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지한은 성큼성큼 거실로 들어오더니 한껏 차가운 얼굴로 그녀를 쏘아봤다.순간 심미연은 등줄기에서 땀이 흐르는 것 같았고 재빨리 핸드폰을 뒤로 감추면서 떨리는 목소리 맞이했다.“왔어?”하지만 강지한은 그녀 앞에 가만히 서서 그녀를 말없이 뚫어져라 바라만 보았다.심미연은 신하린의 회사만 생각해서 모른 척하고 다시 물었다.“아니면 먼저 올라가서 옷부터 갈아입어. 국만 뜨면 밥 먹을 수 있어.”순간 강지한은 그녀의 턱을 잡고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방금 박유진이랑 통화하는 것 같은데 왜 내가 오는 소리를 듣고 바로 끊었어? 뭔가 찔리는 게 있나 봐?”심서연이 아까 심미연과 박유진은 죽마고우이고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라온 사이인지라 박씨 가문에서는 심미연을 거의 며느리로 생각했고 심미연도 박유진을 위해 자기 목숨까지 내놓을 수 있는 정도라고 알려줬다.또한 3년 전, 박씨 가문에 재정위기가 닥치고 박유진이 행방불명이었을 때도 심미연은 박씨 가문에 가서 반드시 가문을 다시 살려내고 박유진을 찾아오겠다고 약속까지 했다고 심서연이 말했다.원래 강지한은 굳이 심미연을 뒷조사할 마음이 없었는데 최근 그녀의 행동을 고려해 봤을 때 무조건 알아봐야 했다.그러나 진실은 더욱 놀라웠다.알고 보니, 3년 전 심미연과 박유진은 혼인 신고했고 당일에 강준형이 박씨 가문에 돈 200억을 넘겼다.그렇게 박씨 가문은 다시 일어섰고 지금 이노하이브의 유일한 적수로 되었다.또한 박유진이 다시 경성으로 돌아오면서 심서연이 했던 모든 말이 사실로 증명되었다.당연히 이 모든 게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분명 다 계획되었으리라 생각했다.예전에 그는 심미연이 이토록 사모님 자리에 앉으려는 목적이 그저 허영심과 명예 때문이라고 여겼다.하여 심미연과 혼인 신고를 한 뒤, 일부러 결혼식도 올리지 않고 외부에도 알리지 않아 두 사람이 결혼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극소수였다.그래도 3년 동안 심미연은 이 일에 대해 별로 언급하지 않았고 또 줄곧 이게 그녀에 대한 벌이라고
그녀와 박유진 사이...한두 마디로 해명할 수 없다.그러다가 강지한은 배를 어루만지고 있는 심미연을 보더니 차갑게 물었다.“배는 왜 쓰다듬고 있어, 임신이라도 했어?”순간 심미연은 심장이 바닥으로 내려앉는 것 같았지만 애써 차분하게 해명했다.“그저 위가 불편할 뿐이야. 그리고 매번 조심했는데 임신했을 리가 없잖아!”어딘가 많이 당황해 보이는 모습에 강지한은 눈살을 찌푸리고 다시 말했다.“좋기는 임신이 아니어야 할 거야. 아니면 진짜 가만두지 않을 거니까!”심미연의 말대로 두 사람은 매번 열심히 피임했고 어쩌다 너무 급해서 콘돔을 사용하지 못한 날에도 이튿날 꼭 약을 먹었다.그런데도 만약 심미연이 임신한다면 그 아이의 아빠는 누구일까?심미연은 그런 강지한의 마음도 모른 채 그저 어떻게 하면 임신 사실을 속일까만 고민하고 있었다.혹시나 들키기라도 하면 분명 병원에 데려가 애를 지워버리라 할 것이다.이 아이는 오직 심미연의 아이였고 누구도 뱃속의 아이를 다치게 할 수 없다.임혜자가 국을 들고 왔는데도 심미연은 여전히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사모님, 식사하세요.”그녀의 작은 속삭임에 심미연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강지한의 팔을 끌며 말했다.“같이 올라가서 옷부터 갈아입자.”심미연은 일부러 그의 비위를 맞춰주는 척, 고분고분한 모습이었는데 강지한은 입맛을 다시다가 그녀 따라 위층으로 올라갔다.두 사람이 떠나고 나서야 임혜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강지한의 성질은 날이 갈수록 살벌해지는 것 같았는데 다행히 심미연이 마음이 넓어서 그나마 그의 화를 받아준다고 생각했다.만약 온지유였다면 진작에 집에서 뛰쳐나갔을 것이다.이토록 살가운 사모님이면 소중히 받들어 모셔도 모자랄 판에 왜 저리도 냉정하게 구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강지한이 위층에 올라가자마자 침실 문을 열어보니 은은한 장미향이 코를 간지럽혔고 침대 위에도 장미꽃으로 하트가 그려져 있었다.심미연은 강지한을 힐끔 쳐다보더니 그에게 물었다.“우리 정원에서 잘
깜짝 놀란 심미연이 고개를 들고 그를 쳐다보았다.남자는 한껏 어두운 얼굴로 그녀를 쏘아보고 있었는데 심미연은 숨을 한번 깊게 들이쉬고 낮은 소리로 해명했다.“배고파서 그러는데 먼저 먹고 하면 안 될까?”“예전에는 안 그러더니 대체 왜 그래? 설마 박유진 때문이야?”강지한은 그녀에게 따져 물었다.그의 말대로 예전에는 남자가 신호만 보내면 심미연은 순순히 협조했다.그리고 두 사람은 유달리 속궁합이 잘 맞았다.하지만 며칠 전, 그녀가 이혼 얘기를 꺼낸 후로부터 계속 남자와의 잠자리를 거절했다.이러면서 딴마음이 없다고 하니 믿을 수가 있나!강지한이 의심의 눈초리로 심미연을 빤히 쳐다보자 그녀는 온몸에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워낙 의심도 많고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가 느껴지면 바로 알아차린다.순간,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자기 배를 또다시 어루만졌다.설마 임신한 사실을 눈치챈 건 아니겠지?“왜 말이 없어? 내 말이 맞다는 건가?”강지한은 또다시 화가 치밀어 올라 당장에라도 그녀의 목을 조르고 싶었으나 겨우 참았다.심미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답했다.“그게 아니라 난 진짜 배가 고픈 것뿐이야. 그 사람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지금 절대로 강지한의 심기를 건드리면 안 된다. 아니면 신하린의 회사가 한순간에 없어지는 건 물론이고 박유진한테까지 피해가 갈 수 있다.강지한은 또다시 그녀의 얼굴을 한참 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심미연은 당황한 기색을 애써 감추고 다시 변명하려던 순간, 강지한의 핸드폰이 울렸다.불구덩이 속에서 겨우 빠져나온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급히 강지한에게 말했다.“핸드폰!”그러자 강지한은 쓴 미소를 지으며 다시 차갑게 경고했다.“심미연, 좋기는 방금 했던 말들이 거짓이 아니어야 할 거야. 아니면 진짜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확인해 보니 온지유한테서 걸려 온 전화였다.아까까지 살벌하던 그의 눈빛이 순간 핑크색 하트로 변했다.심미연이 다른 남자랑 통화만 했는데도
심미연 이 여자, 설마 지금 강지한한테 꼬리치려는 건 아니겠지?어림도 없어!“저녁에 회사로 또 나가봐야 해서 시간이 없어.”“아니면 내 옆에서 회사 일 보면 안 될까? 지한 씨, 나 너무 무서워...”온지유는 말하다가 눈물을 글썽거렸다.“이따 저녁에 다시 보자. 지금 밥 먹어야 해서 끊을게.”강지한은 눈살을 찌푸렸다.이렇게 시도때도 없이 우는 온지유가 가끔은 짜증났다.하지만 이 시각, 수화기 너머의 온지유는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라 핸드폰을 꽉 쥐었다.심미연, 그 여우같은 계집애가 강지한 앞에서 무슨 험담을 늘어놨기에 여기로 오지도 않겠다고 하지?간병인 안현자는 밥을 배달해 오다가 그녀의 어두워진 낯빛을 보고 순간 깜짝 놀라 물었다.“지유 씨...”이때 온지유가 갑자기 옆에 있던 물컵을 그녀에게 던지며 불같은 화를 냈다.“전 사모님이지 지유 씨가 아니에요!”안현자는 어깨를 맞고 그만 손에 힘이 풀려 들고 있던 쟁반 위의 음식들을 바닥에 쏟으면서 순간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쟁반 하나를 못 들어서 이 난장판을 만들어요? 이런 쓸모도 없는 사람을 간병인이라고, 그냥 꺼져요!”온지유는 신경질적으로 안현자에게 욕설을 퍼부었다.강지한에게 받은 설욕을 전부 그녀에게 풀었다.그렇게 안현자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쫓기듯 병실 밖으로 뛰쳐나왔다.더 있었다가는 목숨마저 위험할지도 모른다.정말 이상한 여자라니까.안현자가 떠나간 뒤에도 온지유는 분이 안 풀려 병실안의 물건들을 집히는 대로 다 깨부셨다.심미연 저 빌어먹을 계집애, 감히 온지유가 입원해 있는 틈에 강지한한테 꼬리치려 들다니!...박씨 가문의 식사자리.식탁에는 박유진의 부모님과 심서연의 부모님이 앉아 있었다.박유진이 파혼하겠다는 소식을 듣고 심서연의 부모는 재빨리 자기 딸을 데리고 여기까지 쫓아왔다. 하여 식사 분위기는 다소 어두웠다.박지훈은 박유진을 한번 힐끔 보더니 먼저 입을 뗐다.“저희쪽에서 먼저 파혼을 제기했던 원인은 확실히 제가 점쟁이한테 여쭤보고 두
이미자는 눈살을 찌푸리며 불쾌한 목소리로 말했다.“그 일은 나중에 처리하면 안 되겠니? 지금은 너와 서연의 일을 이야기해야지!”사실 그녀가 마음에 들어 하는 건 심미연이었다.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와는 고부가 될 인연이 없었다.이미자는 심서연과의 결혼도 바라지는 않았지만 박씨 가문과 심씨 가문은 오랜 이웃이자 사업 파트너였기에 혼사가 깨지면 바렐 그룹도 큰 손해를 볼 터였다.그녀는 그런 결과를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들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이기적인 마음도 있었다.결정을 내릴 수 없었던 이미자는 아들에게 결정권을 넘기기로 했다. 어차피 결혼 생활은 아들이 할 것이고 아들의 감정이 가장 중요했으니까.“잠깐 택배 받고 올게요. 금방 올게요!”박유진은 말을 마치자마자 황급히 나갔다.“유진 오빠, 같이 가!”심서연도 따라 일어서며 다급하게 불렀다.그러자 심동현은 그녀를 쏘아보며 호통쳤다.“앉아!”심서연은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아빠!”‘어렵게 유진 오빠를 만나서 좀 더 같이 있고 싶은데 아빠는 왜 따라가지 못하게 하는 거야.’조은하는 심서연의 팔을 잡아끌며 말했다.“얌전히 앉아 있으렴!”박지훈은 입술을 오므렸다. 겉으로는 온화한 표정을 유지했지만 속으로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심서연은 버릇없이 자랐고 속이 좁았다. 그런 아이가 며느리로 들어온다면 아들에게는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발목을 잡을 게 뻔했다.남자에게 좋은 아내를 만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었다.현명한 아내는 남편이 더 높이 올라 더 넓은 세상을 볼 수 있도록 돕지만 어리석은 아내는 남편의 발목을 잡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며 패배자로 만들어 버린다.심씨 가문의 두 딸 중 아들이 심미연과 결혼한다면 그의 앞날은 탄탄대로일 것이지만 정말 심서연과 결혼한다면 그의 미래는 뻔했다.“엄마, 난 그냥 누가 오빠한테 택배를 보냈는지 궁금해서요.”방금 박유진이 허둥지둥 나가는 모습을 보고 그녀는 심미연이 보낸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심미연 그 몹쓸 년은 결혼까
집사는 발걸음을 뒤로 물리며 그녀가 내민 손을 피했다.박씨 가문에서 이미 파혼을 제안했는데, 이 심서연 씨는 어디서 이런 자신감으로 자신을 이 집의 안주인이라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택배를 빼앗지 못한 심서연은 극도로 분노하며 손을 들어 집사를 때리려고 했다.“넌 박씨 가문에서 기르는 개일 뿐이야! 주인도 못 알아보는 주제에!”박유진은 참을 수 없어 그녀의 손목을 꽉 잡고 호통쳤다.“심서연, 당장 입 다물어!”그도 집안의 도우미들을 결코 낮게 본 적이 없는데 그녀가 무슨 자격으로 그들을 욕한단 말인가.심서연은 손목이 부러질 듯 아파 엉엉 울었다.“박유진, 감히 날 괴롭혀! 미연이가 우리 사이를 이간질한 거 맞지!”그녀의 말에 박유진은 마음이 심란해졌다.“너는 꼭 모든 일에 미연이를 끌어들여야겠니! 미연이가 대체 무슨 잘못을 했다고 네게 이런 모함을 당해야 해?”분명 심미연은 억울하게 누명을 쓴 사람인데 심서연의 입에서는 마치 극악무도한 죄인처럼 매도당하고 있었다.심서연은 경악한 눈으로 눈앞의 온화한 남자를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봤다.“오빠가 감히 그 천한 계집 때문에 나한테 소리를 질러! 박유진, 너 아직도 마음속에 그년을 품고 있는 거지?”박유진은 천천히 마음속의 분노를 가라앉히고 손을 놓았다.“약혼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생각해 볼게. 생각 정리되는 대로 연락할 테니 미연이를 찾아가거나 방해하지 마. 오늘 같은 일은 두 번 다시 없었으면 좋겠어!”심미연을 위해 그는 타협했다.그의 바람은 언제나 그녀가 행복하게 사는 것이었다.비록... 그녀를 행복하게 해 주는 사람이 자신이 아니더라도 말이다.그의 말을 똑똑히 들으며 심서연은 가슴속의 분노가 온몸을 덮치는 것을 느꼈다.박유진이 심미연 때문에 자신에게 경고하다니.“그리고 어머니께서는 조용히 계시는 걸 좋아하시니 앞으로는 어머니를 방해하지 마.”박유진은 분노로 일그러진 심서연의 얼굴을 못 본 척하며 나지막이 말했다.“식사 끝나면 돌아가. 바렐 그룹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박지훈은 복잡한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아 박유진을 보며 말했다.“이건 네 인생이 걸린 중요한 문제이니 네 생각을 말해 보거라.”박유진은 담담하게 대답했다.“하겠습니다.”어차피 심미연과 결혼할 수 없다면 누구와 결혼해도 상관없었다.그의 대답에 심서연은 마음이 설렜다.이제 드디어 박유진과 결혼해 박씨 가문의 안주인이 될 날이 머지않았기 때문이다.“천천히 드세요. 저는 서재에 가서 이메일 답장 좀 하고 오겠습니다.”박유진이 부드럽고 예의 바르게 말했다.그는 빨리 택배를 뜯어보고 싶었다.“나도 갈래!”심서연은 박유진을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보았다.그녀는 한시도 그의 곁에서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서연아, 그만 좀 해!”심동현이 낮은 목소리로 꾸짖었다.“유진은 일하러 가는 데 방해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그는 박유진이 이 결혼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사랑에 빠진 그의 딸은 박유진의 마음속 거부감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유진 오빠, 같이 가면 안 돼?”심서연은 집에서 제멋대로 행동하는 데 익숙해져 부모님도 두려워하지 않았다.게다가 곧 박유진과 결혼할 사이인데 함께 시간을 보내며 정을 쌓는 게 뭐가 잘못됐다는 말인가?박유진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부드럽지만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회사 기밀이 관련된 일이라 개인적인 감정으로 처리할 수 없어.”“나는 봐도 몰라. 그러니 회사 기밀을 누설할 걱정은 안 해도 돼.”심씨 가문으로 돌아온 후, 그녀는 먹고 마시고 놀기만 했을 뿐 회사에는 단 하루도 나가지 않았다. 그러니 재무제표는 물론 전문 용어는 외계어처럼 느껴질 뿐이었다.어차피 집에 돈이 있으니 일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앞으로는 또 박씨 가문의 안주인이 될 테니 더더욱 일할 필요가 없었다. 솔직히 아무것도 몰라도 상관없었다.박유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겉으로는 표정 변화가 없었지만 속에서는 분노가 용암처럼 부글거리고 있었다. 마치 끈질긴 파리처럼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심서연은 정말 짜증
소포 안에는 상자가 하나 있었다. 상자를 꺼내 열자 카드 한 장이 떨어져 나왔다.상자를 내려놓고 카드를 집어 들자 박유진은 카드에 적힌 '심'자를 한눈에 알아보았다.기쁜 마음에 얼른 상자를 열어보니 안에는 넥타이가 들어 있었다.조심스레 넥타이를 꺼내 든 그의 마음은 행복으로 가득 찼다.심미연이 가장 좋아하는 색인 걸 보니 그녀가 보낸 게 분명했다.그는 넥타이를 맨 후 휴대폰으로 셀카를 찍었다.심미연에게 사진을 보내고 싶었지만 결국 그만두었다.그녀에게는 이제 강지한이 있으니 방해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조용히 선물을 간직하기로 했다.*강지한은 오랜만에 심미연이 해 준 음식을 먹었다. 그래서인지 저녁을 유난히 많이 먹고 와인 한 병도 다 비웠다.물론 와인은 전부 그 혼자 마셨다.임신 중인 심미연은 술을 마시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다행히 기분이 좋았던 강지한은 심미연이 물을 마시는 것에 대해 굳이 트집을 잡지 않았다.저녁 식사 후, 심미연은 강지한의 손을 잡고 소화를 시키기 위해 산책을 나갔다.정원에는 꽃이 많이 심어져 있어 꽃향기가 코를 찔렀다.심미연은 고개를 들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감탄했다.“향기 너무 좋다!”강지한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렴풋한 그림자 속에서 심미연의 얼굴은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떴다.이 여자의 얼굴은 의심할 여지 없이 아름다웠다.그렇지 않았다면 로펌의 사람들도 그렇게 그녀의 미모와 재능을 질투하지 않았을 것이다.“지한 씨, 이 꽃들은 당신이 좋아하는 꽃이야?”정원의 꽃들은 모두 강지한이 심은 것이었다.그녀는 이 꽃을 심은 그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좋아하는 꽃이라서 심은 걸까?남자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너무 많은 걸 알려고 하지 마. 다쳐!”정원의 모든 꽃은 예전에 죽은 형의 것이었다.이전에는 아무도 그 꽃들의 유래를 묻지 않았지만, 지금은 알아도 말해줄 생각이 없었다.그렇지 않으면 심미연이 알게 되
심미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한 기색을 담아 물었다.“무슨 일이길래 그래요?”이지연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일부러 속도를 늦추며 차분하게 말했다.“온지유 씨가 도망쳤어요.”“언제요?”심미연의 눈빛이 반짝이며 날카로워졌다. 누가 이 일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스쳤다.“어젯밤에요.”이지연의 목소리는 한껏 가라앉아 있었고 자책감이 가득 배어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방심했어요.”심미연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미안해하지 마요. 이건 지연 씨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이지연은 입술을 꼭 깨문 채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제가 당장 찾아올까요?”심미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휴대폰을 천천히 만지며 생각했다.“잠깐만 생각 좀 해볼게요.”어젯밤 강지한이 교통사고를 당한 장면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혹시 온지유의 실종과 강지한이 관련 있는 걸까? 만약 강지한이 온지유를 구한 거라면 도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은 거지? 끝도 없이 밀려드는 의문들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참, 보스. 어젯밤에 스승님 못 보셨어요?”이지연이 물었다.심미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사실은 봤었다. 그녀는 진운혁이 차를 몰고 떠나는 걸 보고 따라붙었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그럴 리가요? 제가 분명히 확인했는데... 스승님께서 이진영 씨랑 같이 식사하고 계셨어요!”이지연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심미연은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렸다.문득 이전에 마주쳤던 진운혁의 모습들이 떠올랐고 그 순간 한 가지 의심이 그녀의 마음속을 훑고 지나갔다.‘그때 내가 본 스승님은... 정말 스승님이 맞았을까? 만약 누군가가 스승님을 사칭하고 있었다면 그 목적은 대체 뭘까?’그때 이지연의 흥분한 목소리가 심미연의 생각을 끊어냈다.“보스! 새로운 정보를 발견했어요!”“무슨 정보예요?”심미연은 본능적으로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귀를 기울이자 이지연의 들뜬 목소
백선영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진은숙의 팔을 살짝 끌어당기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이제 가요.”진은숙은 손바닥 위에 놓인 봉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망설이면서 입을 열었다.“이건... 어쩌죠?”백선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 난처한 상황을 심미연에게 넘기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봉투를 조심스럽게 심미연 앞에 내려놓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모님, 마음은 충분히 받았지만... 이 돈은 받을 수가 없어요.”심미연은 미소를 지으며 눈길을 봉투 위로 흘렸다.“오빠가 직접 드린 건데 마음 편히 받으세요. 저한테 돌려주실 필요는 없어요. 자, 얼른 가서 일 보세요. 저 벌써 배가 고파졌는걸요.”그러나 말하다가 알 수 없는 서운함이 스르르 마음 한쪽에 올라와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박유진은 예전에 밤하늘을 보며 수없이 약속했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그녀와 아이를 평생 지키겠다고. 그런데 지금 그 약속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금세 꺼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오빠, 나랑 약속한 거 잊은 거야?’“정말 감사합니다, 사모님! 사모님과 사장님 두 분 다 참 요즘 보기 드물게 좋은 분들이세요. 두 분, 좋은 일만 가득하시고 영원히 행복하시길 빌게요!”진은숙은 기쁜 얼굴로 연신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 백선영의 팔을 붙잡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오늘 정말 행운이 따랐다 싶었다. 이렇게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다니.심미연도 가볍게 한숨을 쉬고 나서 주방으로 들어가 컵에 따뜻한 물을 따라 목을 축였다. 어쩐지 목이 바싹 마른 게, 감정이 몰려서 그런 걸까.막 물을 다 마셨을 무렵 문밖에서 귀엽고 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 어디 있어요?”그 소리는 마치 봄날에 막 피어난 꽃처럼 듣는 사람 마음을 몽글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심미연은 표정이 풀렸고 얼른 얼굴을 내밀며 따뜻하게 웃었다.“우리 태하, 엄마 여기 있어!”심태하는 쏜살같이 달려와 그녀 품에 안겼다.“엄마, 아빠가 나 버렸어요!”심미연은 깜짝
백선영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모깃소리만큼이나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사장님께서 떠나시기 전에... 집에 안 계시는 동안 꼭 사모님과 도련님을 잘 챙기라고 당부하셨습니다.”진은숙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맞아요, 맞아요! 사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바로 캐리어 들고 곧장 나가셨거든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마음속으로 박유진의 말뜻을 곱씹어 보았지만 마치 안개 속을 걷는 듯 선명하게 와닿지 않았다.“그런데요, 사모님...”진은숙이 심미연을 흘끗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눈빛에는 망설임과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왜 그러세요?”심미연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지만 말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언제나 그래왔듯 도우미 아주머니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었고 태도가 마치 봄바람처럼 따뜻하고 너그러웠다.진은숙은 잠시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더니 마음을 굳힌 듯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어젯밤에 제가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러 나왔는데 계단 모퉁이에서 사장님을 마주쳤었어요. 사장님도 물 마시러 나오신 것 같았어요.”곁에 서 있던 백선영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저도요!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길래 문 열고 나왔더니 사장님이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계셨습니다.”심미연은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어젯밤에 오빠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진은숙은 마음을 가다듬고 이어서 말했다.“불빛이 비쳐서 얼핏 봤는데 사장님 눈가가 벌겋게 부어 있더라고요. 꼭 방금 울기라도 한 사람처럼요. 아마 제가 눈치챌까 봐 인사만 툭 하고는 곧장 자리를 피하셨어요. 전 그냥 물만 마시고 방으로 돌아갔는데 보니까 사장님은 그 자리에 그대로 멍하니 서 계셨어요. 제가 방에 들어간 뒤에도 안 들어오시더라고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덧붙였다.“오늘 아침에 사장님께서 나가신 뒤에 서재를 청소하러 들어갔는데 휴지통에 담배꽁초가 가득 쌓여 있었어요. 어젯밤 내내 잠도 못 주무시고 담배만 피우셨던 것 같아요..
휴대폰 화면이 켜지고 그 익숙하면서도 가슴을 죄는 번호가 뜨는 순간, 박유진의 심장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움켜잡힌 듯 조여들었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속에서 일렁이며 축축한 솜처럼 뭉쳐져 목덜미를 틀어막았고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말은 더더욱 나올 리 없었다.그 번호는 마치 꿈결 속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유령처럼 소리 없이 다가와 그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의 고통과 갈등을 다시 불러냈다.박유진은 손을 떨며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다가 한참을 망설인 끝에 결국 전화를 받지 않기로 했다.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공기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긴장감과 묘한 압박이 가득했다. 박유진은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고 손끝으로 천천히 휴대폰 키보드를 두드려 문장을 써 내려갔다.[진성에 가서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돌아가면 다시 이야기하자. 그래도 되지?]그 메시지엔 그의 복잡한 심경이 담겨 있었다. 현실을 피하고 싶은 마음도, 언젠가 다시 마주하길 바라는 희미한 기대도 모두 그 짧은 문장 안에 섞여 있었다.메시지 전송을 마친 박유진은 망설임 없이 전원을 꺼버렸고 휴대폰을 한쪽으로 툭 던졌다. 마치 그렇게 하면 마음속 어지러운 생각들까지 함께 던져버릴 수 있을 것처럼.주변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텅 빈 공간엔 그의 심장 뛰는 소리만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규칙적이고도 묵직한 박동이 마치 그 존재를 스스로 확인하려는 듯했다.박유진은 눈을 감았다. 피로한 몸은 본능적으로 가장 편한 자세를 찾아갔고 그 짧은 정적 속에서 조금이나마 위로를 찾고자 했다.비록 밤새 한숨도 못 잤고 눈은 충혈되어 있었지만 정신만큼은 유난히 또렷했다.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지탱해 주듯 그는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하지만 피하고 싶을수록 심미연의 모습은 그의 머릿속에서 더욱 선명해졌다. 그녀의 미소는 때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순수하고 따스했으며 때로는 눈빛 하나로도 사람 마음을 뒤흔드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또 부끄러워하던 그 순간순간들
박유진은 자신의 앞날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심미연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는 언제나 그녀의 편이 될 것이란 사실.만약 그녀가 아이를 데려오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그는 가진 것을 다 내어주어서라도 그녀를 돕고 그 아이를 보살필 것이다. 마치 자신의 친딸인 양 지극정성으로.박유진은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은 심미연을 사랑하고 그녀의 아이와 그녀가 지닌 모든 것을 함께 안아줄 준비가 되어 있음을.심미연의 눈가는 어느새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녀의 두 손은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살고 싶어서 지푸라기를 붙잡고 있는 것처럼 박유진의 옷깃을 꼭 움켜쥐었다. 수많은 감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그녀가 박유진에게 진 빚은 너무나도 많고 무거웠다. 그 빚을 다 갚기 위해서는 평생이라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몰랐다.“시간이 늦었으니까 이젠 좀 쉬어. 나도 방으로 돌아갈래.”박유진의 목소리엔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미세한 떨림이 묻어났다. 그는 본능적으로 심미연을 더욱 꼭 안았다. 마치 그녀를 자신 뼛속 깊이까지 끌어안고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어쩌면 이 다정함이 그들 사이 마지막 남은 따뜻함이 될지도 모른다...박유진의 마음속은 쓸쓸함으로 가득했다. 머릿속 이성은 매서운 바람처럼 그를 휘감으며 이제는 놓아줄 때라며 끊임없이 속삭였다.하지만 감정은 뿌리 깊은 덩굴처럼 박유진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얼마나 바랐던가. 단 한 순간이라도 더 심미연의 곁에 머물 수 있기를. 이 찰나의 시간이 남은 생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만 있다면...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박유진의 얼굴을 어루만졌고 그녀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박유진의 마음속 한기를 모두 녹이는 듯했다.심미연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부드럽게 말했다.“이생에 오빠를 만나 알아가고 수많은 인파를 뚫고 함께 걸을 수 있었던 건... 정말 큰 복이었어. 앞으로 어떤 길을 가더라도 우리 손 놓지 말고
박유진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눈빛이 그녀를 감쌌고 낮지만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 말해 봐.” 심미연은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과 마주친 순간, 마음 한켠에서 설명할 수 없는 두려움이 피어올랐다. 마치 오래도록 감춰온 비밀이 이제야 드러날 것만 같은 예감처럼. “왜 그래, 미연아?” 박유진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우면서도 따뜻했다. 그녀의 불안을 감싸 안으려는 듯 아주 섬세하게 묻는 말이었다. 심미연은 입을 열 듯 말 듯 망설였다. 떨리는 입술이 달싹이기만 할 뿐 말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마음 깊은 곳에서 끌어올리고 있는 건 누구에게도 쉽게 털어놓을 수 없던 진실이었다. 그러다 마침내 결심한 듯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강지한의 딸, 강상미. 들어본 적 있지?” 박유진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 아이가 왜?” 툭 튀어나온 말이었지만 그의 마음속에 조용한 파문이 일었다. ‘미연이랑 강지한의 딸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왜 지금에서야 그 아이를 말하는 걸까.’ 심미연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다짐하듯 눈을 감았다가 뜨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사실 예전에 내가 잃어버린 내 딸... 그 애는 세상을 떠난 게 아니었어.” 그 말 한마디를 꺼내기 위해 그녀는 거의 모든 용기를 다 쏟아부었다. “정말이야?” 박유진의 목소리는 놀라움에 젖어 있었다. 그의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그때 너 분명히 말했잖아. 아이 숨 안 쉬고 있었다고. 직접 확인했었잖아... 확신했었어.” 그 순간, 박유진의 머릿속을 스친 단 하나의 가능성. ‘설마... 지금 미연이가 말하려는 게... 그 아이가 강상미라는 말이야?’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껏 맞춰지지 않던 조각들이 하나로 이어지고 복잡하게 얽혔던 퍼즐이 비로소 그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박유진의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손끝이 얼어붙고
박시훈은 눈을 깜빡이며 바로 앞에 있는 얼굴을 바라봤다.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예쁜 여자가 있을 수가 있지?’ 심장이 터질 듯 뛰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심장 박동이 너무 빠른데요? 정상은 아닌 것 같네요.” 심미연은 이마를 찌푸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박시훈은 민망해서 땅속으로 숨어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내가 왜 비정상이야... 완전 정상이거든...’ 심미연은 아무렇지 않게 그의 상처를 확인했다. 상처는 붉게 부어 있었고 피도 조금 배어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약을 꺼내 상처 위에 다시 발라주었다. 상처는 쓰라렸지만 박시훈은 이 순간이 영원히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곁에 있는 지금이 너무도 소중했다. 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상처를 감싸고 도구들을 하나씩 정리했다. 마무리를 한 뒤 장갑을 벗으며 병실을 나갈 준비를 했다. “저... 방금 야식 시켜놨는데... 같이 먹고 가주면 안 돼요?” 박시훈은 괜히 목이 메여 말끝이 흐려졌다. 자신이 이렇게 소심한 사람이었다니, 스스로도 놀라웠다. ‘내가 왜 이 사람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거야...’ “저는 밤에 야식 먹는 습관 없어요.” 심미연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야식 너무 자주 먹지 마요. 건강에 안 좋아요. 전 이만 갈게요. 야식 먹고 푹 쉬세요.” 그녀의 말에 박시훈은 마치 한겨울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얼어붙었다. 심지어 발끝까지 저릿했다. 그녀가 간다. 그를 남겨두고 그냥 떠나버린다. 속이 텅 빈 것처럼 허전했다. 심미연은 이미 등을 돌린 채 병실을 나서고 있었고 박시훈의 낙담한 얼굴은 그녀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병실을 벗어난 심미연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깊게 숨을 들이켰다. 몇 시간째 이어진 수술에, 온몸이 녹초가 된 상태였다. 하지만 강지한을 살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로비로 걸어 나왔을 때 문 앞에 서 있는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심미연의 시선이 하얗게 눈처럼 샌 강준형의 머리카락에 머물렀다. 가슴 어딘가가 저릿하게 아려왔다. 만약 시간이 되돌릴 수 있다면. 그저 아무 걱정 없이 웃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땐 주저 없이 말했을 것이다. ‘네. 할게요.’그때 그녀는 강지한을 사랑했고 그의 가족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더 이상 강지한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리고 강준형이 걱정된다고 해서 그 바람을 무조건 들어줘야 할 이유도 없었다. 곁에서 조용히 그녀를 훔쳐보던 가정부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사모님은 역시 마음이 떠나신 거구나...’ ‘이러다 어르신 또 며칠을 우울하게 보내시겠네...’강준형도 그녀의 침묵에서 모든 걸 느낄 수 있었다. 인연이란 게 억지로 붙잡는다고 이어질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비록 아쉬움은 남지만 그 역시 그녀의 선택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할아버지, 사실 저랑...”“딩.” 심미연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려는 순간,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고개를 든 그녀는 곧장 부드러운 눈빛을 머금은 박유진과 눈이 마주쳤고 그 말은 다시 목구멍 깊숙이 삼켜졌다. “오빠, 여긴 어떻게 왔어?”박유진은 따뜻한 미소로 대답했다. “너 데리러 왔어.” 그리고 곧 예의를 갖춰 강준형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강준형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유진아, 너랑 미연이...?” 어딘가 모르게 다정해 보이는 둘의 분위기. 설마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의심이 스쳤다.“할아버지, 제가 차까지 모셔다드릴게요.” 심미연은 사실 내일 박유진과 혼인신고를 하러 갈 거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조금 전, 강준형이 ‘강지한과 다시 잘해봤으면 좋겠다’고 했던 말이 떠오르자 그 말을 도저히 꺼낼 수 없었다.‘말하지 말자. 괜히 말했다가 할아버지 마음만 상할 수도 있어.”그 순간, 박유진의 손이 저절로 움켜쥐어졌다. ‘할아버지한테
하지만 정작 온지유의 칼끝을 막나낸 사람은 그다지 친하다고 할 수 없었던 박시훈이었다. 심미연의 진지한 얼굴을 본 강준형은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걸 단박에 알아챘다. 더는 묻지 않았다. 그녀는 조심스레 그를 의자에 앉히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만 앉아 계세요. 옷만 갈아입고 금방 나올게요.” “그래. 다녀오너라.” 강준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가볍게 흔들어 보냈다. 심미연이 등을 돌려 복도로 사라지자 그는 그녀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그리고 이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곁에 서 있던 가정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요즘 사모님이 예전보다 훨씬 더 예뻐지신 것 같아요. 성격도 훨씬 부드러워지셨고요. 만약 사모님이 도련님과 다시 재결합하신다면 어르신께서도 도련님 혼자 남을까 봐 걱정 안 하셔도 될 텐데요.” 강준형은 그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다. 미연이가 돌아온다면 지한이도 지금처럼 외롭진 않겠지. 상미도 엄마 손길이 필요하고... 지한이가 아무리 잘 챙긴다 해도 아빠는 아빠일 뿐이지. 엄마처럼 섬세하긴 어렵잖니. 게다가 지한이는 이노하이브를 이끄는 입장이라 상미를 온전히 돌보기엔 시간도 턱없이 부족하고 말이다.” “나중에 사모님께 슬쩍 한번 말씀드려보시는 건 어떠세요?” 가정부는 늘 심미연을 좋게 봐왔다. 도련님과 이혼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도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요즘 세상에 외모, 인품, 성격, 효심까지 갖춘 여자를 다시 만나긴 정말 쉽지 않으니까. 강준형은 또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분위기 봐서 말해보지. 미연이가 듣기 싫어하면 더는 꺼내지 않을 거다.” “네. 그게 좋을 것 같아요.” 가정부도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옷을 갈아입은 심미연이 다시 나타났다. 그녀는 다가와 손을 내밀며 말했다. “가시죠. 할아버지. 제가 집까지 모셔다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