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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Author: 네입클로버
그날 이후로 강지연은 다시 책을 집어 들었다.

그때는 이것저것 깊이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냥 너무 창백해져 버린 자기 인생에 살짝이라도 숨을 붙여 줄 무언가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뭔가에 몰두하고 있으면 그날 들었던 그 말이 떠오를 때마다 무너져 내리는 일은 덜 할 것 같았다.

누가 알았겠는가.

그렇게 그녀 혼자만의 비밀스러운 의지로 남아 있던 것들이 오늘에 이르러서는 그녀 자신을 건져 올릴 구명줄이 될 줄은.

내일은 반드시 시험을 잘 봐야 했다.

그리고 여기를 떠날 것이다.

멀리, 아주 멀리, 갈 수 있는 데까지 멀리.

그렇게 생각해도 가슴은 여전히 아프고 또 아팠다.

강지연은 심지어 이 아픔이 온하준 때문인지, 아니면 스스로가 바쳐 버린 5년이라는 시간 때문인지조차 구분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이제는 이런 고통 속에 스스로를 더 이상 가두지 않겠다는 것. 설령 이 고통이 아주 오랫동안 계속되다가 천천히 옅어지더라도, 그녀는 스스로를 구하기 위해 먼저 자신을 끌어 올리기로 했다.

그녀는 배달 음식을 시켰다. 담백한 저녁 식사와 일회용으로 갈아입을 속옷 몇 벌.

그리고 호텔 프런트에 전화를 걸어 다음 날 아침에 깨워 달라고 모닝콜을 요청했다.

그런 다음 억지로라도 눈을 감고 잠을 자려고 애썼다.

아마 전날 밤을 꼬박 새워 버린 탓일 것이다.

그날 밤 그녀는 뜻밖에도 꽤 푹 잤다.

다음 날, 정해 둔 시간에 맞춰 일어나 휴대폰 전원을 켰다.

순식간에 쏟아져 들어오는 메시지 알림들.

손에 쥔 휴대폰이 쉬지 않고 떨렸다.

전부 단 한 사람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온하준]

강지연은 그 메시지들을 열어보지 않았다.

시험에 영향을 받을까 봐, 괜히 마음이 흔들릴까 봐.

호텔에서 간단히 아침을 먹고 준비를 마친 뒤, 그녀는 시험장으로 향했다.

이 호텔은 시험장과 가까워서 걸어서 가도 5분이면 충분히 도착할 거리였다.

호텔 문을 나서자마자,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이 다시 진동하기 시작했다.

온하준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

놀란 그녀는 그만 휴대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허둥지둥 화면을 밀어 전화를 거절하고 다시 한번 전원을 꺼 버렸다.

시험장을 나올 때까지 그녀의 심장은 계속 요동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기쁨 때문이었다.

왠지 시험을 잘 본 것 같았다.

스피킹 시험에서 마주 앉은 시험관은 내내 웃는 얼굴로 그녀와 대화를 이어 갔다.

리스닝은 대부분 또렷하게 들렸고, 리딩과 라이팅도 큰 막힘없이 끝까지 써냈다.

몇 점이 나올지 감히 짐작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모든 영역을 끝까지 해냈다.

자신이 그렇게까지 쓸모없는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이, 그제야 아주 조금 실감 났다.

강지연은 혼자 인도 위를 걸어가고 있었다. 고개를 숙인 채 머릿속으로 오늘 시험의 자잘한 장면들을 하나하나 되짚었다.

그러다가 눈앞에 갑자기 구두 한 켤레가 불쑥 들어왔다.

일부러 길 한가운데 버티고 서서 사람의 발길을 막아선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탓에, 발을 거둘 틈도 없이 그대로 그에게 부딪히고 말았다.

그가 재빨리 그녀를 붙잡아 주지만 않았다면 그녀는 그대로 넘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절대로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얼굴이었다.

온하준.

“강지연!”

강지연은 한눈에 온하준이 화가 나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어떻게든 그 분노를 꾹 눌러 삼키려 애쓰는 것 같았다.

“지연아, 너 왜 집에 안 들어가?”

온하준은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평소처럼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언제나 그랬듯 부드럽고, 또 다정하게.

강지연이 속으로 되묻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다.

‘왜 안 돌아가는지 정말 모르는 걸까?’

하지만 지금은 온하준과 일일이 따지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방금 부딪히는 바람에 그녀의 가방이 바닥으로 떨어져 버렸고, 가방이 열리면서 시험용 펜이 살짝 튀어나와 있었다.

그녀는 그가 자신이 시험을 보러 왔다는 사실만큼은 절대로 알아채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

그녀는 온하준의 손을 힘껏 뿌리치고 재빨리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펜을 잽싸게 집어 가방 안에 밀어 넣고 가방을 꽉 여몄다.

“뭐야, 방금 그거?”

그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가방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펜이야.”

그녀는 최대한 태연한 척 대답했지만, 가방을 잡은 손가락 마디는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

“나한테 줘.”

온하준이 말했다.

안 된다.

그에게 그 펜을 보여 줄 수는 없었다.

강지연은 더 세게 가방을 끌어안았다.

“펜 가지고 뭐 하게?”

“휴대폰 줘.”

이번에는 그렇게 말했다.

잠시 실랑이가 이어졌고, 결국 그녀는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휴대폰은 꺼져 있었다.

그는 한 번 힐끗 보기만 하고는 그대로 다시 그녀에게 돌려주었다.

“전화도 그렇게 많이 하고, 메시지도 그렇게 많이 보냈는데, 왜 한 번을 안 받는 거야? 아직도 화났어?”

그녀는 휴대폰을 꼭 쥔 채 속으로 생각했다.

‘다행이다.’

혹시라도 메일함까지 뒤져서 시험 안내 메일이라도 보면 어쩌나, 그게 제일 걱정이었다.

‘만약 문제가 이것뿐이라면...’

강지연은 잠시 생각했다.

더 이상 이런 걸로 화를 내고 싶지 않았다. 그냥 멀리 도망치고 싶었다. 이곳에서, 그리고 이 사람에게서 가능한 한 멀리.

그 생각은 이렇게 다시 온하준을 눈앞에서 마주한 지금 이 순간 더욱 선명하고 강렬해지고 있었다.

강지연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는 여전히 그녀가 삐쳐 있다고 생각한 듯 한숨을 쉬었다.

“지연아, 너 원래 착하고 눈치도 잘 봤잖아. 그런데 이번에는 겨우 이런 일 가지고 집에도 안 들어가 버리면 어떡해?”

강지연은 맹세했다.

정말로 이제는 그런 일들로 더 이상 화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방금 그 한마디는 아마 부처라도 참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어제 일도 결국 내 잘못이라는 거야? 내가 철이 없는 거고? 내가 거기 들어가서 김도윤한테 박수라도 치면서 ‘와, 나 연기 잘한다, 나랑 똑같다’라고 해 줘야 했어?”

참고 참고 참아 오던 말이 마침내 터져 나왔다.

온하준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난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야. 내 말은, 남들이 뭐라고 떠드는지는 너도 어쩔 수 없는 거니까, 굳이 그런 말들...”

“나는 못 막았겠지만, 너는 막을 수 있었잖아.”

강지연은 똑바로 그를 바라봤다.

“근데 그때 너는 뭐 하고 있었는데? 이하나랑 껴안고 웃느라 정신이 없었지.”

“강지연!”

그의 얼굴에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분노가 떠올랐다.

그제야 그녀는 알았다.

‘이하나’라는 이름은, 그에게 있어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되는 금기가 되어 버렸다는 사실을...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강지연은 가방을 끌어안고 그를 지나쳐 걸어 나갔다. 그러나 그는 팔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으며 멈춰 세웠다.

“미안해, 지연아. 내 잘못이야. 아까 내가 너무 목소리를 높였어.”

그는 한 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냥 네가 하나를 오해하지 않았으면 해서 그래. 우리 진짜 그냥 친구야. 다른 애들이랑 똑같이 나한테는 그저 ‘형제 같은 친구’고.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너까지 그렇게 말하면 걔가 얼마나 곤란하겠어.”

강지연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 눈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어깨에 기대 깔깔거리던 이하나는 충분히 오해받을 행동을 해 놓고도 지적당하는 것이 그렇게 억울한가.

하지만 그녀는 입안에서 그 말을 굴리다가 결국 조용히 한마디만 흘렸다.

“그래.”

“지연아...”

온하준은 그녀의 차가운 반응을 느끼고 더 다가왔다.

“너 아직도 화난 거야? 혼자 호텔에 가서 자고, 집에도 안 들어오고. 나는 너한테 아무 말도 안 했잖아. 그런데 너는 언제까지 이렇게 화내고 있을 거야?”

그래, 결국 모든 잘못은 그녀의 탓이었다.

언제나 결론은 거기에 있었다.

“지연아, 그만 화 풀어. 우리 먼저 점심부터 먹자. 그다음에 내가 너랑 쇼핑도 같이 가 줄게, 응?”

강지연은 잠시 생각했다.

‘그래, 오히려 잘됐네.’

마침 온하준에게 할 말이 있었던 참이었다.

온하준은 그녀를 데리고 근처의 식당으로 들어갔다.

식당 안으로 들어서자, 서빙하는 직원의 시선이 본능적으로 둘을 훑고 지나갔다.

습관처럼 강지연의 몸이 먼저 움찔했다.

고개를 숙이고 옷깃을 세워 가리려다가 온하준의 뒤로 살짝 숨어 걸음을 아주 천천히 옮겨 자신의 절뚝거림이 덜 티 나게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그녀는 스스로를 말렸다.

어울리지 못하면 어쩔 것인가. 어차피, 이제는 그와 맞추어 살 생각도 없었다.

강지연은 자리에 앉았다.

온하준은 능숙하게 메뉴판을 보고 음식을 주문했다.

음식이 하나둘 차려지고 나서, 그는 젓가락을 그녀 쪽으로 밀어주며 언제나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연아, 먹어. 다 네가 좋아하는 것들로 시켰어.”

강지연은 상 위에 오른 요리들을 훑어보았다. 모두 다 매운 음식뿐이었다.

그녀는 속으로 살짝 쓴웃음을 지었다.

온하준은 여전히 몰랐다. 자신이 매운 것을 잘 먹지 못한다는 것.

집에서 매일 저녁 식탁에 매운 반찬이 빠지지 않았던 건 온전히 그가 매운맛을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나 배 안 고파.”

그녀는 젓가락을 들지 않은 채 말했다.

“그리고 나 할 말 있어.”

“뭔데?”

그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

“어디 가고 싶은 데 있어? 오늘 나 하루 종일 시간 비워 뒀어. 오후에는 같이 놀러 가고, 저녁에는 우리 부모님 댁에 같이 가서 밥 먹자.”

강지연은 거의 보이지도 않을 만큼 희미하게 올라간 그의 웃음을 바라보았다.

곧 그녀의 입에서 나올 말을 떠올리는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짙고 거센 쓰라림이 치밀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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