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아, 찜찜해.’
“이것 한번 먹어보지.”
갑자기 마카롱 하나를 대뜸 서린에게 주는 공작.
‘세레나 주라고! 세레나! 어이, 눈꼬리는 왜 가늘게 휘어 있는데.’
서린은 눈을 위아래로 올렸다 내리며 에르딘에게 무언의 압박을 보냈다.
“아, 레이디도 여기.”
딱 봐도 집히는 아무 파이나 무미건조하게 건넨 공작은 서린을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고양이를 놀아주는 집사 같은 표정으로 서린을 관찰하고 있었다.
‘네가 지금 뭘 잘했다고?’
세레나 입보다 훨씬 크잖냐. 어휴, 답답해. 속 터져.
서린은 가슴을 팡팡 쳤다. 하지만 결국 눈앞의 마카롱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 영롱한 자태. 오랜만에 보는 달달한 녀석. 현대의 맛을 여기서도 느낄 수 있다니 거부할 수가 없었다.
마카롱에게 기도하고 한입에 다 넣었다. 달콤함이 온몸에 퍼져가는 느낌에 서린은 자신도 오늘을 위해 태어난 것처럼 느껴졌다.
‘너무 맛있어. 내가 고마워할 줄 알았냐, 에르딘? 고맙다, 개새끼야.’
작고 소소한 행복에 저도 모르게 얼굴이 풀어졌다.
“하나 더 먹을래?”
공작이 서린을 보며 키득거렸다. 마카롱을 하나 더 집어서 그녀에게 줬다.
아니. 오늘 공작 왜 이러지, 정말?
'나는 정말 너무 감사하지만 이러면 세레나랑 대화를 못 하잖아?'
“참, 공작님. 세레나님도 저기 올라간 체리 파이 보이시죠? 그걸 제일 좋아하세요. 아시죠?”
알 거 아냐. 너 집착왕이었으니까. 이 자식아, 빨리 체리 파이 안 옮겨? 옮깁니다, 실시!
“아, 그렇군요.”
'끝? 네가 날 안 돕겠다 이거지?'
그렇다면 세레나를 공략하겠다.
“세레나님, 세레나님은 요새 취미가 어떻게 되시나요?”
“아, 자수 놓기를 하고 있어요. 공작님께 드리려고 손수건에 자수를 하나 놓고 있답니다.”
그렇지! 세레나 백 점 만점에 천만 점! 공작, 너만 잘 대답하면 돼.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영애.”
끝? 너 이따위로 나온다 이거지? 아까 말을 다 이해 못 했나 보다.
원래 하던 거 반대로 하라고 직설적으로 말해줘야겠다. 어딜 봐서 친절한 신사냐, 이게.
감정이 메말라 비틀어진 신사지.
세레나는 어색하게 굳어버린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말없이 매만졌다. 서린도 할 말을 잃어서 찻잔만 달그락 달그락 만지고 있었다.
“그러는 그대는 취미가 뭐지?”
갑자기요? 그걸 왜 여기서 물어봐아!
눈에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내 취미는 쳐때리는 거요. 너 같은 애들 쳐 때리는 거.'
“세레나님 찬양하는 거요. 아, 이렇게 밝고 예쁘고 여신 같은 세레나님. 어떻게 같은 공기를 마실 수 있게 해주시다니 감사합니다. 그녀의 미소는 햇살이오, 그녀의 눈동자는 타오르는 태양입니다. 같은 물을 마셔도 그녀가 마시면 성수가 되고…….”
세레나가 붉어진 얼굴로 서린을 만류했지만, 서린은 닥치는 대로 지껄였다.
그래, 이렇게 된 거 세레나 장점 모음집이나 만들고 아사리판이다 이거야.
불편한 티파티가 그렇게 서린의 기도로 끝이 났다.
다시는 티파티 안 한다. 공작에게 가서 다시 한마디 해야겠다.
세레나를 데려다준 뒤 이번에는 공작의 침실로 갔다.
벌컥.
“무례하군.”
“저기요, 에르딘 씨. 오늘처럼 하면 관계 회복이고 나발이고 못 해요, 못 해. 아니, 말을 못 알아들었으면 못 알아들었다고 말해야지. 원래 성격 반대로만 하면 된다니까? 왜 속이 터지게 만드냐고요!! 이 상황을 해결할 마음이 있는 거예요?”
가운만 입고 있는 에르딘에게 다가가 하고 싶던 말을 우다다다 쏟아냈다.
무언가 게워낸 듯 속이 시원했다. 그러니까 낮에 조금만 더 잘했으면 좋잖아?
“진정해.”
에르딘이 서린의 어깨를 잡아 빙그르르 돌려 침대에 앉혔다.
“아직 처음이지 않나. 그대가 더 도와주어야지.”
저저, 눈만 웃는 모습. 가식적인 에르딘.
어휴. 저 옷 사이로 보이는 복근이 서린을 마구 유혹했다.
“저는 아주 최선을 다하고 있고요, 댁이 지금 협조를 안 하면 소용이 없어요. 이런 식이면 계약이고 나발이고 없어요?”
서린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갑자기 싸해지는 분위기에 어깨를 잡은 에르딘의 손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알겠다고 했잖나. 오늘은 이만 돌아가고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지.”
에르딘은 손을 떼고 무언가를 참듯 물러났다.
서린은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이쯤이면 빠져야 하는 타이밍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열심히 좀 해봐요, 좀!”
물론 한마디 더 얹어주는 건 한국인의 미덕.
방으로 돌아와 1권의 내용을 점검했다. 황태자가 오기 전에 겨울 축제 같은 걸 했던 것 같은데.
그때 에르딘과 세레나가 불꽃놀이를 보는데, 에르딘은 세레나를 보고 있었더랬지.
대충 도둑질당하고, 뭐 맛있는 거 먹고 그런 에피소드였던 것 같다.
충격적인 일이 많아서 그런지 제대로 기억이 안 나네.
그 축제에 보내기 전에 착한 남자 교육을 시켜놔야겠다. 그냥 입력과 실행만 있을 뿐.
에르딘, 너는 인공지능이 되는 거야.
그 후로 서린은 세레나에게 양해를 구한 뒤 에르딘의 집무실로 출근했다.
축제에 가서 해야 할 것들을 빠짐없이 말해주었다.
인파에 휩쓸리지 않게 도와주기, 손잡고 걷기, 길 가다 보이는 거 사주기, 친절하기, 배려하기, 눈 꿈틀대지 않기 등등.
하루로는 도저히 외울 것 같지 않아서 축제 가기 전날까지 무한 반복으로 읊어댔다.
네가 바보가 아닌 이상 이제 누르면 바로바로 대답이 가능할 것이다.
생각 외로 끝까지 잘 들어준 공작은
“알았다.”
라며 눈이랑 입을 같이 웃었다.
불길한 징조다. 두 개가 같이 웃다니. 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축제 당일, 에르딘의 오전 업무로 인해 오후에 출발하기로 한 세레나를 꾸며주었다.
나름 열심히 하려고 했지만 사람들은 이제 서린에게 세레나를 맡기지 않았다. 쿨하게 인정했다.
다른 사람이 예쁘게 꾸며준 세레나를 현관까지 마중 나갔다.
“세레나님, 조심히 다녀오세요.”
“그대는 같이 안 가나? 수행원이 한 명은 있어야 하지 않은가?”
저게 또 수작질이네.
“저는 감기에, ‘쿨럭.’ 걸려, ‘쿨럭.’ 못 갈 것 같습니다, 공작님.”
“이런. 치유술사를 불러야겠군. 당장 연락을 넣어라. 내가 보는 앞에서 진료하라.”
쿨럭. 이 개자식.
“같이 가시죠.”
델리아의 장례식 이후, 많은 것이 바뀌었다. 아스란에 의해 공작은 어디론가 사라졌고 세레나가 공작의 빈자리를 메꿨다. 세레나는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아스란에게 먼저 묻지는 않았다. 그저 항상 그랬듯 묵묵히 기다릴 뿐이었다.세레나의 치유술은 이제 그 어떤 치유술사보다 더 대단해져 있었다. 그녀는 시간이 나면 항상 빈민가로 나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치유술을 베풀었다.“세레나님, 감사합니다. 세레나님은 여신이십니다.”그 말을 들은 세레나가 자신을 찬양하던 델리아를 떠올렸다.“아니요. 이제 다치지 말고 조심하세요.”치유술을 마치고 나온 세레나를 아스란이 에스코트했다.“어머, 아스란님. 굳이 같이 안 오셔도 된다니까요.”아스란은 대꾸조차 하지 않고 묵묵히 옆에 서 있었다.머리를 짚은 세레나는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홀로 치료를 하러 나왔다가 불량배를 만난 뒤로는 무조건 뒤따라다니는 아스란이었다. 결국 그 불량배들도 치료술로 치료해 보내긴 했지만, 아스란이 그 이야기를 알게 되고 폭주를 할 뻔했었다.오늘 세레나는 어느 젊은 남성의 집으로 찾아갔다.“세레나님, 발목을…….”젊은 남성이 발목을 보였다. 농기구에 긁혀 살이 썩어 가고 있었다. 세레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고름을 짜낸 뒤 치유술을 사용했다. 생각보다 깊은 상처에 조금 무리를 해서 능력을 사용했다.휘청거리는 세레나를 젊은 남성이 받아 들려 하자, 아스란이 손으로 남성을 쳐내고 세레나를 받아 들었다.“내가 하지.”아스란이 도마뱀의 눈을 만들어 남자에게 살기를 날렸다. 가볍게 세레나를 안아 든 아스란은 그대로 밖으로 나섰다.“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울며 감사하다고 고개를 숙이는 남자를 뒤로한 채, 세레나는 안긴 채 마차에 태워졌다.“너무 무리하면서는 하지 마라.”땀을 흘려 들러붙은 머리카락을 뒤로 정리해 주며 아스란이 세레나를 걱정했다.“예? 제…… 제가 할게요. 아스란님, 제발…….”얼굴이 새빨개진 세레나는 얼굴에 붙은 머리카락을 허겁지겁 정리했다. 그 당황스러워하는 모습에 아
시후의 집 2층에서 서린이 열심히 옷을 골랐다. 같이 살기로 하면서 바다 여행은 올해가 처음이었다.‘에르딘이 사라졌을 때 제일 후회했지.’서린은 에르딘이 돌아온 뒤로 한을 풀 듯 그동안 못 했던 걸 다 몰아서 했다.영화 보기, 커플링 맞추기, 남산타워 올라가기 등등 시간이 나는 대로 에르딘과 붙어 다니기 바빴다.그러나 어쩌다 보니 바다만은 다녀오지 못했는데, 내일 드디어 같이 바다를 가기로 한 것이다.서린은 속옷을 고르며 민망해져서 주먹으로 침대를 몇 대 팼다. 이불 사이로 서린의 손이 푹푹 박혔다.‘설마, 붙어 잔 적은 많았지만…… 꺄악.’서린 혼자 얼굴이 빨갛게 익어서는 팔다리를 마구 휘두르며 어쩔 줄 몰라 했다.에르딘은 아래층에서 방문 사이로 내적 비명을 지르는 서린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다음 날 에르딘은 선글라스를 끼고 차 한 대를 가지고 나왔다. 그새 면허까지 따 버린 에르딘이 서린은 어쩐지 뿌듯해져 괜스레 제 가슴을 당당하게 폈다. 트렁크에 짐을 싣고 조수석에 올라탄 서린은 잔뜩 들떠서는 내비게이션에 바다 이름을 쳤다.“가서 멍게, 말미잘, 해삼, 낙지! 꼭 먹여 볼 거야!”눈을 빛내는 서린을 보고 에르딘은 순간 오싹한 기분을 느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자신에게 좋은 것은 아닐 거라고 확신했다.드라이브에 시동을 건 에르딘이 출발했다. 차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서린은 비어 있는 에르딘의 오른손을 잡아 깍지를 꼈다.“시후, 너는 바다를 본 적 있어?”서린이 에르딘을 보며 물었다.“없다.”“엄청 예뻐!”에르딘이 피식 웃으며 서린을 쳐다보았다. 이미 그의 눈에 예쁜 것을 담고 있었다.바다로 가는 길이 막히기 시작했다. 차는 정체되어 있었다. 서린이 몸을 베베 꼬며 말했다.“으…… 다음 휴게소에서 쉬었다 가자.”에르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서린이 정체된 길이 지루한지 또다시 말을 꺼냈다.“시후, 너는 여기 오게 된 거 후회 안 해?”“안 한다.”선글라스 안에 감춰진 눈동자에서 살기가…… 살기?“잠
서린의 눈앞에서 벨라트리스가 손을 뻗었다. 서린은 가슴에 뜨거운 열감을 느끼고 눈을 감았다. 언제나처럼 엿을 날려 주는 것은 잊지 않았다. 모든 것이 느려지며 멀리서 에르딘이 멈춰 있는 모습이 보였다.‘그래도 에르딘한테서는 떼어 냈어.’이제 다시 현대로 돌아가 계획을 짜면 그만이리라.서린은 방에서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에르딘이 있는 곳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다.“건물이…… 없어.”에르딘이 살았던 자리에는 빈 공터만이 남아 있었다. 매서운 바람만이 서린의 뺨을 스쳤다.불길한 예감에 서린은 재빨리 재현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서린아, 학교도 안 나오고 웬일이야?”“선배, 취직 안 했어요?”서린이 설마 하며 물었다.“무슨 소리 하는 거야? 빨리 학교 나와.”서린은 믿을 수가 없어 중얼거렸다.“거짓말…….”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자취방으로 돌아온 서린은 시후의 물건을 사 놓았던 박스들을 꺼냈다.“봐, 꿈 아니잖아. 진짜잖아!”서린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와 찍은 네컷사진이 없었다. 집 안을 다 뒤지기 시작했다.‘뭐야, 에르딘. 너 지금 나 혼자 현대로 보낸 거야?’서린은 박스 안의 물건들을 끌어안았다. 입을 틀어막아도 울음이 새어 나왔다.에르딘이 쓰려고 샀던 물건만 남아 있었다. 사진도, 번호도, 그 무엇도 남기지 않은 채 윤시후는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다.잔뜩 울어 버린 서린은 휴대폰으로 『검은 장미의 가시』를 검색했다.그런 책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에르딘의 상처는 어떻게 됐지.’‘마왕은…… 라리엘은…… 세레나는…….’그곳에 인사하지 못하고 놓고 온 것이 너무나 많았다.결국 가슴을 쥐어뜯기는 듯한 고통이 엄습했다. 서린은 손으로 옷을 강하게 말아쥐었다.왜 마지막이라고 말해 주지 않았어.에르딘 말 듣고 조심 좀 할걸. 왜 항상 저지르고 후회하는 걸까.왜 조심하지 않았어, 이서린!꺽꺽 소리를 내며 목 놓아 울다 지쳐 버린 서린은 그대로 침대 위에 쓰러졌다.다음 날 서린은 비척비척 학교를 향했다. 퉁퉁
“우리가 판단할 일은 아니지.”그가 손에 마력을 더욱 쏟아부었다.쿠드드득.얼음꽃이 한 번 더 피어났다.몸속의 가시들이 일제히 자라났다.벨라트리스의 몸이 크게 떨렸다.피가 폭포처럼 쏟아졌다.날개가 힘없이 축 늘어졌다.허공에는 거대한 얼음꽃 한 송이가 피어난 듯했다.그 중심에 벨라트리스가 매달려 있었다.축 늘어진 몸.감긴 눈.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아스란은 천천히 손을 내렸다.허공에 떠 있던 얼음꽃이 산산이 부서졌다.벨라트리스의 몸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쿵.아스란도 비틀거렸다.그제야 오른팔을 움켜쥐었다.검은 저주가 혈관을 타고 어깨까지 번져 있었다.그는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조금 늦었구나.”비틀거리며 일행에게 걸어갔다.에르딘은 서린을 끌어안은 채 넋을 잃고 있었다.세레나는 울먹이며 아스란을 향해 뛰어왔다.“아스란 님!”아스란은 그녀를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었다.“괜찮다.”한 걸음 더 내디뎠다.시야가 흔들렸다.검게 물든 저주가 몸을 잠식했다.세레나의 얼굴이 흐릿해졌다.아스란은 끝내 몸을 지탱하지 못했다.툭.무릎이 먼저 꺾였다.이내 천천히 앞으로 쓰러졌다.세레나가 다급히 그를 받아 안았다.공작저에서 아스란은 다행히 대신관에게 금세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세레나는 눈물을 흘리며 반은 용인 아스란에게 무리하게 치유술을 쓰다가 결국 쓰러졌다.오히려 세레나를 간호하게 된 아스란에게 에르딘이 조용히 다가왔다.“난 왜 안 돌아가진 거지?”아스란이 대답했다.“내 마력이 끝난 거다. 인과가 끝난 거야.”에르딘이 아스란의 멱살을 잡았다. 에르딘의 주먹이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어떻게 하면 그녀에게 갈 수 있지?”“그녀가 거기 있다고 누가 그러던가?”에르딘은 더욱 거세게 멱살을 움켜쥐었다.“거기 있어야 할 거다. 그녀는 죽지 않았어.”아스란은 무표정으로 에르딘의 얼굴을 바라봤다.원래대로 돌아간 것인데 무엇이 문제인지.저토록 이성적인 남자가 왜 현실을 부정하고 있는 것인지.아스란은 그를
“스승님이 그러셨잖아요.”“인간을 이해하라고.”“그래서 이해하려고 했죠.”손을 천천히 펼쳤다.“웃어도 보고.”“울어도 보고.”“사랑도 해 보고.”“배신도 당해 보고.”“죽여도 보고.”“죽어도 보고.”검은 마력이 손끝에 모였다.“그러다가.”“인간의 욕망을 만났어요.”“그게 너무 아름답더라고.”순간 손가락이 아스란을 향했다.쾅!검은 광선이 공간을 찢으며 날아왔다.아스란은 손을 들어 올렸다.거대한 얼음벽이 솟아났다.쿠드드드득.얼음이 갈라지는 소리가 울렸다.하지만 끝내 벽은 무너지지 않았다.아스란이 담담히 말했다.“내 탓이라는 것이냐.”“욕망의 탓이라는 것이냐.”“……아니다.”“네 탓이다.”벨라트리스의 미소가 사라졌다.“뭐라는 거야.”“할아버지가!”손가락을 장난치듯 여러 번 튕겼다.수십 개의 검은 탄환이 허공을 뒤덮었다.콰쾅!콰앙!얼음벽이 하나둘 깨져 나갔다.하지만.깨질수록 더 커졌다.아스란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한 걸음.또 한 걸음.얼음벽을 밀며 천천히 다가왔다.“……나는.”아스란의 목소리가 조용히 울렸다.“네가 좋은 수호신이 될 줄 알았다.”“…….”“욕심이 많고.”“모든 것을 직접 겪어야 직성이 풀리던 아이.”“그래서.”“인간을 가장 잘 이해할 거라 믿었다.”벨라트리스가 이를 악물었다.“맞아요!”“욕심도 많았고!”“다 해 봤어요!”“그래서 알게 됐잖아요!”날개를 활짝 펼쳤다.검은 마력이 폭발했다.“인간은! 지켜야 하는 존재가 아니야!”“서로 죽이고!”“빼앗고!”“배신하고!”“욕망을 위해서라면 가족도 버리는 존재라고!”광기 어린 외침이 하늘을 울렸다.아스란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그 눈에 분노는 없었다.안타까움뿐이었다.“……아이야.”“인간을 너무 닮아서.”“괴로웠구나.”그가 손을 펼쳤다.차가운 마력이 응축됐다.손바닥 위에 얼음창 하나가 피어났다.휘익.소리도 없이 날아갔다.벨라트리스의 어깨를 꿰뚫었다.곧이어 두 개.열 개.수십
휘익!손을 한 번 휘두르자 서린의 몸이 미로 너머로 튕겨 나갔다.라리엘은 허공으로 떠오르며 웃었다.“꼭꼭 숨어라.”쿠웅!!거대한 그림자가 하늘에서 떨어졌다.용의 날개를 펼친 사내가 그대로 라리엘을 들이받았다.둘은 미로를 부수며 데굴데굴 굴러갔다.엉망이 된 라리엘이 피식 웃었다.“아스란.”“드디어 왔네.”아스란은 옷을 툭툭 털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푸른 눈이 라리엘을 똑바로 응시했다.“그래.”“벨라트리스.”“잘 지냈느냐.”“스승님…….”검갈색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흔들리는 듯 보였다.뒤늦게 도착한 세레나가 에르딘에게 치유술을 걸고 있었다. 희미한 빛이 에르딘의 상처를 감쌌다.라리엘의 시선이 천천히 세레나에게 향했다.“거슬려.”순간 그녀의 몸이 사라졌다.“세레나!”아스란이 몸을 날렸다.라리엘은 에르딘에게 달려가던 길목에서 세레나를 손등으로 쳐냈다. 세레나의 몸이 허공을 가르며 멀리 날아갔다.아스란은 방향을 틀어 세레나를 받아냈다.조심스럽게 그녀를 내려놓은 뒤 다시 라리엘에게 쇄도했다.하지만 라리엘은 손바닥을 펼쳤다.콰앙!보이지 않는 벽이 생겨 아스란의 몸을 그대로 멈춰 세웠다.“제 힘을 거두고 이야기하시죠.”라리엘이 싱긋 웃었다.그 손이 천천히 에르딘의 왼쪽 어깨를 움켜쥐었다.“커흑!”에르딘의 몸이 크게 떨렸다.손끝이 어깨 깊숙이 파고들었다.핏물이 쏟아졌다.핏줄을 따라 붉은 피가 거꾸로 라리엘의 팔을 타고 흘러들어 갔다.에르딘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무릎이 꺾였다.숨이 점점 짧아졌다.“에르딘!”서린이 악을 쓰며 뛰어올랐다.“디질래?!”하늘에서 그대로 떨어진 그녀가 라리엘의 목을 팔로 감아 버렸다.네이키드 초크.팔에 핏줄이 솟았다.온몸의 힘을 전부 목에 실었다.“서린…… 가라.”“손 떼!”라리엘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서린은 이를 악물었다.그리고 그대로 귀를 물어뜯었다.“아아악!”피가 튀었다.라리엘이 처음으로 비명을 질렀다.손이 잠깐 풀렸다.에르딘의 몸이 바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