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시계 초침 소리가 병원 대기실보다 더 건조하게 울렸다.호텔 9층. 조용한 미팅룸. 탁자 위엔 차가 식었고, 햇살도 들지 않았다.유리는 앉아 있었고, 시훈은 문 앞에 서 있었다.이 장면은 너무 정갈해서 마치 준비된 연극 같았다.그녀는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둔 채 시훈을 정면으로 바라봤다.“저를 여기로 부르신 이유가 뭔가요?”목소리는 단단했지만, 긴장이 묻어나는 결.하지만 유리답게 그 결조차 조용하게 곧았다.시훈은 웃지 않았다.“차 한 잔 하시죠. 커피보단… 오늘은 진저티로 준비했습니다.”“마시지 않겠습니다.”“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제 이야기는 들어주시겠죠?”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대신, 손끝으로 테이블을 아주 천천히 톡톡 두드렸다.세 번. 규칙적인 리듬.그건 유리가 깊은 생각을 시작할 때 보이는 신호였다.시훈은 그것까지 읽는 듯 천천히 맞은편에 앉았다.“조유리 씨는 자신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세요?”“제 성격 분석하려고 부르신 건 아니겠죠.”“분석요? 아뇨, 전 이미 오래전에 끝냈습니다.”“…무슨 말씀이시죠?”시훈은 테이블 아래에서 작은 종이 한 장을 꺼냈다.그 안엔 유리의 대학 시절 출석 기록,가족관계, 졸업 논문 주제,심지어 대학교 앞에서 마지막으로 주문했던 커피 취향까지 있었다.라떼에 시나몬 가루를 싫어했던 조유리.미세하게 써놓은 이력은 마치 누군가의 일기처럼 섬세했다.“이걸 왜…”“제가 조유리 씨를 처음 본 건, 서울법대 1학년 2학기, 교양 철학 수업이었습니다.”“…….”“그때부터였습니다. 이상하게 눈에 밟히더군요.”“스토킹입니까?”“스토킹은 관심의 저급한 방식이고, 저는 항상 ‘관찰’에 가까운 거리에서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아주 천천히 들여다봤죠.”유리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마음속에선 정체 모를 찬물이 머리 위로 끼얹어지는 듯한 불쾌감이 밀려왔다.그 불쾌감은 곧 ‘알고 있었다는 공포’로 뒤바뀌었다.“유진 씨의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놀라지 않으셨죠.”
이우는 새벽 2시가 넘도록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핸드폰에 뜬 한 줄 메시지.'센터 앞에 누가 있었어요. 방금 도망쳤어요.'보낸 사람은 은서였다. 그리고, 유리였다.그는 바로 차를 몰았다. 강남의 불 꺼진 센터 앞에 도착했을 땐 이미 경찰차 한 대가 도착해 있었다.문은 일부 파손됐고, 안에는 아무것도 도난당한 게 없었다.하지만 더 무서운 건, 그 모든 흔적이 마치 ‘누군가의 경고’처럼 보인다는 점이었다.유리는 조용히 의자에 앉아 있었다.이우가 다가가도 그녀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무섭지는 않으셨습니까?”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유리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그 눈엔 피로보다 깊은 감정이 들어 있었다.“…무서웠어요.”그리고 이어지는 한 마디.“근데 더 무서운 건… 이제 누굴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거예요.”이우는 말없이 그녀 옆에 앉았다.긴 침묵이 흐른 뒤, 유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제가 이러려고 센터 연 게 아닌데요…”“…조유리 씨가 만든 곳입니다. 어떤 흔들림이 와도 유리 씨가 있는 한, 이곳은 무너지지 않습니다.”“그 말, 진심이세요?”“물론입니다.”유리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그럼… 그 말 하신 김에 제 마음도 받아주시면 안 돼요?”이우의 눈빛이 흔들렸다.“…그건, 제가 감당할 수 있을 때…”“이젠 그런 말 듣기 싫어요.”그녀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단호했다.“계속 밀어내면서 계속 옆에 있는 거, 저한텐 더 잔인해요.”잠시 정적이 흘렀다.그리고 유리는 천천히 이우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올렸다.“저, 이우 씨가 있어서 살아남았어요. 근데 이젠, 이우 씨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아요.”그녀의 눈동자는 맑았다. 슬픔이 아닌, 확신이 담겨 있었다.이우는 그 말을 들으면서도 아무것도 대답할 수 없었다.말로는 붙잡을 수 없는 감정이 지금 이 순간, 손끝에 전해지고 있었다.그 시각. 시훈은 어두운 회의실 안에서 CCTV 영상을 재생하고 있었다.영상엔 누군가 센터 앞에서 잠시
카페 유리문에 붙은 ‘심리상담 예약 가능’ 안내문이 오늘따라 자꾸 눈에 밟혔다.예약은 한 건도 없었고, 전화도 울리지 않았다.센터 안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고, 그 침묵은 유리의 생각을 더 소란스럽게 만들었다.책상 위 종이컵은 비어 있었고, 그 옆에는 시훈이 두고 간 명함이 아직 그대로였다.하얀 바탕에 정갈한 활자. 윤시훈.그 이름만으로 이 며칠 사이, 유리는 너무 많이 흔들리고 있었다.“유리 씨, 오늘도 센터에 혼자 계세요?”이우의 음성이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응. 아직 사람도 없고… 그냥 혼자 정리 중이에요.”“혼자 있기엔, 지금 상황이 조금…”“괜찮아요. 나, 혼자 있는 데 익숙하잖아요.”이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유리에게는 그 말, 너 자신도 믿지 않잖아라는 속삭임처럼 들렸다.잠시 후, 이우는 예고 없이 센터 문을 열고 들어왔다.유리는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또 왔네요.”“오늘은 이유가 있어요.”이우는 손에 들린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윤시훈. 그 사람이 최근에 접근한 기관들 리스트예요.”유리는 봉투를 받아들고, 천천히 서류를 넘겼다.그리고 어느 순간 손이 멈췄다.‘한국심리복지재단. 2023년 하반기 인턴 심사 조작 건.’“…이거 진짜예요?”“공식으론 무혐의 처리됐지만, 내부적으로 여러 증거들이 있었어요.”유리는 말없이 서류를 내려다보다가, 작게 중얼거렸다.“왜 나한테 이런 짓을… 왜 굳이 나를…”이우는 조용히 말했다.“유리씨가 그 사람의 목표라는 증거는 없어요.하지만, 그 사람은 예전부터 유리씨를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유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이우 씨.”그가 고개를 들었다.“사람이 무너지는 건 바깥에서 누가 밀어서가 아니라, 내 안에서 누가 흔들기 시작할 때예요.”“…그래서요?”“그래서 무서워요. 나, 지금 흔들리고 있다는 걸 너무 잘 아니까.”이우는 그녀의 말에 한 걸음 다가섰다.“흔들리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게 당신 잘못은 아니고.”그 말에 유리는 눈을
센터 입구 유리문에 익숙한 로고 스티커가 어긋나 있었다.그 사소한 틈이 유리는 이상하리만큼 신경 쓰였다.문을 열자, 실장 은서가 조심스레 다가왔다.“상담 예약 3건, 오늘 다 취소됐어요.”“이유는?”“하나는 아이가 갑자기 아프다고…두 개는 그냥 사정 변경이라며…”유리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표정은 묘하게 굳어 있었다.“혹시 다 같은 날, 예약된 사람들?”“…네. 일주일 전에 동시에 들어왔어요.”그 말을 듣는 순간, 유리의 뒷목이 싸늘해졌다.그날 저녁, 이우가 센터를 찾았다.그는 말없이 앉아있었고, 유리는 조용히 차를 건넸다.“이우 씨.”“응.”“혹시 우리 센터 운영…누군가 방해하고 있는 걸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이우는 곧바로 되묻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말했다.“생각하고 있었어요. 처음 예약이 들어왔을 때부터.”“…왜 말 안 했어요?”“당신이 흔들리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유리는 잠시 침묵하더니 작은 목소리로 중얼였다.“이미 흔들렸어요.”그녀는 이우 옆에 조용히 앉았다.“당신이 옆에 있으면 내가 강해질 줄 알았어요. 근데, 그게 아니었나 봐요.”“왜요.”“당신이 옆에 있으면 약해져요. 기대고 싶어져요. 참고 싶지 않아져요.”이우는 눈을 감았다.그 말은 그의 모든 인내를 조용히 긁어내는 문장이었다.유리는 이우의 어깨에 조심스레 머리를 기대며 말했다.“이런 날은요… 당신이 입술 한 번만 기울이면 나는 무너질 것 같아요.”이우는 숨을 참았다. 그 말이 너무 가까웠다.감정의 문턱을 너무 무방비하게 열었다.“그래도, 무너지지 마요.”“…왜요.”“지금 당신이 무너지면, 나도 같이 무너져요.나는 당신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온전하지 않아요.”그날 밤, 시훈은 자신의 사무실 안에서익명의 계정으로 센터 홈페이지를 열었다.예약 취소 버튼이 붉게 깜빡였다.“처음은 항상 사소해야 해요. 무너짐은 작은 실금에서 시작하니까.”그는 단추를 꺼내, 작은 금속 상자에 올려놓았다.그 단추 위에 유리의 이름을 적은 메모지
새벽 세 시, 유리는 커튼을 열지 않은 채 소파에 앉아 있었다.거실엔 조명이 없었고, 손에 들린 머그잔엔 식은 커피가 그대로였다.핸드폰 화면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그녀는 천천히 사진첩을 열었다.이우와 함께 찍은 사진은 단 한 장. 그것도 어느 날 우연히 거울에 비친 뒷모습이었다.그는 유리의 뒤에 있었고, 유리는 웃고 있었다.하지만 그 웃음은 지금의 그녀가 낼 수 없는 표정이었다.“당신은 왜 그렇게 멀어요.”소리 내어 말했지만, 들리는 사람은 없었다.다음 날 오후, 이우는 센터를 찾았다.도움이 필요하다는 말도, 급한 일이라는 연락도 없었지만 그는 어김없이 찾아왔다.그냥 오는 사람이었다.“또 혼자 있었어요?”그가 묻자, 유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혼자 있어도 괜찮은 날이었어요. 근데, 혼자 있지 않게 됐네요.”그 말에 이우는 말없이 유리의 손에 따뜻한 차 한 잔을 건넸다.그 손이 잠시 닿았다. 유리는 그 짧은 온기에 숨을 삼켰다.“이우 씨.”그가 고개를 들었다.“왜 나한테 말 안 해요?”“…무슨 말요.”“나, 많이 흔들리죠. 어떤 날은 당신한테 기대고 싶고,어떤 날은 기대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에 나 자신이 밉기도 하고…”이우는 가만히 앉아 있었고, 유리는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근데 당신은, 늘 똑같이 앉아 있잖아요. 움직이지도 않고, 밀지도 않고.”“…그게 나예요.”유리는 속삭였다.“그럼 내가 움직일게요.”그녀는 그의 옆으로 다가가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오늘은, 이 정도까지 할게요. 내가 이 이상 가면… 당신이 또 나를 밀까 봐 무서우니까.”이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그의 손등이 천천히 유리의 손등에 닿았다.잠시. 그러다 아주 천천히, 떼어냈다.그리고 그날 밤.시훈은 조용히 컴퓨터 앞에서 한 장의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었다.조유진의 부검 당시 누락된 단추 사진. 그는 그 단추를 손에 들고 눈을 감았다.“조유리. 너를 여기까지 오게 하려고, 내가 없앤 건 단추 하나가 아니었어.”
이우는 조용히 실내로 들어왔다.서로 마주 앉기까지 몇 초간의 침묵. 그 몇 초가 유리에게는 숨이 턱 막히는 시간이기도 했다.“그 남자 윤시훈, 그 사람 뭔가 이상해요.”이우는 눈썹을 찌푸렸다.“뭐가 이상했어요?”“너무… 정리돼 있어요. 말하는 속도, 눈빛, 단어 선택까지.누굴 설득하는 게 아니라, 누굴 유인하는 것처럼 느껴졌어요.”이우는 묵묵히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유리는 그 반응만으로도 안도했다.자신의 감정이 과하지 않았다는 증거 같았다.“그래서, 그 사람이 말하는 프로젝트 같은 거… 안 하기로 했어요.”“잘했어요.”이우는 그렇게 말했다. 짧고 단정한 문장이었지만, 그 속엔 유리를 믿는 감정이 들어 있었다.유리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말을 덧붙였다.“근데…그 사람, 또 올 것 같아요.”“와도 돼요. 그 대신, 그 앞에 나부터 서 있을 거예요.”말을 마친 이우는 자리에서 일어섰다.“잠깐… 이우 씨.”그를 부르는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흔들리고 있었다.그가 돌아서자, 유리는 망설이다가 말했다.“…혹시 내가 그 사람한테 위험해지면 어떡해요?”“그런 일 없게 할 거예요.”“그래도…혹시 그런 날이 온다면…”이우는 그녀를 향해 한 걸음 다가왔다.“…그런 날엔 제가 유리씨 옆에 있을 거예요.”말을 마치고 문을 나서는 이우를 향해 유리는 무의식적으로 다가섰다.“이우 씨”그는 돌아섰고, 그 순간 유리는 그의 셔츠 소매를 잡았다.눈동자가 흔들렸고, 숨결이 가까워졌다.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도 마찬가지였다.오직 조용한 정적 속에서 두 사람은 그날만큼은 아무것도 더하지 않기로 했다.그날 밤, 시훈은 서류철을 정리하며 웃고 있었다.“그래, 그렇게 천천히 무너지면 돼요.신뢰 같은 거… 깨지는 데 오래 걸릴수록, 더 예쁘게 부서지거든요.”그의 손끝에서 유리의 인터뷰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그리고 화면에 떠 있는 자막 위로 시훈은 손가락을 얹었다.‘조유리. 정의를 묻던 자에서, 사람을 안아주는 사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