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인기척이 가까워질 때 숨소리가 아주 잠깐 달라지는 것도 같았다. 확신할 수는 없었다. 며칠 밤을 설친 자신의 착각일 수도 있었다.
서리는 그 생각을 굳이 붙잡지 않았다. 이겸이 깨어 있기를 바라는 것도, 두려워하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마음 한편이 이상하게 복잡했다.
작은 문제 하나가 생긴 것은 그 무렵이었다.
영안궁의 곳간 장부에 며칠 전부터 이상한 수량이 적혀 있었다. 서리는 담당 시종을 불러 조용히 확인했고, 단순한 착오였음이 밝혀졌다.
별일은 아니었지만, 그 일을 계기로 영안궁 사람들 사이에서 서리를 보는 눈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새 안주인이 그저 자리만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그들도 서서히 알아가고 있었다.
—
혼례로부터 열흘쯤 지난 밤이었다.
그날따라 침전을 지키던 시비들의 교대가 어긋나 있었다.
서리가 이상하다고 느낀 건 등불 하나가 평소보다 일찍 꺼져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사소한 일이었지만, 사소해서 더 마음에 걸렸다.
서리는 평소보다 늦게까지 침전에 남아 있었다.
탕약 그릇을 정리하는 척하며, 방 안의 낌새를 살폈다.
문밖에서 인기척이 사라진 지 얼마 되지 않아, 방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낯선 사내였다.
서리는 순간 몸이 굳었지만, 곧바로 탁자 곁에 세워둔 청동 촛대를 손에 쥐었다. 팔 길이만 한 것이었다. 검을 쥐듯 한쪽 끝을 잡아 상대와 거리를 벌렸다. 어릴 적 배운 자세가 먼저 몸을 움직였다. 손목, 목, 무릎— 급소를 가늠하며 상대의 다음 움직임을 살폈다.
"누구냐."
서리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사내는 대답 없이 다가왔다. 목적이 이겸인지 서리인지, 그 순간에는 알 수 없었다. 서리는 뒷걸음질 치며 침상과 자신 사이의 거리를 가늠했다. 소리를 지르는 것보단, 시간을 버는 쪽이 나을 것 같았다.
그때였다.
침상 위에서 미동도 없던 이겸의 손이, 사내의 발목을 붙잡았다.
사내가 놀라 몸을 틀기도 전에, 이겸은 이미 몸을 일으켜 그를 바닥으로 끌어내리고 있었다.
동작은 빨랐지만 매끄럽지만은 않았다. 몸을 일으키는 순간 옅은 신음이 새어 나왔고, 사내를 제압한 팔에도 힘이 온전히 실리지 않은 듯 보였다. 석 달을 누워 있던 몸이 갑자기 움직인 대가였다.
그래도 사내를 바닥에 짓누르는 손은 정확했다.
서리는 촛대를 쥔 채 그대로 굳어 있었다.
이겸이 고개를 들어 서리를 보았다.
숨을 몰아쉬는 얼굴에는 방금 의식을 되찾은 사람의 혼란이 없었다.
오히려 상황을 파악하려는, 지나치게 침착한 눈빛이었다.
"다친 데는."
짧은 물음이었다. 서리는 겨우 고개를 저었다.
이겸은 그제야 사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내는 이미 서리가 아는 방식대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움직임을 보였지만, 이번엔 이겸의 손이 그보다 빨랐다.
정적이 내려앉은 방 안에서, 서리는 촛대를 쥔 손을 천천히 내렸다.
석 달 만에 깨어난 사람치고, 이겸의 눈빛은 지나치게 또렷했다.
그 사실이, 위험이 지나갔다는 안도보다 먼저 서리의 마음에 내려앉았다.
—
숨이 찼다.
이겸은 사내를 바닥에 짓누른 채로, 자신의 팔이 떨리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힘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석 달 동안 거의 움직이지 않았던 몸이,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뒤늦게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이었다. 어깨의 오래된 상처가 욱신거렸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가슴 안쪽이 뻐근했다.
계획에는 없던 일이었다. 이겸은 그 사실을 몸으로 먼저 실감했다.
"다친 데는."
짧게 물었다.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며칠— 아니, 석 달을 거의 쓰지 않은 목이었다.
서리가 고개를 저었다. 촛대를 쥔 손은 아직 풀리지 않은 채였다.
겁에 질려 주저앉지도, 비명을 지르지도 않은 손이었다.
이겸은 그 손을 잠깐 눈에 담았다.
'무가의 여식답군.'
그 이상의 생각을 더 이어가진 않았다. 지금은 다른 것들을 먼저 처리해야 했다.
바닥에 짓눌린 사내가 갑자기 몸을 뒤틀었다. 무언가를 삼키려는 움직임이었다. 이겸은 반사적으로 사내의 턱을 붙잡아 억지로 벌렸다. 손끝에 작고 단단한 것이 걸렸다. 간발의 차이였다.
"누구냐."
이겸이 낮게 말했다.
"그리고—"
말을 채 끝내기 전에, 방문이 열리며 사람들이 밀려들었다.
시비들의 비명, 다급한 발소리, 그리고 낯익은 목소리 하나.
"주군!"
백우였다.
이겸이 깨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가, 다른 이들 앞에서는 처음 보는 얼굴을 하고 달려 들어왔다.
이겸은 그 순간부터 다시 연기를 시작해야 했다.
"혼백이…… 정말 돌아오신 겁니까."
백우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연기였다. 다만 그 떨림 안에 아주 작은 진심도 섞여 있다는 걸, 이겸은 알고 있었다.
"모르겠다."
이겸은 몸을 반쯤 일으킨 채 대답했다.
정말로 방금 의식을 되찾은 사람처럼, 눈가를 찌푸리며 관자놀이를 짚었다.
"정신이…… 흐릿하다. 여기가 어디인지도."
혼란을 연기하되, 지나치게 어눌하게 굴지는 않았다.
정말로 깨어난 사람이라면 이 정도의 혼란은 자연스러울 것이었다. 그 이상은 필요 없었다.
주변이 소란스러워지는 동안, 이겸의 시선은 슬쩍 서리를 향했다.
서리는 촛대를 내려놓았지만, 여전히 이겸을 보고 있었다.
방금 사람들 앞에서 보인 '혼란'과, 사내를 제압할 때의 '정확함' 사이의 간극을 눈치챈 얼굴이었다.
이겸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다만 아무것도 읽히지 않도록, 시선을 조금 더 흐릿하게 만들었다.
"부인은 다치지 않으셨습니까."
이겸이 서리에게 물었다.
말을 뱉고서야 뒤늦게 이상함을 느꼈다.
방금 정신을 차린 사람이 낯선 호칭을 저리 쉽게 입에 담을 리 없었다.
서리도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부인이라 부르시는군요."
서리가 조용히 되물었다.
"정신이 흐릿하시다면서, 제가 누구인지는 또렷이 아시나 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 뒤로 열흘 사이에 붙잡힌 자가 여섯이었다.수레를 부린 자 셋, 삯을 내주던 자 하나, 그날 골목을 지켰던 자 둘. 진술이 서로 맞물렸고, 맞물린 자리마다 배씨의 이름이 나왔다. 배씨 위에는 추병헌의 이름이 있었다.추가에서 그 무렵 빠져나간 삯의 행방도 드러났다. 장부에 남지 않은 돈이었지만, 받은 자들이 살아 있었다."이만하면 덮을 수 없습니다."백우가 말했다.이겸이 고개를 끄덕였다."올려라."—궁의 답은 예상보다 빨랐다.추가로 사람이 들이닥친 것은 사흘 뒤 새벽이었다. 추병헌이 잡혀 나갔고, 집안 재산에 봉인이 붙었다. 그 아래에서 일을 봤던 자들도 함께 끌려갔다.일이 이렇게 빠르게 굴러가는 것을 보고, 서리는 도리어 걸음을 멈췄다.덮으려 들 줄 알았다. 그런데 궁은 덮는 대신 잘라내고 있었다.—왕후가 이 일을 두고 처음 입을 연 것은 처분이 끝난 뒤였다.말은 궁 안에서 나와 도성까지 퍼졌다. 추가의 가장이 벼슬 낮은 집안 하나를 몰살했고, 이유는 돈이었다는 것이었다.근거로 나온 것은 차용증이었다.추병헌이 임채환에게 돈을 대주었고, 그 문서에는 채무자가 죽으면 임가의 남은 재산과 토지가 추가에 귀속된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임채환이 죽으면 재산을 가져갈 수 있다는 조건을 이용해, 추병헌이 집안 자체를 없앴다는 이야기였다.사람을 죽여 재산을 삼켰다는 이야기였다. 흉악하고, 알아듣기 쉬웠다.도성 사람들도 그렇게 알아들었다. 며칠 사이 저잣거리에서는 추가가 어느 집안을 통째로 죽였다는 말이 오갔다. 임가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추가의 이름은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준연에게 그 말을 전한 것은 서리였다.아이는 별채 마루에 앉아 있었다. 몇 날 잘 먹은 덕에 얼굴에 살이 조금 올랐지만, 여전히 사람이 가까이 오면 먼저 물러앉는 버릇이 있었다."네가 말한 손을 찾았다."준연이 고개를 들었다."잡혔습니까.""잡혔다. 그자를 부린 사람도 함께 잡혔다."아이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마
찾는 데 걸린 것은 아흐레였다.준연이 말한 것은 손 하나였다. 얼굴도 이름도 없었다. 다만 왼손등에서 시작해 손목을 지나 팔까지 이어지는 화상이라면, 여름에도 소매를 내리고 다닐 수밖에 없는 자였다.먼저 임가가 살던 골목부터 짚었다. 그 집에 드나든 사내를 기억하는 이웃이 셋 나왔다. 하나는 그자가 늘 문 앞에서만 서 있었다 했고, 하나는 몇 달에 한 번씩 왔다 했다. 세 번째는 그자가 여름에도 소매를 걷지 않았다고 기억했다."돈 받으러 오는 사람 같았습니다."그 이웃이 말했다."그 집 어르신이 그 사람만 오면 얼굴이 굳었으니까요."빚이었다.임채환이 어디서 돈을 빌렸는지 알아내는 데는 이틀이 더 걸렸다. 도성 북쪽에 자리한 집안 하나가 대준 것이었고, 그 집에서 셈을 받으러 다니는 자들이 여럿 있었다."그 사람들 중에 손을 다친 자가 있는지 물어라."서리가 일렀다."얼굴은 묻지 마라. 손만."—며칠 뒤 저녁, 백우가 명단을 들고 왔다."셋으로 좁혔습니다."백우가 말했다."그중 하나는 손등이 아니라 뺨입니다. 하나는 오른손이고요.""남은 하나는.""왼손입니다."백우가 종이를 짚었다."성이 배, 이름은 확실치 않습니다. 수레와 사람 부리는 일을 맡는다고 합니다."—붙잡은 것은 성 밖 주막 뒤편이었다.사내는 백우를 보자마자 담을 넘으려 했다. 담 위에 올라가 있던 것을 뒤에서 붙잡아 끌어내렸고, 그 뒤로는 크게 반항하지 않았다. 몸을 쓰는 자가 아니었다.이겸이 앞에 섰다."왼손을 내밀어라."사내가 손을 등 뒤로 감췄다. 백우가 그 팔을 잡아 앞으로 끌어냈다.손등이 붉었다. 살이 한번 녹았다가 다시 붙은 자리였다. 겉이 매끄럽지 않고, 손가락 사이까지 당겨져 있었다.이겸이 소매를 잡아 걷었다.손목을 지나 팔뚝까지, 같은 자국이 이어져 있었다.준연이 말한 그대로였다.—사내는 도성 안의 조용한 자리로 옮겨졌다.처음 한동안은 억울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저는 셈 받으러 다닌 것뿐입니다. 임채환이 빌린 돈이 있으니
임가의 시신이 나왔다는 말은 사흘도 안 되어 도성 안까지 돌았다.영안공 쪽에서 그것을 거두어 조사한다는 말도 함께 돌았다.영안궁 대문 앞에 아이 하나가 나타난 것은 그 무렵이었다.문지기가 처음 쫓아냈다. 이튿날 또 왔고, 또 쫓겨났다. 사흘째 되던 날에는 담 모퉁이에 앉아 있다가 발견되었다."임가 일을 묻는다 합니다."백우가 고했다."그 집 시신을 여기서 거뒀느냐고요. 며칠째 근처를 맴돌고 있었습니다.""몇 살쯤 되나.""열 살 안팎으로 보입니다."백우가 잠시 멈췄다."행색이…… 오래 밖에서 지낸 아이입니다."—아이는 마르고 더러웠다. 발에 신은 것은 짝이 맞지 않았고, 손등이 트다 못해 갈라져 있었다.들어와 앉으라 해도 문턱 안쪽에서 더 들어오지 않았다. 무릎에 손을 얹고, 등을 곧게 편 자세였다. 그 자세만은 거리에서 배운 것이 아니었다."이름이 무엇이냐."서리가 물었다.아이가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가 답했다."임준연입니다."—준연을 데리고 간 것은 이튿날 아침이었다.거적을 걷기 전에 이겸이 아이 앞에 섰다."보지 않아도 된다."준연은 고개를 저었다."봐야 합니다."거적이 걷혔다.아이는 소리를 내지 않았다. 다만 무릎이 먼저 꺾였다. 흙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손을 뻗지도 못하고 그 앞을 보고만 있었다.한참 뒤에야 목에서 소리가 새어 나왔다. 우는 소리라기보다는, 숨이 걸려 나오는 소리에 가까웠다.서리는 다가가지 않았다. 이겸도 그랬다. 아이가 다 울 때까지 아무도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해가 제법 올라온 뒤에야 준연이 소매로 얼굴을 닦고 일어섰다."어머니 것부터 물으실 겁니까."아이가 먼저 말했다."제가 임가 사람이 맞는지.""그래야 한다."서리가 답했다."네게 미안한 일이다.""괜찮습니다."—아이는 묻는 것마다 답했다.집 안마당에 우물이 있었고 그 옆에 감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는 것. 아버지가 서책을 넣어두던 궤가 안방 뒤편에 있었고, 밑판이 하나 떨어져 그 아래 서찰을 감춰두곤 했다는
객주를 맡았던 자를 데려온 지 사흘째였다.삯을 내주던 자리는 생각보다 허술했다. 정해진 말을 대면 얼마를 내주고, 나무패를 가져오면 얼마를 더 내주는 것이 전부였다. 그 돈이 어디서 들어오는지는 그자도 몰랐다. 달마다 사람이 바뀌었고, 얼굴을 기억하는 자도 없었다.그래도 실은 실이었다. 서리는 그 돈이 들어온 날짜를 하나씩 짚어가며 종이에 옮기고 있었다.백우가 들어선 것은 그 무렵이었다."주군. 다른 건으로 아뢸 것이 있습니다."이겸이 고개를 들었다."도성 밖 야산에서 시신이 여럿 나왔다 합니다."—발견한 것은 관아도 순검도 아니었다.봄부터 비가 시원치 않았다. 논에 물을 대지 못한 곳이 늘었고, 먹을 것이 떨어진 사람들이 산으로 올라가 뿌리를 캐기 시작한 지 벌써 여러 날이었다.그날도 몇이 괭이를 들고 산등성이를 파고 있었다. 흙이 유난히 무른 자리였다. 괭이 끝에 걸린 것을 뿌리인 줄 알고 잡아당긴 사람이 그대로 주저앉았다.뿌리가 아니었다."한 자리에 여럿이 묻혀 있었다 합니다."백우가 고했다."깊지 않았고요. 흙을 덮은 뒤로 반년쯤 지난 것으로 보인다더군요.""신원은.""알아보기 어렵습니다."백우가 잠시 말을 골랐다."얼굴로는 어렵고, 옷이며 머리카락이 조금씩 남은 정도입니다."서리는 붓을 내려놓았다."인원은요.""어른 넷에 아이 하나입니다."백우가 서리 쪽을 보았다."저희가 찾던 실종자들 가운데 한쪽일 가능성이 있습니다."방 안에 잠시 정적이 내려앉았다.가족째 사라진 집이 둘이었다. 하나는 영안궁의 문적을 맡았던 자의 식솔이었고, 다른 하나는 손수건에 수를 놓은 딸이 있던 집이었다."가보아야겠군요."서리가 말했다.—야산에는 이미 관아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거적이 몇 장 깔렸고, 그 위에 흙을 털어낸 것들이 놓여 있었다. 서리는 소매로 코를 가리지 않았다. 전장에서 돌아온 짐수레를 본 적이 있었다. 그때 맡았던 냄새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이겸이 먼저 다가가 하나씩 살폈다. 백우가 곁에서 숫자를 세었
서리가 물었다."그런 밤이 여러 번 있었나.""두 번쯤 됩니다. 그다음부터는 아예 자리만 두고 곧장 나왔고요.""값은 어떻게 받았나.""다음 날 성안 객주에서 받았습니다. 정해둔 말을 대면 셈해줬고요.""객주는 네가 무엇을 팔았는지 알고 있었나.""아닙니다. 그 말만 맞으면 돈을 내줬습니다.""웃돈은.""다음번에 갔을 때 자리에 나무패가 놓여 있으면, 그걸 객주에 가져갔습니다."사내가 손가락을 비볐다."그게 꽤 후해서요. 그 맛에 다녔습니다.""너 말고도 다니는 자가 있었나.""있었겠지요."사내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그런데 서로 마주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날이랑 시각을 다 따로 잡아줬거든요. 저는 제 날에만 갔습니다."—"무엇을 팔았나."서리가 물었다.사내는 잠시 눈치를 살피다가, 별것 아니라는 투로 늘어놓기 시작했다."뭐 대단한 건 아닙니다. 저는 그냥 저잣거리에서 주워듣는 거니까요. 어느 집에 새 사람이 들어왔다더라, 어디는 사람이 바뀌었다더라, 그런 겁니다.""어느 집.""……영안궁 이야기를 꽤 물었습니다."방 안이 조용해졌다."자세히 말해봐라."이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영안공께서 자리보전하신 뒤로 궁에 사람이 얼마나 드나드는지, 새로 들어온 자가 있는지, 밤에 누가 지키는지— 그런 걸 물었습니다."사내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저야 뭐 담 너머로 들은 소리를 옮긴 거지요. 문지기들이 술자리에서 흘리는 말이나, 물건 대는 상인들한테 들은 것들이요.""그것뿐인가.""서가 이야기도 몇 번 팔았습니다."사내가 서리 쪽을 흘긋 보았다."장군댁이 그렇게 되고 나서 남은 재산이 어디로 갔다더라, 옛날 사람들이 아직 붙어 있다더라, 그런 뒷말이요.""언제부터.""글쎄요, 꽤 됐습니다."사내가 셈하듯 눈을 굴렸다."지난겨울 전부터니까…… 반년은 훨씬 넘었지요."서리는 무릎 위에 놓은 손을 조용히 겹쳤다.연택례에서 이름을 부른 것이 봄이었다. 그런데 이 사내가 영안궁과 서가에 관한 말을 팔기
창고를 비워둔 채 지켜보기로 한 것은 이겸의 뜻이었다.문을 도로 잠그고, 장도 원래 자리에 밀어놓았다. 안에서 무엇을 찾아냈는지 아무도 모르게 두라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장이 서는 날마다 사람을 몇씩 흩어 앉혀두었다.첫 장이 섰을 때는 아무것도 없었다.두 번째 장이 선 밤, 백우가 처음으로 이름 없는 보고를 올렸다. 창고 앞을 두 번 지나간 사내가 있었다는 것이었다. 물건을 사지도, 누구와 말을 섞지도 않았다.세 번째 장에서, 그 사내가 다시 왔다."옷이 달랐습니다."백우가 고했다."지난번엔 짐꾼 차림이었는데, 이번엔 약재 사러 온 행색이었습니다. 들어온 길도 반대쪽이었고요.""확실한가.""걸음이 같습니다. 왼발을 조금 끕니다."백우가 잠시 뜸을 들였다."그리고 창고를 오래 보지 않습니다. 대신 창고가 보이는 자리를 몇 번씩 지나갑니다. 좌판을 들여다보는 척하면서요."이겸은 곧바로 잡으라 하지 않았다."다음 장까지 두어라. 세 번이면 우연이 아니지."—네 번째 장이 선 밤, 사내는 또 왔다.이번에도 옷차림이 달랐고, 들어온 길도 달랐다. 다만 도는 자리는 같았다. 창고 뒤편으로 돌아 담이 무너진 틈을 한 번 들여다보고, 앞쪽으로 나와 좌판 두어 곳을 지나며 다시 그쪽을 살폈다. 그러기를 네 번쯤 되풀이한 뒤에야 자리를 뜨려 했다.백우의 사람이 그 앞을 막아섰을 때, 사내는 곧바로 몸을 틀어 달아났다. 하지만 몇 걸음 못 가 뒷골목에서 붙잡혔고, 칼을 뽑거나 끝까지 반항하지는 않았다.—사내는 영안궁 별채가 아니라 도성 안의 조용한 자리로 옮겨졌다.나이는 마흔쯤, 몸집이 작고 눈이 빨랐다. 결박된 채 앉혀놓자 이겸을 한 번 올려다보고는 곧 시선을 내렸다. 상대가 어느 정도 되는 사람인지 가늠하는 눈치였고, 그 가늠이 끝나자 어깨가 축 처졌다."살려주십쇼. 저는 사람 해치는 일은 안 합니다.""무슨 일을 하나.""……소식 나르는 일 좀 합니다."사내가 우물거렸다."누가 어디 갔다더라, 누구네 집에 누가 드나든다더라,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