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ZER LOGIN"형님, 오늘은 저희 애가 첫 일을 하고나서 너무 긴장했는지, 지금 힘들어해서 제가 대신 왔습니다."
도윤의 잠든 모습을 끝까지 확인 한 범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 뒤 그대로 외출했다.
"너가 걔 학부모냐? 애가 너무 나약한 거 아니야?"
"누구나 다 처음은 서투니까요."
"네 눈이 잘못 된 건 아니고?"
"아이, 형님도 참. 섭섭하게 왜 그러십니까."
넉살좋게 둘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곳은 범의 회사였다.
암암리에 사람의 목숨이 거래가 되고 있는 이 곳.
"그래서, 성공은 했고?"
"제 눈은 틀리지 않았다고 지금 바로 증명해보이겠습니다."
도윤이 저지른 두 번째 사건 현장을 제법 호기롭게 확인한 둘이었다.
"뒷 처리는?"
대포폰에 담긴 사진을 꼼꼼히 보던 그가 물었다.
"이녀석이 처음인 주제에 생각보다 꼼꼼하더라구요. 장갑도 끼고 사전에 CCTV도 조사 하던데요. 장갑도 끼고, 근데 형님."
"왜"
"빨리 제 눈이 틀리지 않았다고 정정하세요. 지금 엄청 신경 쓰이니까."
"잘났다. 자, 니네 애기 갖다줘라."
범의 사수인 석호가 내민 것은 다름아닌 대포 통장과 대포폰이었다.
"니네 애기 회사에도 한 번 데려오고, 인사 연습 시켜놔라. 너도 수고했다. 가 봐."
"사랑합니다, 형님. 살펴가십쇼!"
특유의 익살스러운 표정을 짓고 문을 마저 닫은 범의 얼굴이 어딘가 한결 편해 보였다.
"아, 오늘은 우리 애기 뭘 먹이고 뭘 입히면 좋을까."
어딘가 그의 발걸음은 신나 보이기까지 했다.
"애기야, 형 왔다!"
도윤이 질색팔색할 것을 알지만 그 마저도 즐기는 범은 우렁차게 문을 돌아왔다.
"아빠 왔는데 내다는 봐야 하지 않겠어, 아들?"
도윤의 방문을 예고없이 열었던 범은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범에게 화답하듯 도윤 또한 예고없이 말끔히 사라진 뒤였다.
"아차! 요놈이 사춘기를 보내고 있어서 그런가, 말도 없이 도망갔네."
당황하던 것도 잠시, 범은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현재 도윤에게 쥐여져 있는 것은 자신의 두번째 대포폰, 혹시 몰라 위치 추적 앱을 설치해 둔 범이었다.
"이녀석, 걱정되게 어디서 뭘 하는거야."
범이 확인한 도윤의 위치는 집. 휴대폰을 두고 나갔다.
"이건 예상 못했는데."
꼼짝없이 도윤을 기다리게 된 범이었다.
"들어오기만 해봐라. 아주 눈물 쏙 빠지게 혼내줘야지."
범의 손에는 도윤이 좋아하는 따끈한 호빵이 들려있었다.
그 시각, 도윤은 자신의 마지막 가족을 찾아가는 중이었다.
철민이 죽기 전 적어주었던 주소.
얼마나 들여다봤는지 어느덧 너덜해진 종이 위로 주소는 선명했다.
"엄, 마"
잘 떨어지지 않는 입술로 미리 연습해 보는 도윤이었다.
정말 자신은 단 한순간도 사랑 받았던 적이 없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자꾸만 무거워지는 발걸음을 애써 무시한 채, 어느덧 쪽지와 정확히 일치하는 주소에 다다랐다.
철민과 별 반 다를 것이 없어보이는 낡고 허름한 집이었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지만, 흐느끼는 울음 소리가 집 안에서 들려왔다.
이윽고 그 울음소리는 물소리에 가려졌다.
도윤은 살며시 낡은 도어락 위로 전기 충격기를 가져다대었고, 도어락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도윤이 조심스레 문을 잡아당기자, 문은 저항없이 그대로 열렸다.
그저 눈속임일 뿐인, 허름한 도어락이었다.
그렇게 도윤이 문을 열고 마주한 집안은 생각보다 화려했다.
도윤의 어린 시절 미옥은 술집으로 출근하는 화류계 여성이었다.
"여전한가보네."
형형색색의 옷들이 모든 물건과 뒤섞여 거실 바닥이 난잡했다.
"이것도 여전하고."
집 안을 천천히 둘러보던 도윤은 이내 한 곳에 눈길이 머물렀다.
핏자국.
주인이 누군지 알 수 없었지만 도윤은 곧 그 주인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엄마."
화장실에서 빠져나온 미옥과 마주친 것이다.
"너 누구니?"
멍하니 자신을 쳐다보는 도윤에 미옥은 소리도 지를 생각이 없는지 조심스레 도윤에게 물었다.
마스크와 모자를 벗어 인사한 도윤은 미옥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쳤다.
미옥의 모습은 형편없이 그지 없었다.
새파란 멍들이 얼굴 뿐만 아니라 온 몸에 가득했다.
코피가 났는지 미옥의 웃옷에는 핏자국이 있었고, 여전히 얼굴에 피를 닦아낸 흔적이 있었다.
"너 설마..."
도윤은 아무런 대답하지 않고 마스크와 모자를 다시 더 푹 눌러썼다.
"살아 있었어?"
오랜만에 만난 아들이 반가운지, 미옥은 도윤을 향해 걸음을 내딛었지만 도윤은 뒷걸음질쳤다.
"어디서 뭐 하고 지냈어, 응? 생각보다 말랐네. 돈은 잘 못 버나 봐?"
그러거나 말거나, 도윤의 모습을 살핀 미옥은 본심부터 꺼냈다.
"엄마 걱정돼서 성공해서 찾아온거야? 근데 너 취직은 했니? 뭘 배운게 있어야 취업도 하지. 어디 막노동 같은 데서 일하는거 아니야? 아무렴 어때, 모아둔 돈은 좀 있니? 엄마한테 좀 줘라."
도윤은 어딘가 살풋 허탈한 웃음이 났다.
"감사합니다."
변하지 않아주셔서, 제가 죄책감을 갖지 않게 해주셔서.
"뭐가, 응? 엄마 좀 도와줘."
"엄마."
"그래그래, 내새끼. 엄마 왜 불러?"
미옥은 참 낯짝도 두꺼운 모양이다.
"제 이름은 누가 지어주셨어요?"
"엄마가 지었지! 내새끼 태어나던 날 엄마가 얼마나 고민해서 지었는데!"
"저를 얼만큼 사랑하셨어요?"
"미처 말로 다 표현을 할 수가 없는데 어떡하지. 우리 아들? 일단 여기 앉아 봐."
"제 이름은 뭔가요?"
철민에게도 던져졌던 질문이 미옥에게도 던져졌다.
"뭐? 설마 엄마가 아들 이름도 모를까 봐?"
미옥에게 당황한 기력이 역력했다.
"사실 엄마가 치매가 조금 있는지 기억이 왔다갔다 해, 아들. 한 번만 알려주면 평생 안 잊어버릴게."
"도윤이에요."
"맞다, 우리 도"
미옥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도윤은 망설임 없이 미옥을 전기 충격기로 기절시켰다.
도윤에겐 더 이상 남은 희망이 없었다.
사라진 희망과 새로 생겨난 희망, 이 희망을 믿어보아도 괜찮을까요?
"역시, 이럴 줄 알았어."잠들기 위해 샤워를 몇 번이나 했는지 세다가 지쳤다.아직도 심장이 쿵쾅거려서 온 몸에서 심장이 뛰는 것만 같았다.애써 몰려오는 모든 감정을 무시한 채 잠에 들려고 애썼다.얼마나 지났을까, 잠시 까무룩 잠든 도윤은 누군가로부터 쫓기다 이내 목이 졸리는 꿈을 꾸어 겨우 잠든 잠에서 깨고 말았다.자신의 목을 조르던 그 손짓이 너무 생생했다.도윤의 호흡이 가빠졌고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아직까지도 범으로부터 도착한 메세지는 없었다.이 사실은 도윤을 더 패닉으로 몰아가기에 충분했다."허억, 허억"가빠진 숨은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왜 그랬어?"머리를 감싸안은 채, 주저 앉아있는 도윤의 귓가에 선명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어디선가 들어 본 목소리였다.틀림없이 이 목소리는 철민이었다.조심스레 고개를 든 철민의 앞에 철민이 서 있었다."사람 죽이고 넌 편안할 줄 알았어?"도윤은 움직일 수 없었고, 자신에게 철민이 점점 가까워졌다.이윽고 철민의 손은 도윤의 목을 움켜쥐었다."너도 똑같이 당해봐야 돼. 너가 죽었으면 좋겠어."눈물이 미친듯이 흘러나왔지만 닦을 새가 없었다."죽여버려."이번엔 익숙한 목소리였다.가장 많이 들어왔고, 늘 그리워하던 목소리인 미연의 것이었다."뭐 해? 꼴도 보기 싫으니까 어서 죽여버리라고. 살인마따위 죽여버리라고!""할머니."늘 듣고 싶던 그리운 목소리였다."역겨운 살인마."그런 도윤에게 돌아온 목소리는 매몰찼다.그리고 도윤은 의식을 잃고 말았다.도윤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도윤이 답이 없자 이윽고 초인종까지 울렸다.깜빡하고 방해금지 사인을 켜두지 않은 모양이다."하우스 키핑입니다."문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도윤은 잠시 문을 열어 정비 거절 의사를 밝힌 뒤 다시 침대 위로 누웠다.아무래도 어제 있었던 그 끔찍한 일은 꿈이었나보다.안도감을 느끼는 것도 잠시 휴대폰을 확인한 도윤은 놀랐다.이미 기차 예매 시간은 훌쩍 지난 것도 모자라, 예상 도착
거리는 모든 것이 어둠에 집어삼켜진 채, 낡은 가로등의 희미한 불빛에만 의존하고 있었다.더 이상 뺏길 것도 없어 보이는 이 사람들에게 남은 것이라곤 하나밖에 없었다.목숨.어느새 길거리의 특성을 빠르게 파악하고 동선을 구상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허탈함에 웃음이 나왔다.분명 자신이 상상한 어른의 삶은 멋진 정장을 입고, 남에게 베푸는 그런 삶을 사는 존재였지만 현실은 생각보다 어려웠다."내일은 이렇게 오면 되겠다."오는 길과 가는 길까지 꼼꼼하게 예행 연습을 마친 도윤은 근처 공원에 잠시 앉아 쉬다가 숙소로 향하려던 참이었다."할머니!"앳된 목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 본 도윤은 어린 아이가 한 할머니를 향해 뛰어가는 모습이었다."어이구, 강아지. 넘어지지 않게 조심해야지."다정함이 가득한 목소리와 이윽고 들려오는 따스한 목소리."소윤이 호빵 먹을래?"호빵.도윤에게는 잊지 못할 음식이자, 도윤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다."그 때, 우리 할머니도 호빵 같이 먹었으면 좋았을텐데."씁쓸하게 미소를 진 도윤은 편의점에 들려 저도 모르게 호빵을 하나 구매했다.집으로 돌아가면 미연을 먼저 보러 가야겠다고 다짐했다."아빠한테 니가 먼저 전화를 해야지, 자꾸 아빠가 전화하는게 맞아 아들? 집착하는 아빠같잖아.""지금 집착하고 있는거 맞아.""오늘은 어땠어?"도윤에게 정곡을 찔린 범은 재빠르게 화제를 바꿨다."오늘 동선 다 파악했어. 내일 갈거야.""아직 숙소도 좀 널널하게 기간 남았는데 벌써 오게? 그거 환불도 안 돼.""내 돈 아니니까 괜찮아.""못된 놈.""돌아가는 차표 모레 예약하면 시간 알려 줘. 타고 갈게.""아주 부려먹지 왜?""형 보고 싶어서.""몇 시로 끊어줄까 내새끼, 그런 거라면 빨리 말하지.""눈치가 좀 없네.""처음 들어보는 말인데 그건.""인기도 없지?""그런 농담도 처음 들어.""할 말 더 없지? 끊는다.""부끄러워하긴. 차표 예매한거 사진으로 보냈다. 잘 타고 와.""빠르네, 고마워.""사
"김병섭이라..."범에게서 건네받은 서류를 검토하다 이내 관 둔 도윤은 처음으로 혼자 지내는 밤이 어색한 것도 잠시, 이윽고 곧 청춘의 설렘으로 가득했다.범에게 약간의 시간도 허락 받았겠다, 도윤은 남들처럼 단 하루라도 평범하게 지내고 싶었다."보통의 사람들은 뭐 하고 놀지?"고민도 잠시, 도윤은 오는 기차 안에서 들었던 사람들의 대화를 떠올렸다."여기는 칼국수가 맛있고, 이 카페는 케이크가 맛있는 곳이구나. 맞아, 산 경치도 좋댔어."평범한 사람들이 나눈 평범한 대화를 떠올리는 평범하지 않은 사람.도윤은 그렇게 부푼 마음으로 알람을 맞춰두고 피곤한 몸을 뉘였다.처음으로 맞이하는, 잠이 오지 않는 편안한 밤이었다.결국 도윤은 본인이 설정해 둔 알람 시간 까지 잠들지 못했다.이렇게 된 김에 도윤은 가벼이 차려입고 숙소를 나섰다."저, 저기 저, 칼국수 한 그릇 주세요."간단하게 유명한 산 주변의 산책로에서 경치를 즐기며 아침운동을 마친 도윤은 어제 자신이 알아 본 칼국수 가게를 기웃거리며 들어가 헛기침을 하며 자리 잡았다."하이고, 고와라. 총각이 혼자서 왔나 봐? 칼국수? 알겠어 조금만 기다려."친근하게 맞아주는 가게 주인 덕분에 도윤은 괜히 미연이 생각나면서 기분이 몽글해졌다.칼국수는 오래 걸리지 않았고, 곧 도윤의 앞으로 도착했다."특별히 총각이 예뻐서 내가 특으로 준비했어. 양껏 먹고 모자라면 말해. 우리집이 김치 맛집이야. 김치랑 꼭 같이 먹고. 맛있게 드셔요."도윤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빠른 손으로 상을 다 차려버린 주인은 도윤을 하염없이 쳐다봤다."아이고 아줌마가 아침부터 부담스럽지? 내가 딱 손님만한 손주가 있어서 그래요. 아유, 너무 예쁜 나이다."귀여운 변명을 늘어놓고는 이내 홍홍 거리는 웃음소리와 함께 사라졌다.부끄러움에 모자를 다시 한 번 푹 눌러 쓴 도윤은 칼국수를 먹기 시작했다.일정한 간격없이 투박한 면, 꽤나 정성이 느껴지는 육수, 그리고."흐윽."따뜻한 온기가 도윤을 가득 채웠다.오랜만에
힘들었던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수원의 집 앞에는 의문의 상자가 2개나 놓여있었다."택배 시킨 것은 따로 없을텐데?"분명히 택배 위에 적혀있는 이름과 주소는 자신의 것이 맞았다.신발을 벗자마자 택배 상자를 열어보기 시작한 수원은 놀랐다.작은 쪽지와 함께 하나는 광수로부터 온 것이었다."수원씨, 아침에 볼 때마다 기운이 없는 것 같아서 걱정이 돼 집 앞에 놓고 가요"서툴게 써져 있는 삐뚤빼뚤한 글씨를 소리 내 읽어보던 수원은 이내 관두고 말았다.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은 수원은 물끄러미 택배 상자를 내려다 보았다.상자 안은 초콜릿과 달콤한 간식들로 가득했다."내 걱정을 한 거였구나. 나중에 만나면 오늘 일 사과해야겠다."오늘 아침의 광수와 있었던 일이 자신의 기분 나쁜 착각이길 간절히 바라며 수원은 두 번째 택배상자를 뜯으려 했다."이게 뭐야?"택배 상자를 뜯기도 전에, 택배는 무엇인지 모를 기분 나쁜 붉은 액체로 젖어있었다.불길한 마음을 뒤로 한 채, 택배의 테이프를 뜯어낸 수원은 또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택배 안에는 바늘이 꽂힌 저주인형과 죽은 쥐의 사체, 그리고 쪽지가 있었다.쥐의 피에 젖은 쪽지를 겨우 펼친 수원은 손을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수원은 낮에 봤던 여자의 짓이리라 직감했다.병원에서 낯선 여자에게 들었던 내용이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종이에 빼곡히 적혀있었다.아무래도 오늘도 할아버지가 병문안 온 딸에게 수원의 이야기를 한 모양이다."엄마, 아빠 진짜 세상에 쉬운 일이 없다, 난 이제 정말 어떡해야할까."더 이상의 사고 능력을 잃은 수원은 그대로 팔에 얼굴을 파묻었다.어두컴컴한 수원의 집은 그렇게 울음소리만 퍼져나갔다."아들, 혼자서도 잘 할 수 있지?""아, 좀"첫번째 의뢰를 수행하기 위해, 도윤은 집 근처 역으로 향했다."아들 수학여행 보내는 것 같아서 맘에 편하지가 않아, 용돈 좀 챙겨줄까?""응.""알았어, 이번 의뢰 끝나면 너한테 수고비 들어갈거야. 형이 준 대포 통장 잊지 않
결심한 도윤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도윤에게 생긴 첫 의뢰였다.타겟은 도윤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너무나도 평범했다."진짜 돈이 무섭구나."적은 돈은 아니었지만 돈은 사람을 살리기도, 죽이기도 한다는 양면성에 도윤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김병섭. 나이는 쉰 여섯이고, 사는 곳은 여기서 좀 멀긴 해. 운전은 할 줄 아냐?"대답 없이 고개만 내젓는 도윤의 모습에 범은 알겠다는 듯 대충 끄덕였다."기차나 타고 가라.""내가 잘 할 수 있을까?""너 임마, 너 벌써 해내고 왔잖아. 잘 할 수 있어. 해내야만 하고, 형 민지 누나네 안다니까."범의 장난스런 협박에 도윤은 범을 노려봤다."아빠가 농담도 못하나."머쓱해진 범은 남은 타겟의 정보를 읊어내려갔다.그렇게 그들의 밤은 또 한 번 깊어져만 갔다.다음날 아침,"정해져 있는 시간은 없지만 타겟 제거도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아서, 너무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아. 실수만 안하면 돼. 그리고 넌 비장의 무기가 있잖냐."건네받은 의뢰인의 정보를 수십번 되새기고 있는 도윤에게 범이 직접 내린 커피 한 잔을 건넸다."잠도 좀 자면서 하고, 아들이 우등생 될까 봐 아빠 겁난다 임마. 반 친구들한테 햄버거 쏴야하는 거 아냐?""아침부터 개소리야."범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여전히 시선은 손에 들려있는 서류에 향한 채였다."세상에 하나뿐인 가족한테 너무 심한거 아니냐. 아빠 상처받았어."그러거나 말거나, 도윤은 대뜸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섰다.범을 피할 생각이었다."어디가는 지 아빠한텐 얘기하고 가야 할 거 아냐!"잽싸게 도망가는 도윤을 그저 눈으로만 쫓던 범은 이내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곤 다시 제 할일을 하기 위해 방으로 들어갔다.어느새, 집 안은 언제그랬냐는 듯, 고요함만이 맴돌았다."수원씨! 저에요! 광수! 이번에 저희 집 옥수수가 좀 농사가 잘 되어서 좀 나눠드리려구요! 안에 있는 거 다 아니까 좀 나와보세요!"오전 7시, 수원은 이 시간이 늘 두려워졌다.매일같이
쓰러진 미옥을 뒤로 한 채, 도윤은 집 안을 천천히 둘러보기 시작했다.자신의 어릴 적 기억과 같이 여전히 화려한 옷가지, 지저분한 식기류, 언제 청소가 되었는지 모르겠는 집, 출처를 모르겠는 악취까지.그리고 그 어떠한 곳에서도 도윤의 흔적은 전혀 없다는 것이 도윤의 마음 한 켠을 씁쓸하게 만들었다.낳아준 부모에게조차 잊혀진 심정을 달리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미옥은 생각보다 일찍 깨어났다.하지만 그녀는 그 어떠한 행동조차 할 수 없었다.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한 도윤만이 미옥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저를 이렇게 비참하게 만드셨으면서, 이름 정도는 잊지 마셨어야죠."미옥은 대답할 수 없었다.도윤이 미옥의 입을 스카프로 묶어 막아두었기 때문이었다.20년 전 잃어버린 줄만 알았던 노란색의 스카프가 미옥에게 다시 돌아 온 순간이었다."강태석?"미옥이 기절해 있는 사이, 도윤은 자신이 조사한 미옥의 뒷조사 정보를 하나둘씩 정독했다.도윤이 내뱉은 세 글자의 이름은 미옥의 동공을 흔들리게 했다."아빠 대신 새로 만나시는 남자친구이신가 봐요?"정체모를 남자 사진을 훑어보던 도윤은 사진과 미옥을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오늘 어머니는, 강태석 손에 죽은거에요. 그리고 이 비밀은 우리 둘 만 알아요. 아시겠죠? 마침 강태석씨가 제가 오기 전 다녀갔었잖아요. 맞죠?"도윤이 신나게 눈을 빛내며 설명하는 반면, 미옥의 눈엔 점점 빛이 사라져갔다.사실 도윤은 이제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남지 않은 혈육으로부터 일말의 사랑을 받고 싶었다.단지,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길 바랬을 뿐인데, 도윤의 욕심이 너무 과했던 모양이다."그래도 전 미웠지만 어머니, 아버지를 사랑했었습니다.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도윤은 거실에 널려있던 미옥의 옷가지를 대충 주워들고는 미옥의 목을 압박하기 시작했다.고통과 공포로 인해 울부짖는 미옥에게 도윤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쉬이, 소리내면 사람들이 와요. 기어이 제 발목을 잡으시려구요?"3살의 기억을 아직 간직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