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그날 저녁 서재에는 넷이 있었다.서리와 이겸, 그리고 문 옆에 백우와 초은이 서 있었다.서안 위에는 마영범의 장부와 인장, 삼 년 전 사본이 놓여 있었다."행수는 입을 닫았습니다."이겸이 말했다."다만 행수 혼자 알아서 한 일이냐고 떠보니, 그건 아니라는 말이 먼저 튀어나왔습니다. 그 위에 누가 있는지는 아직 모릅니다.""그럼 남은 건 그때입니다."서리가 삼 년 전 사본을 짚었다."동가에서 받은 곡식이 어느 창고를 거쳐 누구 손으로 서가에 넘어왔는지. 그 칸은 서가 본장부에 있습니다. 백종길 어른 말로는 서고 안쪽 궤에 그대로 있고요."서리가 잠시 장부들을 내려다보았다."마영범 말로는, 행수가 삼 년 전 것은 한 장도 남기지 말라 했다지요. 지금 것은 이미 다 드러났는데도요. 그쪽이 끝까지 지키고 싶은 건 그때 일입니다. 본장부가 이 사본과 나란히 놓이는 것만은 어떻게든 막으려 할 겁니다.""행수는 끝까지 입을 열지 않을 겁니다."이겸의 말에 서리가 답했다."말하게 할 수 없으면, 움직이게 해야지요."이겸이 서리를 보았다."본장부와 맞춰 보러 간다는 말을 흘리자는 말씀이군요.""예. 여기 있는 증거 장부를 서가로 가져가 본장부와 대조한다고요. 본장부는 서고에서 꺼내지 않습니다. 오가는 궤에는 불에 타도 상관없는 사본과 헌 장부, 옮겨 적고 난 종이만 싣고요.""흘리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어디서 새는지는 몰라도, 저쪽이 우리 움직임을 듣고 있다는 건 확인했으니까요.""그런데 장부만 오간다고 하면, 저쪽은 사람 몇만 보내고 끝낼 겁니다. 불 하나 놓고 빠지면 되니까요. 그러면 우리가 잡는 것도 그 몇뿐입니다.""그래서요.""제가 같이 가겠습니다."서재가 한순간 조용해졌다."제가 직접 증거를 들고 서가에 가서 본장부와 맞춰 보고 돌아온다고 하면, 저쪽은 믿을 겁니다. 그때 일을 이어 맞추고 있는 게 저니까요. 대조를 마친 저와 그 기록을 한꺼번에 끊을 수 있는 자리라면, 몇 사람 보내고 끝낼 일이 아닙니다. 이번에 확실히
마영범은 밤을 새운 얼굴이었다.곡물전 뒤 마당에서 끌려온 지 두 시진도 지나지 않았다. 영안궁 별채의 방은 좁았다.이겸은 마영범 앞에 장부 한 권과 인장 하나를 나란히 내려놓았다."네 것이냐."마영범이 인장을 보았다. 오래 쥐어 모서리가 닳은 것이었다."……예."이겸이 장부를 펼쳐 한 줄을 짚었다. 줄 끝에 같은 인장이 찍혀 있었다."이 줄은.""제가 셈한 것입니다.""섞은 것이 서른 섬이다. 빠진 서른 섬은 어디 갔지."마영범이 장부 뒤쪽을 턱으로 가리켰다."……다른 창고로요."이겸이 장부를 몇 장 넘겼다."이 창고는 누구 것이냐.""……장부에 적힌 이름대로입니다.""그 이름 가진 자는 창고에 한 번도 안 왔다더군. 드나든 건 동가 수레였고, 그 안에서 셈을 한 건 동가 셈꾼인 너다."마영범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라고도 하지 않았다."삼 년 전에도 했나."마영범의 눈이 처음으로 들렸다.이겸이 곁에 둔 중개상 장부를 펼쳐 삼 년 전 구월의 한 줄을 보여주었다.받은 쪽 칸에 같은 인장이 찍혀 있었다.마영범이 한참 그것을 보았다."……했습니다.""어느 군영으로 갔나.""모릅니다. 저는 도성 안에서 받고 넘기는 데까지입니다."이겸이 장부를 덮었다."이 셈을 누구에게 올렸나."마영범이 바닥을 보았다.이겸은 재촉하지 않았다. 덮은 장부 위에 인장을 올려 두었을 뿐이었다."말하지 않겠다면 그것도 좋다."이겸이 인장을 손끝으로 한 번 밀었다."줄마다 네 인장이다. 누구에게 올렸는지 말하지 않으면, 섞은 것도 빼돌린 것도 네가 정하고 네가 한 걸로 친다. 군량이다. 그 값은 네 목으로 치르게 될 거다.""……행수 어른입니다.""동가 행수.""예. 그날도 해 지기 전에 저를 보러 오기로 했습니다.""그날 무슨 말을 들었지.""물건은 두고, 셈한 것과 사람을 먼저 빼라고요. 삼 년 전 것은 한 장도 남기지 말라 했습니다.""그 전에는.""조금씩 빼라 했습니다. 낮까지만 해도요.""왜 바뀌었지.""모릅니다
남문 밖에 닿았을 때 해가 막 넘어가고 있었다.곡물전 뒤 마당에서 나오는 길은 둘이었다.하나는 곡물전 앞을 지나 큰길로 붙었고, 다른 하나는 뒤쪽 골목으로 빠져 남문 쪽으로 이어졌다.이겸은 먼저 골목 끝에 사람을 넣었다."수레가 어느 쪽으로 나오든 골목 끝에서 막는다. 먼저 나오는 수레는 대문에서 멀어질 때까지 둔다.""대문 앞에서 잡지 않으십니까.""대문 앞에서 잡으면 안에서 문을 닫는다."이겸이 말했다."수레가 나가는 걸 보면 안에 있는 자들은 일이 되는 줄 안다. 그때 안으로 들어간다."군관이 사람을 나눴다.골목 끝에 여섯, 큰길 쪽에 넷, 담 뒤로 둘.나머지는 이겸과 함께 곡물전 옆 처마 밑에 붙었다.오래 기다리지 않았다.대문이 열리고, 쇠 덧댄 수레가 먼저 나왔다. 가마니가 여섯, 그 위에 거적이 덮여 있었다.수레꾼 하나가 고삐를 잡고, 사내 하나가 옆에 붙어 걸었다.수레는 뒤쪽 골목으로 꺾었다.이겸은 움직이지 않았다.수레 바퀴 소리가 골목 안으로 멀어졌다. 대문은 아직 열려 있었다. 안에서 두 번째 수레를 끌어내는 소리가 났다.골목 끝에서 짧게 사람 소리가 났다가 그쳤다."들어간다."이겸이 먼저 대문으로 들어섰다.마당 안에서 사내 넷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하나는 수레에 가마니를 올리다 멈췄고, 하나는 작은 궤를 끌어안고 있었다.담 쪽 광 앞에서 또 하나가 종이 뭉치를 찢고 있었다."거기 그대로."궤를 안은 자가 담 쪽으로 뛰었다. 담 위로 궤를 넘기려다, 담 뒤에서 뻗어 온 손에 궤째 붙들렸다.찢던 자는 손에 든 종이를 입으로 가져가다가 군관에게 턱을 잡혔다.몸싸움이랄 것도 없었다. 넷 다 무릎을 꿇었다."광부터 봐라."광 안에는 곡식 가마니가 쌓여 있었다. 병사들이 가마니를 내리다가 하나를 들고 멈췄다."이건 무게가 이상합니다."가마니를 가르자 위로 쌀이 한 켜 덮여 있었다. 그 아래에 기름종이로 싼 장부 뭉치가 들어 있었다.이겸이 그것을 보았다."다 갈라라."가마니 다섯에서 장부가
동가 사랑채의 등잔은 요 며칠 늦게까지 꺼지지 않았다.북쪽 창고가 털린 뒤로 동가는 서두르지 않았다.한꺼번에 문을 닫으면 닫힌 자리끼리 이어져 보였다.수레가 평소보다 많이 움직이면 그것부터 눈에 띄었다.무엇보다 먼저 겁먹은 쪽이 먼저 드러났다.그래서 하나씩 뺐다.오래 일한 사람부터 다른 데로 돌렸다. 장부는 몇 권씩 나눠 옮겼다.남의 이름으로 빌린 자리는 평범한 창고처럼 보이도록 쌀 몇 섬을 들여 두었다.수레는 드나드는 날을 줄였다. 급한 것이 아니면 급하게 움직이지 않았다.당주는 그 셈을 매일 밤 받아 보았다."남문 밖은.""사흘에 한 번씩 조금씩 빼고 있습니다. 보름이면 비울 수 있습니다."행수가 답했다."영안궁 쪽은 조용합니다. 창고에서 잡아간 자들도 왕 서방 이름만 대고 있고요. 그 위로는 아는 게 없으니 댈 것도 없지요.""그럼 됐다."당주가 셈을 덮었다.그 셈이 달라진 것은 이튿날 오후였다.병부에 드나드는 아전 하나가 사람을 통해 말을 넣어 왔다.영안궁에서 병부 창고의 옛 출납 문서를 내 갔다는 것이었다."옛것이라니. 언제 것이냐.""삼 년 전 것이랍니다. 북계로 나간 군수 출납이요."사랑채 안이 조용해졌다."영안공이 직접 청했다더냐.""동도원수부 이름으로 나갔답니다. 그 전에 원수부에 따로 두던 수령 대장도 꺼내 봤다는 말이 있습니다."당주가 한참 말이 없었다.지금 일만이라면 꼬리를 자를 수 있었다.창고는 남의 이름이었고, 섞은 것은 거기 있던 자들이 한 일이라 하면 되었다.셈을 잘못한 행수 하나, 욕심 부린 창고지기 하나. 그 정도로 끝낼 수 있었다.삼 년 전까지 이어지면 달랐다."지금 것과 그때 것을 나란히 놓고 보면."행수가 말끝을 흐렸다."한 줄로 이어 볼 수도 있겠지요.""그러면 저자에서 다툴 일이 아니다."당주가 말했다."군량이다. 궁에 올라가면 끝이야."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보름을 기다릴 수 없다. 남문 밖은 오늘 밤 비워라.""한꺼번에 빼면—""물건은 두고 가도
서리가 장부의 겉장을 들어 보였다."아버지는 본장부를 서가에 두고, 셈만 옮긴 사본을 따로 만들게 하셨습니다. 밖에 들고 다니며 볼 것이지요. 날짜와 물건과 수량, 늦은 날수까지는 여기 다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 넘겼는지, 도중에 누구 손을 거쳤는지, 길이 바뀐 까닭이 무엇인지는 없습니다.""본장부에는 있고요.""담당하던 사람이 비고를 달았을 겁니다. 받아 간 사람 이름도요."서리가 첫 줄의 인계 칸을 짚었다. 인계처 자리에는 도성 창고라고만 적혀 있었다."이 물건이 서가에 닿기 전에 누구 창고에 있었는지, 그걸 봐야 합니다."이겸이 대장을 덮었다."부인.""예.""여기까지 맞으면, 이건 이제 서가와 동가가 저자에서 다투는 일이 아닙니다."이겸이 말했다."지금 창고에서 섞은 곡식은 북계로 가는 군량입니다. 삼 년 전 군수 이상은 무령후의 군에도 닿아 있었고, 출진 전부터 시작돼 한 달 넘게 이어졌습니다. 둘 다 군량과 군수품입니다. 사실로 드러나면 궁에 올라가야 합니다.""압니다.""그래서 더 틀리면 안 됩니다.""예."서리가 답했다."불을 누가 냈는지, 일부러 늦춘 것인지는 아직 모릅니다. 그때 저 물건들이 동가 손에 있었다는 것 하나만 잡아도, 나머지는 따라옵니다."이겸이 고개를 끄덕였다."본장부는 어디 있습니까.""서가 서고에 있을 겁니다. 어느 궤에 두었는지는 백종길 어른이 아실 테고요.""그럼 그것부터 챙기시지요."이겸이 대장을 서리 쪽에 두고 먼저 일어섰다. 문 앞에서 한 번 돌아보았다."오늘은 그만 주무시고요.""조금만 더 보고요."처음 들어왔을 때 들은 대답과 같았다. 이겸은 더 말하지 않고 문을 닫았다.닫히기 직전, 그 손이 제 볼께를 한 번 스치는 것이 보였다.서리는 삼 년 전 사본을 덮지 않았다. 등잔 심지가 한 번 더 타들어 갈 때까지 날짜를 옮겨 적었다.—이튿날 아침, 준연이 대문 쪽에서 서리를 불렀다."그 아이들이 왔습니다."대문께에 셋이 서 있었다. 이번에도 안으로는 들어오지 않
삼 년 전 장부를 몇 장 넘기지 않았을 때 서재 문이 열렸다.이겸이었다. 겉옷을 벗어 팔에 건 채 문턱에 서서 서안 위를 보았다."아직 안 주무셨습니까.""조금만 더 보려고요."이겸이 들어와 서안 맞은편에 앉았다.펼쳐진 장부 귀퉁이에 적힌 해를 보고, 그 옆에 밀어 둔 사 년 전 것을 보았다.무엇을 보고 있는지 묻지 않았다.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요즘은 왜 안 해주십니까."서리가 장부에서 눈을 들었다."어떤 걸 말입니까?""부르시는 거요."이겸이 말했다."창고 일 아뢰실 때도 영안공, 낮에 백우한테 저를 찾으실 때도 영안공이라 하셨다더군요. 다시 영안공이 되었습니다."서리가 잠시 이겸을 보았다.무엇을 말하는지 알았다. 마당에 볕이 남아 있던 날, 한 번 불렀던 말.그때 이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걸 여태 기억하고, 셈까지 하고 있었다.서리의 입가가 조금 풀렸다."알겠습니다, 서방님."이겸이 굳었다.앞에 두고 들을 말로는 생각하지 않았던 얼굴이었다.청해 놓고 막상 들으니 어디에 둘지 모르는 사람처럼 앉아 있었다.서리는 그 얼굴을 한 번 더 보았다.그러고는 몸을 서안 너머로 조금 기울여, 이겸의 볼에 짧게 입을 맞췄다.이겸이 숨을 멈췄다.서리는 도로 자리에 앉았다. 장부를 끌어당기고, 넘기던 장을 찾아 손가락을 짚었다."팔월 스무날."서리가 장부를 읽기 시작했다."약재 서른 짐. 열나흘에 넘겨받기로 한 것이 엿새 늦어 이날 인계됐습니다."이겸은 아직 볼에 닿았던 자리를 그대로 두고 앉아 있었다."……예."한 박자 늦은 대답이었다."듣고 계십니까.""듣고 있습니다."이겸이 헛기침을 한 번 하고 서안 쪽으로 몸을 당겨 앉았다.서리는 장부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입가만 조금 늦게 제자리로 돌아왔다.서리가 장부를 이겸 쪽으로 돌려놓았다."여기부터 보시면 됩니다."창고에 불이 나고 서가 수레 여섯 대가 동가로 간 것은 그 뒤, 시월의 일이었다.서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그보다 앞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