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5화

Author: 네입클로버
그날 이후로 강지연은 다시 책을 집어 들었다.

그때는 이것저것 깊이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냥 너무 창백해져 버린 자기 인생에 살짝이라도 숨을 붙여 줄 무언가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뭔가에 몰두하고 있으면 그날 들었던 그 말이 떠오를 때마다 무너져 내리는 일은 덜 할 것 같았다.

누가 알았겠는가.

그렇게 그녀 혼자만의 비밀스러운 의지로 남아 있던 것들이 오늘에 이르러서는 그녀 자신을 건져 올릴 구명줄이 될 줄은.

내일은 반드시 시험을 잘 봐야 했다.

그리고 여기를 떠날 것이다.

멀리, 아주 멀리, 갈 수 있는 데까지 멀리.

그렇게 생각해도 가슴은 여전히 아프고 또 아팠다.

강지연은 심지어 이 아픔이 온하준 때문인지, 아니면 스스로가 바쳐 버린 5년이라는 시간 때문인지조차 구분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이제는 이런 고통 속에 스스로를 더 이상 가두지 않겠다는 것. 설령 이 고통이 아주 오랫동안 계속되다가 천천히 옅어지더라도, 그녀는 스스로를 구하기 위해 먼저 자신을 끌어 올리기로 했다.

그녀는 배달 음식을 시켰다. 담백한 저녁 식사와 일회용으로 갈아입을 속옷 몇 벌.

그리고 호텔 프런트에 전화를 걸어 다음 날 아침에 깨워 달라고 모닝콜을 요청했다.

그런 다음 억지로라도 눈을 감고 잠을 자려고 애썼다.

아마 전날 밤을 꼬박 새워 버린 탓일 것이다.

그날 밤 그녀는 뜻밖에도 꽤 푹 잤다.

다음 날, 정해 둔 시간에 맞춰 일어나 휴대폰 전원을 켰다.

순식간에 쏟아져 들어오는 메시지 알림들.

손에 쥔 휴대폰이 쉬지 않고 떨렸다.

전부 단 한 사람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온하준]

강지연은 그 메시지들을 열어보지 않았다.

시험에 영향을 받을까 봐, 괜히 마음이 흔들릴까 봐.

호텔에서 간단히 아침을 먹고 준비를 마친 뒤, 그녀는 시험장으로 향했다.

이 호텔은 시험장과 가까워서 걸어서 가도 5분이면 충분히 도착할 거리였다.

호텔 문을 나서자마자,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이 다시 진동하기 시작했다.

온하준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

놀란 그녀는 그만 휴대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허둥지둥 화면을 밀어 전화를 거절하고 다시 한번 전원을 꺼 버렸다.

시험장을 나올 때까지 그녀의 심장은 계속 요동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기쁨 때문이었다.

왠지 시험을 잘 본 것 같았다.

스피킹 시험에서 마주 앉은 시험관은 내내 웃는 얼굴로 그녀와 대화를 이어 갔다.

리스닝은 대부분 또렷하게 들렸고, 리딩과 라이팅도 큰 막힘없이 끝까지 써냈다.

몇 점이 나올지 감히 짐작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모든 영역을 끝까지 해냈다.

자신이 그렇게까지 쓸모없는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이, 그제야 아주 조금 실감 났다.

강지연은 혼자 인도 위를 걸어가고 있었다. 고개를 숙인 채 머릿속으로 오늘 시험의 자잘한 장면들을 하나하나 되짚었다.

그러다가 눈앞에 갑자기 구두 한 켤레가 불쑥 들어왔다.

일부러 길 한가운데 버티고 서서 사람의 발길을 막아선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탓에, 발을 거둘 틈도 없이 그대로 그에게 부딪히고 말았다.

그가 재빨리 그녀를 붙잡아 주지만 않았다면 그녀는 그대로 넘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절대로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얼굴이었다.

온하준.

“강지연!”

강지연은 한눈에 온하준이 화가 나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어떻게든 그 분노를 꾹 눌러 삼키려 애쓰는 것 같았다.

“지연아, 너 왜 집에 안 들어가?”

온하준은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평소처럼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언제나 그랬듯 부드럽고, 또 다정하게.

강지연이 속으로 되묻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다.

‘왜 안 돌아가는지 정말 모르는 걸까?’

하지만 지금은 온하준과 일일이 따지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방금 부딪히는 바람에 그녀의 가방이 바닥으로 떨어져 버렸고, 가방이 열리면서 시험용 펜이 살짝 튀어나와 있었다.

그녀는 그가 자신이 시험을 보러 왔다는 사실만큼은 절대로 알아채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

그녀는 온하준의 손을 힘껏 뿌리치고 재빨리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펜을 잽싸게 집어 가방 안에 밀어 넣고 가방을 꽉 여몄다.

“뭐야, 방금 그거?”

그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가방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펜이야.”

그녀는 최대한 태연한 척 대답했지만, 가방을 잡은 손가락 마디는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

“나한테 줘.”

온하준이 말했다.

안 된다.

그에게 그 펜을 보여 줄 수는 없었다.

강지연은 더 세게 가방을 끌어안았다.

“펜 가지고 뭐 하게?”

“휴대폰 줘.”

이번에는 그렇게 말했다.

잠시 실랑이가 이어졌고, 결국 그녀는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휴대폰은 꺼져 있었다.

그는 한 번 힐끗 보기만 하고는 그대로 다시 그녀에게 돌려주었다.

“전화도 그렇게 많이 하고, 메시지도 그렇게 많이 보냈는데, 왜 한 번을 안 받는 거야? 아직도 화났어?”

그녀는 휴대폰을 꼭 쥔 채 속으로 생각했다.

‘다행이다.’

혹시라도 메일함까지 뒤져서 시험 안내 메일이라도 보면 어쩌나, 그게 제일 걱정이었다.

‘만약 문제가 이것뿐이라면...’

강지연은 잠시 생각했다.

더 이상 이런 걸로 화를 내고 싶지 않았다. 그냥 멀리 도망치고 싶었다. 이곳에서, 그리고 이 사람에게서 가능한 한 멀리.

그 생각은 이렇게 다시 온하준을 눈앞에서 마주한 지금 이 순간 더욱 선명하고 강렬해지고 있었다.

강지연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는 여전히 그녀가 삐쳐 있다고 생각한 듯 한숨을 쉬었다.

“지연아, 너 원래 착하고 눈치도 잘 봤잖아. 그런데 이번에는 겨우 이런 일 가지고 집에도 안 들어가 버리면 어떡해?”

강지연은 맹세했다.

정말로 이제는 그런 일들로 더 이상 화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방금 그 한마디는 아마 부처라도 참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어제 일도 결국 내 잘못이라는 거야? 내가 철이 없는 거고? 내가 거기 들어가서 김도윤한테 박수라도 치면서 ‘와, 나 연기 잘한다, 나랑 똑같다’라고 해 줘야 했어?”

참고 참고 참아 오던 말이 마침내 터져 나왔다.

온하준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난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야. 내 말은, 남들이 뭐라고 떠드는지는 너도 어쩔 수 없는 거니까, 굳이 그런 말들...”

“나는 못 막았겠지만, 너는 막을 수 있었잖아.”

강지연은 똑바로 그를 바라봤다.

“근데 그때 너는 뭐 하고 있었는데? 이하나랑 껴안고 웃느라 정신이 없었지.”

“강지연!”

그의 얼굴에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분노가 떠올랐다.

그제야 그녀는 알았다.

‘이하나’라는 이름은, 그에게 있어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되는 금기가 되어 버렸다는 사실을...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강지연은 가방을 끌어안고 그를 지나쳐 걸어 나갔다. 그러나 그는 팔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으며 멈춰 세웠다.

“미안해, 지연아. 내 잘못이야. 아까 내가 너무 목소리를 높였어.”

그는 한 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냥 네가 하나를 오해하지 않았으면 해서 그래. 우리 진짜 그냥 친구야. 다른 애들이랑 똑같이 나한테는 그저 ‘형제 같은 친구’고.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너까지 그렇게 말하면 걔가 얼마나 곤란하겠어.”

강지연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 눈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어깨에 기대 깔깔거리던 이하나는 충분히 오해받을 행동을 해 놓고도 지적당하는 것이 그렇게 억울한가.

하지만 그녀는 입안에서 그 말을 굴리다가 결국 조용히 한마디만 흘렸다.

“그래.”

“지연아...”

온하준은 그녀의 차가운 반응을 느끼고 더 다가왔다.

“너 아직도 화난 거야? 혼자 호텔에 가서 자고, 집에도 안 들어오고. 나는 너한테 아무 말도 안 했잖아. 그런데 너는 언제까지 이렇게 화내고 있을 거야?”

그래, 결국 모든 잘못은 그녀의 탓이었다.

언제나 결론은 거기에 있었다.

“지연아, 그만 화 풀어. 우리 먼저 점심부터 먹자. 그다음에 내가 너랑 쇼핑도 같이 가 줄게, 응?”

강지연은 잠시 생각했다.

‘그래, 오히려 잘됐네.’

마침 온하준에게 할 말이 있었던 참이었다.

온하준은 그녀를 데리고 근처의 식당으로 들어갔다.

식당 안으로 들어서자, 서빙하는 직원의 시선이 본능적으로 둘을 훑고 지나갔다.

습관처럼 강지연의 몸이 먼저 움찔했다.

고개를 숙이고 옷깃을 세워 가리려다가 온하준의 뒤로 살짝 숨어 걸음을 아주 천천히 옮겨 자신의 절뚝거림이 덜 티 나게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그녀는 스스로를 말렸다.

어울리지 못하면 어쩔 것인가. 어차피, 이제는 그와 맞추어 살 생각도 없었다.

강지연은 자리에 앉았다.

온하준은 능숙하게 메뉴판을 보고 음식을 주문했다.

음식이 하나둘 차려지고 나서, 그는 젓가락을 그녀 쪽으로 밀어주며 언제나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연아, 먹어. 다 네가 좋아하는 것들로 시켰어.”

강지연은 상 위에 오른 요리들을 훑어보았다. 모두 다 매운 음식뿐이었다.

그녀는 속으로 살짝 쓴웃음을 지었다.

온하준은 여전히 몰랐다. 자신이 매운 것을 잘 먹지 못한다는 것.

집에서 매일 저녁 식탁에 매운 반찬이 빠지지 않았던 건 온전히 그가 매운맛을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나 배 안 고파.”

그녀는 젓가락을 들지 않은 채 말했다.

“그리고 나 할 말 있어.”

“뭔데?”

그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

“어디 가고 싶은 데 있어? 오늘 나 하루 종일 시간 비워 뒀어. 오후에는 같이 놀러 가고, 저녁에는 우리 부모님 댁에 같이 가서 밥 먹자.”

강지연은 거의 보이지도 않을 만큼 희미하게 올라간 그의 웃음을 바라보았다.

곧 그녀의 입에서 나올 말을 떠올리는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짙고 거센 쓰라림이 치밀어 올랐다.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다섯 번째 결혼기념일에서   제546화

    지난 며칠 동안 벌어진 모든 일은 모두가 그녀를 위해 짜맞춘 하나의 꿈 같았다.그 아름다운 꿈속에서 강지연은 병든 식물이 햇빛과 비를 맞으며 다시 꽃을 피워 가듯 서서히 숨을 되찾고 있었다.그 모두 속에는 온하준도 포함돼 있었다. 어쩌면 그는 그 중심에 있었을지도 모른다.강지연은 더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대신 살짝 방향을 틀어 돌아 나왔다.잠에서 깬 홍순자는 강지연이 방에 없는 걸 보고 깜짝 놀라 밖으로 뛰쳐나왔다.사람들은 강지연과 홍순자가 아직 자고 있을 거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강지연이 사라졌다는 말에 목장 전체가 순식간에 술렁였다.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찾던 끝에 번식 구역에서 송아지를 받는 아저씨 옆에 쪼그려 앉아 있는 강지연을 발견했다.막 떠오른 햇살이 목장을 비추고 있었고 초록빛 풀밭은 금을 입힌 듯 반짝이고 있었다. 그 황금빛 속에서 강지연은 손을 흔들며 환하게 웃었다.“할머니, 고모, 오빠! 빨리 와 봐요. 젖소가 송아지를 낳았어요!”세 사람은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그녀의 미소를 바라보며 조용히 눈시울을 적셨다.평소엔 좀처럼 오지 않는 목장이기도 했고 강지연이 이렇게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오랜만이어서 모두 이곳에서 하루 더 머물기로 뜻을 모았다.그래서 오전에는 강시우가 그녀를 데리고 말을 탔고 오후에는 목장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치즈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버터는 또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하나하나 직접 보여주었다.저녁이 되자 온종일 지칠 정도로 돌아다닌 강지연은 가족들과 함께 다시 야외에 자리를 잡았다.둥근 달이 높이 떠 있는 밤하늘 아래, 그녀는 할머니의 어깨에 기대어 목장에서 만든 시원한 요구르트를 마시며 고소한 바비큐를 먹었다.지금 이 순간이 꿈인지, 아니면 지난 모든 일들이 꿈이었는지 현실감이 뒤섞이는 기분이었다.강시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기 접시 하나를 들고 뒤쪽 숙소로 향했다.“오빠.”강지연이 불렀다.“누구 주려고요?”가로등 불빛 아래, 누군가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 다섯 번째 결혼기념일에서   제545화

    그 뒤 며칠 동안 강지연은 계속 바빴다. 홍순자가 이곳에서 이렇게 다채로운 생활을 하고 계실 줄은 몰랐다.물 만난 물고기처럼 할머니는 이곳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살고 있었고 아직 언어가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는 점만 빼면 삶은 아주 풍성해 보였다.강지연은 홍순자와 함께 강희라 회사의 상품 쇼에 참석한 적도 있었다. 그 쇼에는 홍순자의 디자인이 반영된 작품이 있었기 때문이다.홍순자는 전문적인 디자인 이론을 알지는 못했지만 해성에서 오래 살아오며 자수와 옛 장신구에 대한 지식과 감각이 몸에 배어 있었고 아이디어도 많았다.강희라는 그 생각들을 실제 제품으로 구현해 주곤 했다. 그래서 그날 쇼에서는 홍순자가 무대에 올라야 했는데 강희라는 쇼 전체를 챙기느라 바빴고 자연스럽게 강지연이 홍순자의 의상과 메이크업을 맡게 되었다.손이 많이 가는 일이었다. 강지연은 홍순자의 드레스를 고르고 화장을 해드리고 머리를 손질했다.본인 준비까지 마친 뒤 오후에는 쇼를 보고 저녁에는 만찬까지 이어졌다. 하이힐을 하루 종일 신고 있었더니 발이 말을 듣지 않을 지경이었고 그날도 집에 돌아오자마자 그대로 쓰러지듯 잠들었다.또 하루는 강시우가 국내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제품 설명회를 준비하던 중, 예약해 두었던 사회자가 항공편 문제로 오지 못하게 되었다.결국 강시우는 급하게 그 일을 강지연에게 맡겼다. 그녀는 원고를 외우고 사전을 찾고 챗지피티까지 뒤졌다.전문 용어가 너무 많아 현국어로 번역해도 뜻이 잡히지 않는 말투성이였고 강시우가 바쁘다 보니 단어 하나하나를 전부 물어볼 수도 없었다.그날 밤 그녀는 꿈속에서도 번역하고 있었고 전문 용어와 멘트를 외우고 있었다.방 안에 퍼진 치자꽃 향기 속에서 나뭇잎 부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긴장한 정도는 수능을 앞두었던 시절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다음 날 무대에 올라서자 더 긴장됐다. 외국어로 하는 사회는 처음이었기에 오빠에게 누가 될까 봐 마음이 조마조마했다.그날 밤에도 강지연은 집에 돌아와 머리를 대자마자 깊이 잠들었다

  • 다섯 번째 결혼기념일에서   제544화

    온하준은 밤새 한숨도 자지 않았다. 강희라와 강시우에게서 오는 신호를 놓칠까 봐서였다.강지연의 방에 치자꽃 향 디퓨저를 둔 것도 그의 제안이었고 효과는 확실했다.이제 다음 단계는 낮이었다. 강지연을 더 이상 방 안에만 두지 말고 밖으로 나가 몸을 조금이라도 움직이게 해야 했다.그래야 밤에 깊이 잠들 수 있을 테니 말이다.처음에는 춤을 추게 할 생각이었지만 강시우가 반대했다. 괜히 불편한 기억을 건드릴 수 있으니 당분간은 춤을 피하자는 거였다. 그렇게 해서 나선 사람이 홍순자였다.홍순자는 방문 앞에 잠깐 얼굴을 내밀었다가 머뭇거리며 바로 사라졌다.“할머니? 무슨 일 있으세요?”강시우가 먼저 묻고는 강지연을 향해 말했다.“내가 나가서 보고 올게.”강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뒤 강시우가 돌아오자 그녀가 물었다.“할머니 왜 그러신데요?”강시우는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아, 사과할 일이 있는데 영어로 어떻게 쓰는지 물어보시더라.”강지연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할머니가 왜 사과를 해요? 누구한테 하는 건데요?”“오늘 원래 할머니가 여기 현지 가족 몇 분이랑 약속이 있었거든.”강시우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그런데 못 가게 돼서 디저트랑 사과 편지를 보내려고 하시는 거야.”“왜 못 가시는데요?”외국에 와서라도 할머니가 친구를 사귀고 즐겁게 지내길, 강지연은 누구보다 바라고 있었다.강시우가 잠시 말을 멈추는 순간 그녀는 모든 이유가 자신 때문이라는 걸 알아차렸다.“할머니한테 가시라고 해요. 나 혼자 있어도 괜찮아요.”강시우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아니야. 너 때문이 아니라 할머니가 아직 혼자 나가는 걸 불편해하시거든. 원래는 엄마가 같이 가기로 했는데 급한 일이 생겼고 나도 곧 회사에 가 봐야 해서... 그래서 그냥 취소하신 거야.”강지연은 금세 상황을 정리했다. 고모도 오빠도 바빴고 할머니는 그녀를 혼자 두고 나가는 게 마음에 걸렸던 거였다.그동안 자신 때문에 집 안의 세 사람이 번갈아 곁을 지켰고 그사이 미뤄진 일들이

  • 다섯 번째 결혼기념일에서   제543화

    온하준은 더 이상 자신을 변명할 생각이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어떻게 하면 강지연의 불안을 가라앉힐 수 있을지, 최소한 마음 편히 잠을 잘 수 있게 만들 수 있을지 그 생각뿐이었다.그는 나뭇잎을 한 아름 따 와 홍순자와 강희라 그리고 강시우에게 미리 말해 두었다.강지연이 잠든 뒤 조금이라도 불안해 보이면 바로 자신에게 알려 달라고.강시우는 그의 방법이 반신반의였지만 지금은 무엇이든 해볼 수밖에 없었다.밤 열 시. 강지연이 잠든 지 겨우 삼십 분쯤 지났을 무렵이었다.집안 사람들은 혹여 그녀가 깰까 봐 숨소리조차 조심했고 발걸음도 죽였다.그런데 그때, 거리에서 갑자기 차 한 대가 사이렌 소리를 울리며 지나갔다.잠들어 있던 강지연의 몸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꿈속에서 장시범의 얼굴이 끝없이 커지며 그녀를 향해 주문처럼 같은 말을 반복했다.“어떻게 갚을 거야? 내가 너를 위해 그렇게 많은 걸 바쳤는데 어떻게 갚을 거야?”가슴이 조여 오고 호흡이 가빠졌다. 바로 그 순간, 나뭇잎으로 휘파람을 부는 소리가 들려왔다.곡은 ‘아름다운 강산’이었는데 너무 못 불어서 장시범의 얼굴이 순식간에 흩어지듯 사라져 버렸다.강지연의 꿈속 풍경은 곧 연습실로 바뀌었다. 지역 대회가 열린다며 하나의 작품을 준비해야 했고 그녀가 추는 춤은 바로 ‘아름다운 강산’이었다.그런데 저 남자애들은 왜 이렇게 얄미운지. 못 불기만 하면 다행일 텐데 소리가 너무 커서 음악 소리를 전부 덮어 버리고 있었다.‘박자가 안 들린단 말이야.’강지연은 창가로 달려갔다. 해가 지는 시간, 붉은 노을이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었고 어디선가 치자꽃이 피었는지 향기가 밀려 들어왔다.초여름 저녁 공기에 맑은 향이 섞여 들었다.“야, 좀 그만 불면 안 돼? 음악이 안 들리잖아!”막 화를 내려던 순간, 아이들은 아이스크림이 든 봉지를 흔들며 말했다.“강지연, 아이스크림 먹을래?”‘쳇, 아이스크림이니까 봐준다.’나뭇잎 소리는 계속 이어졌고 음악도 함께 흘렀다. 치자꽃 향기는 열린 창을 타

  • 다섯 번째 결혼기념일에서   제542화

    “알고 있어요. 저는 다시 강지연을 붙잡으려 하지 않을 거예요. 저는 이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잘 알아요.”온하준은 강시우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스스로 선을 그었다.“그 정도 분별은 있어서 다행이네. 우리 집으로 와.”강시우는 결국 온하준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온하준은 강시우가 보낸 운전기사의 차를 타고 집에 도착했고 문 앞에서 근심이 가득한 홍순자의 얼굴을 보는 순간 가슴이 시큰하게 저렸다.한때 자신을 누구보다 많이 아껴 주던 할머니였다. 정말 오랜만에 마주한 얼굴 앞에서 진심으로 잘 모시고 싶다고 생각했던 그 시절의 마음이 불쑥 떠올랐다.“할머니, 저 지연이 보러 왔어요.”홍순자 앞에 쪼그려 앉는 순간 온하준은 눈시울이 붉어졌다.이미 강시우에게서 그의 사정을 들어 알고 있었던 홍순자는 지금의 온하준을 보며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한때는 모든 기대를 이 아이에게 걸었고 강지연을 행복하게 해줄 사람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결국 이렇게 되어 버렸다.“가 봐라.”짧은 말 속에 쓰림과 원망이 함께 얽혀 있었다. 강지연을 떠올리면 가슴이 미어지고 그가 저지른 일들을 생각하면 미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하지만 지금은 강지연을 다시 온하준에게 맡겨야 한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홍순자의 마음을 괴롭혔다.온하준은 강시우를 따라 위층으로 올라갔다. 방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우리 엄마가 안에 같이 있어. 사람 없으면 안 돼. 그리고 문도 안 열려고 해.”강시우는 이미 강지연의 상태를 어느 정도 설명해 둔 뒤였다. 온하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너만 들어가. 나는 안 들어가는 게 나을 거야. 사람 많으면 더 안 좋아.”방문이 열리고 작은 거실을 지나 안쪽으로 침실이 이어져 있었다.온하준은 깔끔한 차림이었고 이마 앞으로 살짝 흐트러진 짧은 머리칼 사이로 차분하면서도 서늘한 눈빛이 비쳤다.침대 머리에 반쯤 기대앉아 있는 강지연이 보였다. 눈빛은 텅 비어 있었고 얼굴은 창백했다. 불과 며칠 사이에 전혀 다른 사람이 된 듯했다.얼마 전 예술제 무대에

  • 다섯 번째 결혼기념일에서   제541화

    이 시점에 온하준의 전화가 반가울 리 없었던 강시우는 미간을 찡그리며 전화받았다.“저기... 강시우 씨.”머뭇거리며 내뱉는 온하준의 호칭에 강시우의 미간이 더 깊게 접혔다.“강시우 씨, 갑작스럽게 전화해 죄송한데 혹시 강지연 상태가 많이 안 좋은 건지 여쭤보고 싶어서요.”“네가 어떻게 알아?”강시우의 목소리가 낮아졌다.“추측해 본 거예요.”온하준은 차분히 말을 이었다.“며칠째 한의원에도 안 가고 연습에도 안 나갔다고 들었어요. 무용단 단원들도 무슨 일이 생긴 건지 모르고 있고요. 강지연 성격에 공연이 그렇게 성공했으면 보통은 더 열심히 연습에 매달렸을 텐데. 그래서 아픈 건지 아니면...”온하준의 말을 듣는 동안 강시우의 머릿속에 문득 한 생각이 스쳤다.“너, 지연이에 대해 잘 알고 있지?”강지연의 성장 과정에서 그는 사실상 부재한 오빠였다.온하준이 쓰레기 같은 인간이라는 건 분명했지만 강지연과 십여 년을 알고 지낸 사이이기도 했다.학창 시절 삼 년, 부부로 산 세월이 오 년.어쩌면 온하준이 그녀 마음속 매듭을 풀 실마리를 쥐고 있을지도 몰랐다.“그렇죠. 이 세상에서 강지연을 가장 잘 아는 사람 중 하나라고는 할 수 있겠죠. 최소한 장시범보다는요.”강시우는 비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무슨 낯짝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거야?”온하준의 목소리에 잠깐의 망설임이 스쳤다.“그래요. 제가 쓰레기같이 굴었던 건 사실이죠. 그래도 정신을 차리고 나니 여전히 강지연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은 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강지연, 마음이 많이 다친 것 같은데 아닌가요? 그것도 가벼운 상처는 아닌 것 같고요.”온하준이 이렇게 확신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강지연은 어릴 때부터 강한 사람이었다. 그런 가정환경에서 자라면서도 거센 바람 속의 풀처럼 쉽게 꺾이지 않았다.상처를 논하자면 지난 오 년의 결혼 생활에서 자신이 준 상처가 가장 컸을 것이다.그럼에도 그녀는 한 번도 앞으로 나아가려는 의지를 잃지 않았다.그랬던 그녀가 장시범 때문에 지금은 춤도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