갔다.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정은은 2초 정도 침묵했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푸하하하하하하!”

재석에게 미안하지만, 정은은 정말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한편, 재석은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소파에 털썩 앉아 급히 휴대폰을 꺼내 톡을 열었다.

그리고 진욱에게 문자를 보냈다.

[왜 눈사람 만드는 방법을 안 가르쳐줬어? 뭐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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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803화

    [할머니께서 정성스럽게 준비하셨으니, 네가 거절하면 실망하실 거야.]정은은 원래 거절하려 했지만, 현빈이 이렇게 말하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오전 11시 30분, 현빈이 차를 몰고 도착했다.정은은 미리 나와 그를 맞았다.“왜 밖에 나왔어? 나 혼자 들어갈 수 있는데.”“못 들어오잖아요.”정은이 같이 출입 인증 구역을 통과하고 나서야, 현빈은 ‘못 들어온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았다.“출입 통제가 처음 왔을 때보다 더 엄격해진 것 같은데?”커팅식 날에 방문한 적이 있었기에, 현빈은 그때의 실험실과 비교해 보았다.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다시 설정했어요.”“위에서 보안 강화를 요구한 거야?”“그런 것도 있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요.”현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오빠는 바쁘지 않아요? 이렇게 시간 내서 밥까지 챙겨올 시간이 있다니?”“바빠도 와야지. 할머니께서 특별히 맡기신 ‘임무’니까.”“임무요?”두 사람이 생활 구역에 도착할 무렵, 현빈은 보온 가방을 열어 도시락통을 하나씩 꺼냈다.심지어 아직도 따뜻했다.그는 차곡차곡 반찬을 식탁 위에 놓으며, 깨끗한 젓가락과 숟가락도 준비했다.“네가 다 먹을 때까지 옆에서 지켜보는 거.”정은은 식탁을 바라보며 속으로 묵묵히 세어 보았다.반찬만 여섯 가지, 게다가 국까지 있었다. 전부 정은이 좋아하는 음식들이었다.“와, 냄새 정말 좋다...”“할머니께서 요즘 요리책을 보며 연습하셨거든. 몇 년 만에 다시 요리를 하시려니 너무 서투를까 봐 걱정된다나. 연습하실 때 만드신 요리들은 나랑 할아버지가 대신 먹었고.”현빈은 웃으며 말했다.“할아버지도 그러시더라. 우리가 네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고.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매일 할머니께서 만드신 요리를 맛보겠어.”정은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그럴 것까진... 그런데 이건 좀 너무 많은데요.”그녀는 난감한 듯 식탁을 바라보다가 문득 떠올랐다.“오빠, 점심 먹었어요?”현빈은 살짝 멈칫했다.“아직. 너무 늦을까 봐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804화

    재석은 전혀 사양하지 않고 바로 승낙했다.현빈의 눈빛이 갑자기 어두워졌다.“미안해요, 갑자기 생각났네요. 여기에 남은 그릇과 젓가락이 없는데.”“찬장에 일회용 젓가락 있어요.”정은이 일어나며 말했다.“내가 가져올게요.”그렇게 말하고선 곧장 자리를 떴다.재석은 자연스럽게 현빈 맞은편에 앉아, 식탁을 한번 훑어보며 웃었다.“진수성찬이네요. 딱 봐도 아주 맛있는 거 같아요.”현빈도 가볍게 웃었다.“조 교수님, 실험실은 안 바빠요? 이렇게 남의 실험실에 와서 밥 얻어먹을 시간이 다 있다니?”“연말이라 일정이 좀 느슨해서 그리 바쁘지 않아요. 나도 원해서 밥 얻어먹는 게 아니니 뭐 어쩌겠어요? 심 대표님이 워낙 열정적이어서 직접 초대까지 했으니 내가 거절하면 너무 실례잖아요.”현빈은 말문이 막혔다.“그보다 심 대표님은 요즘 연말 연회 준비로 많이 바쁠 텐데? 그런데도 이렇게 여유가 있는 거예요?”“정은이 밥 챙겨주는 거라면 바빠도 시간은 내야죠.”재석은 피식 웃었다. 현빈이 자연스럽게 내뱉은 ‘정은이’라는 호칭에 조금 웃긴 듯했다.현빈은 미간을 좁히며 돌려 말하지 않았다.“조 교수님, 혹시 정은이를 좋아하는 거예요?”비록 질문이었지만, 확신에 찬 어투였다. 이미 모든 걸 꿰뚫어 보고 있다는 듯.재석은 답하지 않고 되물었다.“어떤 입장으로 묻는 거죠? 그냥 남자로서? 아니면 정은이의 오빠로서?”현빈은 뜻밖이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설마, 우리의 관계를 조 교수님한테 말한 거예요?”“덕분에 더 확신이 서네요. 전에 정은이를 데리러 왔을 때, 일부러 나 헷갈리게 하려던 거였죠?”현빈은 부정하지도, 그렇다고 인정하지도 않았다.“확인도 안 하고 착각했으니 누굴 탓하겠어요?”재석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심 대표님, 솔직히 궁금하네요. 정은이와의 관계를 대체 어떻게 생각하는 거죠? 감정을 말하기 힘든 사이? 그래서 애매하게 행동하며 남들로 하여금 오해를 하게 한 거예요?”현빈은 피식 웃으며 입꼬리를 구부렸다.“그래서, 조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805화

    재석이 말했다. “내 사랑은 정정당당해서 숨길 이유가 전혀 없으니 왜 인정하지 못하겠어요?”현빈은 재석의 순수하고 직설적인 눈빛을 바라보며 주먹을 꼭 쥐었다. 처음으로 패배감을 느꼈던 것이다.“정은이는 알고 있어요?”재석은 담담하게 대답했다.“고백을 시도하긴 했지만, 그냥 떠보는 정도였어요. 정은이는 감정을 잠시 뒤로 하고 학업을 우선하겠다고 했거든요.”현빈은 피식 웃었다.“그럼, 차인 거네요?”“아니요.”재석은 현빈의 비웃음을 보고도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덤덤하게 말했다.“정식으로 고백한 게 아니니까요.”현빈의 웃음이 짙어졌다.재석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뭐가 그렇게 웃긴 거죠?”“조 교수님이요.”“그래요?”재석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지금은 기회가 없을지 몰라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 누가 알겠어요. 하지만 심 대표님은... 지금도, 앞으로도 기회가 없을 거예요.”그렇다면 누가 더 우스운 것일까?현빈은 표정이 굳어졌다.“그릇이랑 젓가락 가져왔어요!”정은이 돌아왔다.두 사람은 즉시 입을 다물었다.이 순간만큼은 말하지 않아도 그들은 뭔가 완벽하게 통했다.봉수진이 만든 음식은 넉넉했고, 재석까지 먹어도 충분했다.식사 중 정은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선배님, 부담 갖지 마요. 이건 우리 할머니가 직접 만드신 거예요. 이 소고기 조림도 먹어 봐요, 아, 탕수육도 맛있어요! 이 완자도요! 안에 표고버섯이랑 고기가 들어가 있어요!”재석은 정은이 추천하는 대로 하나하나 맛보았다. 정말 말을 잘 듣는 사람이었다.“소스 맛이 진하면서도 느끼하지 않네. 굉장히 맛있어. 그리고 이 완자는 표고버섯 향이 살아 있고, 전체적으로 살짝 신맛이 도는 것 같은데?”정은은 놀라워했다.“선배님, 미각이 엄청 뛰어나잖아요! 우리 할머니께서 완자를 빚을 때 식초를 조금 넣으시거든요. 그러면 맛이 더 풍부해진대요.”재석이 웃으며 말했다.“다 맛있어. 내가 오늘은 제대로 찾아왔네, 이렇게 맛있는 것을 놓치지 않았으니까.”현빈은 두 사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806화

    “본보기?”“네.”재석은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듣자하니 뭔가 사연이 있는 것 같은데?”“사연이 아니라 사고예요.”“한번 들어볼 수 있을까?”“비밀은 아니에요. 사실... 예전에 재검사를 생략했다가 숫자 하나를 잘못 입력한 적이 있거든요. 그 데이터를 담당한 사람이 민지였는데, 그 사실을 알게 됐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지 뭐예요.”재석은 정은의 반짝이는 눈빛에 자연스레 빠져들며 궁금해했다.“그래서? 후에 어떻게 됐어?”“서준이 바로 데이터를 찾아서 밤새 수정했어요. 이틀 밤을 꼬박 새우고 완벽하게 고친 후에야 다시 업로드했죠.”민지는 평소 다이어트를 해도 조금 빠졌다가 금방 요요가 오곤 했는데, 그 이틀 동안 스트레스 때문에 3kg이나 빠지고 머리카락도 한 움큼 빠졌다.“그런데 서준이가, 그렇게 엄격한 사람이 민지한테 사흘이나 휴가를 줬다니까요. 매일 아침 운동하라고 잔소리하던 서준이가요. 아, 선배님,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로 왔어요?”재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머니에서 USB를 꺼냈다.“지난번에 네가 부탁한 자료들 다 찾았어.”정은의 눈이 반짝였다.“벌써요? 이렇게 빨리 찾은 거예요?”“해외에 있는 친구들한테 부탁했어. 국내에선 구하기 어려운 자료들도 외국에선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거든.”“정말 고마워요. 또 신세를 졌네요.”“괜찮아. 어차피 갚을 필요도 없는데 뭘.”“그래도 그냥 받을 순 없죠.”재석은 웃으며 말했다.“아까 밥 사줬잖아? 그것도 할머니가 직접 해주신 집밥. 따지고 보면 내가 더 이득 본 거야.”“참, 이제 실험실에 돌아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재석은 고개를 저었다.“아니, 다들 휴가를 냈거든.”‘아, 어쩐지...’그렇게 재석은 오후 내내 실험실에 남았다.정은이 실험을 하는 동안, 그는 노트북을 꺼내 논문을 쓰기 시작했다.조용한 실험실에서 두 사람은 각자의 일에 집중했지만, 같은 공간 속에서 함께하는 느낌이 들었다.그러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흘러 5시가 다 되어갔다.“이제 집에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807화

    봉수진은 서둘러 문을 열었지만, 정은뿐만 아니라 곁에 잘생기고 기품 있는 젊은 남자가 함께 서 있는 것을 보았다.두 어르신은 순간 멈칫하다가 곧바로 눈을 마주쳤다.봉수진은 재석을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미소를 띠며 정은을 바라보았다.“정은아, 이분은 누구니? 소개 안 해줄 거야?”정은이 입을 열기도 전에 재석이 먼저 말했다.“할아버지, 할머니, 안녕하세요. 저는 조재석이라고, 정은이 친구입니다.”두 노인과 시선을 마주하며 재석은 침착하고 차분하게 말했다.이춘재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물었다.“조 씨라고? 혹시... 조기봉 조 회장의 아들인가?”“네.” 재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께서 귀국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원래 제 아버지도 찾아뵙고 싶어 하셨는데, 제가 먼저 와버렸네요.”“내가 잘못 기억하지 않았다면, 조씨 가문은 아들이 셋이라던데, 자네는 몇 째지?”“셋째입니다. 위로 형이 두 명 있습니다.”“혹시 연구직에 종사한다는 그 아들인가?”“네.” 재석은 눈가에 미소를 머금었다.봉수진은 감탄했다.“어머, 그럼 우리 정은이랑 같은 분야네?”이춘재는 피식 웃으며 말을 받았다.“그렇지 않으면 두 사람 어떻게 만났겠어?”봉수진은 재석이 유명한 물리학자라는 걸 듣고 더욱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공부 잘하는 아이에게 어르신들의 편애가 쏠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재석아, 늦은 시간까지 우리 정은이를 바래다줘서 정말 고맙군. 그냥 가지 말고 밥 먹고 가렴.”재석은 그냥 이렇게 찾아왔으니 인사라도 드리는 게 예의일 것 같아 따라 들어온 것뿐이었다.가볍게 인사만 하고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예상치 못하게 저녁 식사까지 권유받았다.“괜찮을까요? 가족끼리 식사하시는데 제가 방해가 되는 건 아니겠죠?”“아유, 방해는 무슨!” 봉수진은 손을 휘휘 내저으며 말했다.“이렇게 추운 날씨에, 게다가 어두운 밤길을 혼자 다니게 하는게 너무 걱정이었는데, 자네가 데려다줘서 정말 마음이 놓이네. 그리고 말이야, 우리 정은이가 친구를 집에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808화

    이춘재도 따라 들어와서 물었다.“도와줄 거 있어?”봉수진은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도와주긴 뭘 도와줘요? 당신이 언제 주방일을 해봤다고?”“허허... 맞는 말이긴 한데, 그래도 같이 있어줄 순 있잖아?”“당산, 내가 보기에 재석은 정말 괜찮은 젊은이에요. 외모도 반반하고 예의도 바르지. 집안도 번듯하고, 무엇보다 가풍이 좋잖아요. 조씨 가문은 명문 가문이지 않나요? 괜한 소문 하나 안 나온 집안이라고요.”이춘재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갑자기 그 얘긴 왜 해? 그런데 뭐, 재석은 꽤 괜찮긴 하지.”봉수진은 거실 쪽을 힐끗 보았다. 눈이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 젊은이가 예의 바르고 겸손하며, 가정교육을 제대로 받았다는 건 한눈에 알 수 있었다.“우리 정은이랑...”“야,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이미 친구라고 했잖아. 대체 뭘 상상하는 거야?”“내가 뭘 상상했다고 그래요? 친구든 뭐든, 우리 정은이의 곁에 있으려면 우리가 제대로 봐야 하지 않겠어요?”“아직도 정은이가 어린애인 줄 아나 본데, 젊은 사람들이 친구 사귀는 건 그들의 자유야. 우리가 굳이 끼어들 필요 없어.”“나도 알아요. 간섭하려는 건 아니지만, 그냥... 객관적으로 재석이라는 아이를 평가해보자는 거죠.”“그래, 우리끼리 조용히 얘기하는 건 괜찮지만, 괜히 정은이 앞에서 티 내지 마. 원래 아무 일도 아닌 걸 가지고 당신이 자꾸 그러면 애들만 민망해지잖아.”봉수진은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내가 그렇게 눈치 없는 사람처럼 보여요?”이춘재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아니, 아니야. 그건 절대 아니지.”“그나저나, 당신 눈치챘어요? 현빈이 기분 별로 안 좋은 거 같은데요?”“그래?” 이춘재는 눈썹을 찡그렸다.“무슨 일 있나?”“들어오자마자 말도 없이 일부터 하잖아요. 기분이 안 좋은 게 분명해요.”“그건 뭐, 회사에 신경 쓰이는 일이라도 있겠지. 그게 뭐가 어때서? 남자는 원래 이 나이엔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 거야. 작은 문제 하나쯤 있는 건 당연한 거고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809화

    정은은 줄곧 바쁘게 지내다가 섣달 그믐날이 사흘 남았을 때에야 비로소 실험실에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왜냐하면 소진헌과 이미숙이 L시에서 왔기 때문이다.부부는 오래전부터 올해 J시에서 이춘재, 봉수진과 함께 설을 보내기로 정해놓았다.소진헌이 부모님과 두 형에게 어떻게 이야기했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결과적으로 그는 이미숙을 따라 J시에 오게 되었다.원래 계획대로라면 이주 전에 도착했어야 했지만, 출발 직전에 이미숙이 갑자기 영감을 받아 일주일간 자신을 방에 가두어 글을 썼고, 이어서 G시에서 열린 사인회에 참석하느라 일정이 계속 미뤄졌다.다음 날 아침, 정은은 차를 몰고 고속열차역으로 향했다.설이라 역 안은 인파로 북적거렸고, 10여 분을 기다린 끝에야 소진헌과 이미숙이 사람들 사이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아빠, 엄마!”정은은 펄쩍 뛰며 손을 흔들었다.이미숙은 눈에 띄는 빨간 코트를 입고 있었고, 키도 크고 세련된 분위기가 풍겨서 군중 속에서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그 옆에 선 소진헌은 그녀보다 키가 좀 더 컸고, 여행 가방을 밀며 한 손에는 크고 작은 짐가방을 한가득 들고 있었다.반면 이미숙은 작은 핸드백 하나만 들고 있어서, 마치 우아하게 휴가를 떠나는 귀부인 같았다.언뜻 보면 마치 어느 집안의 아가씨와 수행하는 집사처럼 보이기도 했다.하지만 현실은 이랬다.“나도 좀 들게요!” 이미숙은 몇 번째인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그러나 예상대로 소진헌은 몸을 재빨리 틀며 피했다.“됐어! 이 정도 짐쯤이야 나 혼자 들 수 있어. 당신 그냥 편하게 가.”말하면서 그는 일부러 짐이 가벼운 척 들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안 돼, 나도 들 거예요.”“안 돼, 그렇게 하게 할 수는 없어.”“싫어요...”“나도 싫어...”정은이 가까이 다가갈 때, 두 사람은 서로 짐을 들겠다고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저... 그럼 제가 좀 들어드릴까요?”그러자 두 사람 모두 만족스러운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810화

    소진헌은 얼버무리며 대충 넘어갔다.분명히 자세히 말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정은도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이씨 가문 본가에서.이춘재와 봉수진은 딸과 사위가 온다는 소식에 일주일 전부터 대청소를 하며 집 안팎을 말끔히 정리했다.이미숙의 방도 새로 꾸미고, 1인용 침대를 2인용으로 바꿨다. 소진헌이 식물을 다루기 좋아한다는 걸 알고, 온실 옆에 작은 공간을 마련해 크고 작은 화분과 다양한 흙까지 준비해 두었다.그뿐만 아니라, 설날 장식도 빠짐없이 걸어 집 안 곳곳에 설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이른 아침, 이춘재와 봉수진은 일부러 새로 맞춘 한복을 차려입고 활기찬 모습으로 딸과 사위를 맞을 준비를 했다.“몇 시죠?” 봉수진이 물었다.이춘재는 손목시계를 보며 답했다. “금방 11시 넘었어.”“그럼 곧 도착하겠네요. 10시에 떠나는 열차 타면 시간이 딱 맞을 거예요. 슬리퍼는 준비됐지?”가정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다 준비해 두었습니다.”“차는 식지 않았어?” 이춘재는 걱정스레 물었다.“아뇨, 아직 따뜻합니다.”“따뜻한 걸로는 부족하지! 차는 펄펄 끓는 맛으로 마셔야 돼! 그거 버리고 내가 이따가 새로 하나 우려야지.”“네.”“그리고.” 봉수진은 문득 떠올린 듯 말했다. “과일은 미리 썰지 말고, 도착한 다음 깎아. 그래야 싱싱한 맛 볼 수 있어.”“알겠습니다.”“거실은 깨끗하게 정리됐지?”“화장실은 오늘 아침에 다시 한번 청소했어?”“주방은 준비 다 됐고?”이렇게 두 노인은 준비 사항을 하나하나 점검하며 바쁘게 돌아쳤다.그리고 마침내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드디어 왔네!”현관 앞에 선 두 사람은 문을 열었다.딸과 사위가 나란히 들어섰고, 그 뒤로 손녀가 따라 들어왔다.두 노인은 이 순간을 수십 년이나 기다려 왔다.그리고 이제야 그 꿈이 이뤄졌다....점심은 봉수진이 정성껏 차린 음식들로 가득했다.전부 소진헌, 이미숙, 그리고 정은이 좋아하는 음식들로 준비되었다.“미숙아, 이것 좀 먹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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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54화

    “언니, 이건 굳이 우리 의견 물을 필요도 없지 않아요? 언니가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가는 거죠. 저희한텐 뭐든 시키기만 하세요. 무조건 따라갈게요!”민지가 단호하게 말하자, 서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맞아요, 저흰 누나 믿고 가는 거예요. 결정은 누나가 해요.”정은은 그 말에 잠시 멍해졌다가,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너희들... 나 그렇게 믿어도 돼? 나도 가끔 실수하거든?”민지는 마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정은 언니가 실수했다면, 그건 100% 저랑 서준 오빠가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뜻이에요.”“그건 좀 과장이지만...”‘그래도... 이런 믿음을 받는다는 게 참 따뜻하네.’세 사람은 그렇게 식사를 마쳤다.계산은 서준이 맡았고, 정은과 민지는 먼저 주차장으로 향했다. “언니, 먼저 가요. 전 서준이 데리러 갈게요.”“응? 굳이?”“우리 집이랑 방향이 같잖아요. 서준이는 차도 없으니까, 그냥 태워다 주는 거죠, 헤헤.”“그래, 알겠어. 그럼 조심히 가. 운전 천천히 하고.”“네. 언니도 잘 들어가요!”...두 ‘파트너’와 방향을 맞춘 정은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자료 조사부터 시작해 ‘신소재 최적화 계획안’을 정리하고, 모든 내용이 빠짐없이 정리됐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확인했다.벌써 밤 10시. 정은은 핸드폰을 들고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냈다.[장은혁 씨, 시간 돼요? 상의드릴 게 하나 있어요.]그 시각, 은혁은 거실 소파에 앉아 어머니인 황희숙 여사의 ‘진실 공방’에 시달리고 있었다.“너 외할아버지한테 전화 왔어. 오늘 도시락 들고 회사 갔다며? 근데 그냥 말도 없이 두고 사라졌다고 난리야. 게다가 누가 너랑 어떤 여자가 같이 있는 걸 병원 약국에서 봤다던데? 솔직히 말해봐. 너, 여자 친구 생겼지?”은혁은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아니 외할아버지는 왜 또 엄마한테 바로 전화해요? 진짜 너무하신다니까요...”“이 자식 봐라, 말버릇 좀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53화

    진욱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렇게 마음이 있는 거면, 왜 정은이한테 솔직하게 말 안 해?”“겁나는 거지, 재석아? 말 꺼냈다가 거절이라도 당하면... 그땐 친구로도 남을 수 없을까 봐, 무서운 거잖아.”진욱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재석을 똑바로 바라봤다.“그건 너답지 않아. 내가 아는 재석이는, 망설이지 않고 결정하는 사람이었어. 결과가 불확실하다고 물러서는 사람 아니었잖아.”“정은이가 ‘지금은 연애 생각 없다’고 했지? 중요한 건 ‘지금은’이라는 거야. 사람 마음은 바뀌는 거고, 그때 거절했다고 지금도 똑같을 거란 보장은 없어. 알겠냐?”재석은 말없이 진욱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 말이 생각보다 깊게 박혔다. ‘지금도 똑같을까? 아니, 혹시... 지금은 조금 다를 수도 있는 걸까...’진욱은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야, 진심으로 말하는 건데, 너 계속 질질 끌면, 정은이 뺏긴다. 그리고 뺏기고 나서 울어봤자, 소용없을 거야.”“우리 정은이 인기 많은 거 너도 알잖아. 예전에도 정은이 두고 싸운 애들 있었잖아. 그리고 오늘 그 남자 봤지? 얼굴 잘생겼지, 젊지, 에너지 넘치지, 옷차림 보니까 집도 잘 사는 거 같던데?”재석은 이런 말을 아주 듣기 싫었다.“닥쳐.”진욱도 더 이상 말하기 싫었다. “칫. 드디어 위기감이 좀 드나?”‘그래, 긴장 좀 해라. 맨날 냉정한 척만 하지 말고... 이번엔 너도 좀 불안해져 봐야지.’...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집에 바래다준 뒤, 약을 가정부에게 전달하며, 복용 방법까지 하나하나 직접 설명했다. 봉수진은 저녁까지 먹고 가라며 붙잡았지만, 정은은 이미 서준, 민지와의 약속이 있었다.“외할머니, 며칠 안에 다시 올게요. 오늘은 친구들이랑 약속이 있어서요.”“그래그래, 알았어. 젊을 땐 많이 만나고 다녀야지.”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숙였고, 곧 차에 올랐다.약속 장소인 레스토랑에 도착했을 땐, 서준과 민지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테이블 위에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52화

    은혁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그러게요... 나야 뭐, 그랬으면 좋겠지만...”하지만 정은의 태도는 그리 확신을 줄 만큼의 호감은 아니었다.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분명히 좋아한다는 표시도 없는 애매한 선이 보이는 듯했다.‘그래서 더 미치겠어. 기대도 못 하고,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고... 이러니까 계속 마음이 붕 떠 있잖아...’그렇게 속으로 앓고 있었지만, 정은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봉수진의 약에 모든 관심을 쏟고 있었다.VIP 약국답게, 일 처리는 정말 빨랐다. 정성스럽게 달인 약이 곧바로 팩 단위로 나뉘어 밀봉되었고, 음용 방법까지 깔끔하게 안내되었다.냉장 보관 후, 따뜻한 물에 데워 마시면 된다는 안내였는데, 이 정도면 환자도 거부감 없이 약을 먹을 수 있을 것이었다. 약을 다 받은 후, 약 한 시간쯤 지나 두 사람은 병원을 나섰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은의 전화가 울렸다.“여보세요? 외할머니? 네, 약 다 받아놨어요.”“병원에서 달여줬어요. 네, 거기 계세요. 지금 바로 갈게요.”전화를 끊은 정은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은혁을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오늘 고마웠어요. 외할머니 모시러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아, 어... 그래요! 잘 가요!”은혁은 여자의 뒷모습이 멀어질 때까지 멍하니 서 있었다.심지어 여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후에도 한참을 그렇게 바라본 후에야 아쉬움 가득한 시선을 거두었다.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고, 화면엔 ‘황기' 두 글자가 떴다.“여보세요?”[야 이놈아! 도시락 던져놓고 도망가듯 나가버리면 어떡해?! 말도 못 붙였잖아! 뭐가 그렇게 급해? 뭐가 외할아버지보다 중요한 거냐고?!]“죄송해요... 헤헤.”황기는 순간 당황했다. ‘얘 지금 뭐야? 미쳤어? 웃음은 왜 이렇게 정직하게 새어 나오는 건데...?’...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태우고 병원을 나서는 중이었다. 바로 그때, 재석은 약을 수령하고 외래 진료실 앞 벤치에 앉아 있었다.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51화

    정은도 여기서 재석을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선배님, 병원엔 무슨 일로 오셨어요?”재석은 그제야 시선을 거둬들였다. 눈길이 정은에게 닿는 순간, 표정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난...”“날 데려다주러 온 거야.” 그 순간, 전진욱이 배를 감싸 쥐며 천천히 다가왔고, 재석 대신 대답을 건넸다.정은은 진욱을 바라보다가 눈이 살짝 커졌다. “교수님, 어디 아프세요?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요.”“하... 뭘 잘못 먹었는지, 아침부터 배탈이 나서... 약도 안 듣고... 이 사람이 막 끌고 오더라니까... 검사라도 받아보라고.”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하셨어요. 괜히 방치하다가 더 심해질 수도 있잖아요. 미리 체크하면 마음도 편하고요.”“어우, 너희 둘 미리 맞췄냐? 말이 어쩜 그렇게 똑같냐?” 진욱이 짐짓 장난스러운 말투로 투덜댔다.정은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재석을 바라봤다. “그랬어요?”재석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눈빛 속 어딘가 알 수 없는 감정이 일렁였다. ‘저 말투, 저 표정... 나만 아는 게 아닐 텐데...’“정은 씨, 이제 가야죠.” 그때, 은혁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아, 네.” 정은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희 먼저 갈게요.”그렇게 말한 후, 은혁과 나란히 병원 복도를 걸어 나갔다.재석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두 사람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눈빛 속 감정은 복잡하고도 묘했다. ‘뭔데, 저 둘은 저렇게 자연스러워...’“재석아? 야, 재석아!”진욱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재석은 고개를 돌렸지만, 눈빛 속 싸늘함은 여전했다. 진욱은 그 눈빛에 소름이 돋아 어깨를 움찔거렸다.“너... 왜 그래?”“방금 정은이가 ‘저희’라고 했어.”“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재석을 바라봤다. 몇 초간 멍하던 그는 그제야 이해가 된 듯 말했다. “아... 그 ‘저희’? 그게 뭐 어때서? 같이 왔으니까 ‘저희’지. 그럼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50화

    얼마 지나지 않아 황 원장은 처방전을 프린트해서 정은에게 건넸다.“수고 많으셨습니다, 원장님.”정은이 공손히 인사하자 황 원장은 손을 휘저었다.“아이구, 무슨... 이 아가씨는 인사도 참 반듯하게 잘하네요. 말도 예쁘게 하고, 얼굴도 예쁘고. 이런 손녀가 있으면, 어디 내놔도 자랑이겠네요.”봉수진은 바로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럼요. 우리 손녀는 어디 하나 빠지는 데가 없어요.”황 원장은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장난스럽게 물었다.“이렇게 예쁜 아가씨한테 남자 친구가 없을 리 없는데? 그렇죠?”봉수진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없어요! 보통 남자애들은 우리 정은이랑 안 어울려요.”“허허, 그래도 우리 손자 정도면 꽤 괜찮은데...?”황 원장이 살짝 떠보자 봉수진은 손사래를 쳤다.“아이구, 그 얘긴 그만해요. 정은이 아직은 시집 안 보낼 거예요. 지금이 제일 곁에 두기 좋을 때라니까요.”‘아이고, 또 시작이다...’정은은 속으로 헛웃음 치며 처방전을 가방에 쏙 넣고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났다.“저, 약 지으러 먼저 다녀올게요!”...진료실 문을 나서는 순간, 정은은 누군가와 부딪혔다.“아, 죄송해요!”고개를 돌려 상대방을 본 순간 정은의 걸음이 멈췄다.“은혁 씨?”은혁은 보온 도시락 통을 들고 서 있었다.“정은 씨! 또 보네요. 우리 진짜 인연인가 봐요? 하하...”“여긴... 병원인데? 누가 입원하셨어요?”정은이 도시락을 보며 물었다.“아, 아니에요. 저 입원실 온 거 아니고요! 외할아버지가 이 병원 의사세요. 오늘 외래 당번이라 저희 어머니가 직접 도시락을 싸주셨는데, 제가 대신 가져다드리러 온 거예요.”“혹시 외할아버지 성함이 황 씨?”“네! 황기 원장님이세요. 한약재 이름에서 따오셨대요, 혹시... 아는 분이세요?”‘어머나, 진짜 인연인가?’정은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오늘 저희 외할머니 진료도 황 원장님한테 받은 거예요.”“정말요? 세상에... 진짜 대박. 어쩐지 자꾸 마주치네요.”은혁은 정은 손에 들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49화

    아침 햇살이 창문 틈 사이로 스며들었다. 부드럽게 퍼진 빛이 정은의 잠든 옆얼굴을 은은하게 감쌌다.살랑이는 바람에 커튼 끝자락이 가볍게 흔들렸고, 고요한 침실에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여보세요? 외할아버지?”이춘재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아직 자고 있었구나? 그럼 내가 이따가 다시...]“아뇨, 괜찮아요. 이제 깼어요. 요즘 집에서 쉬고 있어서요, 실험실을 좀 멈췄거든요. 왜요, 무슨 일 있으세요?”전화기 너머에서 이춘재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어젯밤에... 내 친구 하나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단다. 병원에서 못 버티고... 그냥 그렇게.]‘헉...’[오늘 아침에 그 집 식구한테 연락이 왔어. 장례 준비도 해야 하고, 남은 가족들도 어찌할 바를 모르니 내게 좀 도와달라고 하더구나. 그 친구는 진짜, 훅 떠났지만 남겨진 식구들은... 참 마음이 아프지.]이춘재는 말을 멈췄고, 한참 후에 덧붙였다.[원래는 오늘 네 외할머니가 병원 가는 날이라 내가 같이 가기로 했는데... 현빈이는 출장이란다. 생각해 보니까 내가 부탁할 사람은 너밖에 없더라.]정은은 웃으며 말했다.“외할아버지, 그게 어떻게 부탁이에요. 당연히 제가 가야죠. 외할머니랑 병원 가는 건 제 몫이에요. 외할아버지는 마음 놓고 다녀오세요.”[그래, 그래. 고맙다, 정은아.]...오전 9시. 정은은 외할머니댁 앞에 도착했다. 봉수진은 이미 외출 준비를 마치고 작은 가방을 손에 든 채 문 앞에 서 있었다.그 옆엔 이춘재가 말없이 함께 서 있었고, 두 사람은 뭔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당신 진짜 왜 그래요? 정은이는 실험실에서도 바쁜 애인데, 이런 일까지 시켜서 되겠어요? 괜히 애 걱정하게 만들고, 또 미안하게 만들고...”봉수진의 잔소리가 이어졌고, 이춘재는 구겨진 어깨로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맞아, 당신 말이 다 맞아. 근데 정은이가 요즘 쉰다길래... 그냥 부탁한 거지 뭐...”“쉰다고 병원까지 같이 가야 해요? 그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48화

    수민은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손을 올려 한 대 갈겼다.짝!동건은 피하지 못하고 정통으로 이마를 맞았다.“야! 미쳤어?!”수민은 인상을 팍 구기며 외쳤다.“너 귀신이야 뭐야? 소리도 없이 뒤에서 들이대고... 맞을만 하니까 맞은 거지.”“뭐? 지금 그딴 태도를 보이는 이유가 뭐야? 딴 남자 생각하다가 놀란 거 아냐? 장은혁? 그 잘난 척하는 새끼?”수민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맞아. 잘생겼지, 말도 잘해, 심지어 마술도 하지. 매력 넘치는데?”“푸... 마술? 그건 여자들 꼬시려고 배운 거지. 허세로 가득 찬 새끼야.”“오히려 더 좋지 뭐... 허세라도, 적어도 표현은 하잖아. 넌 뭐 있어?”동건은 이를 악물었다.“그런 애가 뭐가 그렇게 좋다고. 딱 봐도 겉멋만 잔뜩 든 애송이잖아.”“내가 좋으면 된 거지. 근데... 잠깐만. 너, 여기 어떻게 들어왔어?”수민의 눈빛이 순간 날카로워졌다.“그냥.”“고동건!!!”“야, 소리 좀 그만 질러. 힘 좀 아끼라고. 이따가 쓸 데가 있을 테니까.” “꺼져.”수민은 문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동건은 한 발도 움직이지 않았다.대신, 그녀를 천천히 바라보다가 작게 웃었다.“너 요즘... 왜 이렇게 자꾸 도망치는데? 솔직히 말해봐. 내가 그리웠지?”“웃기지 마.”“아닌데... 지금도 눈 흔들리는 거 보이거든.”수민은 숨을 고르며 조용히 말했다.잠시 후, 그녀는 동건에게 그대로 안겨 침대 위로 내던져졌다.동건은 셔츠 단추를 풀며 천천히 그녀 쪽으로 다가갔다.“한다고 했잖아. 내가 농담하는 사람으로 보여?”수민은 몸을 살짝 일으키며, 도발적인 미소를 지었다.“너 하나로 되겠어?”“해보면 알겠지.”밤은 길었고, 봄기운처럼 뜨거웠다.누군가는 그 열기를 마음껏 즐겼고, 누군가는 답답한 숨을 눌러 삼켰다....불 꺼진 침실. 어둠 속,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창문 너머로 달빛만이 희미하게 커튼 틈 사이로 비스듬히 들어왔다.재석은 거실 창 앞에 서 있었다. 등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47화

    부재중 10통 중 9통은 고동건, 그리고 나머지 1통...‘어? 우리 조재석 교수님?’수민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톡 알림도 확인했다.읽지 않은 메시지 42개.대부분은 역시나 고동건.수민은 손가락으로 휙휙 넘기며 대충 읽었다.[야, 또 남자랑 밥 처먹냐?][여사친 모임엔 남자 안 끼운다며?][그 장은혁, 꽃미남 새끼 남자 아니냐?][조수민 너 진짜 표리부동이다?] [답장 안 해?][전화도 안 받아? 10초 준다!][기다려, 오늘 밤에 너 좀 혼나야겠어!!]수민은 손가락으로 한 번에 쭉 밀어내고, 심드렁하게 한 마디만 보냈다.[꺼져!!!]10초도 안 돼서 동건한테서 바로 또 메시지가 왔다.[답장할 줄은 몰랐네...][넌 진짜 사람 마음 찢어놓고 아무렇지 않지?] [아냐, 넌 원래 마음이 없지.][...]수민은 무표정하게 창을 닫았다. ‘이 인간은 진심으로 질린다...’그리고 재석과의 메시지함을 열었다.단 두 줄.[정은이랑 어디서 밥 먹었어?][장은혁도 함께였어?]수민의 눈썹이 절로 올라갔다.‘어라...?’‘우리 조재석 교수님이? 이런 문장을? 이렇게 빠르게? 이렇게 직접적으로?’‘우리 조 교수님... 평소에 ‘응’ 하나 치는 데도 심장 박동 조절하듯 하던 사람이었는데...’게다가 이 두 문장, 보통 사람이 보냈다면 ‘그냥 궁금했나 보다’ 하고 넘겼을 거다.하지만, 그게 ‘조재석’이라는 이름으로 오면 느낌이 전혀 달랐다.‘이거... 약간... 삐쳤다고 읽어야 하나?’수민의 눈이 반짝였다.‘뭐야, 이거 진짜네?’그녀는 살짝 웃으며 미용실에서 찍어둔 사진을 열었다.정은과 은혁이 나란히 앉은 각도, 분위기도 꽤 그럴싸한 장면.‘자, 실험 들어가자.’사진을 톡에 업로드. 손끝으로 부드럽게 터치.전송 완료.바로 이어 핸드폰에 내장된 스톱워치를 켰다.“시... 작!”1초, 2초, 3초... 5초...띵-[지금 어디야?]수민은 피식 웃으며 핸드폰을 내려놨다.‘오케이, 확정. 조재석 교수님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46화

    “은혁아, 우리 먼저 가볼게.”은혁이 손을 흔들며 인사하려던 찰나, 정은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은혁 씨, 같이 식사하시죠? 어차피 저도 아직 안 먹었는데요.”“마침 예약도 해뒀으니까 괜찮다면 같이 가요.”“정, 정말요?! 괜찮을까요?”은혁은 말끝이 떨릴 정도로 들뜬 기색이었다.수민은 표정으로 정은에게 물었다. ‘진심이야?’정은은 눈빛으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수민은 한숨 쉬듯 웃으며 말했다.“좋지 뭐... 사람 하나 늘어난다고 달라질 거 없잖아. 같이 가자.”은혁은 기뻐서 입꼬리를 다 못 내렸다. ‘정말 같이 가는 거야...? 나 지금 약간... 꿈꾸는 거 아냐?’...레스토랑에 도착하자 직원이 안내한 자리로 세 사람이 들어갔다. 따로 마련된 룸이라 분위기도 아늑했다.음식이 나오기 전, 은혁이 갑자기 말했다.“기다리는 김에... 작은 마술 하나 보여드릴까요?”수민은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마술도 해? 그러고 보니, 정은이 외할머니 생신 때도 뭐 하나 보여줬었지.”“이번엔 새로 배운 거예요.” 은혁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그럼 해봐, 해봐!” 수민은 벌써 핸드폰을 꺼내 카메라 준비 완료 상태로 들고 있었다.“도구 필요해?” 그녀가 묻자, 은혁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옆 캐비닛에서 종이 티슈 한 팩을 꺼냈다.그중 다섯 장을 쏙쏙 뽑아냈다. 마침 티슈에 프린트된 꽃무늬가 하나하나 다 달랐다.그는 정은을 향해 말했다.“정은 씨, 가장 마음에 드는 거 하나 골라주세요.”정은은 망설이지 않고 무심하게 한 장을 집어 들었다.은혁은 그걸 받아 조심스럽게 반으로 접고 말했다.“잘 봐요.”다시 펴서 말한 뒤, 조용히 티슈를 손안에서 뭉쳤다. 그리고 그 주먹을 천천히 펴자 손안에는 작은 꽃 한 송이가 피어 있었다.“선물이에요.”은혁은 웃으며 그 꽃을 정은에게 건넸다.“진짜 꽃이에요?”정은은 놀란 듯 꽃을 받았다. 손에 올려놓고 한참을 들여다봤다.‘이거... 어떻게 한 거지?’수민은 슬쩍 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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