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시현이 행사 안내 파일을 열었다.
맨 위에는 차성그룹 비서실이라고 적혀 있었다. 참석자 명단과 행사장 배치, 발표 장치 반납 장소. 그 아래 작은 글씨로 자료 대기실 2001호가 있었다. 이서는 자기 예약 확인서와 그 문장을 나란히 놓았다.
“저 방을 제가 쓴다는 것도 알았어요?”
“나중에는요. 이서 씨가 번호를 보냈으니까.”
“그전에는 몰랐고요?”
“정확히는, 누구 방인지는 확인하지 않았어요.”
처음에 들은 대답과 조금 달라졌다. 이서는 곧바로 따지지 않았다. 시현은 자신이 틀리지 않을 문장을 고르고 있었다. 그 문장들이 같은 방향을 보고 있는지 살펴야 했다.
복도 건너편에서 민우의 노트북이 울렸다. 파일 전송이 끝난 모양이었다. 민우는 담당자와 통화하며 계단 쪽으로 내려갔다. 둘만 남자 시현이 의자를 조금 앞으로 당겼다.
“아까 질문, 계속해도 돼요?”
이서가 물었다.
“무슨 질문인데요.”
“그날 저랑 잤어요?”
시현의 입술이 벌어졌다가 닫혔다. 그는 이서의 눈을 오래 보았다. 질문이 어디까지를 묻는지 확인하는 시선이었다. 이서는 피하지 않았다.
“아니요.”
“키스 다음에는요?”
“아무 일 없었어요.”
이서는 물컵을 들었다가 다시 놓았다. 시현에게 그런 질문을 할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조교실에 둘이 남았을 때 서로 말이 없어지던 순간은 있었다. 그런 날이면 시현은 먼저 컴퓨터 화면을 돌렸고, 이서는 자료를 보는 척했다.
한 번은 도서관이 닫힌 뒤 같이 버스를 기다렸다. 비가 왔는데 우산은 하나였다. 시현이 우산을 넘겨주고 뛰어가려 하자 이서가 소매를 잡았다. 같이 쓰면 되는데 왜 그러느냐고 했다. 그는 그녀를 보다가, 그러면 자기가 너무 좋아할 것 같다고 답했었다.
그때는 농담으로 넘겼다. 집에 와서는 버스 창문에 비친 두 사람의 어깨를 한참 떠올렸다. 시현을 아무 감정 없는 조교로만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날의 설렘이 어젯밤의 빈칸을 대신 채워주는 것은 아니었다.
“저도 조교님을 싫어해서 묻는 건 아니에요.”
뜻밖에 먼저 나온 말이었다. 시현이 눈을 들었다.
“그래서 대답하기 더 어렵네요.”
“어려워도 해주세요.”
그는 잠깐 입술을 눌렀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째 부인이었다.
태헌도 아니라고 했고 시현도 아니라고 했다. 두 사람이 거짓말하지 않았다면 남은 이름은 하나였다. 하지만 답을 좁히는 것과 그 남자를 믿는 것은 같지 않았다. 이서는 냅킨이 든 파우치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시현이 말했다.
“기억이 그렇게 안 좋아요?”
“좋았으면 안 물었죠.”
“저한테 키스한 것도?”
이서는 고개를 저었다. 시현이 씁쓸하게 웃었다. 잠깐 상처받은 것 같았다. 이서는 그 반응 때문에 자기 기억을 대신 만들어주고 싶지는 않았다.
“기억나야 한다는 표정 짓지 마세요.”
“그렇게 보였어요?”
“네.”
시현은 안경을 만지다가 손을 내렸다. 노트북 화면이 절전 상태로 바뀌어 두 사람의 얼굴이 비쳤다.
“제가 기대했던 대답이 있었던 것 같네요.”
“기대랑 있었던 일을 따로 말해주면 좋겠어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서는 휴대전화에 두 시 이십 분, 키스, 그 뒤 없었다고 적었다. 시현은 그녀가 쓰는 것을 보고 있었다. 대신 써주겠다고 하지 않았다. 이서는 이름 옆에 물음표를 지우지 않았다. 질문을 끝낸 것과 답을 믿는 것 사이에는 아직 거리가 있었다.
“그런데 립밤은 어디에 두고 왔어요?”
“협탁이요.”
“침대 옆?”
“네.”
그 대답은 빠르고 정확했다. 이서는 아침에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시현이 잠깐 눈을 가늘게 떴다.
“뚜껑도 제가 열어뒀나요?”
“그건 제가 묻고 싶어요.”
시현은 튜브를 손에 들려다 이서에게 먼저 눈으로 물었다. 이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손바닥 위에서 돌려보았다. 바닥의 검은 점 두 개를 확인했다.
“제 것은 맞네요.”
그가 덧붙이지 않은 말이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이 무엇인지 이서는 몰랐다. 사람이 잠깐 침묵했다고 해서 그 속까지 읽을 수는 없었다.
“기억 안 나면 안 난다고 해도 돼요.”
이서가 말했다. 시현은 조금 난처한 얼굴로 웃었다.
“아까까지는 제가 두고 왔다고 생각했어요.”
“지금은요?”
“이서 씨가 먼저 갖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해요. 연회장에 있을 때 입술 건조하다고 해서.”
이서는 사진첩을 열었다. 민우가 보낸 파일 사이에 자신의 손이 잘 보이는 사진이 있었다. 남색 봉투를 탁자 위에 놓고, 작은 은색 튜브를 들여다보는 모습.
시현도 그것을 보았다.
“맞네요. 그때 빌려줬어요.”
그가 아주 작게 웃었다. 틀린 답을 지적받았을 때 학생이 짓는 웃음 같았다. 이서는 튜브를 다시 돌려받았다. 물건의 위치가 아니라 처음 생긴 경로부터 달랐다.
“그럼 이게 방에 있었다고, 수석님이 거기 있었다는 증거가 되는 건 아니네요.”
“제가 있었다는 건 인정했잖아요.”
“인정한 사실하고 물건이 말해주는 범위를 구분하려고요.”
시현은 이서를 보았다. 그의 눈에 처음으로 호기심이 조금 섞였다. 자기가 골라주는 대답을 받아 적을 줄 알았는데, 이서는 질문의 기준까지 바꾸고 있었다.
“수석님이라고 불렀네요.”
그가 말했다.
“월요일부터는 그렇게 부르라면서요.”
“지금은 아직 조교실인데.”
“그럼 대답은 어느 쪽 자격으로 하실 건데요?”
시현이 웃었다. 이서도 입가가 조금 움직였다. 잠깐 풀린 분위기를 타서 그가 다른 말을 꺼내려 했지만 이서는 먼저 질문했다.
“객실에서 나갈 때 누구 봤어요?”
시현의 웃음이 멎었다.
“강 교수님이요.”
이서는 펜을 멈췄다.
“직접 봤어요?”
시현은 대답하기 전에 안쪽 조교실을 한번 돌아봤다. 책상 위에 도하가 놓고 간 서류철이 보였다. 이서는 그 시선의 방향을 기억했다.
“교수님이 오셔서 나왔어요.”
같은 말처럼 들렸지만 같은 대답은 아니었다.
2027년 8월 29일 일요일, 졸업식으로부터 1년이 되는 날이었다. 이서는 자기 집 식탁을 창가로 옮겼다.넷이 앉으면 한쪽 통로가 조금 좁았다. 그렇다고 새 식탁을 살 정도는 아니었다. 의자 두 개는 미리 빌려왔다. 테이블 위에는 인터넷에서 배운 대로 접으려다 실패한 냅킨이 네 장 놓였다.***점심 무렵 민우에게 사진이 왔다. 작년 졸업식 때 찍은 단체 사진이었다. 이서는 자기 얼굴부터 확대했다가 원래 크기로 돌려놓았다. 학사모가 옆으로 기울어 있었고, 누군가는 꽃다발 뒤로 반쯤 가려 있었다. 그날에 호텔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너 그때 답사 잘했는데 왜 사진마다 눈을 감았냐.]이서는 자기보다 더 눈을 감고 있는 민우의 사진을 찾아 답장했다. 그는 자기는 찍히는 역할이 아니었다고 우겼다. 잠시 뒤 작은 카메라 시계가 제대로 맞는지 확인한 사진도 왔다.[이젠 9분 안 느려. 오늘 건 그냥 봐도 돼.]이서는 웃으며 고맙다고 보냈다. 작년에는 그 숫자 하나 때문에 사진을 몇 번이나 다시 펼쳤다. 오늘은 식탁의 구도를 잡으면서 민우에게 의자 두 개를 빌려줘서 고맙다고 덧붙였다. 의자는 다음 날 저녁에 돌려주기로 했다. 드라이버처럼 몇 달씩 가지고 있지 말라는 답이 곧 왔다.민우의 말에 이서는 웃었다. 답사를 다시 할 일은 없겠지만, 사진은 한 장 더 남길 수 있었다.새 회사에서는 지난주 처음으로 작은 분석 업무 하나를 처음부터 마감까지 맡았다. 고객은 두 군데를 더 고쳐달라고 했고, 팀장은 정리 방식이 좋아졌다고 했다. 둘 다 맞는 말이었다. 이서는 수정 요청 메일에 월요일 오전에 확인하겠다고 답한 뒤 업무용 노트북을 닫았다.가족처럼 가까워졌다는 말로 네 사람이 모든 생활을 합친 것은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자기 집과 자기 월급, 자기 이름으로 보내는 보고서가 있었다. 함께 머무는 집에는 이서의 방과 생활비 몫이 남아
가평에 가자는 말을 먼저 꺼낸 쪽은 도하였다.8월 셋째 주말에 가기로 한 곳은 그가 예전에 원고를 정리하러 몇 번 묵었던 강가의 작은 숙소였다. 공용 마당이 있고 방은 세 개뿐이었다. 이번에는 하루만 예약했다.“차 막히기 전에 출발하면 좋겠다.”“그럼 아침에 깨워줘요. 대신 못 일어나도 교수님 목소리로 출석 부르지 말고.”도하가 잠깐 웃었다. 이서는 금요일 밤까지 일을 마치느라 잠이 부족했다. 태헌이 차 키를 흔들며 자기가 운전해줄까 물었지만, 이서가 둘이 다녀오겠다고 하자 투덜거리면서도 키를 주머니에 넣었다.“지난번에 산 빵, 이번에는 다른 집 걸로 사 와.”“맛없다면서 다 먹었잖아요.”“다 먹어봐야 맛없는 걸 알지.”시현은 날씨를 확인한 뒤 우산을 가져가라고 했다. 휴대전화 위치를 켜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이서는 가방 옆 주머니에 접는 우산을 넣었다.숙소에 도착한 것은 토요일 점심 무렵이었다. 주인은 방을 보여주고 마당 불을 끄는 시간을 알려주었다. 도하가 가져온 책은 한 권뿐이었다. 이서는 그 두께를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쉬러 온 거 맞죠?”“읽다가 잠들 생각이었다.”“그 두께면 기절하겠는데.”둘은 강가를 걸었다. 물 가까이 내려가는 길은 비 때문에 막혀 있었다. 도하는 다른 길이 있을 거라고 앞서가려다 멈췄다. 이서가 젖은 운동화 끈을 보며 그냥 돌아가자고 했다.예전이라면 더 좋은 풍경을 보여주겠다고 끝까지 길을 찾았을 것이다. 오늘은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을 사서 처마 아래 앉았다. 도하는 포장지에서 떨어진 초콜릿 조각을 바지에 묻혔다. 이서가 손가락으로 그 자리를 가리키자
도하가 외부 교육기관에서 맡을 새 강의의 첫 수업은 8월 첫째 주에 열렸다.정규 지도학생을 맡거나 성적을 단독으로 결정하는 자리가 아니라, 외부 교육기관의 실무자 대상 단기 강좌였다. 담당자는 차성그룹 자문 경력을 강사 소개 맨 위에 올리고 싶다고 했다. 도하는 그 계약이 끝난 시점과 현재 맡는 일을 구분해 보내달라고 요청했다.자료를 고친 뒤에도 신청 인원은 많지 않았다. 첫 강의에 온 사람은 열일곱 명이었다.이서는 그 수업에 들어가지 않았다. 반차를 낼 이유도, 그가 잘하는지 지켜볼 의무도 없었다. 대신 퇴근 후 근처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도하는 강의를 마치고 전화하겠다고 했다.퇴근이 늦어진 것은 이번에는 이서 쪽이었다. 고객이 확인하지 않은 숫자 하나가 보고서에 남아 있어 팀원들과 다시 표를 펼쳐야 했다. 그녀가 늦겠다고 연락했을 때 도하는 아직 강의실에 있었다.“질문이 길어졌어. 나도 조금 늦는다.”“그럼 천천히 해요. 저도 아직 표 앞이에요.”한 시간 뒤 도하가 약속 장소에 도착했을 때 이서는 식당 입구 의자에서 꾸벅 졸고 있었다. 그가 이름을 부르자 그녀는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미안하다. 깨웠구나.”“안 깨우면 여기서 잘 뻔했어요.”도하의 어깨에 걸린 가방이 평소보다 무거워 보였다. 이서가 이유를 묻자 남은 교재를 가져왔다고 했다. 그는 식당에 앉아서도 가방을 바닥에 바로 놓지 못했다.“수업은 어땠어요?”“예상했던 질문이 거의 나오지 않았다.”“좋은 뜻이에요, 나쁜 뜻이에요?”“둘 다.”도하는 국에 숟가락을 넣었다가 멈췄다.“내가 준비한
메일 제목을 본 이서는 파일을 열기 전에 도하에게 전화를 걸었다.“이거 누구한테 받으셨어요?”도하가 보내온 것은 이서가 맡은 신규 업무와 관련된 연구 자료 목록이었다. 공개 논문만 모아놓은 파일이었지만, 그 아래에는 도하가 아는 연구자의 연락처와 ‘상황은 간단히 설명해 두었다’는 문장이 붙어 있었다.수화기 너머에서 도하가 잠시 말을 멈췄다.“전문가 의견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나.”“필요하다고 했지, 소개해달라고는 안 했어요.”이서는 사무실 복도 끝으로 걸어갔다. 상담할 상대를 찾는 일이 어려웠다. 그래서 전날 저녁 그 이야기를 했고, 말하고 나니 조금 후련했다. 하룻밤 사이에 상대가 정해지고 자기 업무가 다른 사람에게 설명돼 있을 줄은 몰랐다.“회사 이름까지 말씀하셨어요?”“회사와 분야만 말했다. 자료는 보내지 않았고.”“그래도 먼저 물어봐 주셨어야죠.”도하는 자신이 보낸 메일을 확인하는 듯했다. 잠깐 키보드 소리가 났다.“철회하겠다.”“상대한테 없던 일로 해달라고만 하지 말고요. 제가 요청한 게 아니라는 걸 분명하게 말해주세요.”그녀는 통화를 끝냈다.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는데도 손끝이 뜨거웠다. 주변에서는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인맥이었다. 그걸 거절하는 자신이 일을 어렵게 만드는 건 아닌지, 잠깐 그런 생각도 들었다.자리로 돌아왔을 때 팀장이 전문가 섭외 진행 상황을 물었다. 이서는 후보를 더 확인하고 있다고 답했다. 도하의 목록을 자기 성과처럼 내밀지는 않았다. 오후에는 공개된 학회 명단을 보고 직접 문의했다. 두 곳은 거절했고, 한 곳은 다음 주에 답을 주겠다고
도하가 주말에 가져온 원고에는 첫 장부터 빨간 줄이 그어져 있었다.7월의 토요일이었다. 이서는 거실 창가에 앉아 선풍기 방향을 돌렸다. 도하의 새 책 원고는 그가 전에 맡았던 기업 자문 사례를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라, 대학원에서 가르치던 의사결정 수업을 정리한 글이었다. 출판사 편집자는 서문의 절반을 덜어내고 실제 사례부터 시작하라고 주문해 놓았다.“틀린 말은 없는데, 읽는 사람이 어디에 앉아 있는지 안 보인대요.”이서가 편집자의 의견을 읽었다. 도하는 찻잔을 내려놓았다.“그 문장을 세 번 읽었다.”“그래서요?”“여전히 무슨 뜻인지 정확히 모르겠어.”모른다는 말을 하는 도하가 조금 낯설었다. 예전이었다면 편집자의 문해력부터 의심했을지도 몰랐다. 이서는 첫 단락의 ‘합리적 판단 주체’를 볼펜 끝으로 가리켰다.“이 사람이 월세 내야 하는 사람인지, 잘못 결재하면 잘리는 사람인지 모르겠는데요. 그냥 합리적이라고만 해놓으니까.”도하는 원고를 자기 쪽으로 가져왔다. 이서가 그걸 붙잡았다.“바로 고치지 말고요. 제 말부터 끝까지 들어봐요.”“듣고 있다.”“손은 이미 고치려고 했잖아요.”그가 펜을 내려놓았다. 이서는 웃지 않았다. 아직 그 앞에서 말할 때 결론을 빨리 증명해야 할 것 같은 버릇이 남아 있었다. 도하 역시 듣다가 곧장 정답을 제시하려는 버릇이 남아 있었다. 둘 다 안다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누가 틀렸다고만 하지 말고, 왜 그 사람이 그걸 골랐는지 먼저 써봐요. 나중에 잘못됐다고 말하더라도요.”도하가 한참 뒤 빈 여백에 짧게
시현은 이서에게 공책을 한 권 건넸다. 오래전 문구점에서 샀던 것과 같은 제품이었다. 표지에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이서는 공책을 열었다. 첫 장도 비어 있었다.“무슨 기록이에요?”“아직 없어요.”그가 대답했다. 예전에는 그녀의 생활을 알아내기 위해 기록을 만들었다. 요즘 쓰는 공책에는 자기가 기억하고 싶은 말과 읽은 책의 문장, 발표 뒤 수정할 내용이 섞여 있었다. 이서에게 보여주고 싶은 쪽만 따로 표시했다.“제 공책도 한번 보여주고 싶었는데, 전부 넘기는 건 아닌 것 같아서요. 이건 같이 쓸까요?”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서로의 모든 사생활을 공유하자는 제안은 아니었다. 함께 가고 싶은 곳과 같이 본 영화 정도를 적어두자는 말이었다.이서는 첫 장에 제주에서 갔던 카페 이름을 적었다. 길을 잘못 들어 돌아온 곳이라고 덧붙였다. 시현은 그 아래에 빵이 맛있었다고 썼다.“분석이 너무 짧은데요.”그녀가 놀렸다.“같이 있었으니까 설명을 길게 안 해도 되잖아요.”시현의 대답에 이서가 웃었다. 둘은 몇 장을 더 채우려다가 멈췄다. 아직 하지 않은 일까지 목록으로 만들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그날 오후, 시현은 연구소에서 받은 수정 의견을 읽었다. 예전보다 관리 권한은 적었지만 개발자로서 실제로 손댈 부분은 많았다. 동료가 그의 코드를 고친 흔적을 보며 잠깐 미간을 찌푸렸다가, 바뀐 이유를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이서는 자기 회사의 메일을 정리했다. 둘이 같은 공간에 있어도 서로의 화면을 볼 필요는 없었다. 중간에 차를 마시고, 각자 다시 일했다.이서가 화면을 닫기 전 저장한 파일의 이름을 다시 확인했다. 시현은 물을 가지러 나갔다가 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