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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_잊지 못한 이름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14 17:02:25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 찰나의 정적이 마치 수만 년처럼 느껴졌다.

"상견례 전에, 잠깐 뵙고 싶습니다."

목구멍까지 차오른 그리운 부름을 삼키기 위해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그 사이, 걱정스럽게 자신을 바라보는 동석과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빛이 말하고 있었다.

‘절대 들켜선 안 돼.’

"...일정 확인해서 연락드리겠습니다."

딱딱한 비즈니스 말투.

통화가 끝났다.

소은은 휴대폰을 내려다보며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온몸의 진이 다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왜 하필..."

동석이 아무 말 없이 다가와 옆에 섰다.

그는 소은의 등을 가만히 짚어주었다.

"은아."

"나 아직."

소은은 끝내 뒷말을 잇지 못했다.

동석은 그녀의 말이 이어지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소은이 어두운 목소리로 낮게 읊조렸다.

"이 결혼, 하고 싶지 않아."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공방 안에서, 부러진 연필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직 아무도 모른다.

백가은이라는 허울을 쓰고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오래 진짜 김소은을 죽여왔는지.

그리고 그 비밀이 얼마나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두 사람의 심장을 겨누게 될지를.

같은 시각.

이룸 그룹 펜트하우스.

태현은 거대한 창가에 서서 야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서울의 밤이 보석처럼 박혀 있었지만, 그의 눈은 시종일관 차가웠다.

조금 전 통화를 마친 휴대폰을 소파 위로 무심하게 던졌다.

백가은.

백제 그룹의 외동딸이자 베일에 싸인 실세 팀장.

세간에서는 세기의 결합이라 떠들어댔지만, 태현에게 그건 그냥 귀찮은 비즈니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결혼이라."

쓴웃음을 지으며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창문에 비친 그의 얼굴은, 20년 전의 순수함 같은 건 진작 사라진 지독하게 냉소적인 남자의 것이었다.

라이터 불꽃이 어둠 속에서 잠깐 일렁였다.

그때였다.

담배를 꺼내다 걸린 지갑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멈칫.

짧은 정적이 흘렀다.

태현이 허리를 숙여 지갑을 집어 올렸다.

지갑 안쪽, 가장 깊숙한 곳에 낡고 빛바랜 사진 한 장.

보육원에서 함께 찍은 아이들.

그 속에서 손을 꼭 잡고 있는 작은 소은, 그리고 태현.

환하게 웃고 있는 얼굴들은, 지독하게 복잡한 지금과 달리 그 시절이 행복했다는 걸 다시금 깨닫게 했다.

"...소은아."

낮은 음성이 조용한 방 안을 파고들었다.

20년 전, 입양 이후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태현은 믿지 않았다.

아니, 믿을 수 없었다.

그에게 그 소식은 도무지 현실 같지 않았다.

태현의 시선이 책상 위 '백가은'의 인사 기록 카드로 향했다.

무표정하게 정면을 응시하는 사진.

그는 지갑 속 어린 소은과 서류 속 가은을 번갈아 봤다.

묘하게 닮은 눈매.

그러나 전혀 다른 분위기.

그의 눈이 작게 흔들렸다.

그럴 리 없는데.

이름도, 나이도 다르니까.

서류철을 다시 책상 위로 던졌다.

내려다보는 야경은 어느새 빛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테이블 위 마시다 만 양주잔에 물기가 고여 툭,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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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른 이름으로 그를 다시 만났다   56화_선을 넘는 질문

    이룸 그룹 본사 회의실.오전 11시.백제 그룹과의 협업 프로젝트 중간 점검 회의였다.이룸 측 참석자는 태현과 한태풍, 그리고 이영돈 본부장이었다.백제 측은 소은이 단독으로 왔다.소은이 자료를 펼치는 사이, 이영돈이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그는 오자마자 소은을 한 번 훑어봤다.빠르고 조용하게.그러나 테이블 건너편에 앉은 태현에게는 보였다.태현은 펜을 손가락 사이에서 천천히 돌렸다.회의가 시작됐다.소은이 진행 현황을 설명했다.자료 구성이 깔끔했다.설명도 군더더기 없었다.이영돈이 중간에 몇 번 끼어들었다.처음엔 업무적인 질문이었다."디자인 방향성이 S의 기존 스타일과 다소 차이가 있는 것 같은데, 이 부분은 어떻게 조율하실 생각입니까.""S의 스타일을 베이스로 하되, 이번 프로젝트 콘셉트에 맞게 일부 조정하는 방향으로 협의 중입니다. 다음 주 안에 수정안 나올 예정입니다.""S와 직접 소통이 가능한 겁니까. 중간에 다른 단계가 있는 건지.""직접 소통합니다."이영돈이 고개를 끄덕이며 소은을 봤다.그 눈빛이 아까보다 좀 더 오래 머물렀다."백 팀장님이 S와 상당히 가까운 사이인 것 같은데."소은이 자료에서 시선을 들었다.이영돈과 눈이 마주쳤다.소은은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네."이영돈이 피식 웃으며 팔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신기하네요. S가 그렇게 오랫동안 익명을 고집하는 사람인데, 백 팀장님하고만 직접 소통이 된다는 게. 보통 인연은 아닌 것 같은데.""......""그럼 백 팀장님 개인적으로는 어떤 분입니까. S가."소은이 한 박자 두고 대답했다."프로젝트랑 관련 없는 질문 아닌가요.""그냥 궁금해서요. 어떻게 그런 인연을 만드셨나 싶어서. 나이도 어리신데. 인맥 관리를 잘하시네요."그때 태현이 펜을 내려놓았다.소리가 작았다.그런데 이상하게 회의실 안에서 또렷하게 들렸다.이영돈과 태현이 잠깐 시선을 교환했다."이 팀장과 결혼이 무산되었다지? 이룸에 다른 사람은 어때요? 예를 들면ㅡ""본부장님.

  • 다른 이름으로 그를 다시 만났다   55화_푸른 보육원

    분식집 문이 열렸다.찬 공기가 한꺼번에 밀려들었다.동석이 제일 먼저 나오고, 그 뒤로 수영, 도휘, 승아가 줄줄이 따라 나왔다.태현과 소은은 아직 안에 있을 때였다.동석이 외투 지퍼를 올리며 먼저 걸었다.나머지 셋이 그 뒤를 따랐다.푸른 보육원까지는 차로 이십 분 거리였다.새로 지은 건물이었다.예전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몇 년 전, 수영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다시 문을 연 곳이었다.지금 살고 있는 아이들은 달랐지만, 간판 이름은 그대로였다.밤바람이 제법 찼다."야, 근데 진짜로 태현이 형이야?"도휘가 먼저 터뜨렸다.동석이 눈을 감았다가 떴다."조용히 해.""확실히 변하긴 했는데 눈매는 똑같더라.""......""끝까지 말 안 할 거야?""뭘 말해, 멍청아."동석이 낮게 쏘아붙였다."소은이에 대해서도 다 말하게?"도휘가 입을 다물었다.그제야 전체 상황이 연결된 모양이었다.도휘가 자기 뒤통수를 다시 한번 감쌌다."그래서 나 때린 거야?""응.""미리 말해주지.""말할 시간이 어딨어."도휘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더 따지지 않았다.네 사람이 한동안 말없이 걸었다.가로등이 하나씩 켜지고, 골목이 넓은 길로 이어졌다.수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확실히 20년이 짧진 않구나. 길에서 만났으면 못 알아봤겠어."아무도 반박하지 않았다."잘 생겼던데? 은이, 좋겠네~."수영이 말했다.동석이 피식 웃었다."파혼 했다니까.""응? 근데 소은이는 어떻게 저 사람이랑 같이 밥을 먹고 있어? 파혼한 사이인데."동석은 대답하지 않았다.걸음을 좀 더 빠르게 뗐다.어느새 차를 세워둔 곳에 도착했고, 네 사람은 하나둘 차에 올랐다.도휘가 슬쩍 동석 옆으로 붙었다."야, 동석아.""왜.""태현이 형, 우리 알아본 것 같지 않아?"동석의 시선이 한 박자 흔들렸다."아니야.""표정이 좀 이상하지 않았어? 우리 보는데."수영이 하품을 하며 대꾸했다."이상한 사람들인가 싶어서 봤겠지. 옆에서 우동 뱉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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