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유진은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고 손을 뻗어 심서연의 손을 잡고 말했다.“제대로 앉아.”그와 심서연 사이는...거래일 뿐이었다.사랑하는 척하는 모습을 남에게 보여주면 되는데 그러는 자신에게 구역질이 났다.“룸에는 모두 지인들이니 유진 씨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돼.”심서연은 박유진의 보기 흉한 안색을 보지 못한 척하면서 한쪽 팔을 다시 뻗어 그의 허리를 껴안고는 나긋나긋하고 매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심미연에게 어떻게 질 수 있겠는가.짙은 향수 냄새가 코에 파고들자 박유진의 부드러운 표정이 순식간에 차가워지더니 심서연를 밀치고 일어섰다.“나가서 담배 피우고 올게.”더 있으면 그는 화를 억누르지 못하고 온화한 가면을 직접 뜯어낼 것 같았다.“박유진! 가지 마!”심서연은 씩씩거리며 일어나 그의 팔을 잡아당겨 가지 못하게 했다.그가 가면 그녀의 체면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이미자의 안색이 좀 안 좋게 변했다.심서연은 횡포만 부리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모르니 앞으로 어떻게 박씨 가문의 안주인이 될 것인지 걱정스러웠다.박지훈은 침묵한 채 마음속으로 심서연이 박씨 가문에 시집오는 것을 찬성하지 않았지만 박유진이 원한다니 그도 막기가 쉽지 않았다.심동현이 눈살을 찌푸리며 얼른 조은하에게 눈짓하자 조은하가 급히 일어나서 심서연을 말렸다.“빨리 앉아. 여기서 창피하게 굴지 말고.”“엄마...”심서연이 불쾌한 표정을 지었지만 조은하는 표정이 어두워진 채 그녀를 의자에 눌러 앉혔다.“조용히 있어.”그녀는 박유진을 잃을까 봐 두려워하는 심서연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녀가 이런 장소에서 엉뚱한 행동을 하는 것을 방임할 수는 없었다.박씨 가문은 아직 그녀와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일단 사이가 틀어지면 박씨 가문은 여러 가지 구실을 찾아 결혼을 지연시킬 것이다.심서연은 엄마가 화를 내는 것을 보고 얌전히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조은하는 그녀를 힐끗 본 후 박유진에게 말했다.“유진아, 너 담배 피우러 가.”박유진은 강지한 앞에
눈을 마주친 박지훈과 이미자는 마음이 서로 달랐다.박지훈은 박유진이 심서연과 결혼하면 앞으로 강지한과 한 가족인데, 만약 바렐 그룹과 이노 하이브가 손을 잡을 수 있다면 바렐 그룹의 미래 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다.이미자가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건 박유진이 심서연과 결혼한 후에 심미연에 관한 생각을 완전히 끊으리라는 것이다. 아들은 그녀가 키웠으니 그가 어떤 사람인지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책임감이 있고 감정을 중시한다. 유일한 결점은 너무 감정이 한결같다는 것이다.그때 강지한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언제 밥을 먹어요? 심미연이 배가 고파요.”심미연은 식사 시간이 항상 규칙적이었는데 매일 저녁 6시 반에 식사를 시작했다.갓 결혼한 그 기간에 심미연은 매일 그가 집에 돌아와 함께 먹기를 기다리며 음식을 한 번또 한 번 데웠다. 후에 그녀는 그를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밥을 먹고 바로 치웠다. 때로는 그가 집에 돌아와 조금도 먹지 못했다.지금 벌써 8시가 다 되어 가니 그녀는 틀림없이 배가 고플 것이다.가뜩이나 몸이 안 좋은데 조금만 더 굶으면 몸이 견디지 못하면 어떻게 한단 말인가?심미연은 눈을 들어 그를 한 번 보고는 마음속으로 어이없게 웃었다.그녀의 부모는 그녀의 생사도 돌보지 않는데 그녀가 배고프든 말든 상관할 리 없지 않은가?강지한이 아무리 그녀가 배고플 거라고 해도 그들은 못 들은 척하며 얼버무릴 뿐이다.조은하는 심미연이 배가 고프다는 말을 듣고 조건반사처럼 욕설을 퍼부었다.“굶어 죽어도 싸!”어려서부터 심보가 사나운 사람인데 누가 그녀의 생사에 관심이 있겠는가.차가운 눈빛으로 조은하를 바라보는 강지한의 몸에서는 차가운 기운이 흘렀다.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심미연의 등에 흉측한 흉터가 있는 것을 알게 된 그는 심미연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고 심미연은 어머니가 화상을 입었다고 말했다.그는 사람을 찾아 두 사람의 DNA를 조사했는데 모녀가 확실했다.그는 어떻게 딸에게 그렇게 독한 어머니가
심미연은 자기도 모르게 강지한을 바라보며 예쁜 두 눈에 의외라는 눈빛이 가득했다.‘이 남자 오늘 약 잘못 먹은 거 아니야?’온지유 앞에서는 한 마디도 안 해주던 사람이 계속 도와주다니?심서연은 화가 나서 손을 들어 심미연을 때리려 했지만 결국 누군가 손목을 가로챘다. 잡힌 손목은 부러질 것처럼 아파진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아파, 놔! 심미연 너 이거 놔!”심미연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는데 무슨 손을 놓는단 말인가.그러나 강지한의 행동은 정말 알 수 없었다.오늘 왜 계속 도와주는지 정말 의아할 나름이었다.“개도 주인을 보면서 때린다는데 심미연은 지금 강씨 가문 사모님이야. 감히 내 앞에서 미연이를 때리려 하다니. 겁대가리 없구나. 당장 사과해!”강지한의 눈에는 냉기가 감돌아 현장을 얼어 붙일 것 같았고 목소리는 뼈를 찔렀다.심미연 마음속에서 막 생겨난 그 한 가닥의 호감은 지금 깨끗이 사라졌다.그녀는 그를 생명의 지푸라기로 여겼는데 그는 그녀를 개로만 여겼다.심서연이 그녀를 상대하는 것은 강지한의 꼬리를 밟아서이지 그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나...”심서연이 막 말을 하려고 하자 남자의 매서운 눈빛이 그녀를 향했다.“사과해! 빨리!”‘이 여자가 내 앞에서 감히 이렇게 날뛰고 건방지다니. 흥!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심서연은 이를 악물고 아무렇게나 말했다.“미안해.”어쩐지 강지한이 오늘 줄곧 그녀를 겨냥하여 심미연을 대신해서 화풀이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전에 인터넷에서는 이 두 사람의 불화설이 돌며 강지한은 밖에 애인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 그런데 왜 강지한은 심미연을 돕고 있는 거지? 일부러 연기하는 건가?’그런 생각에 심서연은 정신이 번쩍 들면서 자신이 진실을 알아냈다고 생각했다.심미연은 그녀처럼 남자에게 사랑받지 못한다는 생각에 그녀의 마음은 순식간에 위로가 되었다.심미연이 행복하지 않으면 그녀는 즐겁고 심미연이 행복하면 그녀는 화가 나서 죽고 싶었다.심미연은 입술을 깨물고 물었다.
‘다 심미연 이 천한 년 때문이야.’박지훈과 이미자는 줄곧 이 모든 것을 차갑게 지켜보며 심서연에 대한 마음속의 인상은 극도로 나빠졌다.이런 며느리를 집에 들이면 정말 가문이 불행해질 것 같았다....복도 끝에서 박유진은 담배를 한 모금 깊이 빨았다. 연기는 밤 빛 속에 감돌며 마치 그의 지금 심정처럼 복잡하고 어수선했다.담배꽁초를 비벼 끈 그는 확고한 발걸음으로 룸에 돌아와 사람들을 훑다가 마침내 심미연에 눈빛이 고정되었다. 그 순간 그의 마음속의 사랑은 조수처럼 용솟음쳤고 모든 세포는 그녀에 대한 갈망으로 들끓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그윽하고 열렬하여 마치 그녀를 그 속에 빨아들이려는 것 같았는데 숨길 수 없는 사랑은 밤하늘에서 가장 밝은 별처럼 눈 부신 빛을 반짝였다.심미연은 그 뜨거운 눈빛을 느끼자 고개를 들어 박유진의 시선과 공중에서 마주쳤다. 그녀는 그의 칠흑 같은 눈동자 속에 그녀가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가득 차 있는 것을 보았는데 마치 강한 매력이 있는 것 같아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하지만 이 훈훈한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하고 강지한의 목소리가 갑자기 이 평온을 깨뜨렸다.“예전에 장모님에게서 말씀 들었어요. 박씨 가문과 심씨 가문이 혼인을 맺는다고 하던데 날짜는 잡았어요?”“지금 날짜를 고르고 있는데 아직 결정하지 못했어.”심동현은 심서연을 잡아당기며 웃는 얼굴로 강지한에게 물었다.“아니면 사위가 날짜를 정할래?”어차피 양측 모두 합의를 봤으니 날짜는 누가 정해도 상관없었다.강지한은 핸드폰으로 달력을 뒤졌는데 심미연은 그의 모습이 마치 사기꾼처럼 느껴졌다.‘이렇게 진지하게 날짜를 고르다니.’"그럼 1월 1일 양력설 날로 해요. 아직 20일이 남았으니 준비할 시간이 좀 있어요.”강지한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살짝 감돌았다.두 사람이 약혼했으니 앞으로 박유진이 더는 심미연을 넘보지 않을 것이다.그는 사심이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심서연은 멍하니 반응하지 못하고 있다가 심동현의 손을 당기며 다급하게 말했다.“아빠, 1월
“살살 해, 나 아파.”심미연은 눈살을 찌푸리고 손을 뻗어 강지한을 밀쳤다.이 남자는 정말 여자를 아낄 줄 전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의 손목이 부러질 것 같았고 방금 얼굴도 그의 가슴에 부딪혀서 심하게 아팠다.“함부로 보지 마!”강지한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귓가에 낮은 소리로 말했는데 말투는 위협적이었다.심미연은 숨을 들이마시며 손을 뻗어 찻잔을 들고 차를 마시며 난처함을 숨기려 했다.박유진이 먼저 찻잔을 들고 그녀 앞에 건네주었다.“네가 차를 마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으로 기억해. 너는 차의 향을 좋아하지 않잖아. 좋아하지 않으면 억지로 자신을 강요하지 마.”말 속에 또 다른 말이 들어 있었다.찻잔이 앞에 있는데 심미연은 받을 수도 안 받을 수도 없었다.그녀는 어려서부터 차 마시는 것을 싫어했는데 차향이 싫어서 그랬다.이렇게 여러 해가 지났지만 그녀는 박유진이 아직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강지한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그가 여기에 있는데 박유진이 뜻밖에도 심미연에에 아첨하며 또 오해를 사는 말을 했다.‘내 존재를 무시하는 거야?’“유진 씨, 나 차 좋아해. 내가 마실게.”심서연은 기분이 나빠져 차를 달라고 했다.‘심미연 이 더러운 년, 이미 결혼했는데도 내 남자를 유혹하려 하다니. 참 뻔뻔해!’박유진은 심미연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안 마실 거야?”심미연은 진퇴양난에 빠져 받을 수도 받지 않을 수도 없었다.강지한은 손을 뻗어 찻잔을 받아 잔에 든 차를 한입에 다 마셨다. 그러고는 찻잔을 내려놓고 심미연에게 술을 한 잔 따라주었다.“네가 주량이 좋다는 걸 알아. 오늘 이 경사스러운 날에는 당연히 한 잔을 마셔야지.”박유진은 강지한을 바라보며 말했다.“이렇게 많은 술을 부인에게 마시게 하면 괴로워하지 않겠어요? 강 대표님은 정말 여자를 아낄 줄 모르는군요."심미연은 주인공이 될 줄은 생각지도 못하고 눈썹을 찌푸리고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입을 열기도 전에 강지한이 먼저 가로챘다.“미연이는
그는 느릿느릿 말했지만 말투가 무거워 고마움이 느껴진 게 아니라 오히려 귀띔하는 것 같았다.술잔을 든 손을 심하게 떨며 심동현은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고 말도 더듬었다.“부모로서 미연이를 잘 대해주는 건 당연한 거지. 우리 사위 너무 겸손해.”조은하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미연아, 앞으로 집에 자주 와. 우린 모두 네가 보고 싶었어.”강지한의 뜻을 알아차린 조은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강지한이 바람이 났다며 왜 아직도 심미연에게 신경 쓰는 거지? 앞으로 심미연에게 잘해줘야겠어. 그러다가 강지한이 회사에 투자하지 않으면 어떡해? 아니면 내일 심미연을 데리고 옷이나 두 벌 사주며 잘 보여야겠어.’심서연은 화가 나서 두 손을 꼭 잡으며 심미연을 죽이고 싶은 마음조차 생겼다.강지한은 술잔에 든 술을 다 마신 후 고개를 돌려 심미연에게 말했다.“미연아, 술 따라야지!”조용하고 얌전한 심미연을 보며 강지한은 마음이 편해졌다.심미연은 그를 힐끗 보며 술을 따랐을 뿐 부모님이 하는 얘기를 한 글자도 듣지 않았다. 이미 남남이기 때문에 그들과 친한 척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두 번째 잔은 강지한이 박지훈과 이미자에게 권했다.다 마신 후 그는 또 심미연더러 술을 따르게 했다.심미연은 맞은편에 앉은 박유진을 슬쩍 보았는데 안색이 안 좋아 보였다. 아마 건강이 회복되지 않아 술을 더 마시면 힘들 것이다.그녀는 머뭇거리다가 강지한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유진 오빠는 술을 마실 수 없으니 지한 씨 함께 마시지 마. 일이 생긴다면 지한 씨책임도 있어.”점심에 알코올 중독이 될 때까지 마셨으니 더 마시면 죽을 수도 있는데 그럴 필요가 없지 않은가!.강지한은 얼굴이 어두워졌다.“넌 강씨 가문 사모님이야.”그는 강씨 가문 사모님이라고 말할 때 언성을 높였다.‘이 여자가 남의 편을 들다니! 박유진을 도와줘?’그는 마음이 불쾌해졌다.“내가 강씨 가문 사모님이기 때문에 당신이 잘못을 저지르게 놔둘 수 없어.”맞은편에
심미연의 말을 듣고 울화가 치밀어올랐지만 현장에 많은 사람이 있어 그녀는 감히 화를 내지 못하고 그저 차갑게 말했다.“남편을 돌봐주는 건 아내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야. 무슨 불평이 있어?”심미연은 화를 참으며 그녀의 모습을 보았지만 그 느낌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씁쓸했다.방금 강지한이 말로 그들을 일깨워줬으나 그녀는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어떤 때 심미연은 심지어 조은하가 친엄마가 맞는지 의심이 가기도 했다. 10개월의 임신을 하고 죽을 고비를 넘겨 겨우 낳은 아이는 엄마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다.엄마는 심서연을 사랑했고 그녀의 부탁이라면 다 들어주셨지만 반대로 심미연을 대할 때는 잔인하고 모질었다.심미연은 줄곧 자신이 언제 엄마의 미움을 샀는지도 이해하지 못했다.강지한은 의자에 나른하게 기대어 그윽한 눈동자로 심미연을 쳐다봤다. 방금 도와줬는데도 이 양심 없는 여자가 다른 사람의 편을 들어주다니.“심미연, 술을 따르라고 했으면 얼른 해야지.”심미연이 움직이지 않자 조은하는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치며 심미연의 머리채를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심미연이 어렸을 때 조은하는 심미연의 머리채를 잡고 땅바닥에 누른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심지어 한 번은 심미연의 이마를 찧은 적도 있었다.그녀의 손이 다가오기도 전에 누군가에게 잡혔다.“그만 해요.”심미연이 그녀를 보는 눈빛은 칼 두 자루를 품은 것처럼 서늘하고 무서웠다. 심미연은 강지한과 함께 오래 있어서인지 점점 닮아갔는데 일하는 스타일은 물론 눈빛까지 비슷했다.조은하는 그녀의 눈빛에 놀라서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다.‘망할 계집애가 어찌 이리도 사나울까!’“심미연, 이 불효녀야. 엄마를 때리다니!”심서연이 역성을 들었으나 옆에 있던 박유진은 미간을 찌푸리고 그녀를 잡아당겼다.손이 잡히자 심서연은 고개를 돌려 박유진을 노려보았다.“뭐 하는 거야!”심미연이 엄마와 손찌검을 하려는 모양이니 당연히 말려야 했으나 박유진이 손을 놓지 않으니 말릴 수 없었다.‘박유진이 일부러
그리고 심동현은 한 사람과 바람난 게 아니다.만약 조은하가 때리려 하지 않았다면 이 부부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절대 이 일을 밝히지 않았을 것이다.“심미연, 정말이야?”조은하는 심미연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한 눈빛으로 쳐다봤다.‘나쁜 계집애! 아빠에게 내연녀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몰래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필이면 이런 날에 말하며 난처하게 만들다니! 나쁜 계집애, 속셈이 정말 보통이 아니네.’“말해도 믿지 않는데 저더러 어떡하라고요. 모른 척하고 싶은 거면 어쩔 수 없어요.”심미연은 웃으며 술병을 들고 술을 석 잔 따랐다.강지한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이건 뭐 하는 거지?’심미연은 술잔을 들어 조은하와 심동현에게 드린 후 자신도 술잔을 들었다.“이 술은 저를 낳고 키워줘서 고맙다는 의미예요. 이제부터 우리는 관계를 끊고 당신들은 더는 지한 씨를 찾아 돈을 달라고 하지 마세요.”지난 3년 동안 그들은 강지한으로부터 수십억 원을 가져갔지만 점점 요구가 높아졌고 금액도 커졌다.그들은 그녀에게 기대어 돈을 흥청망청 쓰면서도 그녀에게 욕설을 퍼부었다.어렸을 때 그녀는 반항할 힘이 없었지만 이젠 그들을 그대로 날뛰게 하고 싶지 않았다.그들과 관계를 끊으면 더는 강지한을 찾아가 돈을 달라고 할 면목이 없고 강지한이 그녀의 약점을 잡아 괴롭힐 수 없다.잔에 담긴 술에는 끝없는 감정이 담겨 있는 것처럼 손을 가볍게 떨던 심미연은 고개를 젖혀 단숨에 다 마신 빈 잔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그녀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알코올에 물들어서가 아니라 오랫동안 쌓인 감정이 이 순간 카타르시스의 출구를 찾은 것이다. 눈물이 핑 돌았지만 마치 그 눈물에는 지난날에 대한 작별을 담은 듯 고집스럽게 흘리지 않았다.주변 공기가 굳어가는 듯했고 심미연의 동작 하나하나가 무겁고 단호해 보였다. 부모님의 경악하고 복잡한 얼굴을 훑어본 그녀의 시선은 결국 텅 빈 술잔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 안에는 그녀가 그토록 바라던 집이라는 존재가 있었는데 이젠 차가운 술 냄새만
심미연은 흩날리던 생각을 차분히 거두고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궁금한 듯 물었다.“우리 태하 진짜 똑똑하네. 어떻게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는 거야?”아직 겨우 세 살이지만 심태하의 마음은 놀랄 만큼 세심하고 예민했다. 또렷한 눈망울은 마치 세상의 감정 흐름을 꿰뚫어 보는 듯했고 그렇게 꼼꼼히 살피는 모습에 심미연은 종종 놀라곤 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박유진이 심태하를 정성스럽게 길러온 시간이 아이를 이토록 똑똑하고 배려 깊게 자라게 만든 것이다.“아까 아빠랑 통화할 때 엄마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어요. 뭔가 걱정하는 게 있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저한테 말 걸었을 때도 평소처럼 웃고 있지 않았어요. 그래서 엄마가 혹시 슬픈 건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어요.”심태하의 말은 또렷하면서도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 단어 하나하나에 엄마를 향한 깊은 애정과 이해가 담겨 있었다.심태하가 보기에 박유진이 집에 있을 땐 심미연은 늘 기분이 좋아 보였고 환하게 웃는 얼굴이 참 예뻤다.“엄마가 안 웃었어?”심미연은 웃음을 터뜨렸다.‘녀석, 정말 못 말려.’겨우 세 살에 이 정도인데 나중에 더 크면 얼마나 영리해질지.“네, 안 웃었어요.”심태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엄마, 아빠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심태하의 목소리는 여전히 앳됐지만 말투는 왠지 어른스러웠다. 꼭 사람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있기라도 한 듯했다.심미연의 마음은 그 말 한마디에 확 풀렸다. 그녀는 아들의 코끝을 살짝 잡아당기며 말했다.“자, 얼른 아침 먹자.”그녀의 말투엔 아낌없는 사랑이 담겨 있었다.이 아이는 정말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다.“아빠가 보고 싶으면 아빠한테 전화하면 되죠!”심태하가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윙크했다.‘나도 아빠가 보고 싶은데 엄마가 안 보고 싶을 리가 없지. 맞아, 분명 그럴 거야!’심미연은 그 말에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네 말대로 할게.”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물론 박유진이 보고 싶지만 그에게 전화하진
하지만 그 깊은 애정과 놓기 싫은 마음은 오히려 박유진을 현실이라는 갈림길 앞에서 망설이게 만들었다.그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지금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심미연만 괴로운 상황에 빠질 것이라는 걸. 그 맑고 투명한 눈동자가 자신의 망설임으로 인해 흐려지는 건, 그녀의 세상이 자신 때문에 흔들리는 건 차마 보고 있을 수 없었다.그렇다고 그녀를 놓아버리면 영원히 잃게 될 텐데... 그 아픔을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지 박유진 본인조차 알 수 없었다.“아빠, 왜 말이 없으세요? 허락한 거죠?”심태하의 목소리는 천진난만하게 들떴다. 마치 머릿속에 따뜻한 한 가족의 그림이 그려지기라도 한 듯.‘아빠가 돌아오면 엄마랑 나랑 셋이 모여 저녁 먹고 같이 웃고 얘기하고...’심태하의 마음속에서 그려낸 가장 순수한 행복의 모습이었다.그러나 그 순수한 소망 앞에서 박유진의 마음은 송곳에 찔린 것처럼 아팠다.그는 알고 있다. 이번 결정을 가볍게 내려서는 안 된다. 누구도 상처받지 않게 하려면 정말 신중해야 했다.하지만 사랑과 책임 사이에서 그가 걸어갈 수 있는 길은 대체 어디란 말인가? 그는 지금 사랑을 저버리지 않으면서 심미연과 아이를 지킬 방법을 찾고 있다.하지만 그런 길이 과연 있을까? 이 선택은 너무나도 어려웠다.“아빠, 나 이렇게 열심히 얘기하고 있는데 왜 아무 말도 안 해요?”심태하는 고개를 갸웃하며 미간을 찌푸렸다.평소 같았으면 박유진은 재밌는 얘기도 해주고 자기 말에 웃어주었을 텐데, 오늘따라 너무 이상했다.‘혹시... 내가 말실수했나?’그때 박유진의 다급하지만 부드러운 목소리가 심태하의 귀에 들려왔다.“태하야, 곧 비행기가 이륙해서 아빠가 휴대폰을 꺼야 돼. 오늘 밤에 다시 이야기하자. 꼭이야.”박유진은 심미연을 당장이라도 보러 가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눌렀고 말하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네! 알겠어요, 아빠! 그럼 오늘 밤에 꼭 통화해요. 약속했으니까 안 하면 안 돼요!”심태하의 목소리에 눈치채기 힘든 외로움이 살짝 섞여 있었다.
심미연은 멍해졌고 아까 자신이 박유진에게 연락을 시도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대신 날아온 건 단 한 줄의 차갑고 무미건조한 메시지. 기대했던 목소리는 끝내 들을 수 없었다.그런데 지금 아들 심태하가 전화를 걸자 박유진은 놀랍게도 전화를 받았다.“아빠, 지금 어디예요? 이틀 뒤면 제 생일이에요! 아빠가 놀이공원 같이 가자고 했던 거 잊으시면 안 돼요!”심태하의 말투엔 아이 특유의 해맑은 기쁨이 가득 담겨 있었고 단어 하나하나가 살아서 튀어나오는 듯했다.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박유진의 목소리는 한겨울 얼음도 녹일 만큼 다정했다.“아빠 지금 진성으로 가는 비행기 타러 가는 중이야. 곧 이륙이라 휴대폰 꺼야 해. 진성에 도착하면 바로 전화할게. 약속!”그 말에는 미안함과 애틋함이 가득 실려 있었다.사실 박유진은 심태하가 생일 이야기를 할 줄은 전혀 예상 못 했다. 어젯밤에 워낙 정신이 없어 그런 중요한 약속마저 깡그리 잊고 있었던 것이다.“아빠가 보내준 선물 잘 받았어요! 너무너무 마음에 들어요, 고마워요!”심태하는 아직 다 하지 못한 말이 많은 듯 아빠에게 털어놓고 싶은 게 가득한 눈치였다.박유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는데 햇살이 쏟아져 내려 유난히 눈부셨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가늘게 떴고 그 강렬한 빛이 속눈썹 아래에 그림자를 드리웠다.그 순간 그의 마음속엔 오로지 한 사람, 심미연의 얼굴만이 떠올랐다. 그녀와 떨어져 있는 모든 시간이 하나같이 그리움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 그리움이 너무 커서 박유진은 당장이라도 비행기에서 뛰어내려 달려가고 싶을 만큼 벅찼다.“아빠... 지금 너무 힘들죠? 그럼 회사 팔고 그냥 집으로 돌아와요. 제가 돈 많이 벌어서 아빠랑 엄마 다 먹여 살릴게요!”심태하의 순수한 눈빛에 진심 어린 다짐이 담겨 있었다. 그에겐 돈을 많이 벌어서 가족을 지킬 거라는 꿈이 있었다.심미연은 그런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통통한 볼살에 아직 아기 티가 남았지만 심태하의 마음속
심미연 역시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이지연이 잘못 알아본 것일 수도 있기 때문에 확신이 서지 않았다.“지연 씨, 다시 한번 제대로 확인해 봐요. 결과가 똑같은지 꼭 잘 봐요.”혹시라도 착오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그럼 제가 다시 확인해 볼게요! 뭐든 나오면 바로 보고드리겠습니다. 보스, 그럼 끊을게요!”이지연은 말 끝나기가 무섭게 전화를 뚝 끊었다.심미연은 휴대폰을 쥔 채 한참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까 이지연이 했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이건명과 문소영이 예전에 그런 사이였다고?’그런데 왜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걸까? 아무도 깊게 파고들지 않았기에 묻혀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결혼 전에 누굴 만나든 그건 사생활인데 그걸 굳이 숨긴 이유가 뭘까?심미연이 이 모든 게 어딘가 석연치 않다고 느끼고 있을 즈음, 밖에서 누군가 소리쳤다.“엄마! 나 배고파요! 우리 빨리 아침 먹으러 가요!”심미연은 생각을 접고 고개를 들어 활짝 웃는 아들을 바라봤다.“그래, 가자.”심태하가 달려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엄마, 며칠 뒤면 제 생일이잖아요. 생일 파티에 상미도 초대하고 싶은데, 그래도 돼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젯밤의 친자 확인 결과가 떠올랐다. 강상미는 그녀의 딸, 즉 심태하와 쌍둥이였다. 그래서 둘의 생일도 당연히 같았다.심태하의 생일 파티에 강상미가 온다면 그건 곧 둘이 같이 생일을 보내게 되는 셈이다.“엄마, 안 돼요?”심미연이 대답하지 않자 심태하가 다급히 물었다.그녀는 웃으며 아이를 안심시켰다.“그럼, 당연히 초대해야지. 너희 둘이 같이 생일 파티하면 되겠네.”“정말요? 엄마 최고! 사랑해요!”심미연은 아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태하야, 너 엄마가 어제 말한 거 잊은 거 아니지? 상미가 바로 태영이야. 너랑 똑같이 엄마 배에서 나왔고 너희 둘은 쌍둥이야. 그래서 생일도 똑같아.”강상미에 관한 일은 이미 방원호에게 조사를 맡긴 상태였다. 꼭 알아내야 한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심미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한 기색을 담아 물었다.“무슨 일이길래 그래요?”이지연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일부러 속도를 늦추며 차분하게 말했다.“온지유 씨가 도망쳤어요.”“언제요?”심미연의 눈빛이 반짝이며 날카로워졌다. 누가 이 일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스쳤다.“어젯밤에요.”이지연의 목소리는 한껏 가라앉아 있었고 자책감이 가득 배어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방심했어요.”심미연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미안해하지 마요. 이건 지연 씨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이지연은 입술을 꼭 깨문 채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제가 당장 찾아올까요?”심미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휴대폰을 천천히 만지며 생각했다.“잠깐만 생각 좀 해볼게요.”어젯밤 강지한이 교통사고를 당한 장면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혹시 온지유의 실종과 강지한이 관련 있는 걸까? 만약 강지한이 온지유를 구한 거라면 도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은 거지? 끝도 없이 밀려드는 의문들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참, 보스. 어젯밤에 스승님 못 보셨어요?”이지연이 물었다.심미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사실은 봤었다. 그녀는 진운혁이 차를 몰고 떠나는 걸 보고 따라붙었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그럴 리가요? 제가 분명히 확인했는데... 스승님께서 이진영 씨랑 같이 식사하고 계셨어요!”이지연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심미연은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렸다.문득 이전에 마주쳤던 진운혁의 모습들이 떠올랐고 그 순간 한 가지 의심이 그녀의 마음속을 훑고 지나갔다.‘그때 내가 본 스승님은... 정말 스승님이 맞았을까? 만약 누군가가 스승님을 사칭하고 있었다면 그 목적은 대체 뭘까?’그때 이지연의 흥분한 목소리가 심미연의 생각을 끊어냈다.“보스! 새로운 정보를 발견했어요!”“무슨 정보예요?”심미연은 본능적으로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귀를 기울이자 이지연의 들뜬 목소
백선영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진은숙의 팔을 살짝 끌어당기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이제 가요.”진은숙은 손바닥 위에 놓인 봉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망설이면서 입을 열었다.“이건... 어쩌죠?”백선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 난처한 상황을 심미연에게 넘기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봉투를 조심스럽게 심미연 앞에 내려놓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모님, 마음은 충분히 받았지만... 이 돈은 받을 수가 없어요.”심미연은 미소를 지으며 눈길을 봉투 위로 흘렸다.“오빠가 직접 드린 건데 마음 편히 받으세요. 저한테 돌려주실 필요는 없어요. 자, 얼른 가서 일 보세요. 저 벌써 배가 고파졌는걸요.”그러나 말하다가 알 수 없는 서운함이 스르르 마음 한쪽에 올라와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박유진은 예전에 밤하늘을 보며 수없이 약속했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그녀와 아이를 평생 지키겠다고. 그런데 지금 그 약속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금세 꺼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오빠, 나랑 약속한 거 잊은 거야?’“정말 감사합니다, 사모님! 사모님과 사장님 두 분 다 참 요즘 보기 드물게 좋은 분들이세요. 두 분, 좋은 일만 가득하시고 영원히 행복하시길 빌게요!”진은숙은 기쁜 얼굴로 연신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 백선영의 팔을 붙잡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오늘 정말 행운이 따랐다 싶었다. 이렇게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다니.심미연도 가볍게 한숨을 쉬고 나서 주방으로 들어가 컵에 따뜻한 물을 따라 목을 축였다. 어쩐지 목이 바싹 마른 게, 감정이 몰려서 그런 걸까.막 물을 다 마셨을 무렵 문밖에서 귀엽고 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 어디 있어요?”그 소리는 마치 봄날에 막 피어난 꽃처럼 듣는 사람 마음을 몽글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심미연은 표정이 풀렸고 얼른 얼굴을 내밀며 따뜻하게 웃었다.“우리 태하, 엄마 여기 있어!”심태하는 쏜살같이 달려와 그녀 품에 안겼다.“엄마, 아빠가 나 버렸어요!”심미연은 깜짝
백선영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모깃소리만큼이나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사장님께서 떠나시기 전에... 집에 안 계시는 동안 꼭 사모님과 도련님을 잘 챙기라고 당부하셨습니다.”진은숙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맞아요, 맞아요! 사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바로 캐리어 들고 곧장 나가셨거든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마음속으로 박유진의 말뜻을 곱씹어 보았지만 마치 안개 속을 걷는 듯 선명하게 와닿지 않았다.“그런데요, 사모님...”진은숙이 심미연을 흘끗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눈빛에는 망설임과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왜 그러세요?”심미연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지만 말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언제나 그래왔듯 도우미 아주머니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었고 태도가 마치 봄바람처럼 따뜻하고 너그러웠다.진은숙은 잠시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더니 마음을 굳힌 듯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어젯밤에 제가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러 나왔는데 계단 모퉁이에서 사장님을 마주쳤었어요. 사장님도 물 마시러 나오신 것 같았어요.”곁에 서 있던 백선영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저도요!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길래 문 열고 나왔더니 사장님이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계셨습니다.”심미연은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어젯밤에 오빠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진은숙은 마음을 가다듬고 이어서 말했다.“불빛이 비쳐서 얼핏 봤는데 사장님 눈가가 벌겋게 부어 있더라고요. 꼭 방금 울기라도 한 사람처럼요. 아마 제가 눈치챌까 봐 인사만 툭 하고는 곧장 자리를 피하셨어요. 전 그냥 물만 마시고 방으로 돌아갔는데 보니까 사장님은 그 자리에 그대로 멍하니 서 계셨어요. 제가 방에 들어간 뒤에도 안 들어오시더라고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덧붙였다.“오늘 아침에 사장님께서 나가신 뒤에 서재를 청소하러 들어갔는데 휴지통에 담배꽁초가 가득 쌓여 있었어요. 어젯밤 내내 잠도 못 주무시고 담배만 피우셨던 것 같아요..
휴대폰 화면이 켜지고 그 익숙하면서도 가슴을 죄는 번호가 뜨는 순간, 박유진의 심장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움켜잡힌 듯 조여들었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속에서 일렁이며 축축한 솜처럼 뭉쳐져 목덜미를 틀어막았고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말은 더더욱 나올 리 없었다.그 번호는 마치 꿈결 속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유령처럼 소리 없이 다가와 그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의 고통과 갈등을 다시 불러냈다.박유진은 손을 떨며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다가 한참을 망설인 끝에 결국 전화를 받지 않기로 했다.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공기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긴장감과 묘한 압박이 가득했다. 박유진은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고 손끝으로 천천히 휴대폰 키보드를 두드려 문장을 써 내려갔다.[진성에 가서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돌아가면 다시 이야기하자. 그래도 되지?]그 메시지엔 그의 복잡한 심경이 담겨 있었다. 현실을 피하고 싶은 마음도, 언젠가 다시 마주하길 바라는 희미한 기대도 모두 그 짧은 문장 안에 섞여 있었다.메시지 전송을 마친 박유진은 망설임 없이 전원을 꺼버렸고 휴대폰을 한쪽으로 툭 던졌다. 마치 그렇게 하면 마음속 어지러운 생각들까지 함께 던져버릴 수 있을 것처럼.주변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텅 빈 공간엔 그의 심장 뛰는 소리만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규칙적이고도 묵직한 박동이 마치 그 존재를 스스로 확인하려는 듯했다.박유진은 눈을 감았다. 피로한 몸은 본능적으로 가장 편한 자세를 찾아갔고 그 짧은 정적 속에서 조금이나마 위로를 찾고자 했다.비록 밤새 한숨도 못 잤고 눈은 충혈되어 있었지만 정신만큼은 유난히 또렷했다.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지탱해 주듯 그는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하지만 피하고 싶을수록 심미연의 모습은 그의 머릿속에서 더욱 선명해졌다. 그녀의 미소는 때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순수하고 따스했으며 때로는 눈빛 하나로도 사람 마음을 뒤흔드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또 부끄러워하던 그 순간순간들
박유진은 자신의 앞날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심미연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는 언제나 그녀의 편이 될 것이란 사실.만약 그녀가 아이를 데려오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그는 가진 것을 다 내어주어서라도 그녀를 돕고 그 아이를 보살필 것이다. 마치 자신의 친딸인 양 지극정성으로.박유진은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은 심미연을 사랑하고 그녀의 아이와 그녀가 지닌 모든 것을 함께 안아줄 준비가 되어 있음을.심미연의 눈가는 어느새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녀의 두 손은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살고 싶어서 지푸라기를 붙잡고 있는 것처럼 박유진의 옷깃을 꼭 움켜쥐었다. 수많은 감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그녀가 박유진에게 진 빚은 너무나도 많고 무거웠다. 그 빚을 다 갚기 위해서는 평생이라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몰랐다.“시간이 늦었으니까 이젠 좀 쉬어. 나도 방으로 돌아갈래.”박유진의 목소리엔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미세한 떨림이 묻어났다. 그는 본능적으로 심미연을 더욱 꼭 안았다. 마치 그녀를 자신 뼛속 깊이까지 끌어안고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어쩌면 이 다정함이 그들 사이 마지막 남은 따뜻함이 될지도 모른다...박유진의 마음속은 쓸쓸함으로 가득했다. 머릿속 이성은 매서운 바람처럼 그를 휘감으며 이제는 놓아줄 때라며 끊임없이 속삭였다.하지만 감정은 뿌리 깊은 덩굴처럼 박유진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얼마나 바랐던가. 단 한 순간이라도 더 심미연의 곁에 머물 수 있기를. 이 찰나의 시간이 남은 생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만 있다면...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박유진의 얼굴을 어루만졌고 그녀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박유진의 마음속 한기를 모두 녹이는 듯했다.심미연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부드럽게 말했다.“이생에 오빠를 만나 알아가고 수많은 인파를 뚫고 함께 걸을 수 있었던 건... 정말 큰 복이었어. 앞으로 어떤 길을 가더라도 우리 손 놓지 말고