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를 듣고 백현지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강지한을 본 순간, 그녀의 심장은 목구멍까지 튀어나올 것처럼 빨리 뛰었다.‘잘생겼다! 목소리도 좋아! 몸매도 짱이네! 이 사람이 대표님이라고?’심미연은 빠른 걸음으로 강지한 앞으로 다가가서 말했다.“회사로 돌아간다며? 빨리 가!”지금 문이 열려 있는데 백현지가 큰소리로 외치기라도 하면 로펌 사람들이 모두 구경하러 몰려들 게 분명했다.그녀는 강지한과의 관계를 공개적으로 알릴 생각이 없었다.어차피 곧 그와 이혼할 텐데 애초에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될 필요는 없었다.강지한은 초조해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심기가 불편해졌다.이 여자는 자신과 엮이는 게 그렇게 싫은 건가?“미연아, 너...”강지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심미연은 그를 밖으로 밀어내고 이어서 백현지까지 밀쳐낸 후 문을 쾅 닫았다.하마터면 문에 코끝을 부딪칠 뻔한 강지한은 반사적으로 코를 만지며 눈빛이 차가워졌다.이 여자가 감히 그를 내쫓다니.정신을 차린 백현지는 달려들어 심미연을 잡아끌었다.“비켜요! 대표님을 만나야겠어요!”대표님이 심미연과 잘 수 있다면, 분명 그녀와도 잘 수 있을 것이다.그녀가 심미연보다 더 예쁘고 몸매도 더 좋으니까.백현지는 속으로 계속해서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라고 되뇌었다.심미연은 그녀를 밀치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대표님과 온 팀장이 무슨 사이인지 잊었어요? 감히 온 팀장님 남자를 건드렸다간 가만 안 둘 텐데?”백현지는 굳어버렸다.조금 전까지 그녀는 그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어때요? 정신이 좀 들어요?”심미연은 그녀의 모습을 보고 겁먹었다는 것을 알았다.온지유에게 잘 보이려고 하면서 어떻게 온지유를 화나게 할 수 있겠는가.백현지는 그녀를 매섭게 노려보며 말했다.“누가 온 팀장의 남자를 빼앗겠다고 했어요! 미연 씨, 그쪽이야말로 대표님과 단둘이 뭐 하는 거예요? 온 팀장님에게 다 이를 거예요!”온지유에게 비밀을 많이 알려줄수록, 그녀는 더 많은 이득을 얻을 수 있
정말 무서웠다.백현지가 가고 심미연과 강지한 두 사람만 남았다.“방금 둘이 무슨 얘기 했어? 미연아, 나한테 숨기는 거 있지?”강지한은 심미연이 뭔가 이상하다고 느껴졌다.그런데 뭐가 이상한지는 딱 짚어 말할 수 없었다.심미연은 가슴이 철렁했지만 곧 태연한 척 웃으며 말했다.“내 일은 당신이 원하면 다 알아낼 수 있는데 뭘 숨기겠어?”역시 이 남자는 의심이 많기에 그녀의 비밀은 언젠가 들키고 말 것이다.그러니 비밀이 밝혀지기 전에 강지한을 떠나서 배 속의 아이를 지켜야 한다.심미연의 미소는 어딘가 어색해 보였고 강지한의 의심은 더욱 깊어졌다.‘이 여자는 도대체 무엇을 숨기고 있는 걸까?’그가 심미연의 팔을 잡으려는 순간, 뒤에서 여자의 애교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지한 씨, 내가 병원에 있는 거 뻔히 알면서 여기까지 나 찾으러 온 거야, 참!”심미연은 목까지 차올랐던 긴장이 순식간에 풀렸다.온지유가 있으면 강지한은 그녀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으니 마침 그의 추궁을 피할 수 있었다.“두 분 얘기 나눠. 나는 바빠서 이만!”심미연은 말을 마치고 문을 닫았고 강지한은 또다시 문밖에 내버려 졌다.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숯처럼 검게 변했다.온지유는 다가와 그의 팔에 매달렸다.“지한 씨, 내 사무실로 가자!”백현지의 전화를 받자마자 온지유는 심미연의 임신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급히 로펌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강지한이 여기에 있을 줄이야.강지한은 자연스럽게 팔을 빼내며 그녀의 부은 얼굴을 보고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여기 왜 왔어?”온지유는 팔짱을 끼려다 실패하자 얼굴이 굳었지만 금세 표정을 바꾸고 나긋나긋하게 말했다.“급한 일이 있어서 왔어. 지한 씨, 내 사무실로 가서 얘기하자. 여긴 사람들이 많아서 이상한 소문이 날지도 몰라! 미연 씨에게 할 얘기가 있다면 내 사무실로 부르도록 할게. 내가 너희를 도와 감싸줄 테니까.”온지유는 마치 본처인 양 굴었다.마치 심미연이야말로 떳떳하지 못한 내연녀인 것처럼 말이다.강지한은 그녀를
온지유는 속으로 이리저리 생각해 봤지만 도대체 왜 그런지 알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마음을 굳게 먹고 이를 악물며 나지막이 말했다.“지한 씨, 나 토할 것 같아. 나 좀 부축해 줄래?”온지유가 토할 것 같다고 하자 강지한은 전에 심미연이 자신에게 토했던 일을 떠올렸다.온지유는 임신하고 나서 자주 토했다.그런데 심미연도 영문도 모르게 토했다.혹시 심미연이 정말 임신한 건 아닐까.강지한은 갑자기 침묵했고 온지유는 불안한 마음에 안절부절못했다.전에 그는 그녀 앞에서 이런 적이 없었다.오늘 도대체 왜 이러는 거지?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순간,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아직도 토할 것 같아?”온지유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으음 하는 소리를 냈다.강지한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부축해서 화장실로 데려갔다.온지유는 깜짝 놀랐다.화장실에 데려와서 뭘 하려는 거지?“토할 것 같다며? 왜 안 가?”정신이 번쩍 든 온지유는 황급히 화장실로 들어갔다.강지한은 흡연 구역으로 가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심미연은 토할 때 조금도 참지 못하고 바로 토해버렸다.하지만 온지유는 참을 수 있었다.왠지 심미연이 보였던 증상이 더 임신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온지유는 화장실에서 백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온 팀장님, 무슨 일이세요?”백현지는 알랑거리는 목소리였다.온지유에게 잘 보여 한 자리 차지하려고 백현지는 갖은 아양을 떨었다.“지금 당장 심미연한테 가서 이렇게 말해...”그러고는 목소리를 낮추고 속삭이듯 말했다.“이래도 괜찮을까요?”백현지는 망설였다.“하라는 대로 해! 뭐가 문제야!”온지유는 싸늘한 얼굴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백현지는 잔뜩 겁먹은 채 대답했다.“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갈게요!”“병원에서 나가면 바로 승진시켜 줄게!”온지유는 미끼를 던졌고 백현지는 신이 나서 어쩔 줄 몰라 했다.“네! 금방 갔다 올게요!”전화를 끊고 온지유는 차갑게 웃으며 속으로 욕했다.“바보 같은 년!”그러고는 휴대폰
심미연이 백현지가 부르는 소리에 나가보니 마침 남자가 온지유을 안고 서둘러 떠나는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그녀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자기라는 본처가 있는데도 저렇게 스스럼없이 껴안고 가다니.정말 자기를 안중에도 두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곧바로 휴대폰을 꺼내 사진 두 장을 빠르게 찍고 돌아서니 백현지가 얄밉게 웃고 있었다.심미연은 백현지가 한심하게 느껴졌다.이용당하는 줄도 모르고 저렇게 좋아하다니.“심 변, 대표님과 온 팀장의 다정한 모습을 보니 많이 힘들죠?”백현지는 눈이 가늘어지도록 웃었다. ‘심미연은 이젠 포기하겠지?’“멍청하다고 하는 것도 칭찬인 줄 알아요!”심미연은 그 말을 던지고 백현지를 지나쳐 걸어갔다.백현지는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며 화를 냈다.“심미연, 당신이 뭔데 날 욕해요!”그녀의 인식 속에서 심미연은 내연녀였다.내연녀는 그녀에게 욕할 자격이 없었다.심미연은 백현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곧장 사무실로 돌아갔다.임현은 막 타온 차를 들고나오다가 백현지의 옆을 지나가면서 작게 말했다.“누가 내연녀인지도 모르면서. 그쪽은 멍청한 게 아니라 바보예요! 변호사님이 아주 참아주신 거지!”그러잖아도 화가 잔뜩 나 있던 백현지는 그 말을 듣고 더욱 분노하여 손을 들어 그녀를 때리려 했다. 임현은 일부러 피하는 척하다가 차를 백현지에게 쏟아버렸다.옷을 입고 있었지만 백현지는 뜨거움을 느끼고 비명을 질렀다.“앗... 뜨거워!”임현은 짐짓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화났으면 나한테 화내면 되잖아요. 왜 내 차를 엎어서 날 데우려고 하는 건데요? 정말 못됐어요!”봉변을 당하고도 되려 누명을 쓰자 백현지는 임현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났다.“임현, 너...”욕을 다 하기도 전에 심미연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세게 때려요! 나 지금 동영상 찍고 있으니까!”백현지는 깜짝 놀라서 손을 얼른 내렸다.직장 동료를 폭행했다가는 감당할 수 없는 죄가 될 터였다.임현은 백현지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심미연은 생각을 거두고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저 일이 있어서 잠깐 나갔다 올게요.”임현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대체 무슨 일이지? 미연 언니 표정이 너무 안 좋은데.’로펌을 나서자마자 심미연은 눈물을 쏟아냈다.택시 기사는 넋이 나간 듯 우는 그녀를 보고 무슨 일이 있는 줄 알고 참지 못하고 위로했다.“슬퍼한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에요. 힘내세요.”심미연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활짝 핀 베니 벚꽃이 유난히 눈에 거슬렸다.온지유가 좋아한다고 강지한은 온 서울 가로수를 베니 벚꽃으로 도배해 버렸다.‘온지유한테는 정말 잘해주네!’운전기사는 쉴 새 없이 말을 이어갔다.“삶이 힘들면 견뎌내고 남편이 바람을 피우면 남편이 잠든 사이에 묶어놓고 실컷 두들겨 패서 화풀이하세요. 상간녀가 찾아와 도발하면 주거침입으로 신고해서 널리 알려지게 하고요. 손님만 떳떳하면 쪽팔리는 건 바람난 남편하고 그 여자뿐이에요!”슬픔에 잠겨 있던 심미연은 운전기사의 말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눈물을 닦으며 운전 기사에게 고맙다고 말했다.“가족이 아프면 모든 걸 쏟아부어 치료해 주세요. 살릴 수 있든 없든 후회만 남기지 않으면 되거든요!”많은 사람들은 사랑하는 가족이 아플 때 돈이 아까워 제대로 치료해 주지 못하고, 결국 그들이 떠난 뒤에야 후회하곤 한다.인생은 한 번뿐이고, 돈은 없어도 다시 벌 수 있지만, 사람은 떠나면 그걸로 끝이다.그러니 ‘그때 이렇게 할 걸’이라는 후회 속에서 남은 생을 보내기보다, 살아 있을 때 최선을 다해 치료하는 편이 낫다. 결과가 어떻든, 적어도 남은 삶은 후회 없이 마음 편히 살 수 있을 테니까.심미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알아요, 고마워요.”이 세상에는 아직 좋은 사람들이 많았다.운전기사는 말이 많아서 줄곧 이야기했다.차에서 내릴 때 심미연의 기분은 훨씬 나아져 있었다. 그녀는 기사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빠른 걸음으로 안으로 들어갔다.위층으로 올라가 외할머니 병실 문 앞에 서니 의료
시골로 보내졌던 2년 동안 외할머니는 항상 심미연을 ‘콩이’라고 부르며 살갑게 대해 주셨다. 집에서 키우는 닭과 오리가 낳은 달걀과 오리 알은 모두 심미연의 차지였다.그 당시 외할머니는 시골에 살면서도 여름과 겨울 할 것 없이 한복을 입으셨다.우아하고 아름다우며 기품이 있어서 심미연은 외할머니가 시골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았다.“콩이야, 이리 와. 얼굴 좀 보자!”외할머니는 오랫동안 잠들어 있다가 막 깨어난 터라 몸이 많이 약해져 있었고 정신도 맑지 않았다. 분명 짧은 몇 마디였지만 양수청은 온 힘을 다해 말하고 나서 숨을 헐떡였다.심미연은 황급히 다가가 앉아서 외할머니의 가슴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숨을 고르도록 도와주었다.외할머니는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야위어 있었지만 얼굴 윤곽이 아름다웠던 흔적은 남아 있었다. 젊었을 때는 분명 절세미인이었을 것이다.“우리 콩이 정말 예쁘구나.”양수청은 심미연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애틋함과 미안함을 느꼈다.이 몇 년 동안 자신의 목숨은 콩이가 돈을 들여 연명해 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콩이에게 자신은 짐일 뿐이었다.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많았다.죽으면 다 해결이 될 것을.콩이도 그녀 때문에 온갖 설움을 겪지 않아도 될 텐데.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양수청을 안으며 말했다.“외할머니, 어서 빨리 나으세요. 그럼 제가 여행 데려가 드릴게요. 평생소원이 오로라 보는 거라고 하셨잖아요? 같이 가기로 한 사람이 약속을 어겼으니 제가 모시고 갈게요!”“오로라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봐야 하는데 그 사람이 약속을 어겼으니 나는 안 갈 거야.”양수청은 말이 느렸고 한마디 한마디 힘겹게 끊어서 말했다.“콩이야, 나 그냥 죽게 해 줘. 이렇게 너한테 짐이 되고 싶지 않아.”이 망가진 몸뚱이는 너무 약해서 이제 흙에 들어갈 때도 된 듯했다.심장을 찢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심미연은 참지 못하고 눈물을 쏟았고 곧 양수청의 환자복을 적셨다.“외할머니, 외할머니는 나으실 거예요! 안 돌아가실 거예
심미연은 흠칫 놀랐다.그녀는 할머니가 갑자기 그런 질문을 할 줄은 몰랐다.‘할머니는 지한을 만난 적도 없는데 어떻게 알았을까?’심미연의 반응은 양수청의 눈에 묵인으로 보였다.양수청은 마음이 무겁고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다 그녀의 잘못이었다. 손녀를 힘들게 만들었으니.양수청은 심미연이 강지한과 결혼한 이유가 분명 돈 때문이라고 생각했다.매일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병원비가 적지 않았으니 말이다.심미연이 아무리 일을 해도 그 돈을 감당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콩이야, 만약 그가 널 사랑하지 않고 네가 행복하지 않다면 그와 헤어지거라.”사람은 꼭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그 남자와 평생을 함께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혼자서도 충분히 잘 살 수 있다.“외할머니, 저 잘 지내요. 걱정 마세요. 그보다 아이 이름을 지어주시겠어요?”심미연은 강지한과의 결혼 생활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고 이혼하기로 마음먹었다는 사실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외할머니가 슬퍼하실까 봐 걱정되었다.외할머니는 겉으로는 저렇게 말씀하셔도 속으로는 자신의 결혼 생활이 행복하길 바라실 것이었다.양수청은 심미연이 말하는 동안 눈빛에 생기가 없는 것을 보고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지만 거짓말을 밝히지는 않고 그저 안쓰러워했다.자신이 죽으면 손녀는 그 사랑 없는 남자를 떠날 수 있겠지.순간, 양수청은 이미 죽음을 생각하고 있었다.“아이 이름은 아이 아빠가 짓도록 하렴. 이 나이에 무슨 좋은 이름을 생각해 내겠니!”“외할머니….”심미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이 열렸다.그녀는 의사가 들어온 줄 알고 뒤돌아보지도 않았다.그때 차가운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미연아, 근무 시간에 어딜 돌아다니는 거야!”화가 난 것이 분명한 말투였다.심미연은 깜짝 놀라 뒤돌아보았고 남자의 분노에 찬 눈과 마주쳤다.그녀는 그가 또 심한 말을 할까 봐 급히 일어나 그에게 다가가며 눈짓으로 신호를 보내면서 물었다.“바쁘다고 하지 않았어? 어떻게 왔어?”강지한은 온몸에서 냉기를 뿜으며 들
심미연은 그가 침묵하자 그의 속마음을 알 수 없어 결국 마음을 굳게 먹고 그의 손을 잡아끌고 병상으로 향했다.강지한은 두 사람이 잡은 손을 내려다보면서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올라갔다.침대 옆에 다다르자 심미연은 허리를 굽히고 양수청에게 부드럽게 말했다.“외할머니, 이쪽은 강지한이에요.”그러고는 강지한의 손을 살짝 잡아당겼다.강지한도 허리를 굽히며 양수청에게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외할머니, 안녕하세요, 이제야 시간을 내서 찾아뵈어 죄송합니다.”양수청은 그의 얼굴을 쳐다보고는 다시 심미연을 보며 말했다.“너희 둘 다 이렇게 잘생겼으니, 아이를 낳으면 정말 예쁘겠구나!”그녀는 아주 천천히 말했지만 심미연의 심장은 꽉 조여드는 듯했다. 아까 외할머니에게 비밀로 해달라고 말했는데 어쩌다 말씀하신 걸까.“예전에는 미연이가 어려서 너무 일찍 아이를 낳는 게 몸에 좋지 않을 것 같아 2년 정도 기다렸어요. 이제는 저희도 임신 준비 중입니다. 내년에는 아이를 낳도록 노력하겠습니다.”강지한은 물샐 틈 없이 대답하며 심미연을 다정하고 애틋하게 바라보았다.심미연은 그가 살갑게 부르는 소리에 머릿속으로 아찔한 장면들이 스쳐 지나가며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남자의 깊은 애정과 여자의 수줍음, 이런 모습은 누가 봐도 행복한 부부의 모습이었다.양수청은 이 모습을 바라보며 전에 어떤 여자가 보여준 로펌에서 찍힌 영상을 떠올렸다. 그 여자와 남자가 함께 있는 다정한 모습이 담긴 영상이었고 자신의 손녀는 멀지 않은 곳에 서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은 보기에도 안타까웠다.그녀는 손녀를 잘 알고 있었다. 이 남자를 많이 사랑하지 않았다면 스스로를 그렇게까지 힘들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만약 이 남자의 마음을 얻지 못하더라도 그의 아이만큼은 낳아 곁에 두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자신의 몸이 이렇게 약하지 않았다면 손녀에게 이런 식으로 아이를 갖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아이가 있어야만 자신이 죽고 나서도 손녀가 삶의
심미연은 흩날리던 생각을 차분히 거두고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궁금한 듯 물었다.“우리 태하 진짜 똑똑하네. 어떻게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는 거야?”아직 겨우 세 살이지만 심태하의 마음은 놀랄 만큼 세심하고 예민했다. 또렷한 눈망울은 마치 세상의 감정 흐름을 꿰뚫어 보는 듯했고 그렇게 꼼꼼히 살피는 모습에 심미연은 종종 놀라곤 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박유진이 심태하를 정성스럽게 길러온 시간이 아이를 이토록 똑똑하고 배려 깊게 자라게 만든 것이다.“아까 아빠랑 통화할 때 엄마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어요. 뭔가 걱정하는 게 있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저한테 말 걸었을 때도 평소처럼 웃고 있지 않았어요. 그래서 엄마가 혹시 슬픈 건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어요.”심태하의 말은 또렷하면서도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 단어 하나하나에 엄마를 향한 깊은 애정과 이해가 담겨 있었다.심태하가 보기에 박유진이 집에 있을 땐 심미연은 늘 기분이 좋아 보였고 환하게 웃는 얼굴이 참 예뻤다.“엄마가 안 웃었어?”심미연은 웃음을 터뜨렸다.‘녀석, 정말 못 말려.’겨우 세 살에 이 정도인데 나중에 더 크면 얼마나 영리해질지.“네, 안 웃었어요.”심태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엄마, 아빠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심태하의 목소리는 여전히 앳됐지만 말투는 왠지 어른스러웠다. 꼭 사람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있기라도 한 듯했다.심미연의 마음은 그 말 한마디에 확 풀렸다. 그녀는 아들의 코끝을 살짝 잡아당기며 말했다.“자, 얼른 아침 먹자.”그녀의 말투엔 아낌없는 사랑이 담겨 있었다.이 아이는 정말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다.“아빠가 보고 싶으면 아빠한테 전화하면 되죠!”심태하가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윙크했다.‘나도 아빠가 보고 싶은데 엄마가 안 보고 싶을 리가 없지. 맞아, 분명 그럴 거야!’심미연은 그 말에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네 말대로 할게.”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물론 박유진이 보고 싶지만 그에게 전화하진
하지만 그 깊은 애정과 놓기 싫은 마음은 오히려 박유진을 현실이라는 갈림길 앞에서 망설이게 만들었다.그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지금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심미연만 괴로운 상황에 빠질 것이라는 걸. 그 맑고 투명한 눈동자가 자신의 망설임으로 인해 흐려지는 건, 그녀의 세상이 자신 때문에 흔들리는 건 차마 보고 있을 수 없었다.그렇다고 그녀를 놓아버리면 영원히 잃게 될 텐데... 그 아픔을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지 박유진 본인조차 알 수 없었다.“아빠, 왜 말이 없으세요? 허락한 거죠?”심태하의 목소리는 천진난만하게 들떴다. 마치 머릿속에 따뜻한 한 가족의 그림이 그려지기라도 한 듯.‘아빠가 돌아오면 엄마랑 나랑 셋이 모여 저녁 먹고 같이 웃고 얘기하고...’심태하의 마음속에서 그려낸 가장 순수한 행복의 모습이었다.그러나 그 순수한 소망 앞에서 박유진의 마음은 송곳에 찔린 것처럼 아팠다.그는 알고 있다. 이번 결정을 가볍게 내려서는 안 된다. 누구도 상처받지 않게 하려면 정말 신중해야 했다.하지만 사랑과 책임 사이에서 그가 걸어갈 수 있는 길은 대체 어디란 말인가? 그는 지금 사랑을 저버리지 않으면서 심미연과 아이를 지킬 방법을 찾고 있다.하지만 그런 길이 과연 있을까? 이 선택은 너무나도 어려웠다.“아빠, 나 이렇게 열심히 얘기하고 있는데 왜 아무 말도 안 해요?”심태하는 고개를 갸웃하며 미간을 찌푸렸다.평소 같았으면 박유진은 재밌는 얘기도 해주고 자기 말에 웃어주었을 텐데, 오늘따라 너무 이상했다.‘혹시... 내가 말실수했나?’그때 박유진의 다급하지만 부드러운 목소리가 심태하의 귀에 들려왔다.“태하야, 곧 비행기가 이륙해서 아빠가 휴대폰을 꺼야 돼. 오늘 밤에 다시 이야기하자. 꼭이야.”박유진은 심미연을 당장이라도 보러 가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눌렀고 말하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네! 알겠어요, 아빠! 그럼 오늘 밤에 꼭 통화해요. 약속했으니까 안 하면 안 돼요!”심태하의 목소리에 눈치채기 힘든 외로움이 살짝 섞여 있었다.
심미연은 멍해졌고 아까 자신이 박유진에게 연락을 시도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대신 날아온 건 단 한 줄의 차갑고 무미건조한 메시지. 기대했던 목소리는 끝내 들을 수 없었다.그런데 지금 아들 심태하가 전화를 걸자 박유진은 놀랍게도 전화를 받았다.“아빠, 지금 어디예요? 이틀 뒤면 제 생일이에요! 아빠가 놀이공원 같이 가자고 했던 거 잊으시면 안 돼요!”심태하의 말투엔 아이 특유의 해맑은 기쁨이 가득 담겨 있었고 단어 하나하나가 살아서 튀어나오는 듯했다.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박유진의 목소리는 한겨울 얼음도 녹일 만큼 다정했다.“아빠 지금 진성으로 가는 비행기 타러 가는 중이야. 곧 이륙이라 휴대폰 꺼야 해. 진성에 도착하면 바로 전화할게. 약속!”그 말에는 미안함과 애틋함이 가득 실려 있었다.사실 박유진은 심태하가 생일 이야기를 할 줄은 전혀 예상 못 했다. 어젯밤에 워낙 정신이 없어 그런 중요한 약속마저 깡그리 잊고 있었던 것이다.“아빠가 보내준 선물 잘 받았어요! 너무너무 마음에 들어요, 고마워요!”심태하는 아직 다 하지 못한 말이 많은 듯 아빠에게 털어놓고 싶은 게 가득한 눈치였다.박유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는데 햇살이 쏟아져 내려 유난히 눈부셨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가늘게 떴고 그 강렬한 빛이 속눈썹 아래에 그림자를 드리웠다.그 순간 그의 마음속엔 오로지 한 사람, 심미연의 얼굴만이 떠올랐다. 그녀와 떨어져 있는 모든 시간이 하나같이 그리움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 그리움이 너무 커서 박유진은 당장이라도 비행기에서 뛰어내려 달려가고 싶을 만큼 벅찼다.“아빠... 지금 너무 힘들죠? 그럼 회사 팔고 그냥 집으로 돌아와요. 제가 돈 많이 벌어서 아빠랑 엄마 다 먹여 살릴게요!”심태하의 순수한 눈빛에 진심 어린 다짐이 담겨 있었다. 그에겐 돈을 많이 벌어서 가족을 지킬 거라는 꿈이 있었다.심미연은 그런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통통한 볼살에 아직 아기 티가 남았지만 심태하의 마음속
심미연 역시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이지연이 잘못 알아본 것일 수도 있기 때문에 확신이 서지 않았다.“지연 씨, 다시 한번 제대로 확인해 봐요. 결과가 똑같은지 꼭 잘 봐요.”혹시라도 착오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그럼 제가 다시 확인해 볼게요! 뭐든 나오면 바로 보고드리겠습니다. 보스, 그럼 끊을게요!”이지연은 말 끝나기가 무섭게 전화를 뚝 끊었다.심미연은 휴대폰을 쥔 채 한참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까 이지연이 했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이건명과 문소영이 예전에 그런 사이였다고?’그런데 왜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걸까? 아무도 깊게 파고들지 않았기에 묻혀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결혼 전에 누굴 만나든 그건 사생활인데 그걸 굳이 숨긴 이유가 뭘까?심미연이 이 모든 게 어딘가 석연치 않다고 느끼고 있을 즈음, 밖에서 누군가 소리쳤다.“엄마! 나 배고파요! 우리 빨리 아침 먹으러 가요!”심미연은 생각을 접고 고개를 들어 활짝 웃는 아들을 바라봤다.“그래, 가자.”심태하가 달려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엄마, 며칠 뒤면 제 생일이잖아요. 생일 파티에 상미도 초대하고 싶은데, 그래도 돼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젯밤의 친자 확인 결과가 떠올랐다. 강상미는 그녀의 딸, 즉 심태하와 쌍둥이였다. 그래서 둘의 생일도 당연히 같았다.심태하의 생일 파티에 강상미가 온다면 그건 곧 둘이 같이 생일을 보내게 되는 셈이다.“엄마, 안 돼요?”심미연이 대답하지 않자 심태하가 다급히 물었다.그녀는 웃으며 아이를 안심시켰다.“그럼, 당연히 초대해야지. 너희 둘이 같이 생일 파티하면 되겠네.”“정말요? 엄마 최고! 사랑해요!”심미연은 아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태하야, 너 엄마가 어제 말한 거 잊은 거 아니지? 상미가 바로 태영이야. 너랑 똑같이 엄마 배에서 나왔고 너희 둘은 쌍둥이야. 그래서 생일도 똑같아.”강상미에 관한 일은 이미 방원호에게 조사를 맡긴 상태였다. 꼭 알아내야 한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심미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한 기색을 담아 물었다.“무슨 일이길래 그래요?”이지연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일부러 속도를 늦추며 차분하게 말했다.“온지유 씨가 도망쳤어요.”“언제요?”심미연의 눈빛이 반짝이며 날카로워졌다. 누가 이 일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스쳤다.“어젯밤에요.”이지연의 목소리는 한껏 가라앉아 있었고 자책감이 가득 배어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방심했어요.”심미연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미안해하지 마요. 이건 지연 씨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이지연은 입술을 꼭 깨문 채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제가 당장 찾아올까요?”심미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휴대폰을 천천히 만지며 생각했다.“잠깐만 생각 좀 해볼게요.”어젯밤 강지한이 교통사고를 당한 장면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혹시 온지유의 실종과 강지한이 관련 있는 걸까? 만약 강지한이 온지유를 구한 거라면 도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은 거지? 끝도 없이 밀려드는 의문들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참, 보스. 어젯밤에 스승님 못 보셨어요?”이지연이 물었다.심미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사실은 봤었다. 그녀는 진운혁이 차를 몰고 떠나는 걸 보고 따라붙었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그럴 리가요? 제가 분명히 확인했는데... 스승님께서 이진영 씨랑 같이 식사하고 계셨어요!”이지연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심미연은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렸다.문득 이전에 마주쳤던 진운혁의 모습들이 떠올랐고 그 순간 한 가지 의심이 그녀의 마음속을 훑고 지나갔다.‘그때 내가 본 스승님은... 정말 스승님이 맞았을까? 만약 누군가가 스승님을 사칭하고 있었다면 그 목적은 대체 뭘까?’그때 이지연의 흥분한 목소리가 심미연의 생각을 끊어냈다.“보스! 새로운 정보를 발견했어요!”“무슨 정보예요?”심미연은 본능적으로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귀를 기울이자 이지연의 들뜬 목소
백선영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진은숙의 팔을 살짝 끌어당기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이제 가요.”진은숙은 손바닥 위에 놓인 봉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망설이면서 입을 열었다.“이건... 어쩌죠?”백선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 난처한 상황을 심미연에게 넘기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봉투를 조심스럽게 심미연 앞에 내려놓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모님, 마음은 충분히 받았지만... 이 돈은 받을 수가 없어요.”심미연은 미소를 지으며 눈길을 봉투 위로 흘렸다.“오빠가 직접 드린 건데 마음 편히 받으세요. 저한테 돌려주실 필요는 없어요. 자, 얼른 가서 일 보세요. 저 벌써 배가 고파졌는걸요.”그러나 말하다가 알 수 없는 서운함이 스르르 마음 한쪽에 올라와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박유진은 예전에 밤하늘을 보며 수없이 약속했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그녀와 아이를 평생 지키겠다고. 그런데 지금 그 약속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금세 꺼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오빠, 나랑 약속한 거 잊은 거야?’“정말 감사합니다, 사모님! 사모님과 사장님 두 분 다 참 요즘 보기 드물게 좋은 분들이세요. 두 분, 좋은 일만 가득하시고 영원히 행복하시길 빌게요!”진은숙은 기쁜 얼굴로 연신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 백선영의 팔을 붙잡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오늘 정말 행운이 따랐다 싶었다. 이렇게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다니.심미연도 가볍게 한숨을 쉬고 나서 주방으로 들어가 컵에 따뜻한 물을 따라 목을 축였다. 어쩐지 목이 바싹 마른 게, 감정이 몰려서 그런 걸까.막 물을 다 마셨을 무렵 문밖에서 귀엽고 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 어디 있어요?”그 소리는 마치 봄날에 막 피어난 꽃처럼 듣는 사람 마음을 몽글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심미연은 표정이 풀렸고 얼른 얼굴을 내밀며 따뜻하게 웃었다.“우리 태하, 엄마 여기 있어!”심태하는 쏜살같이 달려와 그녀 품에 안겼다.“엄마, 아빠가 나 버렸어요!”심미연은 깜짝
백선영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모깃소리만큼이나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사장님께서 떠나시기 전에... 집에 안 계시는 동안 꼭 사모님과 도련님을 잘 챙기라고 당부하셨습니다.”진은숙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맞아요, 맞아요! 사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바로 캐리어 들고 곧장 나가셨거든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마음속으로 박유진의 말뜻을 곱씹어 보았지만 마치 안개 속을 걷는 듯 선명하게 와닿지 않았다.“그런데요, 사모님...”진은숙이 심미연을 흘끗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눈빛에는 망설임과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왜 그러세요?”심미연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지만 말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언제나 그래왔듯 도우미 아주머니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었고 태도가 마치 봄바람처럼 따뜻하고 너그러웠다.진은숙은 잠시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더니 마음을 굳힌 듯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어젯밤에 제가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러 나왔는데 계단 모퉁이에서 사장님을 마주쳤었어요. 사장님도 물 마시러 나오신 것 같았어요.”곁에 서 있던 백선영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저도요!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길래 문 열고 나왔더니 사장님이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계셨습니다.”심미연은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어젯밤에 오빠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진은숙은 마음을 가다듬고 이어서 말했다.“불빛이 비쳐서 얼핏 봤는데 사장님 눈가가 벌겋게 부어 있더라고요. 꼭 방금 울기라도 한 사람처럼요. 아마 제가 눈치챌까 봐 인사만 툭 하고는 곧장 자리를 피하셨어요. 전 그냥 물만 마시고 방으로 돌아갔는데 보니까 사장님은 그 자리에 그대로 멍하니 서 계셨어요. 제가 방에 들어간 뒤에도 안 들어오시더라고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덧붙였다.“오늘 아침에 사장님께서 나가신 뒤에 서재를 청소하러 들어갔는데 휴지통에 담배꽁초가 가득 쌓여 있었어요. 어젯밤 내내 잠도 못 주무시고 담배만 피우셨던 것 같아요..
휴대폰 화면이 켜지고 그 익숙하면서도 가슴을 죄는 번호가 뜨는 순간, 박유진의 심장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움켜잡힌 듯 조여들었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속에서 일렁이며 축축한 솜처럼 뭉쳐져 목덜미를 틀어막았고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말은 더더욱 나올 리 없었다.그 번호는 마치 꿈결 속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유령처럼 소리 없이 다가와 그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의 고통과 갈등을 다시 불러냈다.박유진은 손을 떨며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다가 한참을 망설인 끝에 결국 전화를 받지 않기로 했다.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공기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긴장감과 묘한 압박이 가득했다. 박유진은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고 손끝으로 천천히 휴대폰 키보드를 두드려 문장을 써 내려갔다.[진성에 가서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돌아가면 다시 이야기하자. 그래도 되지?]그 메시지엔 그의 복잡한 심경이 담겨 있었다. 현실을 피하고 싶은 마음도, 언젠가 다시 마주하길 바라는 희미한 기대도 모두 그 짧은 문장 안에 섞여 있었다.메시지 전송을 마친 박유진은 망설임 없이 전원을 꺼버렸고 휴대폰을 한쪽으로 툭 던졌다. 마치 그렇게 하면 마음속 어지러운 생각들까지 함께 던져버릴 수 있을 것처럼.주변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텅 빈 공간엔 그의 심장 뛰는 소리만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규칙적이고도 묵직한 박동이 마치 그 존재를 스스로 확인하려는 듯했다.박유진은 눈을 감았다. 피로한 몸은 본능적으로 가장 편한 자세를 찾아갔고 그 짧은 정적 속에서 조금이나마 위로를 찾고자 했다.비록 밤새 한숨도 못 잤고 눈은 충혈되어 있었지만 정신만큼은 유난히 또렷했다.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지탱해 주듯 그는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하지만 피하고 싶을수록 심미연의 모습은 그의 머릿속에서 더욱 선명해졌다. 그녀의 미소는 때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순수하고 따스했으며 때로는 눈빛 하나로도 사람 마음을 뒤흔드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또 부끄러워하던 그 순간순간들
박유진은 자신의 앞날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심미연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는 언제나 그녀의 편이 될 것이란 사실.만약 그녀가 아이를 데려오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그는 가진 것을 다 내어주어서라도 그녀를 돕고 그 아이를 보살필 것이다. 마치 자신의 친딸인 양 지극정성으로.박유진은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은 심미연을 사랑하고 그녀의 아이와 그녀가 지닌 모든 것을 함께 안아줄 준비가 되어 있음을.심미연의 눈가는 어느새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녀의 두 손은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살고 싶어서 지푸라기를 붙잡고 있는 것처럼 박유진의 옷깃을 꼭 움켜쥐었다. 수많은 감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그녀가 박유진에게 진 빚은 너무나도 많고 무거웠다. 그 빚을 다 갚기 위해서는 평생이라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몰랐다.“시간이 늦었으니까 이젠 좀 쉬어. 나도 방으로 돌아갈래.”박유진의 목소리엔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미세한 떨림이 묻어났다. 그는 본능적으로 심미연을 더욱 꼭 안았다. 마치 그녀를 자신 뼛속 깊이까지 끌어안고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어쩌면 이 다정함이 그들 사이 마지막 남은 따뜻함이 될지도 모른다...박유진의 마음속은 쓸쓸함으로 가득했다. 머릿속 이성은 매서운 바람처럼 그를 휘감으며 이제는 놓아줄 때라며 끊임없이 속삭였다.하지만 감정은 뿌리 깊은 덩굴처럼 박유진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얼마나 바랐던가. 단 한 순간이라도 더 심미연의 곁에 머물 수 있기를. 이 찰나의 시간이 남은 생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만 있다면...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박유진의 얼굴을 어루만졌고 그녀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박유진의 마음속 한기를 모두 녹이는 듯했다.심미연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부드럽게 말했다.“이생에 오빠를 만나 알아가고 수많은 인파를 뚫고 함께 걸을 수 있었던 건... 정말 큰 복이었어. 앞으로 어떤 길을 가더라도 우리 손 놓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