เข้าสู่ระบบ“적어도 그 시절의 충동과 미숙함에 대해, 정식으로 사과는 해야겠어. 그건 내가 교수님께 진 빚이니까.”
태리는 술을 한 모금 들이키다 거의 사레가 들릴 뻔했다. 그녀는 두어 번 기침을 하며 얼굴 가득 거부의 기색을 드러냈다.
“제발 나 좀 살려줘, 유진.”
“내가 대학 시절 딱 한 번 재시험까지 갔던 과목이 누구 수업이었는지 알잖아. 바로 심 교수님 선택과목이야. 난 그분 얼굴만 봐도 긴장돼. 게다가 난 그냥 존재감 없는 학생이었잖아. 교수님은 내가 누군지도 이미 잊었을 걸? 솔직히 말해서, 난 정말로 아무런 도움이 안 돼.”
유진은 그녀가 극구 피하는 모습을 보고 더는 강요하지 않았다.
“그런데 말이야.”
태리의 눈빛이 교활하게 반짝이며 화제가 바뀌었다.
“내가 보기에 딱 맞는 사람이 하나 있긴 해.”
“응?”
“내 사촌 오빠, 서민준 기억나?”
유진은 미지근한 물을 한 모금 마시고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기억하지.”
서민준.
국내 최연소 물리학 분야 차세대 리더로, 지난해 《네이처》가 선정한 ‘세계를 바꾸는 10대 청년 과학자’ 1위에 오른 인물이었다.
학부 시절부터 심 교수의 문하에서 응용생명과학을 전공했고, 2년 만에 SCI 논문 5편을 발표해 생물학계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천재’라 불렸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전공을 바꾸겠다는 기행 같은 선택을 하고는 물리학으로 방향을 틀었고, 당시 학계에 적잖은 파장을 일으켰다.
하지만 결과는 분명했다.
잘하는 사람이라면, 어느 분야를 가도 결국 해낸다는 것이었다.
이제 서민준은 국제 물리학계에서 손꼽히는 거물이 되어 있었다.
유진은 그와 같은 학교 출신이지만 입학 시기가 달라 학부로 따지면 후배 격이었다.
입학하자마자 그의 전설 같은 이야기들을 들었고, 이후 태리를 알게 되어서야 그가 그녀의 사촌오빠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오랫동안 해외 물리연구소에서 근무하다가, 세 달 전 귀국했다.
“며칠 전에 오빠도 교수님 병세를 물어보더라고. 바빠서 직접 찾아 뵙진 못한 것 같던데, 네가 같이 가면 딱 좋지.”
태리는 말할수록 괜찮은 생각이라는 확신이 들었는지, 곧바로 민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두 번 울리고 연결됐다.
유진은 수화기 너머로 낮고 차분한 목소리를 들었다. 냉담하면서도 반듯한 음성이었다.
“무슨 일이야?”
태리는 간단히 상황을 설명했다.
배경 소음이 꽤 시끄러웠고, 그는 몹시 바쁜 듯 1분도 채 되지 않아 통화를 끝냈다.
“끝! 오빠가 내일 오후 2시, 아연 레스토랑에서 만나서 얘기하재.”
태리는 유진의 손을 꼭 잡았다.
“오늘은 그냥 푹 자. 나머진 내일 생각하자.”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알겠어.”
……
다음 날.
유진은 약속 시간보다 30분이나 일찍 집을 나섰다.
레스토랑에 도착해 시계를 보니, 2시까지 아직 2분이 남아 있었다.
빠르지도 늦지도 않은, 딱 좋은 타이밍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직원이 그녀를 안내했고, 몇 걸음 지나 창가에 앉아 있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무표정한 얼굴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흰 셔츠에 검은 슬랙스. 콧대에는 금테 안경이 걸려 있었고, 햇살이 그의 옆얼굴에 내려앉아 마치 한 폭의 유화 같았다.
반면 자신의 차림을 보니, 흰 티셔츠에 청바지, 높게 묶은 포니테일, 화장기 없는 얼굴. 확실히 너무 편한 차림이었다.
유진의 시선을 느낀 듯,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앉아요. 뭐 마실래요?”
자석처럼 귀에 들러붙는 저음이 은근한 전율을 남겼다.
유진은 정신을 차리고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죄송해요, 많이 기다리셨죠.”
검은 보석 같은 눈동자에 미안함이 묻어났다.
민준은 안경을 살짝 밀어 올리며 담담하게 말했다.
“괜찮아요. 저도 5분 정도 먼저 왔을 뿐이에요. 실험실에 아직 처리해야 할 데이터가 있어서, 오늘은 30분밖에 시간을 못 드려요. 충분할까요?”
“네, 충분해요.”
직원이 다가오자 유진은 레몬워터를 주문했다.
민준은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심 교수님을 뵈러 가는 건데, 내가 무엇을 해주길 원하죠?”
예상외로 단도직입적이었다.
유진은 군더더기 없는 이런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교수님은 이미 퇴원하셨어요. 그런데 지금 거주지를 몰라서요. 그래서 같이 찾아뵙고 싶어요. 가능하다면…”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혹시 교수님이 화를 내시면, 옆에서 조금만 말려주세요. 그게… 화는 몸에 안 좋잖아요.”
그 말을 듣고 남자의 입꼬리가 아주 희미하게 올라간 듯 보였다.
“바쁘신 건 알고 있어요. 시간은 제가 맞출게요.”
서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이틀 뒤로 하죠.”
유진은 감사 인사를 전했다.
레몬워터를 두 손으로 감싸 쥔 채, 문득 물었다.
“그런데 저를… 왜 도와주시려는 거예요?”
민준의 검고 윤기 있는 눈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참 침묵이 흐른 뒤, 유진이 대답을 듣지 못할 거라 생각했을 즈음 그가 입을 열었다.
“당신이 유진이니까요.”
“…?”
“심 교수님이 예전에 그러셨어요.”
그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인생에 세 가지 한이 있다고. 하나는 학문의 바다는 끝이 없는데 인생은 너무 짧다는 것, 둘은 자식이 없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이, 유진.”
유진은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손끝이 손바닥을 깊게 파고들었다.
서민준의 시선이 예리하게 그녀를 꿰뚫었다.
그 눈동자에는 깊은 탐색과 평가가 스쳤다가, 이내 다시 고요해졌다.
이날은 그가 유진을 처음 만난 날이었지만, 이 이름을 처음 들은 건 아니었다.
생명, 연구, 가족과 나란히 ‘한’으로 불릴 정도의 존재라니.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유진은 목이 바싹 말라 시선을 내렸다.
그녀는 스승이 자신을 떠올릴 때 지었을, 실망과 아쉬움이 섞인 표정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민준은 종이 한 장을 꺼내 숫자를 적었다.
“제 번호예요.”
유진은 힐끗 보았다. 단정하고 반듯한 필체였다.
……
“주문하신 티라미수 나왔습니다.”
직원은 접시를 내려놓으며 무심코 이 테이블을 훑어보았다.
남자는 잘생긴 얼굴에 무심한 표정을 띠고 있었고, 눈빛 어딘가엔 참지 못한 짜증이 서려 있었다.
맞은편에는 디올 맞춤 레드 드레스를 입고, 에르메스 밀크화이트 켈리백을 든 여자가 앉아 있었다. 누가 봐도 재력가 집안의 아가씨였다.
그녀는 남자의 불쾌함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쉴 새 없이 말을 이어갔다.
“은호 씨, 어머님께 전해 들었는데 위가 안 좋다면서요? 저희 집에 위장 쪽 전문으로 보는 주치의가 있는데, 나중에…”
은호는 라이터를 만지작거리며 가끔 건성으로 대답했다.
오늘 이 맞선 자리는 어머니 차순희 여사가 잡아준 자리였다. 어차피 나온 이상, 대놓고 망치고 싶진 않았다. 다만 여자가 하는 말에는 전혀 흥미가 없었다.
시선이 자연스레 멀리로 향했다가, 갑자기 멈췄다. 그는 순간적으로 몸을 곧추세웠다.
4~5자리 건너편에서, 유진이 어떤 남자와 마주 앉아 있었다.
대화 내용은 들리지 않았지만, 그녀 얼굴에 떠오른 옅은 미소는 분명히 보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어떻게든 참아낼 수 있던 소리가, 갑자기 귀를 찢는 소음처럼 느껴졌다.
짜증이 걷잡을 수 없이 치밀어 올랐다.
은호는 비웃듯 시선을 거두었다.
“이만 가봐야겠네요.”
민준의 일정은 빠듯했다. 30분을 낸 것만 해도 한계였다.
유진은 충분히 이해한다는 뜻을 전했고, 두 사람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스토랑을 나설 때, 민준이 먼저 다가가 문을 잡아주며 그녀를 먼저 보내주었다.
참으로 신사적인 행동이었다.
유진은 웃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길가에 도착하자, 그가 말했다.
“차가 왔네요.”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레 뵐게요.”
그의 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다가, 유진은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뜻밖에도 한 쌍의 눈과 마주쳤다.
웃는 듯하면서도 웃지 않는, 조롱과 냉기가 가득한 시선이었다.
“이렇게 빨리 다음 사람을 찾은 거야?”
“싫어요.”수아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얼굴을 붉히며 살짝 발끝을 들었다.“오빠랑 조금만 더 같이 있고 싶어요.”그녀가 더 다가오기 전에, 은호가 먼저 움직였다.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와아!”주변에서 환호와 탄성이 터졌다.“세상에! 얼마나 사랑하면 저럴까?”“완전 드라마네!”유진은 그 장면을 전부 지켜보고 있었다. 책을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 마디가 하얗게 질렸다.아직도… 마음이 아팠다.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놀라울 만큼 차분했다. 거의 무감각에 가까웠다.‘담배를 끊어도 금단 현상이 있는데, 하물며 6년을 사랑했던 사람인데.’유진은 더 이상 머물지 않고 조용히 몸을 돌렸다. 집으로 돌아가 공부해야 했다.사람들 사이에 서 있던 은호는 문득 무언가 느낀 듯 고개를 돌렸다. 어딘선가 익숙한 뒷모습이 시야 끝을 스쳤다.하지만 그 순간, 수아가 그의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의 손가락이 자연스럽게 얽혔다.“뭘 보고 있었어요?”은호는 시선을 거두었다.“…아무것도 아니야.”수아를 기숙사 건물 아래까지 데려다준 뒤 돌아가려 했지만, 수아는 그의 손을 놓지 않았다.“아직 이른데... 조금만 더 같이 있으면 안 돼요?”은호는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주말에 데리러 올게.”가로등 불빛 아래서 그의 얼굴은 역광 속에 더 또렷하게 드러났다. 수아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달콤한 유혹이 섞였다.“오빠… 오늘 저, 오빠 집에 가도 될까요?”그 말의 의미는 분명했다.은호는 잠시 멈칫했다.“넌 아직 어려. 조금 더 기다리자.”수아는 놀랐지만 마음 한편이 오히려 따뜻해졌다.그가 자신을 가볍게 대하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나 이제 가볼게. 할 일이 있어.”수아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내일 아침에 좁쌀죽 가져다줄게요.”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멍해진 듯 서 있을 뿐이었다.……방 안.컴퓨터 화면이 켜져 있었지만 유진의 타이핑 속도는 점점 느려졌다. 머릿속에 두 사람이
은호는 말을 끝내자마자 차에 올라탔다. 그리곤 가속 페달을 세게 밟아 그대로 떠나버렸다.남겨진 태리는 그 자리에 서서 발을 동동 구르며 욕을 퍼부었다.“저게 사람이야? 사람이냐고!”“쓰레기 같은 자식! 잡놈! 개보다 못한 자식! 아, 진짜 열받아 죽겠네!”그녀는 옆에 서 있던 연하남의 옷깃을 붙잡았다.“내가 말하는데, 이번엔 유진 절대 안 돌아가! 절대!”남자는 연신 달래듯 말했다.“그래 그래, 맞아. 화 좀 가라앉혀…”하지만, 정말 그럴 수 있을까? 저 남자는 이미 결과를 확신하고 있는 사람처럼 태연해 보였다.그는 슬쩍 태리를 바라봤다. 순간, 그녀도 유진처럼 한 남자에게 그렇게까지 헌신해 준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스쳤다.‘아니지… 아니야.’그는 고개를 저었다. 꿈에서도 감히 그런 걸 바라진 못했다.……차 안에서 은호는 전화를 받았다.기분이 좋지 않은 탓에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무슨 일이야.”“자기, 요즘 완전 보물 같은 가게 찾았어요! 게가 진짜 살이 꽉 찼대요. 마침 내일 토요일이잖아요. 우리 가서 먹을까요? 응?”수아의 밝고 발랄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흘러나왔다. 그가 해산물을 좋아한다는 걸 알기에, 취향에 맞춰 제안한 것이었다.게다가 은호는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아무 연락도 없었다. 그 침묵이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결국 자존심을 내려놓고 먼저 전화를 걸 수밖에 없었다.예전에는 대부분 은호가 먼저 데이트를 제안했고, 그녀는 수줍게 한 번 사양한 뒤 받아들이면 됐다.하지만 요즘은 달랐다.그가 먼저 연락하는 횟수는 눈에 띄게 줄었고, 메시지도 짧아졌다. 가끔은 읽고도 답을 하지 않았다.이유를 물어보면 늘 같은 대답뿐이었다.“바빠.”지금도 마찬가지였다.“토요일? 바빠. 시간 없어.”“토요일이 안 되면… 일요일은 어때…요?”그녀는 휴대폰을 꽉 쥐었다. 입술이 하얗게 질렸다.“시간 없다니까. 끊는다.”전화는 그대로 끊겼다.끊긴 화면을 바라보는 순간, 수아의 가슴에 불안이 다시 파고들었다.
민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에게 음식이란 그저 에너지를 보충하는 수단일 뿐, 맛이 좋고 나쁨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다 씻었어요.”유진이 고개를 돌려 보니, 씻어 둔 붉은 피망과 청경채가 가지런히 정렬돼 있었다.누가 봐도 강박에 가까운 정리 습관의 소유자였다.“왜 웃어요?”민준은 이유를 몰라 물었다.유진은 가볍게 헛기침을 한 번 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이제 나가 계세요.”“네.”그는 물기를 닦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유진은 한 상 가득 음식을 차렸다.전체적으로 담백한 맛, 대부분이 심 교수가 좋아하고 또 먹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이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구나…”심 교수는 감회에 젖어 중얼거렸다.식사가 끝나자, 유진은 먼저 그릇을 정리했다.민준도 자연스럽게 부엌으로 들어와 도왔다.따뜻한 노란 조명 아래, 남자의 뒷모습이 길게 늘어졌다.유진의 시선에서 보이는 그의 옆얼굴은, 마치 고대 그리스 조각상처럼 선이 또렷하고 날카로웠다.심 교수가 문틀에 기대서서 물었다.“유진, 네 선배랑은 어떻게 알게 된 거니?”민준은 그녀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제자였고, 유진은 가장 아끼는 학생이었다.아주 오래전부터, 두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다고 생각해 왔었다.그런데 뜻밖에도, 인연은 먼저 그들 스스로 이어져 있었다.그때, 현관 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심 교수님, 손님이 찾아오셨어요!”심 교수는 거실로 나왔고, 소파에서 한 여자가 웃으며 일어섰다.“교수님 안녕하세요. 저는 장은아예요. 전에 병원에 문병 갔었고, 올해 대학원 모집에 대해서도 여쭤봤었죠.”심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기억하고 있어요. 앉아요.”은아의 미소는 한층 더 밝아졌다.“요즘 집에서 요양 중이라고 들었어요. 그래서 몸에 좋은 것들 좀 가져왔어요…”심 교수는 탁자 위에 놓인 선물 상자를 무심히 훑어보았다.인삼, 제비집, 동충하초…그녀의 미소는 자연스레 옅어졌다.“전에 말씀드린 대학원 정원 말인데요…”은아가 다시 말을 꺼냈다.
유진이 먼저 걸음을 옮겼고, 남자는 반 걸음 뒤따랐다.어젯밤의 불안함에 비하면, 그녀는 눈에 띄게 평정을 되찾은 모습이었다.민준이 차를 몰고 왔고, 유진은 조수석에 앉았다.가는 길에 과일 가게를 하나 지나치자, 유진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잠깐만 세워주실 수 있을까요? 3분이면 돼요. 과일 좀 사려고요.”“과일?”“네. 교수님 드릴 거예요.”민준은 핸들을 잡은 채, 조금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굳이 그렇게 번거로울 필요가 있나요?”“…?”유진은 괜히 웃음이 나왔다.“설마 늘 빈손으로 남의 집에 가시는 건 아니죠?”민준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유진은 말없이 엄지를 치켜세웠다.‘대단하네, 정말.’‘아마도, 진짜 대단한 사람들은 다 이렇게… 사소한 건 신경을 안 쓰는 걸까?’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는 결국 길가에 차를 세웠다.……심수희 교수의 집은 대학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한국식과 양식이 조화를 이룬 단독 주택들이 줄지어 있었고, 소박하지만 깊이가 느껴지는 곳이었다.단풍나무 숲을 지나면서 아담한 저택이 모습을 드러냈다.‘6년…’유진은 안전벨트를 꽉 움켜쥐었다. 발치에 놓인 과일 바구니를 내려다보니, 갑자기 마음이 약해졌다.민준은 그녀의 변화를 느꼈다.“안 내려요?”유진은 입술을 깨물었다.“잠깐만요. 조금만 있다가요.”남자는 그녀를 몇 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제가 먼저 들어갈게요.”‘…’아무것도 묻지 않는 배려에, 유진은 마음속으로 감사했다.그가 먼저 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그녀는 몇 번 심호흡을 한 뒤에야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계절은 온갖 꽃이 한창 피어나는 때였다.마당에 들어서자, 옅은 꽃향기가 바람을 타고 퍼져왔다.울타리 옆에는 푸릇푸릇한 채소들이 심어져 있었지만, 주인이 아파서 돌보지 못했는지 기운 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문에 다다르기도 전에 교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진의 심장이 살짝 떨렸고, 그녀는 서둘러 민준을 따라 들어갔다.“교수님.”심 교
유진은 이렇게 직접 몸을 움직여 무언가를 해보는 게 정말 오랜만이었다.은호와 함께했던 지난 몇 년 동안, 손만 뻗으면 다 해결되는 삶을 살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이런 육체적인 일과는 확실히 거리가 멀었다.심지어 몇 년 전, 그가 막 창업을 시작해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을 때조차도 집안의 주기적인 청소는 늘 시간제 도우미를 불러 맡겼다.페인트 한 통을 다 쓰고 나자, 유진은 뻐근해진 허리를 짚었다.편하게만 지내온 세월이 길어서인지, 몸이 금세 투덜거렸다.그녀는 복도로 나가 남은 페인트를 들여놓으려 했다.그런데 발이 조금 빨랐던 탓에, 그만 페인트 통을 걷어차고 말았다.재빨리 붙잡긴 했지만, 결국 옆집 현관 앞에 페인트가 조금 쏟아졌다.급히 걸레를 가져와 닦고 있는데, 굳게 닫혀 있던 문이 갑자기 열렸다.고개를 들며 사과하려던 순간, 익숙한 얼굴과 마주쳤다.“여기 사세요?”“왜 그쪽이 여기에…?”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입을 열었다.민준은 바닥을 한 번 보고, 이내 그녀의 뒤쪽으로 시선을 옮겼다.“그럼 오늘 이사 온 사람이 당신이었군요?”유진도 이렇게까지 우연일 줄은 몰랐다.“보시는 대로예요. 오늘부터 이웃이 됐네요.”민준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그가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단순했다. 연구실과 학교가 모두 가까워 학생들 수업과 실험을 오가기에 편리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유진은 왜 이곳일까?누가 봐도 이 환경은 젊은 여성이 살기엔 썩 적합하지 않았다. 다른 걸 떠나, 엘리베이터조차 없는 건물은 보통 선택지에서 제외되기 마련이었다.유진은 그가 가만히 있는 걸 보고, 복도를 더럽힌 걸 신경 쓰는 줄 알았다.“죄송해요. 페인트가 좀 쏟아졌는데, 금방 다 치울게요.”그녀는 서둘러 마무리했고, 금세 바닥은 깨끗해졌다.아래층으로 내려가며, 그녀는 그의 옆에 놓인 쓰레기를 가리켰다.“마침 내려가는 길인데, 이것도 같이 버려드릴까요?”민준은 사양하지 않았다. 대신 집 안으로 들어가 접이식 사다리를 하나 꺼내왔다.“벽 칠할 거면 이
은호는 가까이 다가가서야 알아차렸다.여자의 아름답던 웨이브 머리는 말끔하게 펴져 있었고, 자신이 가장 좋아하던 색으로 염색했던 머리도 다시 순수한 검은색으로 돌아가 있었다.화장도 하지 않았고, 하이힐도 신지 않았다.하얀 티셔츠 한 장과 청바지. 지나칠 정도로 수수한 차림이었다.다만… 그 눈빛만은 예전보다 한층 더 또렷해 보였다. 실연의 그늘이나 침체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만약 이게 연기라면, 은호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유진은 연기를 아주 잘하고 있었다.너무 잘해서, 그의 신경을 완벽히 건드려 버릴 정도로.유진은 미간을 찌푸렸다.그녀는 그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저 표정은 분노가 터지기 직전의 신호였다.“후.”남자가 비웃듯 코웃음을 쳤다.“근데 안목이 진짜 별로네. 내 옆에 그렇게 오래 붙어 있었으면, 그래도 기준이라는 게 좀 있어야 하지 않아? 개나 소나 다 괜찮다는 식이면, 나 같은 전 남친 체면은 어디다 두라는 거지?”“체면?”유진은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그 웃음 속엔, 희미한 비애가 스며 있었지만, 아쉽게도 은호는 그걸 보지 못했다.지금 그의 머릿속은 온통, 유진이 다른 남자에게 옅게 웃어 보이던 장면으로 가득 차 있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분노가 치밀었다.그는 이 감정을 수컷의 ‘영역 본능’ 탓으로 돌렸다.유진이라는 이 영역은, 한때 자신이 점령했던 곳이었다. 이제 필요 없어진 땅일지라도, 하찮은 개나 소 따위가 와서 표시를 남기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나 바빠. 먼저 갈게.”유진은 더 이상 그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가긴 어딜 가? 태리 집 말고는 갈 데도 없잖아. 그래도 이번엔 제법 독해졌네? 수표랑 서류까지 다 챙겨서 나가고. 뭐야, 이제 장난 좀 쳐보겠다는 거야?”유진의 가슴이 찔끔 아려왔다.그의 성질이 고약하다는 건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비뚤어지고 난폭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렇게 직접적인 말을 들으니, 아무래도 상처가 되지 않을 수는 없었다.그는, 그녀가 그저 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