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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며칠 동안 벌어진 모든 일은 모두가 그녀를 위해 짜맞춘 하나의 꿈 같았다.그 아름다운 꿈속에서 강지연은 병든 식물이 햇빛과 비를 맞으며 다시 꽃을 피워 가듯 서서히 숨을 되찾고 있었다.그 모두 속에는 온하준도 포함돼 있었다. 어쩌면 그는 그 중심에 있었을지도 모른다.강지연은 더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대신 살짝 방향을 틀어 돌아 나왔다.잠에서 깬 홍순자는 강지연이 방에 없는 걸 보고 깜짝 놀라 밖으로 뛰쳐나왔다.사람들은 강지연과 홍순자가 아직 자고 있을 거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강지연이 사라졌다는 말에 목장 전체가 순식간에 술렁였다.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찾던 끝에 번식 구역에서 송아지를 받는 아저씨 옆에 쪼그려 앉아 있는 강지연을 발견했다.막 떠오른 햇살이 목장을 비추고 있었고 초록빛 풀밭은 금을 입힌 듯 반짝이고 있었다. 그 황금빛 속에서 강지연은 손을 흔들며 환하게 웃었다.“할머니, 고모, 오빠! 빨리 와 봐요. 젖소가 송아지를 낳았어요!”세 사람은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그녀의 미소를 바라보며 조용히 눈시울을 적셨다.평소엔 좀처럼 오지 않는 목장이기도 했고 강지연이 이렇게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오랜만이어서 모두 이곳에서 하루 더 머물기로 뜻을 모았다.그래서 오전에는 강시우가 그녀를 데리고 말을 탔고 오후에는 목장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치즈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버터는 또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하나하나 직접 보여주었다.저녁이 되자 온종일 지칠 정도로 돌아다닌 강지연은 가족들과 함께 다시 야외에 자리를 잡았다.둥근 달이 높이 떠 있는 밤하늘 아래, 그녀는 할머니의 어깨에 기대어 목장에서 만든 시원한 요구르트를 마시며 고소한 바비큐를 먹었다.지금 이 순간이 꿈인지, 아니면 지난 모든 일들이 꿈이었는지 현실감이 뒤섞이는 기분이었다.강시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기 접시 하나를 들고 뒤쪽 숙소로 향했다.“오빠.”강지연이 불렀다.“누구 주려고요?”가로등 불빛 아래, 누군가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그 뒤 며칠 동안 강지연은 계속 바빴다. 홍순자가 이곳에서 이렇게 다채로운 생활을 하고 계실 줄은 몰랐다.물 만난 물고기처럼 할머니는 이곳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살고 있었고 아직 언어가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는 점만 빼면 삶은 아주 풍성해 보였다.강지연은 홍순자와 함께 강희라 회사의 상품 쇼에 참석한 적도 있었다. 그 쇼에는 홍순자의 디자인이 반영된 작품이 있었기 때문이다.홍순자는 전문적인 디자인 이론을 알지는 못했지만 해성에서 오래 살아오며 자수와 옛 장신구에 대한 지식과 감각이 몸에 배어 있었고 아이디어도 많았다.강희라는 그 생각들을 실제 제품으로 구현해 주곤 했다. 그래서 그날 쇼에서는 홍순자가 무대에 올라야 했는데 강희라는 쇼 전체를 챙기느라 바빴고 자연스럽게 강지연이 홍순자의 의상과 메이크업을 맡게 되었다.손이 많이 가는 일이었다. 강지연은 홍순자의 드레스를 고르고 화장을 해드리고 머리를 손질했다.본인 준비까지 마친 뒤 오후에는 쇼를 보고 저녁에는 만찬까지 이어졌다. 하이힐을 하루 종일 신고 있었더니 발이 말을 듣지 않을 지경이었고 그날도 집에 돌아오자마자 그대로 쓰러지듯 잠들었다.또 하루는 강시우가 국내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제품 설명회를 준비하던 중, 예약해 두었던 사회자가 항공편 문제로 오지 못하게 되었다.결국 강시우는 급하게 그 일을 강지연에게 맡겼다. 그녀는 원고를 외우고 사전을 찾고 챗지피티까지 뒤졌다.전문 용어가 너무 많아 현국어로 번역해도 뜻이 잡히지 않는 말투성이였고 강시우가 바쁘다 보니 단어 하나하나를 전부 물어볼 수도 없었다.그날 밤 그녀는 꿈속에서도 번역하고 있었고 전문 용어와 멘트를 외우고 있었다.방 안에 퍼진 치자꽃 향기 속에서 나뭇잎 부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긴장한 정도는 수능을 앞두었던 시절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다음 날 무대에 올라서자 더 긴장됐다. 외국어로 하는 사회는 처음이었기에 오빠에게 누가 될까 봐 마음이 조마조마했다.그날 밤에도 강지연은 집에 돌아와 머리를 대자마자 깊이 잠들었다
온하준은 밤새 한숨도 자지 않았다. 강희라와 강시우에게서 오는 신호를 놓칠까 봐서였다.강지연의 방에 치자꽃 향 디퓨저를 둔 것도 그의 제안이었고 효과는 확실했다.이제 다음 단계는 낮이었다. 강지연을 더 이상 방 안에만 두지 말고 밖으로 나가 몸을 조금이라도 움직이게 해야 했다.그래야 밤에 깊이 잠들 수 있을 테니 말이다.처음에는 춤을 추게 할 생각이었지만 강시우가 반대했다. 괜히 불편한 기억을 건드릴 수 있으니 당분간은 춤을 피하자는 거였다. 그렇게 해서 나선 사람이 홍순자였다.홍순자는 방문 앞에 잠깐 얼굴을 내밀었다가 머뭇거리며 바로 사라졌다.“할머니? 무슨 일 있으세요?”강시우가 먼저 묻고는 강지연을 향해 말했다.“내가 나가서 보고 올게.”강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뒤 강시우가 돌아오자 그녀가 물었다.“할머니 왜 그러신데요?”강시우는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아, 사과할 일이 있는데 영어로 어떻게 쓰는지 물어보시더라.”강지연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할머니가 왜 사과를 해요? 누구한테 하는 건데요?”“오늘 원래 할머니가 여기 현지 가족 몇 분이랑 약속이 있었거든.”강시우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그런데 못 가게 돼서 디저트랑 사과 편지를 보내려고 하시는 거야.”“왜 못 가시는데요?”외국에 와서라도 할머니가 친구를 사귀고 즐겁게 지내길, 강지연은 누구보다 바라고 있었다.강시우가 잠시 말을 멈추는 순간 그녀는 모든 이유가 자신 때문이라는 걸 알아차렸다.“할머니한테 가시라고 해요. 나 혼자 있어도 괜찮아요.”강시우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아니야. 너 때문이 아니라 할머니가 아직 혼자 나가는 걸 불편해하시거든. 원래는 엄마가 같이 가기로 했는데 급한 일이 생겼고 나도 곧 회사에 가 봐야 해서... 그래서 그냥 취소하신 거야.”강지연은 금세 상황을 정리했다. 고모도 오빠도 바빴고 할머니는 그녀를 혼자 두고 나가는 게 마음에 걸렸던 거였다.그동안 자신 때문에 집 안의 세 사람이 번갈아 곁을 지켰고 그사이 미뤄진 일들이
온하준은 더 이상 자신을 변명할 생각이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어떻게 하면 강지연의 불안을 가라앉힐 수 있을지, 최소한 마음 편히 잠을 잘 수 있게 만들 수 있을지 그 생각뿐이었다.그는 나뭇잎을 한 아름 따 와 홍순자와 강희라 그리고 강시우에게 미리 말해 두었다.강지연이 잠든 뒤 조금이라도 불안해 보이면 바로 자신에게 알려 달라고.강시우는 그의 방법이 반신반의였지만 지금은 무엇이든 해볼 수밖에 없었다.밤 열 시. 강지연이 잠든 지 겨우 삼십 분쯤 지났을 무렵이었다.집안 사람들은 혹여 그녀가 깰까 봐 숨소리조차 조심했고 발걸음도 죽였다.그런데 그때, 거리에서 갑자기 차 한 대가 사이렌 소리를 울리며 지나갔다.잠들어 있던 강지연의 몸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꿈속에서 장시범의 얼굴이 끝없이 커지며 그녀를 향해 주문처럼 같은 말을 반복했다.“어떻게 갚을 거야? 내가 너를 위해 그렇게 많은 걸 바쳤는데 어떻게 갚을 거야?”가슴이 조여 오고 호흡이 가빠졌다. 바로 그 순간, 나뭇잎으로 휘파람을 부는 소리가 들려왔다.곡은 ‘아름다운 강산’이었는데 너무 못 불어서 장시범의 얼굴이 순식간에 흩어지듯 사라져 버렸다.강지연의 꿈속 풍경은 곧 연습실로 바뀌었다. 지역 대회가 열린다며 하나의 작품을 준비해야 했고 그녀가 추는 춤은 바로 ‘아름다운 강산’이었다.그런데 저 남자애들은 왜 이렇게 얄미운지. 못 불기만 하면 다행일 텐데 소리가 너무 커서 음악 소리를 전부 덮어 버리고 있었다.‘박자가 안 들린단 말이야.’강지연은 창가로 달려갔다. 해가 지는 시간, 붉은 노을이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었고 어디선가 치자꽃이 피었는지 향기가 밀려 들어왔다.초여름 저녁 공기에 맑은 향이 섞여 들었다.“야, 좀 그만 불면 안 돼? 음악이 안 들리잖아!”막 화를 내려던 순간, 아이들은 아이스크림이 든 봉지를 흔들며 말했다.“강지연, 아이스크림 먹을래?”‘쳇, 아이스크림이니까 봐준다.’나뭇잎 소리는 계속 이어졌고 음악도 함께 흘렀다. 치자꽃 향기는 열린 창을 타
“알고 있어요. 저는 다시 강지연을 붙잡으려 하지 않을 거예요. 저는 이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잘 알아요.”온하준은 강시우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스스로 선을 그었다.“그 정도 분별은 있어서 다행이네. 우리 집으로 와.”강시우는 결국 온하준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온하준은 강시우가 보낸 운전기사의 차를 타고 집에 도착했고 문 앞에서 근심이 가득한 홍순자의 얼굴을 보는 순간 가슴이 시큰하게 저렸다.한때 자신을 누구보다 많이 아껴 주던 할머니였다. 정말 오랜만에 마주한 얼굴 앞에서 진심으로 잘 모시고 싶다고 생각했던 그 시절의 마음이 불쑥 떠올랐다.“할머니, 저 지연이 보러 왔어요.”홍순자 앞에 쪼그려 앉는 순간 온하준은 눈시울이 붉어졌다.이미 강시우에게서 그의 사정을 들어 알고 있었던 홍순자는 지금의 온하준을 보며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한때는 모든 기대를 이 아이에게 걸었고 강지연을 행복하게 해줄 사람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결국 이렇게 되어 버렸다.“가 봐라.”짧은 말 속에 쓰림과 원망이 함께 얽혀 있었다. 강지연을 떠올리면 가슴이 미어지고 그가 저지른 일들을 생각하면 미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하지만 지금은 강지연을 다시 온하준에게 맡겨야 한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홍순자의 마음을 괴롭혔다.온하준은 강시우를 따라 위층으로 올라갔다. 방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우리 엄마가 안에 같이 있어. 사람 없으면 안 돼. 그리고 문도 안 열려고 해.”강시우는 이미 강지연의 상태를 어느 정도 설명해 둔 뒤였다. 온하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너만 들어가. 나는 안 들어가는 게 나을 거야. 사람 많으면 더 안 좋아.”방문이 열리고 작은 거실을 지나 안쪽으로 침실이 이어져 있었다.온하준은 깔끔한 차림이었고 이마 앞으로 살짝 흐트러진 짧은 머리칼 사이로 차분하면서도 서늘한 눈빛이 비쳤다.침대 머리에 반쯤 기대앉아 있는 강지연이 보였다. 눈빛은 텅 비어 있었고 얼굴은 창백했다. 불과 며칠 사이에 전혀 다른 사람이 된 듯했다.얼마 전 예술제 무대에
이 시점에 온하준의 전화가 반가울 리 없었던 강시우는 미간을 찡그리며 전화받았다.“저기... 강시우 씨.”머뭇거리며 내뱉는 온하준의 호칭에 강시우의 미간이 더 깊게 접혔다.“강시우 씨, 갑작스럽게 전화해 죄송한데 혹시 강지연 상태가 많이 안 좋은 건지 여쭤보고 싶어서요.”“네가 어떻게 알아?”강시우의 목소리가 낮아졌다.“추측해 본 거예요.”온하준은 차분히 말을 이었다.“며칠째 한의원에도 안 가고 연습에도 안 나갔다고 들었어요. 무용단 단원들도 무슨 일이 생긴 건지 모르고 있고요. 강지연 성격에 공연이 그렇게 성공했으면 보통은 더 열심히 연습에 매달렸을 텐데. 그래서 아픈 건지 아니면...”온하준의 말을 듣는 동안 강시우의 머릿속에 문득 한 생각이 스쳤다.“너, 지연이에 대해 잘 알고 있지?”강지연의 성장 과정에서 그는 사실상 부재한 오빠였다.온하준이 쓰레기 같은 인간이라는 건 분명했지만 강지연과 십여 년을 알고 지낸 사이이기도 했다.학창 시절 삼 년, 부부로 산 세월이 오 년.어쩌면 온하준이 그녀 마음속 매듭을 풀 실마리를 쥐고 있을지도 몰랐다.“그렇죠. 이 세상에서 강지연을 가장 잘 아는 사람 중 하나라고는 할 수 있겠죠. 최소한 장시범보다는요.”강시우는 비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무슨 낯짝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거야?”온하준의 목소리에 잠깐의 망설임이 스쳤다.“그래요. 제가 쓰레기같이 굴었던 건 사실이죠. 그래도 정신을 차리고 나니 여전히 강지연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은 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강지연, 마음이 많이 다친 것 같은데 아닌가요? 그것도 가벼운 상처는 아닌 것 같고요.”온하준이 이렇게 확신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강지연은 어릴 때부터 강한 사람이었다. 그런 가정환경에서 자라면서도 거센 바람 속의 풀처럼 쉽게 꺾이지 않았다.상처를 논하자면 지난 오 년의 결혼 생활에서 자신이 준 상처가 가장 컸을 것이다.그럼에도 그녀는 한 번도 앞으로 나아가려는 의지를 잃지 않았다.그랬던 그녀가 장시범 때문에 지금은 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