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미연아, 너도 이제 결혼한 지 오래되었는데 아이 가질 때도 되지 않았어?”그녀의 물음에 심미연은 씁쓸한 얼굴로 답했다.“지금 무엇보다 일이 더 중요해서 당분간 아이는 안 가지려고요.”강지한과 곧 이혼할 텐데 임신한 사실을 누구한테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또한 혹시나 강지한의 귀에 들어가는 날에는 무조건 아이를 지우라고 할 것이다.그건 절대 안 된다!“여자는 시집갔으면 남편에게 내조하고 자녀를 잘 교육하는 현모양처로 살아야 해. 사업은 남자한테 맡기면 되잖아. 미연아, 너도 알다시피 강지한 씨는 경성에서 지위가 높은 데다가 얼굴도 잘생겨서 그 사람의 침대에 기어오르려는 여자들이 적지 않을 거야. 넌 강씨 가문의 사모님으로서 어떻게 해야 그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하고. 그러려면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있어야 할 거야.”이미자는 비록 지금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지만 그녀도 부잣집 사모님이라 이 바닥의 남자들이 얼마나 야박하고 냉혈한 사람인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요 며칠, 강지한과 온지유의 뉴스가 거의 매일이다시피 보도되는데 당연히 지금 제일 괴로운 사람이 심미연이라고 생각했다.재벌 가문에서 제일 중요시하는 게 대를 잇는 건데 심미연더러 아이를 낳으라고 한 목적도 그녀가 강씨 가문에서 빨리 자리를 잡는 걸 돕기 위해서였다.그녀의 말에 심미연이 싱긋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고민해 볼게요.”심미연은 이미자와 이런 주제로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상대방은 박유진의 어머니이자 예전에 자신을 친딸처럼 아껴준 사람이라 참을 수밖에 없었다.이미자는 젓가락을 놓고 자기 반지를 어루만지며 다시 말을 이었다.“이 사회는 매우 현실적이고 냉혹해. 아마 네가 나이가 좀 더 들어야 완전히 이해하겠지만 젊었을 때 추구했던 사랑과 설레는 느낌은 네가 좋은 삶을 살아가는 데 아무런 도움도 못 돼. 미연아, 그러니까 여기서 포기하지 마!”심미연도 이런 말을 하는 목적이 다 자신을 위해서란 걸 알고 있다.하지만 우스갯소리로
남자는 한껏 어두운 표정으로 다시 심미연을 향해 소리쳤다.“심미연, 당장 나오라니까!”손목을 너무 세게 잡아당겨 아픈 데다가 손잡이를 잡고 있던 한쪽 손에도 점점 힘이 빠졌다.바로 이때, 누군가가 강지한을 힘껏 밀치며 그에게 욕설을 퍼부었다.“둘이 한 여자를 괴롭히는 건 너무 비겁한 거 아니에요?”예상치 못한 상황에 강지한은 뒤로 물러나면서 자기도 모르게 심미연의 팔을 놓치게 되었다.그렇게 엘리베이터 문은 닫혔다.문이 닫히는 순간 강지한은 심미연이 옆의 사람에게 초조한 얼굴로 뭐라 말하는 걸 발견했다.온지유는 입술을 깨물다가 조심스레 강지한에게 말했다.“지한 씨, 난 여기까지 배웅할게. 올라가서 쉬어야겠어.”말을 마친 뒤 재빨리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강지한도 어두운 얼굴로 그러라고 답했다.그러다가 문득 온지유가 그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미연 씨의 외할머니도 이제는 병원에 안 계실 텐데 대체 누구 보러 왔지? 한번 가볼까? 혹시나 이상한 사람이라도 만나서 미연 씨가 다치면 어떡해?”바로 이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그녀는 강지한의 팔을 살짝 잡아당기며 되물었다.“지한 씨, 같이 올라가 보지 않을래?”강지한은 잠시 고민하더니 다시 답했다.“먼저 병실에 가 있어. 난 일이 있어서 회사에 가봐야 할 것 같아.”“미연 씨를 기다리지 않고?”온지유는 일부러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물었다.“자꾸 나랑 미연이 일에 참견하지 마! 내가 알아서 잘 처리할 테니까!”강지한은 차갑게 말한 뒤 뒤돌아섰다.“지한 씨, 아직 지한 씨한테 말 못 한 사실이 하나 있어...”온지유는 떠나가는 그의 뒤에 대고 다급히 말했다.그러자 강지한이 발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려 그녀에게 말했다.“심미연에 관련된 일은 내가 알아서 조사할 테니까 나에게 알려줄 필요 없어!”온지유는 그의 말에 자기도 모르게 두 주먹을 꽉 쥐었다.강지한이 요즘 심미연에게 홀리기라도 했는지 자기 말을 전혀 따라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강지한은 자리를 떴다.온지유가 화
아무래도 비서를 바꿔야겠다. “우연히 식사 자리에서 만났는데 술 한 잔 하기로 했어. 근데 내가 주량이 너무 약해서 마시다가 병원에 입원하게 된 거고.”박유진은 아주 가볍게 설명했다.심미연도 왠지 그가 말하기 싫어하는 것 같아 더는 묻지 않고 의자에 앉았다.“지금은 좀 어때? 괜찮아?”사실 아까 이미자가 박유진이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리를 듣고 난 뒤로부터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분명 자기 때문에 강지한이 박유진에게 그런 짓을 했을 텐데 강지한한테 화나는 것보다 박유진에게 드는 죄책감이 더 컸다.“난 멀쩡하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말을 마친 뒤 박유진은 싱긋 미소를 짓더니 음료수 뚜껑을 따서 그녀에게 건넸다.“입이 너무 말라 보이니까 이거라도 먼저 마셔.”심미연은 건네받은 뒤 한 모금 마셨다.“얼굴이 많이 핼쑥해졌어. 아직도 입덧이 심해?”박유진은 그제야 가까운 거리에서 심미연의 얼굴을 보게 되었는데 예전보다 많이 야윈 그녀에게 걱정스레 물었다.그러자 심미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답했다.“입덧이 아니라 그냥 요즘 일이 너무 바빠서 못 먹고 못 자서 그래.”“넌 지금 임산부야. 아무리 그래도 뱃속의 아이를 먼저 생각해야지.”박유진은 원래 그녀더러 힘들면 일을 전부 그만두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어차피 자기 말은 듣지 않을 것 같았다.지금 젊은 사람들은 삶에서 일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하지만 만약 심미연이 자기 여자였다면 절대 그녀를 힘들게 일 시키지 않을 것이다. 일보다 사람 목숨이 더욱 중요하니까.“알아.”심미연은 자기 배를 어루만지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매번 아이에 대해 말할 때마다 그녀는 반짝이는 눈빛과 모성애가 가득한 모습을 보였는데 박유진도 그런 모습이 너무 좋아 한참 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만약 그들이 헤어지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유진 씨, 유진 씨가 입원했다는 소리를 듣고 내가 돌봐주러 왔어!”귀청을 찢을 듯한 목소리가 들리자 심미연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박유진은 재빨리 핸드폰
박유진은 단번에 그녀의 손을 잡아당겨 자신의 품에 안더니 심서연을 향해 차갑게 경고했다.“넌 닥쳐! 만약 일을 크게 만들면 너랑 바로 파혼이야!”그 말에 심서연이 고개를 들고 그에게 물었다.“유진 씨, 지금 이딴 계집애를 돕기 위해서 우리 결혼으로 나를 협박하는 거야?”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심서연은 당장 어딘가에 분풀이해야 할 것 같았다. 어렸을 때 그녀는 심미연에게 버려진 뒤 어느 한 시골로 팔려 가 10년 동안 힘들게 살아왔다.그녀가 고생하고 있을 때 심미연은 심씨 가문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잘 먹고 잘살았는데 이게 평생 심서연한테는 뼈에 사무치는 한으로 남았다.박유진은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남자이고 또 곧 자기 남편이 될 사람이다. 박유진이 심미연을 얼마나 아끼는지 두 눈으로 직접 본 적이 없는데도 질투 나 미칠 지경이었는데 그 모습을 오늘 눈앞에서 보게 되자 당장에라도 달려가 그녀의 목을 졸라 죽여버리고 싶었다.박유진은 살기가 돋친 심서연의 눈빛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심미연과 두 사람을 비교하게 되었다.심미연의 눈빛은 티 없이 맑고 깨끗했지만 심서연은 포악하고 험상궂어 보였다.“유진 씨, 아직도 심미연 그 빌어먹을 계집애를 생각하는 거야?”남자의 시선은 분명히 심서연한테로 향하고 있지만 얼굴을 보면 분명 다른 생각하고 있었다.고민할 필요도 없이 그 사람은 심미연이라고 생각하니 짜증 나 미칠 것 같았다.박유진은 심미연에게 욕설을 퍼붓는 심서연 때문에 가슴이 아팠고 또 그녀의 저속함이 치가 떨리게 싫었던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한 번만 더 미연이를 욕하면 당장 쫓아내 버릴 거야!”그래도 자기 친언니인데 걸핏하면 욕하는 심서연의 인성이 참 못돼 보였다.“유진 씨, 저 여자가 그렇게 좋아? 이미 유부녀란 사실은 알고 있는 거지?”심서연은 자기 가슴을 남자 쪽으로 바짝 붙인 뒤 그의 반응을 살폈다.오랫동안 박유진을 사랑하면서 둘이 잠자리를 갖는 건 고사하고 손도 매번 그녀가 먼저 잡았다.박유진은 그녀의 말을 들
속옷이 비치든 말든 아무 상관이 없었다.진이경은 재빨리 시선을 딴 곳으로 돌리면서 그녀에게 말했다.“그럼 실례하겠습니다!”말을 마친 뒤 재빨리 그녀를 소파에서 안아 올렸다.그러자 심서연은 깜짝 놀랐다가 곧바로 진이경의 뺨을 한 대 때렸다.“이게 무슨 짓이에요! 당장 내려줘요!”진이경은 방금 맞은 게 귀까지 윙윙 울리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이를 악물고 그녀를 안고 밖으로 나갔다.“유진 씨, 난 유진 씨 여자인데 어떻게 다른 남자가 이러는 걸 가만히 내버려둘 수 있어! 내 남자가 맞긴 해?”심서연은 욕설을 퍼부었지만 박유진은 그저 눈살을 찌푸린 채 담담하게 노트북을 켰다.설령 심서연과 결혼한다고 해도 어차피 그녀와 잠자리도 가지지 않을 것이기에 다른 남자가 그녀를 안든 말든 아무 상관이 없었다.못 본척하는 그의 모습에 심서연은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유진 씨, 날 이따위 취급했다가 내가 심미연한테 가서 해코지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그제야 박유진이 시선을 심서연에게 돌리더니 차갑게 말했다.“일단 내려줘.”심서연은 내리자마자 진이경을 발로 세게 걷어찼다.“다시 한번 내 몸에 손을 댔다가는 사람을 시켜서 당신을 매장해 버릴 거야!”그리고 매서운 얼굴로 진이경을 쏘아보았다.하지만 진이경은 본 체도 하지 않고 그대로 병실 밖을 떠났다.심서연은 한껏 짜증이 섞인 얼굴로 몸을 탈탈 털더니 입으로 중얼거렸다.“비서인 주제에 감히 나한테 손을 대다니, 역겨워 죽겠어!”박유진은 입술을 달싹거리면서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어디 봐서 이런 사람이 대갓집 규수란 말인가, 시장 바닥에서 막말을 퍼붓는 아줌마들이랑 전혀 다를 게 없는데!인성이 참, 뭐라고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였다.근데 남은 인생을 이런 여자와 함께해야 한다니...“유진 씨, 방금 저 인간 당장 해고해.”심서연은 그의 앞에 다가가 짜증을 냈다.이때, 박유진은 단번에 그녀의 목을 힘껏 졸랐다.삶의 철칙이 죽어도 여자한테는 손을 대지 않는 것이었지만 오늘 심서연이 그
심서연은 그의 말을 듣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유진 씨, 심미연이 그렇게 좋아?”그 여자는 그저 자기보다 얼굴만 더 예쁘장하게 태어났을 뿐인데 박유진이 이토록 죽자 살자 매달리는 게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그녀는 심미연도 밉고 박유진도 미웠다.“심서연, 네가 했던 말을 잊지 마!”박유진은 그녀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지금 심미연을 사랑하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중요한 건 자신이 심미연에게 무얼 해줄 수 있냐는 것이다.“절대 심미연을 괴롭히지 않을게. 그러니까 저녁에 식사 자리고 뭐고, 그냥 다음 주에 결혼하자!”심서연은 어느새 눈가가 빨개진 채 그에게 말했다.박유진이 심미연을 위해 이 결혼을 하는 거라면 어디 해보자고!앞으로 평생 서로가 괴로워하면서 살아가 보자!“그래.”박유진이 그제야 손에 힘을 풀었다.“심서연, 다시 한번 말하는데 그 약속 꼭 지켜.”말을 마친 뒤 그대로 화장실에 가서 마치 불결한 물건을 만지기라도 한 듯 손을 빡빡 씻기 시작했다.심서연은 그의 행동을 보더니 또다시 화가 올라오는 걸 간신히 참았다.박유진은 지금 그녀와 살이 닿는 것조차 혐오스러워할 정도였다.손을 닦으며 나오다가 여전히 제자리에 서 있는 심서연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왜 아직도 안 갔어?”그는 심서연과 같은 공간에 있는 게 싫었다.“지금 당장 우리 부모님께 다음 주에 결혼한다는 사실을 알려야겠어. 근데 유진 씨, 우리 결혼식에 심미연도 꼭 데려와!”심서연의 말에 박유진이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불행하게 살아가는 심미연에게 자신이 행복한 모습을 꼭 보여주고 싶었나 보다.하지만 박유진은 그대로 심서연을 지나쳐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우리 결혼식에 어떤 분들을 초대할지는 우리 어머니가 결정할 거야.”당연히 심미연은 초대하지 않을 것이고 오는 걸 바라지도 않는다.“왜? 심미연이 보고 속상해할까 봐 걱정돼?”그러다가 호탕하게 웃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어쩌면 홀가분해할지도? 애초에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으
박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들었다.이때 심서연이 허리를 숙이고 그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됐다. 이제 갈게. 저녁에 봐.”역시나 남자는 물티슈를 급히 뽑아내더니 불쾌하다는 듯이 얼굴을 벅벅 닦았지만 어차피 이제 곧 자기 남편이 될 사람이라 상관없었다.결혼하기만 하면 이런 스킨십은 할 기회가 많으니까.박유진은 얼굴을 닦은 뒤 티슈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다시 일에 집중했다.이런 갑작스러운 행동은 이제 아무렇지도 않았다.하지만 너무 덤덤한 그의 반응에 심서연은 또다시 짜증이 슬슬 몰려왔다.그렇게 한참 동안 박유진을 쏘아보다가 결국 병실 밖으로 나갔다.그녀가 떠나간 뒤 박유진은 곧바로 진이경에게 전화를 걸었고 얼마 안 돼서 그는 병실 안으로 쭈뼛거리면서 들어왔다.“대표님... 저는...”“말해. 왜 그 소식을 퍼뜨렸는지.”박유진은 단호한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사모님께서 협박하셨어요...”진이경은 한껏 낮은 소리로 답했다.그 소식은 누구에게도 알려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 자기 회사 대표가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어머니한테는 당연히 말해줘야 하지 않나?“당장 인수인계 시작하고 넌 내일부터 해고야.”한번이 쉽지, 나중에는 계속 이런 실수가 반복될 게 뻔한데 그의 곁에는 이런 사람을 두면 안 된다.“대표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한 번만 봐주세요!”진이경은 회사에서 붙여준 비서인데 같이 일한 시간이 짧다 보니 박유진의 성격이 어떤지 잘 모르고 있었다. 하여 이미자가 그를 협박했을 때도 솔직하게 다 말해줬다.박유진은 단호하게 다시 그에게 말했다.“그만 돌아가.”그는 한번 결정한 일은 쉽게 번복하지 않는 사람이다.하여 진이경은 어쩔 수 없이 돌아서야 했다.“대표님, 그동안 감사했습니다!”진이경마저 떠난 뒤 박유진은 다시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내일부터 네가 내 비서로 일해.”전화를 끊고 다시 일에 집중했다....심미연이 로펌에 도착해보니 회사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이때 임현이 다급히 다가오면서 그
“변호사님, 근데 사장님은 왜 또 오셨어요? 할 일이 그렇게도 없으신지.”임현은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심미연은 그녀의 모습에 싱긋 미소를 짓더니 그녀에게 말했다.“그만 나가서 일 봐요.”강지한이 그녀를 찾는 원인은 아까 병원에서 그를 못 본척했기 때문일 것이다.그러다가도 혹시나 온지유를 달래주기 위해 온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근데 표정이 너무 무섭던데 혹시 변호사님께 손을 대는 건 아니겠죠?”임현은 살기 어린 모습으로 들어오던 강지한을 발견하고 걱정되어 냉큼 달려왔다.들어보니 명문가에는 비뚤어진 마음가짐을 가진 남자들이 많다고 하던데 보통 가정 폭력이나 바람피우는 방법으로 여자들을 괴롭힌다고 했다.근데 자기 회사의 잘생긴 사장님이 이런 변태적인 성격을 가진 사실은 생각지도 못했다.심미연은 왠지 모르게 이 상황이 매우 웃겼다.“빨리 가요. 사장님께 들켰다가는 이대로 해고당할지도 모르니까.”임현도 참 대담한 것 같다.혹시나 강지한이 듣게 되면 바로 그녀를 해고할 텐데.“그럼 이만 나가볼게요. 혹시나 사장님께서 손찌검이라도 하면 바로 저를 부르세요.”임현은 그래도 심미연이 걱정되었다.“그래요.”그렇게 임현은 빠르게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그녀가 황급히 뛰어가는 모습을 본 심미연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그러자 강지한이 그녀에게 다가와 차갑게 물었다.“뭐가 웃겨?”심미연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아니야.”그를 보자마자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이때, 갑자기 강지한이 그녀를 품에 안으면서 물었다.“미연아, 오늘 왜 병원에 간 거야?”충분히 사람을 보내 알아낼 수 있었지만 그는 심미연이 하는 말을 직접 듣고 싶었다.얼굴이 남자의 가슴팍에 부딪혔는데 순간 코끝이 찡해졌다.심미연은 고개를 들고 그에게 되물었다.“유진 씨 보러 갔어. 나도 묻고 싶은데 왜 유진 씨랑 술 마시게 된 거야?”강지한은 심미연 입에서 박유진의 이름이 들리자 순간 얼굴이 일그러졌다.“박유진이 너한테 뭐라고 했어?”설마 박유진이 심미연한테 모든 걸
심미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한 기색을 담아 물었다.“무슨 일이길래 그래요?”이지연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일부러 속도를 늦추며 차분하게 말했다.“온지유 씨가 도망쳤어요.”“언제요?”심미연의 눈빛이 반짝이며 날카로워졌다. 누가 이 일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스쳤다.“어젯밤에요.”이지연의 목소리는 한껏 가라앉아 있었고 자책감이 가득 배어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방심했어요.”심미연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미안해하지 마요. 이건 지연 씨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이지연은 입술을 꼭 깨문 채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제가 당장 찾아올까요?”심미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휴대폰을 천천히 만지며 생각했다.“잠깐만 생각 좀 해볼게요.”어젯밤 강지한이 교통사고를 당한 장면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혹시 온지유의 실종과 강지한이 관련 있는 걸까? 만약 강지한이 온지유를 구한 거라면 도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은 거지? 끝도 없이 밀려드는 의문들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참, 보스. 어젯밤에 스승님 못 보셨어요?”이지연이 물었다.심미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사실은 봤었다. 그녀는 진운혁이 차를 몰고 떠나는 걸 보고 따라붙었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그럴 리가요? 제가 분명히 확인했는데... 스승님께서 이진영 씨랑 같이 식사하고 계셨어요!”이지연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심미연은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렸다.문득 이전에 마주쳤던 진운혁의 모습들이 떠올랐고 그 순간 한 가지 의심이 그녀의 마음속을 훑고 지나갔다.‘그때 내가 본 스승님은... 정말 스승님이 맞았을까? 만약 누군가가 스승님을 사칭하고 있었다면 그 목적은 대체 뭘까?’그때 이지연의 흥분한 목소리가 심미연의 생각을 끊어냈다.“보스! 새로운 정보를 발견했어요!”“무슨 정보예요?”심미연은 본능적으로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귀를 기울이자 이지연의 들뜬 목소
백선영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진은숙의 팔을 살짝 끌어당기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이제 가요.”진은숙은 손바닥 위에 놓인 봉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망설이면서 입을 열었다.“이건... 어쩌죠?”백선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 난처한 상황을 심미연에게 넘기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봉투를 조심스럽게 심미연 앞에 내려놓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모님, 마음은 충분히 받았지만... 이 돈은 받을 수가 없어요.”심미연은 미소를 지으며 눈길을 봉투 위로 흘렸다.“오빠가 직접 드린 건데 마음 편히 받으세요. 저한테 돌려주실 필요는 없어요. 자, 얼른 가서 일 보세요. 저 벌써 배가 고파졌는걸요.”그러나 말하다가 알 수 없는 서운함이 스르르 마음 한쪽에 올라와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박유진은 예전에 밤하늘을 보며 수없이 약속했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그녀와 아이를 평생 지키겠다고. 그런데 지금 그 약속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금세 꺼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오빠, 나랑 약속한 거 잊은 거야?’“정말 감사합니다, 사모님! 사모님과 사장님 두 분 다 참 요즘 보기 드물게 좋은 분들이세요. 두 분, 좋은 일만 가득하시고 영원히 행복하시길 빌게요!”진은숙은 기쁜 얼굴로 연신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 백선영의 팔을 붙잡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오늘 정말 행운이 따랐다 싶었다. 이렇게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다니.심미연도 가볍게 한숨을 쉬고 나서 주방으로 들어가 컵에 따뜻한 물을 따라 목을 축였다. 어쩐지 목이 바싹 마른 게, 감정이 몰려서 그런 걸까.막 물을 다 마셨을 무렵 문밖에서 귀엽고 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 어디 있어요?”그 소리는 마치 봄날에 막 피어난 꽃처럼 듣는 사람 마음을 몽글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심미연은 표정이 풀렸고 얼른 얼굴을 내밀며 따뜻하게 웃었다.“우리 태하, 엄마 여기 있어!”심태하는 쏜살같이 달려와 그녀 품에 안겼다.“엄마, 아빠가 나 버렸어요!”심미연은 깜짝
백선영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모깃소리만큼이나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사장님께서 떠나시기 전에... 집에 안 계시는 동안 꼭 사모님과 도련님을 잘 챙기라고 당부하셨습니다.”진은숙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맞아요, 맞아요! 사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바로 캐리어 들고 곧장 나가셨거든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마음속으로 박유진의 말뜻을 곱씹어 보았지만 마치 안개 속을 걷는 듯 선명하게 와닿지 않았다.“그런데요, 사모님...”진은숙이 심미연을 흘끗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눈빛에는 망설임과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왜 그러세요?”심미연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지만 말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언제나 그래왔듯 도우미 아주머니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었고 태도가 마치 봄바람처럼 따뜻하고 너그러웠다.진은숙은 잠시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더니 마음을 굳힌 듯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어젯밤에 제가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러 나왔는데 계단 모퉁이에서 사장님을 마주쳤었어요. 사장님도 물 마시러 나오신 것 같았어요.”곁에 서 있던 백선영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저도요!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길래 문 열고 나왔더니 사장님이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계셨습니다.”심미연은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어젯밤에 오빠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진은숙은 마음을 가다듬고 이어서 말했다.“불빛이 비쳐서 얼핏 봤는데 사장님 눈가가 벌겋게 부어 있더라고요. 꼭 방금 울기라도 한 사람처럼요. 아마 제가 눈치챌까 봐 인사만 툭 하고는 곧장 자리를 피하셨어요. 전 그냥 물만 마시고 방으로 돌아갔는데 보니까 사장님은 그 자리에 그대로 멍하니 서 계셨어요. 제가 방에 들어간 뒤에도 안 들어오시더라고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덧붙였다.“오늘 아침에 사장님께서 나가신 뒤에 서재를 청소하러 들어갔는데 휴지통에 담배꽁초가 가득 쌓여 있었어요. 어젯밤 내내 잠도 못 주무시고 담배만 피우셨던 것 같아요..
휴대폰 화면이 켜지고 그 익숙하면서도 가슴을 죄는 번호가 뜨는 순간, 박유진의 심장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움켜잡힌 듯 조여들었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속에서 일렁이며 축축한 솜처럼 뭉쳐져 목덜미를 틀어막았고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말은 더더욱 나올 리 없었다.그 번호는 마치 꿈결 속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유령처럼 소리 없이 다가와 그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의 고통과 갈등을 다시 불러냈다.박유진은 손을 떨며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다가 한참을 망설인 끝에 결국 전화를 받지 않기로 했다.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공기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긴장감과 묘한 압박이 가득했다. 박유진은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고 손끝으로 천천히 휴대폰 키보드를 두드려 문장을 써 내려갔다.[진성에 가서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돌아가면 다시 이야기하자. 그래도 되지?]그 메시지엔 그의 복잡한 심경이 담겨 있었다. 현실을 피하고 싶은 마음도, 언젠가 다시 마주하길 바라는 희미한 기대도 모두 그 짧은 문장 안에 섞여 있었다.메시지 전송을 마친 박유진은 망설임 없이 전원을 꺼버렸고 휴대폰을 한쪽으로 툭 던졌다. 마치 그렇게 하면 마음속 어지러운 생각들까지 함께 던져버릴 수 있을 것처럼.주변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텅 빈 공간엔 그의 심장 뛰는 소리만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규칙적이고도 묵직한 박동이 마치 그 존재를 스스로 확인하려는 듯했다.박유진은 눈을 감았다. 피로한 몸은 본능적으로 가장 편한 자세를 찾아갔고 그 짧은 정적 속에서 조금이나마 위로를 찾고자 했다.비록 밤새 한숨도 못 잤고 눈은 충혈되어 있었지만 정신만큼은 유난히 또렷했다.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지탱해 주듯 그는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하지만 피하고 싶을수록 심미연의 모습은 그의 머릿속에서 더욱 선명해졌다. 그녀의 미소는 때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순수하고 따스했으며 때로는 눈빛 하나로도 사람 마음을 뒤흔드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또 부끄러워하던 그 순간순간들
박유진은 자신의 앞날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심미연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는 언제나 그녀의 편이 될 것이란 사실.만약 그녀가 아이를 데려오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그는 가진 것을 다 내어주어서라도 그녀를 돕고 그 아이를 보살필 것이다. 마치 자신의 친딸인 양 지극정성으로.박유진은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은 심미연을 사랑하고 그녀의 아이와 그녀가 지닌 모든 것을 함께 안아줄 준비가 되어 있음을.심미연의 눈가는 어느새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녀의 두 손은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살고 싶어서 지푸라기를 붙잡고 있는 것처럼 박유진의 옷깃을 꼭 움켜쥐었다. 수많은 감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그녀가 박유진에게 진 빚은 너무나도 많고 무거웠다. 그 빚을 다 갚기 위해서는 평생이라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몰랐다.“시간이 늦었으니까 이젠 좀 쉬어. 나도 방으로 돌아갈래.”박유진의 목소리엔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미세한 떨림이 묻어났다. 그는 본능적으로 심미연을 더욱 꼭 안았다. 마치 그녀를 자신 뼛속 깊이까지 끌어안고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어쩌면 이 다정함이 그들 사이 마지막 남은 따뜻함이 될지도 모른다...박유진의 마음속은 쓸쓸함으로 가득했다. 머릿속 이성은 매서운 바람처럼 그를 휘감으며 이제는 놓아줄 때라며 끊임없이 속삭였다.하지만 감정은 뿌리 깊은 덩굴처럼 박유진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얼마나 바랐던가. 단 한 순간이라도 더 심미연의 곁에 머물 수 있기를. 이 찰나의 시간이 남은 생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만 있다면...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박유진의 얼굴을 어루만졌고 그녀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박유진의 마음속 한기를 모두 녹이는 듯했다.심미연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부드럽게 말했다.“이생에 오빠를 만나 알아가고 수많은 인파를 뚫고 함께 걸을 수 있었던 건... 정말 큰 복이었어. 앞으로 어떤 길을 가더라도 우리 손 놓지 말고
박유진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눈빛이 그녀를 감쌌고 낮지만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 말해 봐.” 심미연은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과 마주친 순간, 마음 한켠에서 설명할 수 없는 두려움이 피어올랐다. 마치 오래도록 감춰온 비밀이 이제야 드러날 것만 같은 예감처럼. “왜 그래, 미연아?” 박유진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우면서도 따뜻했다. 그녀의 불안을 감싸 안으려는 듯 아주 섬세하게 묻는 말이었다. 심미연은 입을 열 듯 말 듯 망설였다. 떨리는 입술이 달싹이기만 할 뿐 말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마음 깊은 곳에서 끌어올리고 있는 건 누구에게도 쉽게 털어놓을 수 없던 진실이었다. 그러다 마침내 결심한 듯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강지한의 딸, 강상미. 들어본 적 있지?” 박유진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 아이가 왜?” 툭 튀어나온 말이었지만 그의 마음속에 조용한 파문이 일었다. ‘미연이랑 강지한의 딸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왜 지금에서야 그 아이를 말하는 걸까.’ 심미연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다짐하듯 눈을 감았다가 뜨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사실 예전에 내가 잃어버린 내 딸... 그 애는 세상을 떠난 게 아니었어.” 그 말 한마디를 꺼내기 위해 그녀는 거의 모든 용기를 다 쏟아부었다. “정말이야?” 박유진의 목소리는 놀라움에 젖어 있었다. 그의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그때 너 분명히 말했잖아. 아이 숨 안 쉬고 있었다고. 직접 확인했었잖아... 확신했었어.” 그 순간, 박유진의 머릿속을 스친 단 하나의 가능성. ‘설마... 지금 미연이가 말하려는 게... 그 아이가 강상미라는 말이야?’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껏 맞춰지지 않던 조각들이 하나로 이어지고 복잡하게 얽혔던 퍼즐이 비로소 그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박유진의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손끝이 얼어붙고
박시훈은 눈을 깜빡이며 바로 앞에 있는 얼굴을 바라봤다.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예쁜 여자가 있을 수가 있지?’ 심장이 터질 듯 뛰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심장 박동이 너무 빠른데요? 정상은 아닌 것 같네요.” 심미연은 이마를 찌푸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박시훈은 민망해서 땅속으로 숨어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내가 왜 비정상이야... 완전 정상이거든...’ 심미연은 아무렇지 않게 그의 상처를 확인했다. 상처는 붉게 부어 있었고 피도 조금 배어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약을 꺼내 상처 위에 다시 발라주었다. 상처는 쓰라렸지만 박시훈은 이 순간이 영원히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곁에 있는 지금이 너무도 소중했다. 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상처를 감싸고 도구들을 하나씩 정리했다. 마무리를 한 뒤 장갑을 벗으며 병실을 나갈 준비를 했다. “저... 방금 야식 시켜놨는데... 같이 먹고 가주면 안 돼요?” 박시훈은 괜히 목이 메여 말끝이 흐려졌다. 자신이 이렇게 소심한 사람이었다니, 스스로도 놀라웠다. ‘내가 왜 이 사람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거야...’ “저는 밤에 야식 먹는 습관 없어요.” 심미연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야식 너무 자주 먹지 마요. 건강에 안 좋아요. 전 이만 갈게요. 야식 먹고 푹 쉬세요.” 그녀의 말에 박시훈은 마치 한겨울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얼어붙었다. 심지어 발끝까지 저릿했다. 그녀가 간다. 그를 남겨두고 그냥 떠나버린다. 속이 텅 빈 것처럼 허전했다. 심미연은 이미 등을 돌린 채 병실을 나서고 있었고 박시훈의 낙담한 얼굴은 그녀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병실을 벗어난 심미연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깊게 숨을 들이켰다. 몇 시간째 이어진 수술에, 온몸이 녹초가 된 상태였다. 하지만 강지한을 살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로비로 걸어 나왔을 때 문 앞에 서 있는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심미연의 시선이 하얗게 눈처럼 샌 강준형의 머리카락에 머물렀다. 가슴 어딘가가 저릿하게 아려왔다. 만약 시간이 되돌릴 수 있다면. 그저 아무 걱정 없이 웃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땐 주저 없이 말했을 것이다. ‘네. 할게요.’그때 그녀는 강지한을 사랑했고 그의 가족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더 이상 강지한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리고 강준형이 걱정된다고 해서 그 바람을 무조건 들어줘야 할 이유도 없었다. 곁에서 조용히 그녀를 훔쳐보던 가정부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사모님은 역시 마음이 떠나신 거구나...’ ‘이러다 어르신 또 며칠을 우울하게 보내시겠네...’강준형도 그녀의 침묵에서 모든 걸 느낄 수 있었다. 인연이란 게 억지로 붙잡는다고 이어질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비록 아쉬움은 남지만 그 역시 그녀의 선택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할아버지, 사실 저랑...”“딩.” 심미연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려는 순간,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고개를 든 그녀는 곧장 부드러운 눈빛을 머금은 박유진과 눈이 마주쳤고 그 말은 다시 목구멍 깊숙이 삼켜졌다. “오빠, 여긴 어떻게 왔어?”박유진은 따뜻한 미소로 대답했다. “너 데리러 왔어.” 그리고 곧 예의를 갖춰 강준형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강준형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유진아, 너랑 미연이...?” 어딘가 모르게 다정해 보이는 둘의 분위기. 설마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의심이 스쳤다.“할아버지, 제가 차까지 모셔다드릴게요.” 심미연은 사실 내일 박유진과 혼인신고를 하러 갈 거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조금 전, 강준형이 ‘강지한과 다시 잘해봤으면 좋겠다’고 했던 말이 떠오르자 그 말을 도저히 꺼낼 수 없었다.‘말하지 말자. 괜히 말했다가 할아버지 마음만 상할 수도 있어.”그 순간, 박유진의 손이 저절로 움켜쥐어졌다. ‘할아버지한테
하지만 정작 온지유의 칼끝을 막나낸 사람은 그다지 친하다고 할 수 없었던 박시훈이었다. 심미연의 진지한 얼굴을 본 강준형은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걸 단박에 알아챘다. 더는 묻지 않았다. 그녀는 조심스레 그를 의자에 앉히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만 앉아 계세요. 옷만 갈아입고 금방 나올게요.” “그래. 다녀오너라.” 강준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가볍게 흔들어 보냈다. 심미연이 등을 돌려 복도로 사라지자 그는 그녀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그리고 이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곁에 서 있던 가정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요즘 사모님이 예전보다 훨씬 더 예뻐지신 것 같아요. 성격도 훨씬 부드러워지셨고요. 만약 사모님이 도련님과 다시 재결합하신다면 어르신께서도 도련님 혼자 남을까 봐 걱정 안 하셔도 될 텐데요.” 강준형은 그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다. 미연이가 돌아온다면 지한이도 지금처럼 외롭진 않겠지. 상미도 엄마 손길이 필요하고... 지한이가 아무리 잘 챙긴다 해도 아빠는 아빠일 뿐이지. 엄마처럼 섬세하긴 어렵잖니. 게다가 지한이는 이노하이브를 이끄는 입장이라 상미를 온전히 돌보기엔 시간도 턱없이 부족하고 말이다.” “나중에 사모님께 슬쩍 한번 말씀드려보시는 건 어떠세요?” 가정부는 늘 심미연을 좋게 봐왔다. 도련님과 이혼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도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요즘 세상에 외모, 인품, 성격, 효심까지 갖춘 여자를 다시 만나긴 정말 쉽지 않으니까. 강준형은 또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분위기 봐서 말해보지. 미연이가 듣기 싫어하면 더는 꺼내지 않을 거다.” “네. 그게 좋을 것 같아요.” 가정부도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옷을 갈아입은 심미연이 다시 나타났다. 그녀는 다가와 손을 내밀며 말했다. “가시죠. 할아버지. 제가 집까지 모셔다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