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척을 듣고, 선우는 바로 문 앞으로 달려가 도겸을 맞이했다.그러나 도겸이 연희의 손을 잡고 들어올 줄이야!‘이게 뭐야!’선우는 숨을 들이마셨다.도겸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선우야.”“도, 도겸 형 왔네요. 빨리 앉아요...”선우는 얼른 인사하면서, 술을 따르며 또 과일을 건네주었다.후에 연희가 화장실에 간 틈을 타서, 선우는 마침내 입을 열어 물었다.“형,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그 사람과 헤어졌잖아요? 그런데 왜 이곳에 데려온 거예요?”술 두 잔을 마시자, 도겸은 눈빛이 좀 흔들리기 시작했다.“연희는 아직 어리니까, 나도 너무 몰아붙이고 싶지 않아. 아마 쉽게 받아들일 수 없을 거야.”선우는 닭살이 돋았다.‘아 뭐야, 대학생인데 뭐가 어리다는 거지? 도겸 형 정말 멍청이구나!’“그럼, 정은 누나는요? 이제 화해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정말 그렇게 되면 현빈은 아마 미친 듯이 기뻐할 것이다.정은을 언급하자, 도겸은 가슴이 아팠다.“누가 그래?”“그럼 지금...”선우는 연희가 떠난 방향을 바라보았다.“양다리를 걸치려고요?”“뭐가 그리 급해. 연희를 잘 처리하면, 난 최선을 다해서라도 정은에게 잘해줄 거야.”선우는 입술을 움직였다.‘시간은 형을 기다리지 않을 텐데. 그 여자의 일을 다 처리하면, 정은 누나는 아마 다른 사람의 여자친구로 될지도 모르잖아.’그러나 도겸이 자신감 넘치는 것을 보고, 선우는 입을 다물고 그의 미움을 사지 않기로 했다.거의 새벽이 되어서야 파티가 끝났다.선우는 이미 반쯤 취했지만, 억지로 일어나서 계산을 한 뒤, 클럽 직원의 부축을 받고 차에 올랐다.대리운전은 이미 안에 있었고, 선우를 무사히 집으로 데려다 줄 것이다.동건은 얼마 마시지 않아서 상태가 나름 괜찮았다. 다만 담배를 좀 많이 피웠기에, 냄새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는 근처의 5성급 호텔에서 스위트룸을 하나 예약했는데, 지금 바로 가면 된다.단둘이 남은 도겸과 연희는 길가에 서서 대리운전을 기다렸다.연희는 남
“지금 안에 있는 거 다 알아. 문 좀 열어줘, 우리 얘기 좀 하자.”“소정은! 내 말 못 들었어?”...“그래, 소정은, 너 정말 잘 났구나! 문 안 열어준다 이거지? 안 열면 내가 못 들어갈 것 같아?”처음에 얌전하게 말하다가, 지금은 화가 치밀어 오른 도겸은 인내심이 조금씩 바닥나고 있었다.그가 마침내 포기하고 떠나려 할 때, 갑자기 차가운 두 눈을 마주쳤다.도겸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다가, 눈살을 세게 찌푸렸다.좁은 복도 안은 불빛이 어두컴컴했다. 지금 조재석은 계단에 서 있는데, 금방 올라온 것 같았다.이 시간, 여기에 나타나다니. 아무리 둔한 사람이라도 재석이 뭘 하러 왔는지 알 수 있었다.‘심현빈이 소란을 피우는 것도 모자라, 지금 또 조재석이란 사람이 나타나다니.’ 도겸은 화가 난 동시에 마침내 정은의 곁에 있는 남자들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래서 진정을 되찾은 후, 그는 가장 먼저 사람 시켜 재석을 조사하라고 했다.‘소씨 가문의 셋째 도련님이었군. 어쩐지 심현빈까지 가만히 있더라니.’“정은이 찾으러 온 거야?”재석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 있지?”“나와 정은이 어떤 관계인지 잘 알고 있을 텐데.”“그래서?”도겸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만약 눈치가 있다면, 정은과 거리를 두는 게 좋을 거야.”“미안, 난 눈치가 없기로 유명한 사람이라서.”“소정은은 내 여자야! 지금은 단지 화가 나서 그런 것일 뿐, 앞으로도 줄곧 내 여자라고.”재석은 눈살을 찌푸렸다.“정은 씨는 사람이지 물건이 아니야. 그런데 누구의 여자라니, 그건 말이 안 되지. 정은 씨는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선택할 수 있어.”도겸은 냉소를 지었다.“조 교수님은 책을 많이 읽어서 그런지, 여자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군. 그 말이 뭐였더라? 뜻깊은 사랑을 했기에 그 사람을 더 미워하는 거라고. 정은이 나와 이렇게 심하게 다툰 것도, 다 날 너무 깊이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거든.”“믿지 못하겠으면 가서 문 두드려
말하면서 수민은 선글라스를 끼며, 정은을 따라 코코넛 주스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쾌적한 미소를 지었다.정은은 긴 다리를 겹친 채 한가롭게 몸을 뒤척였다.“너 데이트하러 가지 않았어?”수민은 입을 삐죽거렸다.“그 금발남은 근육이 그렇게 많아서, 난 또 그 방면이 얼마나 대단한 줄 알았지. 그런데 출국조차 하지 못했어. 차라리 연하남이 더 낫네.”정은은 좀 웃기다고 생각했다.“지난번에 만난 그... 케빈?”“그게 언제 적 얘기냐? 이 연하남은 해맑은 스타일이야. 귀엽게 생긴 데다 성격까지 깜찍해. 몸에서 향기가 나는데, 문제는 요리까지 할 줄 안다는 거야! 너무 좋아!”“그런데 네가 문제야.” 수민은 선글라스를 통해 정은을 바라보며, 웃으며 농담을 했다.“다른 남자 찾지 않을 거야?”‘한 남자에게 매달리면 무슨 재미가 있다고? 남자들 많이 만나봐야 그게 인생이지!’정은은 바다를 바라보며 대답했다.“그럴 계획 없어. 시간도, 정력도, 그럴 필요도 없거든.”“하긴.” 수민은 혀를 찼다. “남자는 네 공부에 지장을 줄 뿐이지. 성적까지 영향을 줄 것이고.”수민은 기지개를 켜더니, 눈빛은 이미 먼 곳에 떨어졌다.“그 뭐야... 방금 파란 눈의 잘생긴 남자를 하나 보았는데, 가서 얘기 좀 해볼게. 넌 혼자 놀고 있어. 이따 봐.”정은은 잔을 들어 그녀를 축원했다.“즐겁게 놀다 와.”...“정확히 알아냈어?” 도겸은 사무실의 창문 앞에 서서, 매서운 눈빛으로 비서를 바라보았다.“이번에 또 틀린 것은 아니겠지?”비서는 당황해졌다.“죄송합니다, 대표님. 지난번에는 제가 소홀히 했습니다. 지금 이미 정확하게 알아냈는데, 정은 아가씨는 H시에 가신 게 아니라 몰디브로 떠나셨습니다.”“확실해?”“이것은 항공편 정보입니다. 정은 아가씨의 이름이 승객 리스트에 나타났고요.”도겸은 자세히 보지 않았는데, 이번에 잘못 알아낼 리가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지난번의 실수는 모두 비서의 탓이 아니었다. 심현빈은 어찌나 비열한지, 뜻밖에도
이른 아침, 공항에서.도겸은 VIP 대합실에 앉아 SNS를 보고 있었다.탑승까지 아직 30분이 남았는데, 그는 시간이 너무 느린 것만 같았고, 지금 당장이라도 비행기를 타고 싶었다.이때, 도겸은 갑자기 멈칫하더니, 벌떡 일어나 앉았다.현빈이 어제 SNS에 해변의 사진, 푸른 하늘과 푸른 바다 그리고 보기 좋은 노을을 올렸다.[몰디브는 날씨가 좋네. 무엇보다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날 수 있어서 더 좋아.]아래는 댓글이 줄줄 달렸다.[형 몰디브에 가서 헌팅이라도 하려고요?]현빈은 댓글에 답장했다.[헌팅은 그물을 치는 것이고, 넌 정확하게 사냥감을 잡는 거야.][현빈아, 너 여자친구라도 생긴 거야?]현빈은 웃는 이모티콘을 보냈다....도겸은 댓글을 보면 볼수록 안색이 어두워졌다. 한참이나 댓글을 읽었지만, 그는 여전히 다 읽지 못했다. 그리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현빈이 사랑에 빠졌다고 추측하고 있었다.‘이 나쁜 자식, 나한테 거짓 정보를 알려주고는, 혼자 몰디브로 달려가 정은을 찾아?’이때 마침 탑승 안내가 울렸다. 도겸은 핸드폰을 거둔 다음, 외투를 들고 일어나 VIP 대합실을 떠났다.그러나 문을 열자마자 연희가 들어올 줄이야.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문을 밀려는 동작을 포옹으로 바꾸었다.도겸은 연희의 포옹에 제자리에 멍해졌다.“오빠 정말 너무 다정하시네요. 전에 제가 무심코 몰디브에 가 본 적이 없다고 말했을 뿐인데, 그걸 줄곧 기억하실 줄은 몰랐어요.”그녀는 손에 든 탑승권을 가리켰다.“그곳의 호텔은 문을 밀면 바로 바다가 보인다고 들었어요. 파도 소리와 함께 잠을 자고, 눈을 뜨면 일출을 볼 수 있다니. 그리고 아름다운 모래사장도 있잖아요.”도겸은 미간을 찌푸리며 연희의 말을 끊었다.“나 화장실 좀.”말을 마치자 그는 성큼성큼 떠났다. 그리고 차가운 얼굴로 구석에 가서 태명에게 전화를 걸었다.[대표님?]‘이 시간에 벌써 비행기에 탑승하셨을 텐데?’“임 비서, 일 그만두고 싶다면 그냥 솔직하게 말하지 그래!”[대표
도겸은 어제 잠을 잘 자지 못했기에, 지금 좀 졸렸다. 하품을 하며 고개를 들자, 연희가 자신을 찍고 있는 것을 보고, 그는 안색이 즉시 어두워지더니 핸드폰을 가렸다.연희는 멍해졌다.“오빠, 우리 처음으로 함께 해외여행을 가는 거잖아요. 사진 한 장 찍지 않을래요?”도겸은 담담하게 설명했다.“난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말을 마치자, 그는 눈을 붙였다.연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방금 엄청 흥분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찬물을 맞은 것 같았다.몰디브는 하늘이 푸르렀고, 바다가 넓었다. 헬리콥터에서 내리자마자, 직원이 나와서 그들을 맞이했다.두 사람이 입주 수속을 밟은 뒤, 직원은 직접 그들의 짐을 책임졌다. 도겸은 피곤함을 느끼며 엘리베이터로 걸어가다가, 문득 심현빈을 발견했다.현빈은 마침 엘리베이터에서 나왔는데, 그는 특별히 꽃무늬 셔츠에 같은 색깔의 반바지를 매치했다.몸매 비율이 너무 좋거나, 얼굴이 너무 잘생겨서인지, 이런 알록달록하고 촌스러우며 또 느끼한 차림새는 오히려 그에게 나른하면서도 존귀함을 도해주었다.현빈도 가장 먼저 도겸을 발견했다. 그는 멈칫하더니, 은근히 웃으며 도겸을 향해 걸어갔다. 손가락에 선글라스까지 끼고 있어, 무척 소탈해 보였다.“도겸아, 여행하러 왔어?”도겸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응, 너도?”현빈은 미소를 지었다.“이게 바로 인연일까? 그런데 너 너무 늦게 온 거 아니야? 난 너보다 하루 일찍 도착했는데.”이 일을 생각하자, 도겸은 안색이 더욱 나빠졌다.“누가 준 가짜 정보에 속아서 시간이 좀 걸렸어. 그런데 넌 하루 일찍 도착해도 아무런 수확이 없는 것 같은데?”현빈은 말을 하지 않았다.“네가 수작을 좀 부려서 여기까지 쫓아오면, 정은이 감동받을 것 같아? 난 정은을 너무 잘 알고 있지. 내가 있는 한, 두 사람 절대로 애인으로 될 수 없어.”도겸은 아주 자신감이 넘쳤다.그와 정은은 사귄 적이 있었기에, 설령 헤어졌다 하더라도, 현빈은 절대로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현빈은 눈빛이 어두
“가면무도회?”“응, 호텔의 전통인데, 반년에 한 번씩 열려. 매번 주제가 달라. 지난번에는 분장쇼였고, 지난번에는 할로윈 파티였어. 이번의 주제는 나름 평범했기에, 사람들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지. 아마 오늘 밤에 사람이 많을 거야.”크리스마스를 앞두고, 호텔 곳곳에서 크리스마스트리를 볼 수 있었고, 색등까지 걸려 있어 명절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수민이 말했다.“나 방금 밖에서 들어왔는데, 웨이터들 전부 가면을 쓴 거 있지? 엄청 재미있을 거야!”수민은 정은에게 여우 가면을 골라주었지만, 자신에게 숲의 여왕인 사자 가면을 골랐다. 그 이유도 단지 사자가 멋있기 때문이었다!정은이 물었다.“왜 늑대를 선택하지 않은 거야?”“늑대?”“네가 바로 늑대잖아?”“야, 너 얻어맞고 싶어?!”정은은 가면을 들고 도망쳤고, 달리면서 얼굴에 썼다.“빨리 서둘러, 늦겠다!”“야, 너 거기 안 서! 누가 늑대냐고?! 네가 더 늑대 같잖아!”...23층 연회장에서.엘리베이터를 나서자, 정은은 사방팔방에서 쏟아지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그녀는 사실 사람이 많은 자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얼굴에 가면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순식간에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수민은 그녀의 손을 잡으며 사람들을 뚫고 바에 도착했다.“마티니 한 잔이요. 정은아, 넌 뭐 마실래?”“난 레몬물.”수민은 어이가 없었다.“뭐? 다시 한번 말해 봐?”“레몬...”수민은 직접 그녀의 말을 끊어버리며 바텐더를 향해 말했다.“내 친구에게는 블러디 메리 한 잔이요!”바텐더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네.”정은은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그러나 지금, 어두운 곳에 처한 누군가 그녀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주시하고 있었고, 시선을 떼기조차 아까웠다...독염은 연회장 문 앞에 서 있었고, 벽에 기대며 수시로 손목시계를 보았다.그는 유나리아 가왕의 가면을 쓰고 있었는데, 블랙과 골든의 충돌에 불규칙한 음표까지 더하니, 차갑고 우아해 보였다.특히 도겸은 흰 셔츠를 입고 있었
남자는 검은색 양복을 입고 있었고, 아이스 블루의 커프스 버튼이 무척 눈에 띄었다. 옅은 색의 파텍필립은 복고풍의 느낌을 주고 있지만, 또 오늘 그의 가면인 오페라의 유령과 아주 잘 어울렸다.정은은 웃음을 머금은 남자의 눈을 마주한 순간, 바로 그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심현빈이었어!’“미안해요, 난 춤을 출 줄 몰라서.”현빈은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학교 백스테이지에서 까치발을 하고 춤추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데.”거짓말이 들통나자, 정은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현빈이 말한 것은 바로 정은이 대학교 4학년 때, 졸업식에서 미처 추지 못한 그 솔로 댄스였다. 정은은 두 달 동안 연습했지만, 종아리를 다쳐 결국 무대에 오르지 못했다.‘나 자신조차 잊을 뻔했는데. 이 사람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이때, 무대 위의 사회자가 무슨 말을 하자, 팔로 스폿이 여러 사람들 머리 위를 비추었다.현장의 환호성도 점차 커졌다. 그 하얀 빛이 두 사람에게 떨어지자, 그들은 같은 동그라미 안에 갇혔다.현빈은 웃으며 말했다.“무도회의 규칙은 팔로 스폿이 비춘 남녀가 반드시 춤을 춰야 한다는 거야. 하나님도 내가 거절당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었나 봐. 그런데 넌 모두를 실망시킬 건가?”말을 하는 동시에, 그는 몸을 굽히더니 손을 내밀어 정은을 초청했다.주위 사람들도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동의해! 동의해!”“한 곡 춰! 한 곡 춰!”정은은 이를 악물고, 울며 겨자 먹기로 그의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현빈은 바로 그녀를 데리고 무도장 가운데로 들어갔다. 그는 앞으로 다가간 다음 뒤로 물러서며, 회전을 한 다음 또 정은을 가볍게 안았다. 마치 키가 훤칠하고 잘생긴 오페라의 유령이 교활한 작은 여우 한 마리를 잡은 것 같았다.남자의 양복바지와 여자의 치맛자락이 뒤엉켜, 눈이 마주칠 때, 현빈은 유쾌하고 만족스럽게 웃었다.정은은 춤을 출 줄 알 뿐만 아니라 아주 잘 추었다.이는 어릴 때 정은의 어머니가 교육에 신경을 썼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그럼.”“금융 회사는 연말에 가장 바쁘지 않아요?”“꼭 그런 건 아니야.”현빈은 웃으며 말했다.“사람에 따라 일정이 바뀌는 법이야. 중요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아무리 바빠도 시간이 있고,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아무리 한가해도 상대하기 귀찮거든.”현빈의 말은 분명히 다른 뜻이 있었지만, 정은은 자세히 생각할 틈조차 없었다. 불빛이 반짝이더니, 이제 파트너를 교환해야 했다.불빛이 희미한 가운데, 한 사람이 이쪽으로 던져졌다.두 사람이 바뀌는 순간, 정은은 연희가 충격에 휩싸인 것을 똑똑히 보았다. 그리고 누군가 그녀의 손목을 꽉 잡았고, 남자의 다른 한 손은 정은의 허리를 세게 쥐고 있었다.도겸은 도발적인 미소를 지으며, 현빈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돌려 정은과 눈을 마주치자, 그의 눈빛은 또 순식간에 부드러워졌다.“정은아, 아직도 삐져있는 거야?”“내가 며칠 전에 네 집에 찾아갔는데, 왜 나한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떠난 거야?”도겸은 좀 억울해하고 있었다.“심현빈이 일부러 네 항공편의 정보를 바꾸지 않았더라면, 나도 진작에 널 찾았을 텐데.”정은은 눈을 드리우며,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내가 늦게 와서 화난 거야?”도겸은 고개를 숙이고 정은을 바라보았는데, 목소리는 저도 모르게 온화해졌다.방금 팔로 스폿이 그들을 비출 때, 도겸은 단번에 그 두 사람이 바로 정은과 현빈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두 사람은 심지어 무도장에 들어가서 나풀나풀 춤을 추었다.현빈은 정은의 가녀린 허리에 손을 얹었고, 매력적이면서도 다정하게 웃었다. 두 사람은 가끔 귓속말을 했고, 또 시선까지 주고받았는데, 이를 본 도겸은 하마터면 화를 낼 뻔했다.‘심현빈, 넌 무슨 자격으로 정은을 껴안고 있는 거지? 난 정은과 6년을 사귀었는데도, 같이 춤을 춘 적이 없는데...’그래서 파트너를 교환할 때, 그는 망설임 없이 연희를 내팽개쳤다.이번에 정은이 정말 화가 났다는 것을 알고, 도겸은 부드러운 말투로 그녀를 달랬다.전에 그들이 무수히 다퉜던 것처
“그럼... 고백하기 전까지, 혼자서 그렇게 많이 고민한 거예요?”“응.”“어쩐지...”정은이 아주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뭐라고?” 재석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이젠 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가요...”둘은 손을 꼭 잡고 복도로 향했다. 조용한 밤, 서로의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걷던 중, 재석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정은도 따라 멈춰 서며 돌아봤다.“왜요?”“정은아, 우리 지금... 사귀는 거 맞지?”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두 사람이 꼭 잡은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그렇게 생각 안 해요? 조금 전부터 내가 ‘재석 씨’라고 부른 거 못 느꼈어요?”“혹시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정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 지었다.“흠,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평소에도 꿈에서 날 자주 본 모양이네요?”재석의 몸이 순간 굳더니, 양 볼이 순식간에 빨개졌다.‘진짜 자주 꿨나 보다?’재석은 눈을 못 마주친 채, 그저 두 사람이 맞잡은 손만 바라보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진짜 좋아.”‘정은이도, 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구나.’‘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구나.’같은 계단, 같은 복도, 수없이 함께 걸어온 길. 그동안은 늘 친구라는 이름으로, 앞서거나 뒤따르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왔지만, 오늘은 처음으로, 손을 잡고 나란히 오르는 계단.정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근데, 왜 나랑 은혁 씨한테 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재석은 목소리를 낮추며, 살짝 눈을 피했다.“미안. 계산하러 나갔다가... 우연히 통화하는 거 들었거든.”정은의 눈이 살짝 커졌다.그리고 머릿속으로 자신이 통화 중 했던 말을 하나하나 되짚어봤다.‘공항에서 보자, 기대된다, Z시 출장... 뭐 이상한 말한 것도 없는데...?’그런데도 재석은 그걸 ‘여행 약속’으로 받아들였고, 그걸로 인해 혼자 삭이다가 결국 아래층에서 고백까지 해버린 거였다.“너희, Z시에 여행 간다고 했잖아.”
정은이 멍해 있는 사이, 재석이 한 걸음 다가섰다. 늘 부드럽고 점잖던 그가, 이 순간만큼은 전에 없던 강한 기운을 뿜어냈다. ‘이 남자... 이런 눈빛도 있었나?’정은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등이 벽에 닿는 순간, 재석은 어느새 바로 눈앞에 와 있었다.정은이도 이제야 제대로 실감이 났다. 재석이 자신보다 훨씬 크다는 걸. 그리고 지금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내려다보면, 자신이 마치 남자의 품 안에 갇힌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도.재석이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이제 좀 알겠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그때 네가 학업이 먼저라고 했을 때, 난 받아들였어.”“그런데 장은혁한텐 기회를 줬지. 정은아...”그가 고개를 더 숙이자,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목선에 닿았다. 순간, 정은의 팔에 소름이 쫙 돋았다. “너, 나한테 너무 불공평해.”그 마지막 한 마디는 묘하게 서글픈 기운이 섞여 있었다.정은은 입술을 달싹이며 뭔가 말하려 했지만, 재석은 그녀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알아, 내가 지금 어떤 입장인지. 묻고 따질 자격도 없고, 네가 누구를 좋아하든, 그건 네 자유라는 것도 알아.”“이 말 꺼냈다가, 우리 사이가 끝날 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근데... 계속 참다 보니까 알겠더라.”‘난... 그렇게까지 쿨한 사람이 아니었어.’“그래서 이제 참지 않기로 했어.”‘어떻게 되든, 그건 네가 정해.’그렇게 말한 재석은 고개를 숙인 채 멈췄다. 마치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처럼.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용한 밤공기 속에서, 정은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울렸다.“이제, 제가 말해도 될까요?”“응...”“재석 씨.”정은은 처음으로 재석을 그렇게 불렀다.“고개 들어요. 나 좀 봐요.”재석의 어깨가 순간 굳어졌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그는 이미, 거절당할 각오까지 끝냈다.그런데 눈이 마주친 순간, 정은의 두 눈 속에서 재석이 본 건... 눈물이 아닌, 웃음이었다.억지로 짓는
“헤어졌다고요?”정은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몰랐어?!”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진욱은 눈을 반짝이며 의자째로 다가오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본격적인 ‘TMI’를 털어놓기 시작했다.“M시 출장 갔다 오고 며칠 안 돼서, 재석이가 바로 짐 싸서 수아를 내보냈다니까?”정은은 그 말을 듣고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재석과 수아 사이에 어떤 감정선이 있었는지, 그동안 몇 번 스쳐 지나갔던 장면들이 퍼즐처럼 빠르게 떠올랐다.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눈빛 속엔 미묘한 기류가 스쳤다.“아마 진짜 많이 좋아했나 봐. 그러니까 정리할 때도 그만큼 아프고, 오래 걸리는 거겠지. 조금만 시간 지나면, 태민이도 정리될 거야.”진욱은 이어서 말했다.“네.”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대답했다.그 이후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남의 연애는, 들을 수는 있어도 깊게 얘기하지 말아야 해. 괜히 나서 봤자... 괜히 끼어든 꼴만 되니까.’...해가 지고, 붉은 노을이 건물 유리에 비치기 시작할 무렵. 정은은 마침내 작업을 끝냈다.진욱은 기다렸다는 듯 프로그램을 열고 기능 하나하나를 테스트했다.그리고 30초쯤 흐른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어어!! 복구됐어! 됐다! 돌아왔어! 다시 쓸 수 있어!!”미진도 덩달아 벌떡 일어나 양손을 번쩍 들었다.“살았다, 진짜!! 여태 손으로 데이터 입력한 거 생각하면... 이건 거의 기적이야!”진욱은 시계를 힐끗 보더니, 정은을 향해 말했다.“지금 이 시간까지 남아서 도와준 우리 정은이, 완전 수고 많았어! 조 교수...”“응...?”갑작스레 이름이 불리자, 재석은 몇 초간 멈칫하다가 고개를 돌렸다.진욱은 능청스럽게 말했다.“아니, 정은이가 이렇게 큰일 해줬는데, 감사 표시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적어도 밥 한 끼는 사야지.”“맞아요, 맞아요. 조 교수님, 이건 진짜 밥으로도 모자라요.” 미진이 곧장 거들었다.재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략 1년 전, 정은은 한동안 재석의 실험실을 빌려 쓴 적이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전진욱, 조미진 등과 인연이 닿았다.처음엔 서로 어색하고 낯설었지만, 몇 달이 지나면서 조금씩 가까워졌고, 지금은 가볍게 농담도 주고받을 만큼 편해졌다.그러던 어느 날, 진욱은 우연히 정은이 실험 데이터를 처리하는 속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 너무 빠른 게 아닌가 싶어서 슬쩍 물어봤더니, 정은은 코딩도 할 줄 아는 공대 만능 캐릭터였다. 그녀는 직접 짠 프로그램으로 데이터를 자동 정리하고, 다차원 분류와 정렬까지 가능하다고 했다.“와, 뭐야... 완전 반칙인데?”진욱은 결국 정은에게 부탁해 실험실 맞춤형 프로그램 하나를 따로 제작해달라고 했고, 그 이후, 데이터 정리는 그야말로 신세계를 맞이했다. 진욱은 쓸 때마다 감탄하며 말했다.“진짜... 정은이 덕분이야. 이게 사람을 살리네.”하지만 어제 그 기특한 프로그램이 갑자기 먹통이 됐다. 손태민이 고쳐보겠다고 덤볐지만, 결과는... 풍비박산이었다. ‘이젠 누가 손댔다간 진짜 박살 나겠어...’ 결국 정은에게 SOS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재석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오늘 시간 돼? 안 되면, 며칠 뒤도 괜찮고...]진욱은 훨씬 급했다. 말 그대로 살려달라는 마음이었다.[야, 오늘 안 데려오면... 나 여기서 바로 싸버린다! 진짜라고, 어?!]그는 어제 약 먹고 좀 괜찮아진 줄 알았건만, 밤새 배가 또 난리였다. 오늘 아침부터 실험실 화장실은 진욱의 전용이 되었다. 오전에만 6회 방문.그 말은, 그냥 협박 아니었다. 진짜 실현 가능성이 있었으니 말이다.정은은 상황을 듣고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시간 돼요. 지금 바로 갈게요.”[그래. 그럼 내가 정문 앞으로 갈게.]‘굳이 마중까진 필요 없는데...’ 뚝-정은이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 ...10분 뒤, 정은은 학교 정문 앞에서 재석과 마주쳤다. 두 사람은 실험실로 걸어가며 프로그램
“언니, 이건 굳이 우리 의견 물을 필요도 없지 않아요? 언니가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가는 거죠. 저희한텐 뭐든 시키기만 하세요. 무조건 따라갈게요!”민지가 단호하게 말하자, 서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맞아요, 저흰 누나 믿고 가는 거예요. 결정은 누나가 해요.”정은은 그 말에 잠시 멍해졌다가,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너희들... 나 그렇게 믿어도 돼? 나도 가끔 실수하거든?”민지는 마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정은 언니가 실수했다면, 그건 100% 저랑 서준 오빠가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뜻이에요.”“그건 좀 과장이지만...”‘그래도... 이런 믿음을 받는다는 게 참 따뜻하네.’세 사람은 그렇게 식사를 마쳤다.계산은 서준이 맡았고, 정은과 민지는 먼저 주차장으로 향했다. “언니, 먼저 가요. 전 서준이 데리러 갈게요.”“응? 굳이?”“우리 집이랑 방향이 같잖아요. 서준이는 차도 없으니까, 그냥 태워다 주는 거죠, 헤헤.”“그래, 알겠어. 그럼 조심히 가. 운전 천천히 하고.”“네. 언니도 잘 들어가요!”...두 ‘파트너’와 방향을 맞춘 정은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자료 조사부터 시작해 ‘신소재 최적화 계획안’을 정리하고, 모든 내용이 빠짐없이 정리됐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확인했다.벌써 밤 10시. 정은은 핸드폰을 들고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냈다.[장은혁 씨, 시간 돼요? 상의드릴 게 하나 있어요.]그 시각, 은혁은 거실 소파에 앉아 어머니인 황희숙 여사의 ‘진실 공방’에 시달리고 있었다.“너 외할아버지한테 전화 왔어. 오늘 도시락 들고 회사 갔다며? 근데 그냥 말도 없이 두고 사라졌다고 난리야. 게다가 누가 너랑 어떤 여자가 같이 있는 걸 병원 약국에서 봤다던데? 솔직히 말해봐. 너, 여자 친구 생겼지?”은혁은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아니 외할아버지는 왜 또 엄마한테 바로 전화해요? 진짜 너무하신다니까요...”“이 자식 봐라, 말버릇 좀
진욱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렇게 마음이 있는 거면, 왜 정은이한테 솔직하게 말 안 해?”“겁나는 거지, 재석아? 말 꺼냈다가 거절이라도 당하면... 그땐 친구로도 남을 수 없을까 봐, 무서운 거잖아.”진욱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재석을 똑바로 바라봤다.“그건 너답지 않아. 내가 아는 재석이는, 망설이지 않고 결정하는 사람이었어. 결과가 불확실하다고 물러서는 사람 아니었잖아.”“정은이가 ‘지금은 연애 생각 없다’고 했지? 중요한 건 ‘지금은’이라는 거야. 사람 마음은 바뀌는 거고, 그때 거절했다고 지금도 똑같을 거란 보장은 없어. 알겠냐?”재석은 말없이 진욱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 말이 생각보다 깊게 박혔다. ‘지금도 똑같을까? 아니, 혹시... 지금은 조금 다를 수도 있는 걸까...’진욱은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야, 진심으로 말하는 건데, 너 계속 질질 끌면, 정은이 뺏긴다. 그리고 뺏기고 나서 울어봤자, 소용없을 거야.”“우리 정은이 인기 많은 거 너도 알잖아. 예전에도 정은이 두고 싸운 애들 있었잖아. 그리고 오늘 그 남자 봤지? 얼굴 잘생겼지, 젊지, 에너지 넘치지, 옷차림 보니까 집도 잘 사는 거 같던데?”재석은 이런 말을 아주 듣기 싫었다.“닥쳐.”진욱도 더 이상 말하기 싫었다. “칫. 드디어 위기감이 좀 드나?”‘그래, 긴장 좀 해라. 맨날 냉정한 척만 하지 말고... 이번엔 너도 좀 불안해져 봐야지.’...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집에 바래다준 뒤, 약을 가정부에게 전달하며, 복용 방법까지 하나하나 직접 설명했다. 봉수진은 저녁까지 먹고 가라며 붙잡았지만, 정은은 이미 서준, 민지와의 약속이 있었다.“외할머니, 며칠 안에 다시 올게요. 오늘은 친구들이랑 약속이 있어서요.”“그래그래, 알았어. 젊을 땐 많이 만나고 다녀야지.”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숙였고, 곧 차에 올랐다.약속 장소인 레스토랑에 도착했을 땐, 서준과 민지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테이블 위에
은혁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그러게요... 나야 뭐, 그랬으면 좋겠지만...”하지만 정은의 태도는 그리 확신을 줄 만큼의 호감은 아니었다.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분명히 좋아한다는 표시도 없는 애매한 선이 보이는 듯했다.‘그래서 더 미치겠어. 기대도 못 하고,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고... 이러니까 계속 마음이 붕 떠 있잖아...’그렇게 속으로 앓고 있었지만, 정은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봉수진의 약에 모든 관심을 쏟고 있었다.VIP 약국답게, 일 처리는 정말 빨랐다. 정성스럽게 달인 약이 곧바로 팩 단위로 나뉘어 밀봉되었고, 음용 방법까지 깔끔하게 안내되었다.냉장 보관 후, 따뜻한 물에 데워 마시면 된다는 안내였는데, 이 정도면 환자도 거부감 없이 약을 먹을 수 있을 것이었다. 약을 다 받은 후, 약 한 시간쯤 지나 두 사람은 병원을 나섰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은의 전화가 울렸다.“여보세요? 외할머니? 네, 약 다 받아놨어요.”“병원에서 달여줬어요. 네, 거기 계세요. 지금 바로 갈게요.”전화를 끊은 정은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은혁을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오늘 고마웠어요. 외할머니 모시러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아, 어... 그래요! 잘 가요!”은혁은 여자의 뒷모습이 멀어질 때까지 멍하니 서 있었다.심지어 여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후에도 한참을 그렇게 바라본 후에야 아쉬움 가득한 시선을 거두었다.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고, 화면엔 ‘황기' 두 글자가 떴다.“여보세요?”[야 이놈아! 도시락 던져놓고 도망가듯 나가버리면 어떡해?! 말도 못 붙였잖아! 뭐가 그렇게 급해? 뭐가 외할아버지보다 중요한 거냐고?!]“죄송해요... 헤헤.”황기는 순간 당황했다. ‘얘 지금 뭐야? 미쳤어? 웃음은 왜 이렇게 정직하게 새어 나오는 건데...?’...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태우고 병원을 나서는 중이었다. 바로 그때, 재석은 약을 수령하고 외래 진료실 앞 벤치에 앉아 있었다.
정은도 여기서 재석을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선배님, 병원엔 무슨 일로 오셨어요?”재석은 그제야 시선을 거둬들였다. 눈길이 정은에게 닿는 순간, 표정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난...”“날 데려다주러 온 거야.” 그 순간, 전진욱이 배를 감싸 쥐며 천천히 다가왔고, 재석 대신 대답을 건넸다.정은은 진욱을 바라보다가 눈이 살짝 커졌다. “교수님, 어디 아프세요?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요.”“하... 뭘 잘못 먹었는지, 아침부터 배탈이 나서... 약도 안 듣고... 이 사람이 막 끌고 오더라니까... 검사라도 받아보라고.”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하셨어요. 괜히 방치하다가 더 심해질 수도 있잖아요. 미리 체크하면 마음도 편하고요.”“어우, 너희 둘 미리 맞췄냐? 말이 어쩜 그렇게 똑같냐?” 진욱이 짐짓 장난스러운 말투로 투덜댔다.정은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재석을 바라봤다. “그랬어요?”재석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눈빛 속 어딘가 알 수 없는 감정이 일렁였다. ‘저 말투, 저 표정... 나만 아는 게 아닐 텐데...’“정은 씨, 이제 가야죠.” 그때, 은혁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아, 네.” 정은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희 먼저 갈게요.”그렇게 말한 후, 은혁과 나란히 병원 복도를 걸어 나갔다.재석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두 사람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눈빛 속 감정은 복잡하고도 묘했다. ‘뭔데, 저 둘은 저렇게 자연스러워...’“재석아? 야, 재석아!”진욱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재석은 고개를 돌렸지만, 눈빛 속 싸늘함은 여전했다. 진욱은 그 눈빛에 소름이 돋아 어깨를 움찔거렸다.“너... 왜 그래?”“방금 정은이가 ‘저희’라고 했어.”“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재석을 바라봤다. 몇 초간 멍하던 그는 그제야 이해가 된 듯 말했다. “아... 그 ‘저희’? 그게 뭐 어때서? 같이 왔으니까 ‘저희’지. 그럼
얼마 지나지 않아 황 원장은 처방전을 프린트해서 정은에게 건넸다.“수고 많으셨습니다, 원장님.”정은이 공손히 인사하자 황 원장은 손을 휘저었다.“아이구, 무슨... 이 아가씨는 인사도 참 반듯하게 잘하네요. 말도 예쁘게 하고, 얼굴도 예쁘고. 이런 손녀가 있으면, 어디 내놔도 자랑이겠네요.”봉수진은 바로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럼요. 우리 손녀는 어디 하나 빠지는 데가 없어요.”황 원장은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장난스럽게 물었다.“이렇게 예쁜 아가씨한테 남자 친구가 없을 리 없는데? 그렇죠?”봉수진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없어요! 보통 남자애들은 우리 정은이랑 안 어울려요.”“허허, 그래도 우리 손자 정도면 꽤 괜찮은데...?”황 원장이 살짝 떠보자 봉수진은 손사래를 쳤다.“아이구, 그 얘긴 그만해요. 정은이 아직은 시집 안 보낼 거예요. 지금이 제일 곁에 두기 좋을 때라니까요.”‘아이고, 또 시작이다...’정은은 속으로 헛웃음 치며 처방전을 가방에 쏙 넣고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났다.“저, 약 지으러 먼저 다녀올게요!”...진료실 문을 나서는 순간, 정은은 누군가와 부딪혔다.“아, 죄송해요!”고개를 돌려 상대방을 본 순간 정은의 걸음이 멈췄다.“은혁 씨?”은혁은 보온 도시락 통을 들고 서 있었다.“정은 씨! 또 보네요. 우리 진짜 인연인가 봐요? 하하...”“여긴... 병원인데? 누가 입원하셨어요?”정은이 도시락을 보며 물었다.“아, 아니에요. 저 입원실 온 거 아니고요! 외할아버지가 이 병원 의사세요. 오늘 외래 당번이라 저희 어머니가 직접 도시락을 싸주셨는데, 제가 대신 가져다드리러 온 거예요.”“혹시 외할아버지 성함이 황 씨?”“네! 황기 원장님이세요. 한약재 이름에서 따오셨대요, 혹시... 아는 분이세요?”‘어머나, 진짜 인연인가?’정은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오늘 저희 외할머니 진료도 황 원장님한테 받은 거예요.”“정말요? 세상에... 진짜 대박. 어쩐지 자꾸 마주치네요.”은혁은 정은 손에 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