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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조작된 온도

مؤلف: 데이지
last update تاريخ النشر: 2026-06-25 10:11:15

그의 집은 고급 펜트하우스였다.

유리는 딱히 놀라지 않았다.

이현의 사치와 허세는 그에겐 정체성 같은 것이었으니까.

와인, 음악, 조명.

그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보이려 했지만,

그의 말투와 행동은 조심스러워졌고, 눈빛은 자꾸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여기까지 와줘서 고마워요.”

“초대했잖아요.”

“근데… 진짜 올 줄 몰랐거든.”

유리는 웃지 않았다.

대신,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왜요? 제가 당신한테 너무 어려운 여자라서?”

“아니, 너무… 신경 쓰이는 여자라서.”

이현은 와인을 따르며 말했다.

그리고 한참 뒤, 유리는 잔을 들고 조용히 물었다.

“정말… 신경 쓰여요? 그 정도로?”

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매일 생각나요. 이름도 모르는 여자를, 매일.”

그 말은 고백 같았지만, 유리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잔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은 이 정도로 할게요.”

“벌써 가요?”

“당신과 더 있으면 오늘 밤을 넘길 것 같아서….”

유리의 그 말이 너무 매혹적이고, 강한 유혹을 암시했지만, 이현은 붙잡지 못했다.

문을 열고 나서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자신이 지금 어떤 게임에 들어와 있는지도 모른 채, 점점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순간, 작은 미소를 지었다.

입꼬리 끝에 스친 감정은 동정도, 연민도 아니었다.

예정된 무너짐. 그것을 설계하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냉정한 웃음이었다.

이제 반쯤은 넘어왔다. 그리고 난, 절반에선 절대 멈추지 않는다.

이현은 요즘 거울을 자주 들여다보는 자신이 낯설었다.

새벽 두 시. 욕실 불빛 아래 비친 얼굴은 평소보다 수척했고, 

눈가에는 그늘이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녀와 만난 이후, 그는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하루의 대부분이 그녀를 중심으로 재편됐고, 

메시지를 보낼지 말지 결정하는 데만 한 시간을 쓰기도 했다.

평소라면 미련하다고 치부했을 행동을, 그는 아무렇지 않게 반복하고 있었다.

그는 몰랐다. 그가 느끼는 이 감정이 사랑이 아닌 중독이라는 걸.

한편 유리는 냉정했다.

그녀에게 이현은 ‘사랑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사랑하게 만들어야 할 대상’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는 점점 더 깊이 빠져들고 있었다.

그녀는 일부러 하루에 한 번만 답장을 했다.

그마저도 뜨문뜨문, 감정을 담지 않고 짧게. 그의 반응은 예측대로였다.

단답에도 안도했고, 기다림 속에서 더 애가 타는 것 같았다.

“좋아, 이 정도면 충분해.”

유리는 핸드폰을 내려두고, 수험서를 다시 펼쳤다.

복수는 철저해야 했다.

그를 완전히 무너뜨려야, 마지막 순간에 자백을 끌어낼 수 있다.

며칠 후, 이현이 먼저 연락했다.

[지금 시간 돼요? 저녁이라도 같이 먹을래요?]

유리는 잠시 멈췄다가, 아주 천천히 답장을 보냈다.

[오늘은 안 돼요. 다음에 봐요.]

이현은 답장을 받은 뒤, 잠시 화면을 들여다보다 혼잣말처럼 웃었다.

“또 다음이래.”

그는 핸드폰을 식탁 위에 내려놓고, 그대로 앉은 채 창밖을 바라봤다.

해는 이미 저물었고, 그의 방엔 형광등 하나 켜지 않은 채 정적이 흘렀다.

그날 밤, 유리는 침대맡에 앉아 이현의 이름을 천천히 메모장에 적었다.

[서이현 – 심리 반응 고조 / 의존 관계 강화 중 / 수면패턴 흔들림 감지]

복수의 시계는 정확히 돌고 있었다. 그가 애쓰고, 기다리고, 

애타는 만큼 그녀는 멀어졌다.

그래야 더 무너진다. 그래야 그가 스스로 고백하게 된다.

“이제 절반은 왔어. 아직 멀었지만.”

유리는 메모를 덮고, 불을 끄며 속삭였다.

“조금만 더.”

서이현은 요즘 밤이 길다고 느꼈다.

예전 같으면 그 긴 밤을 술과 사람으로 채웠을 텐데,

이젠 텅 빈 집 안에 혼자 앉아 그녀의 메시지를 기다리는 일로 채워졌다.

[잘 지내요?]

그는 그렇게 메시지를 보냈고, 전송된 시간은 오후 8시 03분.

답장은 오지 않았다.

9시를 넘기고, 10시를 지나고, 자정을 넘겨도 여전히 읽음조차 뜨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머리를 감싸쥐었다.

“미치겠다, 진짜.”

유리는 일부러 답장을 늦췄다.

아무 이유도 없었다. 그저, 그렇게 해야만 하니까. 

서이현이라는 남자. 그는 지금 감정을 사랑이라 착각하고 있었고,

그 착각이 깊어질수록 그녀는 계획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 관계는 온기로 움직이지 않았다.

조율되고 조작된 온도 속에서 그는 천천히 익어가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유리는 짧은 답장을 보냈다.

[잘 지내고 있어요. 생각보다 바쁘네요.]

마침표도, 이모티콘도 없는 문장.

하지만 이현은 그 한 줄에 마음을 쏟았다.

바쁘다는 말은 곧 나중에 여유가 생길 수도 있다는 말,

그러니 희망을 가져도 된다는 착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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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너무 위험한 여자   42. 입술을 깨물고 말하지 못한 말

    새벽 세 시, 유리는 커튼을 열지 않은 채 소파에 앉아 있었다.거실엔 조명이 없었고, 손에 들린 머그잔엔 식은 커피가 그대로였다.핸드폰 화면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그녀는 천천히 사진첩을 열었다.이우와 함께 찍은 사진은 단 한 장. 그것도 어느 날 우연히 거울에 비친 뒷모습이었다.그는 유리의 뒤에 있었고, 유리는 웃고 있었다.하지만 그 웃음은 지금의 그녀가 낼 수 없는 표정이었다.“당신은 왜 그렇게 멀어요.”소리 내어 말했지만, 들리는 사람은 없었다.다음 날 오후, 이우는 센터를 찾았다.도움이 필요하다는 말도, 급한 일이라는 연락도 없었지만 그는 어김없이 찾아왔다.그냥 오는 사람이었다.“또 혼자 있었어요?”그가 묻자, 유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혼자 있어도 괜찮은 날이었어요. 근데, 혼자 있지 않게 됐네요.”그 말에 이우는 말없이 유리의 손에 따뜻한 차 한 잔을 건넸다.그 손이 잠시 닿았다. 유리는 그 짧은 온기에 숨을 삼켰다.“이우 씨.”그가 고개를 들었다.“왜 나한테 말 안 해요?”“…무슨 말요.”“나, 많이 흔들리죠. 어떤 날은 당신한테 기대고 싶고,어떤 날은 기대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에 나 자신이 밉기도 하고…”이우는 가만히 앉아 있었고, 유리는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근데 당신은, 늘 똑같이 앉아 있잖아요. 움직이지도 않고, 밀지도 않고.”“…그게 나예요.”유리는 속삭였다.“그럼 내가 움직일게요.”그녀는 그의 옆으로 다가가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오늘은, 이 정도까지 할게요. 내가 이 이상 가면… 당신이 또 나를 밀까 봐 무서우니까.”이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그의 손등이 천천히 유리의 손등에 닿았다.잠시. 그러다 아주 천천히, 떼어냈다.그리고 그날 밤.시훈은 조용히 컴퓨터 앞에서 한 장의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었다.조유진의 부검 당시 누락된 단추 사진. 그는 그 단추를 손에 들고 눈을 감았다.“조유리. 너를 여기까지 오게 하려고, 내가 없앤 건 단추 하나가 아니었어.”

  • 너무 위험한 여자   41. 소리 없는 마주침

    이우는 조용히 실내로 들어왔다.서로 마주 앉기까지 몇 초간의 침묵. 그 몇 초가 유리에게는 숨이 턱 막히는 시간이기도 했다.“그 남자 윤시훈, 그 사람 뭔가 이상해요.”이우는 눈썹을 찌푸렸다.“뭐가 이상했어요?”“너무… 정리돼 있어요. 말하는 속도, 눈빛, 단어 선택까지.누굴 설득하는 게 아니라, 누굴 유인하는 것처럼 느껴졌어요.”이우는 묵묵히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유리는 그 반응만으로도 안도했다.자신의 감정이 과하지 않았다는 증거 같았다.“그래서, 그 사람이 말하는 프로젝트 같은 거… 안 하기로 했어요.”“잘했어요.”이우는 그렇게 말했다. 짧고 단정한 문장이었지만, 그 속엔 유리를 믿는 감정이 들어 있었다.유리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말을 덧붙였다.“근데…그 사람, 또 올 것 같아요.”“와도 돼요. 그 대신, 그 앞에 나부터 서 있을 거예요.”말을 마친 이우는 자리에서 일어섰다.“잠깐… 이우 씨.”그를 부르는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흔들리고 있었다.그가 돌아서자, 유리는 망설이다가 말했다.“…혹시 내가 그 사람한테 위험해지면 어떡해요?”“그런 일 없게 할 거예요.”“그래도…혹시 그런 날이 온다면…”이우는 그녀를 향해 한 걸음 다가왔다.“…그런 날엔 제가 유리씨 옆에 있을 거예요.”말을 마치고 문을 나서는 이우를 향해 유리는 무의식적으로 다가섰다.“이우 씨”그는 돌아섰고, 그 순간 유리는 그의 셔츠 소매를 잡았다.눈동자가 흔들렸고, 숨결이 가까워졌다.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도 마찬가지였다.오직 조용한 정적 속에서 두 사람은 그날만큼은 아무것도 더하지 않기로 했다.그날 밤, 시훈은 서류철을 정리하며 웃고 있었다.“그래, 그렇게 천천히 무너지면 돼요.신뢰 같은 거… 깨지는 데 오래 걸릴수록, 더 예쁘게 부서지거든요.”그의 손끝에서 유리의 인터뷰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그리고 화면에 떠 있는 자막 위로 시훈은 손가락을 얹었다.‘조유리. 정의를 묻던 자에서, 사람을 안아주는 사람으로

  • 너무 위험한 여자   40. 조용한 파문

    재판이 끝난 지 사흘째 되는 날. 유리는 처음으로 알람 없이 눈을 떴다.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햇살은 낯설 만큼 따뜻했고,창 밖의 소음은 더 이상 사건을 이야기하지 않았다.오랜만에 ‘아무 일도 없는 하루’가 시작되는 듯했지만,그 고요함이 그녀에겐 불편한 정적처럼 느껴졌다.‘끝났다는 게… 이토록 텅 비어 있을 줄은 몰랐어.’오전엔 강남구청 민원실을 찾았다.상담센터 개소 관련 서류를 준비하기 위해유리는 낡은 검정 서류가방을 들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사복을 입고 앉아 있는 지금,더는 검사의 얼굴이 아닌 ‘상담사 유리’로 서 있는 자리였다.그러나 몸 어딘가에 아직 그때의 서늘한 공기가 남아 있었다.그때, 낯선 목소리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조유리 검사님… 아, 아니. 상담사님이라고 불러야 하나요?”고개를 들자 단정한 정장 차림의 남자가 서 있었다.눈매는 날카롭지 않았지만 깊었고,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무언가를 미리 계산한 듯했다.“윤시훈입니다. 법무법인 신율 소속 변호사이고요. 조유진 씨 재판 관련 언론 보도에서 이름을 여러 번 뵈었습니다.”유리는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어떻게 알고 찾아오신 거죠?”“센터 개소 소식을 들었습니다. 제가 담당하는 재단이 심리상담 프로젝트를 준비 중인데, 조유리 님이 함께해주시면 정말 좋을 것 같아서요.”유리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그의 말을 조용히 흘려들었다.재단의 이름도, 그가 소속된 법무법인도 들어본 적은 있었지만이렇게 구체적으로 자신의 일정까지 파악한 상대는 처음이었다.“죄송하지만, 저를 찾으신 이유가 단순한 협업 때문은 아니겠죠?”그녀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시훈은 억지 미소 없이, 담백한 표정으로 말했다.“맞습니다. 이건 단순한 제안이 아닙니다.검사직을 내려놓고 지금처럼 상담사로 방향을 트신 이유 그게 궁금했습니다.”유리는 말없이 테이블 위에 놓인 물컵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법 안에 있었을 땐, 진실보다 증거가 먼저였어요.사람이 아니라, 수치로 판단됐죠

  • 너무 위험한 여자   39. 진실의 결을 따라서

    그날, 유리는 법정에서 울지 않았다.목소리가 떨리지도 않았고,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았다.하지만 그 자리에 앉아 있던 모든 사람은 알았다.그녀가 무너졌다는 걸. 다만, 무너진 상태로도 말을 할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 강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도.이우는 방청석 가장 뒤에서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그는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하지만 시선은 단 한 번도 다른 곳으로 흐르지 않았다.그가 유리를 바라보는 건 동정도, 사랑도 아닌 존재에 대한 경의에 가까웠다.살아 있는 사람이, 죽은 사람을 대신해 자기 목소리를 써서 세상에 말을 거는 순간.그건 가장 인간적인 방식의 복수이자 가장 아름다운 방식의 사죄였다.그날 유리는 법정을 나서며 자신이 무언가를 끝냈다는 확신을 하지 않았다.그런 건 없었다. 그저 지나온 시간을 더는 숨기지 않아도 된다는 묘한 평온함만이 남아 있었다.그리고 그게, 지금의 그녀에겐 전부였다.법정을 나왔을 때, 바람이 불고 있었다.이상하리만큼 따뜻한 바람이었다.사람들이 말하는 ‘후련함’은 없었다.눈에 보이는 것도, 손에 잡히는 것도 없었다.그런데도유리는 그 바람을 맞으며, 처음으로 숨을 들이쉴 수 있었다.그전까지는 모든 호흡이 언니를 향한 죄책감, 말하지 못한 진실, 감당하지 못한 분노로 뒤엉켜 있었으니까.이제야 가슴 한 켠이 텅 비어 있다는 걸 알게 됐다.텅 빈 자리가 비로소 '살아남은 자리'라는 것도.“끝났네요.”목소리는 이우였다.그는 그녀를 따라 법정을 나서면서 단 한 발자국도 옆으로 다가서지 않았다.그는 언제나 그랬다.유리를 지켜보되, 닿지는 않았다.“아니요,”유리는 조용히 대답했다.“끝난 게 아니라…그냥, 놓은 거예요.”둘은 근처 조용한 카페에 들어갔다.창가 쪽 자리에 마주 앉았지만 시선은 맞닿지 않았다.테이블 위엔 따뜻한 물만 놓여 있었다.커피도, 차도 아니었다. 그 날의 감정은 향기조차 낼 수 없는 투명한 무언가였다.“왜 안 물어봤어요?”유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입술이 약간

  • 너무 위험한 여자   38. 우리는 같은 진실을 다르게 기억한다

    법정에 서는 일은 누군가에게는 정의의 시작일 수도 있지만,누군가에게는 자신의 내장을 꺼내어 보는 일에 가까웠다.유리는 지금 그 가운데에 있었다.검찰청 지하 회의실. 형사6부 증인 면담실.유리는 수사관 앞에 앉아 유진이 남긴 유언, 녹음, 상담 기록,그리고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정황을 진술하고 있었다.그녀의 목소리는 단 한 번도 떨리지 않았다.하지만 입을 다물고 나서는 순간마다, 손끝에 작은 경련이 일었다.“직접 증언대에 서시겠습니까?”김도환 부장의 물음에 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제가 말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제 언니의 말을 기억해주지 않을 것 같아서요.”그 말은 담담했지만, 그 속엔 아무도 대신 들어줄 수 없는 울음의 뒷면이 있었다.퇴근 시간 무렵, 로비를 지나 나오는데 낯익은 그림자가 시야에 들어왔다.검은 코트, 손에 들린 커피,그리고 아직도 끝내 다 담지 못한 듯한 눈빛. 이우였다.유리는 놀란 표정도, 반가움도 보이지 않았다.단지 멈춰 섰고, 이우는 말없이 커피 한 잔을 내밀었다.“오늘, 서 있는 걸로도 충분히 잘한 날 같아서요.”그 말에 유리는 작게 숨을 쉬었다.그리고 커피를 받아들었다.둘은 근처 공원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말없이 커피를 마시고, 서로를 바라보지 않은 채 한참을 있었다.그러다 이우가 조심스럽게 말했다.“그날 이후, 당신이 무너지진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무너졌죠.”유리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근데요, 무너졌다는 걸 인정하고 나니까 어떻게든 다시 서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혼자요?”“처음엔요. 근데 지금은…혼자이길 원하진 않아요.”이우는 그 말에 긴 숨을 내쉬었다.그건 안도도, 후회도 아닌 작은 확신처럼 들렸다.“그럼…옆에 있어도 되나요?”유리는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그 눈빛엔 용서도, 원망도 없었다.단지 한 사람의 얼굴을 기억하려는, 작은 인간의 의지가 담겨 있었다.“있어요. 다만… 그때처럼 말없이 사라지진 말아요.”밤이

  • 너무 위험한 여자   37. 감정의 주소

    비가 그친 뒤의 공기는 항상 무언가를 남기고 간다.젖은 아스팔트, 말라붙은 눈물처럼 끈적이는 하늘, 그리고 침묵.유리는 이현의 고백을 듣고도 마음속 깊은 곳 어딘가가 텅 빈 방처럼 메워지지 않았다.‘그날, 나는 아무 말도 못 했어요.’그 말은 책임도 후회도 아니었다.그건 두려움의 기록이었다.그리고 그 두려움이 유진을 진짜로 외롭게 했다는 걸,이제서야 그녀는 이해할 수 있었다.밤이 깊어지고 유리는 언니의 다이어리 마지막 장을 다시 펼쳤다.그리고 그녀는 미처 보지 못했던, 희미하게 번진 연필 자국 하나를 발견했다.‘반포 6길… 11-2…’‘P.S. 여기서 처음 울었고, 마지막으로 웃었어.’그 문장은 주소도, 추억도, 유언도 아니었다.그건 그저 유진이라는 사람의 감정이 마지막으로 멈춘 장소였다.다음 날, 유리는 그곳으로 향했다.반포 6길. 지나가는 이들조차 발걸음을 줄이는 낡은 원룸 건물, 그리고 그 옆 좁은 골목.주소지의 ‘11-2’는 건물 지하 공간이었다.문은 잠겨 있지 않았고, 철문은 오래된 나무처럼 소리를 냈다.그리고 그 안, 한 켠에 작고 낡은 철제 사물함이 있었다.표면엔 ‘정서연’이라는 이름표.아무도 가져가지 않은 택배 상자가 하나 그 앞에 놓여 있었다.박스를 열었다. 그 안엔 봉투 두 장과 잘 접힌 흰색 블라우스,그리고 녹음기 하나.첫 번째 봉투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이건 혹시, 그 애가 와서 열게 된다면.”그 애 유리였다.녹음기를 틀었다.“이건 유리를 위한 거야. 그 애가 나를 정말로…끝까지 따라오게 된다면, 내가 말해주고 싶은 마지막이기도 해.”“난 이현을 원망하지 않아. 그 사람은 그냥… 나처럼 약했을 뿐이야.”“그 사람을 미워하지 마. 그 감정은 내가 이미 충분히… 끝냈어.”유리는 더 이상 듣지 못했다.녹음기는 계속 재생되고 있었지만 그녀는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그 안에 담긴 말들은 자기를 향한 분노가 아니라 마지막까지 남겨진 사랑이었다.두 번째 봉투에는 사진 한 장이 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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