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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화 눈을 감은 사람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09 16:16:00

서가 저택으로 돌아오자, 마당에 나와 있던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얼떨떨했다.

감씨는 마차에서 내리는 서리를 부축하면서도 좀처럼 말을 잇지 못했다. 늙은 집사와 몇 안 되는 하인들도 서로 눈치만 살필 뿐이었다. 연택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미 소문이 저택까지 앞질러 도착해 있는 모양이었다.

"아기씨."

감씨가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정말 영안공을 고르신 거예요? 그, 아직 눈도 못 뜨신다는……"

"응."

서리는 짧게 답하며 겉옷을 벗었다. 감씨의 눈에 걱정이 가득했다.

"어째서요. 태자 전하도 계셨는데."

"나라를 위해 싸운 분을 병들었다는 이유로 외면할 순 없잖아."

서리는 담담하게 말했다.

거짓은 아니었다.

다만 감씨가 알아야 할 이유의 전부도 아니었다.

감씨는 더 캐묻지 않았다. 다만 서리의 손을 오래 붙잡았다가 놓았다. 그 손길에서 걱정과, 동시에 알 수 없는 안도 같은 것이 함께 느껴졌다.

서리는 그날 밤 홀로 방에 앉아, 태자를 고르지 않았다는 사실이 주는 안도감과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불확실함을 동시에 곱씹었다. 둘 다 진짜였다.

혼인 문서는 사흘 뒤 도착했다.

왕실에서 보낸 관원이 두꺼운 문서 뭉치를 내려놓고 형식적인 설명을 늘어놓는 동안, 서리는 조용히 앉아 첫 장부터 넘겨보았다.

전생의 서리였다면 이런 문서는 훑어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헌을 믿었으니까. 혼인 조건이 무엇이든, 결국 사랑이 전부를 지켜줄 거라 믿었던 스무 살이었다.

지금은 아니었다.

"이 조항."

서리가 문서의 한 대목을 손끝으로 짚었다.

"서가의 토지 관리권이 혼인 후에도 제 명의로 유지된다고 되어 있는데, 실제 집행은 누가 합니까?"

관원이 잠시 당황한 얼굴을 하다가 답했다.

"혼인하신 뒤에는 아기씨께서 지정하시는 자가 집행하게 됩니다."

"그럼 여기, 가신들의 인사권도 마찬가지겠군요."

"그러합니다."

서리는 그 조항 옆에 작게 표시를 해두었다. 나중에 다시 확인할 것들이었다. 문서와 사람의 말이 항상 같지는 않다는 걸, 서리는 이미 십 년 치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관원이 돌아간 뒤, 늙은 집사가 조심스레 물었다.

"아기씨, 예전에는 이런 걸 이렇게까지 살피지 않으셨는데……"

"이제는 살펴."

서리가 문서를 덮으며 말했다.

"그게 다예요."

집사는 더 묻지 않았지만, 서리를 보는 눈빛이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문서를 확인한 뒤로도 한동안은 별다른 기별이 없었다. 왕실이 관여하는 혼사인 만큼, 며칠로 끝날 채비가 아니라는 것쯤은 서리도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예상보다 이르게 날짜가 잡혔다는 통보가 왔고, 저택 마당에 하나둘 들어서는 채비를 보며 서리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병상의 낭군을 맞는 혼례치고는, 지나치다 싶을 만큼 성대했다.

혼례는 서가의 정당에서 치러졌다.

이겸은 당연히 그 자리에 없었다. 대신 그의 검과 예복이 상 위에 가지런히 놓였다. 검집에 새겨진 문양이 아침 햇살에 옅게 빛났다. 왕실에서 보낸 사자가 왕의 승인문과 예물을 전했고, 서리는 조상의 위패 앞에서 부모와 오라비들에게 혼인을 고했다.

"아버지, 오라버니들."

서리는 낮게 중얼거렸다.

"제가 고른 사람이에요. 부디 지켜봐 주세요."

절을 올리는 동안 마당을 채운 사람들의 시선이 서리의 등을 스쳤다. 동정 어린 눈빛도, 궁금해하는 눈빛도 있었을 것이다. 서리는 그 시선들을 하나하나 세지 않았다. 자신이 고른 결과였다. 감당하는 것도 자신의 몫이었다.

의식이 끝난 뒤, 서리는 영안궁으로 향하는 가마에 올랐다.

영안궁은 크고 조용했다.

폐궁이라 부를 정도는 아니었지만, 주인이 병상에 누운 지 석 달째라는 사실이 공기 속에 그대로 스며 있었다. 회랑을 오가는 시비들의 발걸음은 조심스러웠고, 웃음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관리자로 보이는 늙은 시종이 서리를 맞았다.

"영안공부인."

그가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이곳이 바로, 영안공을 모시는 영안궁입니다."

인사는 격식에 맞았지만, 그 뒤에 서 있는 시비와 하인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조심스러움이 묻어 있었다. 새 안주인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아직 정하지 못한 얼굴들이었다.

서리는 그들을 하나씩 눈에 담았다. 누구는 오래 이곳에 있었던 듯 익숙한 몸짓이었고, 누구는 최근에 배치된 듯 아직 서툴렀다. 왕실에서 보낸 사람도 있을 것이고, 이겸을 오래 모신 사람도 있을 것이고, 어디서 온지 알 수 없는 사람도 섞여 있을 것이었다.

전생의 서리는 이런 것들을 눈여겨보지 않았었다. 그 대가를 뒤늦게 치렀다.

이번엔 아니었다.

"모두 수고가 많습니다."

서리는 짧게 인사를 건넸다. 의심하는 기색은 드러내지 않았다. 다만 눈은 조용히 사람들을 훑고 있었다.

침전으로 안내받았을 때, 서리는 처음으로 이겸을 가까이서 보았다.

방 한가운데 놓인 것은 바닥에서 그리 높지 않은 목제 침상이었다. 두꺼운 요와 이불을 덮은 채, 그 위에 눈을 감은 사내가 누워 있었다. 생각보다 큰 몸이었다. 창백한 안색에 다듬어지지 않은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있었고, 이불 밖으로 나온 손등에는 크고 작은 흉터가 여럿 남아 있었다.

서리는 그 손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흉터투성이 손. 아버지의 손이 저랬다. 오라비들의 손도 저랬다. 전쟁이 남기는 흔적은 어디서나 비슷한 모양이었다.

의관과 늙은 시종이 지켜보는 가운데, 서리는 이겸의 곁에 마련된 자리에서 마지막 예를 갖췄다. 낭군이 없는 혼례의 마지막 순서였다. 절을 올리는 서리의 손이 살짝 떨렸지만, 표정은 흔들리지 않았다.

절이 끝난 뒤, 서리는 잠시 그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사랑받을 필요는 없었다. 사랑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미움받지 않으면, 그걸로 충분했다.

다만 마음 한구석에 옅은 불편함이 스쳤다. 이 사람은 지금 이 순간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한 채, 서리의 손에 삶이 걸려 있었다. 이용했다는 말이 정확할지도 몰랐다.

서리는 그 불편함을 오래 들여다보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혼례 후 며칠은 조용히 흘렀다.

서리는 매일 아침 의관이 다녀가는 시간을 지켰다. 처방된 탕약의 종류와 양, 올리는 시각을 꼼꼼히 확인했다. 의관의 말과 기록이 일치하는지도 살폈다. 딱히 의심해서가 아니라, 그저 살피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린 탓이었다.

"어제와 처방이 조금 다른데요."

서리가 탕약 그릇을 살피며 물었다.

"약재를 바꾼 이유가 있습니까?"

의관은 잠시 놀란 얼굴을 하다가, 곧 침착하게 답했다.

"혼백이 미약하게나마 반응하시는 듯하여, 원기를 보하는 약재를 조금 더했습니다."

서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한 답은 아니었다. 다만 앞으로도 계속 살필 생각이었다.

탕약은 서리가 직접 올렸다. 그릇을 받쳐 들고 이겸의 입술 사이로 조심스레 흘려 넣는 일이었다. 몸을 씻기거나 옷을 갈아입히는 일은 여전히 시종들의 몫이었지만, 탕약만큼은 서리가 손수 챙겼다. 의관의 처방이 제대로 들어가고 있는지,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일을 할 때마다, 아주 미묘한 위화감이 스쳤다.

목 넘김이 지나치게 자연스러웠다. 의식 없는 사람의 것치고는.

인기척이 가까워질 때 숨소리가 아주 잠깐 달라지는 것도 같았다.

확신할 수는 없었다. 며칠 밤을 설친 자신의 착각일 수도 있었다.

서리는 그 생각을 굳이 붙잡지 않았다. 이겸이 깨어 있기를 바라는 것도, 두려워하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마음 한편이 이상하게 복잡했다.

작은 문제 하나가 생긴 것은 그 무렵이었다. 영안궁의 곳간 장부에 며칠 전부터 이상한 수량이 적혀 있었다. 서리는 담당 시종을 불러 조용히 확인했고, 단순한 착오였음이 밝혀졌다. 별일은 아니었지만, 그 일을 계기로 영안궁 사람들 사이에서 서리를 보는 눈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새 안주인이 그저 자리만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그들도 서서히 알아가고 있었다.

혼례로부터 열흘쯤 지난 밤이었다.

그날따라 침전을 지키던 시비들의 교대가 어긋나 있었다. 서리가 이상하다고 느낀 건 등불 하나가 평소보다 일찍 꺼져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사소한 일이었지만, 사소해서 더 마음에 걸렸다.

서리는 평소보다 늦게까지 침전에 남아 있었다. 탕약 그릇을 정리하는 척하며, 방 안의 낌새를 살폈다.

문밖에서 인기척이 사라진 지 얼마 되지 않아, 방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낯선 사내였다. 서리는 순간 몸이 굳었지만, 곧바로 탁자 곁에 세워둔 청동 촛대를 손에 쥐었다. 팔 길이만 한 것이었다. 검을 쥐듯 한쪽 끝을 잡아 상대와 거리를 벌렸다. 어릴 적 배운 자세가 먼저 몸을 움직였다. 손목, 목, 무릎— 급소를 가늠하며 상대의 다음 움직임을 살폈다.

"누구냐."

서리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사내는 대답 없이 다가왔다. 목적이 이겸인지 서리인지, 그 순간에는 알 수 없었다. 서리는 뒷걸음질 치며 침상과 자신 사이의 거리를 가늠했다. 소리를 지르는 것보단, 시간을 버는 쪽이 나을 것 같았다.

그때였다.

침상 위에서 미동도 없던 이겸의 손이, 사내의 발목을 붙잡았다.

사내가 놀라 몸을 틀기도 전에, 이겸은 이미 몸을 일으켜 그를 바닥으로 끌어내리고 있었다. 동작은 빨랐지만 매끄럽지만은 않았다. 몸을 일으키는 순간 옅은 신음이 새어 나왔고, 사내를 제압한 팔에도 힘이 온전히 실리지 않은 듯 보였다. 석 달을 누워 있던 몸이 갑자기 움직인 대가였다.

그래도 사내를 바닥에 짓누르는 손은 정확했다.

서리는 촛대를 쥔 채 그대로 굳어 있었다.

이겸이 고개를 들어 서리를 보았다.

숨을 몰아쉬는 얼굴에는 방금 의식을 되찾은 사람의 혼란이 없었다. 오히려 상황을 파악하려는, 지나치게 침착한 눈빛이었다.

"다친 데는."

짧은 물음이었다. 서리는 겨우 고개를 저었다.

이겸은 그제야 사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내는 이미 서리가 아는 방식대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움직임을 보였지만, 이번엔 이겸의 손이 그보다 빨랐다.

정적이 내려앉은 방 안에서, 서리는 촛대를 쥔 손을 천천히 내렸다.

석 달 만에 깨어난 사람치고, 이겸의 눈빛은 지나치게 또렷했다.

그 사실이, 위험이 지나갔다는 안도보다 먼저 서리의 마음에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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