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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고른 낭군
다시 고른 낭군
Author: 진유의서랍

제 1화 두 번째 연택례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09 15:27:22

문서에는 이미 왕실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후사를 두지 못한 죄. 왕실의 신망을 잃은 죄. 그리고 서리가 끝내 알지 못한 한 여인의 죽음과 얽힌 의혹이, 다른 죄목들 사이에 아무렇지 않게 섞여 있었다. 마치 원래 거기 있었던 것처럼.

서리는 그 줄 위에 눈길을 잠깐 두었다가, 옮겼다. 지금 와서 캐물어봐야 달라질 것은 없었다.

붓을 들었다.

서, 리.

이름 두 글자를 적는 데 걸린 시간은 짧았지만, 붓끝이 종이에 닿는 순간까지도 손이 떨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낯설었다.

"이것으로 끝이오."

왕의 명을 받든 내관이 문서를 말아 거두었다. 그 손짓 하나로, 서리는 더는 왕후가 아니었다.

왕후의 인장도, 궁에 머물 자격도 함께 거두어졌다. 내관은 이미 다음 할 일을 생각하는 얼굴로 몸을 돌렸다. 서리에게 남은 것은 폐후라는 두 글자와, 오늘 안으로 궁을 나서라는 명뿐이었다.

정전 밖으로 나오자 늦가을 바람이 뺨을 스쳤다. 서리는 걸음을 멈추고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십 년이었다. 이 계단을 처음 올랐을 때는 붉은 비단신이었는데, 지금은 무명옷 자락이 발끝에 닿고 있었다.

왕후의 자리도, 이헌의 마음도, 되찾고 싶었던 서가의 이름도, 결국 손에 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계단 아래에는 가마 하나가 놓여 있었다. 왕후가 타던 것이 아니라, 장식을 모두 걷어낸 소박한 것이었다. 폐출된 여인을 조용히 실어 보내기에 딱 맞는 격이었다. 가마 곁에 선 자들 중 누구도 서리 쪽을 보지 않았다.

서리는 가마에 오르며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본다고 해서 무언가 달라질 리 없었다.

행선지는 도성 밖, 서가의 옛 별저였다. 부친과 오라비들이 죽은 뒤 오래 주인을 잃었던 집이었다. 지붕이 내려앉지 않도록, 대문이 썩지 않도록, 하인 몇이 최소한으로만 손을 대며 지켜온 곳.

왕실은 체면치레로 시종과 호위 몇을 함께 붙여주었다. 서리는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서리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리를 지켜보기 위해 붙은 사람들이라는 것쯤은 짐작할 수 있었다.

성문을 나서고 얼마쯤 지났을 때, 서리는 창의 발을 살짝 들쳤다.

해가 기운 자리가 어긋나 있었다. 별저로 가는 길이라면 진작 갈라졌어야 할 갈림목을, 행렬은 그냥 지나쳐 있었다.

"이 길이 아니다."

앞쪽에서 짧은 대답이 돌아왔지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다시 물었을 때는 아무도 답하지 않았다.

가마를 스치는 나뭇가지 소리가 잦아졌다. 인적이 끊긴 산길이었다.

이윽고 가마가 내려졌다.

발이 땅에 닿는 순간, 서리는 자신을 둘러싼 얼굴들을 보았다. 눈을 마주치는 자가 하나도 없었다. 그것이 먼저였다. 그다음에, 손 하나가 어깨를 향해 뻗어 왔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서리는 그 손을 쳐내고 비탈 쪽으로 달렸다.

뒤에서 발소리가 쏟아졌다. 무명옷 자락이 마른 덤불에 걸려 찢겼다. 숨이 목 끝까지 차올랐고, 밟는 자리마다 흙이 무너져 내렸다.

그러다 디딘 곳에, 땅이 없었다.

몸이 붕 뜨는 감각. 세상이 옆으로 기울었다.

이렇게 끝나는구나.

손끝이 잡을 것을 찾아 허공을 긁었다.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다.

다시 한번 고를 수만 있다면.

이번에는, 이헌을 고르지 않으리라.

그것이 서리의 마지막 생각이었다.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천장이었다.

낯선 문양이었다. 용이 아니라 매화.

서리는 잠시 그 무늬를 올려다보았다. 서씨 가문 저택, 어릴 적 자신이 쓰던 침소의 서까래였다. 방 안에는 말린 국화 냄새와 오래된 나무 냄새가 옅게 섞여 있었다. 몸을 덮은 이불의 결이 뺨에 닿았다. 손끝으로 가만히 이불자락을 쥐어보았다. 감촉이 지나치게 선명했다.

몸을 일으키려는데, 방문이 열렸다.

"아기씨, 벌써 일어나셨어요?"

익숙한 목소리였다.

서리는 그대로 굳었다.

빗과 세숫물을 든 감씨가 문턱을 넘어 들어오고 있었다. 걸음걸이도, 옷차림도, 이마의 잔주름도 서리가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오 년 전 장례를 치렀던 사람이 아무 일도 없었던 얼굴로.

"아기씨?"

감씨가 걸음을 멈추고 서리를 살폈다. 서리가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자,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서리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 손목을 붙잡았다.

따뜻했다.

장례 날 마지막으로 잡았던, 얼음장 같던 손이 아니었다.

"……따뜻해."

"예? 무슨 말씀이세요, 아기씨."

감씨가 당황한 얼굴로 다른 손을 서리의 이마에 얹었다.

서리는 그 손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손목을 쥔 손에 힘이 조금 더 들어갔다. 이 온기가 손을 놓는 순간 사라져버릴까 봐.

"안색이 왜 이러세요. 악몽이라도 꾸셨어요?"

한참 만에야 서리는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악몽을 꿨어."

그 악몽이 십 년이나 이어졌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감씨는 여전히 미심쩍은 얼굴이었다. 물이라도 새로 떠 오겠다며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서리는 손을 놓지 않았다.

"정말 괜찮으세요?"

서리가 다시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감씨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도로 자리에 앉아 빗을 들었다. 익숙한 손길이 머리카락 사이를 오갔다. 그 감촉조차 낯설도록 생생했다.

이것이 죽기 직전 꾸는 마지막 꿈인지, 혼이 떠돌며 지난 삶을 다시 보고 있는 것인지, 서리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살아 있는 감씨와, 어릴 적 이 방과, 지나치게 선명한 온기와 감촉만이 분명했다.

"오늘이……"

"연택례 날이잖아요. 잊으셨어요?"

감씨가 웃으며 손을 놀렸다.

"궁에서 사람이 벌써 다녀갔어요. 오시까지 별궁으로 오라고요."

서리는 거울 속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겪지 않은 스무 살의 얼굴 안에, 십 년의 기억이 고스란히 들어차 있었다.

이것이 마지막 꿈이든, 정말 돌아온 삶이든, 상관없었다.

이번만큼은, 이헌을 고르지 않으리라.

감씨가 옷장에서 꺼낸 겉옷에는 왕실의 용이 아니라 서가의 매화가 수놓여 있었다.

"서가에 남은 분은 이제 아기씨뿐이에요."

옷깃을 여며주며 감씨가 나직이 말했다.

"오늘만큼은 누구 앞에서도 고개 숙이지 마세요."

연택례. 공신가의 여성 후계자가 혼인 뒤에도 자기 가문의 이름과 재산, 제사를 이어갈 권리를 보장받으며 낭군을 직접 고르는 오래된 의식. 다만 낭군의 신분에 따라 혼례의 방식도, 부부가 지낼 곳도 달라졌다.

전생의 서리는 이헌을 고르는 것이 사랑과 가문을 함께 지키는 길이라 믿었다. 태자의 곁에 서면 서가의 이름을 다시 높이 세우고, 부친과 오라비들의 죽음도 언젠가는 밝힐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 믿음이 얼마나 헛되었는지, 지금의 서리는 알고 있었다.

별궁으로 향하는 길목마다 사람이 나와 있었다. 연택례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언제였는지 서로 헤아려보는 노인들이 있었고, 서가의 아가씨가 어느 이름을 부를지 이미 정해놓고 이야기하는 이들도 있었다. 다른 이름이 나올 거라 여기는 사람은, 그 길 어디에도 없어 보였다.

별궁의 문을 넘어서자 그 소리가 뚝 끊겼다. 안쪽에는 향 냄새와, 발소리조차 조심스러운 정적만이 깔려 있었다.

별궁의 정전에 들어서는 순간, 서리는 곧장 이헌의 시선과 마주쳤다.

높은 단 위, 왕과 왕후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 아래 한 단, 태자석에는 이헌이 앉아 있었다. 느긋한 자세였다. 마치 오늘 이 자리가 이미 정해진 결과를 확인하는 절차에 불과하다는 듯이.

예관이 앞으로 나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오늘 서가의 후계자는 가문의 이름과 권리를 잇기 위해, 스스로 낭군을 정할 것입니다. 연택이 선포되고 폐하께서 이를 허하시면, 그 뜻은 되돌리지 못합니다."

서리는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등을 곧게 폈다. 시선을 들어 늘어선 명패들을 하나씩 훑었다.

태자 이헌의 이름이 가장 앞에 걸려 있었다. 그 이름을 명패에 올릴 수 있는 가문은 도성에 몇 되지 않았다. 그의 눈이 서리를 향했고, 그 안에는 의심이라고는 없었다. 오직 기다림뿐이었다. 서리가 다른 이름을 부를 가능성 같은 건, 애초에 떠올려본 적조차 없는 얼굴.

가슴 한구석이 잠깐 시큰거렸다. 저 얼굴을 보고 뛰던 기억 속 심장이, 몸 어딘가에 아직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이번에는 다를 수도 있지 않을까. 무엇이 어디서부터 어긋났는지 이미 알고 있으니, 더 일찍 알아차리고 더 단단하게 버틴다면.

서리는 그 생각을 끝까지 밀어보지 않았다. 이미 십 년을 그 가능성에 걸어본 뒤였다.

서리는 숨을 한 번 들이쉬었다.

입에 익은 이름 하나가 목까지 올라왔다가, 그대로 가라앉았다.

시선을 거두었다. 명패들을 따라 천천히 눈을 옮겼다. 하나, 둘, 셋. 그리고 맨 끝자리에서 멈췄다.

영안공 이겸.

연택례의 후보 명부에는 가문의 격에 맞춰, 왕실의 재가를 받은 적령기의 미혼 왕족과 공신가 자제들이 이름을 올렸다. 병상의 영안공도 예외는 아니었으나,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그가 실제로 선택되리라 생각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가 개선한 뒤 석 달째 눈을 뜨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 정전 안에서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서리의 손끝이 옷자락을 살짝 쥐었다.

안전한 선택은 아니었다. 전생에서 이겸은 끝내 깨어났다는 소식도 없이, 일 년 뒤 영안궁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이번에도 같은 일이 되풀이된다면, 서리는 돌아오지 않는 주인을 기다리는 영안궁에서 왕실의 시선을 홀로 감당해야 했다.

그래도 사랑받을 필요는 없었다.

미움받지만 않으면, 그걸로 충분했다.

"서가의 적통, 서 리는 앞으로 나오라."

예관의 목소리가 정전에 울렸다.

서, 리. 왕실의 호칭 아래 십 년 동안 가려져 있던 이름이었다. 서리는 그 소리를 듣고도 곧바로 일어나지 못했다. 짧은 순간, 손바닥에 옷자락을 쥐었던 손톱 자국이 남아 있는 게 느껴졌다.

숨을 한 번 내쉬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걸음을 옮기는 동안 정전 안의 소리가 점점 잦아드는 것 같았다. 대신들의 옷깃 스치는 소리, 낮은 헛기침, 그 모든 것이 멀어지고 있었다.

서리는 상석을 향해 시선을 들었다.

이헌이 앉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제 이름이 불릴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의 몸짓이었다.

"영안공을 낭군으로 청합니다."

정전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이헌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슬픔도 서운함도 아니었다. 놀람, 그리고 그 뒤를 바짝 따라오는 불쾌함이었다.

예관이 조심스레 말을 얹었다.

"영안공께서는 아직 혼백이 돌아오지 않으신 상태로, 앞날을 장담하기 어려운 처지십니다. 다시 한번 숙고하심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청하는 것입니다."

전생에 수없이 듣고 흘려보냈던 대신들의 화법이, 이제는 서리의 무기가 되어 혀끝에 올랐다.

"나라를 위해 피 흘린 이를 병들었다 하여 외면한다면, 누가 다시 고려를 위해 칼을 들겠습니까. 제가 서가의 이름을 걸고 그분을 지키겠습니다."

거짓은 아니었다. 다만 전부도 아니었다.

태자의 외가와 가까운 대신 몇이 굳은 얼굴로 서로 눈길을 주고받았다. 한 관료는 무릎 위에 포갠 손을 천천히 움켜쥐었다.

왕의 손가락이 팔걸이를 천천히 두드렸다. 시선이 서리와 이겸의 명패를 지나 이헌에게 머물렀다가, 옆으로— 왕후에게로 옮겨갔다.

왕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서리를 향한 눈빛에서, 조금 전까지 있던 온기가 조용히 사라져 있었다.

"영안공이 끝내 눈을 뜨지 못해도, 그 뜻을 거두지 않겠느냐."

"거두지 않겠습니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서가의 후계자가 가문의 이름을 걸었다. 그 선택을 받아들이겠다. 연택을 허한다."

첫 번째 인연을 끊는 데는, 십 년과 한 장의 폐출 문서가 필요했다.

이번에는, 한 이름을 고르지 않는 것으로 충분했다.

서리가 정전을 나선 뒤에도, 한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열린 문 너머로 매화 문양이 수놓인 옷자락이 회랑 끝에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짧은 정적이 흘렀다.

왕후가 담담히 입을 열었다.

"영안궁도 결국 왕실의 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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