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남편을 잡아먹었다고? 제가요? 그것도 하객들 앞에서?”
이서는 사진첩을 얼굴 가까이 끌어당겼다. 새하얀 드레스 차림의 여자가 강도진의 양 볼을 붙잡고 입을 맞추고 있었다. 발끝까지 내려온 면사포가 바람에 들렸고, 뒤편에서는 꽃잎을 뿌리던 하객들이 배를 잡고 웃었다. 제 얼굴인데도 기억에 없는 표정이었다. 사진 밑에 적힌 ‘남편 너무 귀여워서 내가 먼저 잡아먹음♡’이라는 문장은 더 가관이었다.
“잡아먹을 만큼 좋았나 보네, 내가.”
침대 옆에 떨어져 앉은 도진이 입꼬리를 올렸다. 이서는 사진을 뒤집었다. 도진이 보고 있다는 생각만으로 귀까지 뜨거웠다.
“대표님, 그렇게 잘생긴 얼굴로 아무 말이나 하시면 법에 걸려요.”
“무슨 법?”
“사람 정신 못 차리게 하는 법이요.”
“그럼 우리 여보가 체포해 줘. 나 평생 당신한테만 잡혀 있을게.”
그가 양 손목을 나란히 내밀자 이서는 베개를 껴안았다. 경제지 표지에서 사람을 얼어붙게 만들던 남자가 자기 앞에서는 체포 놀이를 하고 있었다. 무슨 얼굴로 회사에 출근한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웃음은 잠깐이었다. 사진은 웃고, 반지는 반짝이고, 남자는 자신을 사랑한다는 얼굴로 앉아 있었지만 이서에게 지난 1년은 통째로 비어 있었다. 그녀는 다시 앨범을 덮었다. 얇은 종이가 맞부딪치는 소리에 도진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우리 진짜 결혼한 거예요? 사진 말고 확인할 방법 없어요?”
“있지. 당신이 직접 확인할 수 있게 해 줄게.”
도진은 곧장 전화를 걸었다. 비서실장에게 혼인관계증명서와 신고서 사본을 부탁하는 그의 말투는 간결했고, 조금 전의 애교는 흔적도 없었다. 통화를 마친 그가 돌아보자 기다렸다는 듯 눈이 다시 휘었다.
“아이고, 우리 신부님. 서류까지 확인하는 꼼꼼함에 남편 또 반했네.”
“반하실 시간에 물 좀 주세요.”
“네, 공주님. 미지근한 물로 모시겠습니다. 오늘의 사랑도 적정 온도로.”
이서는 이불 속에 발가락을 말아 넣었다. 비싼 침구의 매끄러운 촉감도, 창가에서 풍겨 오는 꽃향기도 도진의 말 한마디에 정신이 팔려 느낄 겨를이 없었다. 남자가 컵을 내밀 때 손가락이 닿을 듯 가까워지자 가슴이 한 번 크게 뛰었다. 그는 그녀가 컵을 제대로 잡은 것을 확인하고서야 손을 놓았다.
잠시 뒤 노크 소리가 울렸다.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봉투를 놓고 자신을 오현석이라고 소개했다. 이서는 어색하게 고개를 숙이고 서류를 꺼냈다. 이름, 날짜, 주소. 혼인관계증명서의 배우자 칸에 강도진이라는 세 글자가 선명했다. 신고서에 적힌 자기 서명까지 확인한 뒤에는 종이 끝이 조금 구겨졌다. 회사에서 결재할 때마다 끝 획을 위로 올리는 버릇까지 똑같았다. 이서가 서명란을 두 번 쓸어 보자 종이 표면의 미세한 굴곡이 손톱에 걸렸다. 누군가 대신 살아 준 세월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살았던 시간이라는 증거였다.
“나 진짜 유부녀구나.”
혼잣말에 도진이 웃으며 대꾸했다.
“그것도 아주 인기 많은 남자의 아내.”
“그 인기 많은 남자가 누구예요?”
“나. 당신한테만 인기 많아. 밖에서는 별로 안 웃거든.”
이서가 어이없다는 듯 그를 보자, 도진은 말을 더하지 않고 컵 받침을 그녀 가까이 밀었다. 이서의 손끝이 떨리는 것을 봤는지 눈길이 잠깐 서류 위에 머물렀다. 웃기려고 애쓰는 얼굴 아래로 걱정이 지나갔다. 그가 낯설다는 사실이 갑자기 미안해져서, 이서는 어쩐지 목이 메었다.
“전 대표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데. 앞으로 어떻게 같이 살아요?”
“다시 알려 주면 되지. 내가 뭐 좋아하는지, 뭘 못하는지. 참고로 당신 없이는 아침밥도 맛이 없어.”
“입맛이 문제예요?”
“심각하지. 아내 얼굴이 반찬이라더니 내가 딱 그 병에 걸렸거든.”
“병원 가세요.”
“담당 의사 선생님이 한이서라고 들었습니다.”
이번에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도진은 그 소리를 듣더니 서랍에서 작은 수첩을 꺼냈다. 흰 첫 장에 반듯한 글씨로 ‘강도진 사용 설명서’라고 적었다. 그 아래에는 아침 기상 시간, 좋아하는 음식, 커피 취향을 차례로 적더니 별안간 ‘특이 사항’이라는 항목을 만들었다.
‘아내가 부르면 3초 안에 대답하기. 아내가 웃으면 이유 없어도 같이 웃기. 아내가 싫다는 건 두 번 권하지 않기.’
“이건 설명서가 아니라 충성 서약 같은데요?”
“맞아. 결혼식 때도 했어. 당신이 늦잠 자면 내가 먼저 일어나 이불 데워 놓겠다고.”
“그게 혼인 서약이라고요?”
“우리 둘한테는 세상에서 제일 중대한 약속이었어.”
도진은 수첩을 넘기다가 마지막 줄에서 펜을 멈췄다. 그의 셔츠 소맷단에는 삐뚤어진 분홍 하트가 수놓아져 있었다. 이서가 그것을 보자 그는 소매를 감추기는커녕 슬쩍 앞으로 내밀었다.
“이것도 당신 작품. 평생 세탁소에 맡기지 말래.”
장난기 어린 눈빛이 잠시 가라앉았다. 이서는 무슨 말을 쓰기에 그렇게 망설이나 싶어 손을 내밀었다. 그가 수첩을 건네자 잉크가 채 마르지 않은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잘 때 손 꼭 잡아 달라고 먼저 조른 사람: 한이서.’
그 바로 아래에는 더 작은 글씨가 있었다.
‘그 손을 놓으면 잠이 안 온다고 했던 사람도: 한이서.’
이서는 사진 속 자신의 웃는 얼굴을 다시 떠올렸다. 처음 보는 남자의 손을 잡지 않으면 잠들지 못했다니. 수첩을 덮으려는데 도진이 서랍에서 낡은 쪽지 한 장을 꺼냈다. 구겨진 종이에는 분명 그녀의 필체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여보, 나 오늘도 손 잡고 잘래. 늦게 오면 자는 척할 테니까 얼른 와♡’
“강도진 씨, 포옹 품질검사에 협조해 주세요.”이서가 소파에 기대 앉은 채 손바닥을 펼치자, 도진은 조금 전까지 품에 안고 있던 그녀를 조심스럽게 놓아주었다. 맞은편에 앉힌 곰 인형의 목에는 아직 그의 넥타이가 매여 있었다. 거실 스탠드 불빛이 분홍 리본 위로 떨어졌고, 창밖 정원에서는 밤벌레가 울었다.“검사요? 우리 여보, 남편을 정식으로 품질 관리해 주시겠다는 겁니까?”“네. 2호보다 안락한지 확인하려고요. 불만 있으면 접수 창구로 가세요.”“불만은 없는데, 내가 너무 잘해서 평생 합격하면 어떡하지?”“그런 말씀 하시면 자신감 과다로 감점이에요.”도진은 입을 꾹 다물더니 곧장 소파 옆의 쿠션을 집어 들었다. 하나를 이서의 허리 뒤에 받치고, 다른 하나는 팔걸이에 끼웠다. 그걸로 모자랐는지 복례에게 부탁해 얇은 담요까지 가져왔다. 이서는 무릎 위에 차곡차곡 쌓이는 물건들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지금 안기려고 온 건데 이사라도 해요?”“내 품이 최고라는 걸 증명하려면 실험 환경부터 완벽해야지. 허리 각도는 몇 도가 편해? 오른쪽 어깨랑 왼쪽 어깨 중에 어디가 좋아?”“무슨 자동차 시승이에요?”“아니. 남편 종신 대여 상품이야. 반품은 안 받고 수리는 평생 무료.”이서가 웃음을 터뜨리자 도진은 진지하게 쿠션을 다시 옮겼다. 그러다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보고 손을 멈췄다. 일부러 우스운 짓을 하는 줄 알았는데 그의 눈길은 이서가 앉은 자리를 세심하게 살피고 있었다. 얼마 전 천둥이 칠 때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책을 읽어 주던 사람도 저런 얼굴이었을까. 그녀가 편안한지부터 확인하던 그 모습이 떠올랐다.“쿠션은 하나면 돼요. 담요는 같이 덮고요.”이서가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도진은 곰 인형을 바라보며 목청을 가다듬었다.“2호 씨, 들었죠? 오늘 공식 심사는 1호만 참여합니다. 참관은 가능해요.”“인형한테 경쟁심 좀 버려요. 목에 넥타이까지 매 줬으면서.”“예의 바른 경쟁자가 되고 싶었지. 그래도 당신 옆자리는 양보 못 해.”도진
“오늘만 내 남자친구를 빌립니다.”이서가 커다란 곰 발을 끌며 도진의 손을 당기자, 그가 거실 한가운데서 능청스럽게 허리를 숙였다. 한쪽 발에서 삑 소리가 났고, 다른 쪽에서는 토끼 귀가 팔랑거렸다. 둘의 꼴을 거울로 확인한 이서는 웃음을 참느라 그의 손목에 매달렸다.“대여료는 얼마인데요, 손님?”“하루 종일 잘생긴 척하지 않기.”“그건 불가능해. 태어날 때부터 자동 결제 중이라.”“그럼 반품할게요.”“잠깐! 사랑 많이 주는 옵션은 무료야. 이건 어떡해?”도진이 그녀의 손을 자기 가슴에 가져다 대자 이서는 괜히 손끝을 움츠렸다. 셔츠 아래에서 두근거림이 전해졌다. 장난만 치던 남자의 심장이 자신 때문에 저렇게 빠르게 뛰고 있다니. 그녀는 곰 발을 벗어 그의 발치에 놓고, 대신 엄지손가락으로 손등을 한 번 쓸었다.“오늘은 합격. 내일도 연장할지는 보고요.”“나 평생 계약직이라도 좋아. 당신 전담이면.”이튿날 오후, 유리가 보낸 택배 상자가 현관을 거의 가렸다. 복례와 함께 포장을 뜯자 사람 허리만 한 크림색 곰 인형이 튀어나왔다. 동그란 귀 사이에는 분홍 리본이 묶여 있었고, 가슴팍에는 ‘언니 전용 안심 포옹 서비스’라는 카드가 달려 있었다.그 아래 유리의 글씨가 덧붙어 있었다.‘오빠는 애교가 시끄러우니까 조용한 모델로 보냈어.’이서는 웃다가 인형을 번쩍 안아 보았다. 폭신한 배가 턱 아래까지 닿았고, 보송한 털에서 갓 세탁한 이불 같은 냄새가 났다. 정원에서 책을 읽을 때 무릎에 올려놓으니 허리가 편했다.빗소리 없이 고요한 오후, 햇살이 카펫 위로 기울어지는 동안 그녀는 책장을 몇 번 넘기다가 인형의 둥근 배에 뺨을 묻었다. 금세 눈꺼풀이 무거워졌다.어젯밤에는 도진의 방문 앞에서 발소리가 나지 않을까 귀를 기울였는데, 오늘은 빈 소파만 바라보아도 그가 돌아올 시간을 헤아리게 됐다. 아직 기억하지 못하는 아내의 하루 대신 새로 채워진 하루들이 있었다. 이름을 부르면 언제든 대답해 줄 사람을 기다리는 기분이 이렇게 달콤할 줄 몰랐다.
“여보, 나 방금 고백받은 거 맞지?”미술관 출구에서 도진이 움직이지 않자 이서는 그의 소매를 당겼다. 조금 전 자신이 먼저 내뱉은 ‘좋아해요’ 세 글자가 아직 두 사람 사이에 남아 있었다. 유리문 너머에서는 행인들이 오갔고, 도진은 그 바쁜 풍경도 보지 못한 채 이서의 얼굴만 바라봤다.“못 들었으면 무효예요. 재방송 안 합니다.”“들었어. 너무 잘 들려서 평생 귓속에서 안 나갈 것 같아. 여보, 나 오늘부터 출근할 때 귀도 씻지 말까?”“씻어요. 꼭.”이서가 웃으며 그를 밖으로 끌어냈다. 도진은 걷다가 두 번이나 헛발을 디뎠다. 제 손을 잡고 좋아한다는 말을 해 준 사람이 정작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걷고 있으니 어쩔 줄 모르는 눈치였다. 이서는 그의 손가락을 조금 더 깊이 끼웠다. 손끝이 맞닿을 때마다 그가 어쩐지 숨을 아껴 쉬는 것 같았다. 도진은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처럼 좋아한다고 말해 왔지만, 그녀에게 그 말을 돌려받는 건 여전히 낯설고 큰 기쁨인 모양이었다. 과거의 사랑을 따라잡으려고 서두르는 대신, 오늘의 고백부터 천천히 갖고 싶었다.다음 날 아침, 침실 앞에 커다란 상자가 놓였다. 뚜껑을 열자 분홍색 토끼 귀가 위로 솟았다. 이서가 슬리퍼를 꺼내기도 전에 도진이 맞은편 방문에서 얼굴을 내밀었다.“우리 애기 발 전용 왕국이 도착했어요!”“슬리퍼 한 켤레가 무슨 왕국이에요?”도진은 대답 대신 제 방에서 거대한 갈색 곰 발 슬리퍼를 신고 나왔다. 앞코에는 발톱 모양 천 조각까지 달려 있었다. 반듯한 셔츠와 바지 아래서 통통한 곰 발 두 개가 움직이자 이서는 배를 움켜쥐었다. 복도 끝 전신거울에 비친 모습은 더욱 가관이었다. 거울 위쪽엔 그룹 대표가 있었고, 아래쪽엔 놀이공원에서 막 탈출한 마스코트가 서 있었다.“제 슬리퍼는 왜 당신 것보다 세 배 작아 보여요?”“당신 발은 내 손에 쏙 들어오고, 내 발은 당신을 지켜야 해서 크거든.”“신발이 경호원이에요?”“응. 부부 공동 경호팀. 토끼 대원과 곰 대장.”그가 한 걸음 다가
“좋아한다고 열 번이요? 무슨 광고 계약이라도 따냈어요?”이서는 돗자리 아래서 찾아낸 쪽지를 흔들었다. 도진은 주먹밥이 담겼던 빈 도시락을 무릎에 올려놓은 채 양쪽 뺨을 번갈아 내밀었다. 봄볕에 달아오른 얼굴에는 기대가 훤히 드러나 있었고, 입가에는 아까 묻은 참깨 한 알이 남아 있었다.“광고라면 평생 무상 송출이지. 상품명은 한이서, 구매자는 나 하나.”“독점 판매 금지예요. 그리고 뽀뽀 받으려면 우선 입부터 닦으세요.”도진이 허둥지둥 손등으로 입가를 훔쳤다. 이서는 그 손을 붙잡고 휴지로 참깨를 떼어 냈다. 가까이 마주 선 남자가 기대에 차서 눈을 감자, 그녀는 웃음을 삼키며 그의 오른쪽 뺨에 입술을 살짝 대었다. 그가 숨을 들이켠 사이 이서는 도시락 뚜껑을 닫아 버렸다.“지급 완료. 추가 청구는 받지 않습니다.”“큰일이네. 방금 받은 게 너무 좋아서 하나부터 다시 세고 싶어졌어.”그의 귀가 붉어졌다. 이서는 남은 컵을 정리하며 슬쩍 웃었다. 얼마 전만 해도 이 남자에게서 한 걸음씩 물러섰는데, 이제는 자신이 먼저 다가간 뒤 그의 표정을 기다렸다. 사랑을 기억하지 못해도 좋아지는 마음은 새로 생길 수 있었다.이튿날, 도진은 그녀를 작은 미술관으로 데려갔다. 현관의 유리 지붕으로 햇빛이 내려왔고, 바닥에는 빛과 그림자가 긴 사각형으로 놓였다. 이서는 안내 책자를 받아 들고 전시장으로 들어갔다. 벽마다 서로 다른 색의 그림이 걸려 있었고, 멀리서는 관람객들이 구두 굽을 조심스럽게 옮기는 소리만 들렸다. 도진은 그림 설명을 읽다가도 이서가 멈춰 서면 어김없이 곁에 섰다. 안내문에 작은 글씨가 많아 이서가 가까이 다가가자 그는 자신의 자리를 비켜 주었다. 그 사소한 동작 때문에 이서는 그가 얼마나 자주 자신을 살펴왔을지 생각했다.커다란 파란색 그림 앞에서 이서가 한참 움직이지 않자 그가 물었다.“마음에 들어?”“네. 색이 예뻐요. 가까이선 거친데 멀어지면 부드러워 보이네요.”도진은 그림을 보다가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난 당신이 더
“조금 더 걸어요.”이서가 도진의 팔에 제 팔을 감자 우산을 접으려던 남자의 손이 멈췄다. 비가 그친 골목에는 젖은 보도블록 냄새가 올라왔고, 꽃집 차양 끝에서는 물방울이 일정한 간격으로 떨어졌다. 도진은 한동안 제 팔꿈치에 걸린 작은 손을 내려다봤다.“여보, 나 오늘 집에 못 갈 것 같은데.”“왜요? 길 잃었어요?”“응. 아내가 먼저 팔짱 껴 줘서 정신을 잃었어. 여기가 천국 입구인지 동네 꽃집인지 구분이 안 돼.”이서는 그의 젖은 어깨를 손수건으로 한 번 더 털었다. 그러자 도진은 꽃집 유리창에 비친 두 사람을 슬쩍 보더니, 우산을 접어 그녀의 손에 들려주었다. 빈손이 된 팔로는 괜히 몸을 조금 더 가까이 붙였다.“남자친구 씨, 걷는 데 집중하세요. 저랑 같이 물웅덩이에 빠지면 둘 다 감점이에요.”“알겠습니다. 오늘의 목표는 당신을 무사히 집까지 모시고, 내일도 또 보고 싶다고 졸라 보기.”이미 같은 집에 사는 사이가 내일도 보고 싶다니. 이서는 기가 막혀 웃으면서도 팔짱을 풀지 않았다. 지나던 차가 물기를 튀기며 지나갈 때 도진이 바깥쪽으로 몸을 돌려 그녀를 가려 주었다. 넓은 어깨 뒤로 잠깐 바람이 막혔다. 낯선 결혼생활 속에서도 이런 순간이 하나씩 쌓이고 있었다.다음 날 오전, 이서가 주방으로 내려갔을 때는 이상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서만복이 도마 앞에서 팔짱을 끼고 있었고, 도진은 넥타이 대신 곰 그림 앞치마를 두른 채 작은 주먹밥과 씨름하고 있었다. 식탁에는 김 조각과 참깨가 흩어져 있었으며, 접시 위의 동그란 밥 세 개는 전부 울상을 짓고 있었다.“이건 왜 다 울어요?”도진이 김으로 만든 눈썹 하나를 붙이다 말고 그녀를 돌아봤다.“당신이 너무 예뻐서 감동한 밥. 셋 다 나를 닮아서 눈물이 많아.”“그럼 이건요? 입이 아예 삐뚤어졌는데.”“그건 당신 보고 뽀뽀 못 해서 삐진 남편.”서만복이 참다못해 한마디 했다.“대표님, 밥알에게까지 가정사를 설명하실 필요는 없습니다.”이서는 조리대에 손을 짚고 웃었다. 도진은
“손잡고 걷는 과목이요? 그럼 학생부터 똑바로 서세요.”이서가 턱을 치켜들자 도진은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서 허리를 곧추세웠다. 한 손에는 빈 종이컵 두 개를 들고, 다른 손은 그녀를 향해 펼친 채였다. 코끝에 묻었던 초콜릿은 말끔히 지워졌지만 아까의 우스꽝스러운 표정이 생각나 이서는 자꾸 웃음이 났다.“출석 부르겠습니다. 강도진 학생.”“네, 한이서 선생님. 손잡기는 우수한 성적으로 수료하겠습니다.”“수업 중 사적인 발언 금지.”“큰일 났네. 선생님이 내 첫사랑이라 사심 없이 수강하기가 어려운데.”지나가던 사람이 슬쩍 돌아보자 이서는 그의 손을 얼른 붙잡았다. 더 떠들지 말라는 뜻이었는데 도진은 입술까지 얌전히 다물고 깍지 낀 손만 내려다봤다. 길가의 은행나무 잎이 바람에 뒤집혔고, 구운 와플 냄새가 골목으로 흘러나왔다. 그의 손바닥은 아이스크림 컵을 쥐고 있던 탓인지 조금 서늘했다. 이서는 손가락에 힘을 더 주었다.“말 잘 듣네요.”“칭찬까지 받았어. 여보, 나 오늘 학급 회장 해도 되겠어.”“방금 떠들었으니 벌점이에요.”“그럼 벌로 당신 손 한 번 더 잡게 해 줘.”도진이 제 손을 들어 보이자 이서는 웃으며 팔을 흔들었다. 손을 잡고 걷는 동안 그의 보폭이 조금씩 짧아졌다. 거리에서 누구나 하는 일을 이 남자는 처음 선물받은 것처럼 소중히 다뤘다. 이미 수없이 함께 걸었을 텐데, 오늘의 손바닥은 오늘의 기억으로 남는다는 사실이 이서를 이상하게 들뜨게 했다.두 사람은 골목 끝의 작은 서점에 들렀다. 전에 골랐던 같은 책이 진열대에 여전히 꽂혀 있었다. 도진은 그 앞에서 일부러 입을 다물고 이서가 고르는 책을 기다렸다. 그녀가 얇은 그림책 하나를 펼치자 남자는 어깨너머로 슬쩍 들여다보다가, 책 속의 둥근 곰을 가리켰다.“나 닮았다.”“곰은 얌전해 보이는데요.”“당신 앞에선 나도 얌전해. 지금도 뽀뽀해 달라는 말 참고 있잖아.”이서는 책으로 그의 가슴을 가볍게 밀었다. 도진은 밀리는 대로 한 걸음 물러나면서도 책 모서리가 접히지 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