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하지만 발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무대 중앙에 섰다.
앞에 놓인 프롬프터에는 준비된 원고가 떠 있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오늘 우리는 평화와 화합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시온은 첫 문장을 읽기 시작하려다 멈췄다.
너무 완벽했다.
그래서 이상했다.
지금 사람들은 완벽한 말을 듣고 싶은 걸까.
아니면 진짜 말을 듣고 싶은 걸까.
이어폰으로 한채린의 목소리가 들렸다.
“원고대로 읽으시면 됩니다.”
시온은 잠시 숨을 골랐다.
그리고 프롬프터에서 시선을 뗐다.
대기실 쪽에서 누군가 낮게 한숨 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안녕하세요.”
관객들이 조용해졌다.
“솔직히 이런 자리는 아직도 어색합니다.”
작은 웃음이 퍼졌다.
시온은 조금 긴장이 풀렸다.
“오늘 많은 분들이 불안하실 겁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이번엔 더 큰 집중이 모였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까지만 해도 제가 이런 말을 하게 될 줄 몰랐습니다.”
몇몇 관객이 웃었다.
“하지만 불안하다고 멈출 수는 없습니다.”
시온은 관객들을 천천히 바라봤다.
“우리는 지금까지 수많은 위기를 넘었습니다. 이번에도 함께 넘을 겁니다.”
잠시 정적.
그리고 박수가 터졌다.
처음엔 작았다.
그러나 곧 객석 전체로 퍼졌다.
무대 뒤.
한채린은 팔짱을 낀 채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또 원고를 안 지켰군요.”
오민석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혼내실 겁니까?”
“끝나고 생각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입가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가 있었다.
이어 사회자가 외쳤다.
“그리고 대한민국이 자랑하는 글로벌 슈퍼스타— 루카!”
폭발적인 함성이 밤하늘을 흔들었다.
루카가 무대에 등장하자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조명이 바뀌고, 음악이 시작됐다.
압도적인 퍼포먼스.
흔들림 없는 라이브. 무대를 장악하는 존재감.시온은 무대 옆에서 넋을 놓고 바라봤다.
“와… 진짜 다르다.”
오민석은 이미 울먹이고 있었다.
“저 같은 시대에 태어나 주셔서 감사합니다…”
루카는 무대 위에서 관객들과 눈을 맞추며 웃었다.
그는 분명 화려했다.
하지만 시온은 이상하게도 조금 전 회의실에서 루카가 보였던 표정을 떠올렸다.
엘리아나의 이름을 봤을 때.
잠깐이지만 웃음이 사라졌던 얼굴.‘예전에 조금 안다고 했지.’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공연이 끝난 뒤.
예정에 없던 순서가 시작됐다.
현장 기자 질의응답.
시온의 표정이 굳었다.
“이건 없던 거잖아요?”
이어폰 속 한채린의 목소리도 낮아졌다.
“언론 요청이 급히 들어왔습니다.”
“거절하면 안 됩니까?”
“생중계 중입니다.”
“…오늘도 망했네.”
기자석 중앙에서 한 여성이 일어났다.
단정한 수트.
날카로운 눈빛. 흔들림 없는 자세.마이크를 잡는 순간 공기가 달라졌다.
사회자가 소개했다.
“뉴스원 메인 앵커, 유세라 기자입니다.”
시온은 괜히 자세를 바로 했다.
유세라는 또렷한 목소리로 물었다.
“대통령님께 묻겠습니다.”
카메라가 시온을 비췄다.
“엘리아나 실종 사건은 아직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정적.
“그런데 지금 이 자리에서 축제를 홍보하고 공연을 진행하는 것이 국민 불안을 외면하는 보여주기식 행보라는 지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현장이 술렁였다.
오민석은 뒤에서 거의 쓰러질 듯했다.
“너무 셉니다…”
한채린의 시선도 날카로워졌다.
쉬운 질문이 아니었다.
도망치면 무능.
감정적으로 대응하면 실수. 원고대로 답하면 진정성이 없어 보일 수 있었다.모두가 강시온의 입을 바라봤다.
시온은 잠시 유세라를 바라봤다.
그녀의 눈빛은 공격적이었지만, 악의적이진 않았다.
진짜 답을 듣고 싶은 사람의 눈이었다.
시온은 천천히 마이크를 들었다.
“맞는 말씀입니다.”
순간 현장이 조용해졌다.
“저도 오늘 이 무대가 맞는 선택인지 계속 고민했습니다.”
유세라의 눈빛이 흔들렸다.
시온은 이어 말했다.
“하지만 국민이 불안할 때 지도자가 숨어버리면, 그건 더 큰 불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숨죽인 침묵.
“축제는 놀자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는 주변 무대를 가리켰다.
“우리가 무너지지 않았다는 증명입니다.”
정적.
그리고 다시 박수가 터졌다.
이번에는 훨씬 컸다.
와아아아!
엄청난 환호와 박수가 쏟아졌다.
유세라도 잠시 말없이 시온을 바라봤다.
그리고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온은 안도하려 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무대 뒤 대형 전광판이 지지직거리기 시작했다.
화면이 꺼졌다 켜졌다를 반복했다.
처음엔 단순한 기술 오류처럼 보였다.
그러나 곧 모든 조명이 한 번에 깜빡였다.
관객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한채린이 즉시 외쳤다.
“전산팀! 화면 차단하십시오!”
하지만 화면은 멈추지 않았다.
검은 배경 위에 붉은 문장이 떠올랐다.
[축제는 시작되지 않는다.]
관객석이 술렁였다.
오민석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각하…”
문장은 다시 바뀌었다.
[엘리아나는 우리와 함께 있다.]
시온의 표정이 굳었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이 떠올랐다.
[다음 무대는 대통령, 당신 차례다.]
순간 시온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 문장은 단순한 협박이 아니었다.
명백한 선언이었다.
누군가 이 무대를 보고 있다.
그리고 자신을 노리고 있다.
한채린이 무전으로 외쳤다.
“전원 경호 태세 전환! 관객 대피 준비!”
임태건이 이미 무대 위로 뛰어오르고 있었다.
“각하, 내려오십시오!”
시온이 움직이려던 바로 그때.
콰앙!
어딘가에서 폭발음이 터졌다.
비명이 쏟아졌다.
한서준은 동생을 한번 살폈다.“얼굴 좋아졌네.”“갑자기?”“전에는 맨날 피곤해 보였잖아.”한채린은 대답 대신 보온병을 내려다봤다.한서준이 돌아섰다.“센터 들어간다.”“응. 조심해서 가.”몇 걸음 가던 그가 돌아봤다.“둘 다 무리하지 마.”강시온이 고개를 끄덕였다.“예.”한서준은 그대로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강시온이 작게 물었다.“저도 포함해서 걱정해 주신 거 맞죠?”“욕심내지 마십시오.”한채린이 먼저 걸었다.강시온이 웃으며 따라갔다.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박은호가 보낸 메시지였다.「제이드 리 관련 최종 보고. 치료 종료 후 보호 관찰 전환. 잔여 조직 수사 협조 완료.」그 아래에는 제이드 리가 남긴 문장이 있었다.「이제는 남이 정한 길 말고 제 길로 가보겠습니다.」강시온은 화면을 잠시 바라봤다.“좋은 소식입니까?”“예.”그는 휴대전화를 넣었다.“이번에는 정말 자기 선택대로 살아보겠답니다.”한채린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후 7시 15분.대통령 관저 정원.공식 일정이 끝난 뒤 강시온은 약속대로 한채린과 저녁을 먹고 정원으로 나왔다.휴대전화가 울렸다.루카가 보낸 사진이었다.야외 카페에서 엘리아나와 나란히 앉아 있었다.「데이트 중입니다. 대통령님도 열심히 하세요.」강시온이 피식 웃었다.“이 사람은 연애를 해도 여전하네요.”한채린이 사진을 확인했다.“엘리아나 씨가 고생하시겠네요.”“그래도
몇 달 후.오전 8시 30분.대통령 관저 집무실.강시온은 책상 위의 보고서 첫 장을 바라봤다.「뉴(New) 세계 평화 프로젝트 제1차 공동운영회의」첫 장 아래에는 한 사람의 이름 대신 참여국들의 서명이 빼곡했다.“현재 참여국은 62개 국가입니다.”한채린이 태블릿을 확인했다.“오늘 회의 이후 추가 참여를 결정할 국가도 있습니다.”강시온이 다음 장을 넘겼다.“최고 승인권자는 없고요?”“없습니다.”“후보 평가도?”“없습니다.”“몰래 사람을 관찰하는 일도?”한채린이 그를 바라봤다.“그 질문을 매번 하실 생각입니까?”“확인할 때마다 기분이 좋아서요.”강시온이 웃었다.과거의 세계 평화 프로젝트 자료는 공개됐고.누군가를 몰래 고르고 움직이던 조직은 사라졌다.새 프로젝트는 각국이 같은 권한으로 참여하고 주요 결정과 예산을 공개하는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었다.사람을 선택하는 계획이 아니라 문제가 생겼을 때 함께 움직이기 위한 약속이었다.강시온은 마지막 페이지에 서명했다.“이제 조금 실감이 나네요.”“무엇이 말입니까?”“이전과는 다른 프로젝트가 시작됐다는 게요.”“시작만 했습니다.”“좋은 분위기를 오래 두는 법이 없으시네요.”“오늘 일정이 많으니까요.&rdquo
강시온이 천천히 웃었다.“그러면 한 번 더 해도 됩니까?”이번에는 한채린이 대답 대신 그의 재킷을 가볍게 잡아당겼다.두 번째 입맞춤은 첫 번째보다 조금 길었다.멀리서 사람들의 박수가 다시 터졌다.World Harmony Fest의 마지막 순서가 끝나고 있었다.두 사람이 천천히 떨어졌다.한채린이 말했다.“이제 정말 돌아가셔야 합니다.”강시온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 미소로 그녀를 바라봤다.“같이 가시는 거죠?”“예.”강시온이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었다.한채린은 망설이지 않고 그 손을 잡았다.두 사람은 맞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행사장으로 돌아갔다.오후 7시 34분.World Harmony Fest 메인 행사장.마지막 공식 일정까지 모두 끝난 뒤였다.루카는 무대 뒤 통로에 기대 서 있었다.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아직 안 가셨어요?”루카가 고개를 들었다.엘리아나가 걸어오고 있었다.“누굴 좀 기다렸어요.”“누구를요?”루카가 웃었다.“그걸 꼭 물어봐야 알아요?”엘리아나는 잠깐 그를 바라보다 말했다.“오늘 무대 좋았어요.”“봤어요?”“네. 끝까지요.”루카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그럼 됐네요.”“뭐가요?”
“이번에는 기다리지 않게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한채린의 말이 끝난 뒤 강시온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수없이 미뤘던 말인데, 막상 허락을 받고 나니 준비했던 문장들은 필요 없었다.“좋아합니다.”한채린의 눈빛이 멈췄다.“한채린이라는 사람을 좋아합니다.”“처음에는 저도 잘 몰랐습니다.”강시온이 조금 어색하게 웃었다.“늘 옆에 계셔서 의지하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그런데 일이 없어도 보고 싶었고, 안 보이면 찾게 됐습니다.”그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대통령이라서 제 곁에 있어 달라는 말이 아닙니다.”“비서실장이라서 옆에 계셨으면 하는 것도 아니고요.”강시온은 결국 가장 쉬운 말로 돌아갔다.“그냥 제가 한채린이라는 사람 옆에 있고 싶습니다.”한채린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강시온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제가 너무 늦었습니까?”“많이 늦으셨습니다.”강시온의 표정이 굳자 한채린이 아주 작게 웃었다.“그래도 기다렸습니다.”이번에는 강시온이 말을 잃었다.한채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저도 처음에는 이 감정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습니다.”“각하를 걱정하는 것도, 찾는 것도 업무라고 생각하면 편했으니까요.”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걸 업무라고 부르는 게 더 이상해
한채린이 그를 바라봤다.“그렇게 멀리 앉으실 필요는 없습니다.”강시온이 고개를 돌렸다.“가까이 앉아도 됩니까?”“아까는 제 어깨에도 기대셨잖습니까.”강시온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그건 꽤 강력한 근거네요.”그는 한채린의 옆자리에 앉았다.어깨 사이에 손 하나 들어갈 만큼의 거리만 남았다.멀리서는 아직 박수와 음악이 이어지고 있었다.한채린이 조용히 말했다.“오늘은 이상하게 그 소리가 멀게 들립니다.”“저도요.”강시온은 정면을 바라봤다.“지금은 저쪽보다 여기가 더 신경 쓰여서요.”한채린의 손이 무릎 위에서 잠깐 멈췄다.강시온은 그 손을 잡지 않았다.대신 자신의 손을 벤치 위에 내려놓았다.한채린도 손을 치우지 않았다.둘 사이의 거리는 그대로였지만, 먼저 물러나는 사람도 없었다.서로 기대지도, 붙잡지도 않았지만 이제는 굳이 멀리 있을 이유가 없는 사이 같았다.강시온이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한채린이 그 움직임을 보고 물었다.“왜 그러십니까?”“괜히 손이 움직일 것 같아서요.”“무슨 뜻입니까?”강시온이 그녀의 손을 한번 내려다봤다.“오늘은 안 잡으려고요.”한채린의 눈썹이 미세하게 올라갔다.“왜요?”이번에는 질문이 그녀에게서 먼저 나왔다.강시온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오후 6시 19분.World Harmony Fest 행사장 뒤편 정원.강시온은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와 정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한채린의 태블릿이 무대 뒤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정원 끝에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한채린은 난간 앞에 서서 멀리 행사장 불빛을 바라보고 있었다.늘 다음 일을 준비하던 사람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서 있는 모습이 낯설었다.한채린이 먼저 그를 알아차렸다.“각하.”강시온이 가까이 다가갔다.“여기 계셨습니까?”“잠시 바람을 쐬고 있었습니다.”“태블릿까지 두고요?”한채린이 짧게 웃었다.“그 정도로 급하게 나온 건 아닙니다.”“저한테는 꽤 큰일처럼 보였습니다.”“왜요?”“한 실장님이 태블릿을 두고 자리를 비우는 건 거의 처음 보는 것 같아서요.”한채린은 다시 행사장 쪽을 바라봤다.멀리서 폐막을 알리는 음악이 희미하게 들려왔다.강시온은 그녀 옆에 섰다.이번에는 이유를 재촉하지 않았다.잠시 뒤 한채린이 먼저 말했다.“연설을 듣고 있으니까 조금 이상해졌습니다.”“뭐가요?”“처음 각하를 만났던 날이 생각났습니다.”강시온의 표정이 멈췄다.대통령이 된 이유조차 몰랐고, 일정표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날.“좋은 기억은 아닐 것 같은데요.”“그때는 아니었습니다.&rd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