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낮, 아르덴파트너스 본사 17층 대회의실.
유리창 너머로 눈이 시릴 만큼 정제된 한낮의 햇살이 길쭉한 대리석 테이블 위로 부서져 내렸다. 에어컨이 조용히 돌아가는 회의실 내부의 공기는 한여름의 열기보다 더 차갑고 팽팽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루네의 서유럽 유통망 확장 및 파리 수선 거점(Atelier) 건립 안건을 두고 벌써 세 시간째 이어지는 마라톤 회의였다.
“윤 대표님, 제안하신 프랑스 파리 현지 수선 및 물류 통합 센터 건립 계획은 아르덴의 위험 관리 가이드라인을 명백히 초과합니다. 현지 아웃소싱 파트너십 대신 직영 공간을 짓겠다는 고집은, 초기 고정비 투자 대비 예상 회수 기간을 과도하게 늘릴 뿐입니다.”
테이블 상석에 앉은 차도현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태도로 루네의 제안서를 넘겼다. 그의 목소리에는 사적인 온기가 단 한 조각도 섞여 있지 않았다. 정갈하게 빗어 넘긴 머리와 각 잡힌 다크 네
채원이 새로운 수정 수치와 조건이 담긴 시트 한 장을 도현의 앞으로 미끄러뜨렸다. 도현의 시선이 빠르게 표 위를 훑었다. 그의 턱밑 근육이 단단하게 굳어졌다가 이내 미세하게 풀렸다. 채원이 제시한 마일스톤 조건은 아르덴이 거절하기 힘들 만큼 정교했고, 리스크를 스스로 감당하겠다는 선언과도 같았다.도현은 펜끝으로 테이블을 가볍게 한 번 톡 두드렸다.“수정안의 데이터는 합리적이군요. 이사회 참관인 자격의 아르덴 담당자가 매달 현지 지출 증빙을 검토하는 조건으로, 이 마일스톤 구조안을 임시 수용하겠습니다. 세부 약정서는 한 실장이 정리해 넘기도록 하죠.”“합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차 대표님.”채원은 맑은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지극히 공적이고 우아한 비즈니스의 마무리였다. 그러나 도현이 자료 가방을 챙기기 위해 몸을 움직이는 순간, 그의 가방 안쪽에 살짝 비친 검은 가죽 바인더가 채원의 눈에 들어왔다.그 안에는 낮의 회의 내용과는 전혀 다른, 두 사람이 직접 조항을 넣고 서명했던 ‘혼인 계약서’ 원본이 잠들어 있었다.시계 바늘이 오후 5시 58분을 가리키고 있었다.채원은 태연하게 휴대전화 화면을 확인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는 도현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차 대표님, 오늘 의사일정은 이것으로 종결된 것 같군요.”“그렇습니다, 윤 대표님.”“혼인 계약서 제3조에 따르면, ‘저녁 약속은 먼저 공식 일정이 끝난 사람이 메뉴와 장소를 정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제 공식 캘린더는 방금 5시 58분을 기해 종료되었고, 차 대표님은 6시 반에 다른 펀드 청산인과의 짧은 보고 일정이 남아 있으시더군요.”도현의 발걸음이 멈췄다. 한지혁 실장이 황급히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고, 서민지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기침을 삼켰다. 도현은 서류 가방 손잡이를 쥔 손가락끝에 살짝 힘을 주며 채원을 내려다
낮, 아르덴파트너스 본사 17층 대회의실.유리창 너머로 눈이 시릴 만큼 정제된 한낮의 햇살이 길쭉한 대리석 테이블 위로 부서져 내렸다. 에어컨이 조용히 돌아가는 회의실 내부의 공기는 한여름의 열기보다 더 차갑고 팽팽하게 얼어붙어 있었다.루네의 서유럽 유통망 확장 및 파리 수선 거점(Atelier) 건립 안건을 두고 벌써 세 시간째 이어지는 마라톤 회의였다.“윤 대표님, 제안하신 프랑스 파리 현지 수선 및 물류 통합 센터 건립 계획은 아르덴의 위험 관리 가이드라인을 명백히 초과합니다. 현지 아웃소싱 파트너십 대신 직영 공간을 짓겠다는 고집은, 초기 고정비 투자 대비 예상 회수 기간을 과도하게 늘릴 뿐입니다.”테이블 상석에 앉은 차도현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태도로 루네의 제안서를 넘겼다. 그의 목소리에는 사적인 온기가 단 한 조각도 섞여 있지 않았다. 정갈하게 빗어 넘긴 머리와 각 잡힌 다크 네이비 슈트, 그리고 자로 잰 듯 반듯하게 매듭지어진 타이가 완벽한 투자사 대표로서의 냉철함을 대변했다.맞은편에 앉은 윤채원은 턱을 약간 든 채 그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냈다. 그녀 역시 루네의 미출시 라인인 차분한 차콜 그레이 린넨 재킷 소매를 단정하게 걷어붙인 차림이었다. 채원은 테이블 위에 놓인 펜을 한 번 돌려 로고가 아래로 향하게 놓았다. 예전의 불안을 감추기 위한 무의식적인 버릇이 아니었다. 상대를 완전히 분석하고 다음 수를 놓기 전의 프로페셔널한 호흡이었다.“차 대표님, 단순한 물류비 산출 공식으로만 접근하면 그렇게 보이겠죠. 하지만 서유럽 바이어들이 루네를 선택하는 가장 큰 이유는 ‘지속 가능한 수선 보장’이라는 신뢰에 있습니다. 현지 파트너십에 위탁할 경우, 당사 특유의 초승달 자수 복원과 비대칭 패턴의 정밀 수선 퀄리티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브랜드 가치가 훼손되어 발생하는 장기적 반품률 상승과 고객 이탈 비용은 아르덴의 그 똑똑한 수식에
첫날밤의 정중하고 기계적이던 동의 프로토콜은 밤의 어둠 속으로 완전히 소멸해 있었다. 도현의 입맞춤은 8년의 갈망과, 지난 수개월 동안 채원을 합법적인 울타리 안에 묶어두기 위해 참아내야 했던 모든 절제와 욕망을 한꺼번에 뿜어냈다.그의 뜨거운 입술이 채원의 아랫입술을 짓이기듯 머금었다가, 각도를 낮추어 더 깊은 타액의 온기 속으로 파고들었다. 채원은 셔츠 앞섶을 쥔 손가락에 더욱 팽팽한 힘을 주며, 그의 넓은 가슴과 어깨를 제 몸으로 빈틈없이 짓눌렀다."도현아... 읏, 천천히...""안 돼. 오늘은 더 이상 안 기다려."도현이 거칠게 호흡을 흩뜨리며 채원의 허리를 들어 올렸다. 채원의 가느다란 두 다리가 자연스럽게 그의 단단한 골반 부근을 감싸 안자, 단숨에 바닥에서 이탈한 채원의 몸이 침실 안쪽으로 빨려 들어갔다.박스들이 가득 쌓여 흐트러진 거실의 정경이 두 남녀의 얽혀 든 몸짓 뒤로 허망하게 뒤로 밀려났다. 도현은 문이 닫히기도 전에 채원을 침대 위로 내리누르며 자신의 거대한 체구와 뼈마디로 그녀의 얇은 홈웨어를 완전히 덮어눌렀다.침대 매트리스가 깊게 내려앉는 진동과 함께, 도현의 손가락이 채원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뜯어내듯 풀어내렸다. 그가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흰 실크 셔츠가 가차 없이 벌어지며, 채원의 쇄골과 하얀 가슴팍이 밤공기 속에 고스란히 노출되었다.그 위로 도현의 뜨거운 입술이 흔적을 남기며 가라앉았다. 그의 이빨이 쇄골 안쪽의 여린 살결을 잘게 깨물어 올릴 때마다, 채원은 허리를 잘게 떨며 그의 머리칼을 움켜쥐었다."하... 도현아, 읏,"살결과 살결이 맞닿는 격렬한 마찰음 사이로, 채원의 오른쪽 손목에 채워진 사파이어 팔찌가 가볍게 흔들리며 도현의 넓은 등과 단단한 어깨죽지를 스치고 지나갔다.금속 체인이 잘게 찰랑이는 가느다란 소리와, 서로의 뜨거운 숨소리가 섞여 들어가는 소리는
채원의 호흡이 완전히 가로막혔다. 목구멍 안쪽이 바늘에 찔린 듯 아릿해지며 소리 내어 부르려던 그의 이름이 거친 호흡 속에 파묻혀 흩어졌다."이게... 이게 어떻게 여기에 있어?""수소문했어."도현의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그 나직한 어조 밑바닥에는 뼈가 아릴 정도의 지독한 집착이 들끓고 있었다."네가 나 때문에 가장 소중한 부모님의 유품을 위탁 매장에 팔고, 그 추운 비를 맞으며 돌아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내 심장이 얼마나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는지 넌 상상조차 못 할 거야. 그 어두운 위탁 매장 장부의 폐업 기록을 뒤쫓고, 8년 동안 이 팔찌를 거쳐 간 수집가와 전당포 업자 다섯 명의 동선을 역추적하는 데 정확히 반년이 걸렸어."그가 채원의 앞에 바짝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그의 크고 뜨거운 손바닥이 채원의 손가락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마지막으로 이 팔찌를 소장하고 있던 유럽의 개인 수집가는 완강했어. 절대로 돈으로는 팔지 않겠다고 하더군. 그래서 내가 아르덴의 이름을 걸고, 그가 평생을 갈망하던 프랑스 사설 경매장의 미술품을 통째로 구해서 맞교환 조항을 짰어. 계약 구조를 짜고 승인을 받아내는 데 내 모든 사적 자산과 인맥의 80퍼센트를 동원했지."도현이 가늘게 떨리는 채원의 하얀 손목을 아주 소중한 자산을 다루듯 경건하게 잡아 올렸다. 8년 전 늘 채워져 있었으나, 어느 날 허망하게 지워져 비어 있던 그 가녀린 손목 부근.도현은 채원의 맥박이 가장 빠르고 애틋하게 요동치는 바로 그 자리에 고개를 숙여 제 뜨거운 입술을 가만히 내리눌렀다.입술이 살결에 닿는 순간, 도현이 참아왔던 더운 숨결이 채원의 손목 안쪽 맥박을 타고 온몸의 세포 끝까지 뜨겁게 번져 나갔다. 채원은 어깨를 미세하게 떨며 입술을 깨물었다."채원아. 이제야 다 돌려놓았어. 네가 제 힘으로 산 이 집도
도현의 구두 벗는 소리가 거실 마룻바닥 위로 묵직하게 떨어졌다. 그는 들고 있던 가죽 가방과 재킷을 소파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두고, 셔츠 소매 단추를 풀며 가볍게 팔뚝 위까지 접어 올렸다. 단단하고 거친 뼈마디가 도드라진 그의 드러난 팔목에는, 채원을 곁에 두기 위해 지난 6개월 동안 치밀하게 법과 제도를 다루었던 남자의 지적이고도 야성적인 매력이 고스란히 묻어났다.그는 채원의 앞에 걸음을 멈추고 앉아 한쪽 무릎을 꿇었다. 채원이 뜯다 만 상자 테이프를 제 손으로 가볍게 잡아당기며 물건들을 하나씩 분류하기 시작했다."그럼 도우러 온 일꾼 하나쯤은 곁에 둬도 되잖아. 계산은 돈이 아니라 다른 거로 받아도 좋고."도현이 아주 낮게 속삭이며 올려다보자, 채원의 귓가에 희미한 열기가 번졌다. 채원은 그의 시선을 피하려 괜히 다른 상자로 손을 뻗었다."이해관계 조율치고는 단가가 지나치게 높은 일꾼이네요, 차 대표님.""윤 대표가 주는 일이라면 단가는 상관없어. 부도 직전의 매출 채권이라도 기꺼이 살 용의가 있으니까."그가 싱긋 웃으며 채원의 굳어 있던 손목을 가볍게 짚었다. 그의 손바닥에서 흘러나오는 뜨거운 온기가 차가운 손등을 타고 팔목 안쪽까지 순식간에 차올랐다.채원은 그의 손을 떨쳐내지 않았다. 펜트하우스에서 30일간의 기묘한 동거를 시작했던 첫날 밤에는 그 체온 하나에 매번 날을 세우고 경계를 쳤지만, 이제는 그의 존재 자체가 온전히 자신의 우주 안으로 깊숙이 영입되었음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도현은 말없이 이삿짐 정리를 도왔다. 낡은 서류철을 제자리에 꽂아 넣고, 채원이 디자인 연구를 위해 모아두었던 원단 스와치 북들을 서재 책장에 반듯하게 정렬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거창한 유도신문이나 해명은 흘러 다니지 않았다.8년 동안 지독하게 비틀렸던 시간의 사슬을 팩트로 입증해 낸 영리한 두 사람이었기에, 이제는
자존심도, 몰락해 가는 가문의 그늘도, 스물한 살의 여린 손가락을 스치던 슬픔도 모두 누른 채 위탁 매장의 영수증을 받아 쥐었던 그날의 기억. 그것은 적선이나 동정이 아니었다.그것은 아직 가치를 인정받지 못해 모두가 비웃던 차도현이라는 존재를 향한, 채원만의 가장 투명하고도 유일했던 사랑의 선언이었다.하지만 도현은 그 지독한 진실을 8년 동안 전혀 알지 못했었다. 채원이 자신을 다른 동기들과 함께 비웃고 버린 뒤 비겁하게 돈을 선택해 떠난 줄로만 믿고, 미워하려 애쓰면서도 단 한 순간도 그 손끝을 마음에서 놓지 못했던 그 고독한 순정의 시간들.서로가 상대방에게 버림받았다고 철저히 믿었기에 확인하는 것조차 두려워 외면했던 8년의 공백은, 그만큼 가슴 아프고 시린 겨울이었다.조용한 초인종 소리가 적막한 거실의 감상적인 공기를 가볍게 흔들었다.채원은 들고 있던 기획서를 가만히 소파 위에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터폰 화면을 확인하기도 전에, 이 시간에 자신을 찾아올 단 한 사람의 실루엣이 본능적으로 떠올랐다.문을 열자, 밤사이 더욱 굵어진 늦여름 밤바람의 차가운 냄새와 함께 차도현이 서 있었다. 늘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각이 잡혀 있던 아르덴의 차가운 투자사 대표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회색 슈트 재킷은 한쪽 팔에 대충 걸쳐져 있었고, 단단한 턱밑을 죄고 있던 넥타이는 진작에 풀어 가방에 밀어 넣었는지 단정하던 흰 셔츠 깃이 비틀려 가슴팍까지 흐트러져 있었다. 이마 위로 가볍게 흘러내린 머리카락에는 차가운 밤이슬과 미세한 빗방울이 하얗게 서려 있었다.도현의 집요한 시선이 문이 열리는 짧은 틈을 타 채원에게로 곧장 와 닿았다. 조금 젖어 목덜미에 착 달라붙은 그녀의 갈색 머리끝, 얇은 셔츠 아래로 비치는 가냘픈 실루엣, 그리고 먼지가 묻어 조금 희끗해진 바지 무릎을 향해 그의 눈빛이 천천히 쓸려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