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백우가 명부를 든 채 이겸의 처소로 들어선 건, 해가 채 다 뜨기도 전이었다.
"확인했습니다, 주군."
백우가 명부를 내려놓았다.
"그날 밤 교대 명단에 '차복'이라는 이름이 하나 끼어 있었습니다. 영안궁 어디에도 그런 자는 없습니다."
"어떻게 끼어들었나."
"본래 교대였던 자는 위에서 하루 쉬라는 전갈을 받고 빠졌습니다. 그 빈자리에 차복이라는 이름이 들어갔고요."
이겸이 명부를 내려다봤다.
"누구 명으로 쉬게 했지."
"그건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차복이라는 자는 영안궁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겸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설픈 수는 아니었다. 안에서 손을 쓴 자가, 적어도 명부의 흐름 정도는 알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포로는."
"아직 입을 열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어젯밤 눈을 뜬 뒤로는 얌전합니다."
"이 일 이후로 별채에 드나드는 자와, 포로에게 오가는 물과 끼니는 전부 따로 명부에 적어두어라."
이겸이 덧붙였다.
"예."
"심문을 준비하라. 그 전에 명부를 고친 자부터 부르고."
명부를 맡은 자는 곧 들어왔다. 겁먹은 기색은 있었으나 감추는 것은 없어 보였다.
"차복이라는 자를 자네가 올렸나."
"예."
"어디서 왔나."
"제가 뽑은 자가 아닙니다."
그가 명부를 내려다봤다.
"원래 명부는 사흘 전에 짰습니다. 그때는 다른 자가 올라가 있었고요. 그날 낮에 교대가 바뀌었다는 전갈이 와서, 빠진 자리에 차복이라는 이름을 적었습니다."
"누가 전했나."
"사람을 거쳐 온 것이라 얼굴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 전갈이 한둘이 아니라서요."
이겸은 그 말을 오래 붙들지 않았다. 교대가 바뀌는 일은 흔했고, 바뀐 대로 적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물러가라."
명부를 맡은 자가 나가자, 그날 밤 차복에게 자리를 넘긴 근무자가 들어왔다.
"차복이라는 이름을 전에 들어본 적이 있나."
"없습니다."
"얼굴은."
"처음 보는 자였습니다."
"교대할 때 무엇을 확인했지."
"명부와 호위패를 봤습니다."
그가 답했다.
"제 다음 자리에 차복이라 적혀 있었고, 호위패의 이름도 같았습니다. 시각과 복장에도 이상이 없었습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나."
"다른 데서 사람을 당겨 오는 일도 있습니다. 명부와 호위패까지 맞으니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근무 위치는."
사내가 잠시 말을 멈췄다.
"제가 말하기 전에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자리도 일러주지 않았는데, 그쪽으로 그냥 걸어갔습니다."
이겸의 손끝이 명부 위에서 멈췄다.
"그때는 이상하다 여기지 않았나."
"여기지 않았습니다. 미리 듣고 왔으려니 했습니다."
그자가 물러간 뒤, 다음 시각의 근무자는 오래 붙잡지 않았다.
"차복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나."
"없습니다."
"명부에서 본 적은."
"그날이 처음이었습니다."
그가 자리에 왔을 무렵에는 이미 소란이 지난 뒤였다.
셋을 다 물린 뒤에도 이겸은 명부를 접지 않았다.
정상 교대자를 하루 쉬게 만들고, 그 빈자리에 이름을 하나 올리고, 호위패와 복장과 시각과 설 자리까지 맞춰 보냈다.
바깥에서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서리가 그 자리에 나타난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저도 심문에 참여하겠습니다."
이겸은 잠시 서리를 바라보았다.
"부인의 사람을 조사할 때 함께하겠다는 약조였습니다. 저 포로는 부인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자가 노린 것이 저라면,"
서리가 곧바로 받았다.
"이건 제 일입니다."
"함부로 끼어들지 마십시오."
"끼어들지 않겠습니다. 다만 지켜보겠습니다."
이겸은 잠시 서리를 바라보다가, 말없이 몸을 돌려 별채 쪽으로 앞장섰다.
포로는 별채의 좁은 방에 결박된 채 앉아 있었다. 나이는 서른 안팎, 눈빛이 가벼웠다. 겁에 질린 얼굴이라기보다는, 상황을 재는 얼굴이었다.
"이름은."
이겸이 물었다.
"이름 대봐야 좋을 거 없지 않습니까."
사내가 씩 웃었다.
"그보다— 말해드릴 순 있는데, 저 살려는 주십니까?"
"붙잡힌 순간에는 스스로 죽으려 들더니,"
이겸이 사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제는 목숨값을 흥정하는군."
사내는 잠시 머쓱한 얼굴을 하다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땐 붙잡히면 끝인 줄 알았습니다. 고문당하다 죽느니 그편이 낫겠다 싶었죠. 근데 밤을 넘기도록 그런 것도 없더군요. 그래서 생각을 고쳐먹었습니다. 아직 팔 것이 남았다고요."
이겸은 대답 대신, 압수해둔 사내의 물건들을 바닥에 하나씩 늘어놓았다. 밧줄 한 뭉치, 재갈로 썼을 법한 헝겊, 짧은 단검 하나.
"흥정은 나중에."
이겸이 물건들을 눈으로 훑으며 말했다.
"죽이는 것만이 목적이었다면, 이런 밧줄과 재갈까지 챙길 이유는 없지. 처음부터 죽이는 게 전부는 아니었다는 뜻이겠고."
사내의 눈빛이 흔들렸다.
"데려가라는 명을 받았나."
사내는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 다만 숨이 아주 잠깐 멎었다가, 다시 이어졌다.
"……그렇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가마터를 실제로 나누어 쓰는 자가 따로 있다는 것은 그 뒤에 확인되었다.밤장이 서는 날마다 어느 패가 어느 자리를 쓰고 언제 들어오는지를 정해두는 사람이 있었다. 다만 그자는 자리와 시각만 배분할 뿐, 각자가 무슨 물건을 다루는지는 묻지 않는다 했다. 묻지 않는 것이 그 자리의 규칙이었다.그자가 누구인지, 지금 어디 있는지까지는 알아내지 못했다."그럼 그 문사는,"서리가 정리했다."관리자인 척한 것이 아니라, 그리 보이게 두고 사람을 부린 것이군요.""예. 그리고 그 사람은 이미 죽었고요."백우가 답했다.포로는 그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다만 종이를 다시 한번 내려다보았다.—죽은 문사의 집은 도성 서쪽 골목 안쪽에 있었다.아내와 어린 아들 하나가 남아 있었다. 살림은 넉넉하지 않았고, 방 안에는 아직 남편이 쓰던 것들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벼루와 붓 몇 자루, 종이를 묶어둔 끈.여인은 처음에 말을 아꼈다. 관에서 나온 사람인가 싶어 겁을 먹은 눈치였다."해를 끼치러 온 것이 아닙니다."서리가 먼저 말했다."그이가 어떤 일을 하고 다녔는지만 여쭙겠습니다.""관아에서 문서 베끼는 일을 했습니다."여인이 답했다."품삯이 많지도 않았고요.""밤늦게 나가는 일이 있었습니까."여인의 손이 무릎 위에서 조금 움직였다."……있었습니다. 자주는 아니었습니다."여인이 말을 이었다."그런데 한번 나가면 늦었어요. 새벽에 들어온 적도 있고요.""어떻게 나갔습니까. 누가 부르러 옵니까.""어떤 아이가 문 앞에서 부르고 갑니다. 들어오지도 않고요."여인이 문 쪽을 가리켰다."그러면 그이가 옷을 갈아입고 나갔습니다.""무엇을 들고 나갔는지 기억하십니까.""붓갑이랑 종이요. 늘 쓰던 걸 챙겨 갔습니다."여인이 방 한쪽을 보았다."그것만은 꼭 챙겼습니다.""언제쯤이었는지 기억나십니까."여인이 잠시 눈을 감았다."날짜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여인이 기억을 더듬은 것은 날짜가 아니라 날들이었다."한번은 시아
임아연이라는 이름이 며칠째 떠나지 않았다.서리는 그 이름을 종이에 적었다가 지웠고, 다시 적었다가 또 지웠다. 옆에 적을 것이 없었다. 태자가 오래 알던 사람이고, 반년 전에 사라졌고, 시신은 나오지 않았다. 그것이 전부였다.전생에 폐출 문서에 적혀 있던 몇 줄과 겹쳐 보인다는 것은,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종류의 근거였다."지금 더 캘 것이 없습니다."이겸이 말했다."압니다."서리는 붓을 내려놓았다."미뤄둔 쪽부터 마저 하지요. 객주가 댄 이름들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객주는 넷을 댔었다.삯을 받으러 오던 자들의 이름과 생김새, 언제쯤 왔는지까지. 정보상들과는 다른 축이었다. 정보를 팔아 삯을 받는 자들이 아니라, 무언가를 옮기고 그 대가로 삯을 받는 자들이었다.임가 일에 매달린 사이 그 넷을 찾는 일이 미뤄졌다. 다시 사람을 풀었을 때, 돌아온 답은 넷 다 같았다."둘은 죽었습니다."백우가 고했다."하나는 물에서 나왔고, 하나는 밤길에 변을 당했다 합니다. 나머지 둘은 행방을 알 수 없습니다.""언제 일이냐.""저희가 객주를 데려온 뒤입니다. 열흘 안팎 사이에 몰려 있습니다."이겸의 표정이 굳었다."집은.""집은 그대로입니다."백우가 잠시 멈췄다."식솔들도 그대로 있고요. 세간도, 이웃들 기억도 다 남아 있습니다."서리는 그 말을 곱씹었다.임가 때와 달랐다. 그때는 집이 통째로 비워졌고, 살던 흔적까지 걷혔다. 이번에는 사람만 없어졌다."급했군요."서리가 말했다."지울 시간이 없었던 겁니다.""우리가 객주를 잡은 것을 알았다는 뜻이겠지요."—죽거나 사라진 네 사람의 이름과 생김새를 적은 종이를 별채로 들여보낸 것은 그다음 날이었다.포로는 요즘 결박 없이 지냈다. 별채 밖으로는 못 나가되 안에서는 자유로웠고, 백우가 오가는 것도 익숙해진 참이었다."이 중에 아는 얼굴이 있는지 보아라."포로가 종이를 받아 들었다. 글을 다 읽지는 못해 백우가 옆에서 한 줄씩 읽어주었다. 이름, 나이, 체구, 눈에
등잔이 두 번 잦아들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창밖은 이미 오래전부터 검었다.어깨가 저려왔다. 목덜미가 뻣뻣해져서 고개를 돌릴 때마다 뻐근한 것이 걸렸다. 서리는 자세를 조금 바꿨다가, 다시 원래대로 앉았다.무릎 위에 모은 손이 차가웠다.*급한 일이 생긴 것이다.*서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태자에게 급한 일이 없을 리 없었다. 하루 종일 사람들이 오갔고, 문밖에서 그런 기척이 있었으니 무언가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그러니 기다리면 되었다.—복도에서 발소리가 났다.서리가 고개를 들었다.발소리는 문 앞을 지나쳐 갔다.—두 번째 발소리가 났을 때도 고개를 들었다. 그것도 지나갔다.세 번째부터는 고개를 드는 대신 귀만 기울였다.발소리에도 결이 있다는 것을, 서리는 그 밤에 처음 알았다. 물건을 나르는 걸음은 무겁고 고르게 났고, 심부름하는 걸음은 잘고 급했다. 어느 쪽도 문 앞에서 멈추지 않았다.—한 번은 자리에서 일어나 침상 가까이 가보았다.이불이 반듯하게 깔려 있었다. 손을 대면 자국이 남을 것 같아서, 서리는 그 앞에 잠시 섰다가 도로 돌아와 앉았다.머리에 얹은 것이 자꾸 목을 눌렀다.한 번은 손을 들어 풀어볼까 했다. 그러나 손이 반쯤 올라가다 멈췄다. 지금 풀었다가 그사이에 문이 열리면, 기다리다 지쳐 흐트러진 꼴을 보이게 될 것이었다.서리는 손을 내렸다.—물그릇 위에 얇게 살얼음 같은 것이 앉았다. 방이 식은 탓이었다.등잔의 심지가 다 타서 불이 저 혼자 꺼졌다.서리는 어둠 속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어둠에 익숙해지자 방 안의 것들이 도로 눈에 들어왔다. 손대지 않은 상, 반듯한 이불, 문. 그것들이 밤새 하나도 자리를 바꾸지 않았다.이제는 발소리가 나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창이 회색으로 밝아오기 시작했다.밖에서 사람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물 긷는 소리, 마당 쓰는 소리. 궁의 아침이 시작되고 있었다.서리는 그 소리를 들으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밤새 굳은 등이 펴지지 않아 몇 번
향이 무거웠다.하루 종일 같은 냄새를 맡고 있었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그것이 향인지 제 옷에서 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서리는 마주 선 사람을 향해 절을 올렸다. 이헌도 같은 자리에서 몸을 낮췄다. 시종들이 물그릇을 받쳐 들었고, 두 사람은 차례로 손을 씻었다. 물이 미지근했다.방 안에는 사람이 많았다. 소리는 거의 나지 않는데 시선만 가득했다. 서리는 손끝 하나 잘못 놓을까 싶어, 전날 밤까지 몇 번이고 외웠던 순서를 속으로 되뇌었다.잔이 세 번 오갔다. 처음 것은 각자, 다음 것은 자리를 바꾸어, 마지막 것은 같은 잔으로. 음식은 맛을 느낄 새도 없이 형식처럼 지나갔다. 무엇을 씹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절차를 외운 대로 따라가는 동안, 서리는 몇 번쯤 이헌 쪽을 곁눈질했다.그는 담담했다. 지루해하지도, 서두르지도 않았다. 잔을 받을 때 손끝이 스쳤고, 그때 한 번 눈이 마주쳤다. 이헌이 아주 옅게 웃었던 것도 같았다.담당 상궁이 앞으로 나와 의식이 끝났음을 고했다.시종들이 소리 없이 물러가기 시작했다.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하나씩 멀어졌고, 마지막으로 문이 닫혔다.—둘만 남았다.이헌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잔을 내려놓고, 소매를 한 번 정돈하고, 서리 쪽으로 몸을 조금 돌렸다."하루가 길었지요.""예.""목이 아프겠습니다. 그 장식이 무거워 보이던데."서리는 무어라 답해야 할지 몰라 잠시 손끝만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목덜미가 뻐근했다.이헌이 웃었다. 이번에는 분명히 웃는 것이 보였다."저도 아침부터 한자리에 서 있었더니, 다리에 감각이 없습니다."서리는 그 말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올 뻔했다. 그러고 나니 온몸에 들어가 있던 힘이 조금 풀렸다.그 웃음이 오래 마음에 남을 것 같다고, 서리는 생각했다. 오늘 처음으로 든 생각이었다.그가 무언가 더 말하려고 입을 열었다.그때였다.—문밖에서 아주 낮은 소리가 났다.말이 아니었다. 손끝으로 문틀을 두드리는 소리에 가까웠다. 짧게,
"찾으시는 중이셨군요."서리가 말했다."예.""저희도 찾고 있습니다."이겸이 말했다."임가의 딸이 어디로 갔는지는 저희 쪽 일과도 닿아 있습니다."이헌이 고개를 들었다."무엇과 닿아 있습니까.""아직 말씀드릴 만큼 정리되지 않았습니다."짧은 침묵이 지나갔다. 이헌은 더 캐묻지 않았다. 캐물을 처지가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도 아는 얼굴이었다."알게 되는 것이 있으면,"이헌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알려주십시오."부탁하는 말투였다. 태자가 영안공에게 쓸 말투는 아니었다.—행렬이 대문을 나선 뒤, 감씨가 서리 곁으로 왔다.해가 길어진 계절이었다. 마당의 꽃은 거의 다 지고 잎만 무성했는데, 낮볕이 물러간 자리로 아직은 서늘한 바람이 돌았다."더 들은 말이 있느냐."서리가 물었다."오시면 마당에서 아가씨와 이야기하다 가셨답니다."감씨가 낮게 답했다."도련님한테 엿을 사다 주신 적도 있다고요.""그 아이는 지금 어떠하냐.""놀란 기색은 있었습니다만, 크게 흔들리지는 않았습니다. 저녁도 다 비웠고요."감씨가 덧붙였다."다만 그분이 가시고 나서도, 한참을 마당 쪽만 보고 있었습니다."서리는 고개를 끄덕였다."마지막으로 본 것은.""작년 겨울쯤이라 했습니다. 그 뒤로는 뵌 적이 없다고요."감씨가 잠시 뜸을 들였다."그런데 마님, 그때는 저런 옷을 입고 오시지 않았답니다.""어떤 옷이었다더냐.""여느 집 자제들 입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답니다. 수행도 없이 혼자 오셨고요."감씨가 목소리를 조금 더 낮췄다."도련님은 그분이 뉘신지 오늘에야 아셨습니다."서리는 그 말을 오래 곱씹었다.궁 밖에서 신분을 감추는 일이야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그 집을 한 번만 찾은 것이 아니었다. 아이가 얼굴을 기억하고, 그에게서 엿을 받은 일까지 떠올릴 만큼 여러 차례 드나들었는데도 아무도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그리고 오늘, 그 집 딸의 이름을 태자가 먼저 꺼냈다. 성이 아니라 이름이었다. 묻지도 않았는데 스스로.얼굴만
추병헌의 집안이 무너졌다는 말은 사흘 만에 궁 안까지 들어왔다.벼슬 낮은 집안 하나를 통째로 죽였고, 이유는 돈이었다는 것이었다. 죽은 집안의 이름까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태자궁에 든 보고에는 그 이름이 적혀 있었다.이헌은 그 종이를 받아 들고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임가라 했느냐.""예. 벼슬은 낮고, 이름 있는 집안은 아니라 합니다.""시신은 몇이었나.""다섯이라 들었습니다."이헌이 종이에서 눈을 들었다."그중에 젊은 여자가 있었나."내관이 잠시 답을 고르는 낯을 했다. 죄인의 처분에 관한 보고를 올렸는데 돌아온 물음이 시신의 성별과 나이였다."거기까지는 아뢸 것이 없습니다.""살아남은 자는.""그것도……""임가의 딸 이름이 명단에 있는지 알아보아라."이헌이 말을 끊었다."오늘 안으로."—답은 돌아오지 않았다.관아에서 넘어온 문서에는 죄인의 이름과 죄목만 있었다. 죽은 자들의 이름을 적어둔 쪽은 관아가 아니라 영안궁이 쥐고 있다 했다.이헌은 그 말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준비하라."—영안궁에 전갈이 닿은 것은 이헌이 궁문을 나선 뒤였다.서리와 이겸이 마당으로 나섰을 때, 태자의 행렬은 이미 대문 앞에 서 있었다. 절차를 갖춘 방문이 아니었다."갑작스러운 걸음을 용서하십시오."이헌이 말했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와 앉기까지, 예를 갖추는 것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자리에 앉자마자 이헌이 물었다."임가의 시신을 영안궁에서 거두셨다 들었습니다.""그렇습니다."이겸이 답했다."발견된 시신 가운데, 그 집의 딸도 있었습니까."서리는 그 물음을 잠시 되짚었다. 죄인이 누구인지도, 어떻게 잡혔는지도 묻지 않았다. 그가 알고 싶은 것은 처음부터 임가 딸의 생사뿐인 듯했다."전하께서는 임가의 딸을 알고 계십니까.""임아연입니다."방 안의 공기가 한 박자 멎었다.도성 사람 대부분이 그 집의 성조차 모르고 지나간 일이었다. 그 이름을 태자가 정확히 알고 있었다.—"성인 여자의 시신은 둘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